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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삶에 늘 함께하신 주님
평화신문 제2회 신앙체험 수기 우수상 수상작
마산교구 하동본당 황점순 카아린
11월 위령성월이 되면 특별히 윤봉문 요셉 순교 복자님을 떠올리면서 감사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저에게는 아주 특별한 사연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자가 되기 전 ‘여호와의 증인’들이 저를 찾아와 하느님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기에 저의 집 문을 열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7년 가까이 그들과의 만남과 공부가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공부한 지 6개월이 지나면 침례를 받고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데 저는 증인이 되기를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계속되는 그들의 방문에 남편도 싫은 내색을 하면서 저에게 “사이비 종교에 빠지지 말고 신앙을 꼭 갖겠다면 천주교에 다니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저보다 먼저 가톨릭 신자가 된 여동생 내외도 “천주교에 대해서도 공부해보고 어떤 종교를 선택할지를 결정하자”면서 교리 공부를 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1985년 정흥식 마르코 신부님에게 교리를 받고 세례 준비를 하는데, 신부님께서는 남편이 비신자이니 남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남편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하니, 열심한 불자이신 시어머님 핑계를 대면서 어머님 돌아가신 후에나 성당에 나가라고 하면서 반대했습니다. 시어머님은 다음 해인 1986년 향년 95세로 돌아가셨고, 저는 다시 교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교리 기간이 끝나고 남편에게 세례 받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하였고, 남편은 “꼭 성당에 다니고 싶으면 1년에 한 번 정도 나간다는 조건으로 승낙하겠다” 라며 마지못해 허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986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에 황봉철 베드로 신부님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의 감정이나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가슴 벅찬 순간이었습니다. 새로이 태어난 순수한 아가의 마음이 이러했을 것만 같았습니다. 세례 때 선물로 받은 십자고상, 성모상 등을 안방 장식장 위에 고이 모셔 두고, 처음으로 저희 가정을 축복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저녁 무렵 귀가한 남편이 낯선 십자가와 성모상을 보는 순간 화를 벌컥 내면서 “도대체 이것들이 뭐냐?”며 성물들을 문밖으로 집어 던져 산산조각을 내고 말았습니다. 축복받기를 바랐던 저의 마음도 남편의 이런 모습 때문에 부서진 성물 파편들처럼 조각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용기를 내어 평일 미사, 주일 미사 그리고 레지오 활동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물론 남편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이지요. 남편에게 흠 잡히지 않으려 집안일이며 남편 뒷바라지, 육아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세례받기 전보다 몇 배는 더 노력했습니다. 새벽 미사가 있는 날은 남편 잠을 깨울까 싶어 더 조심스러웠습니다. 그 와중에 건넌방에서 잠들어 있던 여섯 살배기 막내도 살그머니 나와서 함께 미사를 다녔습니다.
세례 받은 그해 11월 어느 날 새벽 미사에 가서 보니, 신자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5시에 미사가 시작되는데, 4시도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참을 혼자 성체조배하고 미사까지 마치고 성전을 나오니까 저의 삼 남매가 “엄마 큰일 났어요. 막내가 주무시는 아빠한테 엄마가 혼자만 성당 갔다고 울면서 얘기한 바람에 아빠가 화가 많이 나서 빨리 엄마 데려오랬어요” 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온몸이 굳어지면서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불안 불안했던 폭탄이 터져 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집에 들어서니 대문은 못을 박아 열지 못하게 해 놓고, 현관이며 창문의 유리는 모두 박살 나 있었고, 성경, 십자가, 성모상 등 성물들을 밖에 모아 놓고 휘발유를 그 위에 뿌려 놓았습니다. 남편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모두 태워 버리고 같이 죽자”며 엄포를 놓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도저히 견뎌 낼 수 없어서 한참을 고민한 끝에 도망을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막내만 데리고 가면 남아 있는 두 녀석이 너무 힘들어 할 것 같아서 아이들의 담임교사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으니 아이들을 집에 보내주세요”라고 연락을 드렸고, 집으로 달려온 아이들을 보고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엄마는 너희 아빠가 무서워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으니까 엄마 따라갈래? 아니면 아빠랑 살래?” 그랬더니 세 아이 모두 엄마 따라가겠다며 저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 당시 첫째가 10살, 둘째는 8살, 막내가 6살이었습니다.
급히 서둘러 현금과 통장, 패물, 옷가지 등을 챙겨 마을 어귀에서 구례행 버스를 탔습니다. 구례역에 도착해서 자장면을 시켜 아이들을 먹이니 얼마나 맛있게 먹고 신나하는지 참 어이가 없고 앞이 깜깜했습니다. 서울행 기차를 탄 후 막상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할 즈음에는 알 수없는 두려움이 저를 짓누르기 시작했습니다. 끊임없이 묵주기도를 바치며 주님께 빌고 또 빌었습니다. “주님! 저에게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너무너무 무섭고 두렵습니다” 하면서요.
이튿날 새벽 서울역에 도착해서 신림동에 살고 있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했더니 깜짝 놀란 동생 내외가 마중을 나왔습니다. 우리의 행색을 본 제부는 ‘뭔가 큰일이 생겼구나’ 싶었는지 모르는 척해 주었고, 저는 민망해서 “아이들이 가정 실습을 해서 놀러 왔다”며 어설픈 변명을 했습니다. 여동생에게는 “형부에게서 나를 찾는 전화가 오면 절대로 모른다고 해라” 하고 신신당부를 해 두었지만 난감하고 엄청난 사건이라 참으로 힘들었을 겁니다.
동생네에 도착한 다음 날 신림동성당에 가서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남편 때문에 신앙생활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 삼 남매를 데리고 도망 나왔습니다” 라며 경상도 여인의 고해를 다 들어주신 신부님께서 “미사 끝난 뒤 사제관으로 오십시오” 하며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사제관에서 신부님께 자초지종을 모두 말씀 드렸고, 저의 사연을 들으신 신부님께서는 한참을 고심하시더니 “신앙 때문에 힘들게 하는 남편과는 이혼 사유가 됩니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제가 수녀님들과 함께 카아린씨를 위해 기도해 드릴 테니 고향으로 내려가서 잘 참고 견뎌서 성가정을 이루게 되면 주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실 겁니다”.
신부님의 그 말씀에 힘을 얻어 집으로 내려가야겠다고 결정을 하고 난 후에는 불안하고 괴롭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여동생은 이왕 이렇게 서울 올라온 김에 성지순례도 하고 쉬었다 가라고 했습니다.
다음날부터 동생네 아이들과 우리 식구가 함께 절두산성지에 가서 남편을 위한 생미사도 봉헌하고, 아이들에게는 묵주 반지와 목걸이도 사주면서 겁도 없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고 있던 그 시간에 하동에 같이 살고 있는 큰집에서는 딸 다섯에 아들 하나인 귀한 아들이 가출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저와 저의 아이들의 가출은 아무도 몰랐고, 남편과 큰집 식구들은 집 나간 조카 찾느라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제부에게 전화해서 큰집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너희 처형을 빨리 집으로 내려보내라”고 부탁하더랍니다. 일주일을 서울에서 보내고 하동에 내려와 집에 들어서니 남편은 반갑게 맞아주면서 “이제부터는 절대로 성당 다니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겁니다. 그런 남편에게 저는 주일만은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 저와 아이들은 아빠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레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복사도 열심히 서고, 삼 남매 모두 주일학교도 빠지지 않고 잘 다녔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레 남편이 따돌림 당한 느낌을 주었고, 심기가 편치 않아 보이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저의 마음도 또한 불안해져만 갔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전 기도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커다란 몽둥이로 밥상을 내리치면서 “애비가 고생해서 번 돈으로 잘 먹고 잘사는 줄 모르고 어디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냐?”며 밥상을 둘러엎었습니다. 어쩌다 수녀님께서 방문하신 것이 눈에 띄는 날이면 반드시 아이들을 불러 앉혀 놓고 혼쭐을 내곤 했습니다. 성당과 관련해서 생기는 모든 일은 당신 눈에 거슬렸다 하면 구타와 욕설이 나왔고, 온갖 가재도구는 날아다녀야 했습니다.
어느 날은 밤늦게 집을 나와 동네 산기슭 밑 폐가에서 남편을 피해 떨면서 숨어 있는데, 마침 마을 이장님이 우범 지역이라 랜턴을 비추며 순찰을 나왔다가 저를 발견하고서는 깜짝 놀라기에 “이장님, 저 잠깐만 있다 가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모른 척해주세요” 하니까 아무 말 없이 가셨습니다.
어느 날은 남편의 구타를 피해 도망치고 있는데, 막내가 울면서 끝까지 따라왔습니다. 지인들 집에 찾아 들어갈 수도 없고 해서 비어 있는 남의 가게에 들어가 박스를 깔고 막내와 함께 울면서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습니다. 셀 수 없이 반복되는 이러저러한 일들을 겪으며 참아 내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었습니다.
이웃집에서도 아이들에게 “너희 엄마 아빠는 무엇 때문에 매일 싸우냐?” 하며 물었고, 아이들은 “우리 엄마한테 하느님 믿지 말라고 아빠가 때려요” 하고 이웃 사람들에게 대답하더랍니다. 어느 날은 아이들을 주일학교에 보낸다는 이유로 행패를 부리며 때리고 나간 뒤 저는 큰딸에게 “영미야! 이제는 도저히 이 집에서 살아 낼 수가 없다. 아빠 돈으로 사 입은 이 옷도 모두 벗어 놓고 알몸으로 나가야겠다. 엄마 없어도 동생들 잘 돌보며 살 수 있겠지?” 하면서 울고 있으니 “엄마 이제 조금만 참으면 엄마가 아빠를 이길 수 있어요. 이번만 참으세요” 하고 저를 위로 하였습니다. 아빠를 이길 수 있다는 딸아이의 그 말이, 제 아이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또 한고비를 넘겼습니다.
이러한 악몽 아닌 현실들이 끊이지 않고 반복되었지만 제가 참고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새벽마다 성체조배하면서 “저를 구박하며 힘들게 하는 어리석은 남편을 용서해 주시고, 부디 성가정 되게 해주세요!” 라고 빌고 있는 저를 주님께서는 항상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그 시련의 끝자락에 또 한 번의 사건이 터졌습니다. 당신만 빼고 모두 성당 다닌다는 이유로 불러 앉혀 놓고 칼로 위협하면서 절대로 성당에 다니지 말라는 겁니다. 묵묵부답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까 제 머리 위로 커다란 전축을 내리쳐서 머리가 터지고 선혈이 낭자해지니 아이들은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벌벌 떨면서 엄청난 공포에 떨고만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뭇매에 참다못한 저는 남편에게 울부짖으며 소리쳤습니다. “이제는 무서워서 당신과 도저히 살 수 없으니 이혼하겠습니다” 하니까 이런 내 말에 미친 듯이 길길이 날뛰며 “내가 이혼해 주면 당신은 그렇게 좋아하는 하느님 믿으며 행복하게 잘 살겠지만 나는 애들 셋 데리고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같이 죽자” 하면서 남편의 행동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번져갔습니다.
그 순간 저의 머릿속에 불현듯 스쳐 가는 생각이 “일보 전진을 위해 이보 후퇴하라”였습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남편에게 “여보! 그렇다면 이혼은 하지 않고 가정을 지킬게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한 마디에 순식간에 제정신이 든 남편은 깨진 유리 파편이며 부서진 전축, 핏자국 등을 모두 청소하고 정리한 후에 의사 선생님을 집으로 모시고 와서 저를 치료하게 하였습니다.
이 사건 후에 3개월가량 성당에 나가지 않고 숨을 고르며 자숙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보며 남편은 “하느님 믿지 않고 나를 믿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아가면 당신이 원하는 것 다 해줄게” 하면서 안정을 찾는 듯 보였습니다. 아이들에게도 다정다감한 아빠가 되어 주었고, 헌신적이며 가정적인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안 분위기가 정상이 되고 차츰 편안해지자 또 다시 남편의 눈치를 보며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한순간도 잊지 않고 주님께 간구하며 매달렸습니다. 저의 기도 제목은 오로지 ‘성가정 되게 해 주십시오’였으니 이런 저를 주님께서 어찌 그냥 두셨겠습니까. 원하는 것 주실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저를 귀찮아하셨을까요?
몇 차례 교리 받을 기회가 지나쳐 갔지만 남편의 마음이 조금씩 변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이제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기에 평소 남편과 친밀한 교류가 있고 존경하는 선배 후배 신자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렸습니다. 기도해 달라고, 도와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함께 기도할 테니 끝까지 용기 잃지 말라는 격려였습니다. 남편은 마음이 움직이고 변해 가면서 교리 받을 결심을 하게 됩니다.
1991년 1월 드디어 예비신자 환영식에 남편이 참석했습니다. 많이도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였지만, 사목위원들과 신자들 모두가 조심스럽게 반기며 맞아 주었습니다. 환영식이 시작되고 신부님의 인사 말씀이 끝나갈 즈음, 갑자기 회합실 문을 열고 뛰어 들어 온 막내가 “아빠! 큰집 주유소에 불이 났데요. 빨리 가보세요” 하며 소리쳤습니다.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간 남편을 뒤따라 저도 뛰어가서 상황을 살펴보니 천만 다행히도 주유소에 불이 난 게 아니고, 인접해 있는 버스 터미널 사무실이었습니다.
소방관과 함께 불을 다 진화한 뒤 새까만 물을 온통 뒤집어쓴 채 나오면서 하는 말이 “내가 미친놈이지. 이 시간에 성당 가서 앉아 있는 내가 미친놈이지” 하며 자책하는 남편에게 “그 시간에 당신이 다른 곳에 있었다면 정말로 주유소가 불에 탔을 거요. 모두들 걱정하고 계실 터이니 성당으로 갑시다” 하니까 남편은 저를 따라왔습니다. 성당에서는 신부님과 신자들 모두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엉망진창이 되어 돌아온 남편에게 큰 박수로 위로하고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요란하게 시작된 교리 기간 6개월 내내 살얼음판을 딛는 기분으로 마음 졸이며 지냈습니다. 중간 중간 몇 차례 교리책을 길바닥에 내던지며 미친 듯이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힘들고 어렵게 교리 공부를 끝내고 1991년 6월 29일 드디어 세례식 날이 되었습니다. 너무 기쁘고 행복함에 가슴 벅찼지만 내색도 못 하고 아이들과 축하 준비를 했습니다.
꽃다발과 선물도 예쁘게 포장해 놓고 남편 의상도 신경 써서 골라 입게 하고, 온 식구가 조용히, 그러면서도 서로 바라보면서 기쁜 눈빛을 주고받으며 신이 났습니다. 그 와중에 남편은 아들을 불러서 “아빠가 성당 다녀올 동안 가게 잘 보고 있어라” 하고 당부했습니다. 저는 또 아들에게 “엄마, 아빠 모두 성당 가고 나면 몰래 가게 문 닫고 너도 함께 아빠를 축하해 드리자” 하고 단단히 일러 놓았습니다.
잘 준비한 남편과 저도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막 집을 나서려는데 아들이 들어오면서 “엄마, 가게 문 닫았어요” 했습니다. 깜짝 놀란 남편은 양복을 훌훌 벗어 집어 던지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아직 내가 세례도 받기 전에 네 엄마가 이 모양이니 다 필요 없다” 하면서 현관에 챙겨 놓은 선물 꾸러미, 꽃다발을 내동댕이치고는 휑하니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저도 울고, 아이들도 울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초상집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한편 성당에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 가족이 나타나지 않으니까 대부님께서 집에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엉망진창이 된 집안 분위기를 보시고는 몹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시며 “이번에는 틀렸다” 하시며 가셨습니다. 잠시 뒤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간 늦겠다. 빨리 성당 가자”라며 모두를 다그쳤습니다. 울어서 일그러진 얼굴과 헝클어진 옷차림 이런 게 대수가 아니라 지금 빨리 가자는 남편 목소리가 반갑기만 했습니다. 포기하고 계시던 수녀님과 신자들이 반가이 맞아 주었습니다.
세례식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데, 남편의 통곡 소리가 들렸습니다. 코를 풀어대면서 마냥 울고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저도 맨 뒷자리에서 소리 죽여 울었고, 영문을 모르는 신자들은 기쁘고 좋은 날이라 감격해서 우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사실 그렇기도 했습니다.
6년 동안의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잘 참고 견뎌냈다고 주님께서는 잊지 않으시고 선물을 주셨던 것입니다. 남편이 세례 받은 그 이듬해 우리 성당에서는 거제 윤봉문 요셉 순교자 묘역으로 성지순례를 갔습니다. 순례가 끝나고 버스가 출발하는데, 남편은 제 손을 꼭 잡으며 “당신이 뭘 믿고 그렇게 당당히 신앙을 지켜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이 시간 이후로는 주님 때문에 당신을 힘들게 하지 않을게. 참고 견뎌줘서 정말 고마워” 하면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저보다 열 살이 많았던 남편은 평소에는 저를 아이 취급하면서 모든 것을 챙겨 주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은 하지 못하게 하면서 도와주었는데, 신앙생활만은 저보다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작아져 보였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런 남편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줘야지 했는데, 마침 꾸르실료 교육을 받을 기회가 왔습니다. 저보다 일주일 먼저 다녀온 후부터는 당신이 선배라면서 좋아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ME 주말 교육도 함께 받으면서 엄청 행복해 했고, 각자 유언장을 작성해서 바꿔보는 시간이 있었는데, 남편의 유언장에는 “내가 지금 죽는다고 생각하니 어린아이 셋이 줄줄이 떠오릅니다. 연약한 엄마 오리 곁에 새끼 오리 세 마리 참으로 안쓰러운 모습입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 더 열심히, 더 희생적으로 저들을 돌본 후, 주님! 당신께 돌아가겠습니다.” 이런 글을 가상 유언장에 남겼습니다.
남편은 2001년 6월 어느 날 예술 동호회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갑자기 각혈하며 쓰러져, 딸이 의사로 근무하던 부산 동아대학 병원으로 이송해서 수술을 받게 되었으나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았습니다. 담당 의사는 “막상 수술해 보니 상태가 심각하여 회복이 어렵겠다”는 소견을 밝혔습니다. 병명은 확실하지 않았지만, 결혼 전 교직 생활할 때 결핵을 잠깐 앓았다는데, 완치는 되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한쪽 폐가 완전히 말라 있었답니다. 평소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었기에 그렇게 진행된 줄은 꿈에도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
1인실에서 6개월을 지내다가 아무런 차도도 없고 회복할 기미도 보이지 않아, 이럴 바에는 집에 가서 요양 겸 치료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면서 담당 의사는 딸과 같이 하동 집을 현지답사까지 하신 후 퇴원을 결정해 주었습니다. 다행히도 그 당시 오랫동안 살던 집을 허물고 새롭게 지었으니, 병원 특실보다 훨씬 좋겠다면서 남편을 집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때 막내딸은 대학 4학년이었는데, 아빠 간병을 위해 휴학을 하고 의사인 언니에게 환부 소독하는 방법과 간병하는 방법을 철저히 배워 저와 교대로 간병을 하였습니다.
큰딸은 매일 전화로 소독 상태 등을 체크하고 그때마다 “엄마!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아빠는 완치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그 동안만이라도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 하곤 했습니다. 막내딸과 저는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아빠를 위해서 서로 위로하며, 순간순간을 헛되지 않게 보내려고 웃으며 행복하게 보내자면서 격려하면서 견뎠습니다.
소파에 앉아 TV 뉴스를 보다가 가끔 남편은 부들부들 떨리는 힘없는 두 손을 합장한 채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뭐하느냐 물으면 “뉴스에 나온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을 받아달라고 주님께 기도했어” 라곤 했습니다. 어느 날 남편에게 “혹시 꿈속에서 성모님이나 예수님을 뵌 적이 없어요?” 하고 물어보니, 문득 생각이 난 듯 “똑같은 꿈을 두 번 꾸었는데, 성모님께서 기도하고 있는 나를 꼭 안아 주시면서 ‘베드로야! 이 어머니가 함께 있으니 아무 걱정 하지 마라’ 하셨어” 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둔 그 날 밤에는 딸과 교대해서 제가 남편이랑 함께 자는 날이었습니다. 새벽 3시쯤 남편의 잠꼬대에 놀라 일어났습니다. 평소에는 수술한 상처가 아물지 않아 목소리가 겨우 들릴 정도였는데, 그 날 밤은 아주 큰 소리로 “이제 모든 작전은 끝났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라고 외치기에 놀라서 깬 제가 “지금이 전쟁 때도 아니고, 당신은 군인도 아닌데 무슨 작전이 끝났다는 말이에요? 좀 더 자고 아침에는 부산 병원에 가야 하니까 푹 주무세요.” 했더니 “그래, 알았다.” 하면서 다시 잠들었습니다. 남편이 잠들 때면 저는 남편 옷소매에 손을 넣고 잤습니다. 중환자라 진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그때마다 속옷을 빨리 갈아 입혀야 했습니다. 잘못해서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 나니까요.
새벽 5시쯤 속옷이 흠뻑 젖도록 땀을 흘려서 옷을 갈아입히고 있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평소에는 목에 나 있는 호스 구멍에서 숨소리가 크게 들렸었는데, 아무런 소리가 나질 않았습니다. 깜짝 놀라 몸을 흔들어도 아무런 미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얼른 건넌방에서 자는 막내를 깨웠습니다. 아빠를 살펴본 딸이 “엄마! 아빠가 돌아가셨네요” 하며 울부짖었습니다. 큰딸에게 전화를 거니까 “엄마! 허둥대지 말고 도움 주시던 의사 선생님께 연락해서 상처 부위를 수습해 달라 하세요. 친지들께도 빨리 연락하시고, 최대한 빨리 갈게요”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웃에 사시는 시숙님이 “119 빨리 안 부르고 뭐하냐”고 화를 내시자 막내딸은 “큰아빠, 지금은 돌아가신 아빠를 위해 조용히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 집에서 아빠를 편히 주님께 보내드려야 합니다” 라며 오히려 의연하게 대처하였습니다.
그 뒤에 시숙님은 집안의 어른으로서 큰 힘이 되어 주셨고 성당의 연령회장님을 비롯하여 많은 신자의 보살핌과 도우심으로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장례 미사 후에 남편을 선산에 모셨고, 삼우를 지낸 후 삼남매는 저에게 “엄마, 이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면서 기도하면 하느님 옆에 우리 아버지도 함께 계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게 느껴져요. 아빠도 주님 곁에서 우리를 위해 빌고 있겠지요?” 라며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엄마 혼자 너희와 살아가야 하는데, 엄마로 인해 너희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잘 살아가도록 노력할 테니, 너희도 각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이 되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 하니까 “이제부터는 엄마도 주님 안에서 행복하게 신앙생활 열심히 하세요. 아빠 몫까지 잘해드릴 테니까 좋은 것도 누리면서 살아가세요” 라며 힘이 되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그렇게도 걱정하던 연약한 오리 새끼 같은 삼남매는 돌아가신 그즈음에는 첫째 딸은 의사가 되어 있었고, 둘째인 아들은 군대 전역 후 복학도 하지 못한 채 본의 아니게 아빠가 운영하던 가게를 맡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간병 잘하던 막내딸은 대학 졸업반이었으니, 남편도 편히 눈을 감고 떠났을 거라 생각됩니다.
항상 부족하기만 하고 약해만 보이던 아내도 당신이 힘겹게 단련(?)시키고 모질게 행패를 부려, 그 덕분에 단단해졌다 싶었는지 모두 맡기고 훌훌 떠날 때, 그 기분이 어땠는지 언젠가 만나면 꼭 묻고 싶습니다. 남편이 운명한 후 마지막 입관 때의 모습은 생전에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던 너무나 평화롭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남아서 슬퍼하는 저희에게 마지막 위로의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남편이 떠난 지 13년이 지난 지금도 인정 많고 자상하던 따뜻한 눈빛만 기억되고, 엄청난 상처인 줄만 알았던 그 시련기의 기억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변해 추억하게 되니, 이 또한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남편을 이용해서 저를 단련시키신 주님의 뜻이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새삼 지나간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글을 쓰다 보니 까맣게 잊었던 추억들 속에서 빠진 듯 숨어 있는 삼남매가 이유도 모른 채 당하고 힘들어 하며 불안에 떨었던 일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 시절에 저의 아이들이 하느님을 알 턱이 없었고, 신앙에 대해 아무런 이해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때 단지 엄마의 아집과 욕심 때문에 온전히 희생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순수한 천사 같은 삼남매에게 주님께서는 인간의 계산법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축복으로 보상해 주심을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은총과 축복의 의미를 저희 삼남매는, 지금은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끝까지 엄마 곁에서 주님께 항구히 기도하며 잘 견뎌내 준 삼남매에게 고맙고 미안하기만 합니다.
이른 새벽 자명종 소리에 잠에서 깨면 선물로 받은 하루를 주님께 봉헌하러 제일 먼저 성당 문을 열고 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매일을 빠짐없이 주님 뵙고 찬미 영광을 바치고 있는 저 자신을 사랑합니다. “카아린! 참 잘 살아 내고 있네” 하면서!
이런 저에게 주님께서는 뉴만 추기경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고통이나 비극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보존하는 것이다. 또한 고통이 고통으로서 끝마쳐진다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오직 고통이 신앙으로 성화될 때만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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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읽으며 몇번의 눈물을 훔쳤는지 모릅니다. 제가 아무런 제약없이 주님을 모실 수 있음에 감사를 카아린 남편분의 변화에 감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잘 지켜내신 카아린 자매님에게 감사를.... 이 모든 것을 보여주신 주님께 찬미와 영광 드립니다. "고통이 고통으로서 끝마쳐진다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오직 고통이 신앙으로 성화될 때만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아멘+
'오직 고통이 신앙으로 성화될 때만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아멘+'
하느님 뜻으로 좋은 글 마음에 새겨봅니다.
"고통이 고통으로서 끝마쳐진다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오직 고통이 신앙으로 성화될 때만 가치가 있을 것이다.”
자매님의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 믿음에 존경심을 표합니다
저도 믿지 않는 가정에 시집 와서 수시로 냉담하였는데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서 감사합니다
저는 남편덕에 세례를 받았으나 신앙의 단계와 표현방법이 달라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을 때는 하느님께 모든이의 찬미와 감사와 흠숭을 드리고, 못 갈때에는 주님을 모시지 못하는 괴로움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보속의 재물로 바칠 수 있음에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가 부족하여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렇군요
못갈때는 주님을 모시지 못하는 괴로움을 하느님의 뜻안에서 보속의 재물로 바칠수 있음을 미쳐 몰랐습니다
한사람도 믿지 않는 가정에서 남편이 세례는 받았지만 그다음 저의 부족으로 신앙이 수시로 흔들렸음을 회개합니다
많이 배우고 깨닫습니다
감동적이네요~
끝까지 주님포기하지 않으시고
남편의 손도 놓지 않으신 자매님이 참 장하십니다
그 일들안에 깃들인 하느님의 뜻이시여!
찬미영광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