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나일본부와 임나일본부설
임나(任那)란 대체로 낙동강 서쪽의 가야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기록에는 매우 드물게 나오는데, 삼국사기에는 신라 문무왕 때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강수가 원래 임나가라 출신이었다는 언급이 있다. 이렇게 임나가 지역명칭이라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란 그곳에 설치된 일본의 관부(官府)를 뜻하게 된다. 즉 임나일본부란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우리가 가야라고 여기는 지역 즉 임나에 있었다는 일본 고대국가의 일종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말한다. 임나일본부의 존재는 일본천왕의 신성화를 추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에만 나오는데 이 임나일본부의 존속시기나 그 성격에 대한 연구자들의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 종래 일본 내의 통설적인 견해에 따르면, 임나일본부는 왜가 신라를 위시한 삼한지역의 국가들을 평정했다는 369년경에 이 지역에 설치되어 562년 대가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존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우리의 학자들은 물론이고 일본의 학자까지도 이같이 보지 않고 있다. 그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도 매우 다양한데, 논자에 따라서 군사적 성격을 가진 지배기구, 상업적 목적을 띤 무역기관, 외교기관 등으로 파악한다. 임나일본부설이란 그 중에서 군사적 성격을 특히 강조하여, 5세기부터 7세기 사이에 고대 야마토조정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직접 지배하였다는 주장을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일부 일본인의 의식 속에 오래 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서기를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서구 열강의 위협 앞에서 한국을 침략함으로써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정한론(征韓論)이 대두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고, 한국을 강점한 이후에는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역사적 근거로 종종 이용되었다. 결국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과거로의 환원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시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이른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함께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관념적 버팀대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네 가지 증거물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를 하나하나 검토해 보기로 하자.
2.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일본서기(日本書紀) :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물 가운데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에 임나가 신라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신공황후가 정벌한 7국의 지명을 고증한 결과 그곳이 당시의 가야지역이었으며 따라서 임나는 가야를 가리키는 것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에는 백제·고구려·신라·임나의 사신들이 왜에게 공물을 바치는 장면이 수도 없이 나온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7세기 중엽에 천황의 권위가 확립된 후 천황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일본학계 내에서도 그 신빙성에 대해 여러 방면에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고, 대체로 5세기 이전의 기록은 신화적인 전설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일본부란 용어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 일본이란 국호는 7세기경에 비로소 나타난다. 따라서 4세기에 이미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이 천황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일본서기 편찬의 산물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기년(紀年)에도 상당한 조작이 가해져 있다. 예컨대 신공황후가 임나를 정벌했다는 369년은 일본서기에는 249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120년의 오차가 있는데 이와 같은 오타는 시기가 올라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심지어 어떤 인물은 244년간이나 관직에 복무하고 있었을 정도이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8년 전에 편찬된 고사기에는 신공황후의 임나정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지금까지도 일본고대사가 미궁에 빠져 있는 것은 일본에서도 일본서기나 고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지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임나에 관계된 기록에 대해서만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고 있는 것은 석연치 않은 일이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 광개토대왕비는 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이 비가 일본학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만주에 밀정으로 파견되었던 한 일본군장교가 1884년에 비의 탁본을 일본에 갖고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5년간의 비문해독작업 끝에 비문의 내용을 발표하였던 바, 그 결과 광개토대왕비는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귀중한 증거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즉 비문에는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왜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활동을 벌이다가 고구려에 패한 기록이 몇 군데 보이고 있는데, 이는 당시에 왜군이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고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는 그 확고 부동한 증거로 제시되었다. 이 부분의 해석을 둘러싸고 수십년간 논쟁이 전개되어 아직도 종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신묘년기사란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라이위신민)>을 말하는데 이에 대한 해석은 너무도 구구하여 낱낱이 소개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세 유형으로 요약된다. 제1형은 문장 전체의 주어를 왜로 보아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가야(?),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4세기 후반의 왜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가 기정사실화된다. 제2형은 앞부분의 주어는 왜로 뒷부분의 주어는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또는 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한다. 제3형은 해석은 제1형이 옳으나, 신묘년기사 자체가 허구 내지는 과장된 기록이라는 주장이다.
♠송서(宋書) : 중국 남북조시대 남송(南宋 : 420~479)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송서에는 5세기에 남송에 조공을 바친 왜의 5왕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무왕(武王)이 스스로 왜·백제·신라·임나·가라(가야)·진한·모한 등 7국의 왕을 칭하면서 남송의 황제에게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자 남송의 황제가 그에게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는 관작을 수여했다. 이 관작이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 한다면 5세기 경의 왜왕은 일본열도는 물론 백제·신라·가야까지도 지배한 것이 되고 따라서 임나일본부설은 사실로 입증된다. 그러나 임나와 가라가 모두 가야를 가리키는 것인데 왜 중복되어 나타나는지, 또 이미 예전에 멸망한 진한과 마한이 왜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무왕이 받은 관작이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허구적인 명예직이었음을 시사한다. 예컨대 남제(南齊 : 479~502)에서는 백제의 중신들에게 조선태수, 대방태수의 관직과 아울러, 당시 북위에 의해 지배되고 있던 북중국의 지명이 붙은 광양태수, 청하태수 등의 관직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왜왕이 요구한 7국의 관작에서 백제가 제외된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송의 입장에서는 왜왕이 이미 사라진 진한·마한의 왕을 칭하든,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신라·가야의 왕을 칭하든 문제삼을 필요가 없었지만, 백제와는 이미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었으므로 백제의 왕을 칭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칠지도(七支刀) : 칠지도는 현재 일본의 이소노까미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칼로서, 1973년에 앞뒷면에 새겨진 명문이 소개되면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칠지도의 실물로 추정되어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즉 일본서기에 372년에 백제의 사신이 신공황후에게 칠지도 한 자루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소노까미신궁의 칠지도가 그 실물이며, 바쳤다는 것은 당시 백제가 왜의 속국이었음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특히 명문 가운데 공공후왕(供供候王)의 供은 초기에 바친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백제봉헌설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그후 후왕은 제후인 왕으로 재해석되어 동진(東晋)에서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동진하사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제하사설에 의하면 후왕은 중국 사설에 나타나는 ○○候, ○○王등의 백제 관직명으로서 당시 왜왕은 백제왕의 신하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현재로서는 백제봉헌설과 동진하사설은 거의 부정되고 있고 백제하사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백제와 왜가 대등한 관계에 있었다는 양자대등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충분한 설득력이 없다. 주는 자라는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백제는 자신들의 우월한 위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글에 표현하였다. 이 칼이 후왕들에게 줄 만한 것임을 장인의 글을 통하여 밝히고, 왕세자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성음(聖音)-거룩한 말씀, 즉 왕의 말씀-을 과시하며 백제왕이 왜왕과는 수준이 다른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전시후세(傳示後世)-흔히 중국 황제가 신하에게 글을 내릴 때 사용하는 상투적 용어,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자기의 분부나 은택의 뜻을 후세에까지 길이 알리라는 내용-하라는 종언으로써 자신들의 입장을 최종적으로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칠지도는 백제에 대한 왜의 종주권이나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입증하는 자료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3. 한일학계의 기존 연구
임나일본부설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첫째, 약 200년간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면 한국측 기록에 조그만 단서라도 남겨져 있을터인데 그러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임나라는 지명만이 조금 보일 뿐이다. 둘째, 왜의 가야지배를 입증할만한 유물이나 유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셋째, 당시 일본열도는 통일정권이 형성되지 못한채 여러 소국의 분립상태에 놓여 있었으므로 바다를 건너 이른바 식민지를 경영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며, 또 식민지경영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명백한 이유가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넷째,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의하면 당시 가야는 왜보다 약 반세기 앞선 선진문화를 촉구하고 있었는데 왜의 가야지배가 가능했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런 의문 속에서 여러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는데 지금부터 일본·북한·남한의 연구에 대해 알아보자.
♠출선기관설(出先機關設) : 출선기관이란 일본어적 표현으로서 출장소 내지는 출장기관과 같은 뜻이다. 우리에게는 익숙치 않은 용어이기는 하지만, 얼마전까지 일본학계의 통설을 대변하는 용어로서 그 연구경향을 특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그대로 쓰기로 하였다. 이는 고대의 일본이 4~6세기의 이백 년간에 걸쳐서 한반도 남부를 근대의 식민지와 같이 경영하였으며, 그 중심적 통치기관이 임나일본부였다고 해석하여, 이른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의 골자를 이루었던 견해였다. 이러한 해석은 1945년 일본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일본고대사 또는 고대한일관계사 연구의 통설적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에 붐을 이루었던 동아시아사에 대한 관심은 한국사연구의 재검토로 이어졌으며, 출선기관설이 이용하였던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은 물론 광개토왕릉비문과 칠지도에 대한 재검토 및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던 것도 일본고대사학계가 이 시기에 이룬 성과
의 하나였다. 이러한 연구에 의하여 출선기관설은 더 이상 통설적이 위치를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중등학교 일본사교과서의 기술은 별도로 하더라도 현재 이러한 학설을 주장하거나 여기에 근거하는 전문 연구자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가야(加耶)의 왜설(倭設) : 일본내의 출선기관설에 대한 재검토의 분위기와 뒤에 소개할 북한의 연구에 자극을 받아 일본연구자의 입장에서 제기되어진 수정론의 하나가 가야의 왜인설이다. 이 설은 선사시대부터 가야 지역과 일본열도의 교류는 활발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열도에 한반도의 주민이 이주하였던 것과 같이, 가야 지역에도 일부의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되었으며 임나일본부는 그러한 왜인들 내지는 왜인과 한인과의 혼혈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가야 지역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자치기관과 같은 성격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가야 지역에 있어서 왜인들의 집단적 거주가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왜계통의 문물로 보이는 유물이 가야 지역에서 확인되고는 있으나 그 수량이 매우 적으며, 출토상황을 볼 때 전체적인 가야계통의 유물 속에 극히 일부로서 확인될 뿐이다. 또한 해당 유물이 출토되는 고분 역시 가야의 전통적인 묘제를 채용하고 있음이 확인될 뿐이다. 왜인의 집단적인 거주를 증명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기마민족설 : 1945년에 일본이 패전한 후 일본사학계는 예전의 일본의 역사학에 대한 반성의 기운이 고조되어 색다른 이론이 제기되었는데 그것이 에가미의 기마민족설(1948)이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위진시대에 중국 북부에서 호족의 기마민족문화와 한족의 문화가 합쳐져 대륙북방계 기마민족문화가 형성되며 그 문화가 고구려족, 부여족에 의해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계속 남하하여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다가 4세기 전반에 북구주로 건너가서, 다시 기내지역에 진출하여 그곳의 왜족을 지배하고 4세기 말 내지 5세기 초에는 대화조정을 수립하였다. 이 정복왕조를 수립한 기마민족은 그후 마치 자신들이 오래 전부터 일본열도 내에 존재했던 세력인 것처럼 역사를 날조하였는데 그 결과가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편찬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황가는 고구려·부여계의 기마민족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한편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반도에 이동한 기마민족 일파가 처음에는 한반도 남부지역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가 후에 그 지배영역이 변진(가야) 지역으로 축소되었는데, 그 지역은 예전부터 왜족이 진출해 있던 지역으로서, 기마민족은 이를 발판으로 해서 왜족의 본거지인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일본열도를 지배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가야지역과 일본열도를 포괄하는 이른바 왜한연합왕국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임나일본부설이 변형된 모습으로 강고하게 존속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반도 남부가 부여계 기마민족이었다는 증거는 확인할 수 없으며, 기마민족이 3~4세기에 대규모로 이동하였다는 증거도 없다. 문헌기록 등에서 주민의 대규모 이동에 관한 구체적 증거를 찾을 수 없는 상태에서, 몇몇 유물·유적의 유사성만을 가지고 기마민족의 이동과 정복을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우리 고대사회의 발전 계기로 외부의 충격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물론 고대에는 유이민집단의 이동이 잦았고, 그것이 토착집단에게 문화적인 충격을 주어 사회발전을 자극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까운 지역에서의 자연스러운 이동이 아니라,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부터 갑작스런 대규모 이동을 가정하고, 나아가 군사력에 의한 일방적인 정복을 상정하는 것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한 사회가 발전하고 이웃 사회와의 관계가 밀접해지면 다양한 형태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지고, 이 과정에서 선진적인 문화가 뒤떨어진 사회로 흘러들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겠지만, 늘 일방적으로 강요되었던 것은 아니다. 수용하는 쪽 내부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그것을 소화할 만한 능력도 어느정도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강요된 문화전파는 결코 문화 발전의 창조적인 계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정복을 통한 단순한 이식으로, 토착문화의 건강성을 파괴할 뿐이다.
♠광개토왕비문 조작설 : 1972년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는 일본 참모본부가 석회를 발라 비문을 변조함으로써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되도록 내용을 바꾸었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비문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폭탄선언이었다. 그후 비문변조설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1984년 중국의 왕건군은 비문변조설과 임나일본부설을 모두 비판하여 논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그는 비석에 가까이 살던 한 중국인이 본 비문의 탁본을 팔아 돈을 벌었는데, 그가 보다 많은 양질의 탁본을 얻기 위하여 비면에 석회를 칠하고 나중에는 글자 주위에도 석회를 칠했을 것으로 보고, 일본의 의도적인 변조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왕건군은 광개토대왕비는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임나일본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물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어떻든 이 비문 조작설은 조작 자체의 사실 여부보다는 근대 일본 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체질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분국설(分國設) : 1963년에 북한의 김석형에 의하여 제기된 이른바 분국설은 임나일본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고대한일관계사에 관련된 일본학계의 기본적인 발상을 완전히 뒤엎는 혁명적인 연구였다. 선사시대 이래 삼한 삼국의 주민들은 일본열도에 이주하여 각기 자신들의 출신지와 같은 나라를 건국하여 모국에 대하여 분국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고 전제하고, 이들 분국들 중에는 가야인들이 현재의 히로시마 동부와 오카야마에 걸치는 지역에 건국한 임나국이 있다고 하였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이 임나국을 중심으로 신라·백제·고구려의 분국과 왜가 서로 각축하였던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임나일본부는 한반도의 가야 지역과는 전혀 무관하며, 일본열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서 규정지었다. 분국설에 따르면 송서에서 왜왕에게 수여한 관작명칭에 이미 멸망한 진한·마한이 포함되고 있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밝혀지며, 칠지도도 한반도의 백제왕이 일본열도내의 분국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즉 분국설은 왜의 한반도남부 지배설을 비판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삼한·삼국의 일본 열도지배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임나 자체를 한반도가 아닌 일본열도로 비정하였던 점은 분국설의 치명적인 약점이라 할 수 있다. 임나라는 용어는 일본서기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료에서도 사용된 예를 확인할 수가 있다. <한원>에 인용된 중국의 인문지리지에 의하면 한반도 남부의 가야 지역을 총괄하여 임나라고 하고, 가라·임나의 국명을 언급하고 있다. <광개토왕릉비문>에 의하면 400년에 고구려군이 정벌하였던 지역명으로서 임나가라가 보인다. <삼국사기> 열전에 의하면 강수가 임나가량 출신임을 알 수 있고, <진경대사탑비문>(923)에도 신라 사람인 진경대사가 임나왕족의 후예였음을 밝히는 구절이 확인된다. 이렇게 볼 때 임나는 한반도의 가야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며 일본열도의 어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 연구결과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는 재론의 여지가 적지 않으나, 고대한일관계사의 연구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으며, 기본적인 발상에 대한 재검토를 촉구하였던 의미는 아무리 크게 평가하여도 무리가 아닐 듯하다.
♠백제군사령부설(百濟軍司令部設) : 과거 일본의 출선기관설에 대한 북한학계의 비판이 분국론이라면, 한국학계의 본격적인 비판 및 대안 제시는 천관우(千寬宇)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관련사료 중에 일본이 주체로 묘사되어 있는 기사들 가운데에는 백제를 주체로 바꾸어 놓아 보면 사리에 맞게 되는 것들이 적지 않다고 전제하였다.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에 의해 일본서기 편찬의 기본자료가 정리되면서, 원래 백제가 주체로 나온 기사들이 왜가 주체로 된 기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사실은 백제가 가야지역의 통치를 위해 설치한 파견군 사령부와 같은 것으로,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백제의 군사행동에 보이는 왜병의 활동이라든지, 임나일본부의 관련기사에서 보이는 왜계통의 인명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좋을까라는 의문이 들게 한다. 이러한 왜병의 존재와 왜계통의 인명에 대하여 대안을 제시하였던 것이 김현구의 연구였다. 김현구는 백제군과 같이 움직이는 왜병의 성격을 용병과 같은 성격으로 보고, 이러한 용병은 백제가 왜에 선진문물을 전수하였던 데 대한 반대급부이며, 왜계통의 인명은 일찍이 일본열도에서 백제에 이주하여 백제왕의 신하 노릇을 하고 있었던 왜계통의 백제인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러나 4세기 말에 가야 지역의 일부를 평정하였던 백제가 6세기 중반에 와서야 해당의 백제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백제가 가야 지역에 외교적으로 관여하게 되는 것은 점령이라든지 군정과 같은 것을 위함이 아니라 동쪽의 대신라방어선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는 외교적으로 가야 제국과 임나일본부를 조종하여 동쪽의 신라방어선의 안정을 꾀하면서 자신의 주력을 고구려전선에 집중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이는 성왕대의 전쟁이 모두 고구려를 상대로 하고 있음에서 확인된다.
♠외교사절설(外交使節設) : 이상의 연구들은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대해서 각기 다른 해석을 전개하고 있으면서도 임나일본부를 왜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정기관과 같은 관청이나 기관의 성격으로 이해하였던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관련사료를 보면 통치나 군사적 역할을 찾아 볼 만한 기술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점에 주목하면서 주관적인 시각의 선행을 지양하고, 보다 객관적인 실체규명의 연구가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즉 부(府)라는 표기는 기관이나 관청이 아닌 사신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임나일본부를 임나에 파견되어진 왜의 사신들로 이해한 것이다.
4. 일본부관인의 출자와 6세기 국제관계를 중심으로 한 임나일본부론
일본부는 원래 사자 즉 개인,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럼 이러한 일본부라는 명칭을 띤 인물들은 어디에서 파견되었을까? 일본부관인이라 하면 그 명칭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듯이 일본열도로부터 파견된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이 통설의 입장이다. 그러나 실제의 분석 결과 일본열도 이외의 나라로부터 파견된 인물들이 다수 존재한다. 일본부관인의 출자는 사료상으로 확인 가능한 7인 중 기문국계 출신이 3인, 일본계안라인이 2인, 그리고 서일본 출자가 2인임이 밝혀졌다. 이하에서는 이들 일본부의 구성분자의 행동양식과 그 목적 그리고 이들의 활동영역인 안라(일본부 관계기사가 흠명기에만 분포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과 안라일본부라는 명칭으로부터 추찰하면 소위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6세기 전반 안라에만 존재하였다)와 주변 제국과의 관계를 통해서 일본부의 실태를 검토해 보자. 기문국계 출신들은 대산성전투에서 선조들이 백제군에 의해 살해당한 후 안라가야로 망명해 온 기문국 수장층의 후예들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반백제적 입장을 견지한다. 6세기 전반 한반도 남부의 정세는 동서로부터 신라·백제의 정치·군사적인 공세에 의해 가야 제국이 연속으로 침식되어 가는 역사였다. 이러한 와중에 기문국계 출자들은 신라와 안라의 국경지대에 군사적 요충지대를 설정하기 위해 신라와의 외교협상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이들이 안라측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이유는 망명집단의 거점에 필요한 경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 전반 안라가 놓여 있던 위기는 바로 가야 제국과 전통적 교류관계를 맺어 온 서일본 제 집단에게 선진문물의 단절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화정권은 서일본지역 출신지들의 사적 외교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가야·백제·신라와의 다면외교의 전통을 배경으로 안라의 위기적인 상황에서 동서를 오가며 외교적 중재를 할 수 있었다. 이상 소위 일본부관인들의 활동상황을 통해서 볼 때 일본부는 결코 특정국의 지배기관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없고, 또한 대화정권과도 무관계한 존재이다. 일본부는 그 주체를 안라가야로 하고 안라가야의 이익과 그 구성원의 이해관계가 합치되어 나타난 일시적인 역사적 산물로서, 6세기 전반 안라 가야의 독립보존을 위해 외교적 활동을 벌인 인간, 그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된다. 요컨대 임나일본부는 6세기 30년대 이후 국가적인 위기에 놓여 있던 안라가야가 자국의 독립보존을 위해 조직한 외교기구로서 여기에는 안라가야와 이해를 같이하는 기문국계 망명세력과 서일본 출신자까지 참여하였다. 따라서 안라가야의 독립을 주변 제국과의 외교적 노력을 통해서 해결하려 했던 인간, 그 집단이 소위 임나일본부의 실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를 돕기위해 가야 제국이 놓여 있던 당시의 국제관계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475년 웅진으로 천도한 후 백제의 급무는 생산력의 기반이었던 한강·임진강이 고구려의 세력권하에 들어감에 따라 이에 대처할 만한 새로운 농업생산지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새로운 생산지의 개척 때문에 시작된 백제의 남방경영은 대산성전투로 시작된다. 섬진강 상류에서 일어난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백제는 그 여세를 몰아 섬진강 유역을 따라 남부지역으로 진출한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 3월조의 7국평정기사에 보이는 신라·비자발·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침미다례 등은 6세기 전반 백제의 부용국이 되었다고 기록된 『양직공도』의 국명과 놀라울만치 일치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신공기 49년의 기사년의 사건이라는 것은 양직공도에서 말하는 6세기 전반 백제의 대갸야 진출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섬진강 유역을 연한 가야지역으로의 진출 후 백제는 계속 남하해 가는데, 그 과정에서 가야 제국의 저항에 부딪히고 그래서 일본측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듯 하다. 이 때의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백제의 남방진출이라는 급진적인 군사적 팽창정책에 일본측은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고 그 대신에 5경박사 등 당시의 최고급 문화, 기술진을 제공하는 상호 협력체제였다. 신라에 의한 가야 제국의 병합이 가속화되자, 백제의 남부가야, 특히 안라가야에 대해 정치·군사·외교적인 공세 또한 가속화되어간다.
신라 법흥왕대(514~540)는 율령의 반포, 불교 공인, 금관가야 병합 등 중앙과 지방의 정치체제를 조직화해서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특히 가야지방에의 진출이 두드러지는데, 신라와 가야의 통혼관계가 주의를 끈다. 서방으로부터는 동진해오는 백제의 팽창정책에 의해 인근의 가야 제 소국이 무력하게 정복되어 가는 상황이었고, 동방으로부터는 신라의 위협에 직면했던 대가야는 스스로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 동서의 양 강대국의 한 편과 동맹관계를 맺고 다른 일국과 공동보조를 취하는 연합책을 쓸 수 밖에 없었다. 대가야의 지세상 대구 방면을 거쳐 낙동강 수계를 건너면 곧 고령분지 내에 진입할 수 있는 신라의 군사적 사정거리 내에 있었기 때문에 신라의 위협이 백제보다도 긴박하다고 판단되어 대가야는 신라에 통혼책을 제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하여, 신라측에서는 표면적으로는 평화동맹이었지만 가야 제국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야지역에의 무력진공이라는 강경책보다는 외교적 수단에 의해 동지역 내에 친신라파 세력을 형성시켜 가야의 신라화를 유도한 후 최종적으로는 영역화를 노린 법흥왕의 대가야 외교전략으로 이해된다. 즉 왕녀의 종자로 딸려보낸 100명은 정치적으로 잘 훈련된 강력한 침략부대로, 각 현의 수장층에 대한 공작활동을 통해 그들의 신라화에 주력케 함으로써 신라에의 내응을 유도하고 최종적으로는 가라의 병합을 노렸던 것이다. 신라측의 외교공작에 불만을 품고 반신라적 태도를 취한 수장층에 의해(신라의 종자들을 추방함) 신라와의 동맹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가속화되는 신라의 침입에 일본의 구원을 요청하지만, 이당시의 10여 년간은 왜왕권 내부의 불안정으로 가야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가야의 형제국들이 신라·백제에 의해 무력하게 병합되어 가는 상황에서 대가야가 신라를 선택해 동맹관계를 맺어 백제에 공동으로 대항한다는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쓴 것과는 대비되게 안라가야는 신라·백제에 대한 외교적인 절충을 통해서 군사적인 압력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대외정책을 편다. 그래서 국제회의를 주재하지만, 백제측의 거센 외교적 공세 때문에 결렬되고 만다. 안라측의 독립에의 움직임은 이를 허용치 않으려는 백제·신라의 군사·외교적 공세에 상당한 타격을 입게된다. 뿐만 아니라 지배층 내의 분열, 이반이라는 내부적인 요인도 안라가야의 독립운동을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이후 백제·신라의 각축장이 된 안라가야는 여·제 양국의 군사적 충돌이라는 국제적 동요에 의해 550년대에 들어가면 사실상 신라의 종속하에 놓이게 되어 가야의 독립운동은 종말을 고하게 되고, 가야 연맹은 해체를 보기에 이른다. 이상의 검토에서 6세기 전반 안라가야에는 왜왕권의 지배의 논리를 증명할 만한 요소가 없었으며 또한 정치·군사적인 개입에 의한 안라에의 영향력 행사 등의 상정도 인정하기 어렵다. 6세기 이후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안라의 역사는 백제·신라의 정치·외교·군사적인 외압과 이에 대한 대응의 시대였다. 여기에 단지 안라의 독립운동회의에 왜의 사자의 참여 사실이 인정될 뿐이다. 왜왕권의 군사적 개입은 백제가 신라와 대항관계에 있던 특수한 상황하에서 입안되었으나 실현된 흔적은 없다. 요컨대 6세기대의 백제·신라·가야 제국 그리고 왜왕권 등 4자의 관계를 검토해 볼 때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상 성립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