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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오바고 2016.6.14.
예수의 생애
전체적인 사회의 맥락에서 보면, 어떤 사회이든지 주변과 중심이라는 구도를 가지고 흘러간다. 중심은 언제나 주변을 주변화 시키고, 자신의 기득권을 공고화하고, 여기에 대한 선망을 느끼도록 만들다. 동시에 주변인들을 경멸하는, 혐오를 만들어낸다. 혐오의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중심으로서의 권력을 공고히하기 위한 방식이다. 희생양 만들기 문화를 보더라도, 내부적 갈등과 폭력성향이 중심을 향하면 자기들이 위험해지니까, 외부에 타자를 만들어낸다.
개신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만 천하에 드러났고, 대형교회뿐만 아니라 중형교회도 마찬가지다. 평신도들이 교회를 떠나고, 성장을 요구하는 평신도 앞에 목회자들은 할 말이 없다. 비판이 내부로 집중되고 있는 걸 돌리기 위해 이슬람 포비아와 동성애 포비아,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이 두 가지 포비아다. 함께 가고 있다. 오히려 지금 개신교회가 그런 포비아 담론을 통해 쇄신을 꾀하려는 게 (도리어) 몰락을 야기할 것이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것으로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것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으니까.
올랜드 게이바에서 총기사고가 난 다음, 대중가수 지드래곤이라는 아이가 애도하는 글을 올렸다. 그랬다가 하도 논란이 되어 글을 내렸다고 한다. 동성애자는 애도도 받아도 안된다는 것인가. 서울신대 반동성애 아이 하나나 sns에 회칼을 들고 찔러 죽이고 싶다고 쓰고, 목사들의 혐오전략이 희망이 없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그대로 내면화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아슬아슬한 싸움이다. 포비아를 얘기할 때는 어떤 이성적 대화도 불가능하다. 대다수는 입을 다물고 있고, 목소리 큰 사람들만 선동적으로 얘기한다.
트럼프현상은 어떤가?
비슷하게 보고 있다. 트럼프현상은 리먼 브라더스 사고가 나면서, 세계체제가 변화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생긴 것이다. “월가 점령”운동이 벌어졌는데, 1% 대 99%의 대결, 그럼에도 세상은 그대로 가더라. 이놈의 세상 안바뀌는구나, 트럼프가 와서 판을 깬다. 말로. 이전에는 말하는 룰들이 있었다. 그런데 룰 밖에서 얘기하는 게 먹히는 것 같다. 우리 나라에도 이미 나타났다. 일베 같은 집단들.
올랜드 똑같은 사건을 두고 힐러리는 소수자 박해가, 트럼프는 이슬람이 문제라고 한다.시민사회의 상식이 극단으로 가는 사람들을 막아주고 있었는데, 시민사회 상식이 무너졌다. 미국도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다.
전문가들은 힐러리가 되면 더 위험하다고 한다. 제국주의로서의 미국을 강화하려는 게 힐러리니까. 트럼프는 우리가 볼 때 미친놈인데, 그런 미친놈이 더 나을 수 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미국도 재미있어진 것이다.
교회가 왜 존재해야하는가 고민이 된다.
이번 퀴어축제는 비교적 질서가 있었다고 한다. 많이 절제가 된 것 같다.
이전에는 그들이 남들을 조롱했다면, 이번에는 자기를 표현하는 정도로 절제한 것 같다.
개신교가 하는 게 마녀사냥인데, 자기 정체성이 마녀일 때 마녀사냥을 한다고 본다.
동성애 담론이 생기면서, 교회내부로 향하고 있던 비판의 동력이 사라졌다. 밖으로 돌려놓으니까. 명성교회를 비롯해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붉어졌는데, 아무 문제 없이 다뤄지고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대형교회를 하는 이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영특하다는 것이다. 뭘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어수룩한 사람들이 아니다. 훨씬 더 위험하다. 세상 돌아가는 걸 너무 잘 안다.
<예수의 생애>, 초판이 83년에 나왔다. 홍성사 이전에 나온 것도 있다.
엔도슈사쿠 20쇄면 많이 나간 듯 하다.
대형교회 얘기했지만, 그들이 영악할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교회의 대형화를 추구한다는 게 악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최근에 한 후배를 만났다. 매형이 알만한 교회로 갔는데, 예전에 얘기가 상식적으로 통했는데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구조 속에서 개인이 견뎌낼 수 없고.
사람들이 합일화의 의지, 강자에게 합일하고 싶은 게 있는 것이다. 예컨대 고엽제 피해자들, 어버이연합회와 결합해서 온갖 못된 짓하고. 베트남 참전해서 한 못된 짓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상식 있는 사람이면 일본에게 사과요구하면서 베트남에게 사과할 것이다.
종로서적 망할 때, 종로서적 사장과 얘기하는데, 베트남 전쟁 얘기하면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고 하더라. 자기의 과거를 지우는 것이다. 부끄러운 과거를. 믿음이나 상식이나 성찰적 지혜가 발동해서. 참 부끄러운 짓이었구나, 라고 반응하는 게 쉽지 않겠더라.
자기 존재가 없어지는 거니까. 자기 존재가 거기서 나타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조차도 내 교회는 큰 교회야, 라고 존재를 보니까.
그런 성찰 지점이 없어진다면,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베트남에 대한 아픔과 후회 때문에 베트남에 속죄행위를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게 관계회복하려는 운동가/활동가들이 많은데, 그들이 주목받지 못하고, 도리어 반대 사람들만이 주목받는 한국사회가 참 안타깝다.
인간이라는 게 참 “이상한” 동물이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에 나오는 단어다. 고향을 떠나 있는, 낯선. 이런 뜻이다. 자기 스스로에게 낯선 존재인 것이다. 늘 불안한 것이고. 기독교의 원로된 지도자들도 그런 게 슬픈 것이다. 여러 인사들이 존경받았는데, 연세가 많아지면서 보수적으로 되더라. 예외가 서광선 박사뿐인 것 같다. 공산당에게 아버지 살해당하는 것을 본 사람임에도. 미국유학 중 유니온에서 제임스 콘을 만나면서 관점이 바뀌었다. 그 아버지 살해당한 것도 인간의 악마적 제도 같은 게 만들어낸 것이지, 하면서 래디컬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런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예수의 생애> 얘기해하는데, 지금과 그때와 판박이 아닌가.
대중들이란 건, 자기를 좀더 힘있게 만들어주는 지도자를 원하는데, 나약한 지도자를 경멸한다.
능력이라고 하는데, 그게 악마적으로 나타난다. 지금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 같다.
힘을 뜻하는 영어단어는 두 개다. power와 force. 포스는 물리적 힘, 어떤 사람에게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이다. 잘못된 카리스마, 리더쉽. 파워라는 것은, 내가 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나의 존재 자체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예수의 존재는 파워풀했다고 할 수 있다. 대중들이 예수에게서 기대했던 것은 포스다. 그동안 읽어온 엔도의 관점이 그대로 담겨있다.
엔도 슈사쿠가 예수의 생애를 자기 관점에서 상상력을 발휘해서, 성경에 빗대어서, 충실히 그 당시의 고대근동사회를 반영하면서, 나사렛생활부터 십자가 죽음까지 기록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향했던 것들이 과연 무엇인가, 그가 지향했지만 대중들이나 제자들은 어떻게 오해했고, 어떻게 갈라졌고, 다시 예수의 정신을 제자들이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하는 것은 상상력과 작가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작품이다. 특별히 나 같은 경우는, 무력한 예수의 부분에서, 유다만은 알았을 것이라는 관점이 새롭게 들렸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내가 유다에 가까운 사람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아멘’이라고 하는데, 하이데거는 ‘아멘’은 충실이라고 한다. 행위로서 나타나지 않으면 아멘이 아니라고 한다. 진실을 뜻하는 단어에서 나왔다. 자칫 잘못하면, 예수를 알지만, 그렇게 행위하지 못하는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게 새롭게 다가왔다.
나중에 왜 제자들이 예수를 다시 따라갔을까, 그 연결부분이 굉장히 끼워 맞추는 식일 수도 있긴 한데, 다른 책들에 비해 잘 연결시키지 않았나, 그렇게 읽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질문이다. 장점도 있지만, 문제도 있다. 엔도가 접근하는 예수의 생애에 대한 문제점들, 어떤 것들이 있을까.
엔도 작품에서, 너무 내면에 관심을 하다보니까,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같다. 일관된 답답함을 느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그때 바라보면 달리보이는 데가 많은데, 심히 내부적으로 본 감이 있다. 그래서 조금 답답하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다양한 담론 속에서 어떻게 봤는지 나누어달라.
1세기 팔레스타인의 사회경제적 맥락 속에서 예수를 바라보면 달리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만 아니라 사회학적 측면이 엔도에게는 간과된 듯 하다.
우리도 같은데, 종교성을 이야기하는데. 소위 옛날의 영지주의, 요즘은 관상기도 같은 운동들, 좋다. 나도 한다. 답답한 건, 그 속에만 갇혀 있다. 시민적 삶으로, 일상으로 번역되는데 부족하다. 내면, 사랑 얘기하는데, 그 사랑이 토해져야 할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 없이 얼마나 공허해질 수 있는가, 하는 지점이 있다.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이 많다. 현자wise man, 종말론적 예언자, 열심당원 등등. 거기에 비하면 엔도의 관점은 전통적이다. 예수는 참 하나님이라는 교리적 고백과는 거리가 있지만, 동양적 방식으로 풀이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지만.
보통 대중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일반 평신도에게 읽으라고 하면, 난해해질 것이다.
지고지순, 전지전능, 그런 예수가 믿어지나?
자기투영의 예수 아닌가, 내가 믿는 예수 아닌가.
그래야 예수를 대상화할 수 있으니까. 난 숭배만 하면 되거든. 편리하다.
일반 대중, 교인들의 기본적 신앙자세 아닌가.
그럼에도 하나님이 교회를 두신 이유는 무얼까.
그 중에 그래도. 3%? 가라지 뽑으려다 알곡까지 뽑을까봐?
우중정치가 가능한 것은, 환상을 심화시켜주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그렇다. 가난한 집 아가씨가 재벌회장 아들과 좋아한다. 신데렐라. 한류를 연구한 교인이 있는데, 유럽에선 한류드라마가 인기가 없다. 허구니까. 권위주의에 찬 사람들은 전복할 의지를 갖고 열광한다고 한다.
또한 k-pop, 케이팝이라는 말은, 코리안팝으로 규정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냥 사회학적 용어가 되었다. 첫째는 어느 정도의 음악성, 노래연습 열심히 하고, 외국에 어필하기 위해 외국작곡가의 곡 가져오고. 두 번째 칼군무. 이게 강렬하다고 한다. 세 번째는 잘생긴 것. 케이팝이 유통되는 이유다. 미국에서는 하위문화에 불과하다.
개인의 영성에만 천착한 모습을 엔도가 많이 보여준 것 같다. 그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전엔 반가운 책이었지만, 한 발 더 나가기 위해서는 이 책이 도리어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
소위 오강남 박사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를 얘기했는데, 유대사회운동은 표층이고 예수는 심층으로 갔다고 본다. 보편적 측면인데, 예수는 일상의 장소로 자꾸 나아갔다. 사랑만으로는 곤란한 지점이 있지 않나.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고자 애썼다, 이런 표현이 반복된다. 설명이 안되니까. 저자도 알고 언급을 하는 것 같다. 실질적으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제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하고. 갈등하고 고민하고. 거기에 집중해서 다룬 것 같다.
사회적 측면이 결여되었다는 걸 느끼긴 했는데, 한국교회는 일단 여기서 말하는 것만이라도 다시 가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문제라는 게 아니라 아쉬움이 남는다는 점이다. 일단 좀 안다고 하는 기독교 건달들이 많다. 겸손하게 자기 삶을 바꾸어나가는, 남과 다른 것에 대한 자기만족에 그치는 게 너무 많다. 좋은 책들이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위 공부하는 사람들이.
여하튼 엔도가 이 책을 쓴 게, 73년에 냈다. 70년서부터 잡지에 연재한 것이니까, 46년이 흘렀다. 이때 이만한 사고를 한 사람이 우리나라에 누가 있나 싶다.
이 책 읽으면서, 연재하면서도 이미 다 구성이 되어 있지 않나 싶은데, 사회적 배경이라든가 여러 가지 설명들 있지 않나. 난데 없다거나 뚱딴지 같다는 느낌이 없다. 잘 삽입되었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소설가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에 대해 모든 걸 다루지 않았지만, 주욱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게 놀랍더라.
르낭 같은 예수전과는 다른 새로운 예수전, 그런 점에서 놀랍다.
이탈리아를 다녀왔다. 화가들이 성경 한 구절을 보고 그림을 그린다고 하더라. 굉장히 많이 묵상하고 그린다더라. 엔도도 그런 점에서 동물적으로 한구절로 얼마나 씨름했는지 생각하게 만들게 도와주었다.
샤갈의 성서화를 보면 대단하다. 일정한 틀 속에 그림을 집어넣었는데, 작가가 저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다 담겨있다. 그림 공부를 하지 않고서 서양신학을 이해한다는 게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강연 하나 요청받았는데, 피에타 그림 몇 점 갖고 이야기하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티칸 피에타, 수백 가지 해석이 나온다.
성경은 결국 해석이다. 엔도도 굉장히 놀랍지만,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엘리 비젤이 대단하다. <팔티엘의 비망록>을 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독특한 문학을 만들어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몰트만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 비젤의 <밤night> 한 대목 때문이었다. 수용소 연병장에서 교수형에 당하는 세 사람이 있고, 아이가 버둥거리는 걸 보면서, 하나님이 교수형 처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게 모티프가 되었다.
아주 빼어난 작가이다. 기회가 되면 <새벽Dawn>, <밤>, <벽 넘어 마을>, <비망록>, <예루살렘의 거지들> 등. 우리나라에 번역이 되었지만, 죽은 책이 많다. 성서해석에 대한 책들이다. 탁월하다. 유대인들의 성서해석을 잘 모르는데, 엘리 비젤 대단하다.
레비나스의 성서해석도 대단하다. 우리 신학계에서는 그런 성서해석을 거의 안 갖다쓴다. 능력 부족이다.
엔도 슈사쿠가 엘리 비젤과 비슷한 작업을 한 것이다. 예수 생애 다음이 그리스도의 탄생이 다음 작품이다. 어떻게 그리스도로 고백되었는가, 그걸 다룬다.
예수 세미나 쪽은 언제인가?
그보다 더 후다. 역사적 예수 연구 2기. 불트만 같은 경우,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 예수라는 분이 있었다는 것뿐. 내용은 알 수 없다.
역사적 예수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개 일반 대학에 있는 신학자들이 인접학문들의 학문적 성과를 보면서 텍스트에 접근할 다양한 방법을 배운 것이다. 이전에 해석되지 않던 것들이, 그걸 통해 보이는 것들 때문에 르네상스가 된다. 1980년대다. 활발하게 성과물들이 나온다. 역사적 예수 담론이란 게, 여전히 비주류다. 한국에서는 역사적 예수 연구가 감리교쪽 알려진 것은 김준우 박사 덕분인데. 한국 신학계에서는 별로 반응이 없다. 그러나 경청할 만한 부분 굉장히 많다.
신학교 다 무너졌는데. 바닥까지 갔더라.
50쪽의 ‘사실’과 ‘진실’..
이 책 전체의 태도다.
이것을 신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접근을 하면서 얘기해야하는지 고민이다. 기존 신앙관에 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물위에 걸은 게 사실이에요?” 이렇게 묻는 이가 있으면, 나는 되려 되묻는다. 굳이 그렇게 사람이 걸어야 해요? 이렇게 물으면 긴장감이 빠지지 않나. 그런 식으로 슬슬 접근한다. 기적담이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 메시지가 나에게 준 것. 이걸 반복하다가 보면 이건 fact가 아니라 truth를 전달하는 것이구나 하게 된다.
mythos의 본래 뜻은 이야기이다. 신들의 이야기이지만,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스-로마 시대에서 인간이 성취해야 할 가장 높은 덕을 아레테(탁월함)라고 하는데, 예컨대 목수는 만드는 데 탁월함을 보여줘야 한다. 탁월함은 인위적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이상화된 인간이다. mythos. 이렇게 보면, 성경도 mythos로 볼 수 있다. 그 시대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가 물 위를 걸었구나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미 있게 소통되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동화를 듣는 것과 똑같다. 아이들은 다 안다. 동화인지. 그럼에도 동화를 반복해서 읽는 것은 의미 있기 때문이다.
목사들이 교인들을 너무 유치하게 만들었다.
누가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예수의 모든 비유라는 게, 하나님 나라가 인위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예수가 우리에게 전해주려고 하는 하나님 나라 담론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 스러운 삶인지를 얘기해주는 것이다. 접근하는 언어들을 바꾸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비유 속에는 종교적 낱말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일상적인 얘기들 뿐이지만, 절묘하게 하나님 나라의 삶을 보여준다. 오늘 목사들의 언어는 종교적 언어로 충만한데, 일상적 언어로 적용되지 않는다.
신앙을 터잡아왔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엔도의 이야기는 상당히 중요하다. 기적을 행했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쨌든, 성서가 축복이라는 게, 복음서 4개라는 점이고, 읽다보면 차이점을 보게 되더라.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고 권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자연스러워진다. 목사들이 용기를 못내는 것 같다.
아무런 저항이 없었나?
오래듣다보니 괜찮아지더라. 그렇게 훈련받은 분인데, 1년쯤 되었는데, 잡담회에서 어떤 분이 묻더라. 견딜만 하냐? 해방되었다고 하더라. 그런 것에 골똘하고, 믿어지지 않는데 믿으라고 하는데, 그 속에 갇혀 있었다더라.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도마와 같은 태도가 불신앙이라고 배워왔다. 도마가 엉뚱하게 묻지 않았다면 제자들 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도마는 위대한 이다. 신앙의 이정표다.
폭력이 아니라 편함으로 다가왔다. 이런 것도 있다 하는 식으로. 엔도가 위대한 게, 사람들에게 언어를 전달할 때, 문학적 이야기식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요즘 목회자들이 틀에 갇힌 것도 있지만, 실력이 없는 것도 있는 것 같다. 포장할 수 있는 언어를 통해 전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그건 틀렸고, 하는 게 방어적 태도로 만들 수 있다. 이런 건 어떤가 하는 식으로 여지를 주는 게.
어떤 선교사가 와서 기적을 설명하는데, 낫게 한 것보다 나병환자의 상태임에도 접촉한 것이 진짜 기적 아니냐며, 쉽게 이끌어 가더라.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여기 30cm공간만 있어도 된다. 그렇지만 어떤 아이가 와서 그것만 남겨두고 10미터를 다 파해친다고 하면, 나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다. 무형의 유형. 여지를 줄 수 없는 답은 위험하다. 생각이 다른 사람은 견딜 수 없다. 여지를 남겨줘야 한다.
모든 인간들은 보편의 자리, 인간의 슬픔이고 아픔이다. 종교 문화 인종 모든 걸 뛰어넘어 아픔에 반응한 것, 그 근원적 자리를 보여준다. 이런 책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 것이다. 사고하도록 해야 한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까.
9장 마지막, 유다에 대해 묘사하기를, “그는 자기를 사랑하듯이 예수를 사랑했으며 자신을 증오하듯이 예수를 증오했다.” 소설가답게 문학적이다.
“이상한 스승이었다. 그들은 ,.. 파악할 수 없었다. 인생을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차가운 침묵”.
구역원들과 얘기 중에 회개해야 일이 풀린다고 조언하는 신앙인들이 많다더라. 설명이 안 되니까, 하나님의 벌이라고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다. 그런 식으로 구조에 얽매여저서 자유함을 못 느끼더라.
때때로 엄격한 아버지가 될 필요도 있다. 답없는 삶을 사는 것이 용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답을 구하기 때문에 절망한다. 욥기에서도 보면 하나님은 참 짓궂게 묘사된다. 내 문제가 내 앞에 다가와 있으며 안 보인다. 떨어져서 바라보면 주변까지도 보인다. 내 고통이 개별적이긴 하지만, 그 고통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 씁쓸한 느낌을 견디어 나갈 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예수가 사실 무조건 위로만 한 것은 아니다. 고쳐주셨지만. 지금의 많은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적 주체로 서기보다는 목사들이 자기들을 돌보아주고 기도해주고 관심 보여주기를 원한다. 서로 죽이는 일인 것 같다. 목사도 견디기 어렵고. 교인도 스스로 서기 어렵고.
목회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교인들과 기본적 신뢰관계가 이루어져 있으면, 난감한 이야기해도 괜찮다. 신뢰받으니까. 그런데 거꾸로 가는 경우가 있다.
대체로 교인들이 나를 어려워하더라. 허튼 소리도 잘하는데. 밥 사달란 적도 없고. 그것 때문에 어려워하는 것이다. 군목 마지막 1년 하는데, 가 있어야 할 교회목사가 있고, 며칠 같이 있게 되었다. 이 친구가 교인들에게 밥 먹으러 갈테니 점심해놓으라고 거침없이 요청하더라. 그런데 성도들은 그걸 굉장히 좋아하더라. 그래야 친밀해진다고 느끼는 것 같다.
싸우는 것은, 보편의 자리, 슬픔의 지층까지 안 내려오기 때문이다. 지하수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거기서 뽑아진 물 가지고 싸운다. 갈 수도, 갈 능력도 없으니까.
슬픔은 보편적 언어다. 젊을 때, 스스로가 싫었다. 인생이 슬픔인 거다. 정서 그 자체가. 다 슬퍼보인다. 슬픔과 동시에 허무기가 있다. 의욕이 없다. 부질없어 보이고.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게 나를 지켜준 힘이었다. 허무기가 있으니 집착을 하지 않는다. 그게 나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비교적 마음이 건강히 지낸 건 그것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세계, 함부로 규정할 수 없다. 정상-비정상 논쟁? 치유해야 할 대상? 병적인 징후가 아니라면. brain-wash 좀 하자.
동성애 담론에 집착하는 이는, 보편의 적으로 삼아, 자신의 비겁함을 호도한다. 그 이면의 심리상태를 봐야 한다.
kbs 다큐. 52세의 영국 쌍둥이.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Don’t judge”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우리는 판단부터 하지 않나. 미국장로교회, 북침례교는 동성애 받아들였더라. UMC 포틀랜드에서 동성애 의제 다루느냐 마느냐. 미국감리교회는 동성애 수용이 주류이지만, 투표하면 번번히 부결되었다고 하더라. 오순절사고 영향받은 아프리카 필리핀 선교사들 소속이 umc인데, 똑같은 지분갖고 있으니 가능한 것이다.
한편, 고고학적 자료와 해석이 달라졌기에, 보완이 필요할 것이다. 리처드 호슬리 서적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다음 책은 <그리스도의 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