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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부터 정조 서거일까지의 역사기록 검토-
정조시대에 전개된 역동적인 사회 변화와 사상적 모색은 이후 전통사회 체제와 문화의 전
면적 변동의 기점이 되었으며, 오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기나긴 역사적 파장을 가지게 되
었다.
정조 사후 탕평정치가 무너지고 세도정치가 행해지면서 전통적인 사림정치
가 붕괴하였으며, 산림학자와 전통적인 주자학 이념의 영향력과 권위도 급속
히 쇠퇴하였다. 서울(京)과 지방(鄕) 사이의 사회적 분기 현상이 심화되고
명분론적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가운데, 민(民)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
고, 여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이 밀어닥쳐서 조선 전통사회와 문화
는 변화를 강요당하게 된다.
정조시대 이후 오늘에까지 지속되고 있는 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어떤
방향성을 지니는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나간 시대적 격랑을 거슬러
올라갈 때 만나게 되는 변화의 기점, 200년 전 정조시대는 그래서 우리의 관
심의 대상이며 [정조 서거 200주년 추모전]도 이러한 문제의식의 소산이다.
정조 서거 200주년을 맞아 이 글에서는 정조가 서거하던 정조 24년(서기
1800년) 6월 28일까지, 그해 정초부터 200여 일 간의 역사적 정황을 {정조실
록} 등 관련 역사기록에 따라 검토해 보고자 한다. 반년 간의 짧은 기간이지
만 그 속에는 시대의 본질적 문제와 그에 대응하는 인간 군상의 다양한 노력
이 저류가 되어 흐르고 있다. 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그 연장선 상에 위치
한 오늘의 문제와 우리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는 기초가 될 것이라 믿는다.
*** 정조 24년 정월;
정월 초하루, 장차 왕위를 계승할 원자가 새해 들어 11세가 되었다. 정조
는 그를 왕세자로 책봉하게 된 기쁨으로 새해를 맞았다. 원자는 수원의 천하
명당 자리에 사도세자의 새로운 묘소(顯隆園)를 마련하여 이전하던 시기에
수태되어, 이듬해 1790년(정조 14) 6월 18일 혜경궁 홍씨의 생신날 태어났
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음덕으로 원자가 탄생하였으며, 이 원자가 장차 사도
세자와 혜경궁, 그리고 자신의 한을 풀어줄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그의 성장
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정조는 4년 후 갑자년(甲子年, 1804), 원자가 15세 성년이 되면 그에게 왕
위를 물려준 후, 헤경궁을 모시고 화성으로 내려가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신
왕으로 하여금 자신이 이루지 못한 비원(悲願), 곧 사도세자를 국왕의 위격
으로 추숭(追崇)하는 일을 이루어내도록 의도하였다.
사도세자의 추숭은 영조의 허물을 드러내는 일이 되므로, 영조는 정조에게
이런 일을 하지 말도록 각별히 당부한 바 있었다. 유교국가의 군주로서 아버
지를 위하여 할아버지를 저버릴 수 없었던 정조는 이에 자신이 상왕으로 물
러난 후 자신의 부탁에 따라 순조가 이 일을 이루도록 구상하였다. 이 경우
자신은 할아버지의 당부를 어기지 않고도 비원을 이룰 수 있으며, 신왕으로
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한을 풀어줌으로써 큰 효행을 하는 셈이 될 것이
다. 왕세자의 책봉 이후 한해 안에 진행될 왕세자의 관례(冠禮)와 가례(嘉
禮)는 정조가 품어왔던 꿈의 실현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알리는 일이었다. 이
러한 기대 때문에 새해를 맞은 정조의 가슴은 희망에 부풀었다.
이날 정조는 또다른 기쁨을 맛보았다. 그가 특별히 총애하던 단원 김홍도
(檀園 金弘道)로부터 [주부자시의도(朱夫子詩意圖)] 8폭 병풍 그림을 진상받
았기 때문이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
국 평천하'의 8조목을 형상화한 이 그림은 정조의 주자학적 통치이념을 풀어
낸 단원 회심의 걸작이었다. 특히 여덟 폭 가운데 네 번째 폭, '정심(正心)'
을 형상화한 [월만수만도(月滿水滿圖)]는 그림 중앙 상단에 보름달이 휘영청
떠서 만물을 비추는 그림이었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자
호하면서 자신을 명월과 같은 초월적 존재에 비유하였던 정조의 자의식을 그
대로 표현하였던 이 그림은 정조의 통치이념과 새해를 맞는 정조의 특별한
감회를 정확히 헤아려 표현한 것으로 정조를 특히 흡족하게 하였으리라 짐작
된다.
정조에게 새해를 맞는 감회가 남달랐던 것은 새해가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자(朱子, 1130년 - 1200년) 서거 6백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이해를
맞아 정조는 자신의 주도로 주자의 전저술을 망라하여 주자'전서(全書)'를
편찬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몇 년 전부터 이 사업의 주도를 통해 정치적 지
도자이자 학문적 지도자, 곧 '군사(君師)'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
다.
주자전서 편찬 사업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조선의 사상적 기반을
정비하고자 하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조선중화의식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
는 상황에서 대두한 북학론에 따라 외래문물의 수용이 불가피하였으므로, 그
를 받아들일 전통 사상과 문화 기반의 정리와 새로운 기준의 제시는 절실한
과제였다. 정조는 청나라의 학문이 육왕학(陸王學) 일색으로 중국 주자학은
위기에 봉착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정통주자학의 유일한 계승국가로 자
부하는 조선이 주도하여, 주자학을 재정리하면서 정학(正學)의 위상을 확고
히 세우고, 이를 통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조의 시도는 집권 후반기 이래 견지하여온 '교속(矯俗)'론의 연
장선상에서 추진되었다. '만천명월주인옹'으로서 '군사'를 자처하였던 정조
는 사학(邪學)을 배격하고 속된 문화를 교정하기 위해 정학(주자학)의 진작
을 표방하였다. 이는 연암 박지원에 의해 새로운 문화 건설의 방략으로 제기
된 법고창신(法古創新)론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된 일이었다. 전통주자학을 확
립하면서 사학과 외래문화에 대처하고 새로운 시대와 문화를 준비한다는 방
식이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정조는 1798년 이래 {오경백편(五經百選)} {사서집석(四書輯釋)}
{주서백선(朱書百選)} {주자서절약(朱子書節約)} 등 많은 주자서를 간행하
고, 1799년에는 {대학류의(大學類義)}를 펴냄으로써 자신의 통치이념을 확실
히 정리하였다. 이렇게 정리된 정조의 주자학적 통치이념은 단원 김홍도에
의해 그림으로 표현되었으며, 나아가 조선 나름의 새로운 '주자전서' 편찬을
위해 서형수(徐瀅修, 서명선의 조카이자 서명응의 아들)를 청나라에 보내어
자료를 수집해 오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정조의 죽음과 이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서형수가 축출됨으로써 이 작업
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주자 서거 600년을 즈음하여 추진되었던 주자학
의 총정리 시도는 복고적이라기 보다는 전향적인 사상적 기준 수립의 시도였
다. 실제로 법고창신의 사상적 지향성 위에서 정조와 북학론자들의 주체적
필요성에 따라 이는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 시도의 좌절은 전통사상과 문화
의 정리(법고)와 새로운 사상과 문화의 건설(창신)이 정조 사후 역사의 격동
속에 순탄하게 이루어 질 수 없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보름 후 정월 16일, 정조는 사도세자의 탄일을 닷새 앞두고 정례적인 현륭
원 성묘를 단행하였다. 쇠약한 정조의 건강 때문에 신료들은 만류하였지만,
왕세자 책봉의 기쁜 소식을 사도세자 영전에 알리려 정조는 현륭원 행차를
서둘렀다. 정조는 당일로 현륭원에 나아가 벅찬 심정으로 오열하였고, 음력
정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산소 앞에 엎드려 울면서 일어나질 못하였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탈진한 상태에서 정조는 신료들의 부축을
받아 재실로 내려왔다. 정조는 이곳에서 밤을 지새고 다음날 화성행궁(華城
行宮)에서 유숙한 후 18일 환궁길에 올랐다. 이날 서울 가는 길에 수원 북쪽
경계, 멀리 화산이 바라다 보이는 지지대고개에 오른 정조는 눈물을 흘리며
선산을 떠나 다시 서울로 가야 함을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훗날 정조의 유
신들에 의해 세워진 지지대비(遲遲臺碑)는 이러한 광경을 전하고 있다.
1월 21일은 사도세자의 탄일이었다. 그 전날부터 정조는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이곳에서 밤을 지새웠으며, 억누르기 어려운 격한 감정 때문에 가슴
을 진정시키려 연이어 탕약을 들면서 겨우 참배 행사를 치루었다.
그리고는 쉴 틈도 없이 1월 26일, 청나라에서 건륭황제의 죽음에 즈음하여
조칙을 가지고 칙사가 왔으므로 친히 나아가 영접하였다. (청나라의 전성기
를 일군 건륭황제와 조선의 번영을 구현한 정조는 한해 사이에 돌아가게 되
었고, 1800년을 전후하여 동아시아는 큰 정치적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 때
도 신하들은 정조의 건강 때문에 만류하였지만, 모든 일을 직접 해야만 성이
풀리는 성격인지라 정조는 듣지 않았다. 훗날 정조의 유신들은 이달 이런 일
들을 치루며, 이 어름부터 정조의 건강이 극히 나빠졌고 병석에 눕는 일이
잦아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 정조 24년 2월;
2월 2일, 정조는 걷기도 힘겨울 정도의 건강 상태에서 왕세자의 관례와 책
봉례에 직접 참여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행사 직후 혜경궁에게 부스럼병이
나서 10여일 간 정조는 노심초사하게 된다. 정조는 자신이 친히 약을 달이고
약을 발라 드리느라 손이 부어오를 정도였다고 한다. 정조의 간병으로 다행
히 혜경궁은 2월 17일 쾌유하였지만 정조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2월 26일, 왕세자빈의 첫 번째 간택 절차가 행해졌다. 공식적으로는 세 번
째 간택까지 두 번의 절차를 남기고 있었지만, 이미 정조는 자신의 측근이었
던 김조순(金祖淳)의 딸에게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이날 김조순의 딸이
간택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왕세자의 외삼촌인 박종보(朴宗輔)로 하여금
호위하게 하고, 다음날 이미 확고한 자신의 뜻을 신료들에게 전하였다. 지난
정월 현륭원을 참배하던 날 밤, 재실에서 사도세자의 혼령으로부터 계시를
들었으며, 그에 따라 김조순의 딸을 왕세자빈으로 맞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는 노론의 명문 안동김씨를 외척으로 선택하여 왕세자의 후견세력으로
삼고 장차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 정조 24년 3월;
3월 5일, 영조의 기일을 맞아 정조는 궁궐 내에서 근신재계하였다. 선왕인
할아버지(영조)에 대해 정조는 형언하기 어려운 착잡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 죽은 사도세자의 이복형 효
장세자(眞宗)에게 자신을 입양시켜 사도세자와의 관계를 끊도록 까지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왕권강화를 위해 추진해온 영조의 탕평
정치를 계승하였다. 또한 영조대 후반 경주김씨와 풍산홍씨 척족 등 특권세
력의 발호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청론사류(淸論士類)의 정치적 입장을 받아들
여, 우현좌척(右賢左戚, 어진 선비를 등용하고 척족을 물리침)과 우문지치
(右文之治, 곧 학문정치)를 새로운 정치적 명분으로 내걸었으며 정조는 이들
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아 정치적 개혁을 추구하였다.
그 실현을 위해 정조는 규장각을 세워 노, 소론 명문가의 젊은 학자들을
이곳에 포진시키고,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를 활용하여 학문연구과 학문정
치를 주도하였다. 이 결과 재위 24년간 정조가 직접 편찬에 참여한 어정서
(御定書) 89종 2490권과, 신료들을 시켜 편찬한 명찬서(命撰書) 64종 1501
권, 24년간 도합 153종, 4천 권에 이르는 방대한 서적 편찬사업을 수행하여
우리 역사상 제일의 학문군주로 자리매김하였던 것이다.
3월 10일, 동궁시절부터 오래도록 변함없이 정조에게 충성하였던 정민시
(鄭民始)가 서거하였다. 정민시는 서명선(徐命善), 김종수(金鍾秀), 홍국영
(洪國榮) 등과 함께 목숨을 걸고 정조를 지켰던 심복으로서 이른바 '동덕회
(同德會)'의 일원이었다. 정조가 즉위한 이후 그는 정조의 뜻을 받들어 중요
정책의 실무에 거의 다 관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정조 사후 벽파세력에 의
해 서유린(徐有隣)과 함께 국가재정 파탄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서
유린이 정조 사후 벽파정권에 의해 고초를 당하고 어려운 말년을 맞았던 것
과 달리, 그는 정조보다 석달 앞서 유명을 달리함으로써 정조의 어제비문이
내리는 등 '중신(重臣) 중의 중신'으로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정조는 그의 탕평정치를 지탱하던 여러 중신과 대신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
나고 정민시까지 돌아가자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1789년 사도세자
묘소 이전을 제기하여 정조 비원 실현의 단서를 마련해 놓고 그 이듬해
(1790) 3월 금성위 박명원(錦城尉 朴明源)이 유명을 달리한 이후, 동궁시절
정조보호의 일등공신으로서 '의리주인(義理主人)'으로 불리우던 소론의 영수
서명선이 그 다음해(1791)에 서거하였다. 노론 청론사류의 핵심으로서 정조
를 훌륭히 보좌했던 유언호(兪彦鎬)와 윤시동(尹蓍東) 두 정승이 1796년과
그 이듬해에 돌아갔으며, 특히 1798년 이후 많은 원로대신들이 차례로 정조
의 곁을 떠나 유명을 달리하였다.
1798년, 노론 시파의 영수 김이소(金履素, 8월 24일)와 홍낙성(洪樂性, 12
월 30일)이 차례로 서거하더니, 이듬해(1799) 정월 벽두부터 동궁시절 이후
정조를 보좌하고 노론 벽파를 이끌던 김종수(1월 7일)가 돌아갔다. 3일 후엔
아버지 서명응, 아들 서유구와 함께 3대가 모두 규장각 각신으로 뽑히고, 동
생 서형수와 함께 정조의 학문정치를 뒷받침하였던 서호수(徐浩修)가 세상을
떠났다.(1월 10일) 그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막으려 진력함으로써 정조에 의
해 표창되었던 영조대 후반 소론의 영수 이이장(李彛章)의 사위이면서, 서명
선의 조카여서 정조에 의해 장차 큰 역할이 기대되던 터였다. 특히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의 편찬을 책임맡아 돌아가기 직전까지 진력하였
으므로 정조의 애통함이 컸다.({홍재전서}는 서호수가 이만수, 김조순, 이존
수 등 규장각신을 이끌어 편집하다가, 서호수 사후 역시 소론의 徐榮輔가 편
집책임을 이어받고 정대용, 심상규, 김근순 등 각신과 유득공, 이광규(이덕
무의 아들), 성해응, 박제가, 서리수 등 검서관이 교정에 참여하여, 정조 서
거 반년 전인 1799년 12월 21일 4집 120권의 繕寫本이 정조에게 올려지게 된
다. 이날 소론의 대학자이며 명필인 洪良浩의 역사서 {興王肇乘}이 함께 진
상되었다. {홍재전서}는 순조 원년(1801) 12월 184권 100책으로 정리되었으
며 1814년 사도세자의 {凌虛關漫稿}와 함께 정리자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한편, 며칠 후에는 남인의 영수로서 정조의 의리탕평론을 떠받치던 채제공
(蔡濟恭)이 서거하였다.(1월 18일) 그는 정범조(丁範祖),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 기호남인 관료학자들을 이끌며, 영남남인을 규합하고, 표
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등 소북계열과도 연대하여 노론의 신임의리론(辛壬
義理論)에 맞서서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임오의리론(壬午義理論)을 제기하였
다. 정조의 비원을 이해하고 이를 실현해 가는 실제적 책임을 맡았던 그는
갑자년 이후 정조가 웅거할 화성신도시의 건설을 총괄하는 등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노론의 영수이던 김종수가 '문충(文
忠)'이란 시호를 받은 반면에, 그는 '충'이란 글자 없이 '문숙(文肅)'을 시
호로 받아 충신으로서의 면모를 평가받지 못하였다. 남인들로서는 이에 항의
하기도 하였지만, 노론 주도의 정국 상황 속에서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기는
어려웠다.(24년의 정조 치세 기간 동안 남인은 채제공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규장각 각신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정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인의 정치
적 진출에는 근본적 한계가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해(1799) 9월에는 화성 건설의 실무책임을 도맡았고 여러 군영대장을 지
내며 정조를 돕던 소론의 무장, 조심태(趙心泰)도 유명을 달리하였다. 백하
윤순(白下 尹淳),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 이래 동국진체의 서예전통을 집
대성하였으며, 정조로부터 유한지(兪漢芝)와 함께 가장 아낌을 받아 중요한
금석문자를 도맡아 쓰던 명필 송하 조윤형(松下 曹允亨)도 이해에 세상을 떠
났다.
그런가 하면 정조가 서거하던 해, 1800년에는 1월과 윤4월 김희(金熹)와
이명식(李命植)이 차례로 돌아가는 등, 시파의 원로대신들이 거의 세상을 떠
났다. 정조의 신임을 받던 중신 가운데 정조의 언명대로 거의 유일하게 남았
던 정민시까지 유명을 달리함으로써 이제 정조의 주변에는 적막감이 감돌았
으며, 조정 관료들의 세대교체와 새로운 정국 구도를 짜는 일이 시급한 일로
닥쳐왔다.
*** 정조 24년 4월;
4월 13일, 정조는 동궁 시절의 궁료이자 빈객이었던 김종정(金鍾正)의 아
들을 설서(說書)로 특별히 보임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정조의 성장기에 정조
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인물은 남유용(南有容), 박성원(朴聖源), 서명응(徐命
膺) 등이었고, 동궁시절 궁료 가운데는 홍대용(洪大容), 안정복(安鼎福) 같
은 학자들도 있었다. 정조는 대체로 경화사족(京華士族) 출신의 이들 학자들
에게 학문을 배우고 토론하였으며, 이들에게는 그의 자손들에게까지 특별한
은전을 베풀었다. 김조순, 심상규, 이만수, 서영보와 함께 '천생오태사(天生
五太史)'라 불리며 순조대 이후 세도정권의 핵심인물이 되는 남공철(南公轍)
은 정조가 존경하던 어린 시절의 스승 남유용의 자제였으며, 서명응의 아들
손자인 서호수, 서유구(徐有 )도 이런 후광을 입으며 규장각에 들어가 정조
의 근신으로 입신하였다.
한편 4월 15일에는 남인의 이익운을 이조참판으로 임명하고, 4월 20일에는
새로 급제한 심영석(沈英錫)에 대해 정조가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는 등 정조
는 남인의 정계 진출을 확대시키려는 의지를 보였다. 정조는 심영석의 증조
부인 심단(沈檀)이 남인으로서 노론과 영조를 보호한 것에 대해 영조가 그를
공신이자 충신이라고 하였던 일을 노론의 영의정 이병모(李秉模)와 좌의정
심환지(沈煥之)에게 환기시켰다. 정조는 남인이 정계에 적극 진출할 수 있도
록 후원하면서 새로운 정국구도를 모색하고 있었다.
4월 21일, 초계문신 13명의 명단이 나왔다. 노론의 김매순, 김기은, 오연
상, 조종영과 소론의 신위, 그리고 남인의 심영석 등이 눈에 띄는 인물들이
었다. 김매순(金邁淳)은 훗날 홍석주(洪奭周) 등과 함께 경화학계의 대표적
학자가 되며, 신위(申緯)는 조윤형의 사위로서 순조대 이후 시서화 삼절(詩
書畵 三絶)로 일컬어지면서 진경문화를 일변시켜 북학이 풍미하던 서울 예원
의 종장이 되었다.
4월 30일, 가뭄이 심하여 조정에서 대책을 논의하였다. 신료들은 가뭄도
걱정이지만, 이 때문에 안절부절하면서 노심초사하여 더욱 쇠약해 지던 정조
의 건강을 함께 걱정하고 있었다.
*** 정조 24년 윤4월;
윤4월 9일, 왕세자빈 두 번째 간택을 행하여 왕세자빈으로 김조순의 딸을
확정짓고 김조순에게 친서를 내렸다.
윤4월 13일, 초계문신 친시에 김기은(金箕殷)이 몸이 아프다고 하면서 나
오지 않았다. 칭병을 했지만 사실은 남인인 심영석과 동석하기 싫어서였다.
붕당 간의 대립은 뿌리깊은 것이었고 이에 정조는 이 행위를 '속된 습속'이
자 군주의 권위와 탕평론을 부정하는 행위로 비판하였다.
윤4월 17일, 이서구(李書九)를 비변사(備邊司) 화성(華城)구관당상으로 임
명하였다. 이서구는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로서 정조시대 새로운 문예사조의
첨단에 섰던 인물이자 청론사류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청론사류의 이념
을 계승하여 정조와 충돌하면서까지 사림 주도의 정치질서를 추구하였다. 척
족, 권행 등 특권세력의 정치개입을 극력 비판하였던 그는 세도정치기에 가
서는 척족세도를 비판하다가 그들에 의해 정계에서 축출되는 비운을 맞게 된
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에 대한 대중의 광범위한 여망은 야담집 속의 여러
일화로 남아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북학의 중심인물로서 이서구는 연암일파(燕巖一派)의 분방한 문체를 반정
의 대상으로 놓고 정조가 비판하였을 때도, 오히려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
正) 주도가 군주의 지나친 간섭이라고 하여 그에 맞섰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
지 않았다.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방법으로서 법고창신의 지향은 마
찬가지였지만, 그 각론에 있어서는 정조의 주변에서부터 이처럼 다양한 차이
가 있었다.
정조가 새로운 시대를 위해 전통주자학과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을 정리
하고자 할 때, 그는 정조의 명에 따라 성해응(成海應)과 함께 {존주휘편(尊
周彙編)}의 편찬을 주관하는 일을 맡았다. 성해응과 그는 북학론자였지만 북
학이 시대의 대세로 등장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대외명분론을 주체적 입장에
서 재평가하고, 북학론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
작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업은 북학의 풍미로 주자학의 절대성이
무너지고 청조고증학의 유행에 의해 주자학이 송학(宋學)으로 상대화되던 상
황에서 진행된 주자학의 재정리와 마찬가지 성격의 주자학적 명분론의 정리
사업이었다.
이서구는 그의 강경한 입장 때문에 정조로부터 경원되었지만, 연암 문하에
서 닦은 실용적 학문과 실무능력은 정조는 물론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바였
다. 정조는 갑자년의 화성으로의 은퇴를 준비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때 그를
화성구관당상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윤4월 26일, 왕세자 책봉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영의정 이병모를 접견하였다. 이병모는 국가적 경사를 알리는 임무를 맡아
기쁜 마음으로 사신 간다고 하면서도, 정력의 쇠퇴를 말하는 정조께 건강에
유의할 것을 특별히 당부하고 사행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다시는 정조를 만
나지 못했다.
*** 정조 24년 5월;
5월 12일, 소론의 이시수(李時秀)가 우의정인 상황에서 정조는 그 동생 이
만수(李晩秀, 이복원의 아들이자 서명선의 사위)를 이조판서로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사도세자 기일(5월 21일)을 맞아 다음날부터 열흘 간 근신재계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 기간 중 정조의 인사정책을 비판하는 글들
이 나왔고, 당사자인 이만수까지도 사양하는 글을 올려 이 인사조치의 철회
를 요청하였다. 특히 김이재(金履載)는 이러한 정조의 인사에 강력히 항의하
였다.
5월 22일, 근신재계를 풀고 조정에 나온 정조는 자신의 입장을 더욱 강하
게 밀어부쳤다. 12일의 조치에 덧붙여서 소론의 윤광안(尹光顔)을 특별히 이
조참의에 임명함으로써 이조의 주요 직책을 소론 일색으로 구성하여 버린 것
이다. 일찍이 정조는 노론 소론 남인이 삼분의 일 씩이 되도록 하는 탕평적
인사방침을 제시한 바 있었으나, 이 조치에서는 각 당파의 비율을 맞추는
'호대(互對)'의 원칙 자체가 무시되었다. 정조는 장차 4년 후의 갑자년을 겨
냥하며, 당색을 뛰어넘어 신료들을 전면적으로 재배치하고자 하였다. 원로
대신들이 거의 돌아간 상황에서 자신이 즉위한 이후 초계문신제도 등으로 키
워낸 새로운 관료들을 자신의 임의대로 포진시켜 세대교체를 이루고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커다란 정치적 파란을 일
으키고 정조와 신료 간의 극단적 입장 차이를 노출시켰다.
한편 5월 22일 이날, 장령 권한위(權漢緯)는 상소를 올려 사학(邪學)의 폐
단을 비판하고 겸하여 인사정책의 개선과 환곡 폐단의 제거를 요청하였다.
'사학(천주교)'의 수용은 1780년 대 천진암과 주어사에서의 강학회 이후 사
상적 전환을 가져온 남인 신진기예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으므로, 이는 이
가환, 정약용, 이승훈 등 새로운 사상을 희구하던 남인 학자들에 대한 비판
이었다. 그러나 이들 남인 세력은 정조 탕평정치의 한 기둥을 이루고 있었으
므로 이들에 대한 극단적 처벌은 정조의 탕평정치 전체에 대한 위기가 될 수
도 있었다. 정조는 이런 까닭에 이들에 대해 '척사(斥邪)'의 강경책보다는
'부정학(扶正學)'의 온건책으로 대응하였다. 이들을 공격하는 노론세력에 대
하여는 그들이 받아들인 청조풍의 부화한 문체와 문풍을 함께 문제삼아 '교
속'의 원칙을 내세워 동시에 견책하였다.
그러나 이 견책은 일시적인 정치적 조치에 불과하였다. 문체반정과 서학금
단 사건은 정조 측근에서부터 조선의 사상과 문화가 어떤 방향을 지향하며
나아가고 있었던지를 극명히 보여주었으며, 이 도도한 흐름은 정조의 견책에
도 불구하고 더욱 강화되어 갔다. 남인은 정조 사후 천주교 신앙이 빌미가
되어 커다란 탄압을 받고(辛酉邪獄) 실세하게 되지만, 천주교 신앙은 장차
전국적으로 수만명의 서학신앙으로 확대되었다. 북학과 새로운 학문, 문풍을
추구하던 노론과 소론의 핵심세력들은 1806년 병인경화(丙寅更化)로 벽파세
력을 일망타진한 후 세도정권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조선 사상과
문화의 주류를 성리학에서 북학으로, 진경문화에서 북학문화로 돌려놓는 역
할을 하기에 이른다.
5월 29일, 정조의 인사조치에 저항한 김이재를 언양으로 귀양보내었다. 그
러나 정작 정조가 앞날을 내다보며 특별히 신임을 부여한 소론의 우의정 이
시수와 이조판서 이만수 조차도 정조의 조치에 완곡히 반대하였으며, 김이재
를 용서할 것을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5월 30일(晦日), 경연에서 정조는 이러한 정치적 파란과 신료들의 태도에
대해 보다 분명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였다. 자신의 지난날의 인사정책과
나름의 원칙론을 술회하고 신료들의 추종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오회연교
(五晦筵敎)'라 불리는 이 담화를 통하여 정조는 지난 24년 간의 정국운영에
서 각 정파 핵심인물들을 8년 간격으로 등용하거나 쉬게하였다고 술회하였
다. 남인의 채제공과 노론의 김종수, 그리고 유언호와 윤시동 등을 적절히
기용하면서 자신의 탕평책이 진행되어 왔던 바, 이제 김이재의 언론은 이러
한 자신의 고심을 이해못한 속된 습속이라 몰아부치고, 그 배후까지를 의리
론으로서 바로잡으려 한다고 언명하였다. 그는 국왕 주도의 정치방안을 피력
하고, 좌의정 심환지와 우의정 이시수 등을 포함한 모든 신료들의 맹성을 요
구하였다. 그러나 신료들이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정조는 이만수와 윤
광안의 이조판서직과 이조참의직 임명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의 정치
적 선택은 결국 신료들에 의해 거부되었고 정조의 지도력은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 정조 24년 6월;
6월 1일, 화성유수 서유린에게 화성에서의 농업생산 증대 방안과 식목 계
획을 유시함으로써 정조의 화성신도시 육성책과 이를 모범으로 한 전국적 농
업개혁의 방향이 드러나게 된다. 정조는 이 유시에서 화성신도시에서의 국영
시범농장(屯田, 대유둔=북둔과 축만제둔=서둔) 경영을 근거로, '전국적인 둔
전 설치 경영론'과 '영농실적에 따른 관직 제수 방안' 등 두가지 방안을 제
시하였다. 여기서는 부민(富民), 곧 유산계층의 자본을 끌어들여 활용하고
이들에게 벼슬을 주는 등으로 농업생산 증대를 독려한다는 구상이 구체화되
었다. 서유구의 둔전론(屯田論)과 정약용의 여전론(閭田論) 등 농업개혁론은
이러한 정조의 구상과 마찬가지의 기반 위에서, 더구나 화성에서의 둔전 운
영의 실험을 거치며 정리되어 나왔던 것이다. 조선사회와 농업이 근대를 향
해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유시였다.
6월 5일, 정조의 오회연교에 대해 예조참판 이서구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
이며 자신의 관견을 밝혔다. 그는 고금의 의리는 한가지라는 전제 위에서 노
론 신임의리의 준수와 사림청론의 의리론을 주장하였다. 실상 노론의 신임의
리는 정조 즉위 직후 노론 청론사류를 권력기반으로 삼으면서 정조 스스로
그 정당성을 인정한 바 있었다. 정조는 노론의 상징적 인물인 우암 송시열
(尤菴 宋時烈)을 높여서 그 묘소에 어필 신도비를 세우고, 효종의 능침이 있
는 여주에 우암을 제사지내는 대로사(大老祠)를 세워 여기에 어제 어필의 비
석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 노론의 신임의리가 위협받고 있으며, 특권세력의 등장에 의해
청론의 의리론과 사림정치 자체가 곤란한 지경에 봉착하고 있다는 것이 이서
구의 판단이었다. 측근신료들에게 실망하였던 정조가 정동준(鄭東浚)과 같은
특권세력을 키우고, 때로는 금령을 내려 언론을 봉쇄하거나 사림정치의 원칙
론을 부정하기도 했던 점은 정조의 정치력이 한계를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시파 벽파로 분열하여 상쟁하게된 정치 상황 속에 청론사류의
정치적 원칙이 혼란에 봉착하였으므로 이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 이서
구의 주장이었다.
6월 14일, 초순부터 발병한 부스럼병이 종기로 번져 정조의 병세가 악화되
었다. 그간 여러 약을 썼지만 효과는 없었다. 이날 밤, 정조는 침전인 영춘
헌(迎春軒)으로 장차의 외척인 김조순을 불러들여 4년 후 갑자년, 자신이 화
성으로 물러난 후 신왕을 도와 권력을 행사하기 바란다는 당부를 하였다. 이
는 즉위 직후의 우현좌척론을 정면으로 뒤집는 발언이었으며, 정조 24년의
정치적 성과를 스스로 부정하고 척족 세도정치를 유도하는 놀라운 언명이었
다. 청론사류가 분열되어 정치력의 한계를 드러낸 상황에서, 정조의 탕평정
치는 영조의 탕평정치가 그러하였듯이 척족을 특권세력으로 불러들이는 결과
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6월 16일, 음력 6월의 무더위와 오랜 투병에 지친 정조는 오회연교 후의
숨막힐 것 같은 긴장감 속에 신료들을 향해 불만을 토로하였다. 자신의 병은
가슴 속의 홧병에서 유래하였으며, 신료들이 임금의 뜻에 부응하지 않기 때
문에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정조의 불만은 좌의정 심환지와 우의정 이시수에
게로 불똥이 튀어서 정승들 하는 일이 한탄스럽다는 말까지 터져나왔다. 정
조로서는 병환만 아니라면 6월 18일 혜경궁과 왕세자의 생일을 맞아 진찬(進
饌) 등 여러 행사를 벌일 것이겠지만, 이 모든 것은 후일로 미루어졌다. 이
날 이후 병세의 악화로 정조는 정사를 돌볼 겨를 없이 투병에 몰두하게 되
고, 신료들과 투약을 논의하는 대화만이 실록에 기록되게 된다.
6월 28일, 조금 나은 듯하던 정조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오전중에 정조
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정조의 근신들인 김조순, 서정수, 서용보, 이만수,
정대용, 김면주, 심상규, 김근순과 약원도제조인 이시수, 그밖에 심환지, 김
재찬, 조윤대 그리고 의관들이 부복한 가운데 정조는 '수정전(壽靜殿)'인 듯
싶은 말을 되뇌이며 의식을 잃었다. 혜경궁과 왕세자가 달려오고 뒤이어 수
정전에 거처하던 정순왕후도 다녀갔지만, 정조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오후 유시(酉時, 6시 경) 백관과 온국민의 애도 속에 서거하고 말았다.
정조사후 정조의 능침은 화성 남쪽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의 동쪽 구릉으
로 정해졌다. 그러나 이곳 능침의 외형은 현륭원과 차이를 드러내었다. 정조
가 현륭원에 정성들여 갖추었던 병풍석(屛風石)과 와첨석(瓦詹石)이 이곳에
서는 채택되지 못하였다. 정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채택했던 능묘법식은 정조
의 신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석물의 세부의장은 화려해
졌지만 이전의 힘과 활기를 잃어버렸다. 정조시대 중반에 절정을 구가했던
문화와 예술은 정조대 후반, 정조의 서거와 함께 급속히 변화해 갔다. 조선
성리학에 기반하였던 진경문화는 자신감을 잃은 채 조락하고 북학문화가 풍
미하게 되었으며, 천주학을 필두로 서양문물이 점차 큰 영향을 미치는 가운
데 조선의 전통문화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