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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차량 73대 송정교서 20사와 대치"
해남.나주등지 광주 진입 차량지휘
서울로 잠행 교단 축출등 갖은 고초
계엄군총에 희생된 시위대원 입관 못한채 조포만 쏜후 땅에 묻어
시위확산
교사박행삼씨의 증언
80년 5월 28일 대동고 교사 박행삼(당시 43세)은 송정리 역에서 서울행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싣는다.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공략한 이후, 곧바로 또다른 검거선풍이 불어닥쳤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광주시내를 빠져나와 서울행 열차에 몸을 숨긴 교사 박행삼. 달리는 호남선열차. 박행삼은 와락 쏟아지는 눈물에 두눈을 감는다.
[그래, 1950년 12월 무렵이었지. 동족상잔이 자행되고 있었던 그때 나는 해남군 화산면 화산지소앞에 누워 있었지. 화산지소 영창안에 갇힌 형에게 주먹밥을 전해주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지쳐 그만 볏짚거적을 뒤집어 쓰고 잠들어 버렸지. 하늘에서는 가득히 눈이 내리고, 그다음 거적 밖으로 나온 내 두다리와 발등을 소복소복 덮어오기 시작했지. 아 그러했던 6.25한국전쟁 때의 어린소년 나 박행삼! 불행한 역사의 굴곡을 간신히 빠져나온것 같더니 이제는 계엄기관에 쫒겨 어디로 가는것이냐 ?]
광주보다 더 넓은세상인 서울에 가면, 아직은 내 몸뚱아리를 어디 숨길수 없겠느냐 스스로 되물으며 교사 박행삼은 서울행 열차에 숨어든것이다.
창밖을 내다보니 그 드넓은 호남평야가 시푸렇게 매맞은 것처럼 보인다. 교사 박행삼의 잠행동기는 이렇다.
5월 19일 대동고 학생들의 시위로 하여 같은 동료 교사인 박양무,윤광장과 더불어 계엄하의 정보기관으로 부터 이른바 [주목대상 교사]로 지목을 받는다.
[주목대상 교사]낙인
평소 수업시간에도 민족의식 따위를 고취시켰다는,또 거기에다가 앰네스티(국제 사면위원회)등의 모임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하여 예의 주목 대상교사로 낙인찍혀온 것 특히 박행삼의 경우는 5월 19일 대동고 사태 이후 고향 해남으로 잠시 피난 갔다가, 저 [피의 화요일]인 1980년 5월 21일 광주를 향해 진군하게 된것이 아닌가.
5월 21일 오후 박행삼은 광주에서 내려온 해남군청앞 시위차량에 올라 외친다.
전남법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그리고 한때는 깊은 산사에서 고시공부를 한 패기만만한 한 사나이 답게 우렁찬 목소리로 사자후를 터뜨린다. [해남군민들이여, 광주에서 우리 형제 아들딸이 무지막지한 계엄군들한테 죽어가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가만히 주저앉아 있을수가 없습니다. 자아 모두 힘을 합하여 광주로,광주로 갑시다!]
우슬재를 넘어, 박행삼은 해남읍에서 무작위로 차출되어 나선 젊은이들과 함께 도착하니 시위대들(시민군)의 차량이 무려 73대를 넘어선다. 각 시위차량마다 대표자가 한명씩 뽑힌다. 박행삼은 다년간 교사 생활을 했는지라 어디에 가나 제자들이 있다. 73대의 시위차량에는 역시 수많은 제자들이 섞여 있어 자연 그들의 추대에 의해 대표자로 뽑힌다. 예컨데 시민군차량의 지휘관이 된것이다. 남평다리를 지나자 엄청나게 총알이 날라온다.
강주변에 매복된 계엄군들에 의해 앞서간 시위버스 유리창이 모두 박살나버린채 돌아온다. 그 차량에는 모두 다섯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한 젊은이가 유리창에 몸이 걸린채 피를 흘리며 죽어 있다.
남평을 넘어서기가 바쁘게 또다시 M16의 총알이 빗발친다. 먼저 달려간 차량 역시 총알세례를 받는다.
해남읍에서 광주로 함께 달려가는 시민군들은 나주 시외버스터미날 부근의 논에다 입관도 시키지 못한채 가마니만 깔아 조포를 쏘아준 다음 땅에 묻는다.
효천역 계엄군 매복
서해쪽으로 붉은 노을이 떨어지고 ,해남에서 출발한 시민군들은 나주 경찰서와 일부시위차량속에서 밀린잠을 청한다.
5월 22일 효천역을 지나 백운동쪽으로 광주에 진입하려던 시위대들은 효천역에 계엄군들이 매복해 있음을 알고 노안면 방향으로 해서 광주진입을 시도한다.
나주 군민들로부터 뜨거운 격려와 성원속에 빵과 음료수 담배등을 부여받은 시위대들은 노안을 거쳐 이윽고 송정리쪽으로 접근한다.
아뿔사 ! 73대의 시위차량을 이끌고 마치 그 옛날 동학혁명군처럼 달려가던 해남 출신.나주출신 [5.18시민군]들은 송정리 근교 옛[송정교=현명칭은 송정1교]에서 때마침 매복중이던 20사단 병력의 계엄군들과 부딪친다. 당시 시위대들은 해남이나 영암,나주등지에서 탈취한 M1소총과 수류탄을 저마다 휴대 하고 있는 중이다.
비행장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계엄군들이 착암기로 아스팔트를 뚫으며 발케이드를 치고 있지 않은가.
20사단의 한 중령이 차를 세우고 손을 들라고 손짓한다. 이를테면 백기를 들라는 뜻이다.
계엄군들은 일제히 73대의 시위차량과 시민군들을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이때 교사 박행삼(이미 그 자신은 40대중반을 넘어선 시민군 장교,즉 지휘자다)은 무조건 20사단장을 나오라고 호령한다.
공포의 순간,사단장은 얼굴을 보이지 않고 계엄군측의 중령과 대령이 앞으로 다가선다.
하늘에는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여전히 헬리콥터가 윙윙 날고 다섯대의 탱크가 시민군들을 목조여오는 순간이다 숨막히는 협상끝에 시민군들은 이윽고 무장을 푼다.
결국 73대의 시위차량은 한꺼번에 광주 진입을 못하고 흩어진다.
중년교사 박행삼은 계엄군 장교에게 [우리들이 무사히 광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부탁한다. 이렇게 무장을 풀기도 했으니!]라고 호통반으로 말한다. 그러자 임동수라는 이름의 계엄군대위가 박행삼의 말을 받아친다. [국민들을 위해 고생하는 군인들을 죽일수 있느냐.내고향도 광주다]박행삼은 그러나 임동수 대위를 오히려 꾸짖는다.[모르는 소리 마시오. 공수부대가 광주시민을 얼마나 죽였는지 알기나 하고 그러요.]
고문 후유증 시달려
그뒤 곧바로 무장을 해제 당하고 광주에 들어온 교사 박행삼은 화정동 보안대와 서부경찰서를 거쳐 심문을 받은뒤 대동고에서 쫒겨난다.
전남대법대->대학원졸업->문태고교사->대동교교사->진도의신중교감->전일학원강사->4년만에 복직,남평중교사->평민당 수석부위원장->민주교사실천협의회 공동의장->현 효광여중교사로 옮기는 동안 그는 결국 그동안의 구타에 의해 앞이빨이 모두 빠져버렸고 당뇨병으로 이내 시달린다.
그러나 올해 58세의 교사 박행삼은 효광여중 학생들을 마치 친손자처럼 가르친다. 그리고 더욱 젊고,젊다. 또 그래서 그의 마음은 오늘도 호남선 열차처럼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 것이다.
새벽마다 광주역주변의 어둠을 박차고 달려가는 저철마 호남선 열차처럼.......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의 희생 이세상 모두가 가슴에 새겨야 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