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
달팽이, 물감에 빠졌다
종이를 가로지르는
붉은 울음
그게 그림이 된다.
흔들리는 것들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어청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흔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 끝에도
온기는 남아 있어
생명이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 류시화 시인
시월의 빛 위로
곤충들이 만들어 놓은
투명한 탑 위로
이슬 얹힌 거미줄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가을 나비들의 날개짓
첫눈 속에 파묻힌
생각들
지켜지지 못한
그 많은 약속들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한때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 나는
삶을 불태우고 싶었다.
다른 모든 것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릴 때까지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빨리
내에게서 멀어졌는가.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여기, 거기, 그리고 모든 곳에
멀리, 언제나 더 멀리에
말해 봐.
이 모든 것들 위로
넌 아직도 내 생각을 하고 있는가.
새와 나무 : 류시화 시인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상록수언니 류시화시인의 시입니다 읽어보시고 맘에 드시는것 콕~
해피데이
추천 0
조회 39
05.07.13 16:3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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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새와 나무란 시가 좋군요
해피님 빨리 확인하지 못해 미안해요 류시화님 시면 다 다 다 좋아요 감사감사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