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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 선생님과 손녀 딸
(2011년 6월 체육대회의 성공을 기원하며)
나는 40년도 더 넘은 기억을 추억으로 간직하며 “ 아 그래도 그때가 더 좋았었는데”
하는 생각에서 가끔 이런 생각들을 해 보곤 한다.
학교는 분명 종로구 한 복판에서 공부하고 문안의 중심 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흔적도 없이
학교가 없어지고, 동문들 커녕 동창생들 연락도 어려워지고, 졸업증명 조차 엉뚱한 곳으로
가서 떼는 아주 불행한 현실이 이만저만 안타까운 것이 아니었다.
대학을 다닐 때나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자랑스럽게 학교를 내세우고
이름난 동문을 중심으로 동문 활동을 하는 여타의 명문 학교를 볼 때마다
부럽기도 하였고, 우리학교 보다 더 형편없는 학교나, 촌에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조그만 학교를 나온 사람들도 버젓이 왕성한 동문활동을
하는데 문안의 최고 땅 값이 비싼 학교에서 엄청나게 많은 학생 수를
보유했던 우리 수송학교 동문이 중동학원으로 합병 되어가며 서서히 없어져
갔던 현실이 더욱 안타까워 이글을 쓰기로 했다.
물론 중학교를 나와 타 학교를 간 중학 동문이나 우리학교를 나와 사회적
기반이나 지위가 반열에 오른 동문들도 많을 것이나 이들이 아닌 지극히
평범했던 동문들에게 기개 높은 자부심을 고취 시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글을 남기고,일부 선생님들을 비난하는 목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니
부디 오해 없으시길 바랄 뿐입니다.
내가 수송중학교 입학하여 고등학교 6년간 학교를 졸업 할 때 까지 가르쳤던
수송전기공업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실력을 따져본다면 몇 명의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선생님들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교습의 내용이 인문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대학을 가기위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산업현장에 취업을 목표하는 이공학 위주로 공부를
가르치다보니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쪽 공부의 딱딱한 강의가 되어버리기
일쑤고, 학생들은 그것을 귀담아 들으려하지 않다보니 대학진학률은 거의 제로였다.
그러나 당시 산업현장의 일군을 더 중요시 여긴 박정희대통령의 국가 시책에
따라 취업률만큼은 여타의 학교보다 높았던 사실은 인정해 줘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진학보다 취업에 더 비중을 두고 가르쳤고, 대학을 갔다는 말보다
좋은 회사 (한전같은 공기업)에 우선적으로 취업하는 것을 더 인정 해 주는
시대이다 보니 선생님들은 취업하려는 학생들을 우대해 주고, 회사 실습을
추천하거나 권장하는 상태를 (고졸기능공) 더욱 선호하였기 때문일 것 이다.
인성적인 교육으로 인품을 형성시켜주는 책을 소개한다거나 인문학 공부를
재미있게 강의 하는 선생님들 을 만나는 것도 어려웠고 일부 진학반이라고
해서 대학을 가려고 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예비고사에 붙을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을 쌓아줄 선생님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선생님들 자체의 실력에 경쟁력을 불러일으킬만한 동기부여도 없었고,
학생들의 장래를 진지하게 상담해 주는 선생님조차 없었던 것이고, 그냥 시간만
때우면 월급을 받아가는 그런 류의 선생님들이 너무 많았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을 경영하더라도 인건비를 줄여야지만 수지타산이 맞는 법인데 매출은 줄어
들고(학생수) 인건비(선생님)는 점점 늘어나는 방만한 학원 경영을 하지 않았나
싶은데 과목별로 많은 선생님들이 하루에 1시간도 가르친 일이 없는 선생들이
부지기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선생님들을 선발하시고 각 학년 학급으로 배정하시고 매월 봉급을 나눠주시고
관리하셨던 분은 학교 총 책임자신 崔 字 佑 東 교장님인데 외관상 엄하게 보이나
그야말로 법 없이도 사시는 분이고 과묵하시고 엄청 검소하신 분 이었다.
교장님은 선생님보다는 할아버지 이름이 더욱 어울리시는 분으로 인자하시고
자상하신 분이였는데 사립학교 특권인 선생님들의 융통적인 인사관리 등에 있어서
정실적인 친, 인척 선생님들을 기용하거나, 실력 없던 선생님들이 주도적으로
학교를 쥐고 흔들다 보니 온화하시기만 한 교장님 주변이 온통 “무사안일주의”
식으로 흘러버려 적극적 교육목적을 실천하려는 선생님이 드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보니 학교장의 권리와 위엄이 상실되고 학생 훈육은 물론 사립학교의
재정, 서무, 인사 등 고유 특권과 권리가 각 인척들에게 침해당하며 발언권이
약해져 결국 파국적인 적자 상태에 몰렸을 것으로 짐작만 될 뿐이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학교재정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체육관과 본관 신축공사를
벌린 것인데, 늘어가는 학생 수가 계속적으로 증가 추세에 있을 것으로만 알고
(베이비붐 세대의 한 중심) 오판한 교장선생님이하 내, 외부 인척들의 무사안일
등이 당시 엄청난 적자를 불러 일으켰고, 정략적이고 로비스트같이 대처해야
할 국가정책 (중학 무시험 배정: 박지만 세대) 에 대비하지 못한 것이 큰 원인
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시간만 때우면 된다” 는 식의 수 많은 선생님들의 인건비!
혼신과 열정으로 학생들을 교육시켜야 되는데 걸핏하면 매와 벌로 꽃다운 학생들의 의기를 꺾어내던 선생!
어쩌면 아주 귀여운 내 새끼 같은 학생들의 솜털같이 부드러운 뺨에 더러운 발로찍찍 끌고 다닌
냄새나던 슬리퍼 바닥으로 강력하게 뺨을 가격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은 선생!
스티로폼으로 슬쩍 내리쳐도 띵하기만 한 작금의 나이에 끔찍하기만 했던 쓰레기통 뚜껑
(당시 혼자 들어도 힘들 삼각형 모양 쓰레기통 뚜껑)의 모서리로 엄청난 회로가 왕성하게
돌아가던 수밀도, 두부같이 연약한 머리에 내리쳐서 장차 엄청난 불 치성 치매를 유발시키는
행동을 일삼은 무식한 선생!
좁은 책상에 몇 시간 앉아있기만 해도 좀이 쑤실 정도로 골고루 성장하면서
몸 안 혈기가 왕성하게 치솟던 10대 후반의 젊음을 시기한 비굴한 웃음을
머금은 선생이 별 잘못도 없던 몇가락 나지 않아 보기 싫은 수염들을 모두
뽑아버리고, 별로 길지도 않았던 빡빡 머리의 구레나룻을 모두 뽑힌 날은
정말 엄청나게 서러워 남몰래 울기도 했었고, 수염을 뽑혀서 코밑이 벌겋게
변한 분필가루 묻은 얼굴을 씻어내며 자존심마저 뽑힌 것 같아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른다.
간밤에 영화를 본 이야기, 시민회관에서 그룹사운드 음악을 들으며 춤췄던 얘기와
주번완장을 차고 복도에서 계속 펑크와 쏘울 춤을 추며 조잘 조잘 떠들어대던
천진난만한 시절에, 공부시간에도 그렇게 심하게 떠든 것도 아닌데 뽄때를
보여줘야 한다 며 박달나무 같은 나무로 엉덩이 밑을 시커멓도록 때려댄 선생,
하루 온종일 잠을 자라고 해도 부족할 나이에 잠 조금 잤다고 사정없이
나오라고 해서 뺨이 얼얼하도록 때려댄 놀부 쓰레기 같은 선생들!
음악시간은 문자 그대로 즐겁고 흥겨운 시간이 되어야 하는데 계명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것을 얼마나 사회에 응용하고 써먹어야 되는 것인지
놋쇠로 만든 기다란 쇠붙이 막대기로 찐빵처럼 부풀은 얼굴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우리 연약한 고사리 같은 손을 수도 없이 내리치며 못되게 굴은
몰상식 했던 비예술인 음악 선생!
있는 집 애들에게는 관대하고 형편이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업신여기며
소풍이나 단체관람에 돈이 없어 참석하지 못하던 학생들에게 변소 청소나 시키던
개기름이 번들한 선생들과, 설날과 추석날에 교장님 집 앞에서 세배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아부하려던 선생들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되는 학교였으니
그 밑에서 무엇을 제대로 배우고 무엇을 꿈꾸며 학교를 다녔겠는가?
평생에서 가장 황금 같은 시기였고, 인생을 제일 아름답게 꿈 꾸던 호기심 많은
사춘기의 키 재기에 힘자랑과 싸움도 하던 개구쟁이 같던 시절이었고,
밥을 한 솥으로 먹어도 돌아서면 배고팠고, 근질근질 치밀어 오르는 정력을 주체
하지 못해 태권부에서, 또 축구부에서 힘을 키워가던 시절이었고,
약관은 아니지만 10대의 연약함을 놀리는 것이 싫어서 학교 끝난 후빡빡 머리에
사복에 담배를 물고 명동, 종로 거리를 활보하는 깡패 놈들과 같이 다니며 못된 행동을 일삼던 시절이었다.
아침에 등교를 할 때는 효자동에서 안국동 방향으로 중앙청을 끼고 걸어가도 되는 거리였는데
59번이나 60번 버스를 타고 버스 안에 오르면 괜히 주변에 좋은 학교 학생 놈들을
주눅 들게 하기 위해 내 눈을 피해 가게하거나 쳐다보지도 못하게 만들며
시비를 붙거나 째려보면 그 자리에서 내리게 해서 혼을 내주었던 시절이었으니
불과 3-4구간 정도의 짧은 거리지만 자리를 비켜주거나 가방을 안 받아준
상급생이 없을 만큼 기고만장 했던 시절.........
아침을 먹고나왔는데 학교 의자에 앉으면 배고파서 1-2교시에 벌써 남이 싸온
도시락을 몰래 훔쳐 먹기도 했고, 내 도시락마저 점심시간 전에 해치우고
정작 점심엔 옆에서 먹는 친구의 밥을 빼앗아 먹던 시절이었는데 …….
중학교 3학년 가을이 한참 예쁘게 물들어 가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밥을 게걸대며
먹으러 다닌 다른 반에 있던 김준용군(3학년 7반)에 의해 사건이 터져 버렸다.
중학교 2학년 때(외가 청풍김씨 족보) 우연한 기회에 친하게 지냈던 김준용이
3학년에 올라와 거의 불량학생처럼 복장을 입고 (모자는 평창, 상의는 차이나복
스타일, 하의는 나팔바지차림) 천생적으로 생겼던 자기코(벌렁)가 복싱을 해서
잘못 된 것처럼 헛소문을 퍼트려 인상으로 한몫 보며 자칭 깡패 행세를 하고 있었는데
(사실 성정은 착함) 자기반인 7반에서 끝 반인 1반까지 훑어가며 점심을 빼앗아
먹는 못된 짓으로 껄떡대고 다닌 일이 있었다.
당연히 많은 학우들이 이 친구의 행태를 나쁘게 보고 있었고 이를 제지할
다른 방도 없이 점심 도시락에 숟갈을 허용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3학년 1반에 도달해서는 반장을 하고 있던 김중배 군에게 제지를 당하며
시비를 일으켰다가 쪽팔리는 자기 행위를 도와 줄 사람이 없고 심히 수치심을 느끼고는
아무 사정도 모르고 점심을 일찍 먹고 한잠 자고 있던 3학년 5반에 있던
나에게 찾아와 조금 전에 있던 사실을 감춘 채 “산악부 중배한테 맞았는데 나중에 보자” 고
시비를 먼저 걸며 가만히 안 둘 것이라고 하는데 나를 지칭하며 한번 붙자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김중배군은 내가 중학교 회장겸 3학년 5반 반장에 같은 반장을 했고,
반장들 회의를 하거나 소집을 하면 항상 좋게 보던 친구사이이고,
농구나 운동을 할 때에 자주 부딪치기는 했어도 나쁜 사이가 아니었는데
김준용군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해 조금 의아해 하며 하필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가 싶어
이유가 무엇인지 얘기를 들어봐야겠다. 는 생각에 1반 교실로 찾아가 문 앞에서 김중배군을 불렀다.
그런데 중배가 창가 옆 끝에 있는 자리에서 학우들과 얘기하고 있다가
내가 문 앞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자마자 책상을 건너뛰면서 오는 모습이
붕붕 날라 오는 것 같았고, 마지막 책상위에서 벌써 2단 옆차기 자세로
오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오기에 살짝 비켜나며 주먹을 휘둘렀는데 아 차 차...
뭐가 제대로 들어간 것 같나 싶은데 쭈욱 뻗는 것이 아닌가?
무의식중에 나간 주먹이 살이 꼈는지 들어오던 탄력에 중배의 코에 맞았던 것이다.
중배의 얼굴이 찌그러지는가 싶었는데 말리는 학우들은 보이지 않고....
야! “이거 큰일 났구나!” 싶어 중배를 돌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가방도 놓아두고
학교에서 줄행랑을 쳐 도망해 버렸다.
집에도 못 들어가고 사직공원으로 도망쳐 벤취에서 후회만 잔뜩하며 고민하다가
밤에 집에 들어갔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큰일이 났다는 것이다.
중배의 코가 부러지고 얼굴과 눈이 퉁퉁 부어서 역시 중배도 부모님한테 혼 날까봐
집에도 못 들어가고 북한산으로 텐트를 가지고 야영을 떠났다는 것이다.
눈치를 보면서 학교에도 가지 못한 채 몇 일간 결석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다음날부터 터지기 시작했다.
김준용으로 시작된 못된 행위가 첫 번째 비난의 화살을 받은것을 필두로
불량서클을 만들어 못된 짓을 한 주범을 퇴학 시키자는 결정으로 교무회의를 마치고 있었는데
실상 학교에 가지 않아도 자동으로 짤리는 경우가 되어 버렸다.
사실상 학교에도 가기 싫은데 잘 되었다 싶고, 이참에는 꼭 남은 검정고시 한 과목을
붙어야겠다! (나중에 설명) 는 생각으로 나름 위로를 해 가면서 한편, 여러 경로를 통해
중배가 얼마나 다쳤고 치료비라도 보내야 도리가 아니겠는가 싶어 우리 어머니에게
학교를 못 가게 된 이유를 이실직고 빌면서 어머니를 중배네 집에 보내어 대신 사과를
받아달라는 의미로 중배네 집에 찾아가게 되었다.
우리어머니는 평생 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찾아다니며 빌고 다니셨던 경험이 많으신 분으로
몇 가지 과일을 사들고 연남동인가 동교동인가 궁궐 같은 저택들이 많은 동네에 살던
중배의 집에 찾아간 우리어머니는 3번이나 놀랐다고 한다
첫째는 중배가 의리한 집에서 사는 부잣집 아들로 매 한번 맞지 않은 귀중한 아들이었다고
하고, 중배어머니의 수수한 인품에 놀라고, 다소 준비해간 치료비를 전혀 받지 않으시며
용서 해 줄 수 있다고 말 했다는 것이다.
만약 중배와 내가 친하게 지냈다면 그런 훌륭하신 어머니의 가르침에 조금이라도 보답을 했을 것인데
그 이후에도 계속 정신 못 차리고 싸움질을 했으니....
학교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이승길 군이 갔다주면서 학교사정을 귀띔 해주는데
사고원인을 일으킨 당사자 김준용은 일주일간 정학처분을 받고,
학교에 가지도 않고 있던 난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며 퇴학으로 결정하는데
우리 반에 담임선생님이신 이종찬(체육담당) 선생님이 극구 반대하고
‘기회를 줘야한다“며 회의를 끝내는데 3학년 선생님 7분 중에 4분이 짤라야 된다는
의견을 내어 학교장 결재를 기다리는 결정으로 끝을 내었다는 것이다.
학교에 열흘정도 가지 않고 집에서 뒹굴 대며 있으니 하루는 우리 아버지가
일찍 퇴근을 하셔서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장 근무) 같은 동네에 사셨던
최우동 교장님 댁에 직접 만나러 가셨는데 이미 잘 알고 계셨던 교장님이
걱정 말라고 하며 “제발 싸움질 좀 하지 못하게 해 달라!” 학교에 데리고
나오면 형식적으로 처벌을 할 것이라고 하셨다는 말을 듣고
그 다음날 아버지의 훈계를 받으며 학교에 다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훨씬 그 이전에 교장님을 잘 알고 있었는데 내가 청운 초등학교 6학년 배치고사를
보지 못하고 중학교 시험을 치르지 못해 1년을 재수생으로 보내게 되면서
이듬해 경복중학을 시험을 치렀는데 떨어지고 낙심한 우리 집 아버지가 골목 안
한옥집에 사시는 교장님 학교에 (수송중학교) 안내를 받고 보내게 된 것으로
교장님 댁 주변 골목에서 언제나 개구쟁이 노릇을 하며 손자들을 괴롭히던
나를 익히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번 사건도 보기 싫은 놈 떡 하나 더 주는 기분으로
용서를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효자동의 큰길가에 있는 한옥집에서 한의원 집을 했고, 교장님은 우리 집에서
불과 50여 미터 떨어진 골목길안에 있는 한옥집으로 항상 번쩍거리는 검정 찝차 앞에 승차하여
출, 퇴근하시는 모습을 보며 간혹 그 찝차 안에 손녀 2명을 태우고 나들이를 하시고는 했는데
2살 터울 정도 되는 2명의 손녀는 동네에서 제일 예쁘고 아름다운 소녀들로
이제 막 사춘기를 맞는 동네 녀석들이 서로 잘 보이려고 할 만큼 인물들이 출중하였고
그중에서 교장님 댁 맞은편 사는 친구(김승호군 중앙고졸)와 교장님 큰 손녀 “영란”이가
수송초등학교 동창으로 같은 또래의 학년으로 친하며, 나는 또 승호와 제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영란”이와 각별하게 지내는 것이 동네 녀석들의 자랑이 되기도 했었다.
큰 손녀인 “영란”이는 배우 “윤정희” 같은 스타일로 풍문여고를 다녔고,
작은 손녀는 찬바람이 쌩쌩 불만큼 도도하기만 한 새침데기였는데 (문희 스타일)
동네에 살던 모든 녀석들의 선망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 잘 보이려고
밤이면 기타를 들고 집 앞에서 노래로 환심을 살려고 한 적도 있고,
어쩌다 눈길이라도 주면 심장이 멈추는 느낌처럼 짜릿한 교감을 느끼고는 했는데,
사실상 짝 사랑 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왠지 나를 좋게 봐 주길 바라고 우연히 “영란”이만
보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지나가는 나를 후회하며 언젠가는 꼭 말을 붙여봐야지 하며 애태우는
시간이 더 많았으므로 오히려 쓰리쿠션으로 그녀들의 동생 성곤이(56년생)와 형곤이(58년생)한테
잘 보이려고 하였던 기억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나이는 같아도 학년이 틀린 부끄러움 때문에 교복의 학년 뺏지를 빼고 다니며
교복을 입고서는 오히려 “영란”이를 만날까 피해 다니는 일이 있었는가 하면
그럴수록 그녀와 가까워 지지 못하며 벌어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또 나를 바보처럼 보게 되며 멀어지는 계기가 되는 일들이 몇 개 벌어지게 되었다.
교장님의 막내손자인 코 찔찔이 녀석의 구슬과 주머니의 돈 까지 쳐서 쌈치기로 모두 빨아먹고
누나를 동원하면 그 때야 말로 작전을 벌려서 내 의사표시를 알리려고 했는데 이 녀석이
오히려 누나들에게 아주 나쁜 놈으로 일러 바쳐 “영란”이와 그 동생한테 완전히 찍히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또 어느 날 밤에는 그 집 앞 골목길에서 세멘덩어리를 역기로 굳혀 나무의자에 걸쳐놓고 몇 번씩 들어
가빠를 키운다고 운동을 하다가 영란의 아버지가 동네에서 떠들지말라며 쫒아버린(실상은 담배 피우다 걸림)
일과, 얼마 전 축구부 실에서 복싱 스파링에 힘 한번 못써보고 얻어맞은 것에 대비를 한다고
체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뒤늦게 공부를 마치고 들어가던 “영란” 눈에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나 차갑고 매멸차게 바라보는지 다시는 교장님 댁 근처에 가지도 않고 나타나지도 않겠다고 다짐을 할 정도였다.
중동중학교와 담장 하나로 있던 나무 사이에 중학교 축구부실이 있었는데 간혹 점심시간에
몰래 담배를 피우려고 그쪽에 가서 놀곤 했는데 중학교 2학년으로 들어온 괴짜
(조경복 군 가수 조경수 동생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음) 녀석이 복싱 글러브를 2짝을 갖고 와
누구든지 자신 있으면 한번 붙자고 하는 상황에 우연히 내가 걸리게 되었다.
이 녀석이 한 학년 밑에 있는 놈이나 나이는 같다고 하면서 건방을 떠니 조금은 혼을 내야 될 것 같고,
안하무인으로 남을 괴롭힌다고 해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잠깐의 대결상황에 동의 하였고,
슬쩍 발을 써서 킥 복싱 정도 해보겠다는 마음에 글로브를 꼈는데 축구부 애들이
절대 반칙을 해서는 안된다 하고 선배를 심판으로 내세워 축구부 실에 링을 만들었다.
생전에 처음 껴보는 복싱 글러브가 무거운지 그 때 처음으로 알았고,
단내가 나도록 많이 맞아 보기도 처음이었다.
때려보기는 커녕 큰 글로브로 얼굴을 막기에 급급한 연출로 몇 회전을 벌리게 되었는데
오히려 점심시간 종료 종이 울리는 것을 기다릴 만큼 얼굴이 벌겋게 익어 떡이 되도록 맞았던 것이다.
동네에 돌아와 그 녀석이 써먹은 복싱 솜씨를 잡으려고 나름의 전략을 세웠다는 것이 “새도우”
복싱으로 주먹에 밴티지를 감고 열심히 연습하여 다시 붙으면 보내겠다는 일념으로 골목 안에서
“쉭 쉭” 하고 스텝을 밟으며 위빙, 더킹모션으로 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밤에 공부를 마치고
들어가던 “영란”이 눈에 띄게 되면서 영락없이 동네의 불량학생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교장님 댁 근처에 잘 올라가지도 않았고, 마음에 많은 상처를 받으며
“영란”이가 어찌되었든 대학이나 들어가서 꼬셔봐야겠다 라는 생각으로 그녀의 시야에서
점차로 멀어지기로 했는데, 동네 친구 녀석들이 밖에서 놀자고 해도 골목 안에 들어가서
노는 일도 없었고, 그런 눈치도 모르는 손자 녀석들이 찾아와 놀자고 해도 아주 잊기로 했다.
그녀의 눈을 마주칠 수도 없었던 짝사랑의 대상을 눈앞에서 걸리적거리지 않게 보이지
않아야 되는 현실이 조금은 서글펐으나 아예 그날 이후부터 학교 앞 만화방, 종로 화신 근처,
영화관, 광화문 쪽 당구장 등으로 발길을 돌려서 노는 일이 많아 졌었다.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동네에서 눈싸움을 하다가 돌을 집어넣고 눈을 만들어 던진 것이
큰손자 녀석의 머리가 깨졌을 때에도 아주 나쁜 놈으로 취급받았고, 그 학교에 들어갈 줄은
꿈에도 모르고 교장님 찝차에 몰래 낙서도 많이 해 놓고 영란이 아버지한테 혼나기도 했었으니
그리 좋은 인상을 받고 지낸 것은 아니었으나 수송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교장님 출 퇴근길에
미리 나가 경례를 할 정도로 잘 보이려 노력했고, 공부도 열심히 한 덕에 반장도 3년 내리 하면서
교장님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도 관심을 가져주길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교장님 손녀딸 영란이는 눈곱만치도 나라는 존재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그녀가 추구한
학구파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말 한마디 못한 짝사랑으로 되어 버린 것이고, 혹시나 조금 남아
있으려니 했던 영란에게의 희망도 중배와의 싸움으로 인해 영원히 몽땅 쓸어가는 계기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급기야 교장님 댁에 올라간 아버지가 다시는 나쁜 짓을 못하게 한다는 다짐을 맹세하고
나서야 학교에 다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내가 혼자 생각하고 미련을 갖게 되었던
나의 고무신 한 짝 사랑은 여기서 쉽게 포기하는 일이 되고 말았던 것인데
당시 고3으로 다니던 기율부장 이희선(1살 많은 동네친구)형이 교장님 댁 밑에 집에 살던
수송학교 모범생으로 “영란”이 눈에 들지 않았나 싶었고, 그게 아니면 귀공자 같은 공부
잘하는 학생이 교장님 댁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아가며 “영란이와 사귀는 허상이 보일정도로
몸살 같은 상사병을 앓기도 하며 중학 3학년의 끝을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14일 동안 학교에 가지 않고 버티다가 아버지에 끌려서 학교에 가니 김준용군은 이미
정학처분이 끝나서 희희낙락 했고, 난 뒤늦게 교장님의 배려로 2주 정학처분으로
교무실 옆에 책상을 갖다놓고 근신을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옆에서 알게 되었던 것이
선생님들의 숫자가 굉장히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한 번도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는
선생님들도 있었으며,교장님은 이미 실력 없는 선생님들의 구태의연에 익숙하게
많은 것을 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지나치는 선생님들마다 갖고 다니는 드럼채로 머리를 한 대씩 얻어맞는 일도 많았는데
수송학교의 선생님들 반감은 이때 더 생겼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주 순하게 생겼던 선생님마저 드럼 채 한 개를 들고 다니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더니
너도 나도 그 막대기로 학생들의 머리, 엉덩이 다리를 패는 것은 물론 배를 쑤시고
심지어 얼굴도 사정없이 때리는 선생들이 늘어만 갔는데, 인격을 말살하는 언어는 물론,
심지어는 부모님의 욕을 해가며 때려대는 선생들이 있었고,
어쩌다 한번 잘못한 것을 약점 삼아서 학기 내내 학생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며 맞은 일도 있었다.
인간다운 가르침이나, 학생들 꿈과 희망의 교육을 마음으로 이끌도록 가르친 선생이 별로
없었다는 것은 수송출신 동문으로 가장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수송학교는 안국동 학교자리를 물러나게 되었고, 이미 선생님들은 흩어져
대원중고등학교 재단을 이끌던 손상호 선생님이 수송학교의 모든 기록을 가져갔고,
80년대 후반 중동학원과 합병했는데, 최우동 교장님하고 조카뻘 되던 최도곤 선생님이
중동학원의 교장님으로 부임하셨으며, 그 쯤 최우동 교장님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큰 손녀딸과 작은 손녀딸은 이화여대를 나와 아주 잘 나가던
사업가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난 내가 태어난 효자동 집에서 통인동으로 이사하고,
사회 첫발인 청와대에 근무할 때 까지도 동네에서 얼굴을 볼 수도 있었으나 학창시절
자격지심으로 인해 짝사랑의 추억만 고스란히 간직한 채, 마음의 문을 닫아 곧 결혼하면서 모든 것을 잊고 말았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랑, 많은 만남, 또 사람과의 관계, 모든게 추억과 회상으로 남는 중늙은이가 되었고,
길에서 봐도 몰라보는 그런 초로의 나이가 되었지만, 마음 한편 에서는 더욱 그네들의 삶이 궁금하기만 합니다.
첫사랑이나 짝사랑의 대상이 과연 어떻게 사는지 너무나 궁금하여 인연의 빛을 찾아나서는 그런 시간은 가져보지 않았나요?
희한하게도 생각하면 할수록 그 인연의 궁금증은 더욱 반짝 거리기만 하고 추억은 꼬리를 물고 아쉬움만 남깁니다.
코를 질질 흘리며 따라다녔던 교장님 막내 손자 녀석도 이제 50 중반의 나이가 되었겠고,
같은 동네에서 수송을 다녔던 3년 선배 이희선(오리)형도 환갑의 나이로 어느 하늘 밑에서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당시 사랑을 느껴볼 나이도 되지 못한 풋풋하고 순수하기만 했던 청춘의 나이를 왜 그렇게 수줍어했을까요?
또 그 나이답지 않게 밖에서는 왜 그렇게 어른처럼 행세하길 좋아했는지?
빡빡머리 때문에 누려보지 못했던 젊음의 미련이 더 많았을 것으로 아쉬움만 남습니다.
당시에는 학교와 선생님에게 좋지 않았던 불만과 감정으로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머리가 희끗희끗 변해가며 우리의 학교로 맺은 인연의 끈은 더욱 궁금하기만 합니다.
수많은 동창과 동문들의 인연은 모두들 주소를 잃어버리고 잘린 영화 같이 궁금증만 더한 꼴의 아쉬움이 되었습니다.
중앙청과 경복궁, 한국일보를 바라보며 공부했던 6년의 세월을 보낸 박동 옛터 전사들이
모두들 하나같이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잘 나가는 동문회를 만들어 발전해 가는 것과,
동문들 모두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것이 바램 일 겁니다.
비록 학교는 어찌어찌 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즐거웠던 학창시절과 희망을 간직하고 다녔던 학교생활 추억은 꼭 간직해야 하고
그것을 회상하는 의미에서도 우리들이 꼭 만나야만 한다는 점은 누구나 동감 할 겁니다.
그 시절 불가항력의 결정으로 선택했을 학교 측의 이기적인 처사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선생님들 감정도 억겁의 세월로 눈 녹이듯 연륜의 풍파가 모두 가져가 버렸습니다.
우리학교는 삼각산의 명산을 정기 받은 박동 옛터에서
종로 한 가운데 최고의 지세와 땅 기운을 받은 명당입니다.
학교 체육의 첨단을 흔드는 농구와 축구 기계체조, 태권도, 등 최고의 조직력을 갖춘 브라스밴드로
운동장, 체육관에서 영광스러운 응원가를 함께 부르며 가슴을 뜨겁게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많이들 늙어가지만 외로워하지 말고 자주 자주 봐야합니다.
그때 부른 교가, 응원가 모두들 손잡고 불러보는 체육대회를 기획하는 행사는 그야말로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동창들 동문들 모두들 한자리에서 뜨거운 가슴으로 만나 뵈옵길 우리 모두 기원하고 기다리겠습니다.
2011 3월 모임을 마친 일주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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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남목 선생! 이런 기막힌 얘기가 있었냐? 일필휘지로 쓴 글 잘 읽었네
-나 역시나 중배 맘한테 낚싯대로 종아리 맞던 생각도 나고..ㅋㅋ-,
6월엔 모두 합심해서 멋진 체육대회 꼭 하자구
WoW~
재미있게 잘 읽었네..좋은 추억담이야.....
장황한 추억의 소설 과거로 돌아가 한참 읽어내려갔구~먼 수고했다 X-맨
와^^^ 사춘기 시절 추억의 표현....
잘 읽었습니다.
맛깔스러운 토종된장찌게 먹는마음으로 읽으면서 많은생각이 나게해줘 고마워 ! 너의다른면을 본것같아
야~ 이건 대단한 이야기이네 난 아무것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