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왕기상 13:11-19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북이스라엘 첫 왕은 여로보암입니다. 성경은 그가 무대에 오를 때 그를 솔로몬의 신하로 소개합니다. 동시에 그의 어머니가 과부라고 콕 집어 밝힙니다. 성경에서 과부는 최 극빈층이자 취약계층입니다. 그렇지만 여로보암은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성장했음에도 당시 근동지역을 호령한 자국 왕 솔로몬 눈에 들 정도의 능력을 보였습니다. 이때 성경이 밝히는 여로보암의 능력은 ‘부지런함’입니다(열왕기상 11:28).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지런함은 사람에게 필요한 중요 덕목이지 않습니까. 큰 용사이기까지 했던 여로보암은 온 회중이 따를 만큼 신망과 지도력까지 있었습니다. 그는 실로 왕이 될만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는 후에 악한 왕의 대명사가 됩니다. 성경 독자들이 어렵지 않게 기억하는 후렴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열왕기상 15:34)”의 주인공이 되면서 말입니다.
이처럼 여로보암은 재위 기간 하나님 뜻과 반대되는 길을 걸었지만, 그가 다스린 북이스라엘은 그리 약한 나라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절반 이상이 그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는 분명 왕좌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부푼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치가 최고조에 이른 시점은 바로 그가 나라의 국경일, 절기를 선포하고 그날 열린 행사 무대 최상단에 선 그때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로보암과 북이스라엘에게 있어 축제였어야 할 그날, 왕은 큰 굴욕을 당하고 나라는 극심한 공포에 휩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왕을 저주하고 나라의 심판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공사 감독관 출신 왕이 만든 제단이 갈라지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어제 살핀 이 일은 결코 딱 10절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었고,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뒷이야기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들은 늙은 선지자(11-13절)
(11)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의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또 그가 왕에게 드린 말씀도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한지라
도심에서 벌어진 한바탕 소동이 잠시 진정되었을 때 성경은 장소를 한 가정집으로 옮깁니다. 거기에 새로운 등장인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한 늙은 선지자’입니다. 성경 기자는 그의 이름은 소개하지 않지만, 그가 고령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가 아들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나온 이 장면은 성경 독자들에게 기시감을 선사합니다. 이때 본문과 어렴풋이 겹치는 장면의 주인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사무엘상 초반에 나오는 늙은 제사장 엘리와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그리고 이는 갑자기 등장한 이 늙은 선지자의 정체를 이해하는 힌트가 됩니다.
그가 선지자로 소개되는 건 분명 언젠가 한 번은 하나님 말씀을 듣거나 환상을 본 적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만, 그는 지금 벧엘에 삽니다. 벧엘은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시작하며 우상숭배 거점으로 삼은 곳입니다. 이때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에 살면서 예루살렘 성전 직무를 담당하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파면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백성이나 끌어다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북이스라엘 많은 성직자는 신앙을 지키려고 집과 산업을 버리고 남유다로 망명했습니다(역대하 11:13-16). 하지만 본문의 선지자는 여전히 벧엘에 있습니다. 즉 그는 아들들과 함께 여로보암에게 동조하거나 타협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보면 의심은 확신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지금 아들들은 그들의 아버지에게 조금 전 벧엘 제단에서 왕과 하나님의 사람 사이 벌어진 소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손이 마르고, 제단은 갈라졌으며, 모든 일을 일으킨 하나님의 사람은 왕의 초대를 거절하고 돌아간 그 사태를 말입니다. 아들들이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건 이들이 거기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곧 늙은 선지자가 자기 아들들이 여로보암의 행사, 금송아지를 신으로 찬양하는 그 자리에 참석하게 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다 말하지 않아 추측만 할 뿐이지만, 변절자일 가능성이 큰 이 늙은 선지자의 등장은 앞으로 일이 더 심각해질 걸 예고합니다. 아들들이 말을 마치가 그가 반응합니다.
(12-13)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의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그가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그들이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그가 타고
늙은 선지자는 아들들에게 사건을 일으킨 주인공, 유다에서 올라온 하나님 사람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이에 아들들은 자신들이 본 걸 말했고 아버지 요청을 따라 나귀에 안장을 지웁니다. 그러자 선지자는 나귀를 타고 하나님의 사람을 뒤쫓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만난 늙은 선지자(14-17절)
(14) 하나님의 사람을 뒤따라가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냐 대답하되 그러하다
늙은 선지자는 과연 관록이 있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지만, 히브리원문에는 상수리나무 앞에 정관사가 있습니다. ‘그 상수리나무’인 것입니다. 이는 이 나무가 사람들이 잘 아는 나무였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나무 아래 있던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늙은 선지자는 단번에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봤고 그에게 정체를 물었습니다. 이에 그가 ‘맞다’라고 답하자 선지자가 자기 용건을 말합니다.
(15)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집으로 초대했고 ‘떡’을 먹자고 제안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을 접대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등장합니다(창세기 18장, 열왕기하 4장 등). 또 모르는 나그네라도 환대하는 게 하나님 명령이기도 합니다(레위기 19:33-34). 그래서 선지자의 이 제안은 그리 어색하지 않아보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본문을 ‘명령형’으로 기록했습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나와 함께 집으로 가자, 그리고 떡을 먹어라!”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권유 아닌 명령을 했습니다. 게다가 이 말을 앞선 상황을 기억하며 보면 늙은 선지자가 결코 그냥 뱉은 말이 아님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그의 아들들은 벧엘 사건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전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에게 한 말까지 옮겼습니다.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않겠다.”라는 단언을 말입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지금 늙은 선지자는 일부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떡을 먹으라”고 제안했음이 분명합니다. 그가 왜 이랬겠습니까? 이 역시 성경이 밝히지 않아 추측만 할 뿐이지만, 가능성은 몇 가지 있습니다. 그는 여로보암이 실패한 제안을 자신이 성공함으로써 자기 입지를 다지려 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 사람이 맞는지와 그가 하나님께 들었다는 명령이 사실인지 확인하려 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든 걸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불순종하게 시험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은 답합니다.
(16-17)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 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하나님의 사람은 선지자의 집에 가지 않고, 당연히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 명령 때문이라고 앞서 여로보암에게 한 것과 똑같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늙은 선지자는 이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듯 준비한 그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속이는 늙은 선지자(18-19절)
(18)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늙은 선지자는 ‘나도 선지자’라며 이제야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다만 이름이 아닌 신분만 말합니다. 이런 소개가 불손하다는 평가는 차치하고, ‘나 이런 사람이야’ 하며 들이대는 이들 치고 제대로 된 이가 없는 걸 우리는 잘 압니다. 게다가 이어지는 말을 보면 더 가관입니다. 왜냐하면 일부러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하나님의 사람이 언급한 떡과 물, 그리고 ‘돌아가다’라는 말을 사용해 자신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며 응수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성경 기자는 혹시라도 어리둥절할 독자들을 위해 이러한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늙은 선지자는 확실히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가 천사에게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는 건 순전히 뻥입니다. 그런데 이런 늙은 선지자의 말에 하나님의 사람이 독자들을 더 헷갈리게 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19) 이에 그 사람이 그와 함께 돌아가서 그의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자신이 들은 하나님 명령과 정반대의 말을 한 늙은 선지자를 따라갑니다. 이런 선택을 한 과정은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한치 고민 없이 즉각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혼란스러울 만한 상황 아닙니까. 그런데 그가 걸음을 돌렸고 음식을 먹습니다.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한창 기세를 떨치던 왕에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던 사람입니다. 게다가 이적까지 일으키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확실히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한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습니다. 결정 전 하나님께 묻지도 않습니다. 그는 도대체 왜 이렇게 행동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참 이해할 수 없지만, 이 역시 성경이 설명하지 않기에 몇 가지 추측만 해봅니다.
먼저 그가 자신이 받은 하나님 말씀에 확신을 갖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왕과의 설전에선 이겼지만, 노련한 선지자 앞에선 마음속 불안을 감출 수 없었고 그 점을 공략당한 것입니다. 아니면 그가 하나님을 믿긴 믿었지만, 자기 마음대로 믿었을 수 있습니다. 즉, 배고픔과 고단함보다는 안락과 편안함을 주실 하나님을 원한 것입니다.
사실 그는 꽤 위험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한 나라 최대 행사를 망쳐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가 벧엘에서 약 17km 떨어진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면 직선으로 가도 약 3시간 거리인데, 돌아서 가니 시간은 더 걸리고 그만큼 위험에 많이 노출됩니다. 또 돌아가도 마음 편히 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런 현실적 판단을 하는 자신에게 하나님이 늙은 선지자를 통해 위로를 주셨다고 믿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받은 것과 정반대인 예언을 듣고도 오히려 반갑다는 듯 걸음을 뗐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 기자는 그가 속았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내일 살필 본문에서 그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여기까지 살핀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건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벧엘의 늙은 선지자를 통해선 죄로 오염된 환경에 안주하고 과거의 영광에 취해 살다 악한이 되지 말아라.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자리를 피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라는 메시지를 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선, 하나님 말씀엔 끝까지 순종해야 한다. 혹 하나님 말씀이 상충한다면 기도해야 한다. 세상은 선악과 사건 이후로 속이고 속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 깨어 있어라! 라고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는 다 말씀에 근거한 꽤 타당한 교훈입니다. 다만 열왕기상 13장 전체를 보면, 다 보지 않고 본문 바로 다음절까지만 보더라도, 악마인 줄 알았던 늙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잠깐 실수한 대가라기엔 너무 허망하게 죽습니다. 그가 만난 상황은 분명 어렵고 그래서 실수할 만한데도 어떤 변명의 기회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구약성경에서 손에 꼽는 이상하고 또 혼란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창세 이후로 끝없이 사람이 만나는 시험 또는 문제인 ‘하나님의 뜻 분별’이 사건을 관통하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속 두 사람, 하나님의 사람과 늙은 선지자는 선지자이면서도 다 하나님의 뜻 분별에 실패했거나 외면했거나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러다 잘못된 길을 걸었고 죽었습니다. 성경이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은 건 우리도 매일 매 순간 선택하면서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이렇게 덮기엔 교훈은 얻지만, 우리도 이러다 자칫 넘어지고 망할까 싶어 부담되고 답답합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죄악이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다고 할 순 없는 신 사사시대인 오늘 날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이때 성경은 이런 우리 그리고 오래전 성경 첫 독자들의 이러한 근심까지 다 알고 소망의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열왕기하 23:17) 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하니 성읍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되 왕께서 벧엘의 제단에 대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하니라
어제 살핀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예언한 왕 요시야가 한 비석을 두고 정체를 묻자 사람들이 답합니다. ‘하나님 사람의 묘실입니다.’ 분명 본문은 거짓말에 속아 불순종의 길을 간 하나님 사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약 300년이 지난 뒤에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립니다. 이것이 사람들 호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는 불순종했고, 그러다 죽었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하나님 아니시곤 누구도 수여할 수 없는 호칭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내 사람이야” 그래서 성경이 전하는 본문의 세 번째 교훈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사세요. 다만 실패할 수 있습니다. 온 우주 역사에서 그렇게 산 사람은 단 한 명이니까요. 그렇지만 당신의 그 연약함을 인정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세요. 그분이 여러분을 용서하고 깨끗게 하실 거예요.” 사도 요한도 이 사실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요한일서 1:8-9, 새번역)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마주하는 모든 상황을 기쁨으로 맞이 하십시다. 예상 못 한 혼란스러운 문제가 생긴다면 감사하십시다. 왜냐하면 그 일은 신실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돌보심과 우리 안에 있는 진리,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걸은 오늘의 걸음은 분명 많은 이가 뒤따를 하나님 사람의 길로 남을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엔 벧엘의 늙은 선지자와 같은 이가 넘쳐납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사는 우리는 우리는 참 어리석고 연약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속고 그러다 망할 것 같아 두렵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기억하며 용기 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영광의 호칭을 거두지 않으실 걸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만나는 모든 상황에 하나님 뜻을 분별할 지혜를 주옵소서. 그리고 혹 넘어지더라도 그 연약함까지 하나님께 고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회복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오늘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 앞의 길을 감사와 기쁨으로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의 집’이었던 벧엘이 우상의 소굴로 변했지만 늙은 선지자는 그곳에 남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내가 오래 머무는 장소는 어디이며 그곳은 하나님 관점에 어떠한 곳인가요?
2.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3.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에겐 등을 돌렸으면서도 늙은 선지자를 따라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4.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어려울 때 그동안 나는 어떻게 결정해왔는지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앞으로 어렵고 혼란스러운 선택의 상황을 만난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요?
(작성: 이종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