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서울
고려대 국어교육과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9년『현대문학』에 「뿔」 외 4편을 발표
현재 고려대와 상명대에 출강
박사 학위 논문『1920년대 동인지 문학의 근대성 연구』
시집, <사춘기> 2003년 문학과지성사
오늘밤은 106호에서 시작되었다
못된 아이들은 이렇게 항상 머리 위에서 논다. 106호 고독한 남자는 갑자기 참을 수 없었다. 천장이 아니라 천둥 같잖아. 오늘밤은 조용해야 해.
오늘밤은 쉬어야 해. 106호 고독한 남자는 206호 고독한 여자가 된다. 우리집엔 애들이 없어요. 그리고 난 쭉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어요. 306호는 살인사건 이후 칼 한자루까지 사라졌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집이 됐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좀더 올라가봐야 해요. 못된 아이들은 빠르게 기어올라요.
어디쯤에서 배꼽은 쑥 빠질까요? 옥상까지 올라온 우리들은 43명이다. 우리들은 일제히 하늘을 노려본다. 1206호 별빛같이 고독한 남자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고양이군의 수업시대
고양이가 되겠다고 집을 나온 첫날밤부터 눈에서 빛이 났던 건 아니죠. 열세 살 때부터 고독한 눈알을 원했는데요, 초점이 사라질 때까지 눈알을 빙빙 굴렸을 뿐이죠. 누가 좀 뻥, 차줬으면
포물선을 그리며 고양이 한 마리가 날아가는 거예요. 아, 그렇게 풀밭에 눕고 싶었어요
밤은 길고 낮잠은 달콤해요. 그녀는 여섯 마리의 고양이 새끼를 배고 있어요. 그녀는 나의 선생이었고 연인이었죠. 안녕, 라라. 고양이의 길은 여러 갈래, 여섯 마리의 고양이 새끼 같은 것. 안녕, 미미.
고양이가 되겠다고 처음 고백했을 때, 형은 정겹게 내 귀에 대고 말했죠. 넌 원래 고양이 새끼야. 네가 담요에서 나와 기어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붕 아래 쥐새끼들이 싹 없어졌다니깐.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려보라구.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형은 나의 전도사였죠.
형은 검은 양복을 입는 사기꾼이 되었구요, 나는 또 다시 털갈이가 시작됐어요. 아, 그렇게 힘이 없고 부드러워요. 올 겨울에 나는 더 무성해지고 더 포근해질 것 같아요.
이제 아주 멀리 고양이의 길을 가요. 고요한 새벽마다 울음소리를 연습했답니다. 그건 고양이의 것이죠. 달빛처럼 바람소리처럼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영영 모를 거예요.
너무 고요한
귓바퀴를 십 년쯤 돌다 나간 소리를 보았는가? 천구백팔십구년生
이다.
강아지를 찾는 벽보를 읽어보면 애절하다. 그러나 강아지의 개성은
목걸이나 개끈에서 찾을 수 있다. 강아지가 스스로 목걸이를 벗을 수
있을까?
귀를 핥고 또 핥으며 우리는 교감을 나누었다. 개끈 같은 건 생각도
안 했다.
홀림
그녀가 머리를 푸는군요. 뒤통수 중앙에 꼭, 묶여 있
던 머리가 와와와 흩어지는군요. 머리는 머리를 떠날 수
없지만 그 순간은 정말 어디로든 달아날 것 같았어요.
바람과 마구 섞이는 것들. 머리는 머리로부터 자랐지만
머리는 머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녀는 언젠가 혼자 거울을 보면서 머리를 잘라낸 적도 있
어요. 머리가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쓱, 잘리고
그리고 천천히 자랐습니다. 뒤통수 중앙에 꼭, 묶여
있던 머리가 그녀를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나 봅니
다.머리가 머리로부터 달아날 때 그녀가 조금 졸아드는
걸 봤어요. 그녀가 잡아매고 있었던 게 무얼까요? 그런
건 없다고 그녀는 모여 있던 머리를 푸는 걸까요? 그녀
는 지금 산만합니다. 그녀의 머리 속으로 들어오던 열
개의 손가락처럼 그렇게
문은 안에서 잠근다
후려갈기듯이 그가 문을 닫았다고 생각했을 때, 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문은 반발(反撥)하여 조금 열린 채 떨리고 있었다 그가 부르르 떨고 있는가? 오래 참으셨군, 나는 빈정거렸지만
나는 바닥을 드러낸 채 그의 침대에서 너무 오래 기생했다 두께 없는 얄팍한 사랑을 원고지 구기듯이 했네 나는 썼지만
구겨진 그를 펴서 다시 읽고 싶지 않았네 나는
썼지만 그는 때때로 아, 벌어져 있었네 그의 침대에서
나를 핥고 지나가는 문장들을 나는 너무 쉽게 받아들였네 그가 없는 그의 침대에서
나는 뜨거워지지, 그러니 그가 없는 그의 침대에서 참을 수 없었네 오래 참으셨군,
나는 빈정거렸지만 내가 나쁘지 않은가?
문을 닫았다고 그는 믿지만 문의 반동(反動)은 그의 행위에서 비롯하니, 이것이 내가 받은 교훈의 전부다
이제 내 낙서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다시 바람이 나침반인가? 문이 자꾸 펄럭이니 문 밖의 풍경은 빠르게 늘어났다가 줄어들고 늘어…… 나는 중얼거린다,
문은 안에서 잠근다.
일요일
며칠 늦게 일요일이 찾아왔다 햇빛은 일요일의 뒤에 있었고
몇 덩어리의 구름은 일요일의 느리고 느리고 부드러운 말시
그리고 내린 비는 일요일의 가득한 눈물처럼 앞에 있는 햇빛처럼
나는 토요일밤의 송별회를 지나 월요일 그리고 화요일 밤
바쁜 일은 영원히 생기지 않을 것 같은 날들이 멀리 흐르지 않고
가까이 향월여인숙에서 잠이 들고 다음날 다시 새 이불을 덮는다
나는 화요일 밤을 지나 수요일 아침 그리고 목요일 아침의 순서로
일요일을 기다린다
일요일은 제멋대로 다리를 뻗고 두드리고 발을 주무른다
일요일이 쓰고 온 넓은 모자가 넓은 그늘을 만들고
나는 금요일 저녁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구두들이
글성 거리며 웃음을 물고 모여 있는 것을 본다
금요일 저녁에서
발이 녹는다 발부터 일요일까지 토요일이라는 누구누구의 이름까지
번개에 대해
고백컨대, 내게서 뚝 떨어지는 곳에서 떨어지는 번개를
맞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번개에 대해
번개 양편의 구름에 대해 나는 올려다 보는 자이다. 이때
내가 맞은 비의 굵기에 대해
잘 말할 수 없다 나는 편향된 자이기 때문이다. 번개에 대해
뚝 떨어진 곳에서 정전이 되기도 하지만 구름은 다치지 않는다.
구름은 구름의 규칙이 있다
나는 번개에 대해 수정하지 않겠다
시집, 사춘기 (문학과지성사,2003)
미완성교향곡
소풍 가서 보여줄게
그냥 건들거려도 좋아
네가 좋아
상쾌하지
미친 듯이 창문들이 열려 있는 건물이야
계단이 공중에서 끊어지지
건물이 웃지
네가 좋아
포르르 새똥이 자주 떨어지지
자주 남자애들이 싸우러 오지
불을 피운 자국이 있지
2층이 없지
자의식이 없지
홀에 우리는 보자기를 깔고
음식 냄새를 풍길 거야
소풍 가서 보여줄게
건물이 웃었어
세계의 문학, 2003년 봄호
초콜릿 분쇄기
당신의 자장가야
고운 가루약이야
당신을 재우지
천천히 시작되지
부드러운 초콜릿같이
썩은 이빨을 보이지
깨물 수 있다는 게 놀랍지
엄마
언니
그런 여자들
초콜릿과 밤하늘은 분간이 안 되고
비명소리는 분쇄되지
기계는 말없이
생산해내지
엄마
언니
그런 여자들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고 싶어
당신은 어른이 됐지
천천히 시작되었지
알루미늄 원반 위에서
시현실, 2004년 가을호
입맞춤
-사춘기 2
선일여자고등학교 2층 복도 같은 복도입니다. 그런 복도라면 나는 복
도 위의 복도와
복도 아래의 복도를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대걸레를 밀며
달려갔다 달려왔지요. 그런 복도라면 어느 쪽도 이쪽이어서 우리들은
계단을 함부로 오르내렸지요.
여자애가 화장실에서 치맛단을 접고 나올 때는 말입니다. 무릎이 보
일 듯 말 듯 했지만요, 이쪽과 이쪽 사이에서 못 할 말이 뭐 있겠습니
까? 우리는 생각보다 참 욕도 잘 했고
참 쉽게 웃기도 잘 했습니다. 창문에 붙어서 우리는 창문만 닦았고,
그런 복도라면 우리는 복도 위의 복도와 복도 아래의 복도에서 창문만
닦겠지만,
정말 뭐가 더 잘 보였겠습니까? 어쩌면 선일여자고등학교 2층 복도
같은 복도입니다.
하이네 보석가게에서
언니, 나는 비행기를 탈 거야. 나는 아무 것도 버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너무 가벼워졌어. 마리오는 아름다운 남자야.
안녕. 나는 보따리 장사를 할 거야. 보석가게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감정하지. 가짜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아는 건 멋진 일이야. 언니, 곧 부자가 될게. 라인 강가에서.
한국 남자를 사랑해보지 못했어. 오늘밤에도 언니는 시를 쓰고 있니? 언젠가는 언니 시를 읽고 감동하고 싶어. 안녕.
11월에 나는 마리오를 만나지. 언니는 한국어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 우리가 어렸을 때 문방구에서 마론인형을 훔치는 언니를 봤어. 눈물이 주르르 모래처럼 흘렀어. 언니,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모래는 가장 아름다운 흙의 형상이었지. 나는 매일 밤 기도를 해. 언니가 우리 집을 떠나던 날에 나는 왜 쓸쓸해 지지 않았을까? 언니를 위해 기도할게. 안녕
대청소의 날들
가루비누 같은 눈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죠. 그런데 정말 오늘은 가루비누, 칠일을 내릴 듯이 내렸어요. 사람들의 입술에서 비눗물이 흘렀구요. 거품을 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니까요.
검은 동자는 핏물에 빠져 있어요. 오늘은 어쩌면 눈물로 뭔가를 씻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모두들 눈을 감길 무서워해요. 오늘은 분명 이변(이변)이어서 결심하기가 매우 두렵지요
배를 쥐고 구역질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골목이 마구 꿈틀거렸어요. 멀리 있는 강이나 바다를 생각해 봤지만 가루비누, 참 아득하게 내렸죠. 우리가 순순에 대해 생각해야 했을까요? 우리는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어요.
가루비누, 칠일을 내리 듯이 퍼붓고 군인들이 마침내 물청소를 시작햇어요. 사람들은 얌전했지요. 그런데 더러운 강아지들이 사라지고 우리가 이윽고 발가락 벗은 기분이 들면, 거지와 집에서 아침저녁으로 세수하는 사람들을 구별할 수 없으면,
그때는 실종된 사람들도 보일까요? 우린 점점 유리처럼 투명해졌어요.
관리사무소
1028개 마루에 동시에 울려 퍼진다. 우리는 곧 停電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로 이 마이크와 당신들의 스피커에 전류는 끊깁니다. 지금 당신이 딩동,
소리를 들었다면 맨 마지막 초인종입니다. 603호의 어둠 속으로 한 남자가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실루엣은 바야흐로 덩어리입니다.
많은 여자들이 울었고, 더 많은 남자들이 울었고, 아이들이 보챘습니다. 가령, 1104호 여자애의 드라이기에서 더 이상 뜨거운 바람은 나오지 않고, 여자애는 젖은 머리칼을 그냥 베개에 쏟아버렸습니다. 그렇게 누군가 눈감아 버리고,
또 당신들은 기어이 촛불을 들고 서서 유령처럼 서로를 확인하고, 동시에 깜짝 놀라고,
동시에 전원이 확 켜지고,
2003년 시안 가을호
더 작은 사람
작아지기 시작할 때까지만 작아지려고 해요. 나는 작은 사람, 더
작은 사람, 개, 고양이, 한 개의 손가락, 성냥개비,
나는 한 방울을 고집스럽게 바라봤어요. 찡그린 표정은 내 모든
주름에 스며 있어요. 인상적인 것, 빛, 고통,
처음으로 숨을 쉰 이후로 계속해서 숨을 쉬게 됐어요. 점점 빠르
게. 더욱 거칠게. 시작은 그런 것이죠. 엄마, 하고 첫 발음으로 불러
봤댔자 소용없어요. 아버지라면 오 마이 갓!
작아지기 시작하면 시작된 거죠. 나는 더 작은 사람, 더 작은 개,
더 작은 도마뱀, 작은 목소리, 파동의 간섭, 만져지지 않은 하늘,
그리고 파동의 굴절, 만져지는 빗방울, 빗방울, 더 굵은 빗방울,
나는 돌풍과 함께 지나가는 소나기예요. 세계처럼 우산이 뒤집어진
작은 사람들, 유리창에 잠시 달라붙어서 나는 더 작은 동그라미들,
유리창 안쪽에서는 세 명의 아이들이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 규칙과 역활을 정하고 있어요. 한 아이는 손바닥을 쫙 펼치고
사라진 동전에 대해 신비로운 거짓말을 늘어놓고
나는 끝까지 다 듣지 못했다
현대문학, 2006년1월호
가로수 관리인들
훌륭한 사람들
첫 만남에서 대부분의 훌륭한 사람들은 수줍음을 보인다. "안녕하세요." 그들은 날씨에 대해 말한다. 날씨가 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날씨에 예민해지면 매우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가로수 관리인들 중의 한 명을 만났고 그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8번가를 담당하고 있다. 8번가의 나무들은 얼마나 우아하게 나뭇잎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얼마나 구슬프게 나뭇잎 나뭇잎을 피웠을까. 한 장의 나뭇잎 때문에 투신자살을 결심한 사람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질투심을 깊이 감췄지만 그는 나의 질투를 칭찬했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우리의 우정이 초월한 것은 나이뿐만이 아니었다. 믿음은 믿음을 초월하여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헤이, 부탁해
오늘밤은 내 인생을 통틀어 바라봤던 하늘 중에서 가장 투명한 밤이야. 몹시 사적인 날씨야. 인생을 우물 같다고 하든, 바다 같다고 하든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사적인 날씨에 휩쓸리면 우리는 그때마다 유일한 날을 꿈꾸지. 부탁해, 너의 나무로 하여금 오늘밤 나의 침대가 되게 해줘. 오늘밤은 쉽게 깊어지지 않을 거야. 왜 우리는 역겨워지고, 왜 우리는 기를 쓰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걸까. 8번가의 술집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무리들을 우리는 잘 알잖아. 욕설의 상스러움에 마력이 있었다면 우리는 모두 벌써 죽었을 거야. 그러나 오늘밤의 침대는 마술적이지. 나는 조용히 불씨처럼 일어나 8번가의 나무 위를 발목이 달빛에 젖도록 걸어다닐 거야.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겠지. 그들을 사로잡은 표정을 묘사하는 데 단 한 문장도 쓰지 않겠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오늘밤은 유일하게 투명한 밤이야.헤이, 부탁해. 오늘밤은 초월적인 밤이야. 너의 나무는 오늘밤 우리들의 침대가 되는 거야. 8번가의 거지들을 모두 불러올려도 조옿지!
13번가 가로수 관리인
13번가 나무들은 13번가 가로수 관리인의 손길이 닿는 나무들이다. 13번가 가로수 관리인의 손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3번가 가로수 관리인은 열병이 나서 보름째 꼼짝없이 누워 있다. 검은 개 한 마리가 13번가 가로수 관리인의 뜨거운 이마를 길고 긴 혀로 핥으며 보름째 침상을 지키고 있다. 보름 동안 13번가 나무들은 나뭇잎 한 장 떨어뜨리지 않았는데, 심하게 불었던 바람도 흔들지 못한 13번가 나무들의 의지는 어쩌면 검은 개의 것일지도 몰랐다. 강력한 영혼의 힘은 전염병 같은 흐름을 가졌다. 햇빛 속에서 아이들은 홍옥처럼 반,./짝이고 개구리처럼 활짝 피어나는 순간 담을 넘는다. 13번가 사람들은 처음으로 13번가 나무들에게 공포를 느꼈다. 나무는 보름 만에 악몽의 테마가 될 수 있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사람들은 점점 어두워지는 얼굴로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별의 능력
그들은 노인이다. 저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포함되어 있는 세계를 느낀다. 13번가 가로수 관리인은 죽었고, 검은 개는 남았다. 14번가 가로수 관리인은 죽음을 옆에 앉혀두고 어디서 툭 끊겨도 좋을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평선이 재빨리 이동하고 있었다. 동시에,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다. 8번가 상점들의 문이 열리고 부지런한 점원들은 사물들의 자리를 바꿔보기도 하고 먼지를 털어내기도 한다. 나는 당신을 오늘 처음 만나는 것이다. "좋은 아침이죠?" 우리는 날씨를 살핀다. 나무 위에서 아침식사를 하던 한 젊은이가 웃음을 터뜨렸는데, 밥알들이 웃음 소리를 따라 흩어지고 새들이 지저귀며 뒤쫓아 날아갔다.
사소한 기록
발이 푹, 하고 빠지는 것이었다. 이건 실수라고 할 수도 없어, 나는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애쓰는 사람인데, 이를테면 사거리라고 불리는 오거리.
실금같이 깨진 샛길에 대해서 세심했을 뿐
나는 거리를 멋대로 산책했지만 함부로 기억하지 않는다. 단지 몇 사람의 안
면만을 익혔을 따름이다. 이를테면 죽은 생선의 푸른 등을 내리치는 칼 든
사내와 사내의 냄새……
생선은 목을 치지 않고 토막을 친다고 사내가 낮게 우물거렸다. 생선은 참,
목이 없군요.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생선은 개보다는 장작에 가깝죠, 사내가
약간 우쭐거렸을 것이다. 그때 어쩌면 리얼리즘과 그로테스크의 관계를 생각하고
진화론과 목의 관계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기억하는 힘을 줄이기 위한 나의 노력은 미덕에 속한다. 나 역시 먹구름같이
모였다가 파래지거나 노래진다고 할 수도 있다. 있다니! 나는 보이는 것에
대해서만 믿음을 보이는 사람인데, 나는 여기 서늘해지는 목덜미
많은 전선이 지하에 매설되거나 형태를 빌리지 않는 형태로 대치되었다.
발이 푹, 하고 꺼진 이후에 나를 총총히 관통해 사람들이 지하로 흘러갔다.
우리는 아무도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분명히 장애물이 아니다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3년)
오늘밤에도
오늘밤에도 소년들 소녀들 전화를 한다. 오늘밤에도 하늘은 푸르스름하고 해는 떠오르지 않는다. 소년들 소녀들 오늘밤에도 총총하다.
낮에 소년과 소녀는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고, 아이스크림은 햇빛에 녹지 않고, 오늘밤은 아이스크림 같아서 달콤하다. 딸기 시럽같이 성수대교를 흘러가는 자동차들은 어디서
어디서 스르르 녹겠지. 12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소년은 전화를 한다. 난 달리지 않을 거야. 달려가서 누군가를 만나고 덜컥,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아.
난 오토바이족을 동경하지도 않고 여자애를 엉덩이에 붙이고 싶지도 않아. 나는 무섭게 세상을 쏘아보지 않지. 그런 눈빛은 이제 아주 지겨워. 몇 명의 소년 소녀 오늘밤에도 머리를 너풀거리며 추락하고,
그 몇 초에 대해 오늘밤에도 명상하는 소년들 소녀들 전화를 한다. 오늘밤도 쉽게 깊어진다. 우리는 어디서도 만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하면 항상 오늘밤이 아주 달콤해지지. 딸기 시럽같이
성수대교를 흘러가는 자동차들은 어디서, 어디서, 스르르 녹겠지.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나요
네겐 햇빛이 필요하단다. 여자는 나를 유모차에 태우고 공원을 산책했다. 햇빛은 어디 있지요? 난 뭔가 만지고 놀 게 필요해요. 나는 여자를 올려다 보았다. 여자도 어딘가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엄마, 라고 말했다.
얘야, 너는 잠시 옛날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란다. 그리고 세상은 많이 변했단다. 여자가 유모차를 밀던 손을 놓았다.
구른 건 바퀴뿐이었을까?.....내 차가 들이받은 나무는 허리를 꺾었다. 나뭇잎 나뭇잎이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를 나는 들은 것 같다. 아아아, 내가 처박힌 여기는 어딜까?
당신, 왜 그래? 헝클어진 당신이 묻는다. 나는 핸들에 머리를 박고 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나요? 멈출 수가 없었어요. 나는 천천히 당신을 올려다본다.
당신도 어딘가를 올려다본다. 답을 구하는 태도는 누구나 유아적이군요. 그런데, 구른 건 정말 바퀴뿐이었을까요?
나는 엄마, 생각을 했다. 나는 방향을 틀기 위해 잠시 후진을 해야 했다. 천천히 핸들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시집, 사춘기(문학과 지성사 2004)
우는 아이
우는 애들을 달랠 순 없어요. 난 머릿속이 출렁거길
때까지 울죠. 애들이 날 달래지 않으면 애들이....... 애
들이 ....... 익사할지도 몰라요.
애들은 정말 겁도 없어요. 물속에서 노래를 해요. 엄
마 ...... 엄마...... 엄마...... 저 뻐끔거리는 입들을 좀
보세요.
표면으로 올라온 물방울들이 잇달아 터지고 있어요.
공기가 가시처럼 찌르나 봐요. 애들이 너무 오래 물속에
서 놀고 있어요.
울지 않는 아이
아주 조용하죠. 내 머릿속에서 훌쩍임들이 멎고 흘러나오던 콧물도 얼었어요.
꺽, 하는 뭔가 한꺼번에 넘어가는 소리가
고요를 분할했지요. 다음에 온 고요는 쌔근거렸어요. 여진일까요?
정말 아이들은 잠에 빠져버렸나 봐요. 내 머릿속은 보육원이죠. 아이들의 악몽을 덮을 이불을 준비해야겠어요.
아이들의 악몽은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자동차 같아서 피하기가 어려워요. 자동차가 통과해 갔는데 내가 어떻게 콩나물을 사고 두부를 사겠어요?
더 이상 울지 않는 아이는 위험해요. 아주 조용하지만
조용히 내린 눈이 마을을 고립시키죠. 그리고 아무도 그 마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면.
시집,사춘기(문학과지성 2003)
지하 1F에 대해서
여기서는 네 개의 층을 볼 수 있다. 옥상은 쏟아질 듯
한 산을 밀어내고 있다. 대성고등학교 건물 일층과 지층
은 한남연립 마동이 가리고 있다.
지하에 대해서라면 한남연립 마동 베란다에서 욕망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당신의 지하를 구성할 수 있는 베
란다를 욕망한 때가 있었다. 거기서도 널어놓은 팬티는
잘 마르는가?
당신은 방학 중인가? 대성고등학교 남자애들은 방학
중이다. 빈 교실에 왜 커튼은 마스크처럼 입을 막는가?
당신은 정말 방학 중인가? 혹시?
마스크 뒤에서 사내애가 자위를 하고 있다. 나는 세상
에 꼴리는 게 많아. 이유 따위는 없어. 입을 조금 열었지
만 그는 불특정한 남자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커튼이 약
간 구겨졌다가 괜찮아, 하면서 팽팽해졌다.
학교 옥상은 죽지 않고 병신이 될까봐 무서운 곳이었
다. 당신은 어디 있는가? 나는 갈 데까지 갔어도 당신의
지하를 구경할 수 있는 베란다는 욕망의 영역이다.
나는 저녁에 화분을 사러 갈 것이다. 나는 베란다의
여자답게 꽂힐 것이다. 물 주러 오는 남자는 병신이다.
시집, 사춘기
당신과 당신
당신과 당신은 u와 U
너희들은 커플링 같구나
나는 당신을 끼고
당신은 당신을 끼고
비스듬한 오후에는 다 같이 비스듬하게
정면으로 오는 차는 정면으로 충돌하고
연인들의 짧은 이름은 폭죽
대낮을 배경으로
내가 아는 연인들의 가장 긴 이름은 일주일 후
나의 에세이에는 주제가 없고
나에겐 이름이 없다
없는 것들의 목록을 당신과 당신이
당신과 당신을 우르르 탕탕 노래하고
저 난동을 어린이처럼 지켜보는구나
조용해진 당신과 당신은 W와 w
사이사이에 모가지 없이 서 있구나
나는 당신을 당기고
당신은 당신을 당기고
우리들은 나누어 가진다, 천진하게
당신과 당신은 공연에 참여한다
거짓말을 할 때도 천진하게
기억은 몰래 쌓인다
매일 밤 나는 눈을 감지.그리고 오랫동안 눈을 뜨지
않았네. 어떤 소리가 새어 나갈지 알 수 없었네. 나는 놀
러 다녔어. 나는 취미도 개성도 없지.
매일 밤 나는 눈을 감으면서 세상이 감기는 걸 느끼지.
이렇게 간단히 세상이 바뀌는걸 뭐, 하고 중얼거리네.
가로수들이 엎어지고, 길은 혀처럼 도르르 말렸어.
육중한 동물들이 희귀한 교미 장면을 보여주곤 했어도
애로틱해지지 않았네. 뿌옇게 흙먼지만 일었지. 나는
다른 종에게 취미를 느낀 적이 없어. 눈을 감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느끼는 건 아니야.
애들이 조용히 눈싸움을 했네. 눈은 포장일 뿐이고,
언제나 싸움은 돌멩이를 감추고 있는 법이지. 볼때기가
뻘겋게 부처 터질 듯했어. 새들이 흰 눈밭에 콕,콕,콕,
부리를 찍었지만
내리는 눈은 금세 구멍을 메우네. 세상은 여전히 덮여있고,
점점 깊어지지. 매일 밤 나는 눈을 감으면서 세상이
덮이는 걸 느끼지. 그렇게 감춰지고,
나는 오래간만에 눈을 뜨니까 매일 어리둥절해. 그리고
눈곱처럼 떼어놓아야 할 게 있다고 느끼지.
이별의 능력
나는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
나는 2분간 담배 연기. 3분간 수증기. 당신의 폐로 흘러가는 산소.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태울 거야.
당신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알고 있었니?
당신이 혐오하는 비계가 부드럽게 타고 있는데
내장이 연통이 되는데
피가 끓고
세상의 모든 새들이 모든 안개를 거느리고 이민을 떠나는데
나는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
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
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
3시간 이상씩 명상을 하고, 헛것들을 보지. 매우 아름다워.
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해.
당신 머리에서 폭발한 것들을 사랑해.
새들이 큰 소리로 우는 아이들을 물고 갔어. 하염없이 빨래를 하다가 알게 돼.
내 외투가 기체가 되었어.
호주머니에서 내가 꺼낸 건 구름. 당신의 지팡이.
그렇군. 하염없이 노래를 부르다가
하염없이 낮잠을 자다가
눈을 뜰 때가 있었어.
눈과 귀가 깨끗해지는데
이별의 능력이 최대치에 이르는데
털이 빠지는데, 나는 2분간 담배 연기. 3분간 수증기. 2분간 냄새가 사라지는데
나는 옷을 벗지. 저 멀리 흩어지는 옷에 대해
이웃들에 대해
손을 흔들지.
칼
- 사춘기 3
소년이 손을 열어 보여준 건 칼이었다. 분홍색 손바닥 위로 슬몃 피가 비쳤다. "연필이나 깍지 그러니?" 소녀는 분명히
비웃었다. 소녀는 뚫어지게 소년을 응시했다.
여자애에게 위로를 받아본 일이 있었던가? 생각나지 않는다.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는 여자애가 무서웠다. 소년은 소녀의 집에 놀러 가보지 못했다. 소년도 소녀를 초대한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해수욕장의 모래밭에 누워있는 소녀와,
볼록한 가슴에 얹어주는 뜨거운 모래에 대해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생일 파티 같은 것은 부유한 초등학생들이나 하는 짓이다." 아무한테나 손을 벌리진 않겠지?" 소녀는 똑똑하다.
소년은 히, 웃으며 천천히 손을 오무렸다. 손가락과 함께 칼이 사라져갔다.
유령의 집
심장이라고 불렸지.
그 몇 개의 방.
나는 그 몇 개의 방이었지.
303호의 심장은 부활했지. 부활한 심장은 괴물이라고 불리지. 606호 심장은 낙엽같이 누웠어. 나는 바스락거리고 당신은 잠을 이룰 수 없어. B103호 심장은 사랑을 나눴네. 나는 빨리 그곳을 비웠네.
그 몇 개의 방을 순환해.
가끔 친구들이 놀러 오지. 여주인처럼 구는 짜식도 있어. 302호 심장은 노에처럼 굴지.
그 몇 개의 방에서
나는 그 몇 개의 방.
그 몇 개의 방은
피부같이 곰팡이가 피고
손톱같이 죽은 후에도 자라지.
방을 옮기며
나는 점점 인생을 닮아가네. 808호 심장은 눈비가 흘러내리는 창문을 가졌네. 창문이 덜컹거리고 나는 목욕물을 데우지.
당신은 얼어붙었는데
심장은 녹지.
음악 같은
올 겨울은 토끼와 함께 눈 내리는 소파에서
조용한 나의 친구와 함께 마루에서
라르고 음악을 듣다가
굴을 파고
안단테 점심을 먹고
굴을 파고
죽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조용한 사람들을 지나
굴을 파고
우리는 조금 더 멀리 가 보았다
다음 날이 같아도
굴은 소설책처럼 시간을 흐르게 하고
우리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눈이 내리는 소파에서 나는 안단테 안단테 털실을 감고
한 벌의 옷이 사르르 녹고 있었다
친구들
-사춘기 6.
주소록을 만들기로 한 날이었어요. 애들은 종이에 썼어요. 여기에 내가 있고 여기에 내가 없고 저기에 내가 있고 저기에 내가 없고 3시에 바닷가에 있었고…… 정말 시들을 쓰고 있더라구요. 우린 모두 일목요연해지려고 모였다구.
우리에겐 특별한 날이잖아. 실용적인 주소록을 만들기로 해. 우린 모두 지쳤기 때문에 동의했어요. 무섭게 조용해졌는데, 전화벨이 울렸어요. 내가 모임에 빠진 거 애들이 아니? 이해해. 우린 너무 많아졌으니까. 나는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중이야. 지옥행을 시도했거든.
네가 대신 아무렇게나 써줘. 푹신한 침대에 내가 누워 있고 지옥문 앞에 내가 있고 다시 약국에 내가 있고 엄마 손에 잡혀 나는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고 꽃잎이 떨어져서…… 그런데 절대 시 쓰진 마. 그냥 아무렇게나 쓰면 돼.
걘 멋진 데가 있었어. 우린 모두 조금씩 그래. 애들은 종이에 썼어요. 얘들아, 우린 추억하려고 모인 게 아니잖아. 3시에 바닷가에 있었고 모레에는 기차를 탈 거야. 가끔 우리는 여기에 있을 거야. 우린 천천히 조용해졌어요.
사춘기 1
노랑머리 소년을 아십니까?
방과 후에 미용실에서 아줌마들의 머리를 감겨드렸어요.
이모의 미용실입니다.
이모는 맞고 사는 여잔데요. 아줌마들은 내놓고
동정(同情)했어요.
노랑머리 소년을 아십니까?
아줌마들이 참 예뻐했어요. 잡담을 하는 그녀들은
조금씩 음탕했는데요.
후딱 봄이 갈 것처럼 뭉텅, 봄나무에 꽃은 빠져버리고,
봄볕을 받는 수건들은 희미했어요.
치밀어오르는 노랑머리 소년을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