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인절스 강타선을 안타 2개로 막아내며 메이저리그 데뷔 첫 완봉승을 거둔 류현진. 류현진은 일기를 통해 자신의 실력보다는 동료 선수들의 도움과 팀 분위기 덕분에 큰 성적을 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사진=순스포츠 박동아) |
어제는 정말 아름답고 행복한 밤이었습니다^^. 마치 제가 영화를 찍고 있는 듯한, 아니 멋지게 잘 짜인 완성도 높은 영화를 보는 듯 했습니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한 외국 기자 분이 19타자를 연속 범타로 잡은 비결을 얘기해달라고 질문하셨는데,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어제는 모든 게 잘 맞아 떨어진, 야구인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날이었으니까요.
LA 에인절스가 우리 팀과의 첫 경기에서 역전패를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8연승을 달리고 있었고, 팀 타선은 굳이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엄청나다는 건 잘 아실 겁니다. 지난해 신인으로서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한 마이크 트라웃을 비롯해 홈런을 무척 좋아하는 마크 트럼보, 알버트 푸홀스가 건재하는 중심타선은 지금껏 상대했던 타선들 중 가장 막강해 보였어요. 더욱이 상대팀에서 좌완인 저를 상대로 우타자로만 8명을 배치했다는 얘기를 이미 들었기 때문에 더더욱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9회 초 경기가 끝난 후 포수 A.J.앨리스와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류현진. 앨리스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류현진이 데뷔 후 최고의 피칭을 선보였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사진=순스포츠 박동아) |
솔직히 경기 전 긴장도 많이 했어요. ‘내가 잘 막을 수 있을까?’ ‘볼넷이나 홈런이 많이 나오는 건 아닐까?’ ‘어제 역전승하면서 우리 팀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는데, 그 좋은 분위기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들이 얽히면서 조금은 비장한 마음으로 마운드에 올랐던 것 같아요. 그러나 경기 전 연습 피칭을 하면서 패스트볼의 구위가 살아나고 이상하리만치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끼면서 조금은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어제 완봉승의 배경에는 에인절스전 1차전에서 역전승을 거뒀던 부분이 큰 작용을 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강타선이라고 해도 우리는 이길 수 있다, 다저스도 강타선, 철벽 마운드를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제 정신세계를 강하게 지배하지 않았나 싶거든요.
류현진에게 많은 공감을 선사하는 클레이튼 커쇼. 커쇼는 류현진이 2루타를 치고 나갈 때 자기 일처럼 기뻐했고, 경기 후에도 류현진의 완봉승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사진=순스포츠 박동아) |
어제는 팀워크도 환상적이었죠? 제가 2루타를 치고 나갔을 때 덕아웃에서 커쇼랑 곤잘레스가 두 팔 벌려 환호성을 지르며 굉장히 좋아했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경기 중에는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나중에 TV를 통해 하이라이트 장면들을 보는데 커쇼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이 비춰지더라고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커쇼는 두 얼굴이에요. 선발등판하는 날에는 과묵하고 조용한 편이지만 그 외에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을 보여주거든요.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신기한 매력을 갖고 있는 친구입니다.
경기 후 라커룸에서 커쇼가 저한테 한 마디 하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8,9회에도 94, 95마일을 던질 수 있느냐고. 아니, 그건 제가 할 소리인데 뭘 새삼스럽게 그런 질문을 하는지…. 자기도 그렇게 던지는 선수이면서 말이죠.
메이저리그에서 유명한 선수들이 제 동료라는 게 자랑스러워요. 그런 선수들의 운동하는 모습, 경기 전 준비하는 자세 등을 보며 배우는 게 정말 많거든요. 특히 커쇼는 체격은 저보다 작은 편인데도 웨이트트레이닝할 때 저보다 더 높은 무게로 상체훈련을 해요. 제가 50파운드 정도의 무게를 들어 올린다면, 커쇼는 7,80파운드 이상을 해치워요. 그러면서 저한테 장난을 치죠. 무게가 적다면서요.
상대 타구에 왼쪽 발등을 다친 류현진. 아직 붓기와 멍이 가시지 않은 상태라 하루 이틀 훈련하는데 지장을 받을 전망이다.(사진=순스포츠 박동아) |
어제 4회 초 상대 타자의 공에 왼쪽 발등을 맞는 바람에 약간의 부상이 생겼습니다. 하루 자고 일어났더니 심하게 붓고 멍이 든 부분이 더 짙어졌더라고요. 걷는 데에는 지장이 없지만, 아무래도 하루 이틀 정도는 운동을 못할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다음 등판에도 차질이 있을 것 같고요. 확실하지는 않아요. 오늘 트레이너가 제 몸 상태를 파악해서 감독님께 보고하면 어떤 결정을 내려주시겠죠. 뼈에 이상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부상이 있었더라면 어제의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김인식 감독님과 경기 후 통화했었는데, 감독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아프면 무조건 쉬어. 괜히 던진다고 나섰다가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 이럴 때 한 번 쉬는 것도 괜찮아”라고요. 감독님이 아니라 마치 아버지 같아요. 김인식 감독님은^^.
어제 경기 후에 LA에서 부모님과 함께 늦은 저녁 식사를 했어요. 부모님이 내일 한국으로 들어가시는데, 귀국 전 정말 좋은 경기를 보여줬다며 기뻐하시더라고요. 부모님이 저녁식사에 꼭 초대하고 싶은 선수가 있다고 하셨어요. 바로 어제 경기에서 시즌 첫 홈런이자 투런포로 절 ‘살려준’ 루이스 크루즈였습니다. 부모님께서 크루즈에게 갈비를 제대로 쏘셨는데, 사실 어제 경기는 크루즈뿐만 아니라 다저스 모든 선수들을 초대해서 저녁을 사도 아깝지 않은 경기였습니다.
다저스의 공인 커플(?)인 류현진과 루이스 크루즈.(사진=순스포츠 박동아) |
어제 9회 초, 2사 후 마이크 트라웃과의 대결에서 아웃카운트 하나 남겼을 때의 심정은 두근두근 그 자체였습니다. 멋지게 삼진으로 끝냈으면 하는 바람으로 투구를 했는데 그걸 치더라고요. 2루수 땅볼로 아웃되는 순간,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제가 인터뷰 때마다 읊어댔던 무실점 경기를 이뤄냈고, 볼넷도, 홈런도 없는 무사사구로 완봉승을 거뒀으니 정말 하늘을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어요. 만약 볼넷이 한두 개 있었더라면 투구수가 늘어나면서 8,9회에 오르지 못했을 겁니다. 이 정도되면 정말 완벽한 시나리오 아닌가요?^^
그러나 오늘 경기장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면서 계속 심호흡을 내뱉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습니다. 어제의 드라마는 어제로 끝났고, 오늘은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돼야 하기 때문이죠. 어제 한 경기 잘 던졌다고 해서 제가 메이저리그를 평정한 것도 아니고, 제 실력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고 할 수 없어요. 다음 경기, 그 다음 경기 등 앞으로 제가 오르는 세 차례의 선발등판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세 경기 동안 흐트러짐 없이 좋은 피칭을 선보이려면 어제의 행복은 잠시 접어두고 팀 경기에 집중해야 되겠죠.
애리조나 스프링캠프 때 자주 만났던 추신수와 류현진. 두 선수는 오는 7월 LA에서 상대팀 타자와 투수로 만나게 된다. |
어제 경기 후 신수 형한테 문자가 왔었어요. ‘현진아, 난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니까 계속 파이팅하자. 진짜 축하한다’라고요. 문자 읽고 어찌나 가슴이 뭉클해지던지...나중에 전화드렸는데 시차가 있어서 그런지 주무시는 것 같더라고요. 전화를 안 받으셨거든요. 신수 형한테 이 인사는 꼭 하고 싶어요.
“형, 진짜 ‘대박’! 최고예요. 여기 와서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형이 얼마나 대단하신지를. 형이 정말로 자랑스럽습니다. 전 형이 앞에서 잘 끌어주시니까 뒤에서 따라갈 뿐입니다. 형, 우리 웃으면서 7월에 뵈어요. 저도 더 노력하겠습니다.”
첫댓글 어제 경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류현진 선수 자랑스럽네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피칭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