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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리문답 18문-인간의 전적 부패 아담의 원죄 이후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 죄성이 우리 안에 있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부패하게 되었다. 이후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고 죄만 행하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말과 행동과 생각이 모두 악한 죄 뿐이다. 이 죄성을 없애고 다시금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우리는 다시 선을 행할 수 있고 주님께 나아갈 수 있다. |
[화면4-“못난 엄마야… 아가야, 미안해” 미혼모 엄마와 여러 병 앓는 시열이 이야기]
이 아이는 미혼모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이 시열이입니다.
미혼모인 엄마는 폭력 아빠로 인해 외할머니 집에 와서도 외삼촌의 구타 때문에 집을 나왔고, 가난 때문에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다. 결국 병을 앓게 되고, 돈 때문에 일본으로 시집을 가려다가 사기를 당해서 호적상 이혼녀가 되고, 동거하던 남자친구도 폭력 때문에 헤어지고보니 임신 사실을 알게 되어서, 결국 미혼모가 되었습니다.
너무 슬픈 현실 속에 살아가는 엄마는... 그래도 아들을 보며 살아갈 힘과 기쁨을 얻습니다.
왜 이렇게 가슴아픈 현실을 살아가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신문기사. 국민일보 2011.09- 딸인 줄 알았다. 크고 동그란 눈, 하얀 피부. 시열이를 보는 사람마다 “딸이냐” 묻는다고 했다. 예쁜 얼굴이다. 시열이는 생후 6개월 된 남자 아기다. 엄마(26)랑 단둘이 산다. 시열이는 선천성 얼굴기형인 구순구개열에 심장기형, 횡경막 탈장이란 병을 한꺼번에 안고 태어났다. 입술과 잇몸 입천장이 갈라지는 구순구개열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젖병을 힘차게 빨지 못한다. 심장기형 탓에 호흡이 가쁘고 잘 먹지 못한다. 횡경막에 난 구멍으로 장기가 밀려 올라가 숨쉬기조차 힘들어한다. 시열이의 체구는 100일 된 아기보다 작다.
지난달 30일 시열이가 엄마와 머물고 있는 서울 연희동의 미혼모 임시 거처 ‘희망을 찾는 터(이하 희터)’를 찾아갔다. 다세대주택의 반지하 원룸. 방안엔 TV와 서랍장, 빨랫대, 작은 상이 놓여 있었다. 시열이는 햇볕이 드는 창가 가까이에 누워 있었다. 엄마는 한참동안 아이를 바라봤다. 행여 방긋 웃어줄까, 눈을 맞춰줄까, 어떤 옹알이를 할까.
태어난 날 3월 5일 오전 6시10분 전남 목포 K산부인과 병원. 아기는 힘없이 한 번 울었다. 간호사는 아기 얼굴을 엄마에게 몇 초간 보여줬다. “남자아이입니다.” 아기를 엄마 품에 안겨주는 사람도,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도 없었다. 몸무게 2.42㎏, 키 48㎝, 흉위 29㎝, 두위 31㎝. 의료진은 신생아의 정보를 차트에 적어나갔다. 엄마: 장미영(가명) 아빠: .
K병원에는 전날 처음 찾아갔다. 의사는 자궁 문이 이미 3㎝가 열렸다며 입원하거나, 진통이 오면 병원에 다시 올 것을 권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부터 시작된 진통. 하지만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극심한 진통은 아니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다 멈추고, 또 힘이 들어가다 멈추는 식으로 13시간을 버텼다. 자궁문은 열리지 않아 끝내 기구를 써 양수를 터뜨리긴 했지만, 비명 한 번 안 지르고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아이가 워낙 작은 데다 어린 시절 유도선수로 활동해 골반이 남들보다 넓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순산의 기쁨도 잠시.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숨이 막혔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간 먹었던 약이며 술이며, 내뱉었던 말이며. 미안한 일 투성이였다. 그날 밤. 그녀는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 ‘엄마가 많이 미안해 우리 아가. 지금 엄마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네. 열심히 기도할게. 못난 엄마가.’
그녀는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시열. ‘세상의 중심’이란 뜻의 순 우리말이다. 시열이는 태어난 직후 따뜻한 엄마 품에 안기는 대신 광주광역시의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부담스러운 존재
이틀 뒤 그녀는 산부인과 병원에서 퇴원해 나주의 미혼모 시설로 돌아갔다. 시열이는 수술이 급했다. 그러나 그녀는 돈이 없었다. 결국 시열이는 3개월 입원 기간 아무 병도 고치지 못한 채 퇴원했다. 시열이를 미혼모 시설로 데려온 뒤엔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출산을 앞둔 미혼모들이 머무는 시설로, 그들과 한 방을 쓸 수 없었던 것. 미영씨도 원치 않았다. 시설은 고민 끝에 연계 기관인 영아원의 안 쓰는 방을 내줬다. 창고로 활용됐던 방이었다.
그녀는 모자가 함께 머물 수 있는 미혼모 시설을 알아봤다. 제주에서 서울까지 시설이란 시설엔 모두 전화를 걸었다.
“오십 군데도 넘게 전화를 한 것 같아요. 두 군데에 자리가 있었는데, 시열이가 아프다고 하니까 ‘어렵겠다’고 하더라고요.” 모두가 부담스러워했고, 그녀는 절망했다.
아버지, 그리고 남자
아버지는 외동딸인 그녀를 걸핏하면 때렸다. 어머니는 그녀를 외할머니 집에 맡겨 두고 어디론가 떠났다. 외할머니 집에선 외삼촌이 때렸고, 아버지는 학교로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맞서 싸우겠다 며 초등학교 때 유도부에 가입했고, 중학교 때는 유도선수로 전국체전에 나가 입상할 정도로 열심히 운동했다. 하지만 계속 맞고 살았다. 그래서 가출했다.
고3때 집을 나간 그녀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낮에는 편의점, 밤에는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새벽엔 신문을 돌렸다. 잠도 안 자고, 밥도 거르면서 악착같이 살았는데, 간신히 방 한 칸 얻을 무렵 병이 찾아왔다. 갑상선기능항진증. 혹처럼 목이 불룩하게 나왔고, 눈도 튀어 나왔다. 목소리는 갈라졌고, 피로가 몰려왔다.
보증금까지 병원비로 날리게 될 무렵, 옆집 아줌마가 일본 남자한테 시집간 딸의 얘기를 자랑처럼 들려줬다. 구인구직 정보지에서 국제결혼 중개업소를 찾아, 너무도 쉽게 일본 남자와의 결혼을 결심한 그녀. 남편감은 43세 농촌총각이었다. 각각 혼인신고부터 해놓고 함께 살기 위해 일본 땅을 처음 밟은 날,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며 혼인취소소송을 냈다. 그러나 소송은 혼인신고를 한 지 6개월이 지났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녀에겐 이혼 기록만 남았다.
어린 시절부터 유도부에서 같이 지낸 이성친구에게 고민을 하나 둘 털어놓기 시작한 때가 2009년.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친구는 그녀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성친구에서 남자친구로, 동거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2010년 1월. 둘은 인천 연수동에 원룸을 얻었다. 대학을 졸업한 남자친구는 낮에는 면접을 보러 다녔고, 저녁엔 막노동을 해서 생활비를 마련했다. 참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 첫 아이가 들어섰다. 그가 엉뚱한 사업 제안에 넘어가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안정된 가정을 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방향제 사업을 시작한 그는 처음 몇 달은 500만원씩을 손에 쥐어줬고, “처음으로 꿈이 생겼다”며 희망을 얘기했다. 그러던 그가 언제부턴가 그녀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 달라 부탁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휴대전화 소액대출을, 다음엔 사채를 끌어 썼다. 돈이 궁해질수록, 사업이 틀어질수록 그는 더 많은 대출을 요구했다. 돈 때문에 옥신각신하던 중, 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손을 댔다. 아이는 유산됐다. 그 뒤로 그는 곧잘 화를 못 이기고 그녀를 밀거나 때렸다. 이대론 못 살겠다며 짐을 싸서 나간 게 여섯 차례. 그때마다 남자는 용서를 구했고, 여자는 속는 셈 치고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또 때리는데, 남자친구 얼굴이 아버지처럼 보이더라고요. ‘너랑 못 살겠다’ 하고 나왔어요.” 2010년 말. 그녀는 태중에 아이가 자라는 줄도 모르고 그와 이별했다.
임신 8개월 째 안 임신 그녀는 이미 임신 6개월째였다. 임신사실을 몰랐다는 그녀. -어떻게 그런 일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죠? “입덧도 없고, 태동도 못 느꼈고, 배도 불러오지 않았어요.” -아무리 그래도 생리가 멈췄을 텐데, 왜 임신이라 생각지 않았어요. “갑상선기능항진증 때문에 일년에 한 번 할까 말까였어요. 그래서 생리를 안 해도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죠.” 그녀는 임신 기간 내내 약을 달고 살았다고 했다. 갑상선기능항진증 약인 안티로이드에 위장약, 수면유도제 등등. 거기에 술까지 마셨다. “입버릇처럼 ‘죽고 싶다’고 말했거든요. 물처럼 술을 마셨어요. 약 먹을 때도 술을 마셨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자살기도 아니었을까….” 태아가 살아있다는 게 기적이었다. 아랫배가 아파 혹시나 해서 동네 병원에 갔다가 임신사실을 알게 된 그녀. 임신 8개월째였다. 당장에 약과 술을 끊었지만 때는 늦었다. 6개월 몸무게 4.2kg, 살아야만 한다 희터에 들어온 지 50일이 흘렀다. 모두가 외면할 때 같은 처지의 미혼모들은 손을 잡아줬다. 희터는 한국미혼모가족협회가 한국여성재단과 미혼모지원네트워크의 후원을 받아 운영하는 시설이다. 미혼모 2명과 아기 2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다. 그러나 시열이 가족처럼 오갈 곳 없는 미혼모자에겐 따뜻한 쉼터요 안식처다. 덕분에 희망이 생겼다. 협회 일을 돕는 미혼모 최형숙(41)씨가 협회 인터넷 카페와 자신의 페이스북에 시열이의 사연을 알리면서 전국 각지의 미혼모들이 시열이에게 필요한 물품을 보내왔다. 1만원씩, 2만원씩 후원금도 들어왔다. 그렇게 모인 돈이 30여만원. 적은 액수지만 시열이 엄마에겐 큰 힘이 됐다. 그녀가 희터에 들어왔을 당시 가진 거라곤 분유 한 통과 기저귀 몇 개, 옷 몇 벌이 전부였다. 시열이는 치료를 받게 됐다. 삼성의료원의 ‘삼성 밝은 얼굴 찾아주기’ 대상자로 선정, 8월초부터 치료가 시작된 것. 수술은 10월쯤으로 예상하고 있다. 먼저 입술을 잇고, 두 돌 무렵 입천장을 메우는 수술을 받고, 이후에도 잇몸 수술 등 수년간에 걸쳐 수술을 받아야 한다. 시열이는 소아과 진료도 동시에 받고 있다. 상태는 심각하다. 삼성의료원 최연호(소아과) 교수에 따르면 시열이는 오른쪽 횡경막에 구멍이 뚫려 간이 폐까지 올라와 있고, 숨을 잘 못 쉴 뿐더러 폐렴에 쉽게 걸릴 수 있다.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해야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횡경막 탈장 수술을 감당하기엔 너무도 작고 약하기 때문이다.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몸무게는 10㎏. 시열이의 몸무게는 4.2㎏이다. 생후 6개월 된 남자 아기 평균 몸무게(8.5㎏)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그나마 5㎏을 간신히 넘었던 몸무게는 구순구개열 교정기를 낀 뒤 1㎏이나 빠졌다. 교정기에 익숙지 않아 피부에 상처가 나고, 교정기를 지탱하는 고무줄을 갈아주면서 상처가 덧나고, 얼굴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내면 약한 살점이 뜯겨져 나가는 통에 시열이는 먹지도 자지도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그래도 견뎌내야 한다. 시열이는 두 시간 보채다 엄마 품에서 30여분 자고, 다시 두 시간 울고 보채다 잠시 눈을 붙이기를 반복했다. 하루 두 번 분유 160㎖를 빨아 먹기조차 버겁다. 6개월 아기의 평균 수유량은 150∼210㎖씩 하루 4∼5회다. 병원에서는 고심 끝에 튜브를 식도로 연결해 음식물을 공급하기로 했다. 그것 또한 아기에겐 고통일 테다. 그런 아기를 지켜봐야 하는 엄마. 대신 아파주고 싶어도 아파줄 수 없는 엄마. 몸도 마음도 지칠 것만 같았다. -지치지 않나요? “아니요. 전혀요.” 미영씨는 일주일에 한 번씩 시열이를 안고 병원에 간다. 연희동에서 버스를 타고 을지로에 내려, 지하철을 타고 일원역까지 간 뒤, 병원순회버스를 탄다.. -힘들지 않나요? “아니오. 전혀요.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힘들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삶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살아가는 기쁨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꿈도 생겼다. “주얼리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예전에 배웠거든요. 주얼리 디자이너가 되면 집에서도 일할 수 있고, 그러면 시열이랑 같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추석 다음달인 오는 13일이면 모자는 희터에서 나와야 한다. 머물 수 있는 기간이 2개월로 제한돼있기 때문이다. 갈 곳을 찾아야 한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그날 밤, 27개월 된 내 아들이 휴대전화에 저장된 시열이의 사진을 봤다. “아가가 아야야 하네. 아가가.” “응. 아가가 많이 아야 해. 그래도 아가 참 예쁘다 그치?” “아가 예쁘다아!” 시열이는 현재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에 입원한 상태다. 횡경막 탈장 수술이 시급하다고 판단한 의료진이 전날 입원할 것을 권유했다. 시열이는 목에 삽입된 호스를 통해 분유를 먹고 있다. 삼성의료원은 일부 치료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후원 문의가 잇따른다고 전하자 시열이 엄마(본명 장은희)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후원계좌 농협 3520-2519-3745-3, 예금주 장은희). 2011/9/2 국민일보 |
도임: 내 지도는 어디 갔을까?
[장면5-내 지도는 어디 갔을까?]
혹시 예배드리러 오는데 길을 잃어버렸던 친구가 있나요?
아니면 교회가 어디있는지 잘 몰라서 헤맨 친구들 있나요?
그게 아니라면 일찍 와서 기도로 예배를 준비하는 친구들 되길 바래요.
전도사님은 길을 잘 몰라요.
그런데 요즘 길을 알려주는 네비게이션이라는 편리한 기계가 있어 어디든지 갈 수 있어요.
사진을 한번 보세요. 이 지도는 내가 어디 있는지, 우리가 갈 곳은 어디인지 자세히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잘못된 지도를 가지고 길을 찾아가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은 죄를 지은 이후에 이렇게 지도를 잃어버린 것과 같이 되었어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갈 수 있는지 잃어버린 거예요.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멀어질 뿐이예요.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는 지도를 잃어버렸어요.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무능력한 존재예요. 그래서 길이 되신 예수님께로 나아가 인도함을 받아야해요.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말씀으로 우리의 잘못된 행동을 하나하나 고쳐 나가야 해요.
전개: 성령님께서 인도하셔야 해요.
[장면6-1.생각의 지도를 잃어버렸어요.]
죄인인 인간은 생각부터 악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생각만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짓는 죄도 죄라고 말씀하셨어요.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만 가져도 이미 살인한 것이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성경에 써 있어요.
우리의 삶을 보아도, 선한 생각을 하면서 악을 행하지는 않아요. 악한 생각으로부터 모든 것이 출발하는 거예요. 하지만 생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자꾸만 죄를 지으려고 하고, 악한 것들이 생각나요. 안해야지 할수록 더욱 생각이 나요. 우리 힘으로는 생각도 바꿀 수가 없어요.
쉬지말고 “사과를 계속 생각해봐.”라고 말하는 것보다 “사과를 절대 생각하면 안돼”라고 말할 때, “사과”라는 말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된대요. 사람은 이렇게 연약한 존재예요. 내 생각 하나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그러니 어떻게 악을 버리고 선을 생각할 수 있겠어요? 방법은 하나예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이예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해요. 다 같이 따라해요.
“성령님, 나의 생각을 인도하셔서 죄 짓지 않게 해주세요!”
[화면7-2. 말의 지도를 잃어버렸어요]
요즘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욕 없이는 말이 완성되지 않는 것 같아요. 호칭부터 감탄사, 형용사까지 전부 욕이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악한 말을 할 수 없다고 하셨어요. 말로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거나 화를 내는 것도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어요. 사람에게 폭력으로 육체적인 상처를 주는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아물지만, 말로써 정신적인 상처를 주는 것은 평생을 갈 수도 있어요.
많은 연예인들이 악플 때문에 자살을 해요. 이것은 글로 써져 있지만, 말로써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살인한 것이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으로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서로 사랑을 나누길 원하세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입으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말만 하고 있어요. 인간이 죄로 물들었기 때문에 우리 입은 범죄할 뿐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께 우리의 입술도 맡겨 드려야 해요. 내가 더 이상 욕이나 비속어를 쓰지 않도록, 입으로 친구들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나의 입이 세상과 나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해요.
다 같이 따라해 보세요.
“성령님, 나의 입술을 주장하셔서 거룩한 말이 나오게 해 주세요.”
[화면8- 3. 행동의 지도를 잃어버렸어요]
2011년 3월, 강원도에서 10대 청소년 8명이 뭉쳐 거리를 지나다 맟은 편에서 다가오는 현역군인 2명과 어깨를 가볍게 부딪혔다는 이유로 군인을 집단폭행했다. 이를 지켜 본 사복차림의 장교가 제지할 때까지 집단폭행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강원도 시골에서 일어난 집단 폭행... 우리는 참으로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어요.
우리가 생각을 바르게 하고, 옳은 것을 알고 있어도 행동하지 않으면 참으로 아는 게 아니예요. 바울은 감옥에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당부의 말로 듣고, 보고, 배운 것을 행하라고 하였어요. 생각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요. 우리의 마음이 악으로 차 있는지 선으로 차 있는지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죄인이면 모든 행실은 악할 뿐이예요.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우리의 행실이 선하게 될 수 있어요, 그럴 때 우리의 선한 모습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거예요.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 악한 행동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해요.
“성령님, 나를 주장하셔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해 주세요.”
[결론: 성령충만을 받아요!!]
죄인인 사람은 죄로 가득 찬 생각, 말, 행동을 버릴 수 없어요. 우리의 능력으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을 행할 수 없어요. 방법을 하나예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거예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주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께 나의 삶을 맡겨 드리는 거예요.
우리는 죄인이예요. 우리의 뜻과 생각대로 하면 죄만 지어요.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내 생각과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생각대로 살아야 해요.
갈라디아서 5:16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대요.
사랑하는 여러분, 죄의 길을 버리고, 이제부터는 성령을 따라 행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 모든 것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화면9-반항 소년, 유럽 오페라 무대 주역 되다… 독일 뉘른베르크 국립극장 솔리스트 김대영씨]
서구인들의 편견과 텃세가 심한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당당히 주역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성악가 김대영(31)씨. 독일 뉘른베르크 국립극장 솔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2008년 세계적인 콩쿠르 ‘닥터 루이시갈 국제컴피티션’에서 2위를 수상, 동양인으론 처음 성악부문 입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일시 귀국한 그를 지난 26일 만났다.
“나의 삶 속에 감사하는 일들이 자꾸 생길 때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특히 힘든 일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용기가 나요. 그 기도의 힘으로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그의 화려한 프로필 뒤엔 예측하기 힘든 삶의 흔적이 숨어 있다.
오페라 가수를 꿈꾸던 소년
그가 처음부터 노래를 잘했던 건 아니었다. 어린이 성가대 오디션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교회 전도사였던 아버지의 ‘빽’을 써도 안 통했다. 그래도 도전하는 자의 꿈을 꺾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성가대에 합격한 후 너무 기뻐서 어린이 찬송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목청껏 불렀다. 성가연습시간은 행복했다. 그 시간을 통해 노래하는 방법을 배웠다. 중학교 1학년 때 울산시 성악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막연히 유럽의 오페라단에서 노래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소년은 질풍노도와 같은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중·고교 시절 통틀어 10번의 전학을 했다. 목회자였던 아버지의 사역지를 따라 전학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중 몇 번은 학교에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사고를 쳐 전학을 한 경우였다. 그의 거칠고 어두웠던 내면엔 아픔이 있었다. 예고에 진학해 성악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개척교회를 하는 부모님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기에 떼를 쓸 수조차 없었다.
공업고등학교 전기과에 입학한 후 ‘성장통’이 시작됐다. 공부는 뒷전이 됐다. 하교 후엔 책가방 속에 넣어둔 사복으로 갈아입고 노래방, 커피숍, 당구장을 순회했다. 1년 정도 지나자 그것도 지겨웠다. 무단결석을 했다. 2주 만에 엄마가 사실을 알게 됐다. 집 앞 놀이터 그네에 엄마와 나란히 앉았다. “대영아. 미안하다. 하고 싶은 거 못해줘서….” 호되게 꾸중할 줄 알았는데 엄마는 그의 손을 잡고 울먹였다. 아버지가 개척교회를 시작한 때였다. 지하교회에 돗자리를 깔고 벽돌을 쌓아 강대상을 만들어 가족들이 예배드렸다. 지금 울산 주광교회(김성렬 목사)의 시작이었다. 엄마는 아들이 원하는 성악공부를 시켜 주지 못해 아팠던 마음을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사모였지만 가정경제를 책임지기 위해 학습지 교사, 선교원 교사, 가사도우미 등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아들의 마음속 깊이 박힌 분노의 빙산은 차츰 녹아 내렸다.
좌절은 없다
그렇지만 가난한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막노동, 음식점 서빙, 스티커 붙이기 등 아르바이트를 했다. 인생의 가장 막막했던 시절이었다. 첫 월급을 탔다. 열두 살 아래 동생에게 옷을 사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멀리 ‘성악학원’이란 간판이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노래 배우고 싶어서 왔어요.” 그의 노래를 들은 원장은 당장 성악공부를 시작하자고 했다. 그는 “저의 아버지가 개척교회 목사라 학원비 낼 형편이 안돼요. 아이들한테 음악기초 정도는 가르칠 수 있어요. 그리고 매일 학원 청소도 할게요. 레슨해 주세요.” 원장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으며 “우리 아버지도 개척교회 목사님이셨단다. 내가 그 맘 잘 알지”라고 했다. 원장은 성심을 다해 무료레슨을 해주었다.
서울 계원예고에 입학했다. 철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이를 악물고 연습했다. 학교 연습실에 이른 아침 들어가 늦은 밤 나왔다. 고3 때는 전국의 유명한 콩쿠르를 휩쓸었다. 당시 서울에 연고지가 없어 셋방을 얻어 살았다. 주인집 식구들과 나눠 먹으려고 순대를 사왔는데 그들은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 혼자 방에 들어와 그 많은 순대를 꾸역꾸역 먹으며 눈물도 삼켰다. 오히려 힘든 환경 속에서 철들기 시작했다. ‘이 시간을 견디면 나는 더 성장하고 발전할 것이다.’
그는 공업고등학교에서 예술고등학교로, 수원대 음대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로 다시 입학했다. 남들보다 돌아서 가는 듯했다. 이후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뒤 독일 뉘른베르크 음대로 유학을 떠났다. ‘닥터 루이시갈 국제컴피티션’에 입상해 군 면제를 받아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솔리스트가 빨리 되었다. 그동안 국내 슈베르트·음악춘추·난파음악·중앙음악 콩쿠르에 이어 해외에서는 이탈리아 안셀모 콜차니·독일쾰른음악 콩쿠르 등에 입상했다.
회복
2008년 칠레에서 열린 ‘닥터 루이시갈 국제컴피티션’ 콩쿠르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였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그동안 네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었다. 그 상처가 마음에 쓴 뿌리가 돼 너의 성장을 가로 막는 것 같아 미안하다. 용서해다오. 지금까지 아버지가 미웠던 거 다 말해보렴. 욕을 해도 좋다.”
너무나 뜻밖의 전화였다. 그러나 기억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는 아버지보다 빨리 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의 체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어린시절 폭력적인 아버지가 무서웠다. 사춘기 땐 아빠가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만 하시며 우셨다. “아들아, 내가 말만 목사였지 아이였어. 철이 지금에서야 들었다. 아비를 용서해다오.” 국제전화는 2시간 동안 울먹이는 대화로 이어졌다.
당시 아버지는 교회가 성장하지 않고 계속 침체되자 목회자인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함께 목회자 내적치유세미나에 참석했다. 이때 아버지는 3일 밤낮을 울며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며칠 후 아들에게 국제전화를 한 것이었다.
“예전엔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무서웠어요. 잘못하면 금방이라도 벌을 주실 것 같았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경험한 후 하나님은 제게 ‘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복 주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들이 잘 풀려나갔어요.”
단역배우에서 주역배우로
오페라를 자신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기는 서구인들의 오랜 관습에다 동양인 성악가가 낱말 하나만 발음을 잘못 내도 당장 트집을 잡을 정도로 까다로운 유럽 오페라의 풍토에서 버텨내는 것은 만만치 않다. 남들보다 몇 배 노력했다. 언어를 잘 구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단원들에게 다가가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뉘른베르크 음대에서 마이스터 과정을 마친 그는 오픈스튜디오에서 일했다. 젊은 성악가들에게 무대에 오를 기회를 주는 곳이었다. 모든 배역이 기회이자 시험이었다. 2년 동안 주어지는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2010∼2011년 시즌부터 전속 솔리스트로 활동했다. 유럽의 A급 극장 솔리스트는 누구나 꿈꾸는 자리다. 뉘른베르크 국립극장은 A급 극장이다. 얼마 전 신인급 가수가 하기 힘든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달란트 역할을 잘 해내 호평을 받았다.
독일 뉘른베르크 국립극장은 오페라, 발레, 연극이 상시 공연된다. 1년 동안 무대 위에 올라오는 오페라만 16∼17개다. 한 작품당 5∼20회의 공연을 한다. “한 시즌에 80번의 오페라 공연을 해요. 콘서트까지 합하면 100번 이상 무대 위에 올라갑니다. 무대 위에 설 때마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그는 2009년 뉘른베르크 음대에서 만난 서승희(28)씨와 결혼해 슬하에 8개월 된 딸 하담이를 두었다. 아버지가 목회하는 울산 주광교회에서 아버지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어느 날 친구가 “부모님이 널 위해 아무리 뜨겁게 기도하셔도 네가 기도를 안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어. 너의 기도가 합해져야 해”라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돌이켜보면 모든 일이 풀릴 때는 부모의 기도와 자신의 기도가 맞물릴 때였다. “하나님은 좋을 것은 한번에 주시지 않았어요. 모두 두 번째 주셨어요. 그 이유는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기도하지 않고 흥한 것은 그것 때문에 망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어려운 순간마다 기도했다가도 일이 해결되면 붕어처럼 까맣게 잊어버리거든요.”
그는 복음성가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를 좋아한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찬양이기 때문이다. 또 지난 시절 탈선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소년시절의 꿈을 실현한 그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꿈을 가지고 있으면 그 꿈이 반드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매순간 기도하며 그 길을 주님께 물으며 가십시오.”
2011.08.31국민일보
첫댓글 넘 감사합니다. 전도사님이 안 계셔서 부장집사인 제가 늘 전도사님의 설교로 준비합니다.설교를 통해 제가 먼저 은혜받고 기도하게 되네요...승리하시길~~^^
부장집사님이 대단하시네요...^^제가 더 은혜받고 갑니다~샬롬!!
설교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