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을 잃은 소금 비유
누가복음 14장 34-35절 / 34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바리새인이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을 초대한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눅 14:7-14)을 듣고는“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이 있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예수님을 비난하고 멸시하며 반대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서(눅 13:17, 35) 밭과 소와 결혼을 빌미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비유로 들어 하나님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세상을 따라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사는“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눅 14:24)라고 말씀하시면서,‘큰 잔칫집 비유’에 이어‘망대 비유’와‘한 임금의 전쟁 치르는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하시는 것으로 온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 14:25-33).
그리고 이제 지금까지 해 온 말씀의 결론을 이야기 해 주시는 것으로 예수님은 다시 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본문의‘맛을 잃은 소금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앞에서 해 오신 말씀에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말에는 번역이 생략되어 있습니다만, 성경 원문에는“그러므로”란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소금은 사람의 인체에 꼭 필요한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소금이 만일 소금 본연의 맛인 짠맛을 잃어버리면, 그래서 소금이 아무런 맛도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이런 소금은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흙으로도 못 쓰고 비료로도 쓸 수가 없어 화초에조차 사용할 수가 없으니 밖에 버려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소금을 비유적으로 사용하신 것은 이렇게 소금을 비유로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전달하는데 있습니다. 소금은 그 자체가 본연의 맛을 잃을 수가 없습니다. 즉 짠맛을 잃고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그런 소금으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소금을 예수께서‘맛을 잃은 소금’으로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짠맛을 지닌 소금을 이미지로 사용하여서‘맛을 지니지 않은 소금’이란 것이 어떻게 되는지를 전해주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소금은 좋은 것입니다. 소금은 짠맛을 지니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음식에 들어갔을 때는 음식의 맛을 맛있게 냅니다. 소금은 또한 고대 세계에서는 땅의 비옥도를 낮추거나 높이기 위한 방부제로 사용되기도 하고, 어떤 종류의 가마들에서는 촉매제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먹는 음식들이 먹기에 제 맛을 내지 못하고 있으면 언제나 소금을 첨가하여 맛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만, 소금이 그 본연의 맛을 잃으면 그것은 회복할 수 없는 재앙이 될 것입니다. 심지어 소금은 채소를 위한 비료나 거름의 발효율을 조절하는 용도 같은 부차적인 용도로도 사용될 수 없을 것이니,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짝에도 쓸데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맛을 잃은 소금은 식탁에서만 사용 못하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도 사용 못하고 거름으로도 사용 못하여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소금은 집 밖으로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히게 됩니다. 본래 가장 좋은 소금은 식탁용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만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처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맛을 잃은(지니지 않은) 소금 비유’를 들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반대함으로 해서 예수님이 없는 자의 장래란 것이 어떤 재앙에 있는 것인지를 말씀해 주고자 하셨습니다.“하나님 나라의 떡을 먹는 자는 복이 있겠습니다.”란 물음에 예수께서는“하나님 나라의 떡을 먹는 기쁨에 있고자 하느냐?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떡을 먹을 수 있기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신 나를 주로 섬겨 따름에 너희가 있느냐? 너희가 나를 따르는 제자에 있지 않고서는‘맛을 지니지 않은 소금’에 불과하니 그 운명이 어찌 되겠느냐? 흙으로도 거름으로도 쓰지를 못하여 밖에 버려져 사람들이 발로 밟고 다닐 것이 아니냐? 너희 운명이 이와 같을 것이다!”하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겨 따름에 있지 않는다는 것은 소금이 맛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즉, 맛을 지니지 않은 소금과 같습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발휘 되고 있는 맛인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맛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정해 주신 십자가의 구속의 길을 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을 큰 군중이 따르고 있습니다만, 이들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으며,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식사하는 자리에 초대하며 선행을 베푸는 자기 의를 과시합니다만 이들은 세상을 따라 탐욕이 가득한 자였으며, 틈만 보이면 해를 가할 음모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마음은 예수님이 없었으며, 이러한 이들의 운명을 예수님은‘맛을 잃은 소금’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이들에게서 예수님이 비유하신‘맛을 잃은 소금’은 이들에게“이러 이러한 너희에게는 재앙<화, 저주>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셨다는 것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맛을 잃은(지니지 않은) 소금’이 아닌‘맛을 지닌 소금’으로 우리가 이야기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름으로,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께서 함께 하시므로, 우리에게서는 마치 사골진국마냥 예수님으로부터 진하게 우러나오고 있는 맛이요 향기가 있습니다.“하나님 나라의 떡을 먹는 자는 복이 있겠습니다!”라고 한 그 하나님 나라 잔치의 기쁨을 어느 한 때나 두 때가 아닌 늘 맛보고 있습니다. 이 행복함을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여 기뻐하고 있는 우리가 알지, 하나님 나라 잔치 밖에 있는 자들이 어찌 알겠는지요. 이들에게 있으며 이들이 아는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겪는 기쁨과는 전혀 다릅니다. 자신이 기뻐할 수 있는 상황에 한 한 것인데다가 하나님 나라 밖에서 슬퍼하며 고통 중에 있을 자들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잔치의 떡을 먹는 기쁨으로 행복함에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게 하신 일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 잔치의 떡을 먹음에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고난을 당하십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 53장에서 이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종으로 오실 메시야인 예수님이 하실 일을 예언해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우리가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무서운 채찍을 맞아 살이 찢어졌습니다. 우리가 범죄하고도 무사한 것은 여호와의 종이 우리 대신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요, 여호와의 종이 우리 대신 채찍에 맞아 우리 몸이 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목자 없는 양떼 같이 길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 다녔으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자기의 종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종이 고난을 당하고 죽임 당한 것은 여호와의 선하신 뜻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주와 함께 그분의 나라에서 영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먼 나라에 멀리 있는 사람이 자기네들끼리 지절거리는 이야기가 바람을 타고 들려온 한갓 소문거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남이 하는 이야기거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우리가 그분의 곁에서 우리의 눈으로 보고 우리의 귀로 들으며 온몸으로 깨달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인지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 곧 하나님의 영이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님께 받은 영감으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있게 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지혜를 가져다주시는 것에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대략 1600여년에 이르러 40여명의 성경 저자들에 의해서 기록되었으며, 이들은 하나님께 받은 영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으로, 이 성경이 주어진 모든 시대에서,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모든 믿는 자들이 바라보는 예수님에게로 우리의 믿음이 있게 합니다. 이 믿음은 그때의 일을 단지 지금에서 믿는 것에서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우리에게 강림하신 성령님을 통하여 항상 현재적으로 우리를 위한 구속 사역으로 있으며,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 있으며, 우리를 위한 부활로 있으며, 우리를 위한 승천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은 예수님이 하신 그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있게 하시는 것이며,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은 성령님을 통하여 성경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그 예수님에게로 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진리를 보고 듣는 것에 있으며 깨달은 진리와 함께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영감은 언제나 여상하셔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동일하게 영감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보고 듣게 하여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잔치의 떡을 먹는 기쁨에 있는 것은“~~한 자들로 내 집을 채우라.”는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결정이 시행되고 있는 것에서 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반대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으며, 이 믿음이 확고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