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하느님 말씀”에 관한
제12차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메시지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 교우들에게 평화를 내려 주시고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를 빕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총이 내리기를 빕니다”(에페 6,23-24).
형제자매 여러분!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뜨겁고 열렬한 말씀으로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셨습니다. 교황님을 중심으로 제12차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를 무사히 끝낸 우리 주교들도 세계 각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분을 따르고 불멸하는 사랑으로 계속 사랑하시는 여러분께 같은 말씀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옛날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 하느님 말씀의 소리와 빛을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일깨워드리는 바입니다. “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4). 과연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너 사람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모두 귀담아 듣고 마음에 새겨 두어라“(에제 3,10). 우리는 이제 여러분 모두에게 네 단계로 나뉘어 전개될 영적 여정을 제안합니다. 이 여정은 하느님의 영원과 무한에서 출발하여 우리 가정과 우리가 사는 지역의 골목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이끌어갈 것입니다.
제 1장. 말씀의 소리 : 계시
1. “야훼께서 불길 속에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말씀하시는 소리만 들었지 아무런 모습도 보지 못했다. 다만 소리가 있을 뿐이었다”(신명 4,1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험하고 삭막한 사막에서 겪어온 체험을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기에서 주님께서는 어떤 모상이나 형상 또는 금송아지와 같은 어떤 조각물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소리 곧 “목소리”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실상 이 목소리는 “창조”의 첫 순간부터 들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허무의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고 울려 퍼졌던 그 목소리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겨났다...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창세 1, 1.3; 요한 1, 1.3).
피조물은 옛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말하듯이 신들이 서로 싸운 결과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허무를 이기고 만물을 있게 한 말씀으로 생긴 것입니다. 시편작가는 말합니다. “야훼의 말씀으로 하늘이 펼쳐지고, 그의 입김으로 별들이 돋아났다. 바닷물을 독에 담으시고 깊은 땅 속 창고에 넣어 두셨다... 말씀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생기고, 한 마디 명령에 제 자리를 굳혔다”(시편 33,6.9). 바오로 사도께서는 거듭 말씀하십니다. “성서에 ‘내가 너를 만민의 조상으로 삼았다’ 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로마 4,17). 이렇게 해서 우리는 첫 번째 “우주적” 계시를 대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계 전체가 어마어마한 책으로 인류 앞에 펼쳐졌고, 그 안에서 인간은 창조자의 전언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 하고 창공은 그 하신 일을 알려주도다. 낮은 낮에게 말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리는 도다. 그 말도 이야기도 비록 소리 없어도, 그 소리 온 땅으로 퍼져나가고 그 말은 땅 끝 까지 번져가도다”(시편 19, 2-5).
2. 하느님의 말씀은 또한 인간역사를 시작하게 하십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을 닮게”(창세 1,27)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흔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특성을 살려 창조주와 대화 관계에 들어 갈 수도 있고, 죄를 지어 그분을 거부하고 멀리 달아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은 구원하고 심판하며, 일과 사건으로 엮어지는 인간 역사 속으로 깊이 들어오십니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 가고자한다” (출애 3,7-8). 그러므로 인간적 사건들 안에는 하느님이 함께 하고 계셔서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의 활동을 통해서 그 인간적 사건들이 구원이라는 더 높은 기획 속으로 들어 높여집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시기”(1디모 2,4) 때문입니다.
3. 이와 같이, 창조와 역사와 구속이라는 사건의 시발점과 진행 과정 그리고 그 존재 전체에는 능력 있고 창조적이며 구원하는 힘이 있는 하느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맞으러 나오시면서 선포하십니다. “나 야훼가 한번 선언한 것은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에제 37,14). 그러나 하느님 목소리는 한 걸음 더 가야 합니다. 말씀은 글자로 기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대로 거룩한 글, 곧 성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내려 왔을 때 이스라엘은 하느님 말씀의 기록물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돌아 서서 산에서 내려 왔다. 그 두 판 양면에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새겨져 있었는데, 그 판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었다. 그 판에 새겨진 글자도 하느님께서 손수 새기신 것이었다”(출애 32,15-16).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증거판”을 잘 보존하고 그대로 베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너희는 이 돌들 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분명하게 써야한다”(신명 27,8).
성서는 하느님 말씀을 글자로 보증하는 “증거물”입니다. 성서는 창조하고 구원하는 계시 사건의 표준적이고 역사적이며 문건적인 기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은 성서보다 앞서 있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하느님의 감도로 기록되었고” 능력있는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2디모 3,16 참조).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성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역사가 있으며,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몸이 되신 하느님 말씀, 인간과 역사가 되신 구체적인 한 인물이 계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 말씀의 폭은 성서를 포함하면서 그 너머까지 뻗쳐 나가기 때문에, 성서를 읽는 사람에게는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해 주시는”(요한 16,13) 성령께서 계속 함께 해 주실 필요가 생깁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성서의 지킴이인 교회 안에 함께 해 주시고, 교회의 교도직을 통해 올바른 해석을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이라는 거대한 흐름입니다. 이 성전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며, 남에게 전하고 제대로 증거할 수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그리스도교의 첫 신경을 선포하면서, 자기 역시 전통을 통해서 “전해 받은 것”을 “전해주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1고린 15,3-5).
제 2장. 말씀의 얼굴: 예수 그리스도
4. 그리스어 본문에는 가장 근본적인 단어가 세 마디 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살이 되셨다.” 이것이 정점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머리말이라는 시적이며 신학적인 표현의 보석 속에서도 핵심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 신앙 전체의 심장인 것입니다.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이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인간의 얼굴을 취하셨고 사람과 똑 같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온 그리이스 사람들처럼 직접 찾아가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요한 12,20-21). 얼굴은 볼 수 없이, 말만 듣는 것으로는 아직 부족합니다. 참으로 깊고 만족스런 만남을 위해서는 얼굴을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욥은 그것을 잘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만나 가는 길에서 온갖 곡절과 풍상을 다 거친 끝에 그는 말합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함께 계시고 하느님이신 말씀”이십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골로 1,15)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동시에 나자렛 사람 예수로서, 로마 제국의 변방 지역 한 시골 거리를 걸어 다니셨고, 그 지역의 말을 하셨으며, 그 곳 사람이라면 유다인으로서 누구나 지니는 특성을 고스란히 가지셨고, 그 지역 특유의 문화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연약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몸을 지닌 실제 인물이며, 역사이고,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동시에 영광이고 신이며 신비이십니다.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분(요한 118 참조)이신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렇다는 것은 그분이 무덤에 시체로 누워계실 때까지도 여전히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말입니다. 부활은 그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하고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5. 그런데 그리스도교 전통은 흔히 몸이 되신 말씀과 책이 되신 말씀을 나란히 놓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미 신경에서부터 우리는 그것을 감지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셨다”고 고백하고, 또 그 성령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음”을 믿는다고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그 사실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이 “아드님의 몸은 우리에게 전달된 성서다”(루가복음 해설 VI,33)하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오랜 전통을 이어받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마치 예전에 영원하신 아버지의 말씀이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취하여 인간들을 닮으셨듯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말씀들이 인간의 말과 같아졌다”(계시헌장 13).
실제로 성서는 “몸”이고 “문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여러 특별한 언어, 글 표현과 역사적 표현 양식으로 나타나고, 지나간 시대의 특정 문화에 직결된 개념을 빌려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성서는 흔히 끔찍한 사건들에 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대목에서는 피로 얼룩지고 폭력이 난무하는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그 안에는 인간의 웃음이 울려 퍼지는가 하면, 눈물이 흐르기도 합니다. 불행에 빠진 사람들의 절규가 들리는가 하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환성이 들리기도 합니다. 이런 식의 “몸肉的”인 측면 때문에 성서 연구에는 역사적인 분석, 문학적인 분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성서주석학이 제공하는 여러 가지 방법과 접근법이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단순한 사람이라도 성서를 읽는 이들은 성서에 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어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낮추어 그들의 키에 맞추고 그들의 말과 표현양식을 옷처럼 입고 나타났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은 또 반드시 필요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근본주의에 빠져서 결과적으로는 하느님 말씀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사실을 부정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성서 안에서 인간적 언어로 표현되었다는 사실과, 따라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깊이 따지고 연구하고 제대로 알아듣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하느님의 감도는 역사적 정황과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인간적 특성을 지워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서는 영원하고 신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인간적 언어 속에 들어 있는 하느님 말씀의 초월적 차원을 열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성령의 빛으로만 가능한 다른 차원의 이해가 또한 요구됩니다.
6. 그렇기 때문에 성서에 대해 통일성 있고 충만한 이해를 위해서는 “교회 전체의 살아 있는 전통”(계시헌장 12)과 신앙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서의 “문자”에 머물고 말면 그것은 과거의 아름다운 문헌, 지난 시대 특정한 지역의 윤리적, 문화적 증언에 불과하게 됩니다. 또한 육화의 사실을 제외시키면 우리는 근본주의적 모호성이나 막연한 영성주의 내지 심리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서 주석에 관한 지식이 영성적, 신학적 전통 속으로 분명하게 들어가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및 인간적 일치성과 성서 사이의 조화가 깨어지지 않고 잘 보존됩니다.
이런 조화를 다시 찾아내면, 그리스도의 얼굴은 충만한 빛을 띤 채 드러나고,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서 전체를 흐르는 더욱 깊고 내밀한 일치를 발견하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곧, 성서가 73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모두는 단 하나의 “정경”을 이루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대화를 증언하며, 하느님의 유일한 구원계획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당신의 빛을 과거로 되쏘아 구원 역사의 전 과정을 돌아보며 거기에 시종일관 흐르고 있던 하나의 통일성을 보여주고, 그 의미와 뜻을 드러내 주십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당신 피조물 사이에 이루어져 시간 속에서 연장되고 성서 안에 증언된 대화을 최종적으로 확인해주는 인장印章이시며 “알파와 오메가”(묵시 1,8)이십니다. 이 마지막 인장의 빛으로 볼 때에만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이 “충만한 의미”를 띠게 됩니다. 어느 해 봄날 오후 글레오파와 그 동료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을 때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대화하시며,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루가 24,27) 해석해 주실 때, 예수님 자신이 밝혀주신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계시의 중심에 얼굴을 가지게 된 하느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서에 관한 지식의 최종 지향점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사상이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구체적인 한 분을 만나는 일”(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입니다.
제 3장. 말씀의 집: 교회
구약에서 하느님 지혜가 일곱 기둥을 세워 자신의 집을 사람들이 사는 곳에 지었듯이(잠언 9,1), 신약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은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인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교회, 예루살렘의 어머니 공동체가 그 전형입니다. 이 교회 안에서 오늘날 베드로의 후계자를 중심으로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그 뒤를 이어 말씀의 수호자, 선포자, 해석자(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13항)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13 참조). 루가는 사도행전(2,42)에서 이렇게 이루어지는 교회가 네 기둥 위에 세워져 있음을 증언하는데, 우리는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그것이 오늘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7.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꼽아야 할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 곧 하느님 말씀의 선포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같은 취지에서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로마 10,17) 하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의 목소리는 교회로부터 나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선포, 곧 예수님께서 당신 공생활 시작 때에 친히 선포하신 첫 발언이자 가장 중요한 말씀을 선포합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사도들은 하느님 나라의 시작을 알립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음을 선포하면서,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에 결정적으로 개입해 오셨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사도 4,12). 그리스도인은 "부드러움, 상대방 존중, 양심에 따른 확신"을 가지고 이 희망을 증언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거부와 박해의 폭풍에 휩싸일 수도 있음을 의식하고 이를 각오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야 얼마나 낫겠습니까?"(1베드 3,16-17).
교회 안에서는 이어서 "말씀의 빛으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깨달아 인간 존재 전체 속에 이 말씀이 침투해 들어갈 수 있도록"(요한 바오로 2세, 교리교육, 20항) 교리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선포의 정점은 강론입니다. 강론은 오늘도 그리고 많은 신앙인들에게, 하느님 말씀과의 만남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이를 행함에 있어서, 강론하는 이는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의 말은 명확하고 단호하며 내용이 확실해야 하고, "구원의 역사에서 하느님께서 펼쳐오신 놀라운 일들을"(전례헌장 35) 권위있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서 봉독자가 분명하고 생생한 목소리로 그날의 성서 대목을 읽도록 해야 합니다. 강론하는 이는 또한 하느님의 그 놀라운 일들을 듣는 이들이 처한 상황과 때에 맞추어 전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삶의 방향을 새로 설정할 필요를 느껴 스스로 묻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사도 2,37).
복음선포, 교리교육, 강론, 이 모든 것에는 성서를 잘 읽고, 정확히 이해하고, 제대로 설명하고 해석하는 일이 앞서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거기 깊숙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론에는 두 가지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먼저, 성서 본문, 사건, 이야기들의 뿌리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것들이 구원의 역사를 낳은 배경을 알아보아야만, 그들의 의미와 그것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뜻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눈을 다시 현재로 돌려, 그리스도의 빛으로 성서 전체에 흐르는 하나의 줄거리를 보며, 듣고 읽는 이들의 구체적인 삶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께서도 이 두 가지 방향의 움직임을 보이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가던 부제 필립보가 이집트 고관과 가졌던 상징적인 대화에서도 같은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아시겠습니까?..누가 나에게 설명을 해 주어야 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사도 8,30-31). 이 대화의 결말은 성사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만남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 말씀의 집인 교회를 떠받치는 두 번째 기둥을 살펴볼 차례가 왔습니다.
8. 그러면 빵을 떼는 일을 살펴봅시다. 엠마오로 가는 길의 이야기(루가 24, 13-35)는 여기서도 좋은 예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매일 교회 안에서 모세와 예언자들에 관한 예수님의 강론에 이어 식탁에서 성체성사적 빵 떼는 예식이 거행될 때마다 이 장면은 계속됩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백성들 사이의 내밀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는(루가 22,20 참조) 시간입니다. 이것은 말씀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자기의 몸을 음식으로 내어주시는 최고의 자기희생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교회의 삶과 사명을 위한 힘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에 관한 기억인 최후의 만찬에 관한 복음 이야기는, 그것이 성체성사의 거행 안에서 선포되는 순간, 성령 청원기도를 통해서,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되고 성사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의미가 농축된 표현을 써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성서들을 주님의 몸처럼 공경하여 왔다. 왜냐하면 교회는 특히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의 식탁에서뿐만 아니라 하느님 말씀의 식탁에서도 끊임없이 생명의 빵을 취하여 신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있기 때문이다"(계시헌장 21항).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에는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가 서로 밀접히 결합된 하나의 예배행위"(전례헌장 56)가 있어야 합니다.
9. 말씀의 영적 집인 교회를 떠받치는 세 번째 기둥은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골로 3,16)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례력 상의 한 해를 시기와 날짜로 나누어 적절한 주기를 따라 진행하게 함으로써, 특히 시편을 통해 신자들에게 매일의 영적 양식을 제공하는 시간 전례(성무일도)의 중요한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시간 전례와 공동체적 말씀 전례 외에도, 전통은 <렉시오 디비나>, 곧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읽는 성경봉독의 관행을 도입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신앙인들에게는 하느님 말씀의 보고가 열리고, 그렇게 해서 살아있는 하느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 본문을 읽는 일(독서)로부터 시작됩니다. 읽으면 그 실제 내용이 무엇인지를 묻게 됩니다. "성경 본문이 그 자체로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다음에는 <묵상>이 따르는데, 여기서는 성경 본문이 <나(혹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 다음에는 <기도>가 따르는데,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나(혹은 우리)는 어떤 대답을 드릴 수 있을까? 여기서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관상>이 따르는데,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로서, 우리의 현실에 대해 그분 고유의 눈길로 보고 판단하시는 시각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묻게 됩니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 그리고 삶에 어떤 변화를 주님께서는 기대하시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기도하며 읽는다는 과제를 앞두고,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이상형으로 떠올리게 됩니다. 그분이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가 2, 19; 2,51 참조)는 성경 말씀은, 그리스어 본문이 말하는 대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행동들, 일들이 겉으로는 서로 아무 상관없이 제 멋대로 흩어져있는 듯이 보이지만, 하느님의 큰 계획 속에서는 그 사이를 이어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있음을 발견해 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을 읽는 신자들에게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을 들음으로써, 외부의 번잡한 활동에 마음을 온전히 빼앗기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해서 마리아는 "더 좋은 몫"(루가 10, 38-42 참조)을 위한 여유 공간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10. 이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영적 집인 교회를 떠받치는 네 번째이자 마지막 기둥에 관해 살펴 볼 차례입니다. 코이노니아, 형제적 친교, 아가페 등 표현은 여러 가지이지만, 결국 그리스도교적 사랑이라는 말이 그 모두를 가장 잘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형제나 자매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하신 것처럼, 그분의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루가 8,21)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올바로 듣는다는 것은 순명하고 실행한다는 뜻입니다. 삶에서 정의와 사랑이 피어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서 하느님 말씀과 삶, 믿음과 바른 행위, 경신행위와 사회적 투신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예언자들의 호소에 걸맞은 증거의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산상설교 끝에 주신 유명한 경고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여러 번 반복해서 강조하신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 이 말씀은 이사야를 통해서 주셨던 하느님 말씀의 반향으로 보입니다.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이사 29,13). 교회들이 하느님 말씀을 순종적 태도로 듣는 일에 충실하지 않을 때, 이 경고는 그들에게도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은 신앙인들의 얼굴과 손에서부터 보고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대 그레고리오 교황께서는 베네딕도 성인과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들, 곧 하느님과 또 그들의 형제들과의 친교를 확실히 보여주는 이들에게서, 하느님 말씀이 삶으로 바꿔진 모습을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롭고 충실한 사람들은 성서를 “설명”할 뿐 아니라, 살아있고 살아낸 실체로서의 성서를 사람들 앞에 “보여”줍니다. 그런 뜻에서 <살아있는 성경봉독은 선한 이들의 삶이다.>(viva lectio, vita bonorum)하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요한 그리소스토모 성인은, 제자들이 갈릴래아의 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도, 옛날 모세와는 달리, 하느님 말씀이 새겨진 돌판을 들고 내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때부터 그들 자신의 삶이 살아있는 복음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집에서 우리는 다른 교회나 교회적 공동체에 속하는 형제자매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아직도 존재하는 분리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하느님 말씀에 대해서 같은 존경과 사랑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해서 비록 완전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 말씀이 일치의 원칙과 원천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유대관계는 성서의 공동번역, 성서의 보급, 성서적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일치 노력, 주석학적 대화, 성서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해석들의 비교 연구, 다양한 정신적 전통들 속에 깃들어 있는 고유 가치들의 교환, 세속화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 등을 통해서 계속 강화되어야 합니다.
제 4장. 말씀의 길 : 선교
“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주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온다”(이사 2, 3). 하느님의 말씀은 의인화하여 자기 집, 성전에서 “나와” 세상 구석구석에까지 찾아가서, 지상의 백성들이 진리와 정의화 평화를 찾아 시작한 큰 무리의 순례단과 만납니다. 실상, 불신과 무관심만이 지배하고, 악이 선을 압도하며,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이긴 것 같이 보이는, 세속화한 현대의 도시에서, 그 광장과 거리에서도, 숨어있는 숨결처럼, 어떤 희망의 싹, 어떤 기다림의 설레임 같은 것이 있습니다. 아모스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내릴 날이 멀지 않았다. - 주 야훼의 말씀이시다.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아모스 8,11). 교회의 복음선교 사명은 바로 이런 굶주림에 응답하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는 사도들에게 익숙해지고 아늑하게 느껴지는 좁은 지역을 떠나라고 분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성서 전체가 “잠자코 있지 마라”, “크게 외쳐라”,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말씀을 전하라” 하는 부추김의 말씀과, 무관심의 침묵을 깨부수고 소식을 전하는 초병의 역할을 다할 것을 재촉하는 당부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열려있는 길은 바오로 사도나 초기 복음선교사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을 향해 선교사들이 걸었던 그 길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11. 요즈음에 와서는 상호소통이 지구 전체를 하나의 망으로 둘러싸고 진행됩니다. 그래서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마태 10,27) 하신 그리스도의 당부도 새로운 울림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말씀이 분명히 지구촌 모든 지역 언어로 번역되어 인쇄된 글자의 형태로 나타나서 사람들이 보고 쉽게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여전히 가장 우선적임이 분명하지만, 하느님 말씀의 소리는 라디오, 인터넷이라는 고속도로, 가상세계의 선을 타고 전파되는 방식, 씨디, 디비디, 아이팟, 등등 날로 새롭게 개발되는 정보매체들을 타고도 널리 울려 퍼지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텔레비전과 영화관의 화면 속에서도, 인쇄 매체 속에서도, 문화적 사회적 행사들 속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기존 매체들에 비해, 이와 같은 새 홍보 매체들은 각기 지니는 특수 표현의 요구에 따라 각각 고유의 문법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기술적으로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이 새로운 환경을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텔레비전이라는 강력한 수단을 타고 나타나는 이미지, 영상이 지배하는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선호하신 표현법은 지금도 여전히 의미 있고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분은 상징, 이야기, 예, 일상적 경험, 비유 등을 즐겨 쓰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군중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마태 13, 3. 34).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실 때, 예수님께서 쓰신 말마디들은 애매한 언어나 추상적이고 구름이나 잡는 식의 표현을 쓰시는 일이 없고, 언제나 듣는 사람들의 키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분은 듣는 이들의 발이 디디고 있는 땅, 그들의 일상적 경험에서 출발해서 하늘 나라의 신비에까지 이끌어 주셨습니다. 요한이 그 복음에서 소개하는 장면은 이런 뜻에서 의미가 대단히 깊습니다. “몇 사람은 예수를 잡아 가고 싶어하였지만 예수께 손을 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성전 경비병들이 그대로 돌아 온 것을 보고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사람들은 ‘어찌하여 그를 잡아 오지 않았느냐?’ 하고 물었다. 경비병들은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7,44-46).
1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는 동네의 길을 따라 걸으시다가 우리 집 문간에서 멈추어 서십니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묵시 3,20). 사방에 벽이 둘러쳐져서 그 안에 기쁨과 슬픔이 있는 <가정>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공간입니다. 성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정에 관해서 자잘하거나 큼직한 이야기들을 가끔씩 들려줍니다. 시편작가는 한 집안의 가장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같은 아내와 <올리브의 햇순> 같은 자식들에 둘러싸여 밥상에 앉아 있는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의 정경(시편 128)을 아주 생생하게 그려줍니다. 이스라엘이 과월절 축제를 가정에서 지내게 했던 것처럼(탈출 12, 21-27 참조), 초세기 그리스도인들도 가정에서 전례를 거행하였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전달은 가정에서 대를 이어가며 이루어지고, 따라서 부모는 “최초의 신앙 선포자”(교회 헌장 11)가 되어야 합니다. 시편작가는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 선조들이 입으로 전해 준 이야기, 우리 모두 들어서 익히 아는 이야기, 야훼의 영예와 그 크신 능력, 그리고 이루신 위대한 일들을 우리는 다음 세대에 숨김없이 전하리라. 뒤이어 태어날 후손에게도 대대로 알리라고 명령하셨다”(시편 78,3-4,6).
그러므로 각 가정에 성서를 가지고, 정성스럽게 봉안하고, 읽고, 성서와 함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가정은 기도교육, 교리교육, 성서사용 교육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모델과 교육 형태를 개발하여 제시함으로써, “총각, 처녀, 노인, 어린이”(시편 148, 12)들이 모두 하느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찬양하고, 삶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특히 어린이, 젊은이 등 새 세대가 그리스도라는 분이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인지를 체험할 수 있도록 적절하고 효과적인 교육방법을 개발하여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자면, 그들의 머리와 마음을 열게 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성인들의 체험담을 듣고 그들과 깊이 사귀는 일, 친구들의 좋은 감화, 교회 공동체 전체의 좋은 환경과 적극적인 동반이 중요합니다.
13.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씨앗을 받아들이는 토양이 여러 가지가 있어서, 길바닥처럼 딱딱한 것도 있고, 돌밭도 있고, 가시덤불에 덮인 것도 있다고(마태 13,3-7 참조)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에 나가 길을 가기로 결심한 사람은 이와 마찬가지로 밑바닥 인생, 고통과 가난에 찌든 가정, 경멸과 압박에 시달리는 가정, 소외와 불운에 처한 가정, 육체적, 정신적 질병에 시달리고 외로움에 짓눌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흔히 길에 깔린 돌은 전쟁과 폭력의 핏자국으로 물들어있고, 권력의 궁전에서는 부패와 부정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 박해 받는 사람들은 자기 양심과 신앙에서 솟아나는 소리를 높이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실존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거나, 삶에 의미와 가치를 제공해야 할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기도 합니다. “인생은 한낱 그림자로 지나가고 부질없이 소란만 피우는”(시편 3장 7절 참조) 것 같은 상황에 처해,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침묵이 너무 무겁게 자신의 어깨를 짓누른다고 생각하고, 아니면 하느님이 없거나 자신의 삶에는 아무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야훼여!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영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시편 13,2). 그러다가 결국에는 각자 앞에 죽음의 신비가 들이닥칩니다.
이 엄청난 고통의 신음 소리는 땅에서 하늘을 향해 계속 올라가고, 이것이 성서 안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성서는 역사적이고 육화한 신앙을 제시합니다. 폭력과 압제로 점철된 성서 대목들, 욥의 입에서 연이어 나오는 쓰라린 절규, 시편 속에서 거친 목소리로 올라가는 애원의 소리, 전도서 작가의 영혼을 관통하는 내면의 쓰라림과 시련, 사회적 부정에 대한 예언자들의 원색적 고발 등만 생각해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근원적 죄악은 가차 없이 단죄를 받습니다. 그리고 창세기의 근본적 본문(창세 3장)을 보면, 이 죄악은 인류 역사의 시발점에서부터 이미 나타나 그 가공할 파괴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실상, “악의 신비”는 역사 안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악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 가면이 벗겨졌고,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이 악을 누르고 승리할 것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분은 세상에서 가장 철저히 무시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그분께서는 병들었거나 썩어가는 몸에 여러 번 손을 대시고, 말씀으로 의로움을 선포하셨으며, 불행에 빠진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죄인들에게는 용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당신 자신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7-8).
이렇게 그분께서는 죽음의 공포를 체험하시고(“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버림받음의 외로움을 겪으셨으며, 친구들의 배반을 경험하시고, 십자가형이라는 육체적 고통의 극한까지 맛보시고, 아버지의 침묵이라는 암흑의 밑바닥(“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을 통과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이라는 인간 고통의 최 심연에까지 내려 가셨습니다. 이사야가 하느님의 종이라는 인물을 설정해서 해 두었던 말은 바로 이 분을 두고 한 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이었다”(이사 53,3).
하지만, 이 극한적 상황 속에서도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기를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사랑의 연대를 통해서, 자기희생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와 죄악 속에서도 그분은 하느님다움(신성)의 씨앗, 곧 해방과 구원의 단초를 심으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써, 구속救贖을 통해 스스로 받아들이시고 살아내신 고통과 죽음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도 부활의 서광이 비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희망의 이 하느님 말씀을 전할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고, 진리, 생명, 성덕, 은총, 정의, 사랑, 평화의 나라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증언하는 것으로 이 사명을 수행하게 됩니다. 또 우리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아무도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오히려 밀어주고, 밝혀주며, 용기를 북돋아주고, 용서함으로써 이 사명을 수행하게 됩니다.
14. 세상의 여정을 걸어가는 동안,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다 백성>과의 깊은 만남을 주선해 줍니다. 실상 우리는 구약 성서에 대한 공통의 이해와 사랑을 통해, 또 “그리스도도 인성으로 말하면 그들에게서 나셨기”(로마 9,5) 때문에, 우리와 유다 백성들과는 아주 내밀한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서의 모든 대목들은 하느님과 인간의 신비를 밝혀주고, 깊은 사색과 윤리의 보고를 계시해주며, 구원 역사의 긴 여정을 더듬어 그 충만한 완성의 지점까지를 밝혀줍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적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육화(구체화)하는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구약성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하신 그리스도의 어떤 표상을 뚜렷이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히브리 성서는 선택된 백성,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있고 하느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있으며, 율법이 있고 참된 예배가 있고 하느님의 약속이 있는”(로마 9,4) 그 유다 백성과 대화를 열 수 있는 길을 보여줍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유다인들의 성서해석 전통이 간직하고 있는 풍요한 샘에서 성서를 더욱 잘 해석하기 위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복을 받아라, 내 백성 이집트야, 내가 손수 만든 아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이사 19,25).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께서는 당신 축복의 옷자락을 땅위의 모든 백성들에게 펼치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1디모 2,4). 그리스도 신앙인인 우리 자신도, 세상의 긴 여정에서 <다른 종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며 각자 그들의 신성한 경전을 듣고 충실히 실천하는 그들과 대화해야 합니다. 이들 가운데 맨 앞에 <이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 속에서 대단히 많은 표상과 상징과 주제를 성서에서 원용하고, 유일하시고, “동정과 자비가 가득하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인류의 심판자이신 하느님에 대한 성실한 신앙의 증언을 제공합니다.
그 밖에, 그리스도 신앙인은 동양의 위대한 종교 전통들에 대해서도 친밀감을 느낍니다. 그들은 각기 존중하는 경전을 통해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일깨워줍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생명의 존중, 관상觀想, 침묵, 단순성, 포기 등을 가르쳐 준다. <힌두교>에서는 거룩함에 대한 감각, 제사, 성지순례, 재齋, 거룩한 상징 등을 가르칩니다. 또 <유교>에서는 가정과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또한 <전통적 종교들>이 지니는 영적 가치들과 그것을 표현하는 제의, 구전문화를 존중하며, 그들과도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화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좀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의 건설을 위해서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살아가는 일”을 위해서 성실하게 노력하는 모든 이들과도 대화의 문을 열고, 하느님 말씀에 관한 진정한 증언을 통해 그들이 진리와 사랑에 관한 새롭고도 한결 높은 전망을 얻을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15.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편지>(1999)에서 그리스도교 문화와 예술이 끊임없이 영감을 길어낸(5항) “성서가 일종의 엄청난 사전이 되었다”(뽈 끌로델)는 말과 “초상肖像예술의 지도地圖가 되었다”(마르끄 샤갈)는 예술가들의 말을 상기시키셨습니다. 괴테는 복음이 “유럽의 모국어가 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흔히들 말하듯이, 성서는 세계 문화의 “위대한 코드”가 되었습니다. 화가들은 성서 속의 이야기, 상징, 표상들에서 이상적인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음악가들은 성서 대목들, 특히 시편에서 영감을 얻어 곡을 썼습니다. 저술가들은 수 세기 동안 실존의 비유가 된 성서 속의 옛 이야기들을 되풀이하여 사용했습니다. 시인들은 정신, 무한, 영원, 악, 사랑, 죽음, 생명 등 인생의 근본적 신비들을 두고 성서의 각 장면에 흐르는 놀라움의 감정을 그대로 반영시켜 작품을 썼습니다. 사상가들, 과학자들, 그리고 사회 자체도 성서를 인용하였으며, 때로는 반대의 논지를 펴기 위해서조차 하느님 말씀의 영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십계명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를 치켜들었습니다. 성서 속에 나타나는 표상과 사상이 왜곡될 때조차, 성서는 우리 문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구성 요소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우리에게 아름다움의 길 곧 미美를 통한 여정도 보여주는 성서("예술로 하느님을 찬양하여라“(시편 47,8)는 신앙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데, 그것은 누구나 문화에 따라 다양한 표현의 진정한 의미를 재발견하고, 우리 자신의 역사적, 시민적, 인간적, 영적 자아를 다시 찾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위대성의 뿌리이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훌륭한 유산과 함께, 어떤 종류의 열등감도 없이, 자신을 다른 문명과 문화에 소개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풍요성의 측면에서도 모두가 알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뜻 깊은 표현을 따르자면, 하느님의 말씀은 “사슬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2디모 2,9). 그러므로 어떤 문화에도 묶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하느님 말씀에는 어떤 종류의 경계도 뚫고 지나가고자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께서는 새로운 문화 상황에서 성서의 내용을 <토착화>하는 일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같은 사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민하게 생각하고 진행해야 하는 과제이지만 베내딕도 16세 교황님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반드시 추진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다양한 문화 속에 하느님의 말씀이 침투해 들어가게 해야 하며, 각 문화의 언어, 개념, 상징, 종교적 전통들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교회는 하느님 말씀의 진정한 내용을 손상 없이 지켜가도록 변질의 위험을 방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느님 말씀이 지니는 진정한 가치가 다른 문화를 찬란히 비추게 함으로써, 그 문화를 정화하고 더욱 풍요해지게 해야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1980년 케냐를 방문하셨을 때 하신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토착화는 말씀의 육화를 실제로 반영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의 문화가 복음을 통해 변형되고 새롭게 태어나, 그 고유 전통 안에서 그리스도교적 삶, 축제, 숙고에 관해 고유한 표현들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결론
“하늘로부터 들려오던 그 음성은 나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에게 가서 그 손에 펴 든 두루마리를 받아라.’ 그래서 나는 그 천사에게 가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 때 그 천사는 나에게 ‘이것을 받아 삼켜 버려라. 이것이 네 입에는 꿀같이 달겠지만, 네 배에 들어가면 배를 아프게 할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아팠습니다. 그 때 ‘너는 여러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과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해야 한다’ 하는 음성이 나에게 들려 왔습니다”(묵시 10, 8-11).
전 세계에 계시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도 이 권고를 받아들입시다. 그래서 하느님 말씀의 식탁으로 나아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신명 8,3; 마태 4,4) 살아갑시다. 그리스도교 문화의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말했듯이, 성서는 “어떤 처지에 사는 사람들에게든지 그들을 위로하는가 하면, 어떤 처지에 사는 사람들이든지 그들을 위협하기도 하는 대목들을 지니고 있습니다”(블레즈 빠스칼, 빵세, 532).
과연, 하느님의 말씀은 “꿀보다 생청보다 더욱 달고”(시편 19,11),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시편 119,105)인가 하면,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불길이기도 합니다. “내 말은 정녕 불같이 타오른다. 망치처럼 바위라도 부순다”(예레 23,29). 하느님 말씀은 또 땅을 적시어 비옥하게 하고 싹이 돋아 자라게 하는 이슬, 그런 식으로 우리 영적 사막의 메마름을 비옥하고 풍성한 땅으로 바꾸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비(이사 55, 10-11 참조)입니다. 또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 4,12).
이제 애정어린 우리의 눈길은 하느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이들, 교리교사들, 그 밖의 모든 봉사자들에게로 향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위해서 그들이 제공하는 그렇게 귀중한 봉사에 대해서 이 모든 이들에게 충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느님 말씀 때문에, 또는 주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박해를 받고 죽임까지 당한(묵시 6,9 참조) 형제자매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증인이며 순교자들로서 자기 믿음, 희망,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근원인 “하느님의 힘”(로마 1,6) 을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더욱 잘 듣기 위해서 잠시 침묵 속으로 들어가고, 말씀을 들은 다음에는 다시 침묵 속으로 들어가,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계속 머무르고, 우리 안에 살아서 늘 우리에게 말할 수 있도록 합시다. 그 말씀이 하루의 첫 순간에 울려 퍼져, 하느님께서 제일 먼저 말씀하실 수 있게 하고, 저녁에도 우리 안에서 그 말씀이 울려 퍼져서 그날의 마무리 말씀도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게 합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대들에게 문안합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모든 신도에게 문안하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은총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디도 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