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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설교(96)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생명수 비유)
본문 : 요4:1-19, 25-26
<위기를 느끼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약 9개월 동안
예루살렘 근방에 머무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위기를 느끼셨습니다.
<본문 1-2절 읽어라>
1절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절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많이 생기고.......
그 제자들에게서 세례를 받는 자가 ......
요한에게 받는 자보다 많다는 말이 .....
바리새인들의 귀에 들어가서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많이 주든지.......,
요한이 세례를 많이 주든지.....
또 그것이 바리새인이 알았든지
몰랐든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도.....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불편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더욱 불편하게 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세례를 받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요한의 세례를 능가하게 되자 .....
바리새인들이 큰 위기를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점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회개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회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 세례 요한은 회개하여야
앞으로 메세야가 오셨을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타협의 여지가 있습니다.
아직 메시야는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예수님의 선포는 미래형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당장 고치라고 하면 얼굴이 험악해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타협합니까?
“지금 당장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앞으로 차차 잘하라는 뜻이야.”
비록 세례 요한의 설교는
추상같았지만 타협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미래에 대하여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당장의 큰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권위있게 행하셨습니다.
미래가 아닌 현재를 선포하셨습니다.
메시야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씀과
능력을 행하셨습니다(예 - 성전 정화).
바리새인들은 당장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세례 요한을 따르는 자를
초월하자 이들 가운데 큰 위기감이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복음은 이런 것입니다.
복음은 타협을 할 수 없게 합니다.
복음은 차차 잘하면 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지금 결단을 요구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복음은 위기의식으로 가득하게 합니다.
복음은 당장(지금 여기서) 예수 앞에 나와
회개하고 영접하고 구원받을 것을 촉구합니다.
<다시 갈릴리로>....
이러한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 앞에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방해하기 위한
계획에 들어갔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직 자기의 때가
아님을 아셨습니다.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전도노정을 바꾸어
갈릴리 지방으로 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지방으로 가는 것은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 그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그대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는 길이고....
- 다른 하나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기 위해
일단 동쪽으로 나가서 올라가
다시 서쪽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길은 먼 길이 되고
돌아가는 길이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직행로를
놔두고 먼 길로 돌아 다녔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 땅과 거기 사는
사람들을 더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아픔이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각각 앗시리아와
바벨론에게 망한 뒤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붙잡혀 갔습니다.
그런데 점령기간 동안 앗시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이방 민족을 강제로 이주시켜 혼혈이 되게 함으로써
그들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는
저주받은 땅으로, 사마리아인은
아예 간음한 여인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사람으로 태어나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는 기도까지 드렸습니다.
그 때문에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을 복구하고
성전을 재건하려 할 때 사마리아에 있던
사람들이 함께 협력하고자 하지만
더러운 손이라며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의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유대인들이 그토록 더럽게 생각하고
멸시하는 사마리아 땅을 거쳐서
가시고자 하셨습니다.
<본문3절-4절 읽어라>
3절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이것은 예수님의 의지를 담은 표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정신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분열하기를 좋아하고,
우리 편과 네 편으로 구분하기를
좋아하고, 나누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세워놓은 편견과
구별에 매이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이 굳이 사마리아 땅으로
그 행로를 잡은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아야할 사람들임을 선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비극적인
역사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피해자들입니다.
사회적인 약자들입니다.
그들을 증오하고 멸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고
민족의 일원으로 받아드렸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본을 보여주려 하셨습니다.
<여인과의 접촉점>...
예수님이 사마리아 땅의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신 것은 제 육시쯤
(우리 시간 정오)이었습니다.
거기에 야곱의 우물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 우물가에서 쉬기를 원하셨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습니다.
그때에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햇살이 뜨거운 낮 시간에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왔다는 것은 ...
저들의 생활습관으로 보아 매우 이례적인 것입니다.
서늘한 아침이나 저녁에 주로 물을 긷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무도 나오지 않는 시간에 몰래 물을 길러
나왔을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5-8절).
예수님은 아마도 그 여인의 내면의
갈증을 꿰뚫어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과 자연스럽게
말을 거십니다.
“물을 좀 달라”(7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대화의 기법을 알고 계셨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대화를 풀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물을 달라는 요청 자체가
그 당시 사회 풍습으로는 대단히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 사마리아 사람에게,
그것도 여인에 말을 건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예수님도 그 여인도
각각 혼자였습니다.
다른 배석자도 없이 잘못 하다가는
여인을 희롱하는 것으로 오인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물을 얻어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그 여인의 내면을 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접촉점’을 만들기 위한 의미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사실 전도의 시작은 ‘접촉점’을
만드는데서 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이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유대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처음 보는......
더군다나 사마리아 여인인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단지 놀란 것이 아니고
감동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 첩경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자기의
존재의 소중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삶의 큰 기쁨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줌으로써
자기의 존재이유를 찾아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줄 수 있을 때
삶의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절대로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 여인은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유대인이 자기 같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부탁을 하는 것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는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그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1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더 이상 물먹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차피 접촉점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자기를 소개합니다.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인생의 갈급함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왜냐고요? 알지 못하면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는 자에게만 생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몰라서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은 자기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엉뚱한 곳을 찾습니다.
세상의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술과 담배, 마약과 본드에 취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방법들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해갈이 되는 것이 아니고
중독이 되고 맙니다.
거기에 사로잡혀 헤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절망의 세월을 보내며,
죄책감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수를 간절히 원합니다.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네가 나에게 구하였을 것이라.”
예수님이 왜 전도하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가야 생수를 구할 수 있는지
알려주라고 하십니다.
<생명수 비유>.....
이 여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를 물리적인 물로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꾸합니다.
<본문 11-12절 읽어라>
11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절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논리정연하고 이성적인 대답입니다.
물 길을 그릇도 없으면서
무슨 허풍이냐는 투입니다.
또 야곱과 비교하면서 예수님을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냐”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수’에 비유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 13-14절 읽어라>
1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생수’에 비유하십니다.
“이 물을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구원의 ‘생수’,...
곧 ‘생명수’를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15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얼핏 보면 여인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100% 수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반대의 반어법입니다.
“아니 세상에, 한 번 먹고 평생 목마르지
않을 물이 어디 있담?
그런 물이 있다면 한 번 줘보세요.”
이런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을 무시하다 못해
거의 조롱에 가까운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갑자기 그녀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명합니다(16절).
그녀는 남편이 없다고 잡아뗍니다(17절).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7절b-18절)하면서 그녀의 속사정을
꿰뚫고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녀는 결혼을 무려 다섯 번이나 했지만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모두 죽은 것인지,
아니면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이 여인과 동거하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가정을 가진 남자와
불륜관계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녀의 수치를 드러내어
자신의 실상을 바로 보게 함이었습니다.
이 여인이라고 해서 어찌 행복해지기를
원하지 않았겠습니까? ....
새 남편을 만날 때마다 이번만은,
이번만은 행복해지리라고
결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가정이 있는 남자와
불륜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간신히 생존해 가는 처지입니다.
참으로 숨기고 싶은 과거요 현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수치를 드러냄으로서.....
자기 의지를 따라 살면 살수록 ....
더욱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인간 실존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갈증으로 목마른 인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자신의 수치가 드러나자
이 여인은 예수님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제야 이 여인은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절)하고
주님을 인정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영혼의 실상을
똑바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누구신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5절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그녀 역시 메시아 곧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가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2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의 삶은 예수님을 만난 후
전혀 새로워졌습니다.
그녀의 삶엔 기쁨과 평강
그리고 새 생명이 차고 넘쳤습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
이 여인으로 인해 그녀가 살던
수가성이 송두리째 새로워졌음을
39절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맺는 말씀 - 생수이신 그리스도>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예수님은 자신을 ‘생수’에 비유하십니다.
갈급한 인생의 ‘생수’이십니다.
그것도 잠시 마시고나면
다시 목마른 생수가 아니라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인간은 특히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과학적인 분석에 의하면 ...
인간이 가지고 있는 피의 90%가 물이며....
뇌의 80%가 물이고....
살의 75%가 물이며...
뼈에 있어서도 25%가 물이라고 합니다.
이 물로 체온 조절을 합니다.
그 때문에 더우면 물인 땀이 밖으로
나옴으로 체온이 조절되고....
추우면 물을 보호하도록 닫아버려서
땀이 나지 않도록 하여 체온을 조절합니다.
물론 기관의 활동을 부드럽게 하고
영양을 공급하고 운반하는 것도 물의 역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것저것 많이 먹어도
물을 먹지 않으면 그 먹은 음식마저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가끔 병원에 가면 링거 주사 같은
것을 맞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
거기에 5%의 포도당이 들어가 있을 뿐이고
나머지 95%는 맹물입니다.
그러니까 핏속에 물만 집어넣어도
산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물이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배고픈 것도
두렵고 여러 가지 두려운 것이 많이 있지만 ....
가장 두려운 것은 갈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때문에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오하시스를 만나지 못한 채 물이 떨어지면......
타고 가던 낙타의 배를 갈라
그 위 속에 들어 있는 물을 마신다고 합니다.
낙타는 사막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교통수단입니다.
마치 바다의 배와 같습니다.
낙타를 잃어버리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그 얼마간의 물을 마시고자
낙타의 배를 갈라 그 찝찝한 물을 먹고...
얼마 걷다가는 다시 목이 타서
쓰러져 죽는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만큼 물은 소중한 것입니다.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과 같은 존재이십니다.
그런데 어떤 물이냐가 중요합니다.
보통 물은 고여 있으면
시간이 지나면 썩어버립니다.
또한 고인 물은 퍼마시면 없어집니다.
또한 마셔도 마셔도 잠시 후면
또 다시 목마름니다.
끊임없이 반복하여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시기에
썩지도 않고 고갈되지도 않고....
그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자는
다시 갈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감사와 감격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기쁨과 환희의 나날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요7:37-38 ...
37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영생수를 마시고 .....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다시는 갈증이 없는 .....
복을 누리시기를 ....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