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국내 번역돼 나온 바둑 사활 고전. 위로부터 현현기경, 관자보, 사활묘기, 발양론, 기경중묘. |
바둑을 동양철학의 집대성이라고 한다면 지나치겠지만 동양문화의 정수란 수식에는 많은 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바둑의 발원과 중국 고대왕조의 창세기 신화가 맞닿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바둑의 신비는 쉽게 베일을 벗을 것 같지 않다. 현대과학의 총아라는 컴퓨터가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분야 또한 바둑이다.
4000년이 넘는 것으로 짐작되는 바둑은 확률이나 운에 의존하는 게임이 아니라 수(手)로 표현되는 과학이자 학문이다. 수백 년 전 쓰였던 바둑 고전(古典)들의 수준이 오늘날 바둑과 별 차이를 못 느낄 만큼 높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건 놀랍다. 그 같은 사실이 사활집(死活集)이라고 불리는 실전적 묘수 책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현현기경(玄玄棋經)’ ‘관자보(官子譜)’ ‘발양론(發陽論)’ ‘현람(玄覽)’ ‘기경중묘(棋經衆妙)’ ‘사활묘기(死活妙機)’는 바둑 사활의 6대 고전으로 꼽힌다. 출간 시대와 저자가 모두 다르고 작품성이나 난도(難度)도 들쑥날쑥이지만 저마다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현대 최고수급 프로기사들도 어린 시절 이 고색창연한 옛 문헌들을 통해 바둑을 배웠고, 고수로 성장한 오늘날까지도 문제들을 놓아보고 공부하며 행복해한다. 인문학 서적을 읽을 때 느끼는 향기, 절묘한 수순으로 씨름을 거듭하다 미로를 뚫고 답을 찾았을 때의 희열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바둑 불모지인 서구에 대한 보급 효과 측면에서도 동양의 사활 고전들은 매우 좋은 수단이다. 중국과 일본이 꾸준히 그 작업을 해왔는데 한국에선 최근 조혜연(30) 9(九)단이 발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이미 여러 권의 창작사활집을 펴낸 그는 현현기경과 관자보 2권의 영역을 마쳤고, 앞으로 남은 4권을 마저 번역해 6개 바둑 고전의 영어 완간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조 9단이 꼽는 최고의 바둑 고전은 발양론이다. “문제의 난도(難度)와 수준이 매우 높아 앞으로 이를 능가할 저서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할 정도다. 조 9단은 이미 발양론의 영어 제목을 ‘Genesis’라고 정해 놓고 번역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Genesis’는 기원(起源), 발생 또는 창세기를 의미한다.
발양론은 일본의 제4세 명인 이노우에(井上因碩)의 저술로 돼 있지만 그의 편서(編書)일 뿐 본래 출전은 중국 묘수집이란 게 정설로 전해진다. 가문의 비전(秘傳)으로 내려오면서 심지어 문하생들에게까지도 열람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노우에는 “두드러진 수단은 양(陽), 포석 등 형태가 확연하지 않은 것은 음(陰)의 의미로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첫 수는 18급도 둘 수 있으나 그 다음 수부터는 도무지 불가측(不可測)의 연속일 만큼 난해한 내용이다. 1713년 출간된 이후 후대들에 의해 해답이 부단히 정정돼 왔다. 문용직 프로는 “오류가 많고 불완전한 것이 발양론의 매력이다. 나는 발양론을 대하면서 비로소 바둑의 깊이와 어려움을 알았다”고 토로하고 있다.
바둑 사활집의 바이블로 불리는 현현기경은 발양론보다 300여년 앞선 1349년 발표된 책이다. 원나라 때의 국수(國手)급 강자 엄덕보(嚴德甫)와 안천장(晏天章)이 공저자이고 우집(虞集)이 서문을 썼다. 바둑에 대한 전술·정세(定勢·定石)와 포석·행마법 등과 함께 진롱(珍瓏)이라고 불리는 376개의 주옥 같은 사활 문제들이 수록됐다. 현현기경 사활 문제들의 특징은 각 문항마다 흥미로운 제목이 붙어있다는 점이다. ‘삼호출산세(三虎出山勢)’ ‘칠자지모세(七子之母勢)’ ‘팔선과해세(八仙過海勢)’ 하는 식이다.
관자보는 현현기경이 출간된 지 300여년 후인 1690년 빛을 본 책이다. 명나라 때의 국수 과백령(過伯齡)이 수집한 사활 묘수나 맥점들을 청대(淸代)의 도식옥(陶式玉)이 집대성했다. 관자보의 특징은 바둑의 오묘한 기수(奇手) 맥점들과 함께 이례적으로 끝내기 문제에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는 점이다. 관자(官子)의 자(子)는 바둑돌을 뜻하므로 관자는 바둑돌을 관리하는 일체의 기법을 의미하는 동시에 좁게는 끝내기의 영역을 뜻한다.
기경중묘는 바둑 고전들 중 가장 대중적인 내용을 담아 팬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저자는 일본 4대 바둑가문 중 하나인 하야시(林) 가문의 11대 가원(家元) 하야시 겐비(林元美). 1812년 발간된 원본은 문제집 3권과 해답 1권 등 총 4권으로 구성됐다. 저자 하야시는 저서 기경중묘의 서문에서 독자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어 이채롭다.
“바둑이 늘고 싶다면 바둑의 본질을 생각하며 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쓸쓸하고 무료할 때는 이 책을 펼쳐라. 그러면 모든 망상이 사라지고 마음을 깊고 그윽한 세계로 인도해 줄 것이다. 범인(凡人)들은 유현(柳峴)의 경지에서 노니는 심정을 모를 것이다”라고 썼다. 자신의 저서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이 엿보인다. 하야시는 바둑 외의 분야에도 박학다식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바둑 책으로는 기경중묘 외에 맥과 정석을 집대성한 기경정묘(棋經精妙)도 유명하다.
6대 바둑 고전들 중 저자의 지명도가 가장 높은 책을 꼽는다면 ‘사활묘기’일 것이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풍운아 김옥균이 당대 최고수 본인방(本因坊) 슈에이(秀榮)에게 천거, 훗날 본인방 위를 계승하고 마지막 ‘본인방’ 자리를 지켰던 슈사이(本因坊秀哉)가 이 책의 저자다. 1910년 세상에 나왔으니 불과 100년 남짓한 세월이 흘렀을 뿐인 최신(?) 서적이다.
현람(玄覽)은 비극의 기사 아카보시(赤星因徹)가 남긴 유저(遺著)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독자들을 아릿한 감상에 젖게 만든다. 아카보시는 스승 겐안 인세키(幻庵因碩)를 대신해 본인방 조와(丈和)와 격돌한 바둑에서 결사적으로 싸우다 피를 토하며 쓰러져 며칠 후 2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전설적 기사다. 아카보시가 1833년 쓴 ‘기보현람’, 1835년 펴낸 ‘수단50도(手段五十圖)’를 그의 사후 12년 뒤 이노우에(井上秀撤)가 묶어 정리한 책이 현람이다.
6권의 대표 고전을 시대 순으로 나열하면 현현기경(1349)·관자보(1690)·발양론(1713)·기경중묘(1812)·현람(1833)·사활묘기(1910)의 순이다. 최고(最古) 2권이 중국에서 나왔고 이후 4권의 저자는 일본이다. 중국은 기대조(棋待詔)란 이름의 황제 바둑 비서관제를 두었고 일본도, 막부(幕府) 장군들이 바둑 고수들에게 어성기(御城碁)를 두게 하고 녹(綠)을 주며 바둑을 장려했다. 한반도에서 이들에 견줄 만한 바둑 고서가 탄생치 않은 것은 이 같은 배경을 감안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최고의 고전 현현기경이 육당 최남선에 의해 ‘기보(棋譜)’란 이름으로 조선에 처음 소개된 것은 원전이 출판된 지 무려 563년 뒤인 1912년이었다.
바둑의 기술이란 것이 따지고 보면 언제나 돌의 사활로 귀결된다. 박정환·김지석·목진석 등 세계적 고수들이 틈날 때마다 사활 문제에 매달리는 것은 감각 단련과 기본기 단련에 최상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13세 때 우연히 현현기경을 입수한 뒤 무아경 속에서 문제풀이에 열중했다. 고작 6급 실력이었던 나는 그 후부터 사활에 엄청난 자신감이 생겨 고수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영원한 국수’ 김인(72) 9단의 회상이다.
( 한민족 역사 정책 연구소)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