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참전 전우들과의 대화)
우리는 20대 초반에 태극기 높이 들고 맹호, 백마, 청용, 그리고 십자성의 부대마크를 달고 베트남 전쟁터에 가서 함께 싸우고 살아서 돌아 온 전우들입니다. 어린이는 집을 떠나 봐야만 부모님과 집안의 소중함을 알게 되듯, 우리는 군복입고 타국에 가서 대한민국 위상의 중요성을 깨우치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맡겨진 임무 수행에 최선을 다 할 수 있었기에 오늘 이처럼 모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우들의 밝은 얼굴을 대하니 가슴이 펴집니다.
전사한 전우들의 피와 우리들이 흘린 땀으로 고국에 송금된 금액도 금액이지만, 더욱 큰 것은 전쟁터에서 단련된 정신력과 기술과 뭉치는 의지였으며, 이 송금액과 정신력과 기술이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산업화 발전의 기초가 되었던 것을 온 국민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이야 말로 조국 대한민국 제 1급 국가 유공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양민학살의 용병으로 주장하는 있는 일부 세력이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이런 주장이 통하는 것이 저에겐 불가사의하였습니다. 이 불가사의가 우리들을 국가유공자로 정부가 인정하는 것을 막아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000년부터 3년 간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의 국방부 위촉위원으로 활동했던 저는 4.3 무장 폭동을 순수한 민간인의 봉기로 해석하며 폭동과 반란을 진압했던 국군과 경찰을 양민학살의 주범으로 몰아가는 현상을 도저히 참아낼 수 없었습니다. 이것도 참으로 불가사의하였습니다.
4.3사건이 진압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은 탄생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무장 폭도들의 경찰지서 공격으로 시작된 4.3 폭동은 1948년 8월 14일 까지는,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자유민주적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세력을 대상으로 벌인 무장투쟁이었고 5.10 제헌 국회의원 선거로 대한민국이 건국된 1948년 8월 15일 이후에도 계속된 4.3사건은 대한민국에 대한 반란행위였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란 말을 들어 본 분 계십니까? 오래전에 systemclub에도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 6.25 정전 직후에 육군참모 총장을 역임하신 이형근 장군의 “군번 1번의 외길 인생”이란 회고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1. 일선부대의 남침징후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
2. 6.25발발 2주전 단행된 각급 주요 지휘관의 대규모 인사이동
3. 6월 13-20일간에 단행된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 교대.
4. 6월 11일부터 발령되어있던 비상 경계령이 6월 24일 0시에 해제.
5. 육본: 비상경계령 해제와 함께 전 장병의 1/2에게 휴가외출외박 허용
6. 6월 24일 개최된 육군 장교 클럽 댄스 파티
7. 서울 북방으로의 축차적 병력투입으로 불필요한 희생 발생
8. 6월 25-27일, 국군의 반격,북진 중임을 허위 보도한 중앙방송
9. 한강교의 조기 폭파
10. 한강교를 폭파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집행
(한국 군사학회 군사논단 2001년 여름호 8페이지)
이 형근 장군께서는 언젠가 누군가가 이 의혹을 풀 것이며 이것이 규명되어야만 국가의 100년 대계가 보장될 것이란 요지의 말씀을 남기셨는데, 4.3 사건의 배후와 배경에 대한 관심을 갖고 지금까지 연구한 결과 규명을 위한 정부차원의 특별한 노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4.3위원으로서 2003년 4월 2일, 청와대 오찬 초청 시, 4.3사건의 배경에 관련된 내용(박헌영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스티코프 비망록, 스탈린 만세를 부른 4.3폭동 주동자 김달삼의 연설문과 행적 등)을 당시 대통령에게 설명했으며, 4.3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던 2003년 10월 15일에는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4.3위원회에서 특별자료(4.3폭동의 선동을 읽을 수 있는 남노당 기관지인 “노력인민” 기사)를 분배하고 왜곡된 진상조사 보고서의 채택보류를 주장했었으나 무시된 채로 통과되자 국방부와 경찰추천으로 활동했던 동료위원 2명과 함께 동반사퇴를 했던 것입니다.
그날 국무총리 회의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많은 기자들 앞에서 3명의 위원들이 고성으로 왜곡된 진상조사 보고서의 채택에 항의했으나 기사화되지 않아 국민들에겐 알려지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습니다.
왜곡된 진상조사보고서를 기초로 한 2003년 10월 31일, 대통령의 4.3사건 정부차원 사과 발언은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우리의 동맹국인 미국을 적으로 몰았고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나라로 교육하는 전교조의 선생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던 것입니다.
4.3위원은 사퇴했지만, 4.3사건의 배경과 배후를 국민들이 알아야만 대한민국이 튼튼히 지켜진다는 일념에서 인터넷상의 글쓰기를 계속해 왔습니다만, 불가항력이었고 집착할수록 힘든 고독만이 따를 뿐이었습니다. 요로에 올리는 글들이 설명도 없이 지워지곤 할 때는 생명이 지워지는 스트레스를 끝없이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매우 기쁜 순간이 있었습니다. 한 북한 전문가로부터 매우 중요한 자료 하나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형근 장군이 보게 되면 무덤에서도 벌떡 일어날 만한 자료였습니다.
6.25를 북침으로, 김현희의 KAL기 폭파도 남한의 조작으로 주장하던 북한이 1946년부터 6.25전쟁 발발 시까지 추진했던 대남공작을 주인공의 가명까지 밝히며 찬양한 특집보도가 1997년 5월 26일자 노동신문에 실렸던 것을 뒤 늦게 알게 된 것입니다.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치르는 지난 10년 이상 언론에 공론화되지 않은 것이 참으로 불가사의 했습니다.
4.3위원으로 활동 시 알았더라면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채택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이었기에 헌신적인 베트남 참전 전우의 타자지원을 받아 “10년전의 노동신문 특집보도”란 제목으로 서둘러 여러 인터넷 망에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그 글을 읽었을 많은 분들의 침묵으로 공론화의 계기는 아직까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활주변에는 요즘도 있을 수 없는 끔찍한 사건 사고들이 불가사의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한라산이나 태백산 대신, 이제는 서울의 고층건물이 무장 폭도들의 근거지로 활용되는 날이 닥아 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저는 다시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4.3사건과 관련되는 마지막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0여 곳 이상에 글을 실었었지만 답 글을 달아 준 곳은 vietvet.co.kr 한 곳 뿐이었습니다. 사실은 여러분의 번개팅 모임을 알고도 실의에 빠진 저는 누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아 참석할 생각을 않고 있다가 어제 밤에 정재성 전우의 전화연락을 받았던 것입니다. 확답은 하지를 못한 채 고인이 된 동기생의 조문을 하고 있다가 그 곳에서 재차 전화를 받고 이곳에 오게 된 것입니다. 답 글을 주셨던 분들을 직접 대하니 더욱 큰 힘을 얻으며, 여러분의 초청에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4.3과 관련하여 할 말을 다했습니다. 두 대통령이 남북의 정상회담에 앞서 노동신문 특집보도 내용에 관한 보고를 받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면, 대한민국은 튼튼히 지켜질 것을 확신하며 “김 노 두 전직 대통령에게 따져 물어야 할 것”이란 제목의 글을 vietvet의 게시판에 실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1975년 4월의 베트남식 적화통일은 결코 막아내야만 합니다. 통일은 우리의 영원한 꿈이며 희망입니다만, 그 통일은 어떤 경우에도 태극기 휘 날리는 통일이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민주 체제로의 통일을 희망한다면 만에 하나라도 북의 대남공작에 넘어가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니 여러분들의 친구와 후배와 집안의 젊은이들에게, 저의 최근 글들이 급하게 알려지도록 나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인터넷 이상의 쉽고도 빠른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vietnamwar.co.kr의 “인강”칼럼이나 vietvet.co.kr 자유게시판에서 “인강”을 탐색하면 쉽게 보인다는 사실을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티코프 비망록”과 “10년전의 노동신문 특집보도”를 비롯한 관련되는 글들이 한 눈에 보입니다.
철경만대(徹警滿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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