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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크메르의 세계'가 기획한 <21세기 대중음악 사전>을 구성하는 항목으로서,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해당 항목을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후 동영상 등을 추가하여 편집한 것이다. |
[인물] 밥 말리 : 자메이카 레개 음악의 아이콘 (상)
로버트 네스타 "밥" 말리(Robert Nesta "Bob" Marley: 1945.02.06.~1981.05.11.)는 자메이카(Jamaica: 자마이카) '레개'(reggae, 레게) 장르의 가수, 작곡가, 뮤지션, 기타리스트로서 국제적인 명성과 찬사를 받았던 인물이다.(주1)(주2) 그는 1963년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Bob Marley and the Wailers) 밴드를 시작으로 독특한 작곡과 보컬 스타일을 구축했고, 이러한 스타일은 나중에 전세계 대중들의 심금을 울렸다. '더 웨일러스'의 가장 초창기 음반 중 일부는 전설적인 프로듀서 리 "스크래치" 페리(Lee "Scratch" Perry: 1936년생)와 작업을 거쳐 발표된 것이다.(주3)
1974년에 '더 웨일러스'는 해체됐고, 밥 말리는 1976년에 영국으로 이주하여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새로운 경력을 추구했다. 영국 활동의 정점은 1977년에 발매된 <엑소더스>(Exodus)였다. 이 앨범은 그에게 서계적인 명성을 안겨다주었고, 75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 그에게 '모든 시기에 걸친 세계 베스트셀링 아티스트'(world's best-selling artists of all time)라는 지위를 안겨주었다.(주5)(주6) <엑소더스> 앨범은 영국 앨범차트에서 연속으로 56주 동안 순위 안에 머물렀다. 이 앨범에는 영국 차트 히트 싱글들인 <엑소더스>(Exodus), <웨이팅 인 베인>(Waiting in Vain), <잼밍>(Jamming), <원 러브>(One Love) 등 4곡도 수록돼 있었다. 1978년에는 <카야>(Kaya: [역주] 라스타파리 종교인들이 사용하는 '대마초'의 별칭) 앨범을 출시했는데, 여기에는 <이즈 디스 러브>(Is This Love)와 <새티스파이 마이 소울>(Satisfy My Soul) 같은 히트곡들이 수록돼 있었다.
밥 말리는 1977년 말단 흑색점 흑색종 진단을 받았고, 1981년 5월 11일 미국 마이애미에서 향년 36세로 사망했다.
그는 '라스타파리 종교 운동'(Rastafari movement: 라스타파라이)의 종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음악에도 영적 요소로서 라스타파리 종교 이념을 접목시켰다.(주7) 그는 모든 시기에 걸쳐 가장 영향력 있는 뮤지션 중 한명으로 여겨지고 있고, '레게' 음악을 전세계적으로 대중화시킨 공로를 인정받고 있으며, 자메이카 문화 및 정체성의 상징으로도 여겨지고 있다. 밥 말리는 지구적 상징 중 하나로도 발전됐는데, 그러한 상징화는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주1: Jason Toynbee (8 May 2013). Bob Marley: Herald of a Postcolonial World. John Wiley & Sons. pp. 1969– .
주2: Lou Gooden (2003). Reggae Heritage: Jamaica's Music History, Culture & Politic. AuthorHouse. pp. 293– .
주3: Bunny Lee Interview at Reggae Vibes. Interviewer: Peter I.
주4: Aston "Family Man" Barrett Interview at Pure Guitar. Interviewer: Jas Obrecht. 2013-2-19. Archived 2013-12-6 at the Wayback Machine.
주5: Mcateer, Amberly (2014-10-15). "Deadly profitable: The 13 highest-earning dead celebrities". The Globe and Mail.
주6: Nielsen Business Media, Inc. (2007-10-6). Billboard. Nielsen Business Media, Inc. pp. 42– .
주7: Jon Masouri (2009-11-11). Wailing Blues – The Story of Bob Marley's Wailers. Music Sales Group. pp. 242– .
1. 초년의 생애
밥 말리는 1945년 2월 6일 자메이카의 세인트 앤 관구(Saint Ann Parish)에 위치한 마을 나인 마일(Nine Mile)에서 외조부의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노벌 싱클레어 말리(Norval Sinclair Marley: 1885~1955)였고, 어머니는 세델라 브루커(Cedella Booker: 1926~2008)였다.(주8) 노벌 싱클레어 말리는 원래 영국 세섹스(Sussex) 출신의 백인 자메이카인(white Jamaican)으로서, 그 가문은 자신들이 원래 시리아 유태인(Syrian Jewish: [역주] 오랜 기간 시리아 지역에 살아온 유태인 및 해외의 그 후손들)이라고 주장했다.(주9)(주10)(주11) 노벌은 자신이 영국 해병대(Royal Marines) 대위 출신이라고 주장했으며,(주12) 18세였던 세델라와 결혼할 당시엔 농장 감독으로 일하고 있었다.(주12)(주13) 밥 말리의 본명은 '네스타 로버트 말리'(Nesta Robert Marley)였지만, 자메이카의 여권 발급 공무원이 그의 퍼스트 네임과 미들 네임을 바꿔서 기재하면서 '로버트 네스타 말리'가 됐다.(주14)(주15) 노벌은 아내 세델라와 자식들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했지만, 그가 집을 떠나 있는 경우가 잦아서 가족과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밥 말리는 세인트 앤에서 통학이 가능한 거리에 있던 '스텝니 초중학교'(Stepney Primary and Junior High School)를 다녔다.(주16)(주17) 1955년, 밥 말리가 10세가 되던 해, 아버지 노벌 말리가 70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주18)
훗날 '버니 웨일러'(Bunny Wailer: 1947년생)란 예명으로 유명해지는 네빌 리빙스턴(Neville Livingston)은 나인 마일의 어린 시절부터 밥 말리의 죽마고우였다. 두 사람은 '스텝니 초중등학교'를 다니면서 음악을 시작했다.(주19) 밥 말리는 12세가 되던 해 어머니와 함께 나인 마일을 떠나 수도 킹스턴(Kingston)의 도심지역인 트렌치타운(Trench Town 혹은 Trenchtown)으로 이주했다. 이후 밥 말리의 어머니 세델라 브루커와 버니 웨일러의 아버지 타데우스 리빙스턴(Thadeus Livingston) 사이에서 '펄'(Pearl: 진주)이란 이름의 딸아이가 한명 태어났는데, 이로써 펄은 밥 말리와 버니 웨일러 모두의 이복 누이가 되었다.
트렌치타운에서 밥 말리와 버니 웨일러는 같은 집에 살게 됐고, 두 사람의 음악적 탐험도 깊이를 더해갔다. 그들은 자메이카까지도 전파가 당도하던 미국의 라디오 방송들을 들으면서 미국의 최신 미국 '리듬 앤 블루스'(알앤비, R&B, RnB) 음악과, 당시 새롭게 부상하던 '스카'(ska) 음악 등을 섭렵했다.(주20) 밥 말리에게 트렌치타운으로의 이주는 행운이었음이 증명됐고, 얼마 안 있어 버니 웨일러, 피터 토시(Peter Tosh: 1944~1987), 비벌리 켈소(Beverley Kelso: 1948년생), 주니어 브레이스웨이트(Junior Braithwaite: 1949~1999)와 더불어 보컬 그룹을 만들었다.
당시 자메이카의 유명 듀오 '힉스 앤 윌슨'(Higgs and Wilson)의 멤버 조 힉스(Joe Higgs: 1940~1999)는 트렌치타운 3번가에 살고 있었고, 그의 파트너 로이 윌슨(Roy Wilson)은 주니어 브레이스웨이트의 할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힉스 앤 윌슨'은 2번가와 3번가 사이의 주택가 뒤에서 리허설을 하곤 했다. 밥 말리(2번가 거주)와 주니어 브레이스웨이트가 '힉스 앤 윌슨'의 주변으로 모여든 것은 그러한 리허설 활동이 시작되고 오랜 기간 뒤였다.(주21) 말리나 여타 멤버들은 당시 어떤 악기도 연주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연주보다는 보컬 하모니 그룹이 되는 데 더욱 관심이 있었다. 힉스는 그들이 보컬 하모니를 발전시키는 일을 도와주는 데 즐거워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힉스가 밥 말리에게 기타 연주법을 가르쳐줬다는 것이다. 훗날 밥 말리가 '레게' 역사에서 최고의 판매고를 올린 노래들을 만들 수 있던 기반에는 힉스에게서 배운 기타 연주가 있었다.(주22)(주23)
주8: Moskowitz, David Vlado (2007). Bob Marley: A Biography. Greenwood Publishing Group. pp. 13– .
주9: Observer Reporter, "Ziggy Marley to adopt Judaism?", The Jamaica Observer, 2006-4-13: "더욱 흥미로운 점은 [밥 말리의 장남] 지기(Ziggy)의 할아버지 노벌이 '시리아 유태인' 혈통이란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선 노벌 말리의 동생인 노엘 말리(Noel Marley)의 딸 헤더 말리(Heather Marley)도 확인했다."
주10: Jean-Pierre Hombach, Bob Marley: The Father of Music, Lulu, 2012 (ISBN 9781471620454), p. 52: "노벌의 조카 마이클 조지 말리(Michael George Marley) 같은 밥 말리의 친척들은 자신들이 '시리아 유태인' 후손이라고 진술했다. 마이클 조지 말리는 '그 점을 어머니, 할머니, 삼촌에게서 들었다. 말리가(家)는 중동에서 영국으로 이민온 후, 다시 자메이카로 이민간 '시리아 유태인이다'라고 말했다."
주11: The Real Revolutionary, by Rob Kenner, Vibe, May 2006, Vol. 14, No. 5 (Vibe Media Group ISSN 1070-4701), p. 118.
주12: Bob Marley: the regret that haunted his life, Tim Adams, The Observer, 2012-4-8.
주13: Moskowitz 2007, p. 2.
주14: Moskowitz 2007, p. 9.
주15: 스티븐 데이비스(Stephen Davis)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 "그의 이름은 여권발급 공무원의 제안에 따라 '네스타 로버트 말리'에서 '로버트 네스타 말리'로 바뀌었다. 그 공무원은 '네스타'라는 이름이 여자 이름 같이 들린다는 점을 가르쳐주었다."
주16: Stepney Primary and Junior High School Bob Marley Foundation. 2009-9-16.
주17: Bob Marley (2012-1-31). Listen to Bob Marley: The Man, the Music, the Revolution. Open Road Media. pp. 65– .
주18: Moskowitz 2007, p. 4.
주19: The Last Wailer – Bunny Wailer interview at GQ. Interviewer: John Jeremiah Sullivan. Published January 2011.
주20: Bob Marley’s Early Years: From Nine Miles To London Jas Obrecht Music Archive.
주21: Junior Braithwaite interview at iration. 1985-5-5. Interviewer: Roger Steffens.
주22: Chuck Foster, "Joe Higgs – No Man Could Stop The Source".
주23: Jon Pareles, "Joe Higgs, 59, Reggae Performer; Taught a Generation of Singers",New York Times, 1999-12-22.
2. 음악활동
2.1. 초창기 (1962~1972)
1962년 2월, 밥 말리는 '페더럴 스튜디오'(Federal Studio)에서 프로듀서 레슬리 콩(Leslie Kong: 1933~1971)과의 작업을 통해 <저지 낫>(Judge Not), <원 컵 업 커피>(One Cup of Coffee), <두 유 스틸 러브 미>(Do You Still Love Me?), <테러>(Terror) 등 4곡을 녹음했다.(주24) 그 중 3곡은 레슬리 콩 소유의 '비벌리즈'(Beverley's) 레이블을 통해 발매됐고, <원 컵 업 커피>는 '바비 마르텔'(Bobby Martell)이란 예명으로 발표했다.(주25)
1963년 밥 말리, 버니 웨일러, 피터 토시, 주니어 브레이스웨이트, 비벌리 켈소, 체리 스미스(Cherry Smith: 1943~2008)는 '더 틴에이저스'(The Teenagers)라는 그룹으로 불렸다. 이들은 이후 그룹명을 '더 웨일링 루드보이스'(The Wailing Rudeboys)로 바꿨다가, 다시 '더 웨일링 웨일러스'(The Wailing Wailers)로 바꿨다. 바로 이 시점에서 레코딩 프로듀서 클레멘트 '콕슨' 도드(Clement 'Coxsone' Dodd: 1932~2004)가 이들을 발굴했고, 그룹명도 '더 웨일러스'(The Wailers)로 최종적으로 바뀌었다. '더 웨일러스'의 싱글 <시머 다운>(Simmer Down)은 콕슨 도드의 '스튜디오 원'(Studio One) 레이블을 통해 발매됐고, 1964년 2월 자메이카 차트 정상을 차지하면서 7만장이 팔려나갔다.(주26) '더 웨일러스'는 이후 '스튜디오 원'에서 정례적인 작업을 하면서, 기타리스트 어니스트 랭글린(Ernest Ranglin: 1932년생, <잇 허츠 투 비 얼론>[It Hurts To Be Alone]의 편곡자),(주27) 키보디스트 재키 미투(Jackie Mittoo: 1948~1990), 섹소폰 주자 롤랜드 알폰소(Roland Alphonso: 1931~1998) 같은 자메이카의 유명 뮤지션들과 함께 녹음을 했다. 1966년 무렵 브레이스웨이트, 켈소, 스미스가 '더 웨일러스'를 탈퇴하면서, 밥 말리, 버니 웨일러, 피터 토시 등 핵심 3인방만이 남게 됐다.(주28) (역주: 콕슨 도드는 '웨일러스'에게 급료를 지불하지 않아 악명을 얻었고, 결국 이 밴드가 '스튜디오 원'과 결별하는 중요한 이유가 됐다.)
(동영상) '더 웨일러스'의 <시머 다운>(Simmer Down).
1966년, 밥 말리는 리타 앤더슨(Rita Anderson, 리타 말리[Rita Marley]: 1946년생)과 결혼한 후, 미국 델라웨어 주(Delaware), 윌밍턴(Wilmington)에 거주하던 어머니의 집 근처에서 잠시 동안 살았다. 그는 이곳에서 '도날드 말리'(Donald Marley)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듀퐁'(DuPont) 사 연구실 조수 및 '크라이슬러'(Chrysler) 자동차공장의 조립공으로 일했다.(주29)
밥 말리는 가톨릭 교도로 성장했지만, 1960년대에 모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면서 '라스타파리 종교 운동'(Rastafari movement: 라스타파라이)에 관심을 갖게 됐다.(주30) 그는 자메이카로 귀국한 후 공식적으로 '라스타파리 운동'에 귀의했고, [이 종교의 복식 관행에 따라] 드레드락(dreadlocks: 레게 머리) 헤어스타일도 기르기 시작했다. '라스타파리 운동'이 이발을 금지한 것은 <성서>에 등장하는 삼손(Samson)의 행적에 근거한 것이다. <성서> 속의 삼손은 나실인(Nazirite, 나지르인)이었기 때문에, 나실인의 특정한 종교적 맹세들을 지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헤어스타일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는데, <민수기>(Book of Numbers, 民數記) 제6장 5절에는 머리카락의 영적 처리방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나실인으로 지내기로 서약한 기간에는 머리에 칼을 대어서는 안 된다. 서약한 기간이 다 찰 때까지 거룩하게 지내면서, 머리카락이 자라더라도 그대로 놔둬야만 한다."
밥 말리의 팀은 콕슨 도드와 돈 문제로 마찰을 빚은 후, 프로듀서 리 "스크래치" 페리(Lee "Scratch" Perry: 1936년생) 및 페리의 스튜디오 밴드와 함께 작업을 하기로 했다. 이 협력관계는 일년을 채 넘기지 못했지만, 많은 이들이 '더 웨일러스'의 최고 걸작으로 걸작이라고 여기는 음악을 녹음했다. 밥 말리와 페리는 저작권 문제를 두고 의견불일치를 보이다 갈라섰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친구로 남아 작업을 재개하게 된다.
(동영상) 리 "스크래치" 페리가 프로듀싱한 곡 <선 이즈 샤이닝>(Sun is Shining).
1968~1972년 사이에 밥 말리, 리타 말리, 피터 토시, 버니 웨일러는 '더 웨일러스'의 사운드를 상업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자메이카의 킹스턴 및 영국 런던을 오가면서 'JAD 레코드사'(JAD Records)를 통해 과거의 레코딩 트랙들을 재편집했다. 버니 웨일러는 훗날 다음과 같이 확언했다.
"그 노래들은 앨범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레코드 회사들에게 들려줄 목적으로 만든 데모 녹음들이었다."
1968년, 밥과 리타는 뉴욕 브롱크스(Bronx)에 있던 R&B 및 재즈(jazz) 장르의 유명 작곡가 지미 노먼(Jimmy Norman: 1937~2011)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노먼은 재즈 뮤지션 카이 윈딩(Kai Winding: 1922~1983)의 곡 <타임 이즈 온 마이 사이드>(Time Is On My Side)(1963년)의 확장된 가사를 작사했고('롤링 스톤즈'[The Rolling Stones]도 이 곡을 커버해서 발표했음), 쟈니 내쉬(Johnny Nash: 1940년생)와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1942~1970)에게도 작곡을 해준 인물이었다.(주31) 밥 말리는 지미 노먼 및 노먼의 동료 작곡가 알 피프럼(Al Pyfrom) 등과 3일 동안 잼 세션(jam session: [역주] 즉흥성이 강한 합주. 뮤지션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기회)을 가졌다. 그 결과는 24분 짜리 테입이었는데, 여기에는 밥 말리의 자작곡과 노먼-피프럼 작곡의 곡들이 들어 있었다. '레개' 관련 수집품 사학자 로저 스테펜스(Roger Steffens: 1942년생)에 따르면, 이 테입은 '레개'보다는 '팝'(pop)의 요소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점에서 희귀한 것이라고 하며, 그것은 밥 말리를 미국 차트에 올리기 위한 시도였다고 한다.(주31)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에 실린 기고문에 따르면, 밥 말리는 이 테입에서 각기 다른 사운드들을 실험했다고 한다. 가령 <스테이 위드 미>(Stay With Me)에서는 '두왑'(doo-wop) 스타일을 채택했고, <스플리시 퍼 마이 스플리시>(Splish for My Splash)에서는 "1960년대 아티스트들의 슬로우 러브 송 스타일"을 채택했다.(주31) 밥 말리는 아직도 자메이카 바깥에서는 무명의 아티스트인 상태였는데, 1972년에는 영국 런던 블룸즈베리(Bloomsbury)의 리지마운트 가든즈(Ridgmount Gardens)에 거주했다.(주32)
(동영상) <스플리시 퍼 마이 스플리시>(Splish for My Splash).
주24: Bob Marley Solo, 1962 Wailer – The Bob Marley Compendium.
주25: "The Beverley Label and Leslie Kong: Music Business". bobmarley.com. Archived from the original 2006-6-21.
주26: Nielsen Business Media, Inc. (1994-7-16). Billboard. Nielsen Business Media, Inc. pp. 92– .
주27: Ranglin Interview with Angus Taylor. (2011-2-11)
주28: "The Wailers 'Biography"". Vital Spot.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2-12-1.
주29: White, Timothy (1981-6-25). "Bob Marley: 1945–1981". Rolling Stone. Jann Wenner.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9-4-21.
주30: Moskowitz, David Vlado (2007). The Words and Music of Bob Marley. Westport, Connecticut: Greenwood Publishing, p. 16.
주31: McKinley, Jesse (2002-12-19). "Pre-reggae tape of Bob Marley is found and put on auction". The New York Times.
주32: Muir, Hugh (2006-10-27). "Blue plaque marks flats that put Marley on road to fame". The Guardian (UK).
2.2. '아일랜드 레코드사'로의 이적 (1972~1974)
1972년, 밥 말리는 런던에서 'CBS 레코드사'(CBS Records)와 계약을 체결하고, 미국의 소울 가수 쟈니 내쉬와 함께 영국 순회공연에 착수했다.(주33) '더 웨일러스'는 런던에 체류하면서 로드 매니저 브렌트 클라크(Brent Clarke)에게 크리스 블랙웰(Chris Blackwell: 1937년생)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블랙웰은 ["영국의 위대한 인디 레이블"이라 불리는] '아일랜드 레코드사'(Island Records)의 설립자였고, '더 웨일러스'가 콕슨 도드와 함께 출시했던 음반들의 저작권 일부를 영국 출시를 위해 확보해둔 상태였다. '더 웨일러스'는 영국에서 출시될 노래들의 로열티 문제를 논의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실제 만남에서는 새로운 앨범을 녹음하는 조건으로 4천 파운드의 선금을 지급한다는 제안으로 귀결됐다.(주34) 당시 '아일랜드 레코드사'에서는 '레개' 부문의 간판 스타였던 지미 클리프(Jimmy Cliff: 1948년생)가 회사를 떠난 직후였기 때문에, 블랙웰은 지미 클리프의 대체자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블랙웰은 밥 말리가 '락'(rock) 뮤직 팬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요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락 뮤직도 취급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정말로 저항적인 음악이다. 나는 락 뮤직의 요소가 자메이카 음악을 끝장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정말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를 지닌 누군가가 필요했다. 밥이 나타났을 때, 그는 정말로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주35)
'더 웨일러스'는 킹스턴에 있는 '해리 제이스'(Harry J's)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기 위해 귀국했고, 그 결과물이 <캐치 어 파이어>(Catch a Fire)(1973년) 앨범이었다.
기본적으로 8트랙([역주] 8번 더빙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당시로는 상당히 많은 트랙 수였음)으로 레코딩된 <캐치 더 파이어> 앨범은 '더 웨일러스'를 최첨단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최초의 '레개' 밴드로 만들어주었고, '락' 뮤직계 동료들에게도 동급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주35) 크리스 블랙웰은 "통상의 레개 리듬보다는 더욱 물흐르듯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을 만들길 원했고,(주36) 그에 따라 말리의 믹스 및 편곡을 변화시켰다. 밥 말리는 런던으로 건너가서 블랙웰이 자신들의 앨범에 새로 더빙해놓은 내용을 검토했는데, 이 사운드는 베이스를 무겁게 강조한 자메이카 스타일의 사운드를 보다 부드럽게 해놓은 것이었고, 최초 녹음된 노래들 중 2곡이 빠진 것이었다.(주35)
'더 웨일러스'가 '아일랜드 레코드사'에서 처음으로 취입한 앨범 <캐치 어 파이어>는 1973년 4월 전세계에 공개됐다. 이 앨범의 자켓은 마치 락 뮤직 레코드판처럼 독특한 형태의 지포 라이터(Zippo lighter)를 디자인한 형태였다. 이 앨범은 최초에 1만4천장만 팔리면서 밥 말리는 스타 대열에 오르지 못했지만, 평론가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주35)
(동영상) <캐치 어 파이어> 앨범(총 9곡). 피터 토시가 작곡한 2곡을 제외하면, 모두 밥 말리가 작곡한 것이다.
그 해 하반기에 이어서 나온 2번째 앨범은 <버닝>(Burnin')이었고, 수록곡 중에는 <아이 샷 더 셰리프>(I Shot the Sheriff)도 있었다.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1945년생)의 동료 기타리스트 조지 테리(George Terry: 1950년생)는 에릭이 이 앨범을 즐기길 바라면서 <캐치 어 파이어> 앨범을 에릭에게 갖다 주었다.(주37) 에릭 클랩튼은 이 앨범에 감명을 받았고, <아이 샷 더 셰리프> 커버 버전을 자신의 앨범에 수록했다. 에릭 클랩튼은 그보다 2년 전에 <레일라>(Layla)(1972년)를 통해 미국 시장에서 최초의 히트곡(빌보드 싱글차트 51위)을 만든 적이 있지만,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른 것은 <아이 샷 더 셰리프>를 통해서였다(1974-9-14).(주38) 자메이카인들은 <캐치 어 파이어>에 나타난 새로운 사운드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트렌치타운 사운드로 이뤄진 <버닝> 앨범은 자메이카의 레개 팬 및 락 뮤직 팬들 모두에서 인기를 얻었다.(주35)
(동영상) <버닝> 앨범.
(동영상) 에릭 클랩튼의 커버 버전 <아이 샷 더 셰리프>.
크리스 블랙웰은 이때 밥 말리에게 자메이카 킹스턴의 호프로드 56번가(56 Hope Road)에 위치한 레지던스와 회사 사옥을 선물로 사줬다(당시엔 '아일랜드 하우스'[Island House]라 불림). 이곳이 '터프 공'(Tuff Gong) 스튜디오가 되면서 밥 말리의 사무실 겸 자택이 됐다.(주35)
당시 '더 웨일러스'는 미국의 사이키델릭 소울 밴드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and the Family Stone)의 오프닝 밴드로서 미국 순회공연에서 17차례 무대에 서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4차례만 공연한 후에 '더 웨일러스'는 해고당했다. 그 이유는 오프닝 밴드가 그 사이 메인 밴드보다 더 유명해졌기 때문이었다.(주39)
'더 웨일러스'는 1974년에 해산했고, 핵심 멤버 3인은 각자 솔로 활동에 나섰다. '더 웨일러스' 해산의 이유에 관해서는 많은 추측들이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버니 웨일러, 피터 토시, 밥 말리 사이에 공연을 둘러싼 이견이 있었다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단순히 버니와 피터가 솔로 활동을 바랬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주33: Lloyd Bradley (30 August 2001). Bass Culture: When Reggae Was King. Penguin Adult. pp. 522– .
주34: Howard Campbell, "Bunny Wailer sets the record straight", The Gleaner, 2011-3-22.
주35: Hagerman, Brent (February 2005). "Chris Blackwell: Savvy Svengali". Exclaim.ca.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2-4-27.
주36: Quoted in the liner notes to 2001 reissue of Catch a Fire, written by Richard Williams.
주37: George Terry Interview Hit Channel. Interview: June 2011.
주38: Nielsen Business Media, Inc. (1974-9-14). Billboard. Nielsen Business Media, Inc. pp. 64– .
주39: "Bob Marley Biography". admin. 201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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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밥 말리 (Bob Marley) : 자메이카 레게 음악의 아이콘 (상)"
- "[인물] 밥 말리 (Bob Marley) : 자메이카 레게 음악의 아이콘 (중)"
- "[인물] 밥 말리 (Bob Marley) : 자메이카 레게 음악의 아이콘 (하)"
* 참조용 게시물
- "[개론] '레개' : 자메이카 음악의 대명사 (1) - 개요 및 역사"
- "[개론] '레개' : 자메이카 음악의 대명사 (2) - 음악적 특징"
- "[개론] '레개' : 자메이카 음악의 대명사 (3) - 해외 상황 (남미, 북미, 영국)"
- "[개론] '레게' : 자메이카 음악의 대명사 (4) - 해외 상황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 "[부록] 한국 레게 25주년: Get Up, Stand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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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론] 자메이카 음악의 장르들 : 그 역사와 주요 뮤지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