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진여원 원장 혜원 스님
‘슬픔 머무는 곳’ 넘어 ‘푸른 꿈 키우는 공간’으로 우뚝!
동대 불교학과 졸업 직후 2년 동안 전국 돌며 ‘만행’
재가법사 7년 활동한 후 현각 스님 은사로 ‘출가’
‘자타불이’ 정신 입각해 원장·원생 아닌 부모·자식
아이들 자존·자립 키우려 ‘결연·디딤돌’ 통장 개설
선택·결정력 북돋아 주려 옷 한벌도 직접 고르게 해
아동학대 신고 증가 추세 정신·심리 치료비 가중
2015년 전후로 후원 급감 정부 지원 부족 안타까워
문 닫는 시설 점차 많아져 절박한 아이 머물 곳 줄어
“아이들 희망씨앗 틔우려 힘겨워도 절망 않을 터”
진여원 원장 혜원 스님은 “경제난과 코로나 사태가 겹쳐 후원이
급감하고 있다”면서도 “아이들의 꿈만은 사라지게 할 수 없기에
절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회복지법인 성불복지회가 운영하는 진여원은 충주시가 인가한
지역 내 유일의 아동복지시설로 현재 어린이·청소년 등
36명의 원생들이 생활하고 있다. 1995년 미인가 시설로 시작해
2006년 인가 받은 이곳은 상처 받은 아이들의
‘슬픔이 머무는 곳’을 넘어,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레슬링 선수가 나왔고,
충주 피아노대회에서 대상을 받아오는가 하면,
경기도 민요대회에서 1등한 인재도 배출했다.
대학 진학률도 높다. 아이들의 개성이 유감없이 표출되는
진여원이기에 가능한 일일 터다. 그 중심에 혜원(慧原) 스님이 있다.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한 직후 정처 없이 길을 떠났다.
이 세상 한복판을 무소의 뿔처럼 혼자 걸어보고 싶었음이다.
고등학교 불교학생회 활동 때부터 큰스님들에게 자주 듣곤 했다.
‘논두렁을 베개 삼아 자다가
이 삶을 마쳐도 좋다고 여기는 사람이 스님이야!’
그때부터 ‘만행 원력’을 다짐했을 것이다.
대학 재학 당시 ‘불교유적연구회’를 결성해 고적에 새겨진
선인들의 마음을 글로 전하며 쌓아온 내공도
미지의 세계를 향한 걸음을 재촉했을 터다.
인연 있는 절 만나면 방 한 칸 얻어 숨을 돌렸다.
혹, 문전박대당해도 원망하지 않았더랬다.
떨어진 낙엽 긁어모아 덮고 잠을 청하면 될 일이었다.
하늘의 별들을 온전히 볼 수 있어 나름 좋았다.
그렇게 전국을 두 바퀴 돌았다.
그 길 끝에서 훗날 은사인연을 맺은 성불복지회 이사장 현각 스님을 만났다.
학생시절 때부터 염불·기도에 매진했던 터라 재가법사로 7년 동안 활동한 후 삭발염의했다.
혜원 스님이 충주 부대산(富大山) 자락에 자리한
진여원에 처음 들어선 건 2002년이다.
성불복지회가 진여원을 인수하며 인연을 맺었다.
허름한 조립식 건물 하나가 전부였는데 장마철이면 흙덩이들이
건물 틈새로 밀려들어올 정도였다.
헤진 옷이나 이불, 신발 등의 쓰레기가 곳곳에 쌓여 있었다.
당시만 해도 쓰레기 수거 차량이 들어오지 않아
완전히 치우는 데만 3년이 걸릴 정도로 애를 먹었다.
아이들의 정서를 함양시켜 주려면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작은 정원이라도 꾸며야했다. 넉넉한 잠자리를 펴주려면
협소한 공간을 확충해야 했는데 새 건물을 짓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외출했던 아이들이 “아빠!”라 부르며 혜원 스님 품에 안긴다.
마을이 화암리(花巖里)여서일까? 주변은 온통 바위뿐이었다.
큰 돌 하나 치우면 그 만큼의 땅이 없어졌다.
덤프트럭 600대 분량의 흙을 채워 넣었으니,
공간을 다듬은 게 아니라 창출한 셈이다.
기본운영금도 모자란 마당에 인연 닿는 지인들 찾아
동분서주하며 자금을 모았다. 한 푼 모이면 땅 고르고,
두 푼 모이면 철골조 세우고, 세 푼 모이면 시멘트 공사에 들어갔다.
창고에 쌓아둔 문이 있다는 풍문이라도 들으면
당장 가져와 방틀에 맞춰보곤 했다.
2층 규모 생활관의 1층을 짓는데 거의 5년이 소요됐다.
남녀 숙소와 번듯한 식당, 공연할 수 있는 강당을 마주한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웃음을 마음껏 발산했다.
남모를 큰 상처를 안고 있던 아이들. 반발, 열등, 불안감에
휩싸였을 그 아이들을 어떻게 보듬었을까?
“분노조절 장애가 심했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한 번 울면 1시간 내내 그치지 않습니다.
그 아이, 그냥 안아주었습니다. 한 5분 동안은 얻어맞는데,
꼭 안고 있으면 어느새 푹 안겨 있습니다.
다음 날도 울면 또 안아주었습니다.
하모니카, 오카리나, 기타, 플롯, 바이올린을 배워
아이들에게 ‘전수’했습니다. 아이들의 ‘실력’이 늘수록
그만큼의 교감도 깊어졌습니다.”
‘원장과 원생’이 아닌 ‘부모와 자식’ 관계에 초점을 두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다소 큰 아이는 시내로 나가 물건을 훔쳐 경찰서에 붙잡혀 있곤 했다.
혼낸다고 멈춰질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아이들은 값비싼 물건에 욕심 내지 않습니다. 소소한 것들입니다.
큰 액수는 아니지만 고등학생 기준으로 3만5000원의 용돈을 주었습니다.
물론 교통비 등을 제외 한 순수한 용돈입니다.
그 이후 경찰서 가는 일이 현격히 줄었습니다.
진여원이 싫어 나갔다 해도 용돈이 생각나 금방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가까워지며 그들 가슴 속에 굳건히 세워줘야 할 게 무엇인지 간파했다.
“초등학생인 경우 시설 아이라고 해서 또래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아픈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더 깊은 상처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말수가 적고 행동도 피동적입니다. 아이 나름의 자존감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LG와 협약을 통해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인 아이들에게 휴대폰을 주었다.(2006)
아동보호시설 아이들에게 휴대폰을 지원한 건 아마도 진여원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진여원을 후원해 주는 사람들에게 ‘우리 아이들 제주도 구경 한 번 시켜주고 싶다’고 사정해
3000만원을 모아 비행기 타고 바다를 건넜다.(2008)
그해 가을께부터 아이들은 자신의 친구들과 선생님을 진여원으로 초대하기 시작했다.
진여원 생활관은 5년에 걸쳐 완공됐다.
진여원은 아이들에게 옷을 사주지 않는다. 대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값을 준다.
아이들이 가게에 가서 직접 옷을 고르고 결정토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선생님 한 명과 서너 명의 아이들이 외출하는 ‘친밀 프로그램’도 가동하고 있다.
한 가정의 나들이와 유사한 것인데 이 또한 테마파크, 명소 등 아이들이 가고 싶은 곳을 우선으로 한다.
진여원 바로 위에는 화암사가 있다.
현재 극락보전과 산신각만 있을 뿐 대웅전은 없고 터만 다듬어 놓았다.
“대웅전 권선문을 돌려 불사금 7000만 원을 모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사이 대학에 진학한 아이들이 생겼습니다.
용돈, 책값, 기숙사비 등만 뽑아도 한 학생당 한 달 60만원은 있어야 했습니다.
지금이야 일정 수준의 학업성적이면 학자금을 지원 받지만 2015년 전까지만 해도
고려 대상이 아니었기에 매학기 등록금도 내주어야 했습니다.
불사금은 고스란히 아이들의 대학지원금으로 쓰였습니다.”
아이들의 자립심도 키워주어야 했는데 경제관념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
혜원 스님은 아이와 후원자가 1대1로 연결된 결연통장을 만들어 주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퇴소했을 때
무일푼으로 세상을 맞는 것과는 심리적으로 크게 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잔고를 확인한 아이들은 주어진 용돈도 아껴쓰려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통장이 있습니다. 디딤씨앗통장(CDA)입니다.
저소득층 아이들이 매월 저축한만큼 정부가 같은 액수를 적립해주는 시스템인데
36명의 아이들이 부담해야 할 저축을 진여원이 온전히 지원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매월 3만원을 넣었는데
현재는 5만원을 입금하고 있으니 매월 10만원이 적립되는 셈이다.
“학비, 주택 등 긴급자금으로 쓰일 게 아닌 이상 만 23세가 되어야만 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진여원의 형편이 어려워도 이 통장만은 유지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의 아동복지시설 보호아동 현황을 보면 2005년에는 1만9000여명이었고,
2010년에는 1만7000여명, 2015년에는 1만4000여명, 2018년에는 1만2000여명이었다.
점차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출생인구 감소를 감안하면
어른들의 방관으로 거리로 내몰리는 아이들이 아직도 속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18년 연말 기준으로 지난 10년 동안
정서·신체·방임·성 등의 아동학대 건수는 4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심한 학대를 받은 아이는 언어·지적장애까지 겪기도 하는데
이것은 아이의 성장이 멈추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동복지시설이 주거만 책임진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아이들의 정신·심리치료에도 지속적으로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치료비가 만만치 않습니다.
일례로 진여원에 들어오기 전에 기본적인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이 비용만 약 40만원입니다.
수년 간 치료가 필요한 경우 부담감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치료비 대부분이 비급여라는 사실입니다.”
수년 동안 이어져온 불황 탓인지 2015년을 기점으로 후원이 절반 이상 줄었다.
무엇보다 아동복지시설에 대한 정부 지원이 아쉽다고 했다.
“노인복지는 중앙정부로 환원됐는데 아동복지는 아직도 지방자치단체 소관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원 현황이 지자체별로 차이가 큰데
경제자립도가 낮은 충북에서 지원 확대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기업 후원도 수도권에 집중돼 있어 고충은 배가되고 있습니다.
지원은 줄고 비용은 커지다보니 문을 닫으려는 시설들이 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지속적인 치료도 어려운 데다 보호가 절실한
아이들이 머물 공간마저 줄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작은 ‘헬스장’ 하나 마련해 주고 싶지만
2000만원을 마련하기 어려워 수년 째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는 토로에서
당면한 현실을 직감할 수 있다. 코로나 사태로 더 큰 난관에 부딪쳤지만 절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제가 포기하는 순간, 제 아이들의 푸른 꿈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문득, 청년시절 만행을 멈춘 이유가 궁금했다.
“길을 걷는 도중 스쳐갔습니다. ‘전국을 돌겠다는 것도 아집일 수 있겠구나!
내 생각, 내 마음만으로 세상을 사는 게 아니다. 나와 너가 차별 없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세상이 조금은 달리 보였습니다.”
처음부터 원생들을 ‘내 아이’로 품을 수 있었던 연유를 알 법하다.
오늘도 아이들과 게임을 하고, 돌탑을 쌓으며, 최신 인기가요를 듣는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늘 그렇듯 “아빠!”라고 부르며 품에 안긴다.
혜원 스님이 이곳에 존재하는 한
진여원은 ‘슬픔이 머무는 곳’을 넘어 ‘꿈을 키워가는 곳’으로 익어갈 것이다.
‘숫타니파타’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항상 마음을 다스려 내 것이라고 고집했던 모든 것을 놓고 세상을 거니는 사람들.
그들에게 공양을 올리세요!’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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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스님은
동국대와 동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 현재 화암사 주지,
조계종 교정교화전법단장, 성불복지회 진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법무부 장관표창, 조계종 총무원장상을 수상했다.
2020년 8월26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