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2005~2020]/정기산행기(2008)
2008-12-22 10:30:00
일시: 2008. 12. 21(일) 10:00-15:20
산행지: 북한산
산행코스: 불광역-족두리봉-향로봉-비봉-대남문-대성문-정릉
참석자: 경림(산행대장), 문수, 은수, 경호, 병효, 정호, 덕영, 택술 --(8명)
30산우회에 다니면 얻는 것이 있다. 지난 8월 23일 처음으로 30산우회 산행(석룡산)에 따라 나선 후 넉 달이 채 안되었는데, 벌써 여러 개를 확보(?)했다. 조직 관리 차원이겠지만, 몇 번 부지런히 나갔더니 산에서 쓰는 접는 의자를 하나 주고, 며칠 전 송년회에서는 값비싼 아이젠까지 준다.
그리고 이제는 산행대장 발령 - 정부미가 좋아하는 승진이다. 하루만의 감투에 불과하지만 맡고 본다. 지금 놓치면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른다. 내 앞에 택시가 올 때는 차종을 불문하고 무조건 타야 한다는 것이 정부미 사회의 철칙이다.
집결지로 정한 불광역에서 들입목까지 길이 감감하다. 워낙 길치인데다, 불광역에서 출발해서 북한산을 올랐던 것은 회사 동료의 안내로 인적이 별로 없는 주택가를 지나 탕춘대 코스를 탔던 한 번 밖에 없으니 기억이 날 리가 없다. 궁리 끝에 30분 일찍 가서 들입목까지 사전답사를 하기로 한다. 그러나 불광역에 도착한 후 예상하지 않았던 두 가지를 핑계로 이 기특한 계획을 쉽게 버린다. 불광역을 빠져 나오니 등산객들이 그야말로 바글바글. 이 사람들을 적당히 따라가면 어디로든지 산으로 올라가겠지. 그리고 경호가 나보다 먼저 와 있다. 어림잡고 출발했더니 집결시간 40분전에 도착했단다. 경호를 혼자 두고 나만 왔다 갔다 하기는 그렇다(는 훌륭한 구실을 만든다.)
문수, 은수, 정호가 도착하고, 오랜만에 병효대사도 왔다. 인파에 섞여서 출발, 병효의 어렴풋한 기억에 따라 족두리봉 방향 들입목으로 진입하려고 하는 순간 덕영이가 전화한다. 불광역에 도착했는데, 왜 벌써 출발했냐고 투덜투덜. 참석 신고를 하지 않은데다가 지각한 불찰을 지적해 주고, 기다렸다 같이 올라간다.
역시 참석 신고를 하지 않았던 택술이도 전화한다. 평창동에서 올라온다고, 비봉 근처에서 만나자고 한다. 산행대장의 인품이 널리 떨치니, 방방곡곡의 신고하지 않은 인사들이 속속 모인다(?).
50대 남자들의 재주 하나 - 욕심내지 않고 능력에 따라 움직일 줄 안다. “오늘 산행의 원칙은 우회로 정한다. 쪽두리봉, 향로봉, 비봉, 문수봉을 지나가되, 올라가지는 않는다.” 포장을 잘하는 정부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봉우리는 그 위에 올라갈 때보다는 바라볼 때가 더 아름답다.” 요즘 자신이 없어진 50대 남자는 이렇게 화답할지도 모른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내일은 영하 9도까지 내려간다는데, 오늘은 생각보다 따뜻하다. 그러나 쪽두리봉으로 올라가는 코스는 시작이 가파르다. 오늘따라 사람들도 많아서 줄서서 올라간다. 그리고 흔하지 않은 몇 개의 사건을 만난다.
(1) 시끄러운 아줌마, 아저씨들과 함께 헉헉거리면서 올라간 지 15분 쯤. 갑자기 문수 회장이 “아이고, 이것 참” 한다. 덕영이를 기다리던 들입목 입구에 지팡이를 두고 왔단다. 우리가 단체사진 찍을 때 사진기 받침대로 쓰이는 문수의 애장품. 문수만 다시 내려가서 지팡이를 찾아보기로 하고, 덕영이에게 배낭을 맡긴다. 순식간에 귀책사유를 간파한 덕영이는 군소리 없이 문수 배낭을 받아들고 한 쪽 어깨에 걸치다가 은수로부터 가슴 앞으로 돌려 메라는 주의를 듣는다. 배낭 2개를 앞뒤로 멘 덕영이의 모습이 위태로운지 다들 문수가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서 휴식하기로 결정한다.
문수가 지팡이를 찾아서 돌아온다. 우리가 걱정할 까봐 새로 사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코멘트에 씩 웃는다. 다른 사람들의 물건이라도 틈만 보이면 잽싸게 가져가 버리는 서울에서 이런 귀중품을 다시 찾은 것은 큰 다행이다. 벽에 세워 둔 것을 아무도 못 본 것이리라. 그러나 문수 지팡이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 봉우리를 올라가지 않아도 향로봉과 비봉 가는 길은 힘들다. 12시를 지나 비봉에서 택술이를 만난다. 행군 도중에는 점심을 먹지 말고, 빨리 내려가서 민가에서 해결하자는 용감한 의견도 있었지만, 사모바위 가기 전 양지바른 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자 아무도 반대 안한다.
30산우회에 따라다닌 후 처음 겪는 사태가 생겼다. 음식이 부족하다(????) 덕영이가 갖고 온 사과 한 알 외에는 과일이 없고, 떡도 없다. 막걸리를 챙겨 온 사람도 없다. 도시락 몇 개와 라면 몇 개, 그리고 택술이가 갖고 온 중국 술 한 병이 전부. 다이어트를 선언한 덕영이를 제외해도 음식이 사람 숫자보다 모자란다,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위기가 30산우회에도 그 발톱을 드러낸 것일까? 병욱아, 빨리 돌아와라.
*병욱이가 있을때와 없을때.....
사이좋게 나눠먹고 일어서니, 부족한 듯하지만, 오히려 산길 걷기는 더 좋다. 과유불급의 가르침은 등산 중 점심에도 적용된다.
(3) 오늘의 산행 원칙에 충실하다 보니 비봉을 지나 문수봉을 우회하여 청수동암문으로 오르는 딸각고개를 탈 수밖에 없다. 문수봉으로 직접 오르면 비록 경사가 급한 암벽이 있지만 철봉 난간을 박아두어서 그리 위험하지는 않다. 그러나 원칙은 원칙이다. 청수동암문으로 열심히 올라가는데, 앞장선 문수가 우리 사진을 찍어주느라 옆에 둔 지팡이가 순식간에 없어졌다. 다행히 바로 밑에 내려가는 아저씨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왜 남의 것을 말도 없이 가져 가냐고 호통 쳐서 빼앗았지만, 아저씨의 표정에는 미안한 기색이 별로 없다. 우리 사회의 뻔뻔함은 산에서도 예외가 없다.
아무튼 문수는 오늘 돈을 많이 벌었다. 비싼 지팡이를 두 번이나 잃어버리고도 다시 찾았으니, 지팡이 두 번 살 돈을 확보한 셈이다.
(4) 대남문을 지나 대성문으로 간다. 이 구간에는 그저께 내린 눈이 얼어붙은 채로 아직 조금 남아 있어 길이 미끄럽다. 문수회장의 지시에 따라 다들 아이젠을 갖고 왔지만 일부 인사들은 귀찮아서 그냥 가다가 미끄러진다. 게으름은 벌을 받는다. 덕영이의 명언을 빌리면, 흐르지 않는 물에는 이끼가 낀다.
대성문에서 형제봉 쪽으로 내려오다가 영불사가는 길로 해서 정릉으로 간다. 오후가 되니 날씨는 완전히 봄날이다. 이 구간은 사람도 별로 없다. 정릉에서 5시간의 산행을 마감한다. 일요산행 치고는 길고 힘들었지만 연말의 주독을 씻어내는 데는 효과가 클 것이라고 자평들을 한다. 일요일마다 사모님을 모시고 스포츠 댄스를 배우는 덕영이는 먼저 간다. 은수 집 앞의 사바사바 치킨 집에서 생맥주와 간장치킨으로 간단히 뒤풀이를 마감하고, 당구나 2차 없이 헤어진다. 오랜만의 절제된, 담백한 산행이다. 같이 해 준 친구들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