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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에세이 문예》 신인상 등단
•수필집 『대신 생각해 드립니다』
•한국에세이작가상, 에세이문예작가상 수상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사람들은 백내장 수술은 매우 간단하고, 시간도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들 쉽게 말한다. 당일 들어가서 끝내고 나온다고들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진 않다. 또한 각자의 경우가 매우 다르다.
꼬여가는 질문
2023년 1월 19일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구정 연휴 직전이라 수술 날짜를 얻을 수 있었다.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는 PCR 검사를 하는데, 결과서에는 병원에서 지정한 날짜와 검사한 보건소 명칭이 드러나야 한다. 덕분에 나는 경산시청 맞은편, 연못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근사한 경산보건소를 들어가 볼 기회가 생겨 기뻤다.
1월 17일, 보건소에 도착했을 때는 바람이 불고 추웠다. 더구나 PCR 검사는 보건소 건물에서 하는 게 아니어서 보건소 안에는 발
도 들여놓지 못했다. 접수 받는 비닐 천막에서부터 밖에 있는 컨테이너 건물 세 군데를 거치는 것이다. 어찌나 춥고 떨리던지 이것이 코로나19의 시작 증상인지 걱정스러웠다. 보건소에서 귀가하자마자 실내 온도를 높이고 잠을 청했다. 그때가 오후 4시쯤이었는데 이튿날 아침 7시에 눈을 떴다. 거뜬했다. 이미 18일이었고, 오전 중에 음성이라는 ‘판정 결과’가 문자로 왔다. 하루 입원인데도 준비하느라 18일은 종일 분주했다.
19일 9시 예약에 맞추어 출발했다. 그런데 안과는 접수하자마자 시력을 재라고 한다. 나는 햇빛이 비치면 눈이 더 안 보이기 때문에, 병원에 좀 앉아서 빛에 익숙해지면 시력이 나아질 것 같은데……. 시력이 조금이라도 높게 나왔으면 하는 바람에서 투덜거려 보는 거다. 이어 예비 진료실에서 다시 시력을 검사했다. 이 검사표는 아까와는 달리 낮은 시력을 대상으로 하는 표인 것 같다. 그러고는 수술할 눈에 약을 넣더니 기다리란다. 약 1시간 가까이 되었을 때 안약 두 병을 주면서, 30분 간격으로 넣으라고 했다.
그리고도 마냥 대기 공간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된다면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싶었다. 내가 언제까지 기다리냐고 묻자 간호사는 다음 말은 듣지도 않고, 병실 청소를 해야 된단다. 대략 몇 시쯤 되는지 알고 싶다고 했더니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겠다고 한다. 이사이 인턴인 듯한 의사가 방 준비하는 동안 기다려야 한다면서, 지금이라도 입원 수속을 하고 있으면 그사이에 방이 다 될 거라고 했다. 서두르는 게 아니고 다만, 시간을 활용하고자 하는 내 의도가 통하지 않은 것이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커피 한 잔 하고 와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쨌든 이 대화 불통은 까다롭다는 인상을 주었을 것은 물론, 그날 하루를 코미디로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수술복과 환자복
입원 수속을 하러 갔다. 입원 신청서에 직업을 쓰는 난이 있다. 잠깐 생각하다 영대 명예교수라고 써넣었다. 그리고 서류를 내밀었더니, 창구 직원이 보증인란을 가리키면서 “여기에 배우자를 쓰세요”라고 했다. 나는 “선생님은 모든 사람이 다 배우자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물었다. 너무 까칠했나? 동생의 인적 사항을 써넣고 수속을 끝냈다. 창구에서 지시한 대로 8층으로 가던 중에, 예정했던 방이 되었으니 9층으로 가라는 전화를 받았다. 나중에 보니, 예정했던 방은 960호였는데 961호가 나서 그리로 가라고 한 것 같다.
병실에 들어갔을 때 간호사가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병원 옷을 가져왔는데, 이 옷은 소매도 몸통도 구별되지 않은, 한 장의 담요 같았다. 곳곳에 단추가 달려 있어서 단추를 끼우면 소매가 되고, 또 다른 단추를 끼우면 옆구리가 되는 그런 옷이었다. 그러면서 속옷을 다 벗으라고 했다. 눈을 수술하는데 왜 속옷은 벗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는 추위를 타니까 수술 직전에 벗겠다고 했다. 또 하나, 수술하러 가기 전에 면 기저귀를 사서 차야 한단다. 보호자가 없는 나는 수술복 위에 코트를 걸치고 기저귀부터 사러 내려갔었다.
오후 4시 수술이라고 하면서, 수술 4시간 전부터는 금식을 하기 때문에 점심은 나오지 않는단다. 12시 근처였다. 아침도 신통치 않았던 나는 갑자기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카페라도 가고 싶어서 떨던 호들갑은 어떤 예감이 작동한 걸까? 가방에 넣었던 레드향 두 개가 생각나서 하나는 간호사를 주고 하나는 얼른 먹어치웠다. 12시에.
백내장 수술은 개인병원에서는 입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막상 병원에 와 보니, 왜 하루를 입원하는지 알겠다. 일단 수술 시작할 때까지 아침에 지시받은 대로 30분마다 스스로 넣는 약이 두 가지 있고, 또 간호사가 1시간마다 세 가지 약을 눈에 넣는다. 약 넣고, 혈압과 체온 재고……. 소란스러웠고 바빴다.
4시 10분쯤 되니까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무슨 옷을 갈아입으라는 건지. 속옷을 벗으라는 말인가보다 싶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옮겼다. 백내장 수술을 하니까 내가 걸어갈 수도 있는데 왜 침대차에 끌려서 들어가는지 묘했다. 각 단계를 진행할 때마다 생년월일과 이름, 수술 부위를 물어 확인했다. 내 이름은 ‘김정숙’이기 때문에 아무리 확인해도 지나치지는 않다. 수술하기 이틀 전에도 안과로부터 다음 날 아침 일찍 올 수 있느냐는 전화가 왔다. 내가 수술 날짜를 옮기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다른 김정숙인데 착오라고 했다. 이런 정도니 분명히 내가 맞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누워 있으니, 누군가 속눈썹을 잘랐다. 그런데 가위로 찔려서 피가 좀 난 것 같다. 백내장 환자는 부분 마취를 하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 다 들렸다. 나는 겁이 났다. 다른 데도 아니고 눈인데 잘못된다면 큰일 아닌가?
수술실에서 왜 속옷을 벗어야 하는지를 알았다. 수술을 준비하면서, 몸에는 심장박동을 체크하는 단추 같은 장치를 몇 곳에 부착한
다. 옷이 이상하게 생긴 것도 필요한 부위들을 쉽게 노출시키기 위해서인 것 같다. 수술 팀은 내 손을 테이프로 침대에 고정시켰다. 전신마취를 하지 않기 때문에 환자가 순간적으로 움직일까 봐 고정시키는 것 같다.
그다음, 그들은 수술할 눈만 내놓고 얼굴 전면을 덮어씌웠다. 내가 숨쉴 수 있느냐고 물었다. 지금 공기를 공급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면서 산소포화도도 다 체크하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실제로 코 바로 밑의 삼각 뿔대 기구에서 찬 공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까 찔린 눈썹도 생각났다. 기어이 나는, “오늘 눈 상태가 안 되어 있으면 다시 수술 날짜를 잡아도 된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내가 불안해하는 것을 눈치 채고 준비가 잘되고 있다고 했고, 난 입 다물었다. 교수가 들어오기 전에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는 연습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수술 집도 교수가 들어왔다. 교수의 목소리는 내가 기억한다. 교수는 15분쯤 걸리니 눈동자를 움직이지 말고 고정시키고 있으라고 했다. ‘아하, 백내장은 의사와 내가 같이하는 수술이군. 그러니까 나는 적극 노력해야 해.’ 오직 시력을 회복하겠다는 집념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럼에도 빛이 왔다 갔다 하고 물이 확 들어올 때도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았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수술이 끝났다고 하면서 얼굴에 씌웠던 것을 확 벗겨내었다. 얼굴에 접착시켰었는지 따갑다. 나는 수술대에서 줄곧 사도신경, 주모경, 성모경을 외우고 있었다.
수술 후 나를 병실에 실어다 주었다. 밥이 나와 있었다. 마침, 식전, 식후 복용약들도 도착했다. 이어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러 왔다.
혈압은 들어올 때부터 이미 굉장히 높았다. 160을 넘고 있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8층으로 진료 받으러 내려오라고 했다. 정형외과 교수들은 회진을 하는데 안과 교수들은 안과 기구를 따로 차려놓고 그쪽으로 환자들을 불렀다. 8층에 내려가니 그날 수술한 환자들이 죽 앉아 있었다. 우리는 ‘동지적’ 인사를 했다. 내가 그날 9번째 수술 환자라던가? 그때 어느 보호자가 나한테 왜 아직도 수술복을 입고 있냐고 물었다. 다른 사람이 입은 옷은 내 옷과 달랐다. 자기네들은 병실에 들어올 때 침대 위에 그 환자복이 놓여 있었단다. 그리고 수술복은 수술하기 직전에 들어왔단다. 내 차례가 되었다. 교수가 보더니 수술이 잘되었다고 하더니, 자기네들끼리 “페일하다”라고 했다. 이게 영어 fail일까?
진료가 끝나고 환자복을 달라고 해서 갈아입었다. 한마디로, 내게는 옷이 잘못 제공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환자복을 입고 있다가 수술 들어갈 때에서야 수술복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수술복 속에 속옷을 입지 않는 것은 맞지만, 나는 처음부터 수술복을 입고 있었으니, 왜 옷을 벗느냐고 물을 수밖에. 아마도 침대 정리와 입원복 준비까지는 청소하는 분이 하고, 간호사는 수술복을 제공해 주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덜 준비된 방으로 안내되었고, 간호사가 들고 온 수술복을 입게 된 것이다. 수술복 차림으로 2층 매점에도 가고, 또 수술 후 진료도 받으러 간 것이다. 어쨌든 지금 별일 없으니 다행이지만 수술복은 오염되지 않도록 수술 직전에 갈아입는 옷인데, 그것을 종일 입고 있다가 수술실까지 들어갔으니……. 그래도 수술 직전까지 내복을 입고 있은 것은 똑똑한 대처 아니었을까? 그 내복에 세균은 없었겠지? 나는 아침에 던지다 잘린 질문때문에 종일 ‘눈에 띄는 사람’이 되었다.
밤이 되었다. 1인 병실은 처음이다. 코로나 때문에 1인실을 선택했지만, 내심 1인실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1인실은 2인실을 칸 막아 놓은 거나 별로 다른 게 없었다. 가끔 TV 드라마에 보이는 것은 어떤 병실인지? 방에는 TV, 책걸상 1개, 보호자용 평의자가 있었다. 나는 TV를 보지 않는다. 책을 보려고 했는데, 한쪽 눈에 철 안대를 해놨으니 안경을 낄 수가 없어서 글자도 볼 수가 없었다. 혼자 방 안에 누워 있자니 이것이 서러운 건가 하는 생각이 일었다. 얼른, ‘아니지. 나는 신화를 연구한 사람인데……. 이건 동굴 속이야. 새로움이 일어나려면 동굴의 시기를 거쳐야 된다잖아’라고 결정했다. 그때 선배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는 병원 근처에서 같이 받는 수업이 있다. 선배는 그 수업 끝나고 나를 집에 데려다줄 테니, 내 차는 병원에 세워두고 나중에 외래 갈 때 찾으라고 했다. 나는 대리기사 부를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자다가 깨다가 하고 있는데, 새벽 5시가 되니까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러 왔다. 모두 정상이란다. 6시에는 1층으로 진료 받으러 내려오라고 했다. 1층은 정식 안센터이다. 어제 만난 환자들끼리 격려의 인사를 나누었다. 나를 제일 먼저 불렀다. 수술이 잘되었단다. 약 2개를 하루에 네 번씩 넣으라고 처방해 주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오라고 했다. 입원하지 않는 개인병원에서는 다음 날 혹은 이틀, 사흘씩 하는 외래를 이렇게 미리 한 것이다.
아침 식사는 7시 반쯤 돼서야 나왔다. 새벽밥을 먹는 나로서는 한참 기다렸다. 아침 식사 후 바로 짐 정리가 끝났다. 그런데 나보
고 보험사에 낼 서류가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다. 요즘 수술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보험이 있나 보다. 내 보험이 이 경우에 해당되는지를 알아보아야 했다. 보험회사가 근무를 시작하는 9시까지 기다려서야 통화했는데, 백내장은 해당 항목에 없다고 했다. 아주 이른 시기에 든 보험이라 그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병원 측에 퇴원하겠다고 했더니 서류를 심사하는 중이라면서 문자를 받으면 퇴원 수속하고, 간호사실에서 약을 받아 가라고 했다. 한 시간이나 기다려도 문자가 오지 않았다. 그사이에 선배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혼자 귀가하겠다고 답했다. “나를 너무 감동시키면 안 돼요. 감동하면 눈물이 나는데 눈에는 절대로 물이 들어가면 안 되거든요. 눈물 그것도 ‘물’이어서요.”
책도 볼 수 없고, 퇴원 문자 기다리기가 막막해서 다시 간호사한테, 눈을 수술한 거니까 아래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와도 되겠냐고 물었다. 1층에서 카페라테를 한 잔 시켜서 막 돌아섰는데 퇴원 수속하라고 연락이 왔다. 돈을 지불할 때, 창구에서 명예교수여서 50% 할인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고맙습니다. 그 보답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눈이 이렇게 자꾸 말썽을 부리니 걱정이네요” 했다. 창구 직원은 안과는 영대가 제일 좋다고 하지 않느냐면서 이제 잘 보일 거라고 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손에 쥐고 있던 카페라테를 그에게 주었다. 그의 웃는 얼굴이 나를 더 기쁘게 했다.
이젠 집으로 가도 된다. 그러니까 카페라테는 필요치 않다. 나는 2층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섰다가 호두과자를 봤다. 막 따뜻한 과자가 나오고 있었다. 제일 작은 봉지가 6천 원이란다. 그걸 하나 사들고 병실로 올라갔다. 약하고 주의 사항을 전달하러 온 간호사에게, “이거 선생님들 1개씩 돌아갈는지 모르겠어요. 따뜻해서 갖고 왔어요”라며 내밀었다. 어찌나 반기던지. 내가 짐을 챙겨가지고 나오는데, 복도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호두알을 하나 입에 넣던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활짝 웃는다. 그가 열어주는 문으로 나오면서, “선생님들 새해 좋은 일 많으세요”라고 소리 질렀다. 6천 원으로 얻은 여러 사람들의 기쁨에 가슴이 뛰었다. 한 봉지 더 사가지고 다시 올라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요란 떨지 말자’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귀갓길 운전은 사실 조심스러웠다. 가장 큰 길인 달구벌대로에 차를 얹고 트럭을 하나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 천천히 왔다. 차가 막혀도 상관없다. 노선도 바꾸지 않고 직진하다가 연호 삼거리에서 월드컵대로에 얹고 아파트까지 왔다. 문 앞에는 구정 선물이 몇 상자 배달되어 있었다. 곧이어 선배 교수와 학급 동료가 미역국을 끓였다고 들고 왔다.
남자들이 군대에 가면 자신은 없어지고 단체의 한 부품이 되어가는 과정을 견딜 수 없다고 한다. 군대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데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없어지고 군대 부속품처럼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병원 또한 그런 것 같다. 사람들이 병원에 오면 사람이 보이지 않고 그 아픈 부위로 대치되는 것 같다. 게다가 간호사도 자꾸 바뀌고 기계적이다. 이것이 견디기 힘들게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창구에서의 개인적 격려, 간호사들의 빵끗하는 미소는 주눅든 환자에게 은은한 위로가 된다. 사람으로 아픈 것 같은……. 더불어 동료들의 세심한 배려도 깨닫는 기회가 되었으니……. 이런 뿌듯함에 수술복에 묻었을지 모르는 세균도 다 죽었을 거다. 밝아진 눈으로 책은 물론, 사람의 섬세한 마음까지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도 각자의 체험은 서로 다르다’라고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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