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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단원 영성교육 교양강좌 / 주관 : 교회의 어머니Co
강사 : 정성해<베드로> 2대리구 교구장대리신부님
일시 : 2019. 9. 23(월) 오후 7시
장소 : 천주교 대구대교구 욱수성당 성전
레지오 시작기도(주송 김원석<마태오>교회의 어머니Co단장)
강사 소개와 인사
... 이렇게 많이 모이셨네요. 신앙으로 일치된 여러분의 큰 열성과
마음에 저도 합심하여 착하고 열심히 살도록 노력하겠다.
오늘 강좌는 신앙보다 교양강좌가 되겠다.
신앙에 집중.. 어렵더라, 한 인간으로서 겸허하게 살고자하는
제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많은 경우, 레지오신심뿐이 아니라 본당내의 모든 문제들
사업도 그러합니다만 가장 큰 문제가 사업의 본질적인 문제나
레지오 신심의 문제라기 보다는 인간관계에 따른 것들이 너무 많더라.
하느님이 오신 것도 인간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를 해 보려고 애를 쓴다.
어려운 신앙, 하늘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은 좀 인간적이고
철학적인 그런 이야기가 되겠다.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Casino 가 보셨는가? 거기에 없는 것 3가지가 있다.
시계 · 거울 · 창문이다.
전 세계 공통적으로 이 세 가지가 없다고 한다.
여기엔 카지노 산업의 유명한 마케팅 전법이 들어 있다.
검색을 해보니 정선카지노장엔 2년 전부터 중앙에 큰 벽시계를 걸었다고 한다.
없는 것 3가지... 망가뜨려진 자기 꼴을 못 보게 하는 것,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어느위치, 어느 좌표에 있는지 못 보게 하려는 의도이다.
그래야 신경 안쓰고 오랫동안 게임에 몰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마태복음에서는 사람의 목숨..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온 천하를 얻는다해도 자기 목숨을 버리거나 영혼 구원에
실패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래서 제일 중요한 '나'로부터 시작한다.
내가 없는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
자기 관찰 - 자기 이해 - 자기 변화
1. 거울 : 자신과 마주하기(알기, 정직, 성찰 - 뒷모습)
2. 시계 : 약속, 습관, 관리
3. 창문 : 기도, 독서, 여행, 산책, 경청
나는 누구인지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그런데, 답은 없다.
누군가의 노랫말에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고 했고
'내 마음, 나도 모르게..'란 노랫말도 있다.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중요한 물음이다.
그렇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더 허약해지고
허물어진 그런 존재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 모든 발전, 창조, 창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통해서 시작되었고
인간 지구촌이 생성, 소멸하면서 계속 진화해 가고 있는 중이다.
나의 정체성을 묻는 것은 자기가 자기 삶을 사는 첫걸음이다.
개인적이 아닌 사회적으로 묻는다면 '도대체 인간은 누구인가?'로 묻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군중으로, 그 많은 숫자로 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은 그냥 군중, 자기가 없는 떼거리가 아닌
아주 구체적인 자기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시다.
구체적인 同行을 말씀하시다. 군중은 우~가는 것이지만
동행은 구체적으로 누구와 같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제일 중요한 세상을 살면서 누구와 동행하고 있는가..
내가 아는 나 + 남이 보는 나 + 나도 모르는 나
Know thyseelf (너 자신을 알라)
- 소크라테스 -
사실 소크라테스의 말이 아니고 벽에 쓰여진 낙서를 보고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늘 이 말씀으로 자주 일깨웠다고 한다.
너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라.
'그래야 너는 참된 앎을 찾기 위한 물음을 계속 할것이다.'란 뜻이라고 한다.
너가 모르면서 아는척.. 하는 동안은 거짓 앎에 만족해서 참된 삶을 빼앗길 수 있다.
거짓되게 아는 것보다 참되게 아는 것이 열 배, 백 배 낫다.
그러므로 너 자신이 누구인지 묻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라.. 이런
교훈이 저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
너의 분수, 형편, 실력을 알라는 것이다.
자기 인생.. 어드메쯤인지 체크해 보라는 의미다.
그래야 자기 정체성과 적성과 현실을 알고 좀 더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知彼知己 百戰百勝
자기를 알고 상대를 알면 백전백승.. 여기서
적을 아무리 잘 알아도 자기를 모르면 백전백패할 것이다.
우리가 안다는 것.. 하나의 단편에 불과하다.
내가 안다고 하는 지식.. 자기를 통해 다시 한 번 여과되고
정리 되었을적에만 조금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孟母三遷.. 우리가 아는 그대로라면 지혜로운 맹자 어머니가 아니다.
무덤에서 그랬으면, 바로 학교 부근으로 바로 가야지..
그런 뜻이 아니라 아이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
'인간은 유한하다, 끝이 있다'를 알아라.
죽는다는 것을 대전제로 깔아 놓고, 시장의 각박하고 치열함을 보게하다.
제일 큰 것과 가장 현실적인 것을 몸에 익힌다음에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를 물으면서 할 수 있도록 한것이
맹모삼천의 교훈에 더 가깝지 않은가... 생각된다.
우리는 자기에 대한 물음, 관찰.. 성당에서는 성찰(省察)..
우리는 매일 미사때 마다 성찰...자신을 살핀다.
살핀다..그러면 자기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카지노에 없는 세 가지를 거꾸로 해서 교훈을 끌어 낼 수 있다.
거울을 나는 가지고 있는가? -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있는가..
(내면과 행동거지들을 한 번씩 체크하고 있는가)
작은 구멍가게도 결산을 한다, 벌때도 꿀때도 있다.
왜 못 벌었는지, 왜 손해가 났는지 또 어떻게 나누고 재투자 할 것인지를 맞춰본다.
이런 것도 다 성찰이다. 일기, 가계부를 쓴다.
우리는 뒷모습을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각자의 거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시계.. 시간을 보는 시계가 아닌 마음의 시계, 하늘의 시계
나는 "천주교 신자는 시계를 두개 갖고 있어야 된다.'
영혼의 시계..하느님의 시계,
누가 그랬다, '하바드대 졸업장보다 독서하는 습관이 더 중요하다'고
습관은 참 중요한 것이다.
삼등은 괜찮지만 삼류는 안된다.
한 인간이 자기 마음 속에, 혹은 영적으로 거울과 시계와 창문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육적인, 영적인 상태가 어떻게 되겠는가..
.. 누구인가를 부를 수 있다, 부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많은 관계 속에서
이즈러지고 배반당하고, 실패하고 좋았던 모든 관계를
한 번씩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복합체(Microcosmos),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다.
우주와 인간이라는 작은 우주.. 그 안의 내용들을 보면
인간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완전히 대칭이 되어 있다.
우주가 점점 확장되어 가듯이 우리도 확장되어가야 조화와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우리 내면이 그에 따라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 내 존재를 중심으로 하는 어떤 기류, 환경들을 모르고 있다면 나는...
우리는 물질적(物性)이다
감각적 (動,植物)이다.
정신적, 이성적(理性)이다.
영성적(靈性)이다. 그래서 생명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을수록
삶이 깊어지고 아름답고 넓어지고 평온해 진다.
생명은살아있는 목숨(날生 + 목숨命)이기도 하지만
살라는 명령(命 : 명령할 명)이기도 하다.
인간은 무엇인가.. 아직 거기에 대한 명쾌한 답이 없다.
세상에는 없는게 많다, 해답이 없고 정답이 없고 비밀이 없고 공짜가 없다.
생명이 엄청난 창조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생명이 일을 맡아야 한다.
심부름 맡은 목숨(使命)으로 태어나는 인간, 최고의 과정이라고 이야기 했다.
스위스 사상가 00는 한 인간(자아)이 무엇때문에 태어나서 무엇때문에 갈 것인지 발견하는
사명적 자아의 탄생을 최고의 탄생으로 말했다.
여러분은 그냥 툭 던져진 존재인가? 하늘로부터 어떤 심부름을 맡은 존재인가..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심부름을 받고 이땅에 태어났다.
그 심부름은 무엇인가.. 그 물음이 바로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생명을 지명(知命) · 애명(愛命)· 수명(修命)이렇게 관리한 생명을
다른 뭇 생명에게 헌명(獻命)해야 한다.
그것을 예수님은 이웃사랑.. 불교에서는 보시(報施), 공자께서는 인(仁)
..중학교 도덕시간 같은가.. 질문~가장 중요한 열 다섯자가 있다.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할까 어떻게 살까'
어떤 인간도 이 문제를 벗어날 수가 없다.
내가 제일 중요하지만 나 혼자 살 수는 없다.
너를, 이웃을 배우자를 친구를 원수를 만나야 한다.
그다음 '무엇을 하며'는 직업이다.
'어떻게 살까'는 삶의 가치관, 생명관, 사생관, 종교관..
그다음 獻命.. 어디에 바칠까?
그런데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선택하고 만나고.. 나는 어떤 사람과 살고 어떤 직업..
산다는 것은 어차피 선택하는 것이다.
쟝폴 샤르트르는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의 C(Choice)이다.'라고 했다.
- 인생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 선택이다 -
사랑의 기로에 서서 ♬♪..
이런 노래가 있지만 우리는 늘 선택해야 한다.
피조물 중에서 인간만이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까?
Choice & Encounter?
선택에는 가벼운 선택과 (양말을 수건, 신발을 사는 일상사에서 하는 선택)
내가 다른 나를 만들어 가는 무거운 선택 (결혼, 직업, 종교(인생관))이 있다.
결혼.. 너무 힘들어서 인생의 무덤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 무덤을 부활 시켜야하는 것은 나+나=우리가 된 그 당사자들이다.
후회할 거라면 그렇게 살지 말고, 그렇게 살 거라면 후회하지 마라.
- 무라카미 하루키 -
그렇지만 어차피 인생은 후회한다. 그러나
덜 후회하도록 살아야 될것이다. 그 기본이 지혜로움에 가깝다.
인생은 관계다, 관계는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幸, 不行은 만남을 통해 결정된다.
부모님, 어떤 선생님, 어떤 선배, 어떤 이웃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삶이 굴절이 일어난다.
실존적 만남에 혈연, 지연, 학연, 가족, 동료, 선후배, 은인이 있다.
여러분은 한 명, 더 가까운 만남을 하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아주 엄청난...
육과 영을 아우르는 삶과 피안을 다 합하는 그런 한 분을 잘 알고 있다.
좀 많은 사람을 만난다..하는 사람들도 대략 30여 명 정도.
휴대폰에 그렇게 연락처가 많아도 만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본다.
살아있는 사람은 그럼에도 늘 선택하고 만나야 한다.
선택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어느 경영학 교수가 수업 첫 시간에 커다란 항아리를 들고 왔다.
그 무거운 항아리...거기에서 자갈, 큰돌, 모래, 물이 쏟았다.
새내기 경영학 학생들에게 누가 나와서 다시 항아리에 넣어보라고 하다.
그냥 아무렇게나 넣는다면 다 들어가지 않는다.
제일 무겁고 큰 것, 큰 자갈, 작은 자갈, 콩자갈, 마지막으로 모래, 물을 넣어야 한다.
그래야 다 들어 간다, 이것을 우선순위라 한다.
몸이 아픈 남자분.. 마누라가 잠시 없어도 불안해 한다.
그런데 마눌이 주일에 "미사 다녀 올게"하고 나간다.
남자분이 불안해서 마눌을 죽이고 싶더랍니다.
이거 사투리로 '야마리 없는 짓'아닌가, 그 죽어가는,
정서가 불안한 신랑을 두고 성당 다녀와야 하느님 사랑하는 것인가..
그건 아니라고 본다.
하느님 사랑.. 필요없다,
이웃 사랑 안하고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순서의 문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식은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 밖에 없다.
성당가서 헌금 많이 한다고 하느님 사랑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선 순위를 가리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과 인간.. 완전한 개체이다.
하느님을 품고 있는 자아가 한 인간이다.
도로에 주황색 실선, 중앙선이 있다, 이것을 넘으면 큰 과실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그것이 '경계존중의 법칙'이라 한다.
우리는 너무 친해서 그 사람 마음에 들락거리고
들었다 놨다 마음대로 한다... 경계를, 중앙선을 마음대로 무시한다.
그거 안돼요, 그와 나는 동일체가 아니다. 그래서
경계존중의 법칙을 지켜야 한다.
상호 존중.. 이런 것도 선택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내 선택은 나에게 중요하고 그의 선택은 그에게 중요한 것이다.
성바울로 성당에 있을때이다, 앞산에 올라 가면 커다란 간판을 세워놨다.
한글로 한 자씩 쓴 입간판인데, '심 조 불 산'은 호 보 연 자'라
- 산불조심 자연보호- 를 거꾸로 읽다.
서양에서는 respect...자연 존중...그게 맞는 것 같으다.
언제 자연이 보호를 요청했나?
건드리지만 않으면 되었지, 자기네들끼리 가장 완벽하게
하느님 뜻에 맞게 살고 있는 자연.. 보호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모든 생명,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에게 우리는 존중함을 키워야 한다.
십자가 고상...예수님 목이 약간 우측으로 있다. 왜 일까?
예수님이 갈바리아 산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을때, 양측에 강도가 있었다.
그 힘든 구원의 대업 클라이막스에 옆에 있는 강도가 예수님에게 비아냥 거린다.
"흥,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님이 이를 쳐다보다가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쪽에 있는 강도는
"예수님, 당신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저눔과 이눔은 정말
나쁜짓을 많이 해서 죽어 마땅하지만 당신은 정말 죄 없으신 의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밤, 나와 함께 천국에 들것이다."
- 신자들 하하 -
무시하면 돌리고 존중하면 구원받는다.
그래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무엇인가.. 바보다.
성당 공동체에서 좋지 않은 소리.. 그것이 모두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
아니면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과 컴플렉스 때문이다.
그 관계를 얼마나 부드럽게하느냐에 따라서 그 레지오나 단체는
보람과 기쁨과 하느님의 영광을...
레지오 단원의 목적인 자기 성화를 위해서, 둘째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가 거룩해져서 하느님에게 나아가리라.. 자기 성화만 생각하면 안된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자기 성화는 저절로 이루어 진다.
너희는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여라, 나머지는 덤으로 온다.
이것은 1+1이 아니다, 본질인 하나만.. 나머지는 다 .. 이것이
복음 말씀의 핵심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어쨌든 우리는 세 가지를 예외 없이 선택하여야 한다.
나.. 혼자 살 수 없다, 다른 나가 필요하다. 그것이 너
나없이 너 없고 너 없이 나도 없는 존재다.
혼자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함께와 홀로는 다르다.
先, 後는 매우 중요하다.
1. 부족, 불완전해도 선택하라.
2. 우선 순위를 정해라.
3. 경계존중의 법칙(동일입장)
4. 상호 존중
나는 주체
동반자, 직업, 인생관
이것을 넉자로 표현하면 나 - 너 - 일 - 님
人間(인간)은 서로 기대어 사는 존재라고 한다.
명절.. 좋았던 집도 있었겠지만, 좋지 않은 집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신부님 강론 중에...
둘째 며느리가 홀로 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명절이니 맏며느리가 갈비찜을 한통 해 가다.
시어머니가 "요새 그 갈비 누가 먹노"
맏며느리가 속이 상하다.
정구지 전을 부쳐서 밥상에 놓았더니 시어머니가
"이거 부추전이가, 달걀전이가'
- 신자들 하하 -
밥상을 차리는데 많은 반찬..상이 협소해서 좀 작은 쟁반에 담았다.
"이게 뭐꼬, 다 흘리게 그릇 큰 거 없냐, 속 좁게 요런데 놨노"
다시는 시집에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명절 증후군 안 생길 수가 없다.
신랑한테 위로 받고 싶은 마음에
"아이고 어무이가 반찬이 맘에 안드는 것같으다.
내보고 생떼를 쓰고 트집을 잡는다. 당신이 좀 어찌 해 보소"
- 니 그리 속 좁나, 할마이 그카는데 그것도 못 받아 주나 -
명절에 집안 식구끼리 안 좋은 이유가 있다.
이것을 '선생님, 학생 게임'이라 한다.
모두 선생하려 한다. 갈비 件에서 얼른 내가 학생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선생역할 시어머니가 너그러워진다.
그렇게 되면 그 뒤에 부추전, 작은 접시 件은 안 나온다.
그래도 선생 하려는가..
예수님께서 "너희는 스승, 아버지, 어른소리 듣지 마라.
우리는 다 형제들이다, 아버지는 하느님이신 그분 한 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매번 선생하려 한다. 내가 제일 잘 낫다.
그러다 보면 인간의 관계는 서로 상처만 남는다.
모든 불행은 오지랖에서 나온다.
돌이켜 생각하거나 앞질러 생각하는 자들이 불행을 많이 생산해 낸다.
사람을 미워하지 마라, 홀로 고독한 밤을 지내 본 사람은
한 사람의 체온, 그 온기가 얼마나 따뜻한지 느낀다.
미워하는 사람은 미워서 미워한다기 보다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그렇다.
사랑하는 법은 선생님이 되지 않는 것..기꺼이
학생이 되어 학생으로서 아주 맑고 밝게
선생님에게 질문과 대화를 통해서 주고 받아야 한다.
말할 때, 첫 어두가 "내가 이말은 안하려 했는데.." 이 말이 나오면
- 신자들 하하 -
안 하려고 생각했으면 안 해야 된다, 왜 하나.
그 말은 상처를 준다, 왜? 진실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 말을 안해도 된다, 상대방은 이미 알고 미안해 하고 있다.
더 잘하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자신을 높이려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면 높아진다.
'높'자를 거꾸로 뒤집으면 '푹'이 된다.
순교자 성월.. 이웃을 높이기 위해서 기꺼이 학생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을 저는 하얀 순교라고 생각한다.
인간 관계에서 너가 없으면 나도 없다.
한 인간이 얼마나 따스하고 좋은 분인지를 고백했으면 좋겠다.
주님, 저는 저 인간이 싫고 저 인간은 좋습니다.
좋은 눔은 날 안 좋아하고 싫은 눔은 날 좋아합니다.
어찌된 일이 옵니까? 하오니 주님, 제 안에 있는 성령께서
저와 저이 안에 있는 성령께서 만나게 해 주십시오.
저는 기꺼이 학생이 되겠습니다. 아멘.
이런 만남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대원칙은 전 종교와 전 도덕이 다 똑 같다. 이것을 황금률이라 한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 7,12. 루카 6,31)
己所不欲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
선택 2
나의 '것'의 관계
청빈(淸貧), 필요와 필수의 구분
수도자는 순결(순수함, 남녀간이라면 정절, 나를 위해서 사랑을 주지 않는 것),
순명, 청빈(나만을 위해서 갖지 않는 것)을 지킨다.
필요한 것과 필수적인 것을 구분해야 한다.
절대 절명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절제, 자제하고 아껴야 살맛이 난다.
필요하다고 다 산다면 난지도..쓰레기 더미에 산다.
나쁜 것이 아니라도, 해도 되는 것이라도 절제력을 키우지 않으면
유혹, 악이 왔을때 'no'할 수 있는 근력이 없어 진다.
그래서 희생, 보속이라는 가치가 엄청 중요하다.
나와 너 & '것'은 과연 스스로 존재한 것일까?
나 - 님의 관계는 모든 관계의 기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 너, 것.. 다 중요하지만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여기에 무엇이 하나 덧붙인다면 다 의미를 가진다.
이름을 불러 꽃이 되는 것처럼 그것은 '님'이다.
님을 부정하는 것은 너와 나를 다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님을 가지고 계시는가..부처님, 스님, 신부님..
바로 직통으로 하느님으로 올라가라.
그 중간에 중개소 비슷하게 성모님, 거기다 성인 성녀님도 ...
그래서 '님'은 중요하다.
나와 너의 관계는 윤리적 관계
존중이 필수적이고 거기 따르는 은총이 의존이다.
나와 것...경제적 관계라 하고 소유와 이용, 편리하게 쓸 수가 있다.
그런데 가끔은 소유만 하고 이용하지 않고 가는 사람..어떻게 봐야 할까.
필요하고 필수에 대한 지혜가 왜 필요한지 느끼시기 바란다.
나와 님은 종교적 관계로 섬기고 거기에 의탁하는 관계
나와 님의 관계는 모든 관계의 기준이다.
님이 없으면 인간은 하루도 못 산다.
아기 때는 엄마가 나의 님이었다. 유치원생은 유치원 선생님,
초등학교 가니 친구가 님이 되었다가 사춘기때는 연예인이 님.
대학생이 되면서 절친, 남친이 님이었다가 약혼하면 약혼자..
이렇게 바뀐다. 아기 낳으면 아기가 님이 되었다가
직장 - 승진이, 승급, 돈이 님이 되었다가 왔다갔다 하다가
그런 님을 다 보내고 점하나 찍어서 남 만든 담에 만난 님이 하느님이다.
- 신자들 하하 -
신앙.. 사람마다 리듬이 있다, 그것 없으면 살 수가 없다.
나는 종교가 없다는 사람은 '나는 신장없이 태어났다'는 것과 같다.
공기, 햇볕, 바람, 태풍.. 다 누구 것인가?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임자가 있다, 임자 없는 것은 없다.
내것, 네것, 남의 것, 우리 것.. 다 임자가 있다.
우리가 뭘 믿고 사는가, 그 믿음이 깨지면 그때부터 불안해 진다.
누구든 마음 속에 성당, 법당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돈과 명예와 욕심을 담을 수도 있고, 사랑과 헌신을 담을 수도 있겠다.
누구나 종교인인데, 그 구분이 있다, 좀 다르다.
신념과 믿음을 구분해야 한다.
신념의 고향 - 사람, 신념은 자기 확신에 불과하고
신앙의 고향은 하느님의 약속이다.
교회는 신념의 사람이 신앙의 사람 되는 곳이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내가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념은 사람, 자기 개인의 생각 자기 확신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신념으로 가득 차서 그 신념으로 살아 간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약속이 근간이기 때문에 섬김이라는 계약관계가 있다.
'나는 너의 아버지다. 아버지로 관계를 맺고 산다면
아버지의 것을 너에게 다 주겠다.
이는 내 피다, 받아 먹어라. 너의 죄를 하얗게 다 삭혀 버리는 피다.
이는 내 몸이다...
교회는 인간적인 신념의 사람이 들어가서 신앙의 사고로 변화되는 곳이다.
신념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신앙으로 바뀌어 진다면 그것이 복음화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땅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그 출발점이 바로 신앙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자신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에게 스스로 구속됨으로서
참다운 자유를 누릴수가 있다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구속이다.
그것을 천주교인들은 다 안다. 신앙생활하다보면 온 몸으로 안다.
안 보이는 하느님이 모든 인간, 피조물계를 좌우한다는 이 엄청난
현존 방식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안해 주신 것 없이 나와 늘 동행하시며 나보다 한발 더 앞서서
애타게 끌어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그분..
그분을 느낄때, 우리는 이땅에서 하느님 나라의 특별한 현존을 느낄 수 있다.
동백꽃은 나무에서 피고 땅에 떨어져 또 한 번 핀다.
십자가의 신비 안에는 이런 역설이 있다.
바빠서, 못 물어 보셨다면 이제라도
'나는 누구인지, 인간은 무엇인지,하느님은 뉘신지 물어보라. '
'내 힘들다'를 뒤집으면 '다들 힘내'가 된다.
누구나 살면서 고통이 없을 수는 없다.
누구나 저마다의 십자가가 있다. 그런데 자신에게 올 십자가는 반드시 온다.
총합.. 인생의 총합, 고통의 총합, 기쁨의 총합, 보람의 총합..
어떤 사람은 왕창온다. 골고루 오면 복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에 괄호 열고
일용할 고통도 섞어서 주신다.
고통없는 부활이 있다고요? 그것을 삶이라고..
공짜가 있다고요? 없다, 있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이 그 값이 있다.
내가 내 삶을 사는, 이땅에서 하늘나라를 사는 그 값은 십자가.
엄마이기 때문에, 아빠이기 때문에, 나이가 많기 때문에,
학생이기 때문에, 선생님이기 때문에 다 저마다의 십자가가 있다.
그 십자가는 어느 인간에게도 없어지지 않는다.
내것이라 받아 들이면 그 십자가가 바로 은총으로 번진다.
별을 보려면 어둠이 꼭 필요하듯이 십자가, 아픔, 고통.. 정말 중요한 것이다.
고통은 아무도 원하지 않지만 내게 고통이 기꺼이 오셨다.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저에게 오셨다.
십자가를 지고 갈때, 엄마가 너무나 사랑스런 아기를 안듯이
그 고통을 안고 가라. 고통을 함부로 낭비하지 마시라.
나토(No Action Talking Only)족 아는가.
행동은 하지않고 말만 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운 자긍심과 표현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
자꾸 인간적으로 희석이 되고 있다. 그것이 지표로 나타난다.
전례, 인사, 말 다 중요하다. 미사가 형식적이면 그 사람 삶도 형식적이 된다.
이 미사가 내 인생의 마지막 미사라고 생각하라.
마지막 미사..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최후 마지막이 되는 미사
그 미사가, 미사다운 미사가 되지 않겠나 싶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실때는 꼭 약간.. 그런 보자기에 사서 주신다.
그래서 포기한 사람들.. 그렇지만 아까운줄 모르고 산다.
인생을 자아 실력의 장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스스로 속고 사는 삶이다.
매번 님을 바꿔가며 살아 봤지만 정말 나와 영원한 동반자,
영원한 님은 누구신지 한 번 물어보는 그런 시간이 되면 좋겠다.
대부분 내 인생 내가 책임지고 내가 산다는 사람,
내 자아의 완성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거짓말에 속고 있다.
윤리는 착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고 종교는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그냥 착하게 사는 것에 '님'은 필요없다.
너희 아버지가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여라..처럼
목표를 위에 두라. 서울대학은 못가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는 가야지.
자신의 노력으로 현세에 도달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내세에 완성..
이것이 윤리와 종교의 차이점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으로 사람들이 다투는 것을 보았다.
다른 세계..출발점이 다르다.
두 다툼은 상어와 호랑이의 싸움이다.
육지에서는 호랑이, 바다에서는 상어인데
서로가 육지에, 또는 바다에 갈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싸우는가.
쓸데 없는 논쟁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과학과 종교의 공조 필요)
아인슈타인 - 종교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과학자들이 연구실에서 실험을 한다면
인문학자, 철학자들은 머릿 속에서 종교인들은 마음 속에서 실험을 한다.
이것을 '사고실험'이라 한다.
레지오의 무기 : 기도, 믿음, 사랑, 봉사
기도 없으면 믿음이 없고 믿음없으면 사랑이 없다.
사랑이 없으면 절대 봉사 못한다.
인생은 천국을 향한 거룩한 여행이다.
Without prayer, no faith.
Without faith, no love.
Without love, no service.
Without service, no joy and peace
- 마더 데레사 -
맺음말
(기도) 하느님께 겸손하게
(사랑, 봉사) 이웃에게 다정하게
(성찰) 자신에게 정의롭게 살아갑시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마침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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