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에페 1,17-18)
연중 제 22 주일이며 9월의 첫 번째 주일인 오늘 우리가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로서 살아가는 삶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자세는 어떠한 것인지를 이야기합니다.
우선, 오늘 제 1 독서의 예레미야서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직의 사명을 받은 예레미야가 그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내적 외적 갈등과 그가 마주하게 된 시련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이 같은 상황을 묘사하는 데에 있어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예언자로서의 자신의 삶은 모든 이의 조롱감이 되는 것이며 그의 예언자로서의 모든 날들은 치욕과 비웃음의 날들이었음을 자조적으로 고백합니다. 심지어 예레미야는 그로 인한 고통이 너무도 커 이제는 하느님을 기억하지도, 더 이상 그 분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그러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처절히 고백합니다.
“‘그 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 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예레미야는 이 고백을 통해 제 아무리 하느님께서 주신 그 예언의 사명을 거부하려 해도 하느님의 말씀이 마치 심장 속에서 불타오르는 듯 그 힘이 너무도 강해 그것에서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예언자의 삶을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느님 말씀의 힘에 완전히 사로잡힌 예언자의 삶”, 오늘 제 1 독서는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오늘 제 1 독서의 말씀과 같은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예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모습을 전합니다. 지난 주 복음에 바로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의 명 대답, 곧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대답으로 예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은 베드로가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를 수여받는 모습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말씀은 바로 이전 상황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칭찬과 함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영예를 얻은 베드로가 예수님께로부터 무서운 호통과 함께 심지어 사탄이라 불리며 예수님께로부터 매몰차게 내침을 당하는 모습을 전합니다.
아니 도대체 왜 예수님은 방금 전까지 베드로를 칭찬하며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를 주고 또 베드로에게 지상 교회의 주춧돌이 될 것이라 약속하시던 그 예수님께서 왜 갑자기 돌변하여 베드로를 사탄이라 칭하며 매정하게 그를 내쫓기까지 하신 걸까요? 예수님의 심경에 갑자기 무슨 큰 변화가 생겨나기라도 한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그토록 무섭도록 돌변하게 만들 정도로 베드로가 무슨 잘못이라고 한 것일까요? 베드로는 대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스승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말을 들어야만 했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지, 다시 말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엇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구약의 약속된 메시아, 세례자 요한 또는 예언자 중의 하나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관점, 곧 인간 중심적 관점의 반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본인들의 처지와 상황 속에서 그들이 바라고 희망하는 바 그대로, 그 모습을 예수님께 투영하여 자신이 바라고 희망하는 것을 예수님에게서 찾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본 모습을 보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보고픈 모습만을 예수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신 예수님께서 그렇다면 나와 함께 하는 제자들, 다른 사람들이야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적기에 그럴 수 있다 이해한다하더라도, 나와 언제나 함께 하는 제자들은 예수님 자신의 본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묻고자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너무도 훌륭히 정답을 이야기했지만, 그런 베드로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이 바라고 희망하는 바의 메시아 그리스도를 바라고 있었기에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님이 앞으로 겪으셔야 할 고통과 수난의 시간들을 이야기하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이렇게 반박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ㄴ)
그러자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베드로를 매몰차게 꾸짖으시며 다음의 말씀을 그의 잘못을 일깨워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방금 전까지 예수님께로부터 교회의 주춧돌이 되어 바로 베드로라는 그 주춧돌 위에 지상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약속을 받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걸림돌이 된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분명히 지적하시듯 베드로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가 바라고 희망하는 대로만 생각하고 정작 하느님이 뜻하시는 바는 거부하려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고서도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일을 보려하지 않고 내가 바라고 희망하는 사람의 일만을 보려고 하는 모습, 바로 이 모습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모습이며 우리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일이 우선이 아닌 하느님의 일을 우선하는 마음을 가져야 함을 일깨워주시며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이들의 자세를 다음의 말씀으로 일러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ㄴ)
예수님의 이 말씀 안에는 세 가지의 명령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자신을 버리는 것, 둘째로 제 십자가를 지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우선 첫째로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일깨워주신 사실, 곧 사람의 일이 우선이 아닌 하느님의 일을 우선시 하는 마음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내 뜻과 나의 의지로 대변되는 ‘나’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지’를 우선시 하는 믿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한편, 두 번째 명령인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각자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과 고통의 십자가, 곧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 있어 동반되는 삶의 고통을 우리가 기꺼이 짊어져야 함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나 홀로 아무도 가지 않은 미지의 길을 개척해 가는 외로운 길이 아닌, 예수님이 이미 걸으신 그 길, 그 길로 나서 예수님이 남겨주신 발자취를 따라 그 분의 뒤를 따르는 것임을 말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갖추어야 할 믿음의 자세와 삶의 태도를 제자들에게 일깨워주십니다.
이처럼 하느님께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 분의 뒤를 따르는 이들의 갖추어야 할 믿음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오늘 제 1 독서와 복음의 말씀의 흐름은 오늘 제 2 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그 완성을 이룹니다.
오늘 제 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글을 통해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야 함을,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배임을 강조하며 온갖 유혹이 우리를 괴롭히는 현세에서 벗어나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힘 있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죽음의 문화로 대변되는 현대의 사회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 분의 뒤를 따르려 하는 우리들을 유혹하며 하느님의 뜻이 아닌 다른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려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현대의 사회 안에서 하느님을 따르는 길이 너무나 어렵다고 아니 귀찮고 성가시다며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우리를 유혹하는 물질주의와 상대주의로 빠져들어 진리가 아닌 어둠과 죽음의 문화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의미에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진 하느님의 말씀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다시금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귀여겨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2014년 우리를 찾아온 이국 만 리 먼 땅, 푸른 눈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자신을 기다리며 환호하던 아시아청년들을 향해 다음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진지하며 물어보라며 같은 질문을 세 번에 걸쳐 반복하여 이야기하셨습니다.
“주님! 제 삶에서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황님의 이 질문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시금 우리에게 제기되며 이 물음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그 해답 역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에페소서의 말씀을 인용한 복음환호송의 말씀이 바로 그러합니다. 복음환호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에페 1,17-18)
오늘 복음환호송에 인용된 에페소서의 이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고 진리의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심으로서 물질과 쾌락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우리를 불러 주시는 하느님의 부르심만을 찾아 그 분이 들려주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충실한 제자가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당신 말씀의 부르심을 통해 세상이 주는 헛된 가짜 희망이 아닌 말씀을 통한 진실되고 참된 희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여 주심으로서 우리 모두를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느님을 믿고 이 하느님께 의지하여 예수님의 뒤를 따라 나서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그 길에 함께 해 주시며 여러분 모두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약속처럼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때, 우리에게 영원한 상급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진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여러분 모두가 각자의 삶에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름으로서 하느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참 신앙인이 되시기를 언제나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진리의 성령으로 저희를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아버지의 뜻만을 찾아, 그리스도의 말씀에 충실한 참 제자로서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희망이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소서. 아멘.”(본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