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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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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22대 정조, 정조의 업적, | > 정조의 업적, 규장각을 중심으로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의 새로운 활자들이 만들어졌고 영조때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오던 문물제도 정비작업이 완료되었다. 그 결과물들이 이때 편찬된 '속오례의',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의 책들이었다. 한편 그의 문화 정치는 중인 이하의 평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위항 문학을 낳기도 했다. 인왕산의 경아전을 중심 으로 형성된 중인이하의 위항인들이 귀족문학으로만 인식되던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하여 '옥계시사'라는 그 들 독자의 시사를 결성하고 그들만의 공동시집인 '풍요속선'을 발간하는 등 대단한 문화적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정조 시대는 이처럼 양반,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 부흥기였다. 그러한 문예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문화의 전반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그림에서는 '진경산수'라는 국화풍,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국서풍이 유행했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 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이러한 축적 위에서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 정책의 추진과 선진 문화인 건륭 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조선 후기는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룰 수 있었다.
햬빈홍씨,,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며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에 추서되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궁호가 혜경으로 올랐고 17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에 추존되었다. 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녀는 세자의 참담한운명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1795년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을 남겼다. 이는 궁중 문학의 효시가 되고 있다.
효의왕후 김씨, 좌참찬 김시묵의 딸이다. 1762년 10세 때 세손비로 책봉되어 정조와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되었다. 그녀는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빈홍씨를 지성으로 모셨기에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우애가 극진하여 고모인 화완옹주가 그녀를 몹시 괴롭혔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왕가의 자녀들을 돌보는 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성품이 고결하고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아 사가에 내리는 은택을 매우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그래서 수진궁과 어의궁에 쓰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궁중의 물품은 공물이라 하여 일체 사가에 보내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 채 1821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일생을 검소하게 보냈으며 생전에 여러 차례 존호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능은 경기도 화성의 건릉이다. |
고맙습니다.
쏠쏠한 재미 좋은글 사랑합시다.
전주향교/鶴田/옮김/한문희총대장 감사합니다.
 본래의 마음,자유인 한문희총대장, 백두대간의 전설 자유인 백두대간종주대한문희총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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