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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유수(思惟修)/불교인의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일양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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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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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호 《불교평론》의 특집기사는 ‘기복불교를 말한다’는 것이었다. 한국불교가 기복신앙에 경도되어 있고 이로 인한 폐해가 적지 않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느끼고 있는 문제이다. 그런 만큼 이번 특집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 4편으로 이루어진 이 특집은 나름대로 상당한 짜임새를 보이고 있다. 첫째, “기복불교는 불교인가”라는 당찬 물음을 통해 ‘기복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떻게 어긋나는 것인지를 보이고 있다. 요컨대, 원인 없이 결과만 바라는 것이 기복신앙이며 이는 불교의 기본적 가르침인 연기설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것 자체가 불교의 존재이유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위의 논문에 의하면 타파의 대상인 ‘기복신앙’이 왜 오늘날 이렇게 성행하고 있는지에 대해 그 역사적 전개를 살펴본 것이 “기복불교는 왜 생겨났는가”이다. 셋째, 그렇다면 이러한 기복불교는 실제로 이 땅에서 어떤 폐해를 끼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대안은 무엇인지를 실천의 관점에서 고찰한 것이 “기복불교의 실태와 문제점” 그리고 “기복주의를 넘어 공덕주의로”라고 하는 두 편의 논문이다. 이상을 보면 전체 100여 쪽 가량의 지면을 통해 기복불교에 대해 이론과 실천 두 가지 면에서 지적할 것은 대략 다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나아가 기복신앙이 연기설에 어긋난다는 지적과 기복을 넘어 ‘공덕’으로, 혹은 ‘작복(作福)’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한 것으로 본다. 이상과 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번 특집의 기획과 특집의 논문들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기획면에서 볼 때, 앞 2편의 논문은 ‘기복불교’에 대해 순전히 학문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반면 후반 2편의 논문은 거의 ‘경험’에 근거하여 접근하고 있어 보조가 맞지 않는 느낌이며 논의의 현실성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 특집의 글들은 부처님이 설파한 ‘연기설’과 ‘불교는 자력신앙’이라는 대원칙 아래에서 ‘기복행위’를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원칙’을 일사불란하게 적용하는 것은 근본으로의 회귀, 근본 정신의 진작이라는 측면에서는 옳지만 토론 과정에서 사태의 다양성이 무시될 수 있고, 해결책을 제시함에 있어서도 역시 ‘원칙선언’ 수준에서 그칠 위험이 있다. 실제로 서술을 보면 차분한 논증보다는 ‘선언’에 그치는 경우가 자주 보이며, 구체적인 현실에서 ‘종단’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보다는 단지 개인 신앙행태 차원의 문제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근 불교포럼에서 개최한 “기복불교의 대안을 찾자”1)의 예와 같이 기복불교에 대해서는 여러 불교 잡지나 단체에서 꾸준히 문제 제기해온 부분이기도 하고,그러면서도 지금까지 교계의 별 다른 반응을 얻어내지 못하고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은 결국 기복불교에 대한 논의가 일회로 그치고,조직적이지 못하며, 현실성이 없기때문인 것 아닐까? 그래서 ‘기복불교를 다시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재론(再論)’은 내가 다시 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기왕의 특집 “기복불교를 말한다”에 이어 좀더 구체적인 문제점과 현실적인 대안들에 의한 ‘재론’을 촉구한다는 의미이다. 특집 전반 2편의 논문을 통해 기복신앙이 비불교적이라는 것과 그 역사적 전개를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의문점들이 남아 있다. ‘기복신앙’이 ‘타력의존신앙’이라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주장에 따른다 하더라도 이것을 어떤 강도로 어떤 범위까지 적용할 것인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1) ‘기복’의 ‘개념’문제 예를 들면 46쪽에 “붓다는 다음에서 보듯이 다섯 가지 복을 제시한 바가 있다”고 하는 대목이 있다. 그 다섯 가지는 장수하고, 부유하고, 잘생기고, 이름을 날리고, 똑똑한 것을 말하며, 이것을 부처님이 5복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불설(佛說)’이라고 하지만, 그리고 ‘공덕’에서 비롯되는 ‘복’이라고는 하지만 이 다섯 가지를 ‘무루복’과 동일선에 두고 논의한다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그러나 황선생은 이것을 ‘무루복’이라 생각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없다. 58쪽에서는 “창생을 위하여 복을 닦고 죄업을 소멸시키는 도량의 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구절을 ‘재앙을 없애고 복을 구하는 기복불교’라고 해석하는 대목이 있다. 물론 실제 역사적으로 그렇게 전개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구절 자체를 ‘유루복’이라고 해석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창생을 위해 복을 닦고 죄업을 소멸시킨다’면 이것이야말로 ‘공덕’이고 ‘작복(作福)’이지 ‘기복’이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60∼61쪽에서는 “정도(正道)만 행하면 복업이 장구하고…”라는 대목이 있는데, ‘정도(正道)’를 행하여 얻어지는 복업에 대해 과연 ‘유루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지? 아울러 62쪽 “참선 공부는 나라의 복운을 오래 이어가게 하고 지혜의 경론은 이웃 나라의 침범을 막아준다”는 구절에 대해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친다’고 해석하는 것도 이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표현이 기복신앙을 부추겼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 말은 상당히 타당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참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지혜의 경론을 잘 익힌다면 백성들의 정신과 기백이 살아 있게 되니, 복운이 오래가고 외적이 감히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물론 사회학이나 정치학의 관점에서는 참선이니 경론이니 하는 것보다 부국이니 강병이니 하는 것이 나라의 복운과 외침 대비에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진각국사는 승려이니 불교의 관점에서 말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편, 77쪽에 ‘자식이 대학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것’은 “내 자식만 잘되면 된다는 극단적인 이기심이 숨어 있는 것”이라는 표현은 어폐가 있어 보인다. 도대체 ‘극단적인 이기심’이라는 말이 이렇게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일까? 이런 논리대로라면 다른 학생 잠자고 노는 동안에 혼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도 자기만 잘되면 된다는 극단적인 이기심이고, 국가안녕기도회 같은 것도 ‘다른 나라야 어찌되든 우리 나라만 안녕하면 된다’는 극단적인 이기심이 숨어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상에서 언급한 것은 첫째, ‘기복’과 ‘공덕’의 개념 자체가 명확하게 구별하기 어렵거나 최소한 특집의 서술들에서도 명확치 않은 면이 보인다는 것이며, 둘째, 원칙적으로 옳은 주장이라 해도 ‘설득력’을 가지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말이다. 2) ‘기복’과 ‘공덕’은 누가 판단하는가 특집에서는 ‘기복’의 행위에 대해 ‘입시·사업·질병·득남·점·부적’ 등을 예로 들고 있고, 이에 대한 기원에 비도덕적인 예가 있으며, 전체 교단이나 사회관계는 도외시한 채 오로지 개인의 복만 기구함으로써 결국 사회와 교단의 화합을 깨뜨린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기복’의 예를 가져와서 ‘기복’만을 비판한 것일 뿐 실제로 ‘기복행위’를 하는 많은 불자들이 ‘공덕’을 짓고 있다는 것은 무시하는 서술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 현재 사찰을 운영할 수 있는 스님이 크게 부족한 형편에서 사찰의 운영은 대개 재가불자의 자발적인 참여에 힘입는 바가 크다. 경우에 따라 얼마간의 보수를 받는 예도 있겠지만 이러한 도움이가 없다면 대소사간에 사찰의 정상적인 행사를 진행할 수 있을까? 한편 이분들이 자원봉사하는 것이 ‘이만큼 공덕을 지었으니 이번에 우리 아들이 합격하겠지, 손자를 보겠지, 사업이 번창하겠지…’ 하는 반대급부를 기대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공덕을 짓는다’는 생각 정도는 있겠지만 그것은 비판의 대상이 못된다. 즉, ‘기복’과 ‘작복’ ‘공덕’의 구별은 학자들이나 하고 있는 것이지 일반 불자들에게 ‘기복행위’는 그들의 ‘공덕 짓기’의 일부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기복행위’와 신앙, 그리고 일부 유효한 기능 다시 말해서 평소에는 ‘공덕’을 열심히 짓던 분들도 당장 이러한 문제가 닥치면 아무래도 우선은 그 문제 해결을 갈구하기 마련인데 문제는 이들이 단지 사람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고3인 자식을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아무래도 한정되어 있으며, 병자의 치료를 위해 주위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이나 자식 부부의 득남을 위해 나이든 부모가 할 수 있는 일, 남편의 사업을 위해 아내가 할 수 있는 일 등은 모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입시합격을 위한 기도에 열심인 부모가 자식들 밥도 안 챙겨 주고 학과 교재나 학원 등록비도 안 주면서 오로지 기도만 한다고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예일 뿐이며, 대개의 경우에는 자신이 할 바를 다 해놓고 그 나머지 부분에 있어 간절한 성의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를 ‘미신’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반적 정서로 볼 때, 부모가 자신을 위해 밤새워 기도한다면 자식은 그 정성을 봐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노력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도, 기복’이 광적인 경우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입시·사업·질병·득남…’ 등등을 위해 기도하는 것 자체를 인과율에 어긋난다고 해서 불제자가 아니라고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주장이다. 만약 원칙을 이처럼 엄격하게 적용하자면, 새해 아침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며 세배를 올리고 덕담을 주고받는 것도 인과율에 어긋나는 미신일 뿐 아니겠는가! 내가 알기로는, 이러한 ‘타력신앙’을 인정하는 편에서는 ‘타력신앙’을 ‘절대자에의 귀의’라거나 ‘자력의 포기’가 아니라 ‘앞선 선배에게 조력을 구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를테면 프로야구의 선동열 투수도 학창시절에는 최동원 선수를 선망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마음속으로 늘 “최동원, 최동원……”하고 외우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슷한 이치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염하는 것에 대해 세친(世親)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믿음의 힘, 신력(信力)이요, 둘째는 필경지(畢竟知) 즉 궁극적 이치를 아는 것이다. 첫째, 신력이라는 것은 나 자신이 관세음보살과 같다는 철저한 믿음을 지니는 것이요, 또 관세음보살의 공덕과 같은 공덕을 나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는 것이다. 둘째, 필경지라는 것은 결정적으로 법계(法界) 즉 법성(法性)을 깨닫는 것이다. 이 법성을 깨달을 때, 구도자는 초지보살(初地菩薩)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2) 물론, 방금 말한 것이 ‘염불’의 진정한 의미이지만 이러한 의미가 퇴색되고 타력에 의지하려고만 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2) 이기영, 〈불교와 자비정신〉, 《월간 금강》, 대한불교 천태종, 1986년 5월, 48p 재인용.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 ‘아미타불’을 염하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는 경우보다 나쁜 마음을 더 적게 먹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과 같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나름대로 경주하면서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해 종교에 의지하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지 않을까? 1) 염불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논의를 끝맺는다는 것은 결국 현재의 기복불교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기복불교가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 지역적으로 인도나 중국, 일본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고, 역사적으로도 2천년 이전부터 발전되어 왔으며, 그 과정 중에는 원효 스님이나 휴정 스님 같은 대선사들까지 개입되어 있다 하니, 결국 오늘날 한국불교의 병폐라고 말할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점들에 대해 더 논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한다.
② 자력신앙의 원칙에 어긋나는 ‘염불’이 결국 폐지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면 원효 스님이나 휴정 스님이 염불을 제창한 것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시대적인 상황이나 민중들의 의식수준의 차이에 따라 인정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것인지? 아니면, 동기는 좋다고 할 수 있지만 두 분 스님이 결국 잘못 판단하신 것이라고 할 것인지? ③ ‘염불’은 일반 재가신도 외에 선종사찰에서도 수행법의 일종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과연 ‘염불’은 수행법으로 볼 수 있는지 어떤지? 일찍이 만해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염불당 폐지’를 주장한 바 있다. 불도(佛道)란 불러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나에게 도가 있으면 자신이 성불해서 정토에 가면 될 것이지 비굴하게 먼 곳의 부처에게 애걸복걸할 이유가 없으니 축음기같이 부처님 이름을 되풀이해서 부르는 것은 폐지하자는 것이다. 한편, 부처님의 마음을 염하여 나도 이것을 마음으로 하고, 부처님의 배움을 염하여 나도 이것을 배우고, 부처님의 행을 염하여 나도 이것을 행하는 것이 참다운 염불이라 하였다.3) 3) 한용운 스님, 한종만 편, 〈조선불교유신론〉, 《한국근대민중불교의 이념》, 한길사, 서울, 1983년 2판. pp.45∼49. 나는 ‘염불’이 단지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참선 외에 보조적인 수행법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만약 수행법으로 인정할 수 있다면 ‘염불당 폐지’ 같은 것은 너무 독선적인 주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해 스님의 주장을 보면 첫째 주장의 근거와 결론이 뚜렷하고, 둘째 ‘염불당 폐지’와 같이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으며, 셋째 필자의 주관과 신념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2) 천도재 첫째, 이상에서 보듯이 ‘불설과 비불설을 결택하자’는 구호는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구체적인 결론은 얼마든지 다르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선언’들이 아니라 한두 가지의 문제라도 구체적으로 적시해서 논의하는 것이 현실성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천도재’를 ‘스스로 참회하고 선행을 발원하는 기회’로 삼는다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행사의 형식과 그 목적이 일치하는지의 문제이다. ‘천도재’란 확실히 조상의 천도가 주목적이지 ‘스스로 참회하는 기회’로 삼는 것은 부차적인 목적일 뿐인 것이다. ‘천도재’를 올리는 사람은 어쨌든 ‘천도재’를 통해서 조상의 혼령이 실제로 ‘천도’된다고 믿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 만족인지 진정한 효심인지 하는 것은 개인 양심의 문제이니 제3자가 말할 바는 아니다. 따라서 ‘천도재’는 ‘천도재’ 그 자체의 논리에 따라 가부를 논할 문제인 것이다. 만해 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제사를 통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면 한 번 제사하는 것으로 족할 것(앞의 책, 74쪽)”이므로 때마다 제사를 지내고 재공양을 올릴 필요가 있는지? 그렇다면 그 논리는 무엇인지, 과연 ‘천도재’를 통해 조상의 영령이 천도되는지 등등의 차원에서 접근할 문제인 것이다. 만약 참으로 ‘천도재’가 ‘스스로 참회하고 선행을 발원하는 기회’일 따름이고 조상 영령의 천도는 없다고 한다면 ‘천도재’는 폐지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편 ‘천도재’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문제들로는 (꼭 불교의 행사는 아니지만) ‘위령제’ 및 산 사람과 망자(亡者) 사이에서 불교나 사찰이 해야 할 일들이다. 망자의 공간, 그러니까 장례장, 장례방법, 망자의 안치 장소 등등이 구체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만큼 여기에 어떻게 대응하고 어떻게 대안을 제시할 것인지 하는 것이 종교의 중요 임무이기 때문이다. 3) 교리나 종파의 문제 ‘기복불교’에 대해 ‘학문적’으로 접근한다고 할 때 불교학자들이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할지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으로 본다. 특집에서 ‘기복신앙’을 강하게 질타한 그 관점에 따르자면 이러한 신앙, 종단, 교리는 불교가 아닌 것으로 정리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여전히 불교의 범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인지, 나는 그 설명이 너무나 듣고 싶다. 4) ‘선’과 ‘정토신앙’은 어떻게 양립하는가 ‘대승일불승(大乘一佛乘)’사상은 ‘자비희사(慈悲喜捨)’의 공덕을 강조하는 것이지 개인의 기복을 유도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선종’은 불교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자력신앙’이며 ‘주체성’을 강조하는 기풍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정토사상’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 원인부터 해명해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원효 스님이나 휴정 스님이 염불을 선수행 범위에 포함시킨 것처럼 ‘선종’과 ‘정토신앙’이 실제로 양립할 수 있는지, 또 현실적으로 양립하고 있는 이상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선’과 ‘정토신앙’이 양립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의 선종이 정토신앙과 양립하고 있다면 이것은 선종이 그 정신과 기개와 원칙을 잃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이다. 일견 양립 불가능해 보이지만, 나는 ‘첫째’와 ‘둘째’의 가능성이 다 존재한다고 본다. 지금도 각 불교신문에는 ‘영험기도사찰’, ‘영험 있는 천도재’ 등의 광고가 줄이어 등재되는데 이런 것은 사찰에서 ‘기복행위’를 적극 권장하는 것 아닌지? 이러한 ‘공급’이 존재하는데 개인의 ‘수요’를 없애자고 하는 것은 공허한 주장일 뿐이다. 1) ‘개인 신앙’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 논문들에 실려 있는 것처럼 ‘기복’이 복을 주재하는 ‘절대자’를 상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기독교나 천주교는 당연히 기본적으로 기복신앙의 병폐를 드러내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상대적으로 불교보다 신도들이 조직되어 있고 신도들 자체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즉, ‘기복’이란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기복’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은 이상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실제적인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조직되지 않은 수많은 신도들의 신앙행태를 어떻게 바꿀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결국 그 신도를 지도할 수 있고 또 조직되어 있는 승단이 문제해결의 대안으로 제시되어야 타당한 것이다. 한편 이 글들 속에 나타난 것만 보아도 승단(혹은 승려)은 불교를 기복신앙으로 기울게 하고 있는 주체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교단의 각성부터 촉구해야 옳을 것이다. 2) 종단 차원의 해법이 필요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추진되고 있는 쉬운 경전, 쉬운 교리 강좌, 각 사찰의 불교대학 강좌, 시민선방이나 각종 사회참여활동 등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여러 가지 대안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고 지금도 해결의 노력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지만, 이것이 아직 대세가 되지 못하고 있고 불사(佛事)가 주로 ‘사찰 내부, 개인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전각의 신축불사나 기와불사, 각종 탑, 불상의 조상, 각종 재공양이나 기복적 목적의 각종의 기도 등이 각 사찰에서 추진하는 주요 불사가 되고 있어 재가 불자들의 시선이 외부 사회로 향하기 어렵고, 결국 내 사찰 내가 모시는 스님으로 관점이 한정되다 보면 항상 내 가정의 문제만 마음속에 남게 되는 것 아닐까 한다. 또 특집 82쪽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스님과 신도들간의 의사소통의 수단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것도 문제를 확대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앞에서 자원봉사하여 공덕을 짓는 재가불자들을 언급하였지만 문제는 사찰에 참배하러 오는 전체 불자의 수에 비해 이처럼 조직되는 불자의 수가 극히 적고, 이들 역시 결국 사찰의 행사에만 참여할 뿐이지 다른 불자의 일에 상호 부조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조직화와 참여를 재가불자들이 자발적으로 이루어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 만큼 종단 차원의 적극적인 주도가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글은 지난 여름호 《불교평론》에서 다룬 ‘기복불교의 문제점’에 이어, 그 특집 논문들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좀더 구체적이고 진전된 논의를 촉구하는 것이다. 논의의 과정에서 특집의 논문들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서술들이 더러 있는데, 이것은 ‘기복행위’를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태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본문에서는 ‘기복행위의 범위 문제’ ‘지난 특집에서 빠져버린 논의들’ ‘기복불교 문제의 핵심’ 등으로 나누어 서술했지만 사실은 모두 지난 특집에서 이런 부분의 논의가 결여되어 있어 아쉽다는 것이고, 다시 한번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이다. 소위 ‘현실적’이라는 논의는 사실 ‘현실 타협’을 미화하는 논의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하지만, 요컨대 ‘원칙적 수준’에서 본다면 남북한의 그 어느 누구가 ‘통일’에 반대하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원칙론이란 원칙의 옳고 그름에 의해 힘을 갖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대안이 제시될 때만 힘을 가질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지난 특집은 기복불교의 학술적 개념 따로 그 문제점 따로 하여 논의할 것이 아니었다. 기복신앙도 여러 가지 행태로 드러날 것이고, 그 행태들 중에는 문제의 여지가 큰 것이 있고 좀 덜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여지가 가장 큰 것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여 그것이 부처님 말씀에 어떻게 어긋나는지 근거를 제시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더 옳지 않았을까 한다. 다만 이 글에서 기복신앙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종단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 종단이나 사찰에 기복신앙을 재생산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임에도 그 변혁의 과제나 문제점을 적절하게 파악하고 지적하지 못한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종단관계자를 포함하여 많은 분들의 논의가 있었으면 한다. 한편 이 특집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생각되어 본문에서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이 특집에서는 ‘공리(公理)’처럼 언급되고 있는 ‘공덕’의 개념에 대해서도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덕’과 ‘복’ 사이의 논리적 관계도 관계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바람직한 상태(예를 들어 미모, 건강, 학식, 자녀, 재산 등등)’가 곧 ‘복을 받는 상태’로 인식된다면 이것은 다양한 행복의 조건을 획일화하는 위험성이 있지 않을까?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인용문의 출전’ 혹은 ‘참고문헌’에 관한 것이다. 어떤 말이란 위아래 문맥을 동시에 고려해야 그 참 뜻을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인용문’은 아무래도 필요한 부분만 적시하기 마련이므로 ‘출전’을 밝혀 주는 것은 단지 그 인용문의 근거를 밝히는 것일 뿐 아니라 전말이 궁금한 독자는 실제로 그 부분을 직접 찾아보라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대개 불교 논문은 ‘아함경’ 혹은 ‘아함경·47권’ 이런 식으로 출전을 표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 특집에서 같은 내용이 특집 41쪽에서는 ‘중아함·34권·복경’으로, 96쪽에서는 ‘중아함경·138·복경’으로 되어 있어 서로 판본이 다른 책을 참고했다는 말이 된다. 앞으로는 독자들이 실제로 접근 가능하도록 출전을 표기해 주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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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록 | ||
성균관대학교 중문과 및 동대학원 중문과 졸업. 문학박사. 현재 충주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논문으로 <《祖堂集》 意味虛化動詞硏究> <禪問答의 담화구조> <白話語料로서의 禪語錄>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