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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공민 우용환 선배님 약력 | |
1937.02.26 1950.05.04 1950.06.02 1953.02 1953.03 1956.02 1961.09.30 1987.10.02 1993.05.29 1994.01.29 1998.05.10 2008.02.20 |
풍기 금계동 출생 풍기국민학교 졸업 경복중학교 입학 금계고등공민학교 졸업 제천고등학교 입학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입학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제일은행 무교지점장 제일은행 연수원 교수 기산상호신용금고 대표이사 제10대 풍우회 회장 제일은행동우회 부회장 |
나의 소중한 금계고등공민학교
금계고등공민학교 제1회 우용환
금계중학교가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데, 다만 금계고등공민학교의 자료가
부족하여, 선배들이 수고하신일을 잘 알수가 없으니 자세한 내용을 기고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하는 권고를, 한경수로부터 여러차례 받았다.
한경수는 금계중학교 2회이며, 우리 집안으로는 고모님의 외손자 이다.
근간에 금계중학교 총동문회로부터, 모교개교60주년 기념행사에 필요한 자료를 모집한다는 우편물을 받았는데, 이 기회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대로 회고담을 기고하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50년 풍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경복중학교에 입학 하였다.
당시의 중학교는 6월초가 신학기 이어서, 겨우 20여일 다녔는데 6.25사변이 났고, 두달쯤 지난뒤 8월에, 서울에서 걸어서 풍기 금계동 집으로 내려왔다.
서울이 수복 되었지만 집안형편이 여의치 않아, 서울에 복교 할 수가 없었다.
어느날 금계동 1구 공회당에서, 계삼정 선생님이 야학을 하신다는 동네 사람들의 말을 듣고 가보니까, 공회당에 계삼정 선생님이 그리신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가 크게 걸려있고, 선생님이 열심히 교과 지도를 하고 계시었다.
그후 몇 년도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금계중학교 현지의 토지소유자가 토지를 학교부지로 기증하여, 야학을 금계2구로 이전하면서 금계고등공민학교를 설립 하시었다.
당시에 교장 계삼정, 교감 차병태, 물리.화학 김상규, 생물 차병조, 체육 조영주, 영어.역사 허윤, 영어 송지중, 수학 정동원 선생님이 담당 하시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고등공민학교 3학년 졸업 하기전에, 확실히 중학교로 인가를 받으시겠다고 장담 하시었다. 그러나 혹시 모르니까, 고등학고 입학자격검정시험에 응시 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고, 1951년 초부터 검정시험 준비를 하였다.
특별히 정동원 선생님께서, 밤낮을 가리지않고 수학을 지도해 주시었다.
정동원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시고, 동아제약 상무로 재직하시면서, 서울지역 박카스 매출을 총 지휘 하시었다.
그후 진양제약주식회사를 설립하시어 약업계에 큰 공헌을 남기시고, 지금은 서울 광천교회 원로장로로, 복음을 증거하고 계신다.
정동원 선생님의 집중지도를 받고, 그해 8월에 대구에 내려가 검정시험에 응시 하였다.
답안지만 제출하고, 시험지는 모두 모아가지고 귀가 하였다.
집에와서 채점하여보니, 충분한 합격권에 들어가 있었다.
합격자 발표를 보려고 대구매일신문을 계속해서 보았으나, 발표공고가 없다.
희한한 일이다.
고등공민학교 3학년 1학기가 시작되었는데, 중학교 인가가 나지 않았다.
기다리다 참지못한 학우들중 여러사람이, 풍기중학교로 전학 하였다.
나는 검정시험을 잘 보았다는 자신감이 있는외에, 그래도 졸업할 때 까지는, 중학교 승격이 될 것이다 하는 신념이 있었다.
3학년 2학기 부터는 학교에 가지않고, 집에서 고등학교 입학시험문제집을 중심으로, 매일같이 모의고사를 치루고, 필요한 교재를 정독 하였다.
1953년 1월이 되었는데도, 금계중학교 승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금계고등공민학교 3학년 수료예정증명서를 발급받아, 1953년 1월 충주로 향하였다.
충주에는 우리 고종 전광우 형님이, 충주교현국민학교 교사로 계시었다.
충주사범출신인 형님에게, 충주사범학교 입학시험 응시를 부탁코져 하였다.
그러나 형님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진학하기 때문에, 충주에 관한일을 어떻게 해 볼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혹시 모르니까 풍기에 가는길에 제천을 들려서, 제천고등학교 입학시험 응시를 부탁해 보라고 하시었다.
나로서는 막다른 길이니까, 제천고등학교로 갔다.
교무실에 들어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면서, 입학자격검정시험 문제지를 제시 하였다.
이필종 영어담당 선생님이 상담해 주시었고, 선생님은 영어시험문제지와 또 중3영어교재를 주시면서, 해석해 보라 하시었다.
상담을 끝낸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입학시험 까지는 책임지겠다 그러나 입학허가 여부는 교장선생님이 하시니까, 알수가 없다 하시었다.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이다. 선생님에게 백배 하례하고, 수험표를 받아서 귀가 하였다.
지정일에 침착하게 입학시험을 치루고, 합격자 발표일에 떨리는 마음으로, 제천고등학교교정에 들어섰다.
전광우 형님이 나보다 미리와서 합격자 발표를 보시고, 나에게 달려오시면서,
“야 1등이다 1등이야” 외치시었다.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고, 운동장에 게시된 합격자명단을 훑어 보았다. 내 이름이 맨 위에 있다. 수석 합격이다.
풍기시내에서 천명당약국을 경영하시던 우두명 형님이, 보은에 가서 약국을 하시면서 보은농고 화학 교사로 계시었다. 형님이 제천고등학교 합격증을 받아와서, 보은농고에 다니라고 하신다. 제천고등학교 이필종 선생님에게 가서, 보은농고로 가겠다는 말씀을 드리니까, 제천고등학교에 다녀라 입학금과 1학기 수업료가 면제되고, 학교 성적이 우수하면 장학금도 받을수 있다 하시면서, 제천고등학교에 다닐 것을 권고하시었다.
이필종 선생님의 말씀대로, 제천고등학교를 선택하기로 했다.
이필종 선생님은 내가 제천고등학교에 다니는동안, 많은 배려를 해 주셨으며, 훗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들어가는데에도, 큰 도움을 주시었다.
금계고등공민학교에 관한, 잊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이 떠 오른다.
1학년때에는, 김광수 허창구 송문호 이범우 김현태 송경숙 문순임등 42명 학우와 함께 공부 하였다.
조영주 선생님이 체육을 주로 담당 하시었는데, 하루는 삼가동으로 원족을 가자고 하신다. 도시락을 싸 가지고 삼가동 산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여기저기 낙엽송을 채벌하여 서까래 재목으로 건조시켜 놓은 것이 보였다.
“야 가는길에 이것 하나씩 가지고 가자” 모두들 흔쾌히 하나씩 매고 내려왔다.
오는길에 조영주 선생님이, 일본 사무라이 예기를 구수하게 들려주신다.
예기를 듣다보니, 힘든줄도 모르고 어느새 학교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하여, 여러차례 서까래를 학교로 날라 왔다. 흙벽돌을 만들어서, 큰돈 안들이고 교실을 증축 하였다.
조영주 선생님은 도수체조. 텀불링을 가르치시고, 김상규 선생님은 아령. 곤봉 집단체조를 지도 하시어서, 풍기체육대회 기간동안,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바 있다.
1951년 6월초인 것으로 짐작되는데, 교장선생님께서 부르시더니, 6.25포스터를 그려서 풍기지역 곳곳에 붙여라 하신다. 너무 막연한 말씀 같아서, 포스터를 그릴줄 모르는데요 하였더니, 그 자리에서 한 장을 거뜬히 그려 주시면서, 이런식으로해서 수고좀 해라 하시었다. 선생님이 그리신 것을 보고, 아무리 똑같이 그리려하였으나, 매번 실패작이다. 어쩔수가 없다. 대충대충 20매 정도를 그렸다.
포스터와 풀을 준비해 가지고, 풍기시내와 삼가동 산법동 등지로 다니면서, 길거리 벽에, 또 동네입구 벽에, 다 붙였다. 두어장 붙이고 말아도 될 일이었지만, 내 성심껏 책임을 완수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잘 한 일인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고시 준비를 위하여, 소백산에 들어가 있을때의 일이다.
한번은 집에 내려왔더니, 교장선생님께서 만나보시고져 한다는 전갈이 왔다고 한다.
학교로 찾아 갔더니 교장선생님께서 말씀하기를, 금계중학교에 교직을 맡아 주었으면 한다 하시었다. 말씀이 너무 소중하고 고맙지만, 고시준비를 한다는 이유를 말씀 드리고 돌아왔다.
그후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에, 문득 선생님을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에게 식사라도 한번 대접하려고 댁으로 찾아 갔는데, 오랫동안 병석에
계시었고 기침을 많이 하셔서, 말씀을 잘 있지를 못하시었다.
선생님은 제자들이 찾아오는 것이 가장 기쁘고 보람이 있으시다 말씀하시었다. 지금도 교장선생님의 인자하신 말씀이, 귓전을 울리고 있다.
교장선생님의 제자인 군부대 부대장이, 금계고등공민학교에 기여한 일도 잊을수가 없다. 군부대 차량을 동원하여, 전교생이 군부대 인근야영지에 놀러 간적이 있었고, 부석사에 원족을 간적도 있다. 군 부대에서 통조림과 야전식량을 간식으로 가끔 주었고, 학교 교실을 증축할 때에도, 지원하여 준 것으로 기억된다.
우규환 강신용 김용기 정봉강은, 금계고등공민학교 1년 후배 이다.
우규환은 나의 친동생이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서울대 사대교수로 봉직하였으며, 정년퇴임후,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강신용은 나의 경복중학교 입학동기이고, 제천고등학교 1년후배이며, 김용기와 정봉강은 풍기국민학교 동기동창 이다.
오래전부터 경향 각지에서 금계중학교 출신 후배들이, 모교와 고향 발전을 위해서 큰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후배 안상철. 조대원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내가 풍우회 회장을 할때, 또 소백회 회장을 할때에, 많은 협조를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 한다.
그옛날 은사이신 여러 선생님들이, 지금은 고인이 되시었다. 친우들도 유명을 달리한 분들이 많다. 궁금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개교60주년 기념일이 기다려진다.
금계고등공민학교는, 내 인생의 값진 추억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2010년 4월 9일 서울 상월곡동 우거에서
첫댓글 선배님의 사진과 약력 함께 올려 주세요...
아- 한숨에 읽었습니다. 그 질곡의 세월을...
존경드린다는 말씀으로는 너무 모자랄것 같습니다.
존경합니다 선배님.
우용환 대선배님! 감사합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요!!!
우용환 선배님,아니 아저씨 이렇게 좋은 글을 올려주어 고맙습니다.잘 읽었습니다.이 글을 보니 여러가지 일들이 새삼 아련하게 기억에 떠오르는군요. 소백산 달박골에서 껍질가시가 박히고 어깨가 부르트며 낙엽송 석가래 재목을 날라오던 일,진흙을 개어 교실벽을 쌓고 교실을 짓던 일등.초창기의 공부하는 모습은 문자 그대로 주경야독이요 노작교육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