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알렉산드라 수녀(Schwester Maria Alexsandra, 1919.10,28~2001.9,11)
수녀님은 신앙 깊은 부모 애독자愛讀者 아버지와 조용한 현모양처 어머니 사이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수녀님의 속명은 칼로라(Karola), 수도명은 알렉산드라Alexsandra이다. 알렉산드라는 ‘지킴αλέξ’이라는 ‘남자ανδΡς’라는 낱말의 합성어이다. 이름과 수도 여정 발자취가 꼭 들어맞는 분이다. 하느님이 쓰시기 위해 부르신 남성 이상의 기상과 역량을 지닌 분이셨다. 성품이 긍정적이고 무척 쾌활하였으며 오락을 즐기는 유머를 즐길 줄 아는 수도자였다.
마리아 알렉산드라 수녀는 일생을 하느님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선교사로 살았다. 그녀의 선교활동 무대는 브라질 이탈리아 한국으로 이어졌다. 선교지가 바뀔 때마다 따르는 심신의 십자가가 많았지만, 최종은 복종하였다. 수녀님은 선교지의 역사와 문화를 먼저 사랑하고 존중하며 수용하였다. 일찍부터 탁월한 언어 재능에 발탁되어, 모국어인 독일어 외에 이탈리아어, 영어, 브라질어, 한국어 5개 언어에 능통하였다. 이것은 선교사 활동에서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이었다. 수녀님의 자서전을 대하며 인재 양성과 ‘인사가 만사‘를 넘어 바로 하느님 나라 실현에 앞당기는 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녀님의 성소는 유년기부터였다. 겨우 5살에 유치원 수녀님을 보고 첫 부르심을 느꼈다. 이웃에 사는 남자아이가 우연히 갈 한복판에서 마주치자, “나는 너와 결혼할 거야” 라는 청원에도 그녀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8살부터 아시아 선교의 꿈을 키웠다. 14살에 독일 뮨스터 지역에 있는 노틀담 수녀회 지망자 학교에 학생으로 입학하였다. 1934년 15살이 되던 해 자질을 엿본 수도회에서 영국 유학을 보냈다. 하느님의 계획이 삼위일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브라질 선교>
1933~1939년 사이에 사악한 지도자 히틀러와 나치의 폭정과 종교박해를 피해 브라질로 가서 선교사의 여정을 시작했다. 1939년 20살에 브라질에서 정식으로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1942년 2월 12일 첫 서원을 하였고, 1947년 2월 11일 종신 서원을 봉헌하였다. 이후 16년간 브라질 선교사로 맹 활동하였다.
이탈리아 선교>
1956년 노틀담 수녀회 총장 베라께서 로마로 호출하였다. 이탈리아 선교사로 임명하신 것이다. 이탈리아 관구 본원에서 1년간 책임 수녀직을 맡았다. 알렉산드라 수녀님은 36세로 이탈리아어에 미숙하였고 관리와 운영 경험은 전혀 없었으나 최선을 다하여 소임을 하였다. 1957년 이탈리아 예수 성심 관구장 수녀로 임명되어 9년간 투신하여 이탈리아에서 총 10년을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이 당시 총장 베라께서는 알렉산드라 수녀에게 이제 이탈리아에서 남은 평생을 일할 것이라고 하였다.
한국 선교>
노틀담 수녀회는 1962년부터 극동 아시아에 있는 한국선교를 계획하였다. 당시 베라 총장은 뮬하우젠 관구장인 라파엘리타 수녀와 알렉산드라 수녀에게 한국선교 탐사를 지시하였다.
1966년 당시 메리 안셈 총장은 48살의 알렉산드라 수녀에게 한국선교를 제안하였다. 전임 총장 베라는 수녀에게 이제 이탈리아에서 남은 평생을 일할 것이라고 하였었는데 말이다. 알렉산드라 수녀는 어려움을 호소하였으나 총장은 적임자임을 간파하여 한국선교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렇게 하여 알렉산드라 수녀는 세 번째 선교사로 파견되게 되었다.
1967년 7월 7일 한국에 도착 네 번째 선교사 사명을 시작하었다. 한국에 선교사로 온 수녀는 독일 뮬하우젠 관구의 마리아 보노사 수녀, 코스펠트 관구의 마리아 게오르규 수녀, 마리아 베틸데 수녀였다. 게오르규 수녀의 한국행은 불발에 그쳤다.
선교 수녀들이 시작한 첫 사도직들은 다음과 같다.
도착 첫해인 1967년 성탄에 서울 시내 대중교통 버스 안내양 40명을 초대하여 뜻있는 성탄을 지냈다. 2년이 지난 후 1969년 겨울, 정식으로 ’버스 안내양 사도직‘을 시작하여 1983년까지 계속하였다. 적절한 시기와 적절한 대상자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도직 시작이었다. 사도직 내용은 장차 가정을 이룰 것을 겨냥하여 구체적인 가사 관리 내용이었다. 이것은 독일에서 중요한 종교사회교육으로 행해졌다. 후에는 방송·통신과 검정고시에 연계하여 고등교육을 이수하도록 지도하였다.
1969부터 1984년까지 서울 종로 계동에서 여대생 기숙사를 운영하였다. 지방에 있는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안심하고 수녀원 기숙사에 이들을 맡겼다.
1982년 말부터 방송통신 고등학교를 다니는 버스 안내양들의 부족한 학습을 도와주기 공부방을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쥴리 학원으로 발전하여 운영되었다. 쥴리는 노틀담 수녀회의 영적 창설자이시다. 1983년 3월 5개 회사 버스 안내양 30명이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이것은 쥴리 학원의 초석이 되어 1997년까지 운영되었다.
2023년 가을 현재 한국 노틀담 수녀는 200여 명이 여려 사도직에서 활동하고 있다.
1985년 노틀담 한국 지부는 준관구로 승격되면서 관구 명칭을 ‘평화의 모후’로 정하셨다. 제정 일은 매 해 6,25일로 정하였다. 이것은 한국 내전과 외세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비극적 남북 분단과, 불안하게 대립하고 있는 국내 현실을 감안하여 통일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선교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헤아리고 배려하는 참 선교사다운 모습이었다.
알렉산드라 수녀는 75세가 되시는 1994년, 선교사로 총 54년간 여정, 한국에서 27년간 소임을 마치고 고국 독일로 영국 귀국하셨다. 떠남을 앞두고 깊은 고민과 갈등을 겪으셔야만 했다. 고령에 병까지 든 몸으로 끝까지 한국에 남아도 되는가? 아니면 54년 이상 떠나 이방인처럼 된 조국 독일로 돌아가야 하는가? 게다가 1985년에 발병된 암까지 발목을 잡고 있었다. 수녀님은 독일 국적을 유지하면서 대한민국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었다. 대신 독일에 수십 년간 보험료를 납부하였다. 예상되는 수술과 입원비는 당신이 투신해온 한국 관구에 부담을 줄 것이라는 판단하였다. 수녀님은 고민과 기도 끝에 영구 귀국을 결심하였다. 1994년에 한국을 완전히 떠났다. 이후 노틀담 수녀회 모원에서는 모든 선교사는 소임을 마친 후 본국으로 영구 귀국을 제정하였다.
수녀님은 생전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이것은 그녀가 한 말이 아니라 삶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이며 수도자로서의 증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라 수녀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지닌 하느님의 사람이며, 참으로 귀감이 되는 노틀담 수도자였다.
1985년 암이 발병되어 돌아가시는 2,001년까지 무려 16년간 18번의 암 수술을 받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1994년 영구 귀국하여 더욱 힘들어진 투병 생활 중에서도 할 수 있에 적극적이셨다. 2000년 12월 수녀님은 독일 관구 ‘살루스’에 입주하였다. 살루스란 노년기와 병고의 수녀님들께서 머무시는 곳이다. 이곳에서 십여 년간 머무셨다. 신앙 깊고 천성이 낙천적이며 유머와 놀이를 즐기실 줄 아셨던 수녀님은 돌아가시기 하루 전까지도 카드 게임을 하셨다고 한다.
회고해보니 하느님께서 수고하고 짐 진 수녀에게 긴 이별의 시간을 허락하셨다. 언젠가 수녀님은 비행기로 북극권을 통과하다가 진귀한 ‘오로라 현상’(형형색색의 빛을 내는 현상)을 목격했다고 하시며, “나는 이제 가장 아름다우신 분 하느님만 뵈면 된다”라고 하셨다. 내가 직접 들을 말씀이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9시 30분 수녀님은 그 하느님을 뵈오러 소풍 길을 떠나셨다.
부고>
모니카 수녀님, 오늘 나는 수녀님에게 매우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마리아 알렉산드라 수녀는 한 시간 반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지난밤 수녀님은 복부 고통을 호소하여 긴급히 병원에 모셨습니다. 검사 결과 암세포가 위벽을 망가뜨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검사 후 조금 지난 오전 9시 30분경 수녀님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마리아 알렉산드라 수녀는 간암이 퍼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수녀님은 의사에게 더 이상 수술을 받지 않을 것이며 또한 다른 병원으로 가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자신의 뜻을 밝혔습니다. 수녀님은 타고난 성격 그대로 늘 기쁨을 지니고 있었고 다른 수녀님들과 간호사들을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수녀님은 하루도 침대에 누워 있는 날이 없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인 어제도 몇몇 수녀님들과 카드놀이를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슬프지만, 수녀님은 더 좋은 세상에 들어갔음을 확신하며, 한국을 사랑하였기에 우리의 힘 있는 중재자로 계실 터이니 기도 속에서 하나가 되어야겠습니다.
알렉산드라 어록>
“내가 조금씩 조금씩 알게 된 것은 삶은 기도하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삶을 기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가져가야 하는데 그것은 기도만이 아니다.”(여기서 기도란 언행일치의 증거를 말한다)
“공동체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공동체가 여러분을 사랑할 것입니다.”
+ 마리아 알렉산드라 수녀님을 노틀담 수녀와 노틀담 평화의 모후 한국 관구에 선교사로 보내주신 하느님은 찬미와 감사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