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세계관적 성경읽기란?
제1장 콘텍스트를 품고 다시 텍스트로
1.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을 찾아가는 성경읽기
전체주의 사고에 빠지기 쉬운 세계관
-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세계”, “관”의 세 가지 요소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돼
- 한국 “기독교”의 미래를 상상하는 데 있어 먼저 “관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 “세계관”을 공부하거나 이야기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 뭔가 행동의 변화를 바라고, 행동의 변화는 “관”의 변화에서 시작되기 때문
- “관”에는 통합성 또는 전체성을 지녀
- 유사 용어인 “견見”(그저 보는 것)과 “시視”(꼼꼼히 들여다보는 것)에 비해 “관觀”은 일정한 관점과 입장을 가지고 보는 것
- 피상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 통합적으로 전체를 파악하는 것
- “세계”는 모든 것을 말하기에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야기하기 쉬어
- 마치 하나님처럼 밖에서 “세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듯한 착각
- 총망라하는 관점으로 보아도 특정 시간과 장소라는 맥락 속에서 형성된 것
-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 세계관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워
-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지 인간은 아니라는 근원적 한계를 무시한 교만
-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경험은 성경을 읽는 틀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 특정 세계관을 보편적인 관점이라고 여기면
- 자기 생각을 “상식의 수사”와 “신적 강요”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정당화해[1]
- 상식의 수사: 자신의 생각을 모두가 상식으로 여긴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 신적 강요: 상식의 수사를 신앙과 연결시키는 것
- 자신의 사고방식을 신앙의 이름으로 강요할 때의 현상
- “세계관”은 전체주의 사고로 이어질 위험에 노출되고, 성경에 뿌리를 둔 세계관이라고 생각할수록 위험은 더 커져
기독교 세계관이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변형될 위험[2]
- 기독교 세계관이 성경의 활력을 담아내지 못하고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로 환원되는 위험에 노출되는 5 가지 상황(Brian J. Walsh)
기독교 세계관이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로 환원되는 위험과 문제점
조건(또는 상황) | 문제점 |
세계관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폐쇄적 공동체의 보호적 에토스(기풍, 관습)가 되어 | - 공동체의 안전과 정결을 지켜야 한다는 두려움에 휘둘리게 돼 - 두려움의 이면인 배제와 혐오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 |
주변 문화와 상관없어지는 것은 | - 역동성을 잃어버린 세계관은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실천도 어려워 - 한국적 상황에서의 실천은 타인을 공격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고립 자초) |
성경의 활력을 잃어버린 채 | - 자신의 세계관을 성경과 동일시하면 더는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어져, 활력을 잃고 깨달음이 없이 자신의 세계관을 강화할 뿐 - 활력을 잃은 성경읽기에 따른 세계관은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됨 |
세계관이 보편적 최종성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며 | - 특정 세계관의 맥락을 인식하지 못해 다른 세계관이나 사람들과 대화 필요 못 느껴 - 자기 방식으로 이해한 기독교를 ‘절대 진리’로 여기며, 다른 세계관을 무찔러야 하는 대상으로 삼아 - 가슴과 상상력으로 품어야 할 세계관이 지성주의 함정에 빠지게 돼 |
그것의 총체적인 완전무결함을 강조하기 때문 |
21세기를 위한 기독교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
- 기독교 세계관이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전락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방법
- 첫째, 우리의 세계관과 성경읽기에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 성경을 읽는 자리가 성경 이해와 세계관에 차이를 가져온다는 사실의 인식과 인정 필요
- 성경읽기는 특정 역사와 문화의 영향을 받아
- 새로운 맥락과 경험은 성경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이해를 넓혀 주어
- 하나님을 더 깊이 인식하기 위해서 어떤 자리가 더 적절한 성경읽기 자리인지 성찰하고 그 자리로 나아가야
- 둘째, 우리의 세계관과 성경읽기는 시대의 과제를 푸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 새 하늘과 새 땅의 전망 속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인도해야
- 그 방향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 하느냐에 달려 있어
-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자리와 방향에 대한 제안
- 첫째, 왈쉬의 완전무결함을 강조하는 위험은 욕망에 대한 성찰을 통해 극복할 수 있어
- 우리의 행동과 삶은 사실 욕망의 결과물
- 욕망의 습관을 그리스도의 주재권 아래 가져가는 제자도의 확장이 필요
- 그래야 세계관의 모든 것을 전체체계로 이해하는 지성주의나 주지주의의 위험을 피할 수 있어
- 둘째, 고지론에 입각한 권력 중심이 아니라, 경계를 넘어 두려움을 벗은 변두리가 삶의 자리가 되어야
- 그런 자리에서 형성된 세계관이 성경의 활력을 담아내며, 주변 문화에 참된 영향을 미칠 수 있어
- 셋째, 더 사랑하고, 더 겸손하고, 더 감사하게 만드는 세계관이 좋은 세계관이며, 그것은 대화하는 세계관이다.
- 기독교 세계관은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세계관이 되어야
- 그럴 때, 우리의 세계관은 하나님의 진리로 더욱 풍성해질 것
- 넷째, 환대와 포용의 복음을 꽃피우는 세계관이 되어야
- 그래야 배타성에 의한 공동체의 ‘정결’을 보호하려는 잘못을 피할 수 있어
- 다섯째, 사회의 공동선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류의 번영을 추구해야
- 이러한 사명이 성경의 종말론적 비전을 지금 여기서 살아내는 것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자리와 방향에 대한 5가지 제안 요약
1) | 지성의 제자도와 더불어 욕망의 제자도를 성찰하며 |
2) | 권력의 중심이 아닌 경계를 넘나드는 변두리에서 |
3) | 대결이 아닌 대화하는 사랑, 겸손, 감사의 덕을 구비한 세계관과 |
4) | 혐오와 배제의 ‘카톡교’가 아닌 환대와 포용의 복음을 통해 |
5) | 교회의 ‘부흥’ 너머 인간의 번영을 추구해야 |
콘텍스트[3]를 품고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을 찾아가는 성경읽기
- 자리와 방향의 5가지 제안에 대한 출현 배경
- 혐오와 차별, 독선과 대결의 근본주의 신학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한국 기독교의 “콘텍스트”에서 나와
- 자리와 방향에 대한 5가지 제안의 성경 텍스트에 대한 공명의 수준
- 이 책이 다루려는 내용이며, 제안은 성경과 잘 공명한다고 확신
- 지지와 공명은 콘텍스트와 씨름하는 역동적 읽기를 통해 확보해야
- 피상적이고 평면적인 텍스트 인용은 성경의 활력을 잃어버리게 할 뿐
- 성경의 활력을 놓치는 길(왈쉬)
- 성경을 1) 정통 신학적 답을 쉽게 구하는 책, 2) 절대적 도덕을 빠르게 찾을 수 있는 설명서 같은 책, 3) 아무런 맥락이 없는 진리를 요약한 책으로 여기는 것
- 위 3가지 잘못을 피할 때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는 성경의 힘을 경험할 수 있어
- 성경의 활력을 놓치지 않으려면
- 성경을 읽으며 질문할 수 있어야 해
-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넘어 자신을 돌아보는 질문
- 말씀의 요구에 저항하는 질문
- 필요하다면 말씀이 만들어 내는 예상 상황에 대한 질문
-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가나안 땅으로 데려갈 것이며 그 일을 위해 모세를 보내겠다고 하시자(출 3장)
- 모세는 자신의 자격을 의심하는 질문을 한다.
- 이런 질문이 오가는 상황에 의해서 비로소 “나는 곧 나다.”라는 말씀을 이끌어내
- 성경읽기는 자신에 대한 성찰과 타자에 대한 공감의 윤리를 함양할 수 있어야
- 신앙이 세상과 소통되지 못하는 이유
- 콘텍스트를 읽고 씨름하지 않고 텍스트에 매몰되는 것(최종원)
- 콘텍스트를 읽고 생긴 질문을 품고 다시 텍스트로 돌아올 때 만나게 되는 것
-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우리의 욕망, 삶의 자리, 세계관을 다시 되짚어 보게 하는 새로운 텍스트의 세계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하며 되돌아서지 말자
- 진실만을 추구하는 성경읽기는 논점을 피해가지 않아
- 사람을 살리는 진실은 종종 “오랫동안 현명하고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여 온 제도”를 부정
- 논점을 피해가지 말아야 할 이유
- 진실을 추구하지 않고, 찾지 않고, 드러내지 않았을 때, 약한 이웃들이 기절하고 신음하기 때문
- 우리는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나아가야 하며, 콘텍스트를 품고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야 해
2. 하나님의 창조를 긍정하며 대화하는 성경읽기
- ‘세계관적 성경읽기’란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성경읽기
-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 “사람은 죄인이다.”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중에서 죄인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면 성경읽기 밑바탕에는 창조가 아닌 인간의 타락이 놓여 있는 것
-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첫 시작과 뿌리는 하나님 창조
창세기 1:1에 기초한 성경읽기
- 성경에서 ‘세계’가 등장하는 첫 말씀으로 만나
-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존재를 의미
-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계의 모든 것을 창조하심
-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에는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도 포함
- 기독교인, 비기독교인(무신론자, 다른 종교인),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등
- 세계관적 성경읽기란?
- 1)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세상을 품는 성경읽기
- 거룩해 보이는 것과 세속적으로 보이는 것, 몸과 영혼, 육체와 정신 등
-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다 품지 못해
- 2) 온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생각하는 성경읽기
- 천지창조 사실은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야
- 피조물을 보시고 좋았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 속에 깃들어 있음을 알려 줘
- 창세기 1:1을 믿는다는 것은 창조세계는 선하고 거룩하다는 것을 믿는 것
- 3)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명심하는 성경읽기
- 우리가 창조자가 아니라는 고백은 성경읽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성경 이해는 결코 완벽할 수 없어
- 최선을 다해도 말씀에 대한 나의 이해가 틀릴 수 있고, 맞아도 하나님은 나의 예상과 달리 행동하실 수 있는 자유로운 창조주이심을 인정해야
- 우리의 성경읽기는 겸손해야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어
- 나의 생각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생각을 절대화하는 우상숭배와 같지만, 겸손한 성경읽기는 타인과의 대화로 이어질 수 있어
파괴된 관계와 성경읽기
- ‘창조’와 함께 이야기되는 ‘타락’과 ‘구속’은 성경읽기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 ‘타락’은 모든 것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 핵심 결과는 관계의 파괴
-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창조세계와의 관계가 타락으로 인해 손상돼
- 손상된 관계에 ‘자기 중심성’이 결합하여 성경읽기가 망가지게 되면
-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가 손상돼
-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이해하기 쉬워져
- 삶이 바뀌기는커녕 자기 생각을 강화하여 ‘해석학적 우상숭배’를 범해
- 하나님의 뜻을 빙자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성경을 이용
- 둘째, 사람사이의 관계를 손상시켜
- 이웃과의 공동체를 잊은 채 성경을 사사로이 읽게 돼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복이 될지라”(창12:2)의 복에 집중하며, “나, 나, 나”만 되뇌는 성경읽기는 타락한 성경읽기
- 셋째, 인간과 창조세계의 관계를 손상시켜
- 환경과 생태를 무시하는 인간 중심적 성경읽기가 돼
- 타락의 영향을 받은 자기중심적 성경읽기는 어떤 본문을 읽더라도 개인적인 관심사를 벗어나지 못해
십자가의 구속과 성경읽기
- 구속이란?
- 창조를 되찾는 회복이며, 창조의 모든 영역에 존재하는 왜곡된 방향을 바로잡는 것
- 십자가의 구속이 어떻게 자기중심적 성경읽기를 벗어나게 하는가?
- 첫째, 십자가의 구속은 권력지향적, 승리주의적 성경읽기를 거부함
- 죽음이 승리라는 비밀을 아는 사람은 살아남아야 성공한 것이라는 승리주의적 세계관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어
- 성경을 읽을수록 삶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은 자아실현과 입신양명의 타락한 성경읽기일뿐
- 둘째, 십자가의 구속은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성경읽기를 촉구함
- 주님은 주리고 나그네 되고, 병들고 옥에 갇혀 고난받는 사람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동일시하심
- “사회계층화와 성과 인종의 장애물…문자주의, 도덕주의, 영웅주의처럼 두려움을 심어 주고 유해한 성경읽기로 이어지는 신학”과 싸워[4] 십자가의 구속이 요구하는 성경읽기로의 방향을 전환해야
- 셋째, 십자가 구속은 복음의 총체성을 깨닫는 성경읽기와 함께함
-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죄를 처벌하고, 죄를 용서하셨고, 악과 사망에 대해 승리하셨고, 인류에게 자유와 참 생명의 길을 주셨음
- 온 창조세계를 썩어짐과 탄식에서 해방시키심
자기중심성을 넘어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몸을 담그는 성경읽기
- 세계관적 성경읽기의 특징
- “좋으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긍정하며 타자와 겸손히 대화하는 성경읽기”
- 이러한 성경읽기가 우리의 세계관을 변화시켜
-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성경을 ‘자기 확신 강화제’로 사용하게 돼
- “자기 중심성을 넘어 세계에 몸을 담그는 성경읽기”
- 이러한 성경읽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변화시켜
- 사사로운 행위로 끝나는 골방 성경읽기는 자기중심성에 매몰된 타락한 성경읽기
- 성경 저자의 세계관 속에서 이해하려는 성실함과 나의 읽기가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함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 그럴 때 나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 나의 필요보다 이웃의 필요, 인간만이 아니라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공유하는 참된 은혜가 있게 돼
- 십자가 구속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읽기를 통해 얻게 될 변화
- 성경을 읽을수록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나아가며, 번영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주님을 만나고
- 자기 세계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광활한 세계에 몸을 담그게 될 것
제2부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
제2장 지성 너머 욕망의 제자도
3. 봄이 아픈 사람들과 부르는 노래
하나님, 어디서 무엇을 하시나요?
- 악과 죽음의 세상에서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시는가?
- 시편에는 탄식의 노래가 많고, 예수님조차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고통에 탄식하셔
- 십자가상 예수님의 부르짖음에는 무능력이 아니라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만나
- 공감하지 못하는 신은 능력 없는 신
- 하나님은 결국 십자가로 악을 이기셨음
- 악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자기희생, 자기희생의 사랑으로 악을 정복
머리뿐 아니라 마음과 몸을 변화시키는 세계관
- 성경읽기는 생각하는 머리, 공감하는 마음, 자기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는 몸을 형성할 수 있어야
-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씨름하는 태도를 만드는 성경읽기가 필요
봄이 아픈 사람들과 함께 부르는 노래
- 시편 137편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의 울음으로 시작
- 평소 수금으로 반주하며 불렀던 시온의 노래는 찾을 수 없어
- 노래를 멈출 수밖에 없던 이유는 시온의 노래가 조롱거리가 되기 때문
-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고, 타향에 포로로 잡혀 왔기에 울음 외에 다른 소리는 있을 수 없어
- 에돔은 유다 자손의 형제였지만 유다의 패망을 기뻐하며 재앙을 방관하고 바빌론과 한패
- 예루살렘을 잊지 않겠다는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을 방관하며 조롱의 막말들을 뱉었던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기억을 호출하며 분함을 표출
-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에 헐어 버리라….하였던 에돔 자손을 기억하소서” (시137:7, 저자 번역)
- 시편 137편의 마지막 외침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올 때 그들의 어린아이들이 바위에 메어침을 당하는 잔혹하였던 일을 짐작할 수 있어
- 자신들이 어린아이를 잃은 방법 그대로 바빌론에 행하여 자신들의 억울함을 갚아주는 자에 대한 잔혹한 축복임
- “멸망할 바빌론 도성아…네 어린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시137:8-9, 새번역)
- 이것은 죽은 자녀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처절한 갈구요, 진상 규명과 공정한 처벌, 책임을 지라는 호소
평론가가 아니라 여행자의 성경읽기
- 악과 고통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평론가의 자리에 머물 수 없어
- 악을 대하는 두 가지 방식(J. I. 패커)
- 발코니에 있는 사람: “어떻게 악이 하나님의 주권 및 선하심과 양립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을 찾아내는 것”이 문제
- 길을 걸어가는 사람: “어떻게 악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인가가 과제
- 고통과 고난 가운데 함께 울고, 분노하고, 부르짖을 때 비로소 독생자를 보내신 비밀의 빛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어
- 냉철한 이성만이 아니라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을 형성하는 것도 기독교 세계관이 해야 할 일
- 이제 기독교 세계관은 지성의 제자도를 넘어 그리스도의 가슴과 공명하는 제자의 가슴을 형성해야
4. 예배 중독자 사울
- 기독교 세계관은 삶의 습관과 태도에 배어 있는 욕망을 진지하게 성찰해야
- 욕망에 찬 사람이 지도자로 있는 공동체나 사회는 위기에 빠지거나 파멸에 이르러
- 그릇된 욕망을 숨기는 방법은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
- 예배와 같은 종교 행위 이면에 감춰진 욕망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 종교가 없는 사람들의 78.2%가 한국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변(2020년 2월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
- “대면 예배”를 둘러싼 논란으로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을 지나며 완전히 파산
- 첫번째 대유행 시작이었던 사이비 신천지 밀접 집회, 두번째 대유행은 8월 1,000명을 넘는 확진자가 발생된 특정 교회의 광화문 집회, 세번째는 부산의 대형 교회 폐쇄 명령 받음, 한 선교단체의 집단 감염
- 이후 한국 교회는 자신의 종교 행위를 우기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게 돼
-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떨어뜨린 힘의 정체
- 중심을 향한 욕망, 권력을 향한 욕망, 주변부로 밀려나는 두려움
- (일부) 목사들이 대면 예배를 고집하는 이유
- 스크린과 TV중계 예배를 독점했던 권력이 해체되자 이젠 ‘현장 예배가 생명’이라고 해 권력을 지키기 위해 신앙의 명분을 사용
- ‘이성’은 욕망을 설득시킬 매력이 없으며, ‘욕망’은 이성의 명령을 따를 참을성이 부족[5]하기 때문
예배인가 주술인가
- “예배 중독”이라고 할 만한 사울의 잘못
- 점점 줄어드는 사람들을 보며 초조해하다가 스스로 번제를 드리는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러(삼상 13-15장)
- 아말렉과의 전쟁시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좋은 것으로 제사한다며 양과 소를 살려두어(삼상15:9)
- 사울과 요나단의 대조점
- 요나단은 자신의 무기를 든 자에게 블레셋을 공격하자며 나설 때
- 사울은 제의적 의복인 에봇을 입고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며 에봇을 가지고 혹시 점술 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사울은 사무엘과 결별한 후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통로를 상실해 점술에 의존
-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조작하려는 사울과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를 인정한 요나단은 명확히 대조됨
- 요나단은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조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하나님이 무조건 자신을 도와주실 것이라 확신하지 않음
-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려는 듯 제사장 아히야에게 ‘에봇’을 가져오라 하지만, 상황이 급박해지자 하려던 것을 멈추고 전투에 참여
사울의 어리석은 맹세
- 사울의 어리석은 맹세
- 사울은 전쟁에 이길 때까지 아무도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군인들에게 맹세시킴
- 요나단은 이 맹세를 듣지 못해 전쟁 중에 꿀을 먹고,
- 군인들은 전쟁으로 굶주려 양, 소, 송아지를 마구잡아 피째 먹는 죄를 저지름
- 범죄의 근본 원인은 사울의 어리석은 맹세와 명령
- 사울과 아히야의 정치적 목적과 하나님의 침묵
- 정치적 목적
- 사울에게는 블레셋에 대한 완승이고, 아히야에게는 사무엘을 대체하는 제사장직을 하나님에 의해 보장받으려 해
- 하나님의 침묵
- 사울이 블레셋을 끝까지 추격하자는 제안에 백성은 받아들였으나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묻자고 하고,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심
- 사울은 누구의 잘못인지 알기 위해서 했던 제비뽑기로 뽑힌 요나단을 처형하겠다고 하지만, 사실 잘못은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며, 흥정하는 사울임
욕망이 드러나고 형성되는 예배의 자리
-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의 익숙한 종교 행위의 의미
- 사람을 무시하고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과도한 예배 집착은 불안함을 떨치려는 자구책일 뿐
- 겉모습이 신앙적이어도 하나님을 조작해 낼 수 있다는 망상 가운데 드려지는 이교적 제사일 뿐
- 사울의 예배가 주술과 별반 차이가 없는 이유
- 예배를 통해 자신의 경험에 ‘아마도’라는 불확실성을 제거하려 했기 때문
-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답을 얻지 못하자 마침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불안감을 떨칠 수 있도록 점술을 구하는 자리까지 몰락
- 중독의 치료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함에 따른 질문과 성찰
- 2020년 한국 교회의 비상식적이고 고집스러운 모습은 중독되어 있던 권력이 사라지는 상실감을 이기지 못한 금단 현상은 아니었을까?
- 이웃을 사랑하는 예배자를 세우기 위해서는 욕망이 드러나고 형성되는 예배를 통해 성찰하고 바로잡아야
- 중심을 향한 욕망이 아닌 경계를 넘는 용기의 자리로 우리 삶의 자리를 옮겨야
제 3장 중심이 아닌 경계의 삶
5. 변두리에서 만들어지는 세계관
- 성경읽기는 세계관을 변화시키지만, 성경을 읽는다고 항상 변하는 것은 아님
- 성경읽기가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이 성경읽기에 영향을 끼쳐
- 성경을 읽을수록 고집이 세진다면 성경을 자기 확신 강화제로 읽는다는 뜻
- 성경읽기 영향의 방향을 아는 중요한 잣대는 ‘겸손’
- 성경을 자기 확신 강화제로 읽을 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해
세계관은 성경읽기에 영향을 미친다
- 마24:36-41에서 ‘데려감’과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유(미들톤과 왈쉬)
-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상황을 노아의 홍수에 빗대어 어떤 사람들은 “데려가고”(be taken), 어떤 사람들은 “버려둠을 당할 것”(be left)이라고 말씀하심
- 이 비유에 대한 우리의 생각
- ‘데려감’을 받은 사람: 구원을 받았고
- ‘버려둠’을 당할 사람: 멸망을 당한다
- 이때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번역된 표현은 “남겨질 것”이라고 번역할 수 있기 때문에 정반대로 이야기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
- 새번역은 39절의 ‘데려가다’라는 동사를 홍수 심판의 맥락을 살려 ‘휩쓸어가다.’ 라고 번역
- 마찬가지로 40-41절의 데려감을 당하는 사람들은 심판을 의미하고, 남겨진 사람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 구원받은 사람이 됨
- ‘버려둠’이라는 한글의 부정적 번역과 달리 중립적인 영어 표현으로도 마찬가지의 오해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 그것은 전부터 세상이 불타 없어질 것이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변두리에서 만들어지는 세계관이 필요하다
- 어떤 세계관이 성경 전체의 전망에 잘 어울리는 성경읽기를 가능하게 할까?
- 온 세상을 품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완결을 바라보는 세계관
-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님의 갈릴리 변두리 삶, 성문 바깥 십자가에서의 죽음, 여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신 부활의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세계관
- 언제 우리 삶의 자리와 방향이 예수님의 것을 닮게 되는가?
- 성령께서 우리의 선입견을 깨뜨리고 새로운 시각을 주시는 자리(중심이 아닌 경계 너머의 변두리)에서 세계관이 만들어질 때
- 예수님의 첫 설교를 볼 때 하나님을 친밀히 경험할 수 있는 자리는 변두리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놀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작은 자에게서 시작되는 은혜
- 시리아 왕이 아끼는 강한 용사 나아만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각
-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나병에 걸린 이방인 바깥사람
- 나병환자인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진 통로는 무엇이었을까?
- 나아만 아내에게 시중드는 여종은 여주인에게 나아만을 낫게 할 수 있는 예언자가 있다는 길을 알려주면서 나아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됨
- 하나님의 역사는 크고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변두리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시작돼
작은 자를 통해 이어지는 은혜
- 엘리사의 요청과 나아만 일행의 반응
- 많은 선물을 실은 말과 함께 화려한 나아만의 행렬이 엘리사의 문 앞에 도착했지만 엘리사는 사환을 보내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고만 해
- 나아만은 사환을 통해 말을 전해 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받아 본 적 없는 푸대접에 분을 참지 못하고 그 장소를 떠나
- 푸대접에 익숙한 나아만의 종들은 엘리사의 말을 들으라고 나아만을 설득
- 자존심을 꺾고 종들의 말을 따랐던 나아만이 받은 것
- 기적처럼 병이 나았고, 하나님이 없던 나아만에게 은혜가 흘러 들어와
- 나아만의 교만으로 끊어질 뻔했던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를 통하여 이어졌나?
- 이름없는 변두리의 작은 종들
중심을 향한 욕망, 은혜의 걸림돌
- 나아만이 치료되어 새 신앙을 가지고 돌아간 후 게하시가 등장
- 게하시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시종임
- 그는 종교적 중심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생각과 행동은 참된 신앙과 거리가 멀어
- 나아만, 엘리사, 게하시
- 나아만은 병이 나은 후 엘리사에게 선물을 주려 했음
-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하나님을 바르게 알리기 위해 선물을 거절
- 게하시는 선물을 가지고 돌아가는 나아만을 쫓아가 거짓말을 통해 선물을 얻어냈음
- 엘리사는 게하시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고, 책망과 심판이 이어짐
- 게하시에게 종교적 중심은 자기 욕심을 효과적으로 채우는 도구에 불과
- 은혜의 통로가 될 것 같았으나, 은혜의 걸림돌이 될 뿐이었음
하나님의 은혜 속에 세계관 변화를 경험하는 작은 자의 변두리 자리
- 나아만 이야기에서 만난 두 종류의 사람들
- 은혜의 걸림돌이 되었던 “인싸”들
- 이스라엘 왕: 권력의 자리에서 은혜의 기회를 전쟁으로 바꿀 뻔했고
- 나아만: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서 상한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두고 화내며 돌아갈 뻔했음
- 게하시: 종교 서비스를 팔아 욕심을 채워 하나님의 은혜를 왜곡시킴
- 변두리의 이름 없는 “아싸”들
- 나아만 아내의 어린 여종: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나아만에게 흘러가기 시작
- 나아만의 종: 나아만의 교만 때문에 끊어질 뻔한 하나님의 은혜를 이어줘
- 중심을 추구하는 길은 욕망을 따라 점점 고집스러워짐
- 작은 자의 변두리 자리 길은 부드럽고 겸손한 사람이 돼
- 우리의 세계관이 변두리 자리에서 만들어 질 때 성경읽기는 우리를 변화시킬 것
6. 경계를 넘는 에스더
- 기독교를 향한 공격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것
- 특정한 교리나 논쟁들에 대한 파편적인 변증이 아니라,
-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것”[6]
- “기독교는 세계관이다.”라고 주장한 이유
- 당시 시대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고 지키고 싶었기 때문
- 따라서 세상이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겸손히 귀 기울여야 하고,
- 어떤 자리와 방향이 기독교 신앙을 세상에 잘 보여줄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위기의 유다인들
- 페르시아 왕후 에스더가 나아간 삶
- 죽음을 목전에 둔 유다인들을 위해 중심의 삶에서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는 경계의 삶으로 나아가
-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에 잘 나타나
- 에스더가 왕후가 되어 죽음을 각오하기까지 변화하는 과정(에 3장)
- 페르시아 왕후 와스디가 왕의 말을 듣지 않아 폐위되고 에스더가 왕후가 됨
- 왕궁 신하 하만은 유다인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다며 분노함
- 하만은 모르드개를 비롯한 그의 민족을 다 죽이려고 왕의 조서를 받아냄
- 조서가 공포되자 수산성은 어지러워지고, 왕후 에스더와 유다인 모르드개는 운명이 갈라지는 듯함
왕궁의 삶을 제안하는 에스더
- 위기에 처한 에스더와 모르드개 사이에 오고간 첫 번째 대화 전개 내용(에 4:4)
- 모르드개는 유다인을 다 죽이라는 조서로 낙심가운데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대궐 문 압으로 나옴
- 에스더는 모르드개와 달리 피상적이고 권력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함
- 모르드개는 옷 갈아입고 조용하면 좋겠다는 에스더의 사적 해결책을 거절
-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베옷을 입고 난리쳐 봐야 길이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
- 에스더와 모르드개 간 대화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 우리에게도 종종 튀지 않고, 괴로움도 면할 수 있는 권력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 기회가 되면 뭔가를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 그런 방식은 공동체 전체가 아닌 개인적인 문제 해결에 머물기 쉬워
왕궁에 머무는 에스더
- 에스더와 모르드개 사이의 두 번째 대화 전개 내용(에 4:5-9)
- 에스더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하닥을 통해 상황을 알아봄
- 모르드개는 자신을 찾아온 하닥에게 자신이 당한 일을 알려 줌
- 에스더가 조서 초본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 자기 민족을 구할 것을 부탁함
- 에스더와 모르드개 사이의 세 번째 대화 전개 내용(에 4:10-14)
- 에스더는 유다인이 죽게 된 상황을 알았지만, 민족의 목숨보다 자기 목숨을 걱정
- 모르드개는 왕궁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에스더는 왕궁 안의 상황을 서로에게 알림
- 우리도 중심의 질서와 방법에 익숙해지면, 경계 너머 변두리식 방법은 너무 위험하고 우습고 순진하게 느껴질 뿐
경계를 넘어오는 에스더
- 왕에게 나아가는 것이 위험하므로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제안을 거절해
- 하지만 모르드개는 경고와 함께 다시 결단을 요청
- 경고: 어찌되었든 유다인은 위기를 모면할 것을 확신하지만, 에스더가 잠잠하면 결국 에스더와 그녀의 집이 멸망할 것
- 다시 결단 촉구: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14)하며 경계를 넘어오라고 한 번 더 초청
-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분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
- 이웃의 필요를 위한 부르심에 경계를 넘어설 수가 있느냐가 중요하며,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어
- 에스더의 선택: 위기에 처한 유다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왕궁의 질서와 방식을 깨뜨리겠다고 결심
경계를 넘게 하는 힘 – 바깥과의 끊임없는 대화
- 무엇이 중심을 고수하던 에스더를 변하게 만들었나?
- 그것은 왕궁 외부와의 끊이지 않은 대화 때문
- 보낸 옷을 모르드개가 거절했을 때에도 사람을 보내 모르드개의 상황을 살펴
- 궁전 바깥의 모르드개의 존재는 에스더의 변화에 결정적 영향을 끼침
- 삶의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의 존재는 내가 아는 방식이 전부가 아니며,
- 하나님 나라는 나의 경험과 편견보다 훨씬 크고 풍성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줘
- 중심이 부여하는 힘을 통해서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의 주의점
- 중심을 향한 욕망을 포장한 것일 가능성이 커
- 중심의 힘을 선망할 때 일상을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공동체가 필요해
- 에스더 같이 왕후가 되어야 세상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할 때의 문제점
-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고 구하는 일은 무한히 미루어 져
- 중심을 맴돌며 경계를 넘지 않는 왕궁의 시혜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지 못해
- 에스더 이야기가 주는 격려와 도전
- 왕궁의 삶을 욕망하는 우리에게 경계 바깥으로 가는 용기를 내어 보라 격려
- 경계 바깥의 삶을 말해 주는 모르드개가 되어 보라고 도전케 해
[1] Brian J. Walsh, “Transformation: Dynamic Worldview or Repressive Ideology?” International Journal of Christianity & Education 4.2(2000): 104
[2] 위의 책 101-114
[3] Context: 짧게는 3년, 길게는 2020년대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 형성되어 온 30여 년의 시간(전성민)
[4] 밥 에크블라드. 『소외된 자들과 함께 성경읽기』.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10. 20.
[5] 김진혁, 『순전한 그리스도인: C. S 루이스를 통해 본 상상력, 이성, 신앙』(서울: IVP, 2020), 155.
[6] James Orr,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The Christian View of God and the World』, 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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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적 성경읽기
김장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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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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