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교회는 은사는 있어도 이 사랑의 법이 적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은 장차 되어 질 미래적인 사건으로만 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향해 ‘사랑을 추구하라’(고전14:1)고 당부합니다.
사랑이 장차에 될 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착수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전 13장은 12:31절부터 시작이 됩니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가장 좋은 길은 다른 차원의 길입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의 은사와 존재로 임하신 사랑의 차이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전체의 결론을 맺습니다(고전13:13)
사랑은 믿음의 결과요 목적이기 때문에 완성되고 성취되어야 합니다.
믿음에 의한 진화의 종국이 바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은사와 사랑은 별개입니다. 나타나심과 존재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오면 은사는 끝이 납니다(8-10절)
예수님은 성령의 나타나심도 가지시고 사랑도 가지셨습니다.
그리스도를 그 안에 모신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은사도 물론 필요하지만 그 은사보다
사랑 곧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분을 나타내는 일이 중요한 마지막 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의 부활만 있고 그 부활과 생명이 자신 안에 있는
부활의 신앙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면 은사는 나타나지만 사랑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13:1)
만약 말 속에 핵심인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됩니다.
따라서 설교는 주님께서 내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처럼(요6:63)
사랑으로 역사하는 영과 생명의 레에마의 말씀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고전4:20)
계시록은 말싸움이어서 흡사 선거 유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말싸움에서 안 될 것 같으면 거짓말을 하고 중상 비방합니다.
지금 정치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입들의 전쟁을 한 번 보세요.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2)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하는 말은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 기름집 아들은 참기름 냄새라도 나는데 사랑의 집안 아들이 사랑이 안 나오면 어쩌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은사만 있고 반석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주님께서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 이건 큰일입니다(마7:22-23)
그러므로 은사의 사람과 그리스도의 형상과 속성의 사람은 서로 다를 수가 있습니다.
의료행위를 한다고 다 의사가 아니지요. 의사의 정신은 오직 의사만 갖습니다.
돌팔이는 오로지 환자의 병만 나으면 된다는 생각을 갖는 겁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아무 유익이 없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의지로도 가능한 일입니다.
예를 들면 노동계의 전 아무개처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를 노동계의 예수라고 부릅니다.
그 사람의 희생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의사, 열사와 같이
사랑 없이도 명분이 있는 일에 자신의 몸을 내 던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본인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이 있어야 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적인 인간의 사랑은 배신으로 인한 증오로 끝이 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원한 사랑에는 반드시 동반자가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느니라’(고전13:4-7)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나타나는 행위들인가 아니면 어떤 상태들일까요?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인데 왜 못 참아 이런 식으로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오래 참는 다는 것은 사람의 성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성격대로라면 채찍으로 성전을 엎어버리신
예수님은 사랑이 하나도 없는 분이 되고 맙니다.
위의 내용들은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의 속성이지 인간의 타고난 속성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인해 안 하기도 하고 사랑으로 인해 할 수 있는 속성이며 능력입니다.
사실 사람이 자신이 하기 싫어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싫어집니다.
시기 자랑 같은 것이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싫어집니다.
성령이 싫어하시므로 안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긍정적인 행함의 요소도 그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그 사랑으로 인해 본성적으로 그렇게 되어 갑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이 모든 것(7절)은 바로 그 무엇이 됩니다.
의미 있는 다수이며 여러 가지입니다.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은 그 목적 때문입니다.
사랑은 어떤 목적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사랑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미움과 증오의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활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져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의 자녀로 new born한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책망과 격려와 생명과 양식, 위로, 채찍
그리고 징계 등을 총동원해서 반드시 사랑의 사람으로 양육해 가십니다.
만일 사랑으로 진행이 되어가지 않으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을 받아
회심하여 중생한 자로 발견이 되어 영생을 얻어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로 성령의
인침을 받아 거룩하게 되어 주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구원의 사람인가를 확인하세요.
예언 방언 지식은 은사 곧 믿음의 도구들이므로 결국은 폐하게 됩니다(고전13:8)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는 예언 방언 지식 이런 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존재 자체이므로 영원히 폐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있는 생명력입니다.
은사는 성령의 나타나심이므로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우리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항상 붙어 있습니다.
사랑은 살아있고 존재하고 역사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랑의 역사(labor prompted by love 살전1:3)라고 말씀합니다
존재인 사랑이란 명사에서 동사인 사랑한다는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언과 방언과 지식이 사랑과 대조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은사들은 사랑에서 나온 영향력이지만 사랑은 그 본체입니다.
나타나는 은사만 알면 성령은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단순한
영향력일 거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제3위 하나님이십니다.
보통 은사들은 육체적인 개념들이 많아서 부분이라고 말씀합니다(고전13:9)
그래서 전체와 부분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완전과 불완전한 것 위의 것과 아랫것의 대비입니다.
온전한 것은 장성한 것 그리고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됩니다(고전13:10-11)
그러나 부분적인 것은 어린아이이며 구리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합니다.
장성한 자와 어린아이는 말, 깨달음과 생각이 다릅니다.
차원의 차이며 위엣 것과 아랫것의 차입니다.
지금 피조물들이 이 아랫것들에게 복종하면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장성한 자는 어린아이의 말과 깨닫는 것과 생각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때가 달라서 자신의 때가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인데 바로 이 길을 보아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고전12:31)
사랑이 되면 거울(반사, 그림자)로 말미암아 보던 것이 얼굴의 실체를 봅니다.
사도요한은 이를 두고 보고 듣고 만졌다고 표현하는데(요일1:1) 실감했다는 말입니다.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알리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함과 같이 확실하게 온전히 안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나를 알리신 것을 이제 내가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를 알아가는 것은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주를 얻으면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이 발견되고 주께 붙잡힌 것을 붙잡는 것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을 믿으며 바라며 하는 말씀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롬8:18)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롬8:22-23)
이것은 우리의 바람이 되고 사랑은 그 바람의 성취물입니다. 소망의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은 과정이지만 사랑은 완성의 단계입니다.
그리고 항상 있는 것입니다(고전13:13)
왜 고전13장을 12장과 14장 사이에 끼워 넣었을까요?
고린도교회의 상태는 현재 성령의 나타나심의 은사만 있고 사랑에 대한
믿음과 소망의 과정이 있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잘 듣고 성령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므로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힌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는 온전한 믿음에 의해 사랑을 향한 소망이 확실해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주께 영광을!!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