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원정은 임하면 추목리 다리골에 있는데 경주이씨 평리공파(요자구자) 제사이다.
해창 송기식님, 이목현님, 김홍락님의 모원정기가 걸려 있다.
慕原亭記
日月山南走爲北臺山, 復北折數百里爲橋洞山, 又起伏爲藏龜山, 東都李氏累世之藏在焉. 麒榮山在南而爲几案, 臨河江在北而爲衿帶也. 自參議公肇基于斯數百年, 子姓甚繁衍, 以耕讀爲世規, 或官冕爲榮耀, 或搬移立門戶, 其盛矣哉. 不有積蔭之久, 垂裕之厚, 何以得此. 歲丁卯春, 作亭於橋洞山下, 以參議公墓所爲最尊位故也. 乃爲餕禮昭穆之所, 華枝公使人命基植而問名, 且責以記其事. 余亦自出家後人, 實有事爲榮, 而顧責非其人, 累辭不獲, 乃名以慕原, 解之曰, 使爲諸公後者, 能繼其志述其事, 省楸而慕陟降之靈, 求其積累之原, 登亭而慕肯構之義, 求其苦誠之原, 安逸而慕勞得之原, 窮乏而慕懼墜之原, 疏而慕祖宗之原, 遠而慕吳中之原, 世世慕其慕而慕之, 人人原其原而原之, 其將原之不窮, 而慕之悠遠. 是亭之設, 受益爲大, 況不朽亭之道, 亦在此乎? 且聞是亭之後也, 百族一心 傾囊橐而不知苦, 極腁胝而不知勞, 此非孝悌之心油然而生者不可能, 所謂本立而道生者也. 且使聞風者欽仰, 亭之有聲也, 行過者肅敬, 亭之有色也, 人效則而錫其類者, 亭之香臭, 族會合而盡其歡者, 亭之有滋味也, 聲色臭味具焉, 則非華榭墨客遊賞之比, 豈徒爲李氏賀, 其亦有關於世道歟. 乃頌曰, 維天有理, 萬殊之原, 維人有祖, 萬孫之原, 陟降如在, 楸溪之原, 顧名義存, 是慕之原.
鎭川 宋基植 記
慕(모)原(원)亭(정)記(기)
日(일)月(월)山(산)南(남)走(주)爲(위)北(북)薹(대)山(산) 復(부)北(북)折(절)數(수)百(백)里(리)爲(위)橋(교)洞(동)山(산) 又(우)起(기)伏(복)爲(위)藏(장)區(구)山(산) 東(동)都(도)李(이)氏(씨)累(누)世(세)之(지)藏(장)在(재)焉(언) 麒(기)靈(령)山(산)在(재)南(남)而(이)爲(위)几(궤)案(안) 臨(임)河(하)江(강)在(재)北(북)而(이)爲(위)衿(금)帶(대)也(야) 自(자)參(참)議(의)公(공)肇(조)基(기)于(우)斯(사)數(수)百(백)年(년) 子(자)孫(손)甚(심)繁(번)衍(연) 以(이)耕(경)讀(독)爲(위)世(세)規(규) 或(혹)冠(관)冕(면)爲(위)榮(영)耀(요) 或(혹)搬(반)移(이)立(입)門(문)戶(호) 其(기)盛(성)矣(의)哉(재) 不(불)有(유)積(적)蔭(음)之(지)久(구)垂(수)裕(유)之(지)厚(후) 何(하)以(이)得(득)此(차) 歲(세)丁(정)卯(묘)春(춘) 作(작)亭(정)於(어)橋(교)洞(동)山(산)下(하) 爲(위)餕(준)禮(예)昭(소)穆(목)之(지)所(소) 乃(내)名(명)之(지)曰(왈)慕(모)原(원) 使(사)升(승)榮(영)命(명)基(기)植(식)而(이)請(청)記(기)其(기)事(사) 余(여)亦(역)自(자)出(출)家(가)後(후)人(인) 屢(누)辭(사)而(이)不(불)獲(획)命(명) 遂(수)接(접)狀(장)而(이)解(해)之(지)曰(왈) 使(사)爲(위)諸(제)公(공)後(후)者(자) 能(능)繼(계)其(기)志(지)述(술)其(기)事(사) 省(성)楸(추)而(이)慕(모)陟(척)降(강)之(지)靈(령) 求(구)其(기)積(적)累(누)之(지)原(원) 登(등)亭(정)而(이)慕(모)肯(긍)構(구)之(지)義(의) 求(구)其(기)苦(고)誠(성)之(지)原(원) 安(안)逸(일)而(이)慕(모)勞(노)得(득)之(지)原(원) 窮(궁)乏(핍)而(이)慕(모)懼(구)墜(추)之(지)原(원) 疎(소)而(이)慕(모)祖(조)宗(종)之(지)原(원) 遠(원)而(이)慕(모)吳(오)中(중)之(지)原(원) 世(세)世(세)慕(모)其(기)慕(모)而(이)慕(모)之(지) 人(인)人(인)原(원)其(기)原(원)而(이)原(원)之(지) 其(기)將(장)原(원)之(지)不(불)窮(궁) 而(이)慕(모)之(지)悠(유)遠(원) 是(시)亭(정)之(지)設(설) 受(수)益(익)爲(위)大(대) 况(황)不(불)朽(후)亭(정)之(지)道(도) 亦(역)在(재)此(차)乎(호) 且(차)聞(문)是(시)亭(정)之(지)役(역)也(야) 百(백)族(족)一(일)心(심) 傾(경)囊(낭)索(삭)而(이)不(부)知(지)苦(고) 極(극)胼(변)胝(지)而(이)不(부)知(지)勞(노) 此(차)非(비)孝(효)悌(제)之(지)心(심)油(유)然(연)而(이)生(생)者(자) 不(불)可(가)能(능) 本(본)立(립)而(이)道(도)生(생)者(자)也(야) 且(차)使(사)聞(문)者(자)欽(흠)仰(앙) 亭(정)之(지)有(유)聲(성)也(야) 行(행)過(과)者(자)肅(숙)敬(경) 亭(정)之(지)有(유)色(색) 人(인)效(효)則(즉)而(이)錫(석)其(기)類(류)者(자) 亭(정)之(지)有(유)香(향)臭(취)也(야) 族(족)會(회)合(합)而(이)盡(진)其(기)歡(환)者(자) 亭(정)之(지)有(유)滋(자)味(미)也(야) 聲(성)色(색)臭(취)味(미)四(사)者(자)且(차)焉(언) 則(칙)非(비)華(화)樹(수)墨(묵)客(객)遊(유)賞(상)之(지)比(비) 豈(기)徒(도)爲(위)李(이)氏(씨)賀(하) 其(기)亦(역)有(유)關(관)於(어)世(세)道(도)歟(여) 乃(내)頌(송)曰(왈) 維(유)天(천)有(유)理(리)萬(만)殊(수)之(지)原(원) 維(유)人(인)有(유)祖(조)萬(만)孫(손)之(지)原(원) 陟(척)降(강)如(여)在(재)楸(추)溪(계)之(지)原(원) 顧(고)則(즉)義(의)存(존)是(시)慕(모)之(지)原(원)
鎭(진)川(천) 宋(송)基(기)植(식) 記(기)
모원정기(慕原亭記)
송기식(宋基植) 찬(撰), 황만기(黃萬起) 역(譯)
일월산(日月山)이 남쪽으로 달려 북대산(北臺山)이 되고 다시 북쪽으로 몇 백 리 꺾이어 교동산(橋洞山)이 되며 또 기복(起伏)하여 장구산(藏區山)이 되는데, 경주이씨(慶州李氏)가 몇 대 동안 은거한 곳이다. 기령산(麒靈山)이 남쪽에 있어 궤안(几案)이 되고, 임하강(臨河江)이 북쪽에 있어 요해지가 된다. 참의(參議)공이 이곳에 터를 잡은 뒤부터 몇백 년 동안 자손들이 매우 번창하였는데, 농사짓고 독서하는 것을 대대로 규범으로 여겼다. 어떤 이는 벼슬을 하여 영광스럽게 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터를 옮겨 문호를 세우기도 하였으니, 참으로 성대하도다. 조상이 음덕을 오래 쌓아 후손들에게 넉넉하게 도타운 복을 내리지 않고서야 어찌 이곳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정묘년(1927) 봄에 교동산(橋洞山) 아래에 정자를 지었는데 제사를 받드는 장소로 삼고자 하였는데, 곧 이를 모원정(慕原亭)이라 하였다. 승영(升榮)이를 시켜 나에게 그 일을 기록해 줄 것을 청하였다. 나 또한 후배로서 진실로 일을 맡는 것이 영광스럽지만 그 적임자가 아니기에 몇 차례 사양했지만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행장을 접해 이를 풀이하기를,
만약 공의 후손들로 하여금 능히 조상의 뜻을 잇고 조상의 일을 잘 따르게 한다면 성묘를 하면서는 오르내리는 신령을 추모하고 대대로 쌓은 근원을 구할 것이고, 정자에 올라서는 정자를 지은 뜻을 추모하고 힘들게 이룬 근원을 구할 것이며, 편안할 적에는 수고롭게 쌓은 근원을 추모할 것이고, 궁핍할 적에는 선조의 유업을 실추시킬까 두려워한 근원을 추모할 것이며, 서먹할 적에는 조종(祖宗)의 근원을 추모하고, 멀리 떨어져 있을 적에는 오중(吳中)의 근원을 추모하게 될 것이다. 대대로 그 조상을 훌륭한 조상으로 여기면서 추모하고, 사람마다 그 뿌리를 아름다운 근원으로 여기며 이를 근원으로 생각한다면, 그 장차 근원이 궁핍하지 않고 추모함이 영원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정자의 건립이 더욱 위대한 일인 것이다. 게다가 정자를 영원히 유지할 방법이 또한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또한 이 정자를 지은 일을 들으니 모든 종족이 한마음으로 합심하여 곳간을 털어도 힘든 줄을 모르고 발에 굳은살이 박혀도 수고로운 줄을 몰랐으니, 효성스러운 마음이 뭉클하게 일어난 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었을 것이니, 이른바 “근본이 확립되면 도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또한 풍모를 듣는 자로 하여금 흠모하게 하니 정자에 성(聲)이 있는 것이고, 지나가는 자들로 하여금 엄숙히 공경하게 하니 정자에 색(色)이 있는 것이며, 사람들이 본받으며 그 무리들에게 알려주게 되니 정자에 향취(香臭)가 있는 것이고, 종족들이 모여 그 기쁨을 다하게 하니 정자에 자미(滋味)가 있는 것이다. 소리와 색과 향기와 맛이 갖추어졌으니 화려한 정자에 시인 묵객들이 수창하고 유상(遊賞)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니, 어찌 경주이씨(慶州李氏)만을 위해 축하할 일이겠는가. 이것 또한 세도(世道)에 관계되는 바이다. 이에 송축(頌祝)한다.
하늘에 이치가 있으면 만물에 근원이 있게 되며
사람에게 조상이 있으면 자손들이 근원이 있게 된다.
오르내리는 영혼이 있으니 추계의 근원이 있게 되었고
정자의 명칭과 뜻이 있으니 추모하는 근원이 있는 것이다.
慕原亭記
奇龍之山 西走北馳 分作十數里 更回合蟠結 開一 洞府 曰楸木 洞之南有小亭 蓋古處士 諱堯九公之所賞粧點 而其裔孫華賢 自醴泉龍山寓此 而以包林瑞羽 承堯九公之遺訓輪議擧族 鳩財聚材 而肯構者也 族氏世家此洞 淑氣鍾毓 遂隱德不仕 以文學爲世美 顧命與時違 進不能有爲王國 退自券懷 恬靜高潔 自託於山厓水曲 以爲潛修晦養之地 迨所謂不拔之潛龍爲君子簻軸之所者 豈非有待而然歟 圭出徵記於予 予雖不文 族親之地誼 不敢終辭 遂作而歎曰 有矣哉 誠之無所不致 而天之無時不復也 夫天下古今 經生學士 結塵湖山 嘯咏自適者 不知其數 而數世之後存者幾希 是固有關於氣數之天然 天道無常 惟人事之是應 苟不自誠 而坐見荒原廢礎 誘之曰 天固無如之何 則非知道者 雖然肯構之道 不但於亭宇而己 惟繼志述事之是尙 使居是亭者 究祖先之所以立亭者之體 當日隱求之志 孝友而立其本 經史而廣其知 學明進德 彬彬成就 則其於繼述也幾矣 堂凡六間 東西爲室 中爲堂 退而爲軒 可以爲納凉棲息之所矣 至於煙汀月沙鳥獸魚泳之獻狀不一者 必待吾心明暢 塵機淨盡 而有翫象自得之眞 徒爲騷人韻士一時景物役而己 則抑來圭出 性淳而質美 不以余言爲誣也 遂立亭者之由 以爲之記
庚戌 南至節 族孫穆鉉 敬書
慕(모)原(원)亭(정)記(기)
奇(기)龍(룡)之(지)山(산) 西(서)走(주)北(북)馳(치) 分(분)作(작)十(십)數(수)里(리) 更(갱)回(회)合(합)蟠(반)結(결) 開(개)一(일)洞(동)府(부) 曰(왈)楸(추)木(목) 洞(동)之(지)南(남)有(유)小(소)亭(정) 蓋(개)古(고)處(처)士(사)諱(휘)堯(요)九(구)公(공)之(지)所(소)賞(상)粧(장)點(점) 而(이)其(기)裔(예)孫(손)華(화)賢(현) 自(자)醴(예)泉(천)龍(용)山(산)寓(우)此(차) 而(이)以(이)包(포)林(림)瑞(서)羽(우) 承(승)堯(요)九(구)公(공)之(지)遺(유)訓(훈) 輪(윤)議(의)擧(거)族(족) 鳩(구)財(재)聚(취)材(재) 而(이)肯(긍)構(구)者(자)也(야) 族(족)氏(씨)世(세)家(가)此(차)洞(동) 淑(숙)氣(기)鍾(종)毓(육) 遂(수)隱(은)德(덕)不(부)仕(사) 以(이)文(문)學(학)爲(위)世(세)美(미) 顧(고)命(명)與(여)時(시)違(위) 進(진)不(부)能(능)有(유)爲(위)王(왕)國(국) 退(퇴)自(자)卷(권)懷(회) 恬(념)靜(정)高(고)潔(결) 自(자)託(탁)於(어)山(산)厓(애)水(수)曲(곡) 以(이)爲(위)潛(잠)修(수)晦(회)養(양)之(지)地(지) 迨(태)所(소)謂(위)不(부)拔(발)之(지)潛(잠)龍(룡)爲(위)君(군)子(자)薖(과)軸(축)之(지)所(소)者(자) 豈(기)非(비)有(유)待(대)而(이)然(연)歟(여) 圭(규)出(출)徵(징)記(기)於(어)予(여) 予(여)雖(수)不(부)文(문) 族(족)親(친)之(지)地(지)誼(의) 不(부)敢(감)終(종)辭(사) 遂(수)作(작)而(이)歎(탄)曰(왈) 有(유)矣(의)哉(재) 誠(성)之(지)無(무)所(소)不(부)致(치) 而(이)天(천)之(지)無(무)時(시)不(부)復(복)也(야) 夫(부)天(천)下(하)古(고)今(금) 經(경)生(생)學(학)士(사) 結(결)廬(려)湖(호)山(산) 嘯(소)咏(영)自(자)適(적)者(자) 不(불)知(지)其(기)數(수) 而(이)數(수)世(세)之(지)後(후)存(존)者(자)幾(기)希(희) 是(시)固(고)有(유)關(관)於(어)氣(기)數(수)之(지)天(천)然(연) 天(천)道(도)無(무)常(상) 惟(유)人(인)事(사)之(지)是(시)應(응) 苟(구)不(불)自(자)誠(성) 而(이)坐(좌)見(견)荒(황)原(원)廢(폐)礎(초) 誘(유)之(지)曰(왈) 天(천)固(고)無(무)如(여)之(지)何(하) 則(칙)非(비)知(지)道(도)者(자) 雖(수)然(연)肯(긍)構(구)之(지)道(도) 不(불)但(단)於(어)亭(정)宇(우)而(이)已(이) 惟(유)繼(계)志(지)述(술)事(사)之(지)是(시)尙(상) 使(사)居(거)是(시)亭(정)者(자) 究(구)祖(조)先(선)之(지)所(소)以(이)立(입)亭(정)者(자)之(지)體(체) 當(당)日(일)隱(은)求(구)之(지)志(지) 孝(효)友(우)而(이)立(입)其(기)本(본) 經(경)史(사)而(이)廣(광)其(기)知(지) 學(학)明(명)進(진)德(덕) 彬(빈)彬(빈)成(성)就(취) 則(칙)其(기)於(어)繼(계)述(술)也(야)幾(기)矣(의) 堂(당)凡(범)六(육)間(간) 東(동)西(서)爲(위)室(실) 中(중)爲(위)堂(당) 退(퇴)而(이)爲(위)軒(헌) 可(가)以(이)爲(위)納(납)凉(양)棲(서)息(식)之(지)所(소)矣(의) 至(지)於(어)煙(연)汀(정)月(월)沙(사)鳥(조)獸(수)魚(어)泳(영)之(지)獻(헌)狀(상)不(부)一(일)者(자) 必(필)待(대)吾(오)心(심)明(명)暢(창) 塵(진)機(기)淨(정)盡(진) 而(이)有(유)翫(완)象(상)自(자)得(득)之(지)眞(진) 徒(도)爲(위)騷(소)人(인)韻(운)士(사)一(일)時(시)景(경)物(물)役(역)而(이)已(이) 則(칙)抑(억)來(래)也(야)圭(규)出(출) 性(성)淳(순)而(이)質(질)美(미) 不(부)以(이)余(여)言(언)爲(위)誣(무)也(야) 遂(수)立(입)亭(정)者(자)之(지)由(유) 以(이)爲(위)之(지)記(기)
庚(경)戌(술) 南(남)至(지)節(절) 族(족)孫(손)穆(목)鉉(현) 敬(경)書(서)
慕(모)原(원)亭(정)記(기)
이목현 찬, 황만기 역
기룡산(奇龍山)은 서쪽으로 달리고 북쪽으로 달려 수십 리를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져서 하나의 동부(洞府)를 열었는데 추목(楸木)이라 한다. 동부의 남쪽에 작은 정자가 있으니 대개 고(故) 처사(處士) 휘(諱) 요구(堯九) 공이 장점(粧點)하던 곳이다. 그의 후손 화현(華賢)이 예천 용문에서 이곳에 우거(寓居)하였는데, 포림(包林) 서우(瑞羽)가 요구(堯九) 공의 유훈을 받들기 위해 모든 종족들과 논의하여 재력을 모으고 목재를 모아서 정자를 지은 것이다. 종족들이 대대로 이곳에 살면서 맑은 기운을 기르며 마침내 덕을 숨기며 벼슬하지 않으면서 문학(文學)을 아름답게 여겼다. 다만 운명이 시대와 어긋나서 벼슬길에 나아가도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전원으로 물러나 스스로 마음을 단념하고서 고요하고 고결하게 스스로를 산자락과 물굽이에 의탁하여 수양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이른바 ‘뜻이 확고하여 뺏을 수 없는 잠룡이 군자가 은거하는 장소로 삼았다’는 것이 어찌 기다림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규출(圭出)이 나에게 기문을 요구하였다. 내가 비록 문장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족친의 입장에서 감히 끝까지 사양할 수 없어서 마침내 기문을 지으면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훌륭하도다. 정성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고 운수가 회복되지 않은 때가 없도다.”라고 하였다.
무릇 천하 고금에 경서를 익히는 유생과 학문하는 선비가 호산(湖山)에 집을 짓고서 시를 읊조리며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은 몇 명인지 그 숫자를 모르지만 몇 대 뒤에도 그렇게 하는 자는 거의 드물다. 이것은 진실로 운수의 자연스러움에 관계된다. 하늘의 도는 일정함이 없어서 오직 인사(人事)만이 여기에 응하게 되므로, 진실로 스스로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앉아서 근원이 황폐해짐을 보게 될 것이다.
이들을 권면하기를, “하늘은 진실로 어찌할 수가 없으니 도를 아는 자가 아니면 누가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조상을 뜻을 잇는 방법은 정자를 짓는 것에만 있을 뿐만이 아니고, 오직 계지(繼志)와 술사(述事)를 숭상한다. 이 정자에 거처하는 사람에게 선조(先祖)가 정자를 지은 이유와 당시 은거한 뜻을 궁구하게 하고, 효우(孝友)로써 그 근본을 세우고 경사(經史)로써 그 지식을 넓히게 하며, 강학하여 도를 밝히고 덕을 나아가서 밝고 빛나게 성취하게 한다면 계술(繼述)은 거의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자는 모두 6칸이다. 동서(東西)는 실(室)로 하였고 가운데는 당(堂)으로 하였으며 남쪽으로 물려서 헌(軒)으로 하니, 시원하여 지낼만한 곳으로 삼을 만하였다. 안개 낀 물가와 달빛 비친 모래, 조수(鳥獸), 헤엄치는 물고기까지도 모습이 한결같지 않은 것은 반드시 우리들의 마음이 맑고 밝아 속세의 나쁜 기운이 죄다 깨끗해져서 완상함에 스스로 참됨을 얻기를 기다린 것이지, 한갓 시인 묵객들을 위한 한순간의 경물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니다. 한편 기문을 청하러 온 규출(圭出)은 성품이 순하고 자질이 아름다워서 내 말을 가지고 속이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정자를 세운 이유로 기문을 짓는다.
경술년(1910) 남지절(南至節)에 족손(族孫) 목현(穆鉉)이 공경히 쓰다.
慕原亭記
在昔仁陵之世 有李進士楸山公諱井英 遂隱而不仕 嗣胤通政公諱堯九 自襄陽移永嘉之楸溪里 盖冒先號而名其地也 自是姓孫 世守隱德 以儒術相傳 數百年 不求聞達於世間有察訪寢郎及賢士者 幾人 亦不汲汲於名途也 然所居山深而地陜 雲仍愈繁而愈析 愈分而愈貪 猶力穡安命 其奉先之誠睦族之規 比饒封時尤密 歲乙丑冬昭穆之會 將燕毛焉 小長咸曰 甄氏之思亭 固可慕效也 乃戶醵而箕欽 凡斧鉅材甓 皆取諸宮中而用之 且百族子來 不月而成 比諸豪奢之役 功省而事迅 力殘而心一也 人孰不感歎哉 其制六架 東西爲室 中爲堂 南退而畵爲軒 甚奧敞凉 燠之宜也 且種竹於後 灌花於前 有守廚而護之於是溪山改觀 行路起敬 始知李氏之隱德 有光於百世也 盖以其先世之先壟 在左右而取報本之義也 其幹事者圭燮 老而沒也 甲戌春圭琇 述其事 欲壽其亭 囑余而書之 余今老矣 登臨之無由 而窃感事其 修其顚末 且勗之曰 陳後山所謂視其美以爲勸 視其惡以爲戒者 爲君誦之 是爲之記
通政大夫 前行弘文館侍講兼知制誥 聞韶 金鴻落記
慕(모)原(원)亭(정)記(기)
在(재)昔(석)仁(인)陵(능)之(지)世(세) 有(유)李(이)進(진)士(사)楸(추)山(산)公(공)諱(휘)井(정)英(영) 遂(수)隱(은)而(이)不(불)仕(사) 嗣(사)胤(윤)通(통)政(정)公(공)諱(휘)堯(요)九(구) 自(자)襄(양)陽(양)移(이)永(영)嘉(가)之(지)楸(추)溪(계)里(리) 盖(개)冒(모)先(선)號(호)而(이)名(명)其(기)地(지)也(야) 自(자)是(시)姓(성)孫(손) 世(세)守(수)隱(은)德(덕) 以(이)儒(유)術(술)相(상)傳(전) 數(수)百(백)年(년) 不(불)求(구)聞(문)達(달)於(어)世(세)間(간) 有(유)察(찰)訪(방)寢(침)郎(낭)及(급)賢(현)士(사)者(자) 幾(기)人(인) 亦(역)不(불)汲(급)汲(급)於(어)名(명)途(도)也(야) 然(연)所(소)居(거)山(산)深(심)而(이)地(지)陜(협) 雲(운)仍(잉)愈(유)繁(번)而(이)愈(유)析(석) 愈(유)分(분)而(이)愈(유)貧(빈) 猶(유)力(역)穡(색)安(안)命(명) 其(기)奉(봉)先(선)之(지)誠(성)睦(목)族(족)之(지)規(규) 比(비)饒(요)封(봉)時(시)尤(우)密(밀) 歲(세)乙(을)丑(축)冬(동)昭(소)穆(목)之(지)會(회) 將(장)燕(연)毛(모)焉(언) 少(소)長(장)咸(함)曰(왈) 甄(견)氏(씨)之(지)思(사)亭(정) 固(고)可(가)慕(모)效(효)也(야) 乃(내)戶(호)醵(갹)而(이)箕(기)欽(흠) 凡(범)斧(부)鉅(거)材(재)甓(벽) 皆(개)取(취)諸(제)宮(궁)中(중)而(이)用(용)之(지) 且(차)百(백)族(족)子(자)來(래) 不(불)月(월)而(이)成(성) 比(비)諸(제)豪(호)奢(사)之(지)役(역) 功(공)省(성)而(이)事(사)迅(신) 力(력)殘(잔)而(이)心(심)一(일)也(야) 人(인)孰(숙)不(불)感(감)歎(탄)哉(재) 其(기)制(제)六(육)架(가) 東(동)西(서)爲(위)室(실) 中(중)爲(위)堂(당) 南(남)退(퇴)而(이)畵(화)爲(위)軒(헌) 甚(심)奧(오)敞(창)凉(양) 燠(욱)之(지)宜(의)也(야) 且(차)種(종)竹(죽)於(어)後(후) 灌(관)花(화)於(어)前(전) 有(유)守(수)廚(주)而(이)護(호)之(지) 於(어)是(시)溪(계)山(산)改(개)觀(관) 行(행)路(로)起(기)敬(경) 始(시)知(지)李(이)氏(씨)之(지)隱(은)德(덕)有(유)光(광)於(어)百(백)世(세)也(야) 盖(개)以(이)其(기)先(선)世(세)之(지)先(선)壟(롱) 在(재)左(좌)右(우)而(이)取(취)報(보)本(본)之(지)義(의)也(야) 其(기)幹(간)事(사)者(자)圭(규)燮(섭) 老(노)而(이)沒(몰)也(야) 甲(갑)戌(술)春(춘)圭(규)琇(수) 述(술)其(기)事(사) 欲(욕)壽(수)其(기)亭(정) 囑(촉)余(여)而(이)書(서)之(지) 余(여)今(금)老(노)矣(의) 登(등)臨(임)之(지)無(무)由(유) 而(이)窃(절)感(감)其(기)事(사) 修(수)其(기)顚(전)末(말) 且(차)勗(욱)之(지)曰(왈) 陳(진)後(후)山(산)所(소)謂(위)視(시)其(기)美(미)以(이)爲(위)勸(권) 視(시)其(기)惡(악)以(이)爲(위)戒(계)者(자) 爲(위)君(군)誦(송)之(지) 是(시)爲(위)之(지)記(기)
通(통)政(정)大(대)夫(부) 前(전)行(행)弘(홍)文(문)館(관)侍(시)講(강)兼(겸)知(지)制(제)誥(고) 聞(문)韶(소) 金(김)鴻(홍)落(락)記(기)
모원정기
김홍락 찬, 황만기 역
옛날 인릉(仁陵) 시대에 진사(進士) 추산공(楸山公) 휘(諱) 정영(井英)이란 분이 있었는데, 마침내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통정공(通政公) 휘(諱) 요구(堯九)가 양양(襄陽)에서 안동(安東)의 추계리(楸溪里)로 이거(移居)하여 선친(先親)의 호(號)를 무릅쓰면서 그 땅을 명명하였다. 이로부터 자손들이 대대로 은덕을 지키면서 유술(儒術)을 서로 전하고 수백 년 동안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다. 간혹 찰방(察訪), 참봉(參奉) 및 현사(賢士)가 몇 사람 있었지만 또한 명달에 급급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는 곳의 산세가 깊고 지세가 협소하여 후손들이 더욱 번성할수록 더욱 갈라지고 더욱 분화될수록 더욱 가난하였으나 오히려 농사에 힘쓰면서 운명에 안주하였다. 선조를 받드는 정성과 친족과 화목하는 규칙은 풍요로울 때와 견주어 더욱 친밀하였다.
을축년(1925) 겨울에 제사의 모임을 거행하려고 할 적에 소장(少長)들이 모두 “진씨(甄氏)의 사정(思亭)은 진실로 흠모하여 본받을 만합니다.” 하였다. 이에 집집마다 갹출하여 흠모하는 정성을 기울였다. 무릇 도끼와 톱과 목재와 기와는 모두 궁중에서 가져다가 사용하였다. 또한 많은 친족들이 와서 한 달도 안 되어 완성하였다. 호사(豪奢)스러운 일에 비해 공은 적게 들고 일은 빨리 마쳤으나 힘이 미약했으나 마음은 일치하였으니, 누군들 감탄하지 않으리오
그 제도는 6칸으로 동서쪽은 방으로 삼고 가운데는 당(堂)으로 삼았으며 남쪽은 약간 물려 헌(軒)으로 삼으니, 매우 따뜻하고 시원하여 깊숙이 자리한 장소가 노닐기에 적당하였다. 또한 뒤에는 대나무를 심고 앞에는 꽃에 물을 주어 집을 지키고 보호하게 하였다. 이에 산천이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고 행인들도 공경함을 일으켰다. 비로소 이씨(李氏)의 은덕이 백세토록 빛나게 됨을 알게 되었다.
갑술년(1934) 봄에 규수(圭琇)가 그 일을 기술하여 그 정자를 오래도록 보존하려고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지금 늙어서 정자에 오를 수가 없으나, 적이 그 일을 감동하여 그 전말을 기록하여 권면하기를, “진후산(陳后山)이 말한 ‘그 훌륭한 것을 보고 더욱 잘하려고 힘쓰고 나쁜 것을 보면 경계하도록 하려는 것이다.’는 것을 그대를 위해 송독하며 이에 기문을 짓는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전행(前行) 홍문관시강(弘文館侍講) 겸 지제교(知製敎) 문소(聞韶) 김홍락(金鴻洛)이 기문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