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라지만 그래도 98세면 많은 나이다. 그 나이를 살아간 이는 손에 꼽는다. 고구려 장수왕이 98세까지 살았다. 대만의 장제스 총통도, 맥도날드 ‘빅맥’을 창시한 미국인 짐 델리게티도 그 나이까지 살았다. 한국 철학계의 대부인 98세 철학자 김형석이 최근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백세가 가까운데도 아직 청춘이다. 그러고 보니 ‘젊은 노년’들에게 98세는 다시 시작하는 나이다. 98세에 첫 시집 『약해지지 마』를 펴낸 일본의 사바타 도요 할머니도 있었다. 지난해 11월 24일 불광동 성당에서 개최된 독서아카데미 강의 현장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강연 내용을 귀에 쏙쏙 담는 한편, 학창시절 밤을 새워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읽었던 데 대한 보답으로 그에게 인생을 살아갈 지혜를 청했다.
기억력이 좋으시다고 들었다.
몇 년 전까지도 대학 강의 때 배운 것을 기억해 곧잘 사람들에게 써먹곤 했다.(웃음) 내가 대학갈 때는 대학을 가는 학생이 아주 적었다. 그래서 그 때 대학에 갔던 이들은 가슴 속에 문제의식을 하나씩 갖고 살았다. 배운 것을 사회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책임감,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강의 내용이나 스승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대학에 가는 세상이다. 책임감도,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도 적은 것 같다. 문제의식이 있는 학생과 문제의식이 없는 학생은 졸업한 뒤에 인생도 달라진다. 사람이 나이 20이 되면 내가 50이 됐을 때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평생을 교육자로 사셨다.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교육은 콩나물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물(지식)이 금방 흘러내려가는 것 같지만 물이 내려가는 동안에 콩나물은 자란다(교육된다). 물이 내려가지 않고 물 안에서만 키우면 콩나물이 썩어버린다. 지식도 물이 흘러 내려가는 것처럼 자꾸 새로 배워야 한다. 콩나물에 물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말라버린다. 지식을 배우는 것도 콩나물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한 가지만 공부하면 썩어버린다. 공산주의가 그렇다. 역사가 사회가 다 결정되어 있다고 믿으니 공산주의는 고인물이다. 불행해지고 폐쇄적이고 부러지게 된다. 우리는 콩나무를 키우는 물처럼, 지식이 흘러가는 것처럼 성장해야 한다.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
스무 살에 몰랐던 것을 서른이 넘으면 알게 될 때가 있다. 마흔을 넘기면 인생이 또 달리 보인다. 만약 백년을 산다면 인생은 또 우리에게 어떤 무늬로 그려질까? 백년을 준비하는 그는 그의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아니 백년 중 그의 황금기는 언제였을까.
언제 나이 때가 제일 좋았나.
지금은 작고하고 없지만 철학자 안병욱 선생(전 사상계 주간, 숭실대 교수), 김태길 선생(서울대 철학과 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장)이 제 친구였다. 언젠가 한 번 세 명이 모여서 인생에서 ‘계란 노른자’라고 할 만한 나이가 언제였는가를 놓고 서로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보았다.
그랬더니 60~75세까지가 가장 생산적이고 보람 있었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김태길 선생은 76세 때 『한국인의 가치관』이라는 책을 내놓았고, 안병욱 선생은 89세까지 일을 했다. 이런 말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60이 되면 ‘내가 나를 믿게 된다’. 60 이전에는 어렵다. 나도 60이 되기 전에는 모든 면에서 미숙했다. 공자도 60을 이순(耳順)이라고 했다. 60이 제일 좋은 나이다.(웃음) 살아보니 75세까지는 정신적으로 성장이 가능하다. 그러니 콩나물에 물을 주듯이 계속 일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75세부터는 이제 그것을 얼마나 인생 끝까지 유지해가느냐가 숙제로 남는다. 그렇게 잘 관리하면 85세까지는 유지될 수 있다. 그런데 85세 이후로는 장담하기 어렵다(웃음).
김형석은 말 그대로 역사의 산증인이다. 일제 강점기에 도산 안창호(1878~1938)의 강연을 직접 귀로 들었고, 시인 윤동주 (1917~1945)와 중학교를 함께다녔다. 소설가 황순원(1915~2000)이 학교 선배였고, 한국 최초의 추기경 김수환(1922~2009)이 일본 조치(上智)대학교 후배였다. 교과서에서, 영화에서나 봤던 인물들이 그가 만나고 겪고 함께 했던 인물들이었다. 존경할 만한 원로와 영웅이 귀한 이 시대. 그가 기억하는 대한민국의 위인들은 어떤 모습의 사람들이었을까.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우리 근현대사 100년 내에 우리 국민이 존경할 만한 민족의 지도자로 누구를 꼽을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정치인이나 문화인 중에는 없었다. 그러다 한 분을 떠올렸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우리 국민이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인촌 김성수(1891~1955) 선생도 지도자로 모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려대학을 설립했지만 총장을 맡지 않았다. 자신은 나서지 않고 항상 뒤에서 도움을 주었다. 기업인으로는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1895~1971)을 꼽았다. 그분은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 자금을 요청했지만 거절했다. 세금은 누구보다 많이 냈지만 정치자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처럼 정경유착하지 않았다. 그 자녀들도 받은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그런데 제가 살면서 이 네 분과 추억이 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세 분이 모두 좋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분들이었다.
김형석은 일제 강점기에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 년 동안 교편을 잡으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철학계의 내로라하는 제자들을 길러냈고,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삶을 관통하는 철학적 사유로 우리를 일깨우는 집필에 힘썼던 시대의 지성이었다. 그는 1960~70년대에는 사색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로 『영원과 사랑의 대화』등 베스트셀러를 냈다. 당시 피천득의 수필집 다음으로 잘 팔렸다는 한 해 60만 부 판매 기록은 이후에도 출판계 판매기록으로 회자됐을 정도다. 그의 수필집 『인생, 소나무 숲이 있는 고향』,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는 철학자로서 깊이 있는 사색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어떻게 살아야 후회하지 않는 삶일까.
나 자신도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뒤늦게 발견한 인생의 교훈이 있다. 인생에서 50에서 80까지는 단절되지 않은 한 기간으로 보아야 한다. 공자도 말했지만 50은 지천명(知天命), 즉 ‘하늘이 맡긴 사명을 깨닫는’ 나이다. 그래서 나이 50부터는 내가 80이 되었을 때 적어도 어떠어떠한 삶의 조각품을 완성해야 겠다는 계획과 신념, 꾸준한 용기를 갖고 제2의 마라톤을 달리는 각오로 재출발해야 한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해야 하고, 확실한 가치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나이 50쯤 됐을 때 내가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를 고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나중에 인생 자체가 달라진다. 50에 자기 인생을 고민하는 사람은 그 후의 자신의 삶이 갈짓자를 그리지 않는다. 그냥 직선으로 간다. 하지만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혼란을 겪는다.
사람은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갖고 사는 것이 좋은가.
자기 인격의 수준만큼 재산을 갖는 것이 원칙이다. 인격의 성장이 70이라면 70의 재물을 소유하면 된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있다고 해서 90의 재산을 갖게 되면 그 분에 넘치는 20의 재산 때문에 인격의 손실을 받게 되고 지지 않아야 될 짐을 지고 사는 것만큼 고통과 불행을 겪는다. 내가 항상 가족들이나 제자들에게 하는 충고가 있다.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에 머물면서 정신적으로는 상위층에 사는 사람이 행복하고 사회에도 기여하게 된다.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행복을 더 많이 누리도록 되어있다. 살아보니 그렇더라.
“다른 모든 것은 원하는 사람도 있고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행복은 누구나 원한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그러나 행복은 어떤 것인가? 라고 물으면 같은 대답은 없다. 행복은 모든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공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만의 행복론이 있을 듯 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가능성을 유감없이 달성한 삶은 행복하며, 성공적이다. 그래서 정성 들여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실패가 없으나 게으른 사람에게는 성공이 없는 법이다. 내가 어려서 건강 때문에 고생했다. 가정을 꾸리고 나서는 자녀들 여섯을 키웠다. 지금은 저 세상으로 떠난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 탈북한 남동생 둘에 어머니까지 모시고 살았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열명이나 됐다. 선생 월급만으로 먹고사느라 참 고생 많이 했다.(웃음) 그런데 지나고 보니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더라. 내가 책에 쓴 내용도 그것이다.
교육자라서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렇다. 내가 뿌린 씨앗을 내 제자들을 통해서 나는 거두고 있으니 행복하다. 몇 년 전에 어떤 제자를 만났더니 “선생님께서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라’ 하고 말씀하셔서 늘 그것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고 말해줘서 참 기뻤다. 우리들이 사는 가정을 보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이 가장 행복한 인생이다. 사랑의 나무에는 많은 열매가 맺어야 한다. 그 열매가 자녀들이다. 그리고 그 열매는 이웃과 사회를 위해 베푸는 사랑과 봉사다. 나는 이런 인간애를 모르는 인생은 고귀한 삶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행복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있고, 봉사할 수 있어 행복하다.
불신과 절망의 격랑이 몰아치고 있다.
소통이 단절된 데서 시작됐다. 그런데 소통 부재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은 대화가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다. 상대방과 내 생각이 같으면 대화보다는 행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생각이 다른 때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러고는 내 생각을 말해야 한다. 그 내용이 다를 때는 어느 주장이 더 많은 사람과 미래에 도움이 되겠는가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버릴 것은 버리고 시정할 것은 고친 다음에 나와 네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찾으면 된다. 그런 노력을 계속하다보면 모두를 위한 객관적 이익을 도모하게 된다. 개인 간의 문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그 이상의 건설적 방법은 없다.
이처럼 어려운 일을 당한 우리 민족이 새롭게 출발할 방법은.
나는 해방되고 2년간 공산치하에서 살다가 탈북해서 대한민국에 왔다. 대한민국이 나를 품 안에 안지 않았으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먼저 나라 걱정을 해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된다. 민족과 국가 속에서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정권 잡을 생각, 자기 당파 생각을 먼저 할 것이 아니라 나라 걱정을 먼저 해야 한다. 사람이 민족과 국가를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 꼭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게 아니다.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중학교에 갈 때쯤 되니까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자기와 자기 가정만 생각하고 살면 자기 가정만 이끌 수 있는 만큼 밖에는 크지 못한다. 같은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고 내 직장을 걱정하면 직장과 지역 사회에서 커질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항상 국가와 민족과 국가를 생각하고 살면 민족과 국가의 지도자만큼 커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살아보니 그게 진리더라.
그 생각을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셨나.
내가 남들보다는 조금 일찍, 34살에 연세대 철학과 교수가 됐다. 그런데 주위를 보니까 절반 이상의 교수들이 연세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만 생각하더라.(웃음) 그런 교수들은 정년퇴임하면 불러주는 데가 없다. 그런데 나보다 더 연세대를 걱정하는 사람은 나중에 교무처장도 되고 학장도 되고 총장도 된다. 항상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는 사람은 정년퇴직 후에도 사회에서 민족과 국가를 위해 일한다. 그런 사람들은 처장이, 학장이 안 돼도 나라를 위해 할 일이 많다. 내 친구인 안병욱 선생, 김태길 선생이 그렇다. 언젠가 셋이 모여 얘기하는데, “대학교 있을 때보다 정년퇴직 후에 수입이 더 늘었지.” 그러더라. 다들 웃었다. 우리 셋은 90이 될 때까지 그렇게 살았다. 지금의 우리 지도자들이, 특히 정치 지도자들이 민족과 국가를 생각해야 한다.
김형석의 인생에서 소중한 인연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만난 두 친구, 안병욱 교수(2013년 작고), 김태길 교수(2009년 작고)였다. ‘철학계의 삼총사’로 불렸던 이들은 반세기 동안 사랑이 있는 경쟁을 벌인 ‘축복받은 관계’였다. 김형석은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 다음으로 자신에게 가장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이 두 친구였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선진국민이 될까.
전세계를 앞서서 이끌어가는 나라는 국민의 70% 이상이 백년 이상 책을 읽는 나라다. 나이 50 이상 되는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어른들이 책을 읽으면 아이들이 자연히 따라 온다.
건강을 유지하는 특별한 비결이 있으신가.
50이 넘어서는 주 3회 정도 수영장을 찾고, 하루에 50분 정도 걷는 운동을 지금까지 계속하고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일’이 내 건강을 유지해주었던 것 같다. 칸트나 슈바이처의 경우를 살펴봐도 그렇지만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건강도 유지했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이들이 많은데, 일이 목적이고 건강은 수단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누가 더 건강한가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누가 더 일을 많이 하는가를 물으면 된다. 나에게 있어서는 일이 건강의 비결이다.
어떻게 살이야 행복한 노년일까.
노년기에는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한데, 그 지혜라는 것은 ‘늙으면 이렇게 사는 것이 좋겠다’는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푸대접을 받았어도 상대방을 대접할 수 있는 인품, 모두의 인격을 고귀하게 대해줄 수 있는 교양, 그 이상의 자기수양이 없다.
내년이면 백세에서 1을 뺀 99세 백수(白壽)이시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우리의 생명과 삶도 그렇다. 죽기를 거부하는 밀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 많은 생명과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는 것이 인생의 순리다. 내가 오래 살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고통을 안겨준다면 그리고 그런 사람이 많아진다면 얼마나 불행하고 저주스러운 인생과 사회가 되겠는가. 그래서 행복하게 일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때까지 사는 것이 최상의 인생이라는 생각을 한다. 장수보다는 좀 더 오래 많은 일로 봉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내 소원이다.
90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어렵고도 드문 사례다. 정신은 멀쩡해도 몸이 잘 말을 듣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혼자 거동하기 어렵다. 대개 배우자 한쪽이 없는 경우가 많다. 김형석 옹도 아내를 잃었다. 그런데도 보청기도 없이, 휠체어도 없이 잘도 걸었다. 아니 정신세계는 여느 젊은이보다 더 젊었다. 나이 들수록 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 그렇다.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 그의 사유의 깊이를 이해하기엔 기자의 그룻이 너무 작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profile :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
1920년 평안남도 대동(大東) 출생
1944년 일본 조치(上智) 대학 철학과 졸업
1944~1950 송산(松山)여중·중앙중 교사
1954년 고려대·연세대·한국신학대 강사
1964년 연세대철학과 교수
나권일 기자 na.kwon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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