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민중운동 내에 정치적 재편의 시도들이 어지럽게 진행되고 있다. 대선이라는 제도 정치 일정만이 아니라 발전 사유화 반대 총파업의 무산 이후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민주노동조합운동의 위기 역시도 이런 흐름을 자극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흐름들 속에는 민주노동당 내 사회주의자들의 주목을 요구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남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좌파정당이며 지난 지방선거의 정당명부비례대표투표에서 8%를 넘는 지지를 얻은 민주노동당이 정치적 재편의 출발점이 되기보다는 뭔가 이와는 다른 흐름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들의 알리바이 정도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 내의 사회주의자들로서는 우선 자기 반성하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가? 뭐가 막힌 것인가? 그리고 또한, 민주노동당을 비판하는 노동자·민중운동 내의 동지들의 입장은 과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지난 2년간의 당 건설 투쟁 속에서 민주노동당 내의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는 당의 초석을 놓는 작업에 함께 하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해왔다. 하지만 당이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민중운동의 디딤돌보다는 걸림돌로 바라보는 시각들이 분분한 지금은 당 내 사회주의자들의 적극적 의견 개진과 선도적 실천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제는 민주노동당의 성장을 위해서도 가감 없이 우리의 목소리를 낼 때가 됐다.
이 글은 그 첫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기초적인 주장들만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부족한 점이 더 많을 줄 안다. 하지만, 하나의 '출발점'이라는 점, 동지들의 양해를 구한다.
2. 노동계급의 다수자혁명이라는 전망
우리의 모든 논의와 실천의 출발점은 <반(미)제>와 <반(독점)자본>을 두 축으로 하여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다수자혁명이다. 80년대부터 이는 운동 내에서는 이미 상식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제대로 고민되고 실천되지 못하는 것이 또한 바로 이 다수자혁명의 전망이다. 전체 민중을 이끌 노동자계급의 주도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계급동맹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대중을 역사의 주역으로 일으켜 세울 구체적인 현실 고리들은 무엇인가? 이 과정에서 다양한 조직들의 역할과 과제는 무엇인가?
지금 누가 이러한 물음들을 고민하고 있는가? 혹시 우리 사이에서 이는 선거에서 어떻게 하면 표를 늘릴까 하는 문제로, 혹은 어떻게 하면 노동조합운동 상층의 주도권을 쥘 것인가 하는 문제 정도로 추락해버린 것은 아닐까?
3. 90년대의 '위기'에 대해, 다시 한 번
80년대 말·90년대 초에는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이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었다. 민주주의 혁명이 더 높은 단계의 혁명으로 성장·전화한다는 전략적 전망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적 전망 아래서는 군사파쇼 정권에 대항하는 광범한 <민주·개혁 대중>이 운동의 지반이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선진노동자 대오가, 그리고 대안 사회를 건설하려는 운동이 형성되고 움직인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87년의 6월을 달구었던 대중은 92년 무렵까지도 거리로 집결하길 꺼리지 않았다. 그들은 '물'이었고, 운동권은 그 물 안의 '고기'였다.
하지만 대략 92,3년 무렵부터 사정은 달라진다.
첫째, 부르주아 자유주의 세력과 군사파쇼 잔존 세력의 야합을 통해 지루하고 불완전한 형태로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민주·개혁 대중도 이완되기 시작했다.
둘째, 운동 세력은 투표장에서든 거리에서든 자신을 하나의 정치적 선택지로 대중에게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민주·개혁 대중은 자신을 김영삼·김대중 정치세력 내의 원칙파로 인식했을망정 그와는 다른 어떤 정치 세력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불완전한 민주화가 진행되자 이들의 상당수는 정치적 기권주의·냉소주의로 향했다.
셋째,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민주주의 혁명이 성장·전화해가야 할 그 '목표' 자체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혼돈과 투항의 긴 행렬이 시작됐다. 그 나마 애초의 이념과 원칙을 저버리지 않은 운동 세력조차도 자신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제한된 대중, 즉 유일한 조직 대중인 노동조합 내에 뿌리를 박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느덧 우리의 운동은 노동조합운동과 동일한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혹자는 그 내부의 현실파가 되고, 혹자는 전투파가 되었을 뿐.
4. 다시 계급적 대중을 형성한다는 과제
어느 나라의 좌파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정착되고 난 다음에는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한편에서는 형식적인 제도정치 참여 권리가 생긴다는 점에서 공개 정치 활동의 가능성이 열린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제도정치의 절차 속에서 일정하게 인정 받지 못하면 의사당 안에서건 거리에서건 대중적 영향력을 갖기 힘들다는 시련이 대두한다.
형식적인 정치적 자유가 열리고 나면 대중은 투표지에 자신이 표를 찍는 대중정당 혹은 대중 정치인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구체화한다. 자신이 지지하는 그 대중정당, 대중 정치인으로부터 정책적 입장, 이념적 입장, 더 나아가서는 세계관까지를 연역한다. 아니 사실은 이미 갖고 있던 자신의 혼란한 생각들을 자신이 지지하는 공개 정치 세력을 정점으로 하여 정리하고 나름대로 체계화한다. 그다지 열의 없이 자신의 표를 던지거나 기권하는 대중이라면 이는 어떤 비판의식을 의미하기보다는 그만큼 현재 정치적 지향과 의지 자체가 분명치 않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좌파로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시점에서 대중정당을 건설하여 일정 규모 이상의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새로운 실천의 지평을 맞이할 수 있다. 80년대 민주화 이행기에 브라질에서 일어난 일이 정확히 이 경우였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제 몸 추스리기에 실패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우리의 경우, 반파쇼 투쟁에 함께 했던 민주·개혁 대중이 형해화된 지금,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지지 대중을 밑에서부터 새로이 형성해야 하는 지극히 곤란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그것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입장권이 일단 자유주의자들과 구파쇼세력에게 독점된 뒤에 말이다.
5. 대중의 능동화, 의식화는 무엇으로 가능한가?
한국의 좌파는 자신의 대중적 지반을 새로이 형성해야 한다. 그 속에서 그 자신이 새로이 형성되어야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우리의 현재 핵심 과제는 이것이다. ― 민주주의혁명 시기의 민주·개혁 대중이 해체된 그 공간을 채울 <진보·개혁 대중>을 형성해야 한다. 87년에는 노동자들이 민주·개혁 대중 내의 종속적인 일부였다면, 이제는 노동자계급의 선진 대오가 앞장서서 진보·개혁 대중을 결집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다수자혁명의 주도자로서 노동자계급 자신이 단련될 것이고, 대중은 다수자혁명의 주인공으로 성장할 것이다.
문제는 민주주의혁명 시기가 아닌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상대적 안정기에 진보·개혁 대중이 형성될 실천적 계기는 도대체 무엇인가이다. 우리는 그것이 일상적인 개혁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일상적인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지도하며,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임금체계를 폐지한다는 최종 목표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회 개혁을 위한 일상적인 실천 투쟁"뿐이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의 말에서 더 덧붙일 것은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는 것이 "개혁의 축적으로 대안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사회민주주의의 전략적 전망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수준의 개혁이라 하더라도 곧바로 대안 사회의 건설과 연결될 수는 없다. 또한 개혁의 연속이 어떠한 단절도 없이 더 높은 수준의 정치적 목표의 실현으로 발전하리라고 믿지도 않는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개혁 투쟁을 통해 의식화하고 조직화할 진보·개혁 대중이고, 그 속에서 또한 단련될 선진노동자 대오다. 오직 이러한 주체가 형성될 때에만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도 막상 혁명적 실천이 가능하다. 이는 역으로, 우리가 추구할 일상 개혁 투쟁의 핵심은 이를 통해 어떻게 하면 대중을 더욱 능동화하고 의식화·조직화할 것인가에 있다는 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대로, "노동조합 투쟁과 정치 투쟁이 갖는 커다란 사회주의적 의미는, 그것이 노동자 계급의 인식과 의식을 사회화한다는 것이다"(위의 책). 혹은 더 간명하게 말해, "[노동자] 투쟁의 진정한 성과는 직접적인 전과(戰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계속되는 단결의 확대에 있다"(맑스·엥겔스, {선언}).
6. 개혁적 자유주의와 중도 정치공간의 붕괴
소위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세는 일상 개혁 투쟁이 사회주의적 방향에서 발전할 가능성을 높여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고 있다. 미국의 금융자본을 정점으로 한 초국적 자본의 운동은 이제 선진자본주의와 신흥산업국을 가릴 것 없이 모든 나라의 국내 부르주아지를 초국적 금융자본의 운동 내에 포섭하고 서열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남한의 경우에도, 독자적인 발전 전망의 궁지와 혼란으로 갈팡질팡하던 독점자본은 IMF 위기를 계기로 더욱 노골적으로 초국적 자본의 움직임과 일체화하는 방향에서 자신의 살길을 모색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시장주의적 재편은 그들 생존의 도약대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 이상 해외 부르주아지와 국내 부르주아지를 구분하는 것 자체도 커다란 의미를 갖기 힘들다.
특히 중요한 것은 국내 부르주아지의 독자적 발전 전망을 정치적으로 대변할 정치적 세력, 그들이 차지하던 정치적 공간이 붕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케인즈주의라는 것은 대개 이러한 정치적 전망을 대변하는 중도 우파와 사회민주주의적 중도 좌파 사이의 타협으로 나타났었다. 그러나, 이런 중도파적·계급타협적 지반은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부터 붕괴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가 '사회주의 없는 개혁주의'에서 '개혁 없는 개혁주의'로 전락하는 과정은 이것의 반영일 뿐이다. 한국의 경우, 이는 '대중참여경제론'을 주창하던 김대중의 정치세력이 '신자유주의'의 광신적 전도사로 전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나마 중도 우파의 공간을 점하던 민주당은 계속 붕괴 일로를 걷고 있다. 우리는 소위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세가 계속되는 한, 이러한 정치 지형이 유지·심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바로 이러한 정치 지형이기 때문에 어떠한 개혁 투쟁도, 그것이 대중의 실제적인 삶의 향상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것인 한, 제도 정치 공간에서 기존의 어떤 제도 정치 세력과의 타협 속에 자신의 목표를 쟁취할 가능성은 극히 적다. 아니, 거의 없다. 이는 21세기라는 시간, 한국 사회라는 공간에서 사회민주주의 노선의 '불가능성'을 말해준다. 제도 정치 공간에서 중도 우파와의 타협 아래 개혁을 추진하고 이를 통해 지지층을 확대·유지한다는 전략적 전망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와 반대로 대중의 참여에 기반해 대중의 급진화를 낳는 진지한 개혁 투쟁은 크든 작든 기득권 세력과의 대치 국면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대결 속에서 개혁 투쟁을 지지하고 이에 참여하는 대중은 더욱 더 비판적인 의식을 획득하고 더욱 더 적극적으로 대중투쟁의 주역이 될 것이다. 오늘날 '개혁' 투쟁은 '혁명적'일 수 있으며, 오직 그래야만 한다.
7. 노동자·민중운동의 전략 -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 누가 일상 개혁 투쟁을 이끌 조직적 주체로 나설 것인가? 이제까지 노동조합운동에 이 모든 것이 내맡겨져 있음으로써 숱한 곤란과 궁지에 직면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조합으로 안 되니까 이제는 당(혹은 어떤 다른 정치조직)이다"라는 식의 전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요즘은 민주노동당에조차 실망한 일부 동지들이 "합법정당으로는 안 된다, 또 다른 무엇이다"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물론 이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문제는 어떤 특정한 조직 형태를 특권화할 것인가에 있지 않다. 말하자면,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우리의 물음이 되어선 안 된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노동자·민중운동에 필요한 각 조직들·운동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이를 통해 노동자·민중운동의 상승을 이뤄낼 것인가이다. 쉽게 말해 이것 그리고 저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가장 훌륭한 참조점으로 생각하는 것은 1912년부터 1914년 사이의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실천 사례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1912년부터 시작된 노동자 대중투쟁의 물결을 배경으로 사회민주노동당 다수파 의원단의 제도 정치 활동과 노동자 대중투쟁, 그리고 <프라우다>를 중심으로 한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이 어우러져 노동자계급의 놀라운 의식적·조직적 성장을 이뤄냈다. 그리고 바로 이 힘을 바탕으로 3년 뒤의 세계사적 격변이 가능했다. 이는 대중투쟁과 제도 정치 개입, 대중적 언론·문화 활동이 의식적으로 결합될 때 비로소 서로간의 상승 작용을 낳으면서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새로운 정치의 주역으로 성장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우리의 일상 개혁 투쟁은 바로 이런 방향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의 주역은 당만도 아니고, 노동조합만도 아니고, 또 다른 무엇도 아니다. 사실 유일한 주역은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는 대중일 뿐이다. 다만, 그 대중이 다수자혁명의 주역으로 성장하고 결집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대중운동과 제도 정치 내의 당 활동, 대규모 언론·문화 활동을 서로 잇는 총체적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8. 우리 시대의 노동자계급정당 ― 대중정당과 운동정당
이러한 총체적 전략을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우선 '당'이 필요하다. 노동자계급의 정당. 당원 중 몇%가 노동자 출신이냐라는 차원에서 노동자 정당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대안 사회를 건설한다"는 강령적 지향과 실제 이를 실천해내려는 의지에서 노동자 정당인 그런 당. 그런데,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정착된 지금의 상황에서 이는 무엇보다도 공개적인 대중정당이어야 한다. 한 마디로 여론조사와 투표일에 대중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정당이어야 한다. 그 선택 행위를 통해 가장 낮은 수준의 대중조차 자신의 삶이 부르주아 정당·정치인들과는 뭔가 '어긋난' 것임을 막연하게나마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정당.
하지만 우리는 또한 주장한다. 오늘날 노동자계급정당은 또한 <운동 정당>이어야만 한다. 운동 정당이라니 무슨 말인가? 이는 민주노동당 내 사회주의자들이 구상하는 총체적 전략에서 비롯되는 현 시기 노동자계급 대중정당의 과제를 압축한 말이다. 대중의 모든 활동을 부르주아 정치 제도에 진출한다는 과제에 종속시키는 사회민주주의 대중정당과는 달리, 당의 모든 활동을 대중의 주체화·능동화라는 과제에 의식적으로 종속시키고 그 일부로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초기(70년대 말·80년대 초)에 등장한 세 개의 정치적 실험은 운동 정당이라는 구상에 일정한 시사를 던져준다. 독일의 녹색당, 폴란드의 솔리다르노시치(연대노조), 그리고 브라질의 노동자당이 그것이다. 사실 운동 정당이라는 말 자체가 독일 녹색당에서 나온 것이다. 각각의 실험도 그 후 수많은 굴곡과 영광, 좌절을 겪었지만 말이다. 따지고 들어가 보면 위에서 예로 든 1912년∼14년 사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다수파의 경우도 이 범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노동자계급정당이 갖춰야 할 운동 정당의 특성을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대안 사회 건설의 주체가 당이나 특정한 조직틀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표현할 대중들 자신임을 인정하고 이에 따라 일상의 모든 실천 속에서 다양한 사회운동들의 자율성을 인정한다.
둘째, 어찌 됐든 합법정당이니만큼 그 일차적 과제는 제도 정치 진출에 있으나, 일정한 제도 권력의 확보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대중운동들을 북돋는 데 복무한다. 지방자치체를 장악한 뒤 참여예산제를 통해 지역주민들을 주체화·능동화하고 지역사회운동을 성장시키는 데 기여한 브라질 노동자당 좌파의 실험을 우리는 주목한다.
셋째, 제도 정치 진출을 비롯하여 당의 활동 전반을 하나의 정치'운동'으로서 추진한다. 당은 조직상의 끝없는 불안정성을 감수하더라도 말 그대로 정치적 대중운동체로서 작동해야 한다. 모든 일상 개혁 투쟁들은 하나의 '정치적 대중운동'으로 융합되어야 한다. 이 정치적 대중운동이란, 숱한 시도와 대결, 승리 혹은 패배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다수자혁명의 주체를 형성하는 운동, 그것이다.
9. 전략적 지도부는 대중(투쟁) 속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이쯤해서 '현존' 노동자계급정당과 '전략적 단위' 사이의 관계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다. 분명히 할 것은 현재 존재하는 노동자계급정당이 곧바로 노동자계급의 전략적 지도단위가 될 수 있다거나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민주노동당이 지금 그러한 단위라거나 반드시 민주노동당이 주된 기반이 되어 그러한 단위가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도 않다.
현재 존재하는 노동자계급 대중정당이 운동 정당으로서 제 몫을 다할 때 우리는 훨씬 높은 질을 갖고 훨씬 높은 수준의 당면 과제를 해결할 조직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그것의 구체적 형태가 어떻게 될지, 주로 어떤 세력에 기반해 만들어지게 될지를 지금 예견할 수는 없다. 좌파적 원칙을 확고히 하는 대중 정치인이 그 일부가 될 수도 있고,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세대의 지도력이 그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될 수도 있으며, 특정한 시점에서 올바른 지도 노선을 추진하는 활동가들의 결집이 이뤄질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것은 소위 전략적 지도단위는 다수자혁명의 주체가 형성되는 바로 그 과정 <속에서> 형성되고 건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전략적 지도부는 대중과 <함께> 성장할 수 있을 뿐이다.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지도부는 오직 수 차례의 당대회와 수십, 수백 차례의 대중적 평가 속에서 선출되고 탄핵받고 재신임받는 엎치락뒤치락을 거치면서, 달리 말해서 떠들썩한 대중의 마당에서만 구성될 수 있다. 전위를 자임하는 몇 개의 정파가 모여서 될 일이 아니다. 전략적 지도부의 '의식적' 준비란, 이렇게 대중적 평가의 장을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데 있지, 소위 '의식적' 분자가 뭔가를 자임하는 데 있지 않다.
10. 민주노동당 ―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전진과 퇴행의 공존
그리고 여기 민주노동당이 있다. 이 당을 어떻게 볼 것인가? 민주노동당 안에서도, 그리고 바깥에서도 이 당을 '계급연합당'이라고 규정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정파연합당에 대한 은어라면 모를까, '계급연합당'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의 존속을 추구하는 부르주아 정당이든지 그것의 극복을 추구하는 노동자계급정당이든지, 둘 사이에서 동요하는 각종 중간계층 정당이 있을 수 있을 뿐, '계급연합당'은 어불성설이다. 어쩌면 소위 '국민정당'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 우파의 노선이 그렇게 표명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규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반대한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계급정당이다. 천박하게 "노동자만 당원 될 수 있냐?"는 그런 차원에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주도로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한 대안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궁극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민주노동당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직면한 한국의 민주노동조합운동 내 3대 정치세력의 공동전선 형태로 창당되었다. 그 3대 세력이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회민주주의자들, 민족해방파, 사회주의자들이다.
민주노동당 창당의 배경에는 전진적 요소와 퇴행적 요소가 함께 존재했다. 96, 97 총파업의 경험과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서 민족해방파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일정하게 급진화하면서 '신자유주의 반대' 기조에 합의할 수 있었다는 점은 전진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총파업의 '절반의 패배'와 IMF 위기에 대한 노동조합운동의 무력한 대응 이후에 노동조합운동의 궁지를 '우회'하려는 전술로서 정당 건설이 추진되었다는 것은 퇴행적인 요소였다.
이로 인해 민주노동당이라는 살아 있는 조직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며 모순을 낳았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선진노동자들의 전국적 조직화를 이뤄냈다는 점은 민주노동당이 '미래'로 나아가는 중요한 관문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입당운동이 주로 민주노총 상층 간부와의 관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후에도 이들 상층 간부진의 정서(전략적 전망의 부재, 실용주의, 경험주의, 패배주의)가 당을 지배했다는 점은 분명 '미래'보다는 우리의 '과거', '현재'와 닿아 있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민주노동당은 창당 시기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기회'이자 '위기' 그 자체다.
11. 한국 노동조합 관료주의의 불안정성,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불확정성
민주노동당 내의 사회주의자들은 '기회'의 측면과 '위기'의 측면을 모두 주목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에 적극적으로 함께 한다. 왜냐하면, 지금 '위기'는 노동자계급운동 전반의 그것인 반면, '기회'는 오직 대중적인 정치 활동의 추진, 그것에만 있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민주노동당의 현재의 한계에 커다란 책임을 지니고 있는 1세대 지도부의 약점은 90년대 중반 들어 사회주의운동과의 연결고리가 약화된 상태에서 형성된 노동조합운동 간부진의 정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혹자는 이를 '관료주의'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다. 이는 관료주의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적' 노동조합 관료주의의 특수성, 특히 민주노동조합운동 내에서 형성되어 있는 관료주의의 특수성에 주목한다. 선진자본주의 국가 노동조합 내의 관료주의가 실질적인 계급타협의 성과에 기반한 다분히 구조적이고 안정적인 것이라면, 우리의 경우 노동조합 관료주의는 자본가측으로부터의 어떠한 실질적인 양보에도 기반하지 않은 실로 과도적이고 불안정한 것이다. 현 국면이 대중운동의 침체 국면이라는 점이 그 유일한 토대다.
따라서, 바로 이러한 불안정한 관료주의와 연관되어 있는 민주노동당 1세대 지도부의 지도력 역시도 극히 불안정한 것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때문에 민주노동당 1세대 지도부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제대로 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지만, 또한 이 때문에 이 당에는 사회민주주의고 뭐고 아직 확정된 무엇이 없다.
서유럽의 100년 넘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에 견주어 민주노동당을 평가하는 것은 한 마디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과대평가, 참으로 어이없는 과대평가다. 세계적 대불황에 따른 대중의 급진화를 통해서든, 몇 가지 의미 있는 개혁 요구 투쟁의 성공 혹은 좌절을 통해서든, 노동조합운동 내의 전투적 새 흐름의 등장을 통해서든, 아니면 한국 지배계급의 장기인 폭압적 선제공격을 통해서든, 이 당은 내외의 충격을 통해 쉽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정치운동체로 탈바꿈할 수 있다. 우리는 민주노동당의 '변화가능성' 여부보다는, 자신들의 패배적 전제 때문에 그러한 변화가 가능할 시점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기권파들의 무능을 더욱 우려한다.
12. 민족해방파에 대하여
물론 민주노동당을 이루는 두 거대 세력에 대한 판단 없이 섣불리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두 세력, 민족해방파와 사회민주주의자들 말이다.
우선 민족해방파. 이들은 최근까지 소위 '비판적 지지' 입장을 유지하여 노동자·민중운동의 정치적 성장을 가로막는 데 주된 역할을 했다. 이 점에서 이들이 민주노동당에 결합한 것만 해도 역사의 커다란 진전이라 해야 할 것이다. '반(미)제'를 강조하는 입장 때문에 신자유주의 정세에서 일정하게 급진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도 높이 사야 할 대목이다. 이것만이라면 이들과의 공조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견결히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류는 쉽게 극복되지 않았다. '비판적 지지'의 이론적 토대가 되어왔던 민족부르주아지와의 연합이라는 전략적 입장은 6.15 선언을 계기로 '6.15 연대'라는 형태로, '조국통일전선'과 '민족민주전선'의 분립이라는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다. 6.15 선언에 동조하는 한, 광범한 계급간 연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에는 북한에 대해 '비둘기파'의 입장을 취하는 부르주아 정치 분파와의 연립 정부를 '자주적 민주정부'라는 이름으로 추진하고 정당화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즉, 존재하지도 않는 중도 우파(사실상은 '비둘기파'적 입장의 시장주의 우파)와의 협력 시도가 강박적으로 계속 나타날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주한미군문제를 대중적 쟁점으로 제기하는 등 민족해방파 동지들의 반제운동의 성과는 높이 평가받아야 하며, 이 점에서 민주노동당의 긍정적 지반 중 하나를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공조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이들의 전략적 전망에서 나타나는 명백한 오류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13.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하여
다음으로, 사회민주주의자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제까지 한 번도 자신들의 전략적 전망을 분명히 한 적이 없기 때문에 평가 자체가 힘들다. 그들의 선조 베른슈타인과도 다르게 이 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노동조합주의자들의 실용주의에 위험하게 기대어 공생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한 가지 강력한 전제는 존재한다. 그것은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노선을 한국 사회에서도 반복한다면, 그 정도의 성과, 즉 복지국가의 길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는 한 마디로 노동자계급운동의 호도다. 케인즈주의적 계급타협은 세계 자본주의의 특정한 국면에서, 국내에는 격렬한 계급투쟁이 진행되고 국제적으로는 현실사회주의권이 버티고 있다는 전제 아래 가능했던 것이다. 이 모든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 지금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무엇으로 개혁의 성과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인가? 선거와 의회만을 통해서? 서유럽의 동료들도 이것만으로는 자신들의 그 자랑스러운 복지국가를 이뤄낼 수 없었다. 더구나 계급타협의 상대인 중도 우파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제 무정형의 혼돈 속에 있다.
단계적으로 국회의원 수를 늘려 2012년에 집권하겠다고, 혹은 2016년에 집권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어떠한 미래도 열어나갈 수 없다.
14. 당의 분화는 객관적, 대중적 근거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민주노동당 내에서 민족해방파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격렬히 대립하고 있다. 이는 한 마디로 이들의 지평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둘 다 당분간 자파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데 진력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제도권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늘려가는 데 집중할 것이다. 이것만 본다면,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화는 기정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다르게 판단한다. 민족해방파는 남북간 데탕트 국면이 지속될 경우 남한 의회주의 좌파의 한 구성 요소로 전락할 수도 있지만, 미 제국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급진적 요소를 유지·발전시킬 수도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들 역시도 한편으로는 성공적인 원내 진출이 가능할 경우 예정된 그들의 길을 밟아 나갈 수 있지만, 중도 우파와의 타협을 통한 실질적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한 그 좌파적 부분과 지향이 강화될 수도 있다(가령, 소유의 사회화를 현실 정책으로 추진한다거나 대중투쟁과의 결합을 중요시하는 등).
이것은 민족해방파 전체, 사회민주주의자 전체가 급진화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이들의 미래가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인 만큼 민주노동당의 장래 역시 확정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민족해방파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노선이 당을 전적으로 지배하게 되는 시점에는 '발전적 분화'의 필요성이 당연히 제기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그 때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제도정치권에 진출한 부분을 대중들이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와 같은 전략적 사안이 현실 쟁점으로 등장할 때가 그러한 때일 것이다.
15. 민주노동당 바깥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하여
흔히 '좌파'라고 불리는 민주노동당 바깥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 진정성을 높이 평가한다. 특히,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과제"라는 백 번 반복해도 과하지 않을 명제를 힘주어 강조하는 대목이 그렇다. 새 사회의 주인은 대중 자신이다. 따라서 모든 대리주의적 실천은 비판받고 극복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오류를 실제로 극복하고 진정 대중의 주체화·능동화를 이뤄낼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의 입장은 이미 위에 제시했다. 그런데, 최근 '좌파'의 많은 동지들은 어떤 특정한 조직 형태, 실천 형태에서 다른 특정한 조직 형태, 실천 형태로 중심을 옮기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보는 것 같다. 국가가 아니라 대중운동이다, 합법정당이 아니라 다른 어떤 정당(비제도적 투쟁정당?)이다, 당이 아니라 공동전선이다, 아니다 평의회다, 이런 식이다. 이런 논의에는, 과연 지금 자본주의 지배질서의 어떤 측면들이 대중의 주체화·능동화를 가로막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실제로 대중의 참여와 급진화를 이뤄내기 위해서 얼마나 복합적이고 다기한 실천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려가 없다.
이런 상태에서 특정한 조직 형태, 실천 형태의 채택을 통해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면, 결국 의도하지 않게 무능력한 종파주의, 잘못된 전위주의(대리주의)가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즉, '대중'을 빈번하게 강조하지만, 정작 현실의 구체적인 대중은 사라지고 없는 결과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 가장 속된 사례만을 들겠다. 사회당의 소위 '좌파결집'론이 그것이다. '좌파'라는 활동가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활동가들이 선결집하면 그것이 곧 올바른 노선의 보증이고, 전략적 지도부의 출발이라는 듯한 선언. 하지만, 우리는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일좌파'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잡기 위한 '계급통일'이다. '좌파의' 통일이 아니라 '계급의' 통일이다!
우리는 굳이 당 외의 선진노동자조직, 평의회운동 등을 고민하는 '좌파' 동지들까지 민주노동당으로 규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이 꼭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합법정당과 공동전선, 그 밖의 조직 형태들이 서로 경합하는 배타적인 대안들로 제시되는 것은 분명 오류다.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의 조직들, 그리고 맹아적 조직들을 대중투쟁의 분출과 성장의 방향으로 관계짓고 교류시킬 방안이다. 당 안팎의 사회주의자들의 공통의 출발점은 바로 이것이다.
16. 민주노동당 내 사회주의자의 반성과 과제
이제 민주노동당을 건실한 노동자계급정당으로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 전체 노동자·민중운동의 한 단계 더 높은 성장을 이루기 위한 민주노동당 내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를 이야기할 차례다.
우선, 민주노동당 내 사회주의자들은 그 동안 민족해방파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지배하던 당내에서 하나의 독자적 세력으로서 자신의 주장과 실천적 지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소위 민족해방파와 손잡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타격한다는 전략도, 소위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손잡고 민족해방파를 타격하다는 전략도 사회주의자들의 독자적 발전의 발목을 잡는 오류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노선 투쟁을 당내 세력 다툼으로 전락시킨다는 점에서 잘못이다. 이제는 사회주의자들의 자기 내용을 갖고 민족해방파, 사회민주주의자들 모두에 대해 비판을 아끼지 않고, 견인할 수 있는 부분은 견인해야 한다.
다음으로, 1세대 당 지도부의 실용주의적 기풍을 극복하고 민주노동당이 운동 정당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게 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당의 전략적 전망을 주도적으로 공론화하고 다듬어야 하며, 지구당 체계에 종속되지 않는 선진노동자 당원·학생 당원들의 생명력 있는 조직·운동 체계를 제기해야 하고, 대상에 맞게 다양화되고 실천적인 목적이 분명한 당원 교육 체계를 구축하는 데 앞장서야 하며, 대중신문 발간·라디오 방송 채널 확보·출판 활동 등 활발한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전국적인 일상 개혁 투쟁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이 과정에서 진보·개혁 대중을 형성하며 당원들을 단련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당 전체를 최대로 가동해야 할 2002년 대통령 선거는 이러한 당 재편의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비록 불발되기는 했지만 민주노동당 최초로 대중투쟁에 전면적으로 결합한 경험이었던 지난 봄의 발전 사유화 반대 파업투쟁 같은 대중투쟁도 물론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계기를 넋 놓고 흘려버리지 않게 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당내 민주주의나 의원단에 대한 통제 등의 쟁점에 대해 선도적으로 문제제기하고 해결 방향을 만들어가는 데 앞장서야 한다.
또한, 당내 사회주의자들은 당에 합류하지 않거나 혹은 또 다른 전략적 판단에 따라 당 바깥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자들과의 가교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이를 통해 당 활동과 다양한 대중투쟁이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데 한 몫 해야 한다. 그리고 당, 노동조합, 사회운동들 전반에 걸쳐 새로운 지도력이 구축되도록 의식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덧붙여, 환경, 여성, 국제연대 등 민주노동당뿐만 아니라 한국의 노동자·민중운동 내에서 여전히 취약하거나 미답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부분에서 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자들은 선도적으로 문제제기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
17. 더욱더 노동자계급의 당이기 위하여
이중에서도 특히 노동자계급정당으로서의 질을 강화하기 위해서 지대한 노력이 필요하다. 정례 당-총협의회나 민주노총 정치방침 같은 형식적 관계, 상층 중심의 관계는 극복되어야 한다. 오랫동안 강조되어왔지만 민주노총 상층에 대한 의존 때문에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있는 직장분회의 조직화에 당내 사회주의자들이 앞장서야 한다.
단순히 직장분회를 건설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직장분회를 통해서 전국적으로 공통의 개혁 요구(비정규직 철폐든 무상의료·무상교육이든 잔업·특근의 거부든)를 선전·선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민주노총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당 자체의 내용으로 노동자들을 설득하고 당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 직장분회 조직화가 힘을 받을 수 없었던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도 당의 주도적인 노동 정책이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현장에서 선전·선동할 거리가 없었다는 점이다.
만약 '노동자의 힘'의 공투본-공선본 제안이 합의되어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참여하는 예비경선이 실시된다면 이는 노동자 정치실천단을 조직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당이 얼마나 주도적으로 대선투쟁을 치르느냐에 따라 이 중의 상당 부분이 당 직장분회로 전화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2003년 초부터 당은 노동위원회를 통해 현장의 공동 선전·선동 쟁점을 확정해 전국적인 노동자 정치활동의 전형을 창출해야만 한다. 당내 사회주의자들이 이러한 환골탈태를 실현시켜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운동 내에 등장하고 있는 혁신의 움직임들과도 적극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18. 또 하나의 '현장' ― 지역
지구당의 지역사회 내 실천에서도 참신한 바람이 필요하다. 흔히 민주노동당의 지구당 활동을 출세주의자들의 온상으로 보기도 하지만, 우리는 정반대로 본다. 앞으로 상당 기간 민주노동당의 지구당 활동은 출세의 발판이기보다는 승리의 전망 없이 지켜내야 할 외딴 진지들일 뿐이다. 우리는 지역적 실천의 축적을 통해 제도권에 진출한다는 당 일각의 전망이 비현실적이라 판단한다. 전국 정치의 차원에서 대중의 의식의 흐름이 바뀌지 않고서 지역 수준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의 지지층을 형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국적 정치에 영향을 주어, 예를 들어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등을 통해 제도 정치에 진출하고 그 파괴력으로 지역구 수준에서도 일정 규모의 지지층을 형성하는 길 외의 다른 길은 모두 환상일 뿐이다. 그 때까지 우리는 지구당에서 이 고난의 여정을 묵묵히 책임질 것이다.
초기의 곤란과 한계 속에서도 당내 사회주의자들이 지역사회에서 이뤄야 할 과제는 이렇다. 첫째 노동자·민중의 일상 생활에서 자본과 지배권력으로부터 자율적인 영역을 만들어내고, 둘째 지역주민들의 참여와 능동화를 통해 민중권력의 맹아들을 구축하며, 셋째 당·노동조합·진보적 주민조직들 사이의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지역 수준의 대안권력의 토대를 쌓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이러한 실천을 위해 제도권 진출 부분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이미 지역권력의 상당 부분을 점한 울산 북구, 동구에서 참여예산제와 같은 실험이 적극 추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당내 사회주의자들은 울산 북구, 동구에서 과감한 실험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전국적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또한 소속 지구당에서 창조적 시도들을 앞장서서 추진해야 한다.
광역·기초 의원들의 활동 전형을 창출함으로써 이후에도 제도 정치 부분과 대중운동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형성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다.
19. 2004년의 과제들 ― 비례대표후보는 당원 총투표로 뽑혀야 한다.
물론 지금 당장 우리의 실천 과제는 2002년 대선을 어떻게 돌파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2003년에 공세적으로 대중투쟁의 재생을 이뤄낼 기반을 만들어내는 것을 이번 대선투쟁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본다. 우리는 '노동자의 힘'의 공투본-공선본, 그리고 예비경선 제안이 대선투쟁을 이러한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데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 보며, 환영한다. 이는 무엇보다 현장에서 노동자 정치실천단을 조직하고 그 바람을 일으키는 기회로 활용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명실상부한 '계급투표'가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해서 얻어진 득표의 규모, 공통의 정책들, 현장 활동의 자신감, 노동자 정치의 바람, 이런 것들이 2003년 전국적인 노동자 투쟁의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에 대한 준비를 대중투쟁을 되살리는 원동력 중 하나로 배치하고 활용해야 한다. 민주노동당 내 사회주의자들은 현재 당헌에 대의원대회에서 선출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를 당원 총투표로 선출하는 것으로 개정하도록 발의하고 당내 여론을 조성하며 개정을 실현시켜야 한다. 그래서,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선출 유세라는 형태로 현장의 개혁 요구들을 모으고 투쟁의 여론을 조성하며 전국적 흐름을 가시화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제도 정치에 말 그대로의 '노동자 대표'를 진출시킨다는 목적과 함께 신자유주의 공세에 반격을 가할 총파업 투쟁의 저력을 구축한다는 또 다른 목적을 의식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광역의원 정당명부와 마찬가지로 국회의원 정당명부에서도 여성이 반드시 50% 선출되도록 만드는 당규 제정도 또 다른 쟁점으로서 함께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실천 프로그램이 2003년 한 해를 후끈 달굼으로써 2003년의 제1야당·선명야당은 '민주노동당'(더 정확히 말하면, 민주노동당으로 상징화되는 노동자·민중운동)이라는 생각이 대중 속에 광범하게 자리잡아야 한다. 중도파 정치의 몰락은 좌 대 우, 계급 대 계급, 세계관 대 세계관이라는 새로운 정치 지형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이제 2004년을 의회 진출의 원년뿐만 아니라 대중적 좌파 정치의 원년으로 만드는 게 민주노동당의 과제고, 이러한 민주노동당의 과제를 공문구에 그치지 않게 하는 것이 당내 사회주의자들의 사명이다.
이 투쟁 속에서 우리는 대중의 영광과 승리뿐만 아니라 이러한 결과를 이뤄내기까지의 온갖 우여곡절과 오류에서도 대중과 함께 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대중의 발걸음과 함께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