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당감 금은방 왜 많나 내 덕분!
부산진구 가야동과 당감동은 금은방이 유난히 많다. 1990년대 이전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적지 않은 금은방이 대로변을 따라서 또는 이면도로에서 성업한다. 금은방이 많은 이유는 이 일대가 처녀/총각 거주지였기 때문이다. 처녀/총각이 약혼하거나 결혼하면서 금은방을 찾았고 돌잔치 하면서 금은방을 찾았다.
처녀/총각은 대부분 객지 사람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농어촌을 떠나 도시로 온 처녀/총각이 가야와 당감, 그리고 근처인 부암, 개금 등지에 방을 얻어 자취했다. 여기는 그들 일터와 가까워 출퇴근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먹는 것, 쓰는 것도 아껴 적금을 들었고 만기가 되면 고향 집으로 송금했다.
처녀/총각은 대부분 신발공장에 다녔다. 신발공장은 특별한 기술 없이도 취직할 수 있었다. 이 일대 신발 대기업은 셋. 태화고무와 동양고무, 그리고 진양화학이었다. 셋은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다. 객지에서 온 처녀/총각은 여기서 밤낮 일하며 집안의 기둥이 되었고 회사의 기둥이 되었다.
말표 고무신 태화고무는 셋 중에서 연륜이 가장 지긋했다. 한국전쟁 이듬해인 1951년 부산으로 피난 와서 당감동 109번지 경부선 기찻길 옆에 터를 잡았다. 동양고무도 그 무렵 피난 와서 동구 초량동 132-4번지 공장을 돌리다 1963년 당감동으로 옮겼다. 국제상사 형제기업 진양화학은 1963년 부암동에서 창업했다. 현재 신발동상 자리다.
태화고무는 1947년 서울 청파동에서 업을 시작했다. 신금봉과 김학명, 변은산, 황기성 4명이 동업했다. 핵심은 신금봉이었고 훗날 아들 신명수가 회사를 이어받았다. 한국전쟁 피난지 부산에서 자리를 물색하다가 당감동 마철리 마을에 있던 빈 공장을 인수했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적산 공장이었는데 기이하게도 상호가 같았다. 두말하지 않고 인수했다.
마철리((馬鐵里)는 조선시대 자연마을. 말발굽을 만들어 얻은 지명이었다. 태화고무 상표가 말표인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된다. 마철리는 10여 가구가 거주하는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마을 북쪽에 일제강점기 철도조차장, 철도직원 관사, 일본인 마구간 등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커졌다. 태화현대아파트, 당감2동 주민센터, 부산서면교회, 부산철도차량정비단 일대가 마철리 마을이었다. 현재는 마철로라는 도로명으로 남아 있다.
태화고무는 한국전쟁 덕을 톡톡히 봤다. 부산의 다른 신발공장도 마찬가지였다. 몰려드는 피난민에겐 고무신을 팔고 넘쳐나는 군인에겐 군용화를 공급하면서 전쟁특수를 누렸다.
전쟁특수가 사라진 1960년대 수출을 모색하던 태화고무는 한국 최초 신발 수출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1962년 장화 128,000켤레, 12만 달러를 미국에 수출했다. 그해 국제화학도 농구화 2,400여 족을 수출했지만 한국 신발 첫 수출의 영광은 태화고무 차지였다.
태화고무는 업계 선두그룹이었다. 1964년 KS 허가공장 지정, 1966년과 1972년 대통령 포상과 대통령 표창, 1973년 주식회사 전환 등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 갔다. 주식회사 전환은 태화고무 발전을 이끈 가속페달이었다. 기업공개, 주식시장 상장, 공시의무 등으로 공신력이 높아졌고 주식을 발행해 자본 조달이 쉬워졌다. 태화고무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1977년에는 고무를 떼어냈다. 주식회사 태화고무에서 주식회사 태화로 상호를 변경했다. 이는 업종 다각화를 의미했다. 총고무화와 포화의 제조판매, 기타 고무 가공품의 제조판매, 합성고무/합성수지 가공품의 제조판매, 수출입 위주에서 건설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해 호황이던 건설 경기에 편승했다. 1978년 공영건업을 사들여 건설업에 진출했다.
아픔도 있었다. 1978년 11월 대화재를 입어 제2공장 건물 전체와 기계, 수출용 신발류 완제품과 원재료 등이 탔다. 진화에 사흘이나 걸렸다. 이로 인해 태화고무 주식 매매가 한동안 거래 정지됐다. 더 큰 아픔은 1991년 들이닥쳤다. 철석같이 의지하고 믿었던 나이키가 거래를 중단했다. 치명적이었다. 가장 큰 고객이 등을 돌린 만큼 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다.
헤쳐 나가야 했다. 태화주택을 흡수하는 등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나 무리수였다. 자금난을 겪었다. 신발 부진을 타개하려고 시도한 아파트 건설, 중국 현지 공장 건설 등도 부메랑이 되어 발등을 찍었다. 끝은 야금야금 다가왔다.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늪에 빠져들었다. 1994년 신발 생산 중단, 1996년 자본 잠식상태, 1998년 12월 조흥은행 법정관리, 1999년 5월 상장 폐지, 2001년 3월 타 법인에 권리 양도로 한 시대 풍운아 태화고무는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졌다.
태화고무와 당감동 일대는 한 몸 한뜻이었다. 당감동 이북동네는 한국전쟁 피난민 마을. 피난민 마을이 들어서면서 인적 뜸하던 당감동은 사람 넘치는 동네가 되었다.
현재 동일스위트아파트 일대 김지태산이며 고지대는 피난민으로 넘쳤고 마을 한가운데 흐르는 개천을 복개해 당감시장이 들어섰다. 객지에서 온 처녀/총각 역시 이 일대 거처를 마련했다.
고무공장 월급날이면 당감동 통닭골목은 불야성이었다. 고무공장 다니면서 피난민은 새로운 삶을 펼쳤고 처녀/총각은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가진 거라곤 맨주먹뿐이던 시절 태화고무와 당감동 일대는 희망의 땅이었고 생명의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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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당감동 기찻길 옆 마철리 마을에 들어섰던 태화고무(붉은 선 안. 〈옛 사진으로 보는 서면이야기〉 203쪽). 처녀/총각과 신혼이 많아 결혼반지, 돌 반지 금은방이 주변에 성업했다. 마철리 마을이 있었음을 알리는 마철로 도로판. 뒤에 보이는 태화현대아파트가 태화고무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