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위상제님의 화천과 박한경도전의 임종과정 비교
양위 상제님은 이미 도수에 따라 어느 때 화천하시는지를 당연히 알고 계셨으며 자연스럽게 화천 하셨다. 하지만 박한경 도전은 더 오래 살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하였다. 이는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나 천지공사를 보시는 진인(대두목)으로 보기에는 전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이제 양위상제님의 화천과 박도전의 임종과정을 비교하면서 박도전의 정체를 파악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1. 구천상제님의 화천과정 경석으로 하여금 양지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 강 일순 호남 서신 사명(全羅道古阜郡優德面客望理姜一淳湖南西神司命)이라 쓰게 하고 그것을 불사르게 하셨다. 이 때에 신원일이 상제께 『천하를 속히 평정하시기 바라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내가 천하사를 도모하고자 지금 떠나려 하노라』하셨다.(전경 행록 5장 33절) 이십사일 이른 아침에 경석을 불러 흘겨보시면서 “똑똑치도 못한 것이 무슨 정가이냐.” 고 나무라셨도다. (전경 행록 5장 34절) 상제께서 수박에 소주를 넣어서 우물에 담구었다가 가져오게 하셨도다. 그 수박을 앞에 놓고 가라사대 “내가 이 수박을 먹으면 곧 죽으리라. 죽은 후에는 묶지도 말고 널 속에 그대로 넣어 두는 것이 옳으리라.”하셨도다. 상제께서 약방 대청에 앉아 형렬에게 꿀물 한 그릇을 청하여 마시고 형렬에게 기대어 가는 소리로 태을주를 읽고 누우시니라. 이날 몹시 무더워 형렬과 종도들이 모두 뒤 대밭가에 나가 있었도다. 응종이 상제께서 계신 방이 너무 조용하기에 이상한 마음이 들어 방을 들여다보니 상제께서 조용히 누워 계시는데 가까이 가서 자기의 뺨을 상제의 용안에 대어보니 이미 싸늘히 화천(化天)하신지라. 응종이 놀라서 급히 화천하심을 소리치니 나갔던 종도들이 황급히 달려와서 ‘상제의 돌아가심이 어찌 이렇게 허무하리오’ 하며 탄식하니라. 갑자기 뭉게구름이 사방을 덮더니 뇌성벽력이 일고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화천하신 지붕으로부터 서기가 구천에 통하는도다. (전경 행록 5장 35절)
2. 옥황상제님의 화천과정 전경의 내용으로는 미흡한 점이 많아 태극진경을 참고하였다. 대순진리회 전경에서 도주께서 정유년 십이월 이십일일 자시부토 무술년 삼월삼일까지 도장에서 불면불휴하고 백일도수를 마치시니라. 오일에 심히 괴로워 하시므로 한의사와 양의사를 불러 왔으되“때가 늦었도다.”고 이르시니라. 도주께서 이튿날 미시에 간부 전원을 문밖에 시립케 한 후 도전 박한경을 가까이 하고 도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도의 운영 전반을 맡도록 분부를 내리고 “오십년 공부 종필이며 지기금지사월래가 금년이라.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 고 말씀하시고 다시 문 밖을 향하여 도적놈을 세 번 부르시더니 화천하시니라. (교운 2장 66절) 태극도의 태극진경에서 이달 23일 조회시에 상제님께서 박한경에게 하문하시기를 "네가 지방 일을 안 보아도 네 방면 사업에 지장이 없으렷다." 하시니 한경이 "한 달만 내려가서 정리하면 되겠나이다." 하고 사뢰니라. 상제님께서 "너를 도전으로 임명하노라. 앞으로 도전은 종전과 같이 나의 시봉만 하는 직책이 아니라, 도중사를 책임하여야 하리니 도무(道務)에 충실하도록 하라." 하명하시고 오치국에게 "너를 도전에서 해임함은 과오가 있음이 아니라 직제를 변경한 연유니라." 하시니라. (태극진경 9장 46절) 이날 낮에 상제님께서 상급임원들을 시좌하게 하시고 한경 치국의 도전 이 취임 배례를 받으시니라. 이때 치국이 부복하고 사뢰기를 "배움이 없는 제가 도전직을 받드는 동안 존전에 불충부실(不忠不實)하였사오니 황송무지이옵나이다." 하니 말씀하시기를 "거듭 말하거니와 네게 허물이 있어 해임함이 아니니라. 네가 그동안 맡았던 도전의 직무는 나를 시봉하는 일뿐이었으나 앞으로 한경이 맡을 도전은 시봉일 뿐만 아니라, 모든 원(院)들의 도무 전반을 책임 하여야 하므로 교체함이니 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도 도중사에 성충(誠忠)을 다하라." 하시니라. (태극진경 9장 47절) 이날 밤 초경에 회룡재에서 학정 김영하와 도정영대(道庭靈臺) 시봉 이창로가 소관 업무 관계로 시좌하였을 때 숭도부인께서 상제님께 "한경의 위인이 나약하여 도중사 전반을 책임하는 도전으로는 미흡하지 않나이까?" 하고 사뢰니 말씀하시기를 "나도 그러함은 아오. 그러나 협의회가 있으니 부인은 과념(過念)하지 마시오. 사람을 쓰는데 소인인 줄 모르고 쓰면 실패하지만 알고 쓰면 쓰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소. 상제님 앞에도 경석(京石)이 있지 않았소?" 하시니라. (태극진경 9장 49절) 이날 밤에 박중하가 여쭈기를 "이 번에 임명하신 도전의 직무는 종전의 시봉원 책임자와 어떻게 다르옵니까?" 하니 "전(前) 도전은 시봉원 수임(首任)이 주무였으나 신 도전은 시봉원 수임 겸 도중 각 원의 업무 전반을 책임지되 의결에 따르면 되느니라." 하시니라. 중하가 종전의 제도와는 상이한 말씀이므로 다시 "그러하오면 어떻게 되겠나이까?" 하니 "방촌지목(方寸之木)도 가사고어잠루(可使高於岑樓)니라." 하시니라. (태극진경 9장 51절) 중하가 어의를 더욱 깨닫지 못함을 사뢰니 "근본을 헤아리지 않고 그 끝만을 보면 천마산 꼭대기에 세운 숟가락이 더 높아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니라. 모든 임원이 권한만 알고 의무를 모르면 범람(汎濫)하여 본말이 전도되기 쉬우니 너는 협의회 의장으로서 한경이 그리 되지 않도록 책선(責善)하라." 하시니라. (태극진경 9장 52절) 28일에 상제님께서 1957년 11월 18일 시학공부 시작시에 설석하셨던 백일공부를 마치신 다음 중궁에 임원들을 시좌시키시고 엄숙히 명하시기를 『이제 내가 이 세상에서 볼 도수는 모두 마쳤으니 이로써 종필(終畢)이니라. 앞으로 남은 일은 오직 너희들이 나의 50년공부종필(五十年工夫終畢)로써 짜놓은 진법의 법방을 수행하여 대도를 성취함에 있느니라.』하시니라. (태극진경 9장 57절) 이어 가르치시기를『내 이제 구천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도수를 풀었다함을 너희들이 바로 깨달아 아느냐? 때가 이르면 나도 인간의 육신을 벗고 옥경(玉京)으로 돌아가리니 진실로 이 말을 헛으로 듣지 말지니라. 이미 지기금지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요, 운래청룡시사월(運來靑龍是四月)이니라.』하시니라. (태극진경 9장 58절) 28일에 상제님께서 1957년 11월 18일 시학공부 시작시에 설석하셨던 백일공부를 마치신 다음 중궁에 임원들을 시좌시키시고 엄숙히 명하시기를 『이제 내가 이 세상에서 볼 도수는 모두 마쳤으니 이로써 종필(終畢)이니라. 앞으로 남은 일은 오직 너희들이 나의 50년공부종필로(五十年工夫終畢)써 짜놓은 진법의 법방을 수행하여 대도를 성취함에 있느니라.』하시니라. 이어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 『50년공부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며 지기금지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니라. 나는 가노니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나의 법방과 사업을 푼각도 어김없이 내가 행하던 대로 잘 행하여 나아가되 일심으로 믿고 닦아서 다시 만나자.』 하시며 일동으로부터도 다짐을 받으시고 와석(臥席)하시니라. (태극진경 9장 70절) 잠시 후에 상제님께서 와석하신 채 어수를 좌우로 흔드셔서 내쫓듯 하시며 "도적놈 내쫓아라." 하시고 이를 수차 반복하시므로 임원들이 "여기에는 도적이 없나이다." 하고 상고하니 "아니다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때 뒷자리에 부복했던 김재복, 김용화, 오경식, 이인호 등이 물러가므로 존전에서 박한경이 "이제는 없나이다."하고, 숭도부인께서도 "만수도인(萬修道人)을 어이 하시려고 이러시나이까?" 하시니 급히 기좌(起坐)하셔서 정색하시며 "도인들은 염려 없소, 내가 해 놓은 대로 하면 되오." 하시고, 노기로 어안에서 화광(火光)을 발하시며 한경이 머리채를 잡아 여러 차례 흔드시다가 어수를 내리시고 다시 "도적놈, 도적놈!"을 반복하시며 와석하시니라. (태극진경 9장 71절) 상제님께서 하오 1시경 갑자기 호흡이 촉급하시므로 시측한 가족과 임원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니라. 이때 청봉이 댓돌에 내려가 오른손 무명지를 돌로 찧어서 선혈(鮮血)을 어구(御口)에 드리우니 호흡을 가다듬으시고 "도연(徒然)한 일을 하지 말라. 구천 알현의 시각만 늦어지느니라." 하시니라. (태극진경 9장 72절) 이로부터 30분 후에 "감나무골"을 분부하시며 호흡이 다시 촉급하시므로 비록 금하신 일이나, 재복이 창황한 가운데 최후의 구급방법으로 준비하여 숨겼던 강심제 주사를 놓아 드리려 하니, 상제님께서 어수로 "주사기를 달라"는 어의(御意)를 표하시므로 부득이 올려 드리자 그대로 방바닥에 엎으시니 파손 되니라. 이때 용성(龍聲)으로 "대강 대강" 하시는 옥음(玉音)과 함께 기식(氣息)을 거두시고 화천하시니, 이날이 도력기원50(단기 4291, 서기 1958)년 세차 무술(歲次戊戌) 음력 3월 초6일, 양력 4월 24일이고 일진은 신미(辛未), 시각은 을미(乙未)시인 하오 1시 37분이며 인세향수(人世享壽)는 64년이시니라. (태극진경 9장 73절) 박한경 도전의 임종 과정 (상도방면의 홈페이지에서 발췌) - 1995년 3월 중순경에 임원 연수 때문에 삼성 콘도에 있던 박도전은 병이 심해지자 순감을 부른다. 순감36명이 급히 삼성콘도로 와서 시료를 보았는데,24시간 쉬지 않고 교대로 1개월여를 계속 시료를 보았다. - 1995년 4월 20일경 박도전은 1개월여의 시료를 받은 뒤 병이 조금 가벼워지자, 토성 도장으로 돌아와서 계속 시료를 받으면서 토성도장 공사현장을 둘러보았다. 1995년 5월 4일 박도전은 병이 극히 심해지므로 임원들이 원주 기독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오후 3시경 원주 기독교 병원에 도착한 박도전은 11층 112병동에 입원 하였다. 원주기독병원에는 박도전의 손자가 의사로 근무 하고 있었는데 외과 인턴이었다. 6월20일경 병이 어느 정도 가벼워져 여주도장으로 돌아와 본부도장 아래별채에서 요양하였다. 1995년 11월경에 박도전의 지병이 더욱 깊어지자 원주 기독병원에 다시 입원을 하게 된다. 이때 수임원들은 정대진, 이유종, 김찬성, 정훈봉, 유경문, 전호덕, 손경옥, 박원균, 정인식 등 이었다. 수임원들은 순감을 시켜 박도전의 병을 계속 시료를 보게 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1996년 1월 23일( 음력: 1995년 1월 4일) 이날 새벽에 박도전이 의식 불명인 상태가 며칠간 계속 되어 왔고, 이제는 거의 소생 가능성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 병원에서 사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되면서 담당의사가 산소호흡기를 부착한 상태로 낮 12시경에 여주도장으로 옮겼으나, 오후 1시경에 사망한다. * 순감일지 이 일지는 박한경 도전의 시료를 보았던 어느 순감의 메모를 정리한 것이다. - 1995년 3월 11일 오전 9 시료 중 졸거나 다른 생각을 하면 ?전이 안 좋으심 절대 졸거나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졸려면 좀 자고 정신을 맑게 해서 보라 - 1995년 3월 13일 오후 11 나만 고생하고 여태 헛공부하고 헛 가르쳤다고 하시며 눈시울 적시심 - 1995년 3월 15일 새벽 4 인정머리가 하나도 없다고 서운해 하시고 걱정하심 - 1995년 3월 15일 오전 11 졸지 말고 잘 보라 하심. - 1995년 3월 16일 저녁 8 꼭 되니까 믿고 확신을 가지고 봐라. - 1995년 3월 17일 오전 10 잘 봐라 잘 보면 오래 안 걸리고 잘 안보면 오래 걸리고 고생하신다. - 1995년 3월 17일 오전 11 산명은 속이지 않는다. 너희가 한만큼 신명은 일하고 열어준다. - 1995년 3월 17일 오후 8 볼려면 열심히 보던지 아니면 그만 두자고 걱정하심. - 1995년 3월 18일 새벽 2시 다 졸고 있나 보다고 걱정하심. - 1995년 3월 18일 오전 6 차도가 없다고 안 되면 지금이라도 포기하자고 걱정하심. - 1995년 3월 24일 5:00 3월12일 침대생활 이후 기동을 전혀 못하심. 주무시는 자리 요로 바꿈 복수가 문제임 복수를 빨리 빼야겠다. 3층 전체 복수를 집중으로 빼면서 고환 부기 본다. 오장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정지되어 있다. 되면 되게 해주고 안 되면 지금이라도 포기하자 말미를 보겠다. ...중략
- 1995년 6월 20일 “순감은 시료할 때 나의 분신이다. 시료하면 그 병은 모두 나의 몸에 와서 없어진다. 그리고 나의 몸은 순감들의 정성으로 낫는다.” 라고 말씀하심. 그래서 절대 안되는 게 아니다. 꼭 되는데 믿음이 부족해서이다. 확신이 없는 것은 곧 나를 못 믿는 것이다. |
출처: 이제는 태극도로 귀의하여야 할 때이다 원문보기 글쓴이: 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