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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5 편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레반트에 미친 영향
.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
. 1935년
95:0.1 인도가 동 아시아에서 많은 종교와 철학을 낳은 것처럼, 레반트(*)도 서양 세계에서 신앙의 고향이었다. 살렘 선교사들은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이란, 아라비아 등 서남아시아 전역에 마키벤타 멜키세덱의 복음을 선포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결실을 맺었지만, 다른데서는 성공한 정도가 달랐다. 그들의 실패가 지혜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 레반트 : 동부 지중해 연안의 지역 (레바논ㆍ시리아ㆍ요르단ㆍ팔레스타인ㆍ이스라엘)을 가리킨다.
1. 메소포타미아의 살렘 종교
95:1.1 기원전 2000년이 되자, 메소포타미아는 셋 족속의 가르침을 거의 잃어버렸고, 침략자들의 초기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일곱째 날을 존중하는 아담 족속의 관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대인은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금기를 팔레스타인으로 가져갔고, 이러한 금기는 일곱째 날(샤바툼)을 지키는 바빌로니아의 풍습에 기초를 두었다.
살렘의 가르침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종교를 개선하려 했고, 150년 넘게 우세했지만, 예전의 신앙에 차츰 무릎을 꿇었다.
살렘 선생들은 메소포타미아 신들의 수를 크게 줄였고, 여러 신 가운데 땅과 바다와 하늘의 신인 벨 ㆍ이아ㆍ아누를 최고로 올려놓았다. 다른 지역에서 여러 삼신조가 생겨났고, 모두 안드 종족과 수메르인의 삼위일체 가르침에서, 멜기세덱의 세 동그라미 표시를 믿는 살렘 사람들의 신앙에서 기반을 두었다.
살렘 선생들은 성교와 다산의 영인 이시타르의 인기를 완전히 이기지 못했다. 메소포타미아에 두루, 여자의 일생에 한 번, 낯선 사람들의 품에 안기는 것이 보편적 풍습이 되었다.
95:1.6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초기에 어지간히 진보했지만, 살렘 선교사들은 사회 개혁을 일으키려는 계획에 실패했고, 더 중요한 영적ㆍ철학적 가르침이 모두 패배 속에 사라져 버렸다.
복음이 실패하자 이시타르의 제사가 유행하였고, 팔레스타인에서는 아스타롯, 이집트에서는 이시스, 그리스에서는 아프로디테, 북쪽 부족들 사이에서는 아스타르트로 알려졌다. 바빌로니아 사제들은 점성술로 다시 돌아섰다. 점성술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몇 세기 동안 부흥을 누렸고, 사제 계층은 갈수록 더 악화되었다.
멜기세덱은 만물의 아버지요 조물주인 유일한 하나님에 관하여 가르치고, 오직 믿음으로 신의 은총을 얻는다는 복음을 전파하라고 추종자들에게 전에 경고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멜기세덱 선교사들은 도덕 기준을 그 사람들에게 너무 높이 올려놓았다. 그들은 너무 많은 일을 시도했고, 고귀한 운동은 옆길로 빠져 실패하였다.
키시에 있던 살렘 본부는 한 세대 안에 종말에 이르렀고,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선포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거의 사라졌다. 여기저기 흩어진 작은 무리들은 유일한 창조자를 믿는 믿음을 계속 이어갔고, 메소포타미아 사제들의 우상 숭배와 부도덕에 맞서 싸웠다.
가르침이 거부되고 난 다음 기간에 살았던 살렘 선교사들은 구약 시편의 많은 부분을 돌에 새겼으며, 후일에 히브리 사제들은 포로 생활 시절에 이를 발견했고, 유대인이 저술했다고 여기는 찬송 모음에 합병하였다. 바빌론에서 온 이 아름다운 찬송들은 벨마르둑의 성전에서 기록된 글이 아니다. 이 찬송들은 살렘 선교사들 후손의 작품이었다. 욥기는 살렘 학교의 가르침을 잘 반영한다.
95:1.11 메소포타미아의 종교 문화가 아메니모프와 이크나톤의 작품을 통해서, 히브리 문학과 예배 문학으로 들어갔다.
2. 이집트의 초기 종교
95:2.1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이집트에서 뿌리를 내리고, 나중에 유럽으로 퍼졌다. 나일강 유역의 진화 종교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있던 우수한 핏줄, 곧 놋 종족, 아담 종족, 그리고 후일에 안드 민족들이 도착함으로 정기적으로 강화되었다. 유대인은 바빌로니아인으로부터 세계 창조에 대한 관념을 받았지만, 이집트인으로부터 신의 섭리 개념을 얻었다.
이집트에서 살렘의 가르침을 더 유리하게 만든 것은 철학이나 종교의 성향이 아니라, 정치 및 도덕의 성향이었다. 지도자는 왕좌를 쟁취한 뒤에, 그의 부족 신을 모든 다른 신의 창조자라고 선포하였다.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언제나 세력을 넓혔지만, 진화하는 다신교 개념을 이기지는 못했다.
이집트의 40 부족은 저마다 신을 가졌고, 하나는 황소, 하나는 사자, 이런 따위를 숭배하였다.
이집트인은 벽돌로 만든 지하 저장실에 묻힌 시체들이 썩는 반면, 벽돌이 없는 무덤에 놓인 시체들은 소다가 스며든 모래의 작용 때문에, 보존되는 것을 관찰하였다. 몸을 보존하는 것이 미래 생애를 수월하게 만든다고 이들은 믿고 있었다.
사제들은 관에 부적이 되는 구절을 새기곤 하였고, 이것이 “지하 세계에서 심장 빼앗기는 것”을 막는 조치라고 믿었다. 이러한 주문이 수집되었고, ‘사자(死者)의 서’로 보존되었다.
95:2.6 이 시절의 미신은, 침이 병 고치는 약으로서 효력이 있다는 널리 퍼진 믿음에 잘 나타나는데, 이 관념은 이집트에서 기원이 있었고 거기서부터 아라비아와 메소포타미아로 퍼졌다.
이집트인은 별들이 죽은 사람의 혼이 살아남는 것을 가리킨다고 오랫동안 믿었다. 큰 피라미드의 입구로 이끄는 길은 북극성을 가리켰다.
비스듬히 내려오는 태양 빛이 땅을 향하여 구름 속의 구멍을 통해서 통과하는 것을 관찰했을 때, 사람들은 임금과 기타 의로운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늘 계단을 내려놓는 것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멜기세덱이 나타났을 때, 이집트인은 주위의 민족들보다 높은 수준의 종교가 있었다. 주문으로 적당히 준비가 되면, 오시리스의 재판실까지 갈 수 있고, 죄가 없으면, 복스러운 나라로 입장이 허락된다고 믿었다. 혼을 저울에 달아서 모자라는 것이 발견되면, 지옥의 삼키는 여신에게 맡겨진다고 믿었다. 비교적 진보된 미래 생명의 개념이었다.
땅에서 사람이 지은 죄 때문에 저 세상에서 재판받는다는 개념은 이집트로부터 히브리 신학으로 전해졌다. 재판이라는 낱말은 히브리 시편에 꼭 한 번 나타나는데, 이집트인이 바로 그 찬송가를 썼다.
3. 도덕 개념의 진화
95:3.1 이집트의 문화 및 종교는 안드 종족이 살던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했고, 히브리인과 그리스인을 통해서 서양 문명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인의 사회 및 윤리적 이상은 나일강 유역에서 점차로 발달하였다.
도덕의 진화는 계시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신성한 영이 깃들기 때문에, 사람은 체험적 삶에서 영적 가치 기준을 발달시키고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양심과 성품이 진화하는 범위는 둘째 에덴과 살렘의 진리 선생들이 나타나면서 확대되었다.
이 시대에 이집트인의 세 가지 표어는 진리-공정-의(義)이었다. 유란시아에서 순전히 인간다운 종교 가운데 아무것도, 나일강 유역에서 한때 있던 이 인본주의에서 나타난 사회적 이상과 위대한 도덕성을 일찍이 뛰어넘은 적이 없다.
이러한 토양 속에서 살렘 종교의 남은 교리가 번성했다. “평화로운 자는 생명을 얻고, 죄 있는 자는 죽음을 받는다.” “사랑받는 일을 행하는 자는 마음이 평안하며, 미움받는 일을 하는 자는 죄가 있다.” 후일의 선악 개념을 미처 생각해 보기도 전에, 나일강 유역의 거주자들은 윤리적 기준에 따라서 살았다.
이집트인은 도덕적이었으나 영적 성품이 아주 높지는 않았다. 6천 년 동안에 위대한 선지자가 겨우 4명 이집트에서 일어났다. 아메니모피를 한동안 따랐고, 옥반을 죽였다. 이크나톤을 건성으로 받아들였고 모세를 물리쳤다. 유일한 하나님을 외치는 살렘의 가르침을 위하여 아브라함이, 그리고 나중에는 요셉이, 이집트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4. 아메니모피의 가르침
95:4.1 때가 되자, 많은 사람이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고 더러는 아메니모피라 불리는 한 선생이 나타났다. 이 예언자는 양심을 가장 높은 정점까지 올려놓았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고 가르쳤으며, 태양신에게 부탁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했다.
아메니모피는 재산과 행운이 하나님의 선물이라 가르쳤고, 이 개념은 히브리 신학에 영향을 미쳤다. 이 현자의 가르침(지혜서)은 나중에 히브리어로 번역되었고, 구약이 글로 쓰이기 전에 그 민족의 신성한 책이 되었다.
나일강에 있던 이 지혜로운 사람은 “재산은 날개를 달고 날아가 버린다”―땅에 있는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고 가르쳤다. 그의 큰 기도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사람들의 말”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행위”로 향하라고 타일렀다. 그의 가르침의 요점은 이러했다: 일은 사람이 꾸며도 결과는 하나님이 정한다. 히브리어로 번역된 그의 가르침은 구약에서 잠언의 철학이 되었다. 후일에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필로는 지혜서의 사본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아메니모피는 진화로 생긴 윤리와 계시된 교훈을 보존하였고, 히브리인의 종교와 그리스인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히브리인의 잠언에서 15장ㆍ17장ㆍ20장, 그리고 22장 17절에서 24장 22절까지는 거의 글자 그대로, 아메니모피의 지혜서에서 가져갔다. 히브리인 시편의 1편은 아메니모피가 썼고, 이것은 이크나톤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5. 놀라운 이크나톤
95:5.1 아메니모피의 가르침이 이집트인의 지성에서 사라지고 있었는데, 살렘의 의사의 영향을 통해서, 왕실의 한 여자가 멜기세덱의 가르침을 지지하였다. 이 여자는 아들 이크나톤에게 하나님의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였다.
육체를 입은 멜기세덱이 사라진 뒤에, 그때까지 어떤 인간도 이크나톤처럼, 살렘에 계시된 종교의 개념, 그렇게 놀랍게 뚜렷한 개념을 가진 적이 없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영적 쇠퇴가 깊어지는 이 시기에, 그는 엘 엘리욘(최고자 하나님, Most High God), 유일한 하나님의 교리를 이집트에서 살려 두었고, 이것은 미가엘의 미래 수여를 위한 종교적 배경에 중요했다. 이 공훈을 인정해서, 아이 예수가 이집트로 옮겨졌다. 거기서 이크나톤의 영적 후계자들 가운데 더러가 아이 예수를 보았다.
이크나톤이 모세만큼 융통성과 정치적 천재를 보였더라면, 이집트는 일신교를 믿는 큰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놀라운 각오를 가지고, 이 젊은 통치자는 과거와 인연을 끊고, 자기 이름을 고치고 (*고치기 전 이름은 아멘호텝 4세) 수도를 버리고, 새로운 도시를 짓고, 한 민족 전체를 위하여 새로운 예술과 문학을 창조했다. 그는 민족의 물질적 안정과 번영을 마련해 주지 못했고, 그의 종교적 가르침에 불리하게 반응했다.
놀랍도록 선명한 비전과 단 한 가지 목적에 마음을 쏟은 이 사람이 모세같이 정치적 지혜가 있었더라면, 서양 세계에서 종교 진화와 진리 계시의 역사 전체를 바꾸었을 것이다.
95:5.6 아주 지혜롭게도 이크나톤은 태양신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일신교를 세우려고 애썼다. 이크나톤은 신이 아버지요 어머니인 것에 관하여 당시에 존재했던 아톤 신앙의 일반화된 교리를 취하여 한 종교를 창시했으며, 이것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가깝고 경건한 관계를 인정하였다.
이 젊은 임금은 글을 많이 썼고,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해설서의 저자였는데, 31장으로 된 이 책을 다시 권력을 잡은 사제들이 모조리 없애버렸다. 이크나톤은 또한 찬송을 137편 썼는데, 이 중에 열두 편이 구약의 시편에 간직되어 있고, 히브리인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이크나톤이 일상에서 내세운 종교의 최고 단어는 “의(義)”였고, 그는 옳게 행하는 개념을 재빨리 확대하여, 국가의 윤리뿐 아니라 국제 윤리까지 포함시켰다. 이집트의 가족생활은 도덕 문화를 간직하고 육성하는 데 많이 이바지했고, 팔레스타인에서 후일에 유대인에게 훌륭한 가족생활을 하도록 격려하였다.
그는 후일의 히브리인이 가진 개념보다 훨씬 높은 신(Deity)개념을 가졌지만, 국가를 세우는 자의 목적에 소용되기에는 너무 앞선 것이었다.
이크나톤의 사위는 사제들을 따라가서 다시 옛 신들을 숭배하였고, 이름을 투탕카멘으로 바꾸었다. 서울은 테베로 돌아왔고, 사제들은 땅에서 살찌고 궁극에는 온 이집트의 7분의 1을 소유하였다. 대번에 바로 이 계급의 사제들 중에 하나가 대담하게 왕관을 빼앗았다.
95:5.11 그러나 사제들은 일신교의 물결을 이길 수 없었다. 이 개념은 이크나톤이 죽은 지 오랜 뒤에도,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불타올랐다. 이크나톤은 온 이집트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열심히 선포했다.
이크나톤의 교리는 너무 앞선 종교를 제시했기 때문에 오직 교육받은 이집트인이 그의 가르침을 넉넉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농사에 종사하는 하층 계급은 결코 그의 복음을 정말로 알아듣지 못했고, 따라서 사제들과 함께, 예전의 숭배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든 사람이 불멸한다는 가르침은 이집트인에게 너무 진보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크나톤의 가르침대로, 누구나 구원받고 부활한다는 민주주의가 궁극에 이겼다. 나중에 이집트인은 말을 못하는 동물이 살아남는다고 믿을 정도까지 되었다.
그의 영향은 몇 세기 동안 팔레스타인과 그리스에서 지속되었고, 이렇게 이집트는 나일강의 진화된 문화와 유프라테스의 계시된 종교를 후일은 종족들에게 전한 중개인이 되었다.
이집트에서 머무른 결과로 이 베두인 족속은 이 가르침 가운데 많은 것을 가져갔고, 이크나톤의 교리 가운데 상당 부분을 그들의 민족 종교 안에 지속시켰다.
6. 이란의 살렘 교리
95:6.1 멜기세덱 선교사들 중에 더러는 이란으로 가서 5백 년 동안 선교가 진척되었는데, 통치자가 바뀌어 살렘 종파를 거의 멸종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에 조로아스터가 살렘 복음의 불꽃을 다시 살리는 듯하였다.
조로아스터는 우르에 순례하러 가서 칼리가스티아와 루시퍼 반란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민족의 종교를 개선하기 시작했다. 우르에 전통이 남아 있던 일곱 으뜸 영의 이야기를 들었고, 따라서 아무라 마즈다 밑에 일곱 최상의 신이 있는 세계를 상상하였다.
이 새 종교는 기도하고 의식을 치르는 종교가 아니라, 행동―일―하는 종교였다. 이 종교의 하나님은 최고의 지혜를 가진 존재요 문명의 후원자였다. 이것은 악ㆍ무위(無爲)ㆍ후진성을 감히 없애려고 한 호전적 종교 철학이었다.
조로아스터는 불의 숭배를 가르치지 않았지만, 영의 상징으로서 불꽃을 이용하려 했다.
조로아스터교는 일곱 으뜸 영에 관한 달라마시아 및 에덴의 가르침을 지속한 유일한 종파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순수한 이원론(선과 악)이 아니었다. 후일에 와서야 선과 악이 동등한 조건 아래에서 싸운다고 믿었다.
95:6.6 유대인의 천국 및 지옥의 전통, 악마에 관한 교리는 루시퍼와 칼리가스티아의 전통에 근거를 두었지만, 주로 유대인이 페르시아에 지배를 받던 시절에 조로아스터교 신자들로부터 얻었다. 이집트인처럼 조로아스터는 “심판의 날”을 가르쳤지만, 이 사건을 세상의 끝과 연결하였다.
이란의 사제들은 미트라 숭배를 부활시켰는데, 이것은 레반트와 지중해 지역에 두루 퍼졌고, 한동안 유대교와 기독교와 같은 시대에 경쟁했다.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은 이처럼 유대교와 기독교, 이를 통해서 모하메드교, 이 세 가지 큰 종교에 연달아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조로아스터의 드높은 가르침과 고귀한 찬송가들은 파르시 교도들의 왜곡된 복음과 거리가 멀다.
이 위대한 사람은 살렘의 불빛이 끝내 꺼지지 않도록 지키려고 그리스도 이전 6세기에 솟아난 그 독특한 무리 중의 한 사람이었다.
7. 살렘의 가르침이 아라비아에 미친 영향
95:7.1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아라비아에서 최근에 자리를 잡았지만, 군사력이나 국가의 강요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마키벤타의 지시는 살렘 선교사들을 주춤하게 하였다.
동양과 서양이 각자 불교와 기독교로 갈라진지 오랜 후에도 아라비아 사막은 몇 천 년 동안 변화가 없었다. 각 부족은 자체의 주물을 모셨고, 가족을 지키는 수호신을 모시는 가족들이 많았다.
아라비아에 두루 여기저기서, 흐릿한 유일한 하나님 개념에 집착한 가족과 씨족들이 있었다. 그러한 무리들은 멜기세덱ㆍ아브라함ㆍ모세ㆍ조로아스터의 전통을 소중히 간직했다. 예수의 추종자들이 “온 세계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더 심각히 받아들이고, 사회적 요구 조건을 너무 엄하지 않게 고안했더라면, 아라비아는 예수의 단순한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레반트의 위대한 일신교가 아라비아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 사실인데도, 그 신앙은 일신교였다.
거의 모든 아라비아 부족이 메카에 있는 어느 성전의 검은 돌 주물을 숭앙하였다. 이 장소에 나중에 이슬람 종교가 자리 잡게 되었다. 유대인이 화산의 신 야웨을 모신 것 같이, 아랍인은 카바의 돌을 떠받들었다.
95:7.6 이슬람의 장점은 뚜렷하고 윤곽이 분명하게, 알라가 하나밖에 없는 신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약점은 여자를 천대한 것, 군사력을 종교의 선포와 관련시킨 것이다. 이슬람은 만물의 유일한 신, 우주의 신을 강하게 고수해 왔다.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이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