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한국의 기도 도량 / 와룡산 고산사
전쟁 피해 사라진 나한 한 분 절절한 염원 담긴 내 마음서 찾다
신라 헌강왕때 도선 스님 창건
나라 뺏긴 경순왕 머물렀던 곳
용이 문 여의주 자리에 응진전
석조관세음보살·나한상 유명
▲ 용이 누워있다는 제천 와룡산, 제 집 버리고 파란 하늘로 들어가 잠룡이 되려나.
태양이 식어간다. 뜨거움에 움츠렸던 바람이 가을 싣고 기지개를 켠다.
하늘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용의 머리둘레에 앉았다는 응진전, 용이 문 여의주 자리란다.
용이 깊은 가을 하늘에 머리를 담그려는 찰나, 응진전은 고산사에 여법함을 더했다.
와룡산(臥龍山). 용이 제 몸 숨겨 웅크리고 누워서일까.
용 품에 안긴 고산사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신륵사로 들어가는 들머리 수산 2구를 지나 단양방면으로 36번 국도를 계속 달리다
도로 왼쪽 신현주유소 옆으로 난 좁은 길에 이정표가 서있다.
예서 가파른 산길 1km를 올라야 한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용의 등 밟듯 숨 가쁘게 올라서야
조계종 제 5교구본사 법주사 말사인 제천 고산사다.
일부 복원된 월형산성이 작은 돌담을 이뤄 일주문인양 세간출세간을 가른다.
잘 다듬은 표지석이 고산사임을 알려준다.
표지석 옆에 다다라서야 초목이 만든 그늘에 몸을 감췄다.
식어버린 땀과 세간에서부터 따라온 번뇌 한 조각 여기 두고 고산사에 든다.
여름 끝자락에서 서성이는 태양이 가을 문턱에 걸터앉았다.
찬란하게 내려쬐도 가을 머금은 바람이 열기를 훔쳤다.
바람은 살갗만을 적셔주는 대지의 입김이 아니라
온 가슴을 적셔준다던 소설가 이외수의 말이 와닿았다. 바람은 맑고 서늘했다.
길은 더 가파르게 이어졌다. 연못에 선 해수관음이 객을 마중했다.
왼쪽으로 이어진 길 끝에는 요사채와 예스럽게 생긴 해우소가 있었다.
▲ 일부 복원된 월형산성이 작은 돌담처럼 고산사 입구를 지키고 있다.
고산사 마당에 서서 한 바퀴를 둘러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와룡산 한 가운데 고산사가 안긴 기분이 들었다.
초목들은 초록빛으로 산을 감쌌고, 그 안에 몇몇 전각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요사채로 쓰이는 고경당(古鏡堂)은 소나무 숲을 병풍처럼 둘렀다.
삼성각과 저 멀리 응진전은 초목과 파란 하늘 사이에 파묻혀 고졸했다.
와룡산과 절묘한 하모니를 이룬 고산사가 궁금했다.
자료를 뒤지니 신라 헌강왕 15년인 879년 도선 스님이 창건했단다.
1920년 유호암이 쓴 ‘고산사중수기’에 따르면
고려 숙종 7년인 1096년 국사 혜소 스님이 중건하고,
조선 효종 4년인 1653년 송계 스님이 중창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화마를 입었던 것을 1956년 다시 재건했고,
1990년대에 들어와 대대적인 불사가 이뤄졌다.
선원과 삼성각, 응진전이 새로 지어졌거나 복원됐다.
▲야트막한 돌담을 지나 숨 가쁘게 오르면 해수관음을 만난다.
우거진 초목들 곁으로 난 샛길이 단정했다.
삼성각 지나 응진전으로 향하는 길 위 하늘에
초록 이파리가 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우거진 초목들이 길을 수놓았다.
응진전 앞은 제법 탑 모양을 갖춘 2개의 돌탑이 세워져있었다.
2개의 돌탑 가운데 키 작은 돌탑 하나 서 있어 마치 한 가족 같았다.
돌탑은 큰 돌이 초석을 다지고 차츰 작은 돌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층층이 돌과 돌 사이엔 자그마한 돌들이 틈을 메우고 있었다.
용이 누워있다는 와룡산, 제 집 버리고 파란 하늘로 들어가 잠룡이 되려나.
태양이 식어간다. 뜨거움에 움츠렸던 바람이 가을 싣고 기지개를 켠다.
하늘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용의 머리둘레에 앉았다는 응진전, 용이 문 여의주 자리란다.
용이 깊은 가을 하늘에 머리를 담그려는 찰나, 응진전은 고산사에 여법함을 더했다.
응진전은 1998년 함현 스님이 새로 지었단다.
전에는 다 쓰러져 가는 법당 위에 비닐 한 장 덮어 비바람만 겨우 피했다고.
삐걱거리는 법당 마루는 삼배조차 감당하기 어려웠을 터다.
아니, 당시 간절함만 들고 고산사 응진전을 찾았던 기도객의 삼배는 그 무게가 무거웠으리라.
응진전은 석가모니 부처님 제자인 나한을 모신다.
16명의 뛰어난 제자를 나한이라 하는데 ‘아라한’을 줄여 이르는 말이다.
아라한은 응공, 응진의 자격을 갖춘 분이라고 한다.
공양 받을 자격이 충분하고 마땅히 진실된 마음에 답을 하니 응진(應眞)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응진전이다.
한데 고산사 응진전은 주불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닌 관세음보살님을 모셨다.
대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삼존불이 후불탱화에 계셨다.
그리고 열여섯 분이 아닌 여섯의 나한님이 세 분씩 좌우를 보처하고 있었다.
한 쪽은 웃는 상이고 다른 쪽은 매서운 눈매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본래 나한님은 일곱 분이 계셨다고 한다. 제 집 뛰쳐나간 나한님은 어디 계시려나.
아마 응진전에 온 마음 다 기울여 소망을 비는 기도객이 나한님이자 부처님이시리라.
자신이 잘 되길 바라는 탐욕을 버리고 타인이 잘 되길 비는 마음이 소망 아니던가.
타인의 희생이 필요한 탐욕을 비비고 비벼 먼지로 날려버리고
자신의 희생이 필요한 소망으로 가꾸는 게 기도일테니….
▲삼성각이다. 초록 초목과 파란 하늘 사이에 파묻혀 고졸하다.
석조관음보살좌상(충북 유형문화재 제194호)은
보관을 쓰고 흰색 가사를 걸치고 온화하게 웃고 계셨다.
어찌도 저리 눈을 지그시 내리깔까. 느끼하지도 그렇다고 멍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내리깐 눈매 안에 또렷한 눈동자는 도리어 취모검처럼 날이 섰다.
우리네 마음 속 부처님의 눈매는 어떨까. 법당 안 시계가 세 번의 종을 쳤다.
상념, 날카롭게 베였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신라 53대왕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곳에서 8년을 기거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단다.
자식인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는 월악산의 각 사찰에 머물렀고,
그래서 와룡산은 부모산 월악산은 자식산이라 불린다고 한다.
응진전에서 월악산을 보면 꼭 절하는 형국이라는데,
당시 경순왕은 말을 타고 월악산과 와룡산을 오갔다고.
해서 지금도 와룡산에는 치마령(馳馬嶺)이란 고개 지명이 남아있다.
제천 월악산 덕주사를 참배할 때 들었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애절한 이야기(본지 1190호 9면 참조)가 아련했다.
고경당에 들렀다. 미리 손님이 와 계신 주지 장산 스님 대신
종무소 일을 보는 무생지(50) 보살 덕분에 복잡한 머리를 쉬었다.
보살은 13년째 고산사를 다녔다고 했다. 응진전 나한님에 대한 얘기를 들려줬다.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아랫마을 사람들이 해준 얘기란다.
이 근방엔 북한군이 자주 출몰했고,
마을 사람들은 열 분 계셨던 나한님이 소실될까 이운하다 잃어버리기도 했다고.
더러는 집에 가져가 기도를 드리곤 했는데
마을 남자들은 ‘이까짓 돌이 뭐냐’며 깨부수기도 했단다.
그 집 남자는 다시 빛을 볼 수 없게 되는 등 우환이 들었다고 했다.
보살은 고산사 나한님이 영험하다 일렀다. 자신도 선몽을 받고 이곳에 닿았다고 했다.
원래 충주 대원사 토박이 신도였다.
보살은 서른 두 살에 절과 인연 맺고 초파일에 법문을 들은 뒤
머리에서 거머리가 빠져 나가는 꿈을 꿨다.
법문 듣는 게 좋아 충주 석종사 혜국 스님도 친견했다.
그러다 고산사와 불연이 닿았으나 남편은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인데도 한사코 말렸다.
보살은 “진정한 부처님은 집에 있다”는 법문을 떠올리고
남편에게 삼배를 올린 뒤 잠자리에 들었다.
4년이 흐르고 나서야 남편은 매일 고산사에 보살을 데려다 줬고
지금은 차 한 대를 따로 마련해 편히 다니라고 했단다.
응진전은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 자리라는 말을 전한 보살은 주지스님과 자리를 마련해줬다.
▲응진전. 관세음보살님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대신해 주불로 가부좌를 틀었다.
여섯 분의 나한님이 좌우를 지키고 있다.
장산 스님은 기도를 묻는 객에게 소참법문을 했다.
세상의 병이 깊다 했다. 빨리 가야하고 많이 알아야 하고 높이 가야하고
많이 가져야 하는 똑똑한 병이 걸려 병의 뿌리가 깊다 일렀다.
스님은 인간 심성을 정화하는 노력 없이는 병원이 많아도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했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와인 향을 그리워하지 말고,
수선화 향기를 맡으면서 장미 향기를 그리워하지 말랬다.
모자라거나 부족하더라도 오직 그곳에 집중할 때 스스로 행복함을 안다고 했다.
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
더 갖기 위한 소망이 탐욕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경책이었다.
어두운 밤길, 작은 등불 하나 비추며 걸어도 흔들리는 불빛에 넘어져 등불은 꺼진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던 별빛은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작은 등불을 끄지 않고는 하늘의 별빛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늘 작은 것은 크고 깊은 그 무엇을 비출 듯 가리고 서 있는 법이다.
시인 박노해의 얘기다.
그랬다. 작은 탐욕하나 놓고 깊은 소망하나 걸친 마음이 기도였다.
기도하는 마음은 와인 향 그리워하지 않고
막걸리 한 잔에 만족하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길을 만들지만
우리 중생은 멀리 있는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길을 만든다고 소설가 이외수는 말한다.
웅크린 용의 등 같은 길을 타고 한참을 올라야 만나는 고산사는
어떤 그리움을 숨긴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려나.
고산사는 그리워하고 있다.
탐욕 털어낸 소망 하나, 기도객의 간절함 하나, 사라진 나한 한 분.
2013. 09. 12
최호승 기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