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다물역사관(한민족역사탐방)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0.해동역사(海東繹史)
.고려(高麗) 1
살펴보건대, 고려(高麗)의 ‘려’ 자는 음이 ‘리(離)’이다. 장위(張位)의 《발음록(發音錄)》에 “고려의 ‘려’는 평성(平聲)에 권발(圈發)한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은 ‘산고수려(山高水麗)’에서 뜻을 취해온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대개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으므로 고려라고 칭한 것이다. 왕씨(王氏)의 선조에 대해서 동사(東史)에서는 혹 당나라 선종(宣宗)에게서 나왔다고도 하나 이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대대로 신라에서 벼슬하다가 태조의 아버지인 금성 태수(金城太守) 왕륭(王隆)에 이르러서 비로소 송악(松嶽)에 살면서 태조를 낳았다. 태조는 장성함에 미쳐서 궁예(弓裔)에게 벼슬하여 시중(侍中)이 되었는데, 궁예가 정사를 어지럽히자 장사(將士)들의 추대를 받아 드디어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설거정(薛居正)의 《구오대사(舊五代史)》와 당나라의 남은 기록들 및 구양수(歐陽脩)의 《신오대사(新五代史)》,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모두 “왕씨가 고씨(高氏)를 대신해서 나라를 얻었다.”고 하였고, 《송사》에서는 이를 따라 역시 “후당(後唐) 동광(同光)과 천성(天成) 연간에는 그곳의 임금인 고씨가 여러 차례 조공하였으며, 장흥(長興) 연간에는 권지국사(權知國事) 왕건(王建)이 고씨의 왕위를 이어받고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틀린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호삼성(胡三省)이 《통감(通鑑)》의 음주(音註)를 내면서 이미 틀렸다는 것을 상세하게 밝혔으므로 지금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대개 《당서(唐書)》에서는 고씨의 군장(君長)은 영순(永淳) 당 고종의 연호이다. 과 수공(垂拱) 무후(武后)의 연호이다. 뒤에는 이미 끊어졌으니, 어떻게 동광과 천성 연간에 중국에 조공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왕씨가 나라를 세운 것은 후량(後梁) 정명(貞明) 4년(918)이니 또 동광과 천성 이전이었다.
○ 후량(後梁) 균왕(均王 말제(末帝)를 가리킴) 용덕(龍德) 2년이다. 태조 5년 태봉(太封)의 왕 궁예(躬乂)가 살펴보건대, 동사에는 태봉(太封)이 태봉(泰封)으로 되었고, 궁예(躬乂)가 궁예(弓裔)로 되었다. 성품이 잔인하자, 해군통수(海軍統帥) 왕건이 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어 다시 고려 왕이라고 칭하였으며, 개주(開州)를 동경(東京)으로 삼고,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삼았다. 왕건은 검소하고 관대하였으므로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자치통감》 ○ 《자치통감》 본주(本註)에는,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말하기를, ‘고려 왕건의 선조는 고구려의 대족(大族)이다. 고씨의 정사가 쇠미해지자 나라 사람들이 왕건이 어질다고 여겨 드디어 함께 추대해서 군장으로 삼았다. 후당 장흥(長興) 3년(932)에 권지국사(權知國事)라고 자칭하면서 명종(明宗)에게 청명(請命)하니, 명종이 대의군사(大義軍事)를 제수하고 고려 왕에 봉하였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서긍이 선화(宣和) 연간에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고려도경》을 올렸는데, 기재된 내용이 아주 소략하다. 이는 그 나라 사람들이 전해 주는 말을 듣고 드디어 왕건이 고씨의 뒤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면서 왕건이 실은 궁예(躬乂)를 살해하고서 나라를 세운 것임을 모른 것이다.” 하였다.
○ 후당 장종(莊宗) 동광 원년에 태조 6년 고려가 정사(正使) 광평 시랑(廣評侍郞) 한신일(韓申一)과 부사 춘부 소경(春部少卿) 박암(朴巖)을 보내었다.
○ 고려는 본디 부여인(扶餘人)의 별종이다. 고려의 땅과 임금의 세차(世次)는 《당서》에 모두 나타나 있는데, 살펴보건대 이는 고구려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다른 오랑캐에 비하여 성씨(姓氏)가 있으며 관직의 칭호는 대략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이상 모두 오대사》
○ 요(遼) 태조 천현(天顯) 원년 태조 9년 3월 정미에 고려가 와서 조공하였다. 《요사》 ○ 살펴보건대, 이에 앞서 신책(神册) 4년(919) 바로 후량 정명(貞明) 5년에 이미 사신을 보내어 거란(契丹)과 교빙하였다.
○ 후당 명종 장흥(長興) 3년 태조 15년 3월에 권지국사 왕건이 사신을 보내왔다. 왕건은 고려의 대족(大族)이다. 《오대사》
○ 5월에 살펴보건대, 《오대사》에는 6월 갑인으로 되어 있다. 제서(制書)를 내려 권지고려국사 왕건을 특진 간교태보 사지절 현도주도독 상주국(特進簡較太保使持節玄菟州都督上柱國)으로 임명하고 고려국왕에 봉하고, 대의군사(大義軍使)로 삼았다. 7월에 조서를 내려 고려국왕 왕건의 처 하동 유씨(河東柳氏)를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삼았다. 고려의 입조사(入朝使)인 대상(大相) 왕유(王儒)가 주청한 것이다. 《책부원귀》
○ 진(晉) 고조 천복(天福) 원년에 태조 19년 고려 왕 왕건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ㆍ백제를 격파하였다. 이에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가 모두 내부하였다. 2경(京), 6부(府), 9절도(節度), 1백 20군(郡)이 있다. 《자치통감》 ○ 《남당서(南唐書)》에는, “오(吳) 천조(天祚) 2년(936)은 진(晉) 천복(天福) 원년에 해당하는데, 고려 왕 왕건이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였다. 이에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ㆍ철륵(鐵勒)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고려에 내부하였다. 승원(昇元) 2년(938)에 사신을 보내어 글을 올리면서 ‘전(牋)’이라 칭하여 격식을 표(表)와 같이 갖추면서, 신(臣)이라 칭하지 않았다. 열조(烈祖)가 무공전(武功殿)에 나아가 사신을 알현하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 뒤에는 사책에 빠져 있어서 사신이 왔는지의 여부를 상고할 수가 없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태조 18년(935) 을미에 신라 왕 김부(金溥)와 후백제 견훤(甄萱)이 모두 와서 항복하여 드디어 삼한의 땅을 통합하였다.
○ 3년 태조 21년 8월에 청주(靑州)에서 왕건이 즉위하고는 글을 올려 고려국에서 볼모로 와 숙위(宿衞)하고 있던 왕인적(王仁翟)을 향리로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였는데, 허락하였다. 《책부원귀》
○ 요 회동(會同) 2년 태조 22년 정월 을사에 후진(後晉)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사신을 보내어 고려에 통보하였다. 《요사》
○ 진(晉) 천복(天福) 6년 태조 24년 5월에 제서(制書)를 내려 고려국왕 왕건에게 개부의동삼사 간교태사(開府儀同三司簡較太師)를 더해 주고, 예전대로 사지절 현도주도독(使持節玄菟州都督)에 대의군사(大義軍使)를 삼고 식읍(食邑) 1만 호, 식실봉(食實封) 1천 호의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봉하였다. 8월에 광록 경(光祿卿) 장징(張澄), 국자 박사(國子博士) 사반(謝攀)을 파견하여 고려로 가서 책명(册命)하게 하였다. 《책부원귀》
○ 천복 연간에 서역(西域)의 중 말라(襪囉)가 진에 와서 조회(朝會)하였는데 화복(火卜)을 잘하였다. 얼마 후 고조(高祖)에게 하직하고 고려에 유람하기를 청하였다. 고려 왕 왕건은 그를 심히 예우(禮遇)하였다. 이때 거란이 발해의 지역을 병탄한 지 몇 년이 되었다. 왕건이 조용히 말라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본디 우리의 친척 나라인데, 그 왕이 거란에게 잡혀갔다. 내가 중국 조정을 위하여 거란을 쳐서 그 지역을 취하고, 또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니, 대사는 돌아가서 천자에게 말해 기일을 정하여 양쪽에서 습격하게 해 달라.”
하였다. 이에 말라가 돌아와서 낱낱이 아뢰었으나, 고조는 회답하지 아니했다. 《속통전(續通典)》
○ 제왕(齊王 출제(出帝)를 가리킴) 개운(開運) 2년에 혜종(惠宗) 2년 왕건이 졸하고 그의 아들 왕무(王武)가 즉위하였다. 11월 무술에 왕무를 고려국왕에 봉하였다. 《오대사》 ○ 살펴보건대, 고려 태조는 천복 8년(943) 계묘에 훙하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개운 2년이라고 기록한 것은 대개 부고를 알린 데 따라서 쓴 것이다.
○ 출제(出帝)가 거란과 원수가 되니, 말라가 고려와 힘을 합해 거란을 치는 일을 다시 말하였다. 출제는 고려로 하여금 거란의 동쪽 변방을 흔들도록 하여 그들 군사력을 분산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마침 왕건이 죽고 그의 아들 왕무가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를 칭하면서 표문을 올려 상(喪)을 고하였다. 11월 무술에 왕무를 대의군사 고려왕(大義軍使高麗王)으로 삼은 다음 통사사인(通事舍人) 곽인우(郭仁遇)를 사신으로 보내 유지(諭旨)를 내려 거란을 치게 하였다. 곽인우가 고려에 이르러서 고려의 군사가 약한 것을 보고, 지난날 말라가 한 말은 모두 왕건을 위해 과장하여 떠벌렸을 뿐 실지로는 거란과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곽인우가 되돌아오자, 왕무가 다시 다른 일로 변명을 하였다. 《자치통감》
○ 후한 은제(隱帝) 건우(乾祐) 4년(951)에 왕무가 졸하고 그의 아들 왕소(王昭)가 즉위하였다. 왕씨 3대는 오대(五代) 시대가 끝날 때까지 항상 와서 조공을 바쳤으며, 즉위하여서는 반드시 중국에 승인을 요청하였고, 중국에서도 항상 후하게 대접하였다. 《오대사》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혜종 왕무가 즉위한 지 2년 만에 훙하자, 군신들이 왕의 동생인 왕요(王堯)를 옹립하였는데, 이가 바로 정종(定宗)이다. 정종이 재위한 지 4년 만에 훙하자, 동모제(同母弟) 왕소(王昭)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광종(光宗)이다. 광종 원년 경술년은 바로 후한 건우(乾祐) 3년이다. 구양수(歐陽脩)가 지은 《신오대사(新五代史)》 및 《고려도경(高麗圖經)》, 《송사》에는 모두 광종을 혜종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 주(周) 태조(太祖) 광순(廣順) 2년 광종 3년 정월에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 왕소가 광평 시랑(廣評侍郞) 서봉(徐逢) 등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을 바쳤다. 2월에 조서를 내려 특진 간교태보 사지절 현도주도독 상주국(特進簡較太保使持節玄菟州都督上柱國)에 임명하고 대의군사(大義軍使)로 삼아 고려 왕(高麗王)에 봉하였다. 이어 담당 관서로 하여금 책명하는 예를 청하게 한 다음, 태복 소경(太僕少卿) 왕연(王演)을 고려국책례사(高麗國册禮使)로 차임하고, 우위솔부(右衛率府) 여계빈(呂繼贇)을 부사로 차임하였다. 《책부원귀》 ○ 살펴보건대, 《오대사》를 보면, 왕연이 이해 9월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
○ 세종(世宗) 현덕(顯德) 2년 광종 6년 11월에 고려에서 광평 시랑(廣評侍郞) 순질(荀質)을 보내와 황제가 등극한 것을 축하하였다. 이에 고려의 국왕 왕소에게 개부의동삼사 간교태위(開府儀同三司簡較太尉)를 제수하고, 전과 같이 사지절 현도주제군사 행 현도주 도독(使持節玄菟州諸軍事行玄菟州都督)을 삼고 대의군사(大義軍使)에 임명하여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봉하고 훈(勳)은 예전과 같게 하였다. 《상동》
○ 6년에 광종 10년 공제(恭帝)가 즉위하였다. 고려국왕 왕소에게 간교태사(簡較太師)를 제수하고 식읍(食邑) 3천 호를 더해 주었다. 8월에 왕소가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고, 겸하여 《별서효경(別序孝經)》 1권, 《월왕효경신의(越王孝經新義)》 8권, 《황령효경(皇靈孝經)》 1권, 《효경자도(孝經雌圖)》 2권을 올렸다. 《상동》
○ 송 태조 건륭(建隆) 3년 광종 13년 10월에 왕소가 광평 시랑 이흥우(李興祐)와 부사(副使) 이희려(李希勵), 판관(判官) 이빈(李彬) 등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송사》
○ 4년 광종 14년 봄에 조서를 내려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현도주도독(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玄菟州都督)에 제수하고, 대의군사(大義軍使)에 충임하였으며, 고려 왕(高麗王)에 봉한 왕소에게 식읍 7천 호를 더하고, 이어 추성순화보의공신(推誠順化保義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다. 《고려도경》에, “황조 건륭 3년(962)에 태조황제께서 등극하시어 만국을 소유하심에 고려 왕 왕소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이에 공신의 칭호를 하사하고, 이어 식읍을 더해 주었다.” 하였다. 9월에 고려에서 시찬(時贊) 등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는데,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을 만나 배가 파선되어 빠져 죽은 자가 70여 명이었고, 시찬은 겨우 살아남았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위로하였다. 《상동》
○ 개보(開寶) 5년 광종 23년 7월 경인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조서를 내려 식읍을 더 내려 주고, 추성순화수절보의공신(推誠順化守節保義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진봉사(進奉使)인 내의 시랑(內議侍郞) 서희(徐煕)에게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를 더해 주고, 부사인 내봉 경(內奉卿) 최업(崔鄴)에게는 검교사농경(檢校司農卿)을 더해 주었으며, 모두 어사 대부(御史大夫)를 겸하게 하였다. 그리고 판관인 광평 시랑 강예시(康禮試)에게는 소부 소감(少府少監)을, 녹사(錄事)인 광평 원외랑(廣評員外郞) 유은(劉隱)에게는 검교상서금부낭중(檢校尙書金部郞中)을 더해 주고, 모두 후하게 대접하여 보내었다. 《상동》
○ 8년에 광종 26년 왕소가 졸하고 그의 아들 왕주(王伷)가 영권국사(領權國事)가 되었다. 《상동》 ○ 살펴보건대, 《송사》에는 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동사(東史)에 따라 바로잡았다.
○ 9년 경종 원년 9월 경오에 왕주가 조준례(趙遵禮)를 사신으로 보내어 공물을 바쳤는데, 아버지가 죽어서 승습을 받아야 하기에 와서 조지(朝旨)를 청한 것이다. 왕주에게 검교태보 현도주도독 대의군사(檢校太保玄菟州都督大義軍使)를 제수하고, 고려국왕에 봉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검교태부(檢校太傅)로 올리고 대의군(大義軍)을 태순군(太順軍)으로 바꾸었으며, 좌사어부솔(左司禦副率) 우연초(于延超)와 사농시 승(司農寺丞) 서소문(徐昭文)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었다. 왕주가 그 나라 사람 김행성(金行成)을 보내어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상동》
○ 태종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 경종 2년 12월에 왕주가 그의 아들 왕원보(王元輔)를 보내어 명마(名馬), 토산물, 병기 등의 물품을 가지고 와서 바치게 하였다. 이해에 김행성(金行成)이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였다. 《상동》
○ 3년 경종 3년 또 사신을 보내어 방물과 병기를 바쳤다. 왕주에게 검교태사(檢校太師)를 가하고 태자중윤 직사인원(太子中允直舍人院) 장계(張洎)와 저작랑 직사관(著作郞直史館) 구중정(句中正)을 사신으로 삼아 보내었다. 《상동》
○ 7년에 성종(成宗) 원년 왕주가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경종이 태평흥국 6년 신사에 훙하였다. 그의 동생인 왕치(王治)가 지국사(知國事)가 되었다. 사신 김전(金全)을 보내어 금실과 은실로 꿰맨 계금포(罽錦袍)와 계금욕(罽金褥), 금과 은으로 장식한 칼과 활, 좋은 말, 향약(香藥) 등을 조공으로 바치고, 인하여 왕위의 승습을 요청하였다. 이에 왕치에게 검교태보 현도주도독(檢校太保玄菟州都督)을 제수하고, 대순군사(大順軍使)로 삼아, 고려국왕(高麗國王)에 봉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 이거원(李巨源)과 예기박사(禮記博士) 공유(孔維)를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상동》
○ 요(遼) 성종(聖宗) 통화(統和) 원년 성종 2년 10월에, 장차 고려를 정벌하고자 하여 성종이 동경 유수(東京留守) 야율말지(耶律抹只)가 거느린 병마를 친히 사열하였다. 병오에 선휘사 겸 시중(宣徽使兼侍中) 포영림(蒲領林)ㆍ아긍덕(牙肯德)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고려를 토벌하게 하고는 기고(旗鼓)와 은부(銀符)를 하사하였다. 《요사》
○ 3년 성종 4년 7월 초하루 갑진에 모든 도(道)에 조서를 내려 군사와 무기를 정비하여 동쪽으로 고려를 정벌하러 가는 데 대비하게 하였다. 8월 계유에 요택(遼澤)이 진창이 되어 고려를 정벌하는 일을 파하였다. 《상동》
○ 송 옹희(雍煕) 2년에 성종 4년 왕치(王治)에게 검교태부(檢校太傅)를 가하고 한림시서(翰林侍書) 왕저(王著)와 시독(侍讀) 여문중(呂文仲)을 사신으로 보내었다. 《송사》
○ 3년에 성종 5년 북쪽으로 군사를 출동시켜 거란(契丹)을 정벌하였다. 고려가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 항상 거란의 침입을 받고 있었다. 이에 감찰어사 한국화(韓國華)를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유시하게 하였다. 조서는 예문지에 나온다. 이보다 앞서 거란이 여진(女眞)을 칠 적에 고려의 경계를 거쳐 군사를 출동하였기 때문에 여진은 고려가 거란의 군사를 유도하여 화근을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이에 조정에 말[馬]을 바치면서 와서 하소연하고, 또 고려가 거란과 우호를 맺어 서로 응원하면서 그들의 백성을 약탈하여 가고는 다시 놓아 보내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고려의 사신 한수령(韓遂齡)이 들어와 조공을 바칠 때 살펴보건대, 한수령이 들어와 조공을 바친 것은 옹희 원년이었다. 태종이 그 틈을 타 여진이 급박함을 고한 목계(木契)를 내어 한수령에게 보이면서 “돌아가면 본국에 말하여 요나라에서 잡아 온 포로를 돌려보내게 하라.” 하였다. 왕치는 이 말을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송나라의 사신 한국화가 이르자, 사람을 시켜 한국화에게 말하기를,
“지난해 늦겨울에 여진이 목계를 급히 보내어서 ‘거란이 군사를 내어 우리 요나라의 경계에 들어왔는데, 고려에서 알지 못할 듯하기에 미리 알려 주니, 그에 대해 미리 방비를 하라.’고 하였다. 본국이 여진과 비록 이웃 나라라고는 하지만 길이 멀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속셈을 평소에 알고 있는바, 탐욕스럽고 속임수가 많아서 믿을 것이 못 되었다. 그 뒤에 또 사람을 보내 거란의 군사가 이미 매하(梅河)를 건너왔다고 알려 왔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오히려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하고 있었으므로 구제해 줄 겨를이 없었다. 그 뒤 얼마 지나서 거란의 군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와서 여진을 크게 공격하여 죽이고 빼앗는 것이 매우 많았다. 이에 여진의 남은 족속들도 흩어져 도망가자, 거란의 군사들이 여진을 잡으려고 뒤쫓아 와서 우리의 서북쪽 덕창(德昌)ㆍ덕성(德成)ㆍ위화(威化)ㆍ광화(光化)의 경내로 들어와서 살펴보건대, 덕창은 지금의 박천군(博川郡)이고, 덕성은 지금의 영변부(寧邊府)이고, 위화는 지금의 운산군(雲山郡)이고, 광화는 지금의 태천현(泰川縣)이다. 포로로 잡아갔다. 그때 거란의 한 기병(騎兵)이 덕미하(德米河)의 북쪽에 이르러서 살펴보건대, 덕미하는 평안도 북쪽 경계에 있어야 한다. 관성(關城)을 지키는 군졸을 큰소리로 불러 말하기를 ‘우리는 거란의 기병이다. 여진이 우리의 변방 지역을 노략질하는 것이 상습화되었는데, 이제 원수 갚는 일을 끝냈으니,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본국에서는 거란의 군사가 물러갔다고 들었으나 오히려 예측하지 못한 근심이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이에 본국에서는 병란을 피하여 도망온 여진 사람 2천여 명에게 물자를 주어 되돌려 보냈다. 그러자 여진에서는 또 본국에게 매하진(梅河津)을 봉쇄하고 성루를 쌓아 거란을 방비하라고 권하였다. 이에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막 그곳을 둘러보고 공사를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진은 군사를 몰래 출동시켜 본국의 관원과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였으며, 장정을 잡아가서 모두 노예로 삼은 뒤 다시 다른 지역으로 옮겨 보냈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여진이 해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기 때문에 감히 군사를 내어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도리어 본국을 무고하여 황제를 현혹시킬 줄 알았겠는가. 본국이 대대로 중국에 정삭(正朔)을 여쭙고 조공을 바치고 있는데, 어찌 감히 두마음을 두어 외국과 몰래 내통하겠는가. 하물며 거란은 요해(遼海)의 바깥에 끼어 있고 또 대매하(大梅河)ㆍ소매하(小梅河)의 두 강으로 막혀 있으며, 여진ㆍ발해는 본래 일정한 주거지가 없으니, 어떤 경로를 통해 오갈 수 있겠는가. 그런데 터무니없는 말로 참소와 비방을 하니, 분통스런 마음에 가슴이 막힌다. 일월이 지극히 밝으니 굽어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지난번에 병란을 피하여 도망온 여진의 무리를 모두 구휼해 주었으며, 또한 본국에서 관직을 제수받아 본국에 남아 있는 자가 아직도 있는데, 높은 관직에 있는 자로는 물굴니우(勿屈尼于)ㆍ주원(郍元)ㆍ윤능달(尹能達)ㆍ주노정(郍老正)ㆍ위가야부(衞迦耶夫) 등 십여 명이 있으니, 경사의 대궐로 불러들여 본국에서 조공하러 들어간 사신과 함께 뜰에서 그 일에 대해 해명하게 하기 바란다. 그럴 경우 변함없는 우리의 충심이 밝혀질 것이다.”
하였다. 이에 한국화가 그렇게 하겠다고 허락하고, 곧바로 군사를 징발하여 서쪽에서 모이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왕치가 시일을 끌면서 곧바로 조서대로 시행하지 아니하자, 한국화가 이를 여러 번 독촉하였으며, 군사를 징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돌아와 여진에 관한 일을 사실을 갖추어 진달하였다. 10월에 왕치가 고려의 학사(學士) 최한(崔罕)ㆍ왕빈(王彬) 등을 파견하여 국자감에 나아가 학업을 익히게 하였다. 《상동》
○ 단공(端拱) 원년에 성종 7년 왕치에게 검교태위(檢校太尉)를 더해 주고, 고공원외랑 겸 시어사 지잡사(考功員外郞兼侍御史知雜事) 여단(呂端)과 기거사인(起居舍人) 여우지(呂祐之)를 사신으로 보내었다. 《상동》
○ 2년에 성종 8년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조서를 내려 사신으로 온 정사(正使) 선관 시랑(選官侍郞) 한인경(韓藺卿)과 부사 병관 낭중(兵官郞中) 위덕유(魏德柔)에게 모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제수하고, 판관(判官) 소부 승(少府丞) 이광(李光)에게 검교수부원외랑(檢校水部員外郞)을 제수하였다. 이에 앞서 왕치가 승(僧) 여가(如可)를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와 조근하게 하면서 《대장경(大藏經)》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하사하였다. 이어 여가에게 자의(紫衣)를 하사하고, 사신들과 함께 귀국하게 하였다. 《상동》
○ 순화(淳化) 원년 성종 9년 3월에 조서를 내려서 왕치에게 식읍(食邑) 1천 호를 더하고, 호부 낭중(戶部郞中) 시성무(柴成務)와 병부원외랑 직사관(兵部員外郞直史館) 조화성(趙化成)을 파견하여 고려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고려의 풍속에서는 음양술(陰陽術)과 귀신에 관한 설을 믿어 꺼리는 것이 아주 많아, 매양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반드시 길한 달, 좋은 날짜를 택해 예식을 갖추어 조서를 받았다. 시성무가 사신으로 와서 객관(客館)에 머무른 지 한 달이 넘게 되자, 마침내 왕치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왕이 대대로 번국(藩國)으로서 왕실(王室)을 존숭하므로 큰 경사가 있을 적마다 가장 먼저 휘장(徽章)을 받았습니다. 지금 중국 조정에서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여 특수한 은총을 내림에 있어서 머나먼 물길을 지나왔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득한 바다를 파도를 헤치고 건너왔으니, 황조에서 고려를 대우하는 것이 역시 융숭한 셈입니다. 그런데 금기(禁忌)에 얽매이고 점술에 구애받아, 점치는 자의 허튼소리에 현혹되어 천자의 조서를 받드는 것을 지체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천자의 책명(册命)에 기록된 내용은 점치는 자 따위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서도 상일(上日)만을 말하였지 육갑(六甲)에 있어서 좋은 일진은 가리지 않았으며, 《예기(禮記)》에서는 중동(仲冬)을 기록하여 일양(一陽)이 처음 생동하는 좋은 시기만을 취하였습니다. 찬란한 옛날의 훈계를 밝게 상고할 수가 있는바, 마땅히 생각을 바꾸어 황제가 내리신 조서를 빨리 받들어야만 할 것입니다. 조서로 내린 명령을 즉시 시행해서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낼 경우, 황제의 은총이 빛나 칙명을 욕되게 하였다는 책망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알리는 바이니, 왕께서는 저의 말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왕치가 글을 보고는 부끄럽고 두렵게 여겨 사람을 보내어 사과하였다. 그때 마침 장맛비가 그치지 않고 내렸는데, 왕치가 날씨가 개기를 기다려서 조서를 받겠다고 하자, 시성무가 또다시 글을 보내어 힐책하였다. 이에 왕치가 다음 날에 나와 조서를 받았다. 《상동》
○ 2년에 성종 10년 고려에서 한언공(韓彦恭)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조공을 바쳤다. 한언공이 표문을 올려 왕치의 뜻을 아뢰고 불경(佛經)을 간행하여 하사해 주기를 요청하니, 조서를 내려 《대장경(大藏經)》 및 황제가 지은 《비장전(祕藏詮)》ㆍ《소요영(逍遙詠)》ㆍ《연화심륜(蓮花心輪)》 등의 서책을 하사하였다. 《상동》
○ 요 통화(統和) 10년 성종 11년 11월에 동경 유수(東京留守) 소항덕(蕭恒德) 등이 고려를 정벌하였다. 《요사》
○ 송 순화 4년 성종 12년 정월에 왕치(王治)가 백사유(白思柔)를 사신으로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아울러 불경과 황제가 지은 책을 하사해 준 데 대하여 사례하였다. 2월에 비서 승 직사관(祕書丞直史館) 진정(陳靖)과 비서 승 유식(劉式)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왕치에게 검교태사(檢校太師)를 더해 주고, 이어 조서를 내려 군리(軍吏)와 기로(耆老)들을 위로하였다. 진정 등이 사신으로 갈 때 동모(東牟)에서 출발하여 팔각해구(八角海口)로 나갔다. 그곳에서 고려 사신 백사유가 탄 배와 고려의 수공(水工)을 만나 그 배를 얻어 탔다. 곧 길을 떠나 지강도(芝岡島)로부터 순풍을 만나 바다에서 이틀 밤을 지내고 옹진(甕津) 어귀에 닿아 상륙한 뒤, 다시 육로로 1백 60리를 가서 고려의 경내인 해주(海州)에 닿고, 또 1백 리를 가서 염주(閻州)에 닿고, 또 40리를 가서 백주(白州)에 이르고, 또 40리를 가서 그 국도(國都)에 이르렀다. 왕치는 사신을 교외에서 맞이하여 번신(藩臣)의 예절을 다하였다. 진정 등을 70여 일 동안 머물게 하다가 돌려보냈는데, 돌아올 때 습의(襲衣), 금대(金帶), 금기(金器), 은기(銀器) 수백 벌과 포(布) 3만여 단(端)을 주고, 표문을 부쳐 사은하였다. 이에 앞서 순화 3년에 황제가 제도(諸道)의 공거인(貢擧人) 들을 친히 시험 보이고는, 조서를 내려 고려의 빈공 진사(賓貢進士) 왕빈(王彬)과 최한(崔罕) 등을 급제시키고, 얼마 뒤에 관직을 제수한 다음 고려로 돌려보내었다. 이때에 이르러 진정 등이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편에 왕치가 표문을 올려 사은하였다. 표문은 예문지에 나온다. 또 장인전(張仁銓)이란 자가 있었는데, 진봉사(進奉使) 백사유(白思柔)의 공목리(孔目吏)로서 마음대로 중국 조정에 글을 올려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다. 백사유가 장인전이 고려의 기밀 사항을 중국 조정에 고하였다고 생각하자, 장인전이 두려워서 감히 귀국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상이 진정 등에게 명하여 장인전을 함께 데리고 가도록 하고는, 이어 왕치에게 조서를 내려 장인전의 죄를 용서해 주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치가 또 표문을 올려 사은하였다. 표문은 예문지에 나온다. 또 왕치가 상언하여 판각(板刻)된 구경(九經)의 서책을 하사하여 유교(儒敎)를 진흥시켜 달라고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유식 등이 복명하면서 ‘왕치가 사신으로 원증연(元證衍)을 파견하여 우리들을 호송하게 하였는데, 원증연이 안향포(安香浦)의 포구에 이르러서 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지는 바람에 싸 가지고 온 물품이 모두 가라앉았다.’고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등주(登州)에 조서를 내려 원증연에게 증명서를 발급해서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하고, 이어 왕치에게 옷감 2백 필, 은기 2백 벌, 양 50마리를 하사하였다. 《송사》
○ 요 통화 11년 성종 12년 3월에 고려 왕 왕치가 박양유(朴良柔)를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죄를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여진(女眞)에게서 빼앗았던 압록강(鴨淥江) 동쪽 수백 리의 땅을 고려에 내주었다. 《요사》
○ 12년 성종 13년 3월 정사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사로잡아 간 사람과 가축들을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자, 조서를 내려서 속환(贖還)하게 하였다. 병인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에 유시하였다. 《상동》
○ 송나라 순화(淳化) 5년 성종 13년 6월에 고려에서 사신 원도(元都)를 파견하여 구원병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면서, 거란이 침입해 왔다고 하소연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북쪽 변경이 겨우 평온해졌으니 경솔하게 전쟁을 일으켜서 국가에 일이 발생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단지 조서만을 내려서 위무하고, 사신을 정중하게 접대하여 보내었다. 이 뒤로는 고려에서 거란의 제재를 받아 조공을 중단하였다. 《송사》 ○ 살펴보건대, 《동사》를 보면, 성종 13년 갑오에 거란의 연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이로부터 송나라와는 국교가 단절되었다.
○ 요 통화 13년 성종 14년 11월 신유에 사신을 보내어서 왕치를 책봉하여 고려국왕으로 삼았다. 무진에 고려에서 동자(童子) 10명을 보내어 요나라 말을 배우게 하였다. 《요사》
○ 14년 성종 15년 3월 임인에 고려 왕 왕치가 표문을 올려 혼인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고 동경 유수(東京留守) 부마(駙馬) 소항덕(蕭恒德)의 딸을 시집보내었다. 경술에 고려에서 다시 동자 10명을 보내어 요나라 말을 배우게 하였다. ○ 6월 기축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으며, 뒤에는 수시로 사신이 왔다. 《이상 모두 상동》
○ 15년에 성종 16년 고려에서 한언경(韓彦敬)을 보내어 폐백을 바치고 부마 소항덕(蕭恒德)의 처 월국공주(越國公主)가 훙한 것을 조문하였다. ○ 11월에 왕치가 훙하니, 왕치의 조카 왕송(王誦)이 왕동영(王同頴)을 보내어 부음을 고하였다. 12월 갑인에 사신을 보내어 고려 왕 왕치에게 제사 지내고 조서를 내려 그의 조카를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삼았다. 《이상 모두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목종(穆宗) 왕송은 바로 경종의 장자(長子)로 성종의 당질(堂姪)이다. 그러니 《송사》에서 왕치가 졸하자 동생 왕송이 즉위하였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 16년 목종(穆宗) 원년 11월에 사신을 보내어 고려국왕 왕송을 책봉하였다. 《상동》
○ 송 진종(眞宗) 함평(咸平) 3년이다. 목종 3년 고려의 왕송(王誦)이 일찍이 병교(兵校) 서원(徐遠)을 보내와서 조정에 문안하였는데, 거리가 멀어서 덕음(德音)이 오래도록 미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송의 신하 이부 시랑 조지린(趙之遴)이 아장(牙將) 주인소(朱仁紹)에게 명하여 등주(登州)에 와서 정탐하게 하였다. 등주의 장수가 이 사실을 아뢰자, 황제가 특별히 주인소를 불러서 만나 보았다. 그 자리에서 주인소가 고려 사람들이 황제의 교화를 사모하고 있으나 거란에게 견제를 당하고 있다는 상황을 진달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왕송에게 전함(鈿函)에 담은 조서 한 통을 내려 주인소로 하여금 싸 가지고 가게 하였다. 《송사》
○ 요 통화 20년 목종 5년 2월 정축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송나라를 정벌하여 이긴 것을 축하하였다. 7월 신축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서 조공하면서 고려의 《지리도(地里圖)》를 바쳤다. 《요사》
○ 송 함평(咸平) 6년에 목종 6년 왕송이 호부 낭중(戶部郞中) 이선고(李宣古)를 사신으로 보내어 조회하면서 사은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후진(後晉)에서 연(燕)과 계(薊) 지방을 거란에게 빼앗긴 탓에 드디어 현도(玄菟)와 통하는 길이 생겨 번번이 와서 공격하면서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으니, 송나라 군사를 변경에 주둔시켜서 이를 견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정중하게 답하였다. 《송사》
○ 요 통화 22년 목종 7년 9월 기축에 남쪽으로 송나라를 정벌한다고 고려에 유시하였다. 《요사》
○ 23년 목종 8년 5월 병인에 송나라와 화친하니,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축하하였다. 《상동》
○ 28년 현종(顯宗) 원년 5월 병오에 고려의 서경 유수(西京留守) 강조(康肇)가 임금 왕송을 시해하고 제 마음대로 왕송의 종형(從兄) 왕순(王詢)을 세웠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강조가 통화 27년(1009) 기유에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 왕순을 세웠는데, 현종은 바로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왕욱(王郁)의 아들로, 목종에게는 종숙(從叔)이 된다. 그러니 《요사》에서 종형이라고 한 것이나 《송사》와 《고려도경》에서 목종의 동생이라고 한 것은 모두 틀린 것이다. 조서를 내려서 각도(各道)의 병기를 수선하여 동쪽을 정벌하는 데 대비하게 하였다.
○ 황제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고려의 강조가 임금 왕송을 시해하고는 왕송의 족형인 왕순을 왕으로 세운 다음 그가 정승 노릇을 하니, 이는 큰 역적이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그 죄를 문책해야 하겠다.”
하니, 신하들이 모두 옳다고 하였다. 그런데 소적렬(蕭敵烈)이 아뢰기를,
“국가가 여러 해 계속 정벌을 행하여 사졸들이 지쳤는데, 더구나 지금은 폐하께서 상중에 계십니다. 또 농사마저 흉년이 들어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았으며, 섬오랑캐의 작은 나라는 성루(城壘)가 튼튼합니다. 그들과 싸워 혹 승리한다 하더라도 무위(武威)를 빛낼 수 없을 것이며, 만일 승리하지 못할 경우에는 후회를 끼칠까 염려됩니다. 그러니 사신 한 사람을 보내어 그 까닭을 묻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저들이 만일 죄를 자복하면 덮어 두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성상의 상기(喪期)가 끝나고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군사를 일으켜도 늦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황제의 명령이 이미 내려져 그 말이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식자들이 옳게 여겼다.
○ 8월 정묘에 황제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면서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 그 사실을 통보하였다. 그러고는 황제의 동생인 초국왕(楚國王) 융우(隆祐)에게 경사(京師)에 남아서 지키게 하고, 북부재상(北府宰相) 부마도위(駙馬都尉) 소배압(蕭排押)을 도통(都統)으로, 북면임아(北面林牙) 승노(僧奴)를 도감(都監)으로 삼았다. 9월 신묘에 추밀 직학사(樞密直學士) 고정(高正), 인진사(引進使) 한기(韓杞)를 고려에 파견하여 고려 왕 왕순에게 사유를 물었다. 10월 초하루 병오에 여진에서 좋은 말 1만 필을 진공하면서 고려를 정벌하는 데 종정(從征)하게 해 주기를 요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왕순이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면서 출병을 파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11월 을유에 대군이 압록강(鴨淥江)을 건너 강조(康肇)가 막아 싸우는 것을 패퇴시키니, 강조가 동주(銅州)로 물러나 있었다.
○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선봉장이 되어 동주(銅州)에 이르자, 강조가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요나라 군사에 항거하였다. 한 군대는 동주의 서쪽 삼수(三水)가 만나는 지점을 차지해 주둔하여, 강조가 그 가운데에 있었고, 한 군대는 동주에서 가까운 산에 주둔하였으며, 다른 한 군대는 성에 붙어서 주둔해 있었다. 병술에 야율분노가 야율홍고(耶律弘古)와 우피실(右皮室)의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를 거느리고 삼수에 주둔한 군대를 격파한 다음 강조와 부장(副將) 이현온(李玄蘊) 등을 사로잡으니, 군사들이 바람에 쓸리듯 무너졌다. 이때 마침 대군이 이르러서 수십 리를 추격하여 3만여 명을 참수하였으며, 고려 군사들이 버린 군량미, 갑옷, 무기 따위를 노획하였다. 무자에 동주(銅州)ㆍ곽주(霍州)ㆍ귀주(貴州)ㆍ영주(寧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소배압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도(北道)를 경유하여 나아가 노고달령(奴古達嶺)에 이르러서 적병을 만나 싸워 패퇴시켰다. 신묘에 왕순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면서 조회하겠다고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고 군사들이 고려 사람들을 포로로 잡거나 노략질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런 다음 정사사인(政事舍人) 마보우(馬保佑)를 개경 유수(開京留守)로 삼고, 안주 단련사(安州團練使) 왕팔(王八)을 부유수로 삼았으며, 태자태사(太子太師) 을름(乙凛)으로 하여금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마보우 등을 호송하고서 개경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또 고정(高正)을 파견하여 왕순을 맞이해 와 들어와서 조회하게 하였다. 임진에 고려의 수장(守將) 탁사정(卓思正)이 요나라 사신 한희손(韓喜孫) 등 10명을 살해하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항거하였다. 고정(高正)이 도중에 머물러 있다가 탁사정에게 포위되었다. 고정이 형세상 고려의 상대가 되지 않으므로 휘하의 장사들과 함께 포위망을 돌파해 나왔는데, 죽거나 부상당한 사졸이 아주 많았다. 이에 마보우 등이 되돌아왔다. 을름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서 탁사정을 치게 하니, 탁사정이 마침내 서경(西京)으로 도망쳤다. 5일 동안이나 포위하고 있으면서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성종(聖宗)이 성의 서쪽에 주필(駐蹕)하였다. 고려에서 예부 낭중(禮部郞中) 발해타실(渤海陀失)이 와서 항복하였다. 경자에 성종이 소배압과 야율분노 등을 파견하여 개경을 공격하였는데, 서령(西嶺)에 이르러서 고려 군사를 만나 격파하고서 수천 급을 참수하였다. 고려 왕 왕순이 변성(邊城)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도성을 버리고 평주(平州)로 도망하였다. 이에 소배압과 야율분노 등이 개경으로 들어가서 왕궁을 불사른 다음 백성들을 위무하고서 청강(淸江)으로 와 있다가 회군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사신(史臣)이 논하기를,
“고려가 임금 왕송을 시해하고서 왕순을 세웠는데, 요나라에서 그 죄를 추궁하는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니 고려에서는 마땅히 음식물을 싸 들고서 나와 요나라의 군사를 맞이하고, 숙소를 청소해 놓고서 기다려야 마땅하였다. 그런데 험한 곳에 웅거하고 군대를 들어 항거해 요나라로 하여금 지혜로운 자가 지모를 다 쏟고 용맹한 자가 힘을 다 쓰게 하였다. 비록 그 수도를 얻은 바 있었지만, 좁다랗게 바다 한 귀퉁이에 있는 고려는 예전 그대로였다. 그러니 어찌 다른 사람을 승복시키는 것은 힘으로는 안 되고 덕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고려의 궁실을 무너뜨리고 고려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았으니, 이는 이른바 죄를 물을 자격이 없는 자가 죄를 묻는 군사를 출동시킨 것이다. 아, 주애군(朱崖郡)을 버린 것은 가연지(賈捐之)의 힘이었다. 소적렬(蕭敵烈)이 아뢴 것은 까닭이 있는 것이었다.”
하였다. 《상동》
○ 송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이다. 현종 원년 이에 앞서 거란이 고려를 습격하자, 고려에서는 흥주(興州)ㆍ철주(鐵州)ㆍ통주(通州)ㆍ용주(龍州)ㆍ구주(龜州)ㆍ곽주(郭州) 등 여섯 성을 국경에 쌓았는데, 거란에서 자기들을 배반한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 여섯 성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왕순(王詢)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거란이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서 도성으로 쳐들어가 궁실을 불사르고 주민들을 약탈하니, 왕순은 승라주(昇羅州)로 옮겨 피난하였다. 거란 군사가 물러가자 사신을 거란에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니, 거란에서 여섯 성 문제를 들어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때부터 고려에서 군사를 보내어 이 여섯 성을 지키게 되었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성종 때 여섯 성을 쌓았다. 거란에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침입해 오자, 왕순은 여진과 더불어 기병(奇兵)을 매복해 요격하여 거란 군사를 거의 모두 죽였다. 왕순이 또 압록강 동쪽에 성을 쌓아 내원성(來遠城)과 서로 마주 보게 하였다. 그러고는 강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은 다음 군사를 매복시켜 새로 쌓은 성을 튼튼하게 하였다. 《송사》
○ 거란에서 고려를 정벌한다고 떠들어 대면서 요양성(遼陽城)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에 진종(眞宗)이 왕조(王朝) 등에게 이르기를,
“지금 거란에서 고려를 정벌한다고 하는데, 만일 고려가 위급해져 우리에게 귀부하거나 혹 우리에게 구원병을 보내 주기를 요구할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자, 왕조가 아뢰기를,
“그 큰 것을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거란은 현재 우리와 동맹을 굳게 맺고 있고, 고려는 조공을 여러 해 동안 바치지 않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등주(登州)에 유시하여,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해 구원병을 보내 달라고 청해 올 경우에는 즉시 ‘여러 해 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감히 조정에 상달할 수가 없다.’고 하게 하고, 귀순해 오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보살펴 주기만 하고 조정에 보고하지는 말게 하라.”
하였다. 《의각료잡기(猗覺寮雜記)》
○ 요 통화 29년 현종 2년 정월 초하루 을해에 고려에서 군사를 철수시키자, 항복하였던 고려의 여러 성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귀덕주(貴德州)의 남쪽 산악 지역에 이르렀을 때 큰비가 연일 내렸는데, 날씨가 개고서야 겨우 강을 건널 수 있었으며, 말과 낙타가 모두 피로하여 병기를 대부분 버렸다. 기축에 압록강에 주둔하고 임진에 조서를 내려 군사들을 파하였다.
○ 2월 무오에 포로로 잡아 온 고려 사람들을 여러 능묘(陵廟)에 나누어 있게 하고, 나머지는 내척(內戚)과 대신(大臣)들에게 하사하였다. 《이상 모두 요사》
○ 개태(開泰) 원년 현종 3년 4월 경자에 고려에서 채충순(蔡忠順)을 보내어 옛날과 같이 칭신(稱臣)하기를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 왕순(王詢)이 직접 조회하라고 하였다. 8월 기미에 고려 왕이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표문을 올리면서 병이 있어 직접 조회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다시 강동의 여섯 주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상동》
○ 2년 현종 4년 6월 초하루 신유에 중승(中丞) 야율자충(耶律資忠)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여섯 주의 옛 땅을 다시 취하게 하였다. 8월 기축에 야율자충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 10월 병인에 상온(詳穩) 장마류(張馬留)가 고려에 대해 잘 아는 여진 사람을 바쳤다. 황제가 고려에 대해 물으니, 답하기를,
“신이 3년 전에 고려에 포로로 잡혀 낭관(郞官)으로 있으므로 잘 알고 있습니다. 개경에서 동쪽으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넓기가 개경만 한 큰 성채가 있는데, 주위의 여러 주에서 보내오는 진귀한 물품이 모두 이곳에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승라주(勝羅州) 등의 살펴보건대, 승라주가 《송사》에는 승라주(昇羅州)로 되어 있다. 남쪽에도 두 개의 큰 성채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물품이 쌓여 있습니다. 만약 대군이 전로(前路)를 따라가서 갈소관여진(曷蘇館女眞)의 북쪽 길을 취하여 곧장 압록강과 대하(大河)를 건넌 다음 올라가면 곽주(郭州)에 이르러서 큰길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고려를 취하여서 차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 말을 받아들였다. 《이상 모두 상동》
○ 3년 현종 5년 2월 갑자에 상경부유수(上京副留守) 야율자충(耶律資忠)을 다시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강동 여섯 주의 옛 땅을 취하게 하였다.
○ 5월에 조서를 내려 국구(國舅)인 상온(詳穩) 소적렬(蕭敵烈)과 동경 유수(東京留守) 야율단석(耶律團石) 등으로 하여금 고려를 정벌하게 하고,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놓고, 보주(保州)ㆍ선의주(宣義州)ㆍ정원주(定遠州) 등에 성을 쌓게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송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에 현종 5년 고려에서 고주사(告奏使)로 어사공부 시랑(御事工部侍郞) 윤증고(尹證古)를 보내와 금실로 짜서 만든 용봉안(龍鳳鞍)과 수놓은 용봉안복(龍鳳鞍㡤) 각 두 벌과 세마(細馬) 2필, 산마(散馬) 20필을 조공으로 바쳤다. 윤증고가 돌아갈 때 왕순에게 조서(詔書) 7통 및 의대(衣帶), 은채(銀綵), 안륵마(鞍勒馬) 등을 하사하였다. 《송사》 ○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 왕 왕순이 거란을 크게 격파하고는 대중상부 7년에 다시 조공을 바치면서, 존호(尊號)를 내려 주고 정삭(正朔)을 반포해 주고 책봉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진종이 처음에는 그대로 따라 주려고 하였는데, 의논하는 자들이 곤란하다고 하자, 드디어 그 명을 중지하고는 조서만 내려 주었다.” 하였다.
○ 이때 여진 역시 장군(將軍) 대천기(大千機)를 파견하여 고려의 사신을 따라 들어와서 조공을 바쳤다. 여진은 대개 옛 숙신씨(肅愼氏)로 대대로 혼동강(混同江)의 동쪽 장백산(長白山)의 압록강 발원지 부근에 살아왔는데, 남쪽으로는 고려와 인접하였고, 북쪽으로는 실위(室韋)와 접하였고, 서쪽으로는 발해(渤海)ㆍ철전(鐵甸)과 경계를 나누었고, 동쪽으로는 바닷가에 닿았다. 여진의 추장은 본디 신라 사람으로 완안씨(完顔氏)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 말의 왕(王)과 같은 말이다. 여진 사람들이 그가 일을 잘 처리하는 데 감복해서 수령으로 추대한 것이다. 순화(淳化) 2년(991)에 발해가 조공을 바치지 않자 여진에 조서를 내려서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발해 사람 수급 하나에 비단 5필씩으로 쳐주었다. 그 뒤에 드디어 고려로 귀화하여 복속되었다. 대중상부 3년(1010)에 거란이 고려를 정벌하였는데, 여진을 경유하여 진군하였다. 이에 여진이 고려와 함께 군사를 합하여서 항거하여 거란은 많은 군사를 잃어버리고 돌아갔다. 이때에 이르러서 고려의 사신과 함께 오자, 숙소와 음식 및 잔치를 베풀어 주는 예를 고려의 사신에게 해 주는 것과 똑같이 하였다. 8년에 다시 사신을 보내왔는데, 고려의 사신을 따라 함께 왔다. 《문헌통고》
○ 8년에 현종 6년 등주(登州)에 조서를 내려서 해변에 관(館)을 설치하고 사신을 접대하게 하였다. 그해에 또 고려가 어사민관 시랑(御事民官侍郞) 곽원(郭元)을 보내와서 조공하였다. 곽원이 스스로 본국의 국경은 남쪽에서 북쪽까지가 1천 5백 리이고 동쪽에서 서쪽까지가 2천 리라고 하였다. 곽원은 언사와 용모가 공손하고 단정하여 잔치를 받을 때마다 반드시 손수 사표(謝表)를 지었는데, 자못 문장이 좋아 조정에서도 후하게 대접하였다. 《송사》
○ 요 개태(開泰) 4년 현종 6년 4월 갑인에 소적렬(蕭敵烈) 등이 고려를 정벌하러 갔다가 돌아왔다. 5월 신사에 북부재상(北府宰相) 유성(劉晟)을 도통(都統)으로, 추밀사(樞密使) 야율세량(耶律世良)을 부도통으로,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 소굴렬(蕭屈烈)을 도감(都監)으로 삼아 고려를 정벌하였다. 유성이 약속한 기일을 지체시키자, 뒤미쳐 돌아오게 하고, 야율세량과 소굴렬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토벌하게 하였다. 《요사》
○ 5년 현종 7년 정월 경술에 야율세량과 소굴렬이 살펴보건대, 《요사》 제70권 속국표(屬國表)에는 소굴렬이 소선녕(蕭善寧)으로 되어 있다. 고려와 더불어 곽주(郭州)의 서쪽에서 싸워 격파하고는 수급 1만여 급을 베었으며, 군수 물자를 모두 노획하였다. 《상동》
○ 송 대중상부 9년에 현종 7년 고려의 사신 곽원이 하직하고 돌아갈 때 왕순(王詢)에게 조서(詔書) 7함(函)과 습의(襲衣), 금대(金帶), 기폐(器幣), 안마(鞍馬) 및 경서(經書), 사서(史書), 역일(曆日), 《성혜방(聖惠方)》 등을 하사하였다. 곽원이 또 《국조등과기(國朝登科記)》와 하사한 어시(御詩)를 베껴 가지고 돌아갈 것을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송사》
○ 천희(天禧) 원년에 현종 8년 고려에서 어사형관 시랑(御事刑官侍郞) 서눌(徐訥)을 파견하였는데, 숭정전(崇政殿)에서 표문을 올리면서 방물을 바쳤다. 또 수춘군왕(壽春郡王)을 봉하여 세운 것을 하례하였다. 《상동》
○ 요 개태 6년 현종 8년 2월 정축에 조서를 내려서 국구장(國舅帳)의 상온(詳穩) 소외와(蕭隗洼)에게 본부(本部)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5월 초하루 무술에 추밀사(樞密使) 소합탁(蕭合卓)을 도통(都統)으로, 중국 사람인 행궁도부서(行宮都部署) 왕계충(王繼忠)을 부도통으로, 전전점검(殿前點檢) 소굴렬(蕭屈烈)을 도감(都監)으로 삼아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9월 을묘에 소합탁 등이 고려의 흥화군(興化軍)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자, 군사를 철수하였다. 《요사》
○ 7년 현종 9년 8월 병진에 조서를 내려 동평군왕(東平郡王) 소배압(蕭排押)을 도통으로,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 소허열(蕭虛烈)을 부총(副摠)으로, 동경 유수(東京留守) 야율팔가(耶律八哥)를 도감으로 삼아 고려를 정벌하였다. 이어 고려의 수리(守吏)들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스스로 귀순하여 오는 자에게는 후하게 상을 내리고, 성을 굳게 지키면서 항거하는 자는 뒤늦게 후회하여도 소용없을 것이다.’고 유시하였다. ○ 12월에 소배압 등이 개경(開京)에 이르자, 적들이 무너졌다. 이에 군사들을 풀어 사로잡고 노략한 다음 돌아왔다. 군사들이 다타이하(茶陀二河)를 건널 즈음에 추격하는 고려의 군사들이 쫓아왔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고려의 군사들로 하여금 두 강물을 건너게 한 다음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야율팔가 혼자서만 안 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적들이 만약 두 강물을 건너게 되면 반드시 결사적으로 싸울 것인바, 이는 위태로운 방법이다. 그러니 두 강물 사이에서 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러자 소배압이 그 의견에 따라 두 강물 사이에서 싸웠다. 적군이 양쪽에서 화살을 쏘아 대어 요나라 군사들이 불리하자, 소배압이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천운(天雲)과 우피실(右皮室) 두 부대의 군사들 가운데 강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으며, 천운군의 상온(詳穩) 해리(海里), 요련(遙輦)의 상온 아과달(阿果達),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발해(渤海)의 상온 고청명(高淸明) 등이 모두 진중에서 죽었다. 《이상 모두 상동》
○ 8년 현종 10년 3월 을해에 동평왕(東平王) 소한녕(蕭韓寧), 동경 유수(東京留守) 야율팔가(耶律八哥), 국구인 평장사(平章事) 소배압(蕭排押), 임아(林牙) 요지(要只) 등이 고려를 토벌하러 갔다가 돌아왔다. 군사를 잃은 죄에 연좌되어 죄를 낱낱이 따진 뒤 석방하였다. 기묘에 조서를 내려서 고려를 정벌하는 데 공을 세운 발해의 장교관(將校官)들에게 관직을 높여 주었다. 6월 무자에 고려를 정벌하다가 사망한 장교의 자제들을 녹용(錄用)하였다. 을사에 남피실(南皮室)의 군교(軍校)들이 고려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으므로 금과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7월 기미에 고려를 정벌하다가 죽은 여러 장수들에 대해 조서를 내려서 그의 아내들에게는 봉작(封爵)을 올려 주고, 자제들은 녹용하였다. 신유에 효리(肴里)ㆍ열가(湼哥) 두 해(奚)의 군사들이 고려를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웠으므로 모두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8월 경인에 낭군(郞君) 갈불식(曷不式) 등을 파견하여 여러 부(部)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대군을 편성해 고려를 토벌하게 하였다. 12월 신해에 왕순(王詢)이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치기를 요청하니, 조서를 내려 받아들였다. 《상동》
○ 송 천희(天禧) 3년 현종 10년 9월에 등주(登州)에서 아뢰기를,
“고려의 진봉사(進奉使) 예빈 경(禮賓卿) 최원신(崔元信)이 진왕수(秦王水) 어귀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서 공물(貢物)이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내신(內臣)을 보내어 위로하였다. 11월에 최원신 등이 들어가서 알현하면서 계금의(罽錦衣), 계금욕(罽錦褥), 오칠갑(烏漆甲), 금으로 장식한 장도(長刀)와 비수(匕首), 계금안마(罽錦鞍馬), 저포(紵布), 약물(藥物) 등을 바쳤다. 또 중포(中布) 2천 단을 바치면서 불경(佛經) 1장(藏)을 하사해 주기를 요청하니, 조칙을 내려 불경을 하사하고 포(布)는 도로 돌려주었다. 그리고 최원신 등이 배가 침몰되어 물자가 다 떨어졌으므로 특별히 의복과 비단 등을 하사하였다. 명주(明州)와 등주에서 자주 고려의 해선(海船)이 풍랑에 표류하여 해변에 떠밀려 왔다고 아뢰자, 그때마다 조서를 내려서 위로하고 바다를 건너가는 동안 필요한 식량을 지급해서 돌려보내게 하였는데, 이것이 그대로 규례가 되었다. 《송사》
○ 요 개태 9년 현종 11년 5월 경오에 야율자충(耶律資忠)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는데, 왕순이 표문을 올려서 번국(藩國)을 칭하고 조공을 바치기를 청하였으며, 구류하고 있던 왕인(王人) 지랄리(只剌里)를 돌려보냈다. 지랄리는 고려에 6년간 구류되어 있었는데, 충절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임아(林牙)로 삼았다. 신미에 사신을 보내어 왕순의 죄를 풀어 주었으며, 아울러 그가 요청한 것을 윤허하였다. 《요사》
○ 송 천희 5년 현종 12년 왕순이 고주사(告奏使) 어사예부 시랑(御事禮部侍郞) 한조(韓祚) 등 1백 79명을 파견하여 와서 사은하였으며, 또 거란과 수호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또 표문을 올려 음양지리서(陰陽地理書)와 《성혜방(聖惠方)》을 하사해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모두 하사하였다. 《송사》
○ 건흥(乾興) 원년 현종 13년 2월에 한조 등이 하직 인사를 하고 귀국하게 되니, 왕순에게 예전과 마찬가지로 하사하였다. 마침 진종(眞宗)의 상(喪)을 당하여 또 유물(遺物)을 싸 보내서 왕순에게 하사하였다. 《상동》
○ 인종(仁宗) 천성(天聖) 8년 현종 21년 왕순이 다시 어사민관 시랑(御事民官侍郞) 원영(元穎) 등 2백 93명을 파견하니, 표문을 받들고서 장춘전(長春殿)에서 황제를 알현하였으며, 금기(金器), 은계도검(銀罽刀劍), 안륵마(鞍勒馬), 향유(香油), 인삼(人蔘), 세포(細布), 동기(銅器), 유황(硫黃), 청서피(靑鼠皮) 등의 물품을 조공으로 바쳤다. 《상동》 ○ 《고려도경》에는, “천성(天聖) 연간에 고려의 사신이 여진의 사신과 함께 들어와 공물을 바쳤다. 천자가 은혜를 내리고 예우함이 대단하였다.” 하였다.
○ 9년 현종 22년 2월에 원영 등이 하직 인사를 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등주까지 원영 등을 호송하였다. 그 뒤로는 사신의 왕래가 끊어져 중국과 통하지 못한 지가 43년이나 되었다. 《상동》 ○ 《고려도경》에는, “고려 왕 왕순(王詢)이 졸하고 아들 왕륭(王隆)이 즉위하였는데, 결단성이 부족하여 정사가 어지러워지고 힘이 모자라 북쪽 오랑캐를 꺼려 드디어 다시 신하로 섬겼다. 이에 조공하는 사신이 끊어졌다. 왕륭이 죽자 정(正)이라고 사시(私諡)를 올렸다. 아들 덕왕(德王) 왕흠(王欽)과 왕흠의 동생 목왕(穆王) 왕형(王亨)도 모두 조공하는 사신을 보내지 않았으며, 조정에서도 역시 사신 보내는 것을 파하였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현종이 훙하고 태자 왕흠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덕종(德宗)으로, 그사이에는 이름이 왕륭이고 시호가 정(正)인 임금이 없다. 《고려도경》에서 말한 것은 어디에 근거하여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 요 태평(太平) 11년 현종 22년 12월 신축에 고려 왕 왕순이 훙하니, 그의 아들 왕흠(王欽)이 사신을 보내어 보고하였다. 즉시 사신에게 명하여 왕흠을 고려국왕에 책봉하도록 하였다. 《요사》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현종 왕순이 요 태평 11년 신미에 훙하고 덕종 왕흠이 즉위하였다. 그런데 《요사》에는 태평 2년의 일로 되어 있는바, 이는 틀린 것이므로 《고려사》를 따라서 바로잡았다.
○ 태평 7년 덕종 때 11월 계해에 삼한왕(三韓王) 왕흠을 계성군 절도사(啓聖軍節度使)로 삼았다. 《상동》 ○ 삼가 살펴보건대, 덕종 왕흠은 요 중희(重煕) 원년(1032) 임신에 즉위해서 3년 갑술에 훙하였으니, 덕종이 계성군 절도사가 된 것은 마땅히 중희 초년의 일이어야 할 것이다. 태평 7년(1027)이라 한 것은 아주 틀린 것이다.
○ 흥종(興宗) 중희 15년 정종(靖宗) 12년 8월 계축에 고려 왕 왕흠이 훙하니, 사신을 보내어 와서 고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덕종 왕흠이 요 중희 3년 갑술에 훙하고 동생 정종(靖宗) 왕형(王亨)이 중희 4년 을해에 즉위하여 12년간 재위하다가 이해 병술에 훙하였다. 그런데 《요사》에는 덕종이 이해에 훙하였다고 썼으니, 혹 당시 국내에 일이 많아서 이때 비로소 와서 고한 것인가?
○ 23년 문종 8년 6월 임인에 고려 왕 왕휘(王徽)가 그의 아들에게 관작을 제수해 주기를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 검교태위(檢校太尉)를 가하였다. 《상동》
○ 송 신종(神宗) 희령(煕寧) 2년에 문종 23년 고려 왕 왕순의 손자 왕휘(王徽)가 뒤를 이어 즉위하니, 이가 바로 문왕(文王)이다. 살펴보건대, 문종은 바로 현종의 아들이고 정종의 동생이다. 《송사》에 현종의 손자라고 한 것은 틀린 것이고, 《고려도경》에 목왕 왕형의 동생 왕휘라고 한 것이 맞다. 고려의 예빈성(禮賓省)에서 복건전운사(福建轉運使) 나증(羅拯)에게 이첩하기를,
“본조의 상인 황진(黃眞)ㆍ홍만(洪萬)이 와서 말하기를, ‘복건전운사가 황제의 밀지(密旨)를 받았는데, 고려와 접촉하여 통호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국왕의 뜻을 받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글은 예문지에 나온다. 지금 공장(公狀)을 황진과 홍만이 서쪽으로 돌아가는 편에 부쳐 보내니, 회답이 오기를 기다려 즉시 예물을 갖추어 조공하겠습니다.”
하였다. 왕휘가 또 일찍이 꿈속에서 중국에 갔었는데, 시를 지어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송사》 ○ 《봉창일록(蓬窓日錄)》에는, “고려는 송나라 태종 단공(端拱) 이후로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왕휘가 즉위한 뒤 어느 날 밤의 꿈속에서 변경(汴京)에 이르자, 황제가 불러서 관등(觀燈)놀이를 하였는데, 왕휘가 그 사실을 시로 지어 기록하였다. 그리고 신종 때에 이르러서 다시 옛 고사를 따라 행하였으니, 꿈속에서도 중화(中華)를 잊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 시는 예문지에 나온다.
○ 3년 문종 24년 나증이 이 일을 조정에 아뢰니, 의논하는 자들 역시 고려와 맺어 거란을 치기를 도모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허락하고, 나증에게 명하여 후하게 대접하라는 뜻으로 유시하였다. 왕휘가 드디어 민관 시랑(民官侍郞) 김제(金悌) 등 1백 10명을 보내왔다. 조서를 내려서 하국(夏國)의 사신과 같게 접대하도록 하였다. 《상동》 ○ 《동파집(東坡集)》에는, “원우(元祐) 2년(1087) 2월 17일에 왕호병(王虎炳)이 말한 것을 보니, ‘예전에 추밀원예방검상문자(樞密院禮房檢詳文字)가 되어 고려에서 보내온 공안(公案)을 보니, 처음에 장성일(張誠一)이 거란에 사신으로 감을 인하여 오랑캐의 장중(帳中)에서 고려의 사신을 만났는데, 고려의 사신이 그 임금이 중국을 흠모하고 있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그러자 장성일이 귀국하여 이 사실을 아뢰니, 선제(先帝)께서 비로소 고려를 불러오게 할 뜻이 있었다. 추밀사(樞密使) 여공필(呂公弼)이 이를 인해 선제의 뜻에 영합하여 직접 글을 지어 차자로 올려 고려를 불러오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드디어 운사(運使) 나증(羅拯)에게 명하여 상인(商人)을 파견하여 고려를 불러오게 한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나증에 대해서만 잘못이라고 말할 뿐 여공필을 허물할 줄은 알지 못한다. 장성일과 같은 경우는 대개 논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하였다.
○ 7년에 문종 28년 고려 왕이 그의 신하 김양감(金良鑑)을 파견하여 보내왔다. 이때 고려 사람들이 중국에 왕래하면서는 모두 등주(登州)를 경유해 왔는데, 와서 아뢰기를 ‘거란과 멀리 하고자 하니, 길을 바꿔 명주(明州)를 경유해 예궐(詣闕)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군현에서는 고려의 사절(使節)을 접대(接待)하는 옛 준례가 없어서 백성들이 자못 괴로워하였다. 이에 조칙(詔勅)을 내려 법식(法式)을 세워 반포하였으며, 접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모두 관가에서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 고려의 사신들이 중국어에 능통하지 못한 탓에 모리(謀利)하는 자들이 사사로이 거래할까 염려하여 고려의 사신이 이르는 곳마다 왕래를 금지시켰다. 왕휘가 중서성과 추밀원에 선물하는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조칙을 내려 시장에서 교역하여 겸백(縑帛)을 사서 보답하게 하였다. 또 표문을 올려 의약(醫藥)을 구하고 화소공(畫塑工)을 파견하여 고려 사람들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나증(羅拯)에게 조칙을 내려 고려로 가기를 원하는 자를 모집하도록 하였다. 《상동》
○ 9년에 문종 30년 고려에서 다시 최사훈(崔思訓)을 보내오니, 황제가 총애하는 근시(近侍)에게 명해 도정(都亭)ㆍ서역(西驛)의 예에 따라 관소(館所)를 수리하여 아주 후하게 접대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 사신으로 나오는 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고려에서 일찍이 영관(伶官) 10여 명을 바치면서 아뢰기를,
“오랑캐의 음악이라 볼 것은 없지만 국사(國史)를 빛내고자 해서 바치는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고려는 글을 숭상하는 나라라고 하면서 조서를 내릴 적마다 반드시 글을 잘 짓는 신하를 뽑아 짓게 한 다음 그 가운데서 가장 잘된 것을 뽑아 보내었다. 《상동》 ○ 《고려도경》에는, “희령(煕寧) 4년(1071)에 왕휘가 권지국사(權知國事)로서 다시 조공을 바쳤다. 7년과 9년에 사신을 거듭 보내오자, 신종황제가 고려 왕의 충성을 가상하게 여겼다.” 하였다.
○ 요 도종(道宗) 태강(太康) 4년 문종 32년 4월 신해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압록강 이동의 지역을 돌려주기를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요사》
○ 송 원풍(元豐) 원년에 문종 32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안도(安燾), 기거사인(起居舍人) 진목(陳睦)을 각기 가관(假官)으로 임명하려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빙문하였다. 명주(明州)에서 두 척의 배를 만들었는데, 한 척은 ‘능허안제치원(凌虛安濟致遠)’이라 하고, 또 한 척은 ‘영비순제(靈飛順濟)’로서 모두 신주(神舟)라고 이름하였다. 정해현(定海縣)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가 고려에 도착하자, 고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나와 맞이하였다. 왕휘가 포(袍)ㆍ홀(笏)ㆍ옥대(玉帶) 등을 갖추어 입고 절한 다음 조서를 받들었고, 안도와 진목을 대우함에 있어서도 예로써 하였다. 그들을 별궁(別宮)에다 묵게 하면서 관소의 이름을 순천관(順天館)이라 하였는데, 이는 ‘중국을 하늘처럼 높이 받들고 따른다’는 뜻이다. 이때 왕휘는 이미 병들었으므로 간신히 조서만을 받들었으며, 또 의약을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송사》 ○ 《고려도경》에는 왕휘가 풍비증(風痺症)을 앓았다고 하였다.
○ 2년에 문종 33년 왕순봉(王舜封)을 파견하여 의원을 데리고 고려로 가 진찰하고 치료하게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문종 33년 7월 신미에 송나라에서 왕순봉과 한림의관(翰林醫官) 형조(刑慥)ㆍ주도능(朱道能)ㆍ심신(沈紳)ㆍ소화급(邵化及) 등 88명을 보내오고 약 1백 종을 하사하였다. 왕휘가 또 유홍(柳洪)을 파견하여 사은하도록 하였는데, 바다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조공할 물품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에 유홍이 글을 올려 자신의 죄를 진달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위로하였다. 얼마 뒤에 일본에서 만든 배를 바치면서 아뢰기를,
“제후는 거복(車服)을 조공으로 바치지 못하는 법이기에 감히 토산물과 함께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고려에서 공물을 바칠 때마다 문득 유사에게 내려 그 값을 헤아린 다음 1만 겸(縑)을 대가로 주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값을 헤아리지 말고 1만 겸을 정수로 삼도록 하였다. 《상동》
○ 6년에 문종 37년 왕휘가 졸하였는데, 왕위에 있던 것이 38년이었다. 왕휘는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어질고 너그럽게 하기를 숭상하였으니, 동이의 어진 임금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의 풍속을 그대로 따라 왕녀(王女)는 신하나 서인들에게 시집보내지 않고 반드시 형제나 종족(宗族)에게 시집보내었으며, 귀족들 역시 그렇게 하였다. 둘째 아들인 왕운(王運)이 ‘이미 중국과 통호하였으니 예의로써 예전의 풍습을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간하자, 왕휘가 노하여 왕운을 밖으로 내쫓았다. 고려에서 부음을 아뢰자, 황제가 가엽게 여겨 명주(明州)에 조서를 내려 절간을 수리한 다음 왕휘를 위해 1개월간 불공을 드리게 하였으며, 양경략(楊景畧)ㆍ왕순봉(王舜封)을 파견하여 제전(祭奠)을 올리게 하고, 전협(錢勰)ㆍ송구(宋球)를 파견하여 조위(弔慰)하도록 하였다. 양경략이 이지의(李之儀)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자, 황제가 이지의는 글재주가 시원치 않다고 하면서, 그 대신 학문이 깊고 기국이 빼어난 자를 중서성에 나오게 해 글재주를 시험한 다음 파견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먼 외방의 나라라 완벽하게 갖추기를 요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사신에게 서로 접견하는 장소의 전각 이름이나 망새 기와의 모양새 등에 구애되지 말고 접견하라고 유시하였다. 왕휘의 아들 순왕(順王) 왕훈(王勳)이 뒤를 이어 즉위한 지 1백 일 만에 졸하였다. 그의 동생인 선왕(宣王) 왕운(王運)은 《고려도경》에는 국원공(國原公) 왕운이라고 하였다. 어진 이를 사랑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품행이 근신하여, 장사치가 서책을 팔려고 올 적이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향불을 피운 다음 대하였다. 《상동》 ○ 《요사》에는, 태강(太康) 9년(1083) 8월에 고려 왕 왕휘가 훙하고 기사에 왕휘의 세자 삼한국공(三韓國公) 왕훈(王勳)을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삼았으며, 12월에 고려 왕 왕훈이 훙하였다고 하였다. ○ 살펴보건대, 태강 9년은 송 원풍 6년이다.
○ 요 대안(大安) 원년 선종 2년 11월 병진에 사신을 보내어 삼한국공(三韓國公) 왕훈(王勳)의 세자 왕운(王運)을 고려국왕으로 삼았다. 《요사》
○ 송 원풍 8년에 선종 2년 고려 왕이 그의 동생 승통(僧統)을 파견하여 조회하면서 불법(佛法)에 대해 물었으며, 아울러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을 바쳤다.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고려에서 김상기(金上琦)를 봉위사(奉慰使)로, 임기(林曁)를 치하사(致賀使)로 파견하였다. 고려에서 형법(刑法)에 관한 서책과 《태평어람(太平御覽)》ㆍ《개보통례(開寶通禮)》ㆍ《문원영화(文苑英華)》 등을 사 가겠다고 요청하자, 조서를 내려서 《문원영화》 한 책만 하사하였으며, 명마(名馬), 금기(錦綺), 금백(金帛) 등의 물품을 주어 그 예에 보답하게 하였다. 《송사》
○ 철종(哲宗) 원우(元祐) 4년 선종 6년 11월에 항주(杭州)를 맡고 있는 소식(蘇軾)이 상주(上奏)하기를,
“고려의 승통(僧統) 의천(義天)의 수하인 승(僧) 수개(壽介) 등 5인이 고려 예빈성(禮賓省)의 공문을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국왕의 명을 받들어 수개 등으로 하여금 의천이 지은 제문(祭文)을 싸 가지고 항주로 가서 승 원사리(源闍梨)를 제사 지내게 한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국모(國母)의 지시를 받들어서 두 개의 금탑(金塔)을 가지고 가서 황제와 태황태후께서 오래 사시도록 축원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고려의 속셈을 살펴보건대, 이는 대개 이성(二聖)께서 자리를 이은 지 몇 년 동안에 감히 함부로 들어와 조공하지 못하여서 그들의 이익을 모두 잃어버렸으므로, 다시 사신을 파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성상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으므로 원사리를 제사 지낸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고, 인하여 금탑을 바쳐 우리 조정에서 고려를 어떻게 대우하는가를 시험해 보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어찌 금탑을 바쳐 축수(祝壽)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지 않는단 말입니까. 만약 조정에서 그들을 조금이라도 후하게 대해 주면 그들은 탐욕스런 마음을 다시 가져 조공을 자주 바쳐서 반드시 무궁한 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하였다. 《동파집》 ○ 《속문헌통고》에는, “의천의 성은 왕씨로, 고려국 인효왕(仁孝王)의 넷째 아들이다.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하여 우세(佑世)라는 호와 승통(僧統)이라는 직위에 봉하여졌다. 원우(元祐) 초기에 중국으로 들어와 불법(佛法)을 물었는데, 황제가 칙명을 내려 주객(主客) 양걸(楊傑)로 하여금 그를 호송하여 전당(錢塘)으로 가게 하였다. 이로 인해 의천이 불법을 받았다.” 하였다.
○ 5년에 선종 7년 다시 고려와 사신을 통하여 은기(銀器) 5천 벌을 하사하였다. 《송사》
○ 7년에 선종 9년 고려에서 황종각(黃宗愨)을 파견하여 《황제침경(黃帝鍼經)》을 바치고 서적을 많이 사 가게 해 주기를 청하니, 예부 상서 소식(蘇軾)이 아뢰기를,
“고려에서 들어와 조공을 바치는 것은 조금도 이익이 없는 반면에 다섯 가지의 손해되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 고려에서 사 가기를 청하는 여러 서책과 금박(金箔)을 수매(收買)하는 것은 모두 허락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조칙을 내려 금박을 사는 것만 허락하였다. 그러나 마침내는 《책부원귀(册府元龜)》를 사 가지고 돌아갔다. 《상동》
○ 요 대안 10년 선종 11년 여름에 고려국왕 왕운이 훙하였다. 그의 아들 왕욱(王昱)이 사신을 보내어 와서 고하니, 즉시 사신을 보내어 부의하고 증직하였다. 《요사》
○ 수륭(壽隆) 원년 헌종(獻宗) 원년 11월 경신에 고려 왕 왕욱이 병이 들었다. 그의 아들 왕옹(王顒)을 권지국사로 명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왕옹은 숙종(肅宗)의 이름으로 바로 헌종의 숙부이니, 이곳에서 그의 아들 왕옹을 권지국사로 명하였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 3년 숙종 2년 3월에 왕욱이 훙하였다. 《상동》
○ 송 원부(元符) 2년이다. 숙종 4년 당초에 고려의 선왕(宣王) 왕운이 즉위하여 4년 만에 졸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선종은 11년간 재위하다가 소성(紹聖) 원년(1094) 갑술에 훙하였다. 그러니 《송사》 및 《고려도경》에 모두 즉위한 지 4년 만에 졸하였다고 한 것은 아주 크게 틀린 것이다. 아들인 회왕(懷王) 왕요(王堯)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선종이 훙하고 태자 왕욱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헌종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회왕 왕요라고 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왕요는 바로 정종(定宗)의 이름이다. 한 해가 지나기도 전에 병이 들어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그의 숙부인 계림군(鷄林君) 왕희(王煕)에게 섭정하게 하였다. 얼마 뒤에 왕요가 졸하자 왕희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왕희는 뒤에 요나라 임금의 휘(諱)를 피하여 왕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왕옹은 성품이 탐학스럽고 인색하였으며, 장사꾼들의 이익을 빼앗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부잣집에서 범법을 할 경우에는 오랫동안 가두어 두고 속전(贖錢)을 바치게 하였는데, 아무리 하찮은 죄를 저질렀더라도 역시 은 몇 근을 바쳐야만 하였다. 몇 년 동안 사신이 오지 않다가 2월 기묘에 선비를 빈공(賓貢)으로 보냈다. 《송사》
○ 요 수륭(壽隆) 5년 숙종 4년 10월 초하루 기해에 고려 왕 왕옹이 사신을 보내어 책봉해 주기를 청하였다. 《요사》
○ 6년에 숙종 5년 고려 왕 왕옹을 봉하여 삼한국공(三韓國公)으로 삼았다. 《상동》
○ 송 원부(元符) 3년 숙종 5년 휘종(徽宗)이 즉위하자, 고려에서 임의(任懿)와 왕하(王嘏)를 보내어 조문하고 축하하였다. 《송사》
[주D-001]권발(圈發) : 발음을 표시하기 위하여 글자의 네 귀퉁이에 권점(圈點)을 치는 것을 말한다.
[주D-002]권지국사(權知國事) : 왕호(王號)를 인정받지 못하는 동안에 사용하는 왕의 칭호로, 권서국사(權署國事), 권지국왕사(權知國王事)라고도 한다. 고려 이후 우리나라는 왕이 즉위하면 중국에 보고하여 승인을 받아야만 왕호를 사용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라는 칭호를, 조선 태조 이성계는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라는 칭호를 썼다.
[주D-003]신책(神册) 4년 : 원문은 신책 3년으로 되어 있으나, 정명 5년은 신책 4년에 해당 되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탐부(耽浮) : 탐라(耽羅) 즉 제주도를 말한다. 천수(天授) 21년(938)에 탐라국의 태자(太子)인 말로(末老)가 와서 조회하자, 태조가 이를 갸륵하게 여겨, 신라의 고례에 따라 국왕에게는 성주(星主), 태자에게는 왕자(王子)의 작호(爵號)를 주었으며, 그 뒤 숙종 때에 이르러서 고려의 군현으로 개편되었다.
[주D-005]환어라(驩於羅) : 거제도(巨濟島)나 대마도(對馬島)에 있었던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D-006]철륵(鐵勒) : 흉노의 후예로, 뒤에 돌궐에 복속되어 지금의 청해(淸海) 지방에 거주하였다. 당나라에 의해 토평되었으며, 남은 종족들은 모두 회흘(回紇)에 귀속되었다.
[주D-007]왕인적(王仁翟) : 《고려사절요》에 “23년(940)에 후진(後晉)에서 우리나라의 볼모 왕인적을 돌려보냈다.” 하였다.《高麗史節要 卷1 太祖神聖大王》
[주D-008]화복(火卜) : 점치는 방법의 하나이다.
[주D-009]별서효경(別序孝經) …… 올렸다 : 이 당시에 중국에는 당나라 말기에서 오대 시대에 걸친 전란으로 전적이 많이 유실되어 후주(後周)에서 고려에 이들 전적을 보내 주기를 요구하여 보낸 것인 듯하다.《김상기, 高麗時代史, 서울대학교출판부, 1985, 62쪽》
[주D-010]여진(女眞) : 만주의 동부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으로, 송화강(松花江)ㆍ목단강(牧丹江)ㆍ흑룡강(黑龍江) 유역에 살던 종족이다. 10세기 초에 요(遼)나라 태조가 발해(渤海)를 멸망시키자, 발해에서 벗어난 말갈(靺鞨)을 여진족이라 불렀다. 그 가운데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요나라 때 고려와의 국경 지역인 두만강 유역에서 함경남북도 지방에 해당되는 지역에 이동하여 살았는데, 이들을 흑수여진(黑水女眞)ㆍ동여진(東女眞)이라 불렀으며, 생여진(生女眞)이라고도 하였다. 또 길림성(吉林省)의 서남부 지역에 사는 여진은 서여진(西女眞)이라고 하였다.
[주D-011]목계(木契) : 나무 조각에다 의사를 표시하는 부호를 새긴 것이다.
[주D-012]정삭(正朔) : 정삭은 정월 초하루를 말하는데, 제후가 천자에게 역(曆)을 받는 것을 말한다.
[주D-013]대매하(大梅河)ㆍ소매하(小梅河) : 대매하는 지금의 요하(遼河)이고, 소매하는 지금의 혼하(渾河)이다.
[주D-014]이에 …… 파견하여 : 《동사강목》에는 단공 2년에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여가(如可)가 여가(女可)로 되어 있다.《東史綱目 第6下》
[주D-015]소항덕(蕭恒德) : 소손녕(蕭遜寧)을 가리킨다. 소항덕이 본명이며, 손녕은 그의 자(字)이다.
[주D-016]정벌하였다 : “11월에……정벌하였다”는 거란의 제1차 침입을 말한다. 이 당시 송나라와 대치 관계에 있던 요나라는 송나라와 고려가 화친을 맺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소손녕을 도통(都統)으로 하여 정병 80만 명을 이끌고 쳐들어와 지금의 태천(泰川)과 구성(龜城) 중간 지점에 있는 봉산군(蓬山郡)을 점령하고는 항복을 요구해 왔다. 이에 고려에서는 서경(西京)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떼어 주고 강화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중군사(中軍使)로서 직접 거란군을 방어하고 있던 서희(徐煕)가 이를 반대하였다. 소손녕은 오랫동안 기다려도 항복에 대한 소식이 없자 안주(安州) 서남쪽에 있는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패하였다. 이 기회를 타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이에 거란에서는 고려가 요나라에 조공(朝貢)하는 대신 압록강 이동의 여진 땅 280리를 고려가 소유하는 것을 묵인한다는 조건으로 화약(和約)을 맺고는 철군하였다.
[주D-017]동모(東牟) : 산동성(山東省) 봉래현(蓬萊縣)에 있다.
[주D-018]공거인(貢擧人) : 공사(貢士)와 거인(擧人)을 말한다. 지방에서 천거하거나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중앙의 회시를 볼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주D-019]빈공 진사(賓貢進士) : 빈공은 제후가 천자에게 천거한 선비라는 뜻으로, 당나라와 송나라 때에는 변방의 여러 나라 출신들을 등용하기 위해 빈공과를 두었다.
[주D-020]공목리(孔目吏) : 고려 때 예빈시(禮賓寺)의 하급 관리로 회계와 공문서를 관장하는 관리이다.
[주D-021]여진(女眞) : 본문에는 ‘여직(女直)’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요나라 흥종(興宗)의 이름을 피휘(避諱)하기 위하여 그렇게 표기한 것이다. 《요사》에서 발췌한 것은 모두 여직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번역을 하면서는 ‘여진’으로 표기하였다.
[주D-022]강조(康肇) : 《고려사》ㆍ《동사강목》에는 강조(康兆)로 표기되어 있다.
[주D-023]고려의 …… 하겠다 :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면서 강조를 문책하기 위한 것이라고 명분을 내세웠으나,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첫 번째로 제1차 침입 때와 마찬가지로 고려와 송나라 간의 우호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의도에서였고, 두 번째로는 1차 침공 결과 고려 측에 양도하게 된 이른바 강동 육주(江東六州)를 탈환하자는 것이었다.《한국사 제4권, 국사편찬위원회, 1974, 273쪽》
[주D-024]황제가 …… 정벌하면서 : 이것이 거란의 제2차 침입이다. 1차 침입 이후에도 고려에서 계속 송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거란을 멀리하였으므로 거란에서는 고려를 정벌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강조(康兆)의 정변이 일어나자, 강조의 죄를 묻겠다는 구실로 거란의 성종(成宗)이 직접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을 공격하였으나, 양규(楊規)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성공치 못하였다. 이에 성종은 진로를 바꾸어 통주(通州) 부근에서 강조(康兆)의 군사를 만나 이를 격파하고 강조를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그런 뒤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한 채 곧바로 개성으로 진격하였다. 현종은 나주(羅州)로 피란하면서 하공진(河拱辰)을 청화사(請和使)로 파견하여 강화를 요청하였다. 거란에서는 고려 왕이 직접 조회할 것을 요구하였고, 고려에서는 이를 허락하니, 거란의 군사가 철군하였다.
[주D-025]북면임아(北面林牙) : 임아는 문한(文翰)을 맡은 관원을 말하며, 학사(學士)를 칭하기도 한다. 군목(群牧)에 설치한 임아는 문서(文書)를 관장하였다.《遼史 卷106 國語解》
[주D-026]동주(銅州) : 《고려사》ㆍ《동사강목》에는 통주(通州)로 되어 있다. 지금의 선천(宣川)이다.
[주D-027]상온(詳穩) : 요나라의 관직으로, 변방 백성을 진무하는 관직이다. 《遼史》 국어해(國語解)에, “여러 관부(官府)를 감독하고 다스리는 장관(長官)이다.” 하였다.
[주D-028]강조와 …… 사로잡으니 : 이현온이 《고려사》와 《동사강목》에는 이현운(李鉉雲)으로 되어 있다. 이때 거란의 포로가 된 강조는 자신의 신하가 되라는 요나라 성종의 거듭된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 하면서 끝끝내 버티었다. 성종이 똑같은 말로 이현운을 꾀이자, 이현운은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보았는데, 한 마음으로 어찌 옛 나라를 생각하랴.”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강조가 노하여 이현운을 발로 차면서 “네가 고려 사람으로서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東史綱目 第6下》
[주D-029]곽주(郭州)ㆍ귀주(貴州)ㆍ영주(寧州) : 곽주는 지금의 곽산(郭山)이고, 귀주는 지금의 구성(龜城)이고, 영주는 지금의 안주(安州)이다.
[주D-030]청강(淸江) : 《동사강목》에는 청수강(淸水江)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청천강(淸川江)을 말한다.
[주D-031]주애군(朱崖郡)을 …… 힘이었다 : 주애군은 한나라 때 설치한 군현이다. 한나라 원제(元帝) 초원(初元) 원년(기원전 48)에 주애군의 백성들이 난동을 부리자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였는데, 여러 해 동안 평정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규모의 군사를 보내 평정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대조(待詔)로 있던 가연지가 상소를 올려 이에 반대하면서, “주애군은 바닷가에 외롭게 있으니, 버린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으며, 치지 않는다 해도 위엄이 손상되지 않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부자간에 한 냇물에서 같이 목욕하여 금수와 다름이 없어서 본디 군현을 설치할 곳이 못 됩니다.” 하였다. 원제가 이 의논에 따라 주애군을 정벌하는 일을 중지하였다.《漢書 卷9, 卷64》
[주D-032]흥주(興州) …… 여섯 성 : 평안북도 서북쪽의 해안 지대에 있는 여섯 성으로, 이것이 이른바 강동 육주(江東六州)이다. 이 강동 육주는 당시에 군사상, 교통상의 요지로, 이를 차지하기 위해 요나라와 고려가 치열한 분쟁을 치렀는데, 거란의 3차 침입 이후에는 고려의 영토로 완전히 귀속되었다.
[주D-033]승라주(昇羅州) : 승주(昇州)와 나주(羅州)를 말한다. 이때 현종(顯宗)은 나주로 피란하였다.
[주D-034]내원성(來遠城) : 요나라의 진지(陣地)로, 압록강 가의 검동도(黔同島)이다.
[주D-035]고려에서 …… 일으켰다 : 거란 군사가 고려에서 철수할 때, 통주(通州)와 구주(龜州) 등지를 확보하고 있던 양규(楊規) 휘하의 고려 군사가 철수하는 거란 군사를 맞아 대타격을 가하였다. 구주 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叔興)은 거란 군사 1만 명을 격살하였으며, 양규는 의주 무로대(無老代) 전투에서 거란 군사 2천 명을 사살하고 포로 3천 명을 탈환하였으며, 이수(梨樹)ㆍ석령(石嶺)의 전투에서 2천 5백 명을 사살하고 포로 1천 명을 탈환하였으며, 여리참(餘里站) 전투에서 1천 명을 사살하고 포로 1천 명을 탈환하였으며, 애전(艾田) 전투에서 1천 명을 사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한국사 제4권, 271쪽》
[주D-036]귀덕주(貴德州) : 귀주(貴州)로 지금의 구성(龜城)이다.
[주D-037]갈소관여진(曷蘇館女眞) :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진을 정벌할 때 여진 수천 호를 요양(遼陽)의 남쪽으로 이주시켰는데, 이를 갈소관여진이라 한다. 일설에는 숙여진(熟女眞)을 갈소관여진이라고 한다. 합소관여진(合蘇官女眞)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김상기, 高麗時代史, 서울대학교출판부, 1985, 186쪽 주》
[주D-038]압록강에 …… 놓고 : 압록강에 놓은 부교는 지금의 구련성(九連城)으로부터 강상(江上)의 검동도(黔同島)를 거쳐 의주에 이르는 곳에 설치된 듯하다.《한국사 제4권, 278쪽 주》
[주D-039]보주(保州) : 지금의 의주(義州)이다.
[주D-040]선의주(宣義州) : 지금의 선천(宣川)이다.
[주D-041]정원주(定遠州) : 지금의 정주(定州)이다.
[주D-042]세마(細馬) : 잘 길들인 말을 말한다.
[주D-043]산마(散馬) : 길들이지 않은 말을 말한다.
[주D-044]철전(鐵甸) : 철리국(鐵利國)을 말한다. 《동사강목》에 “철리국은 여진의 동북쪽 옛 말갈의 부락에 있는데, 발해가 철리부(鐵利府)를 두었더니 뒤에 스스로 일어나 나라가 되었다.” 하였다.《東史綱目 第6下》
[주D-045]곽주(郭州) : 지금의 곽산(郭山)이다.
[주D-046]8월 …… 정벌하였다 : 이것이 거란의 제3차 침입이다. 거란에서 고려 왕이 친히 들어와 조회하기를 요구하였으나 고려에서는 병을 핑계로 들어가 조회하지 않았다. 그러자 거란에서는 앞서 고려가 차지하였던 강동 육주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니, 고려에서 이를 거절하고 요나라와 국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거란은 1014년부터 계속하여 강동 육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침입을 시도하였는데, 그때마다 패하여 돌아갔다. 1018년에 이르러 소배압(蕭排押)의 지휘하에 1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규모의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때 고려에서는 상원수(上元帥) 강감찬(姜邯贊)과 부원수 강민첨(姜民瞻)으로 하여금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였다. 두 장수는 흥화진(興化鎭)으로 진격하여 산골짜기에 1만 명의 군사를 매복시키고 성 동쪽의 큰 냇물 즉, 지금의 삼교천(三橋川)을 막아 놓은 다음 적이 이르자 물을 트고 급습하여 대파하였다. 이에 소배압은 샛길을 따라 개성으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곳곳에서 강민첨의 군사에게 패함에 그 이듬해 퇴각하였다. 이때 강감찬은 구주(龜州)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후퇴하는 거란 군사를 크게 격파하여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밖에 안 되었다. 이를 구주대첩(龜州大捷)이라 한다. 이를 계기로 거란에서 요구하였던 고려 왕이 친히 조회하는 문제와 강동 육주의 반환 문제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주D-047]다타이하(茶陀二河) : 이는 고려 측의 기록에 보이는 석천(石川) 즉 지금의 황화천(皇華川)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하(茶河)와 타하(陀河) 두 강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다타이(茶陀二)의 이(二)를 숫자로 본 데서 나온 착오이다.《김상기, 高麗時代史, 99쪽 주》
[주D-048]우피실(右皮室) : 국어해에, “피실(皮室)은 군사 제도로, 남(南)ㆍ북(北)ㆍ좌(左)ㆍ우(右)의 피실과 황피실(黃皮室)이 있으며, 모두 정예병을 장악한다.” 하였다.
[주D-049]하국(夏國) : 서하국(西夏國)을 가리킨다. 서하는 송나라 때 서북방의 당항족(黨項族)이 세운 나라로, 송나라에 대해 신하를 칭하다가 1038년에 조원호(趙元昊)에 의해 건국되었다. 1227년까지 존속하였다.
[주D-050]이때 …… 허락하였다 : 고려와 송나라가 교류하던 초기의 항로(航路)는 주로 황해도 연안의 옹진(甕津) 항구로부터 바다를 건너 산동성 봉래현(蓬萊縣)에 있던 등주(登州)와 산동성 제성현(諸城縣)에 있던 밀주(密州) 등지에 상륙하는 항로를 이용하였다. 그런데 이 항로가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어서 거란에서 알게 될까 염려하였다. 이에 고려에서 김양감(金良鑑)을 파견하여 송나라에서의 상륙지를 산동성 항구로부터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 즉, 지금의 영파부(寧波府)로 옮길 것을 청하여 변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성강(禮成江)에서 출항하여 인천에 속한 섬인 자연도(紫燕島), 해미(海美)의 서쪽에 있는 마도(馬島), 고군산(古群山), 전라북도 흥덕(興德)의 서쪽에 있는 죽도(竹島), 흑산도(黑山島)를 거쳐 서남쪽으로 항해한 뒤 명주에 도달하는 새로운 항로를 열게 되었다. 등주로 가는 항로를 동로(東路)라 하고, 명주로 가는 항로를 남로(南路)라고 하였는데, 이후로는 주로 남로를 이용하여 왕래하였다.《韓國史 中世篇,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61, 390쪽》 《한국사 제4권 국사편찬위원회, 337쪽》
[주D-051]도정(都亭) : 도읍(都邑) 안에 있는 전사(傳舍)를 말한다. 진(秦)나라 법에 10리 마다 1정(亭)을 두고 군현의 치소(治所)에는 도정(都亭)을 두었다.
[주D-052]왕훈(王勳)의 세자 왕운(王運) : 이 기사는 잘못되었다. 선종(宣宗) 왕운(王運)은 문종(文宗) 왕휘(王徽)의 둘째 아들이고, 순종(順宗) 왕훈(王勳)의 동생이다.
[주D-053]승통(僧統) : 고려 승위(僧位)로 교종(敎宗)의 직위 가운데 가장 높은 직이다. 여기서는 의천(義天)을 가리킨다. 의천은 선종의 동생으로 이름이 후(煦)인데, 송나라로 들어간 뒤에는 송 철종의 휘(諱)를 피하여 자(字)인 의천으로 행세하였다. 《동사강목》 제7을 보면, 의천은 왕명을 받들고 송나라로 간 것이 아니라, 몰래 상선(商船)을 타고 도망하여 송나라로 들어갔으며, 송나라에서는 의천을 객례(客禮)로 대우한 것으로 되어 있어, 이 기사와는 차이가 있다.
[주D-054]전당(錢塘) : 남송(南宋)의 도읍지이다.
.고려(高麗) 2
○ 금(金)나라 목종(穆宗) 영가(盈哥) 10년 계미 숙종 8년 2월에 고려가 비로소 와서 통호(通好)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숙종 7년 임오에 동여진(東女眞)의 추장 영가(盈哥)가 사신을 보내와서 조회하였다.
○ 고려의 지역은 압록강(鴨綠江) 동쪽과 갈라로(曷懶路) 남쪽에 위치하였으며, 동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에 닿았다. 요나라 때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옛 숙신(肅愼)의 지역에 있으며, 백산(白山)이라는 산이 그곳에 있는데, 이는 대개 장백산(長白山)으로,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 ○ 살펴보건대, 《금사》 세기(世紀)를 보면, 금나라의 시조 함보(函普)는 고려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려사》 세가(世家)에는, “금나라의 선조는 본국 평주(平州)의 승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이다. 처음에 여진으로 들어가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으며, 여진의 여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고을태사(古乙太師)라 하였다. 고을태사가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았으며, 활라태사는 아들을 많이 낳았는데, 큰아들을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막내를 영가(盈哥)라 하였다. 그 가운데서 영가가 가장 웅걸차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큰아들인 오아속(烏雅束)이 영가의 뒤를 이었으며, 오아속이 졸하자 그의 동생인 아골타(阿骨打)가 즉위하였다. 예종(睿宗) 4년 6월에 동번사(東藩使) 요불(褭弗)ㆍ사현(史顯) 등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면서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태사(太師) 영가(盈哥)가 일찍이 「우리 조종들께서 대방(大邦)에서 나왔으니 자손들에 이르러서는 의리상 대방에 귀의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다. 지금 태사로 있는 오아속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하였다. 예종 12년 3월에는 아골타가 아지(阿只) 등을 파견하여 글을 올렸는데, 형제(兄弟)라고 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조고(祖考) 때부터 한 귀퉁이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일러 대국(大國)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아 조심하여 섬겼다.’ 하였다. 14년 8월 정축에 중서 주사(中書主事) 조순거(曺舜擧)를 금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더구나 금나라가 발원한 곳은 반은 우리 땅이다.’는 내용이 있자, 금나라 임금이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하였다.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금나라의 선조는 본디 고려에서 나와서 복종하여 섬기던 자이다. 여진이 비록 예전에 고려에 속하였으나, 다시 고려와 통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이에 앞서 어떤 의원(醫員)이 병을 잘 치료하였는데,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으며, 또한 그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는 여진의 완안부(完顔部)에서 살았다. 목종(穆宗) 때 어떤 척족(戚族)이 병이 나자 이 의원이 진찰하여 병세를 살폈다. 목종이 의원에게 이르기를, “네가 이 사람의 병을 낫게만 해 준다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 너를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하였다. 그러자 의원이 좋다고 하였다. 그 사람의 병이 낫자, 목종이 처음에 약속한 대로 돌려보내 주었다. 을리골령(乙離骨嶺) 복산부(僕散部)의 호석래(胡石來) 발근(勃菫)이 고려와 여진의 사이에 살고 있었다. 목종이 족인(族人) 수아(叟阿)를 시켜 호석래 발근을 초청해 오도록 하고는, 인하여 수아로 하여금 고려의 국경까지 의원을 호송해 가서 돌려보내 주게 하였다. 그 의원이 고려로 돌아가서 고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여진의 흑수부(黑水部)에 사는 부족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져 군사가 더욱 정예롭게 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 하였다. 고려 왕이 그 말을 듣고는 여진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얼마 뒤에 호석래가 귀부(歸附)하였으며, 마침내 을리골령 동쪽에 있는 여러 부족들을 거느리고 모두 귀부하게 하였다.
○ 아소(阿疎)가 요나라에서 그의 무리인 달기(達紀)를 시켜 갈라전(曷懶甸) 사람들을 선동하니, 갈라전 사람들이 달기를 체포하였다. 금나라 목종이 달기를 고려로 송환하면서 고려 왕에게 말하기를,
“앞서 고려의 변경에서 환란을 일으킨 자들은 모두 이런 무리들이었다.”
하였다. 목종이 소해리(蕭海里)를 격파하고는 알로한(斡魯罕)을 시켜 고려로 가서 싸움에 이긴 것을 통보하게 하였다. 그러자 고려에서도 사신을 보내어 승리를 축하하였다. 얼마 뒤에 또 사갈(斜葛)과 알로한을 시켜 고려로 가서 빙문하게 하니, 고려 왕이 말하기를,
“사갈은 여진의 족제(族弟)이니, 융숭하게 대우하여야 한다.”
하고는 이어 큰 은반(銀盤) 하나를 주면서 사례하였다. 그 뒤에 갈라전의 여러 부족들이 모두 금나라로 귀부하고자 하였다. 고려에서 이 사실을 알고는 와서 귀부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고려에 가까워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어서 그런 것이다. 고려에서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귀부하지 못하도록 막았는데, 사갈이 고려에 있다가 갈라로(曷懶路)를 오가면서 이런 사실을 모두 알았다. 이에 드디어 석적환(石適歡)을 시켜서 갈라전으로 가서 갈라전 사람들을 귀부시키게 하였다. 석적환이 출발하기 전에 목종이 죽고 강종(康宗)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강종이 석적환을 파견하여 성현(星顯) 통문(統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을리골령에 이르러서 군사를 더 모집한 다음, 활녈수(活涅水)로 나아가 갈라전을 순행하면서 배반하여 도망한 7성(城)을 수습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고려에서 갈라전으로 사람을 파견하여 의논할 일이 있다고 고하였다. 갈라전의 관속(官屬)들이 사륵(斜勒) 상온(詳穩)과 치라보(治刺保) 상온으로 하여금 고려로 가게 하니, 석적환 역시 배노(盃魯)를 파견하여 고려로 보냈다. 그러자 고려에서 차라보 등을 머무르게 하고 배노는 되돌려 보내면서 ‘너와는 의논할 일이 없다.’ 하였다. 이에 오수(五水)의 백성들이 모두 고려로 귀부하였으며, 단련사(團練使) 가운데 붙잡힌 자가 14명이나 되었다. 《이상 모두 금사》
○ 강종(康宗) 오아속(烏雅束) 2년 갑신에 숙종 9년 고려가 와서 침공하자, 석적환이 크게 격파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을 추격하여 고려의 경내로 들어가 진지를 불살라 버리고 돌아왔다. 4월에 고려가 다시 쳐들어오자, 석적환이 5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벽등수(闢登水)에서 막아 다시 크게 격파하였다. 그들을 추격해서 벽등수로 들어가 잔병들을 국경 밖으로 축출하였다. 이에 고려 왕이 말하기를,
“변경에 흔단이 있다고 고한 자는 모두 갈라전의 관속인 상단(祥丹)ㆍ방도리(傍都里)ㆍ석필한(昔畢罕) 등이었다.”
하면서, 단련사 14명과 6로(路)의 사인(使人) 가운데 고려에 있던 자들을 모두 되돌려 보내고는 사신을 파견하여 강화를 요청하였다. 이에 드디어 사갈로 하여금 국경을 확정하게 하였다. 사갈이 을리골수(乙離骨水)와 갈라전(曷懶甸) 활녜수(活禰水)에 이르러 두 달간을 머물렀는데, 사갈이 송사(訟事)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사건이 있을 적마다 지체시키므로 백성들이 아주 괴롭게 여겼다. 이에 강종이 사갈을 송환하고 석적환을 파견하였다. 석적환은 삼잔수(三潺水)에다가 막부(幕府)를 설치하고, 지난날에 몰래 고려와 왕래하면서 화란을 일으킨 자들을 즉시 법에 의거해 처단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불문에 부치니, 강종이 유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상동》
○ 요 천조(遼天祚) 건통(乾統) 5년 숙종 10년 11월 병진에 고려의 삼한국공(三韓國公) 왕옹(王顒)이 훙하였다. 그의 아들 왕우(王俁)가 사신을 파견하여 부음을 고하였다. 《요사》
○ 송 휘종 숭녕(崇寧) 5년에 예종(睿宗) 원년 왕우가 왕위를 이어받고 나서는 조공하는 사신들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그리고 또 사자(士子) 김서(金瑞) 등 5인으로 하여금 태학(太學)에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조정에 박사(博士)를 두었다. 《송사》 ○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는 원우(元祐) 5년(1090)부터 원부(元符) 원년(1098)에 이르기까지 공사(貢使)를 두 번 보내왔다. 이에 3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어루만져 편안하게 해 주었는데, 이는 원풍(元豐) 때의 고사를 따른 것이다. 황제가 천자의 자리를 이어받아 선대를 추모하여 효성을 바치고 크나큰 선대의 업적을 계승함에 온 천하의 모든 나라들이 다 신하 노릇을 하였다. 이에 황제의 덕이 온 번복(藩服)에 덮이고, 황제의 은택이 바다 건너까지 퍼졌다. 그리하여 숭녕(崇寧) 원년에 호부 시랑(戶部侍郞) 유규(劉逵)와 급사중(給事中) 오식(吳拭)에게 명하여 부절(符節)을 가지고 고려로 사신 가도록 하였는데, 예물을 풍성하게 하고, 은혜로운 조서를 또렷하게 내렸다. 이는 고려에 은혜를 더 내려서 총애하고 무휼함으로써 돌아가신 신종황제의 뜻을 이어 더욱 거룩하고 융성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숭녕 2년 5월에 명주도(明州道)의 매잠(梅岑)을 경유하여 바다를 건너갔는데, 이때 고려 왕 왕희(王煕)가 거란 왕의 이름을 피휘(避諱)하여 이름을 왕옹(王顒)으로 고쳤다. 그러나 신종황제 때부터 먼 외방 사람을 힘써 무휼하면서 오도록 함에, 하늘마저 슬기로운 그 계책을 도와주었다. 이에 고려의 왕 왕휘(王徽)가 왕위를 이어받아 그 뜻을 이어받드니, 이는 아마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왕휘는 충순(忠順)하고 사리를 잘 따랐다. 그리하여 중국을 높이 떠받들 줄 알아 중국 사신을 접대함에 있어서 예모와 뜻이 정성스럽고 도타웠으며, 심지어는 중국 장사치들을 대접함에 있어서도 예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정사를 베푸는 데 있어서는 어짊과 용서를 숭상하였으니, 오래도록 나라를 향유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숭녕 초에 왕옹이 죽으니, 나이가 50세였으며, 세자인 왕우(王俁)가 즉위하였다.” 하였다.
○ 금 강종(金康宗) 4년 병술 예종 원년 고려가 흑환방석(黑歡方石)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왕위를 승습한 것을 축하하였다. 강종이 배노(盃魯)를 보내어 빙문하게 하고, 또 전에 약속한 대로 망명한 백성들을 돌려보내 주기를 요구하게 하였는데, 고려가 허락하면서 말하기를,
“사신을 파견해서 국경까지 와서 데려가라.”
하였다. 강종이 이 말을 믿고 완안부(完顔部)의 아괄(阿聒)과 오림답부(烏林答部)의 승곤(勝昆) 등으로 하여금 국경으로 가서 이를 데려오게 하고, 강종은 마기령(馬紀嶺)의 을척촌(乙隻村)에서 사냥하면서 인도해 오기를 기다렸다. 아괄과 승곤이 국경에 도착하자, 고려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이들을 살해하고는 갈라전으로 군사를 출동시켜 9성(城)을 쌓았다. 강종이 돌아오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요나라 사람들이 장차 우리를 탓하여 공격해 올까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태조(太祖)만이 혼자 아뢰기를,
“지금 만약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어찌 갈라전 지역만 잃겠습니까. 여러 부(部)가 모두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강종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에 알새(斡賽)로 하여금 내외의 군병을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 아도한(阿徒罕)을 선봉으로 삼았다. 고려의 군사 가운데 해도(海島)에 주둔한 자들이 있었는데, 아도한이 군사 30명을 거느리고 밤중에 바다를 건너가 영책(營柵)과 전함을 불태우고 이들을 격파하니, 드디어 타길성(駝吉城)이 함락되었다.
○ 고려의 군사 수만 명이 와서 대항하였다. 알새가 군사를 10개의 부대로 나누어 번갈아 가면서 나가고 들어와 드디어 크게 격파하였다.
○ 혼탄(渾坦)이 목리문전(木里門甸)에서 고려 군사를 만나 오래도록 힘을 다해 싸웠다. 사묘아리(斜卯阿里)가 분기하여 창을 앞세우고 달려가 진중에서 적장을 찌르자, 적이 드디어 무너졌다. 혼탄이 석적환과 도문수(徒門水)에서 군사를 합하였다. 사묘아리가 먼저 적병을 쳐부수고 두 성을 빼앗았다. 고려 군사들이 와서 공격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요해처를 차지하고 있어서 진격하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사묘아리가 이들을 추격하여 갈라수(曷懶水)에 이르렀다. 고려의 군사들이 앞 다투어 강가로 달아나자, 사묘아리가 그 틈을 타서 거의 대부분을 죽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석적환과 군사를 합하였다. 도중에 적병 5만 명을 만나서 이들을 격파하여 패주시켰다.
○ 알로(斡魯)가 알새(斡賽)를 대신해서 몇 달 동안 군사를 거느렸다. 알로 역시 고려의 9성(城)에 대치해서 9개의 성을 쌓아 버티면서 나가서는 싸우고 들어와서는 지켰다.
○ 6월에 알새가 다시 군중으로 왔다. 고려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자, 알새가 이들을 패퇴시키고는 진격해서 그 성을 포위하였다. 7월에 고려에서 다시 강화를 요청하니, 강종이 이르기를,
“일이 만약 제대로 맞아 들어가면 고려와 강화하라.”
하였다. 고려에서, 도망하여 고려로 들어간 사람들을 되돌려 보내고 9성의 둔수(屯守)를 파하며, 침략한 옛 땅도 되돌려 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드디어 고려와 강화하였다. 《이상 모두 금사》 ○ 살펴보건대, 9성은 함흥부(咸興府) 이북의 지역이다.
○ 요 건통(乾統) 8년 예종 3년 4월 병신에 고려 왕 왕우를 봉하여 삼한국공(三韓國公)으로 삼고 그의 아버지인 왕옹을 고려국왕에 증직하였다. 12월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사은하였다. 《요사》
○ 금 태조 수국(收國) 원년 예종 10년 9월에 태조가 이미 황룡부(黃龍府)를 함락시키고 가고살갈(加古撒喝)에게 명하여 보주(保州)를 공격하게 하였다. 보주는 고려와 가까운 곳에 있는바, 요나라가 고려를 침입해서 보주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가고살갈에게 명하여 빼앗게 하였는데, 오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가고살갈이 군사를 보내 주기를 요청하면서 또 고려 왕이 장차 사신을 보내올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태조가 납합오준(納合烏蠢)으로 하여금 군사 1백 기(騎)를 가지고 돕게 하고는 가고살갈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네가 적은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차례 많은 적을 격파하여 포로로 잡은 자들이 많았었다. 또 들으니, 오랑캐 땅의 사막에서 여러 차례 싸워 공을 세웠다고 하는바, 짐이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만약 보주가 함락되지 않거든 변방만을 굳게 지키라. 내가 이미 황룡부를 함락하였는데, 요나라 임금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있으니, 이 요나라를 쳐부수고서 다시 너에게 군사를 더 보내 주겠다. 고려에서 사신을 보낸다는 일은 과연 사실인지 모르겠다. 고려의 사신이 오면 잘 호송해서 이곳으로 보내라. 변경의 일을 조심하여서 소홀히 하지 말아라.”
하였다. 11월에 요나라에 딸린 여진(女眞)인 마만(麻懣)ㆍ태만(太彎) 등 15명이 모두 항복하였으며, 개주(開州)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보주에 있는 여진의 여러 부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태조가 가고살갈(加古撒喝)을 보주로 도통(保州路都統)으로 삼았다. 태조가 요나라 임금의 군대를 격파하여 쫓아내었다. 가고살갈이 합주(合主)ㆍ순화(順化) 두 성을 격파한 다음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보주를 공격하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알로(斡魯)로 하여금 갑사(甲士) 1천 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금사》
○ 2년 예종 11년 윤1월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요나라와 싸워 승리한 것을 축하하고, 또 말하기를,
“보주(保州)는 본디 우리 고려의 땅이니 반환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에 태조가 사신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스스로 취하라.”
하였다. 그러고는 가고살갈과 납합오준 등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고려가 와서 보주를 탈취하려고 하거든 호라고(胡刺古), 석현(石顯) 등의 군사를 보태어 방비하라. 혹시라도 군사를 합치고자 하면 갑작스럽게 가지 말고 변경만 잘 지키라.”
하였다. 가고살갈, 아실뢰(阿實賚) 등이 보주를 공격하자, 요나라의 수장(守將)이 도망쳤는데 고려의 군사들이 이미 성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얼마 뒤에 고려국왕이 포마(蒲馬)를 시켜 보주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서 고려국왕에게 유시하기를,
“보주가 그대 나라의 국경과 가깝게 있기에 그대가 스스로 취하도록 허락하였다. 이제 우리의 군사들을 수고롭혀서 적을 격파하여 성을 함락시켰는데, 포마는 단지 입으로만 보주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표문을 올려 요청해 온다면 그 즉시 별도로 의논하겠다.”
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보주는 지금의 의주(義州)이다.
○ 송 정화(政和) 6년에 예종 11년 고려의 사신을 올려 국신사(國信使)라 하고 예우를 서하국(西夏國)보다 낫게 하여 요나라 사신과 함께 모두 추밀원(樞密院)에 예속되게 하였다. 그리고 인반압반관(引伴押伴官)을 고쳐 접송관반(接送館伴)이라 하고, 《대성연악(大晟燕樂)》을 하사하고, 변두(籩豆)ㆍ보궤(簠簋)ㆍ준뢰(尊罍) 등의 제기(祭器)도 하사하였으며, 사신에게 예모전(睿謨殿) 안에서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송사》
○ 금 천보(天輔) 2년 예종 13년 12월 갑진에 발근(孛菫) 출패(朮孛)를 파견하여 요나라 지역을 평정하였다고 고려에 유시하였다.
○ 금나라에서 고려에 유시하기를,
“짐이 처음에 군사를 일으켜 요나라를 정벌할 적에 이미 포고하였는바, 하늘이 잘 도와주심에 힘입어 여러 차례 적병들을 물리쳐 북쪽으로는 상경(上京)에서부터 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있는 경부(京府)와 주현(州縣) 및 부족과 인민들을 모두 위무하여 평정하였다. 이에 이제 발근 출패를 파견하여 유시하여 알리고, 이어 말 1필을 하사하니, 도착하거든 잘 받기 바란다.”
하였다.
○ 윤달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요나라를 이긴 것에 대해 축하하였다. 《이상 모두 금사》
○ 3년 예종 14년 11월에 고려에서 갈라전(曷懶甸)의 장성(長城)을 3척 가량 높여서 쌓자, 변경의 관리가 군사를 출동시켜 저지시켰으나, 고려에서 따르지 않으면서, 옛 성을 보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갈라전 발근 호라고(胡刺古)ㆍ습현(習顯)이 이 사실을 아뢰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그들을 침입해서 사단을 일으키지 말고, 단지 영루(營壘)나 튼튼하게 지키면서 널리 정보를 수집하라.”
하였다. 《상동》
○ 4년에 예종 15년 함주로 도통사(咸州路都統司)가 보주(保州)ㆍ필리위(畢里圍) 두 성에다가 군대를 나누어 주둔시키면서 군사를 더 보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너희들이 군대를 나누어 주둔시켜서 변경을 튼튼하게 지키고 있으니, 매우 잘하는 일이다. 고려는 여러 대에 걸쳐서 신하로서 요나라를 섬겼는바, 혹 요나라와 교통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항상 사람을 내보내 정탐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동》
○ 요 천경(天慶) 10년에 예종 15년 고려에서 군대를 파견하도록 요청하여 금나라를 막고자 하였는데, 금나라에서 힐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요나라가 망하였다. ○ 고려는 요나라와 더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관계를 맺은 것이 2백여 년이었다. 《이상 모두 요사》
사신이 논하기를,
“고려에서 요나라를 섬기면서 일찍이 혼인을 요청해 옴에 요나라에서 시집을 보내기는 하였지만, 어찌 고려의 마음을 변치 않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삼한(三韓)의 지역은 경계를 접하고 있어서 그들의 동태를 쉽사리 알 수가 있었으나, 틈만 있으면 문득 군사를 출동시켰으며, 공사(貢使)가 가고 나면 사단이 그에 따라 발생하였다. 군사를 일으켜 그들의 죄를 묻느라 여러 차례 친정(親征)하였는데, 승리한 적이 많기는 하였지만 패하여 후회를 끼친 경우도 있었다. 옛날에 오(吳)나라의 조자(趙咨)가 위(魏)나라에 대하여 말하기를, ‘대국(大國)에는 정벌하는 군대가 있고, 소국에는 견고한 방어책이 있다.’ 하였는데, 어찌 그렇겠는가. 선왕(先王)들이 먼 외방을 회유함에 있어서 덕으로 하고 힘으로 하지 않았음이 너무도 분명하다. 요나라가 멸망할 때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고려에서 군사를 출동시키기는 하였으나, 어찌 금나라의 상대가 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상동》
○ 송 선화(宣和) 4년 임인 예종 17년 3월에 고려 왕 왕우가 병이 심해지자, 이자겸(李資謙)을 불러들여 후사(後嗣)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다. 4월에 왕우가 훙하였다. 이자겸 등이 이에 세자 왕해(王楷)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왕해는 얼굴이 준수하게 생겼으며, 몸체는 작았으나 자태가 풍성하여, 살이 많이 쪘다. 성품이 지혜롭고 학식이 풍부하였으며, 또한 매우 엄명하여,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는 관속들이 잘못을 범할 경우 반드시 엄하게 꾸짖었다. 즉위함에 미쳐서는 비록 나이가 어리기는 했으나, 나라의 관원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꺼렸다. 지난번에 신사(信使)가 고려에 이르자, 조서(詔書)를 받고 표문(表文)에 배례하며 잔치를 베푸는 예를 거행함에 있어서, 올라가고 내려감과 나아가고 물러남에 어른다운 의젓한 풍모가 있으니, 역시 동방 오랑캐의 어진 임금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 《고려도경》
사가(史家)의 법에 있어서 시대가 먼 것을 전하는 것은 간략하게 하고, 시대가 가까운 것을 전하는 것은 상세하게 한다고 한다. 고려의 역대 임금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앞에서 대충 서술하였다. 그러나 왕씨는 나라를 세운 뒤 여러 대에 걸쳐서 본조(本朝)를 떠받들어 섬겼고, 왕우(王俁)와 지금의 왕 왕해(王楷)에 이르러서는 또한 대접하는 예를 더욱 후하게 하였다. 그러니 조목별로 하나하나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삼가 고려의 세차(世次)와 종계(宗係)를 기술하고, 그 뒤를 이어 왕해의 행적을 기술한다. 장흥(長興 후당(後唐) 명종(明宗)의 연호임) 3년(태조15) 임진부터 지금 선화(宣和) 6년(인종2) 갑진까지 왕씨가 나라를 차지한 지가 9세(世)인데, 모두 17명이며, 합하면 총 햇수가 1백 93년이다. 《상동》
○ 5년이다. 인종(仁宗) 원년 당초에 고려의 풍속에는 형이 죽을 경우 왕위를 아우가 이어받으므로, 이때에 이르러서 왕우가 졸하자, 여러 동생들이 서로 왕위를 다투었다. 고려의 상(相) 이자겸이 왕우의 아들인 왕해를 임금으로 삼고 와서 부음을 고하였다. 황제가 이에 급사중(給事中) 노윤적(路允迪)과 중서 사인(中書舍人) 부묵경(傅墨卿)에게 조서를 내려서 위문하게 하였다. 왕우가 왕위에 있을 적에 중국 조정에 의원(醫員)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조서를 내려서 2명의 의원이 가도록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예종 13년에 송나라에서 합문 지후(閤門祗候) 조의압(曹誼押), 태의국 교수(太醫局敎授) 양종립(楊宗立)ㆍ두순거(杜舜擧), 교학(敎學) 성상(成湘), 학록(學錄) 진종인(陳宗仁)ㆍ남줄(藍茁)이 나왔다. 《고려도경》에도 말하기를, “정화(政和) 무술년에 고려의 사신이 와서 글을 올려, 의직(醫職)에 있는 사람을 파견하여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드디어 남줄 등이 고려로 가서 2년간 머무른 뒤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의원 2명이라고 한 것은 앞의 2명은 의술에 정통한 자이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따라왔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의원들이 2년을 머무른 뒤 돌아왔는데, 왕해가 의원들에게 말하기를,
“조정에서 장차 군사를 일으켜 요나라를 정벌할 것이라고 하는데, 요나라는 형제(兄弟)의 나라로서 그들을 그대로 두면 변경의 방패가 되기에 충분하다. 여진(女眞)은 호랑이와 같으니, 그들과 사귀어서는 안 된다. 이미 사태가 그러하니 두 의원은 돌아가서 천자께 보고하여 일찌감치 방비하기 바란다.”
하였다. 두 의원이 귀국하여서 이를 아뢰었으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송사》 ○ 《주자어류(朱子語類)》에는, “국가에서 바야흐로 여진과 통호(通好)하고 있을 때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의 곁에서 모시고 있는 의원을 보내 달라고 하였다. 이에 황제가 노의(老醫)들을 불러 그 가운데 두 사람을 택하여 고려로 가도록 하였다. 의원들이 고려에 이르자 날마다 후하게 대접하였는데, 의술(醫術)에 관한 것은 물어보지 않으면서 중국 대궐 안의 일에 대해서만 자주 물어보았다. 이에 두 의원이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물어보자, 고려의 임금이 말하기를, ‘나에게 아주 긴밀한 일이 있어서 송나라 황제께 진달하고자 하는데, 사신으로 나오는 자가 비밀을 지키지 못할까 염려된다. 이에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을 구하여 이 일을 분부하려는 것이다. 공들에게 대궐 안의 일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은, 공들이 참으로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며 신임을 받는 사람들인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하였다. 두 의원이 인하여 무슨 일인가를 물으니, 고려의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송나라 황제께서 여진과 더불어 화친하고는 거란을 협공하려고 한다는데,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니다. 대개 우리나라는 여진과 육로로 서로 통하고 있어서 항상 사람들을 시켜서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다. 여진은 좋은 사람들이 아니어서 거란을 이긴 뒤에는 반드시 송나라를 쳐들어갈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나라도 역시 스스로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 이에 항상 그에 대한 대비책을 생각해 왔다.’ 하였다. 두 의원이 그들에 대한 방비책을 묻자, 고려 임금이 말하기를, ‘여진에서 진법(陣法) 하나를 만들었는데, 아주 뛰어난 진법이다. 내가 지금 그 진법을 이기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하고는, 인하여 여진의 진법을 의원들에게 보여 주게 하였는데, 대개 괴자마(拐子馬)와 비슷한 진법이었다. 두 사람이 귀국하여서 이를 아뢰자, 황제가 노하여 노의(老醫)를 불러 힐책하였는데, 한 사람은 대궐 문을 나가 피를 토한 뒤 죽지 않았으며, 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는 즉시 죽었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장단의(張端義)의 《귀이록(貴耳錄)》에도 두 의원에 관한 일이 실려 있다.
○ 금 태종(金太宗) 천회(天會) 원년에 인종 원년 습현(習顯)으로 하여금 요나라의 주군(州郡)을 획득한 사실을 고려에 유시하게 하였다. 이때 고려에서는 바야흐로 난동을 일으킨 자들을 처형하고 있었으므로, 습현에게 “이것은 선부 국왕(先父國王)에게 내리는 글이다.”라고 하게 하였다. 습현이 관소(館所)로 나아갔다. 처형한 관료가 모두 70여 명이었다. 즉시 구례(舊禮)에 의거하여 접견하였다. 그러고는 표문을 올려서 요나라를 이긴 것을 축하하였으며, 아울러 방물도 바쳤다. 다시 요나라 황제가 하국(夏國)으로 도망친 사실을 통보하였다. 12월에 고수(高隋)와 사야(斜野)가 고려에 사신으로 나갔는데, 국경에 도착하였을 때 고려에서 접대하는 예가 불손하였다. 이에 고수 등이 감히 고려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태종이 이르기를,
“고려는 대대로 요나라에 대해 신하로서 섬기고 있었으니, 요나라를 섬기던 예로 우리나라를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현재 국상(國喪)이 났고 요나라 황제를 잡지 못하였으니,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지는 말라.”
하고는, 고수 등에게 되돌아오라고 명하였다. 《금사》 ○ 살펴보건대, 《금사》 고려열전(高麗列傳)에는 천보(天輔) 4년(1120)의 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 2년 인종 2년 5월 을사에 갈라로 군수(曷懶路軍帥) 완안홀랄고(完顔忽剌古) 등이 아뢰기를,
“지난날에는 고려의 경내에서 해마다 물개[海狗], 송골매[海東靑], 난추니[鴉鶻] 등을 잡았습니다. 이에 배 2척을 들여보내 잡게 하였는데, 고려에서 전함 14척을 끌고와 우리 배를 요격해서 두 배에 탔던 사람을 모두 죽이고 무기를 빼앗아 갔습니다.”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작은 일로 해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다. 이후로는 명령을 받지 않았으면 함부로 고려의 경내로 들어가지 말라.”
하였다.
○ 7월 임진에 동지남로도통(同知南路都統) 골실답(鶻實荅)이 아뢰기를,
“고려가 우리 쪽에서 도망쳐 간 자들을 받아들여 변경의 방비를 증강시키고 있으니, 반드시 다른 계략이 있는 것입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고려에 통문(通問)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일반적인 규례를 어기지 말라. 혹시라도 고려에서 침략해 오면 너의 군사를 정돈해서 대항하라. 감히 먼저 고려로 쳐들어갈 경우에는 비록 승리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릴 것이다.”
하였다.
○ 10월에 남로 군수(南路軍帥) 도모(闍母)에게 명하여, 갑사(甲士) 1천 명을 합소관로(合蘇館路)의 발근(孛菫) 완안아실뢰(完顔阿實賚)에게 보태 주어 고려를 방비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송 선화(宣和) 7년에 인종 3년 흠종(欽宗)이 즉위하니 하례(賀禮)하는 사신이 명주(明州)에 이르렀다. 어사(御史) 호순척(胡舜陟)이 말하기를,
“고려가 국가를 피폐하게 한 지가 50년이 되었습니다. 정화(政和) 이래로 사신이 해마다 와서 회수(淮水)와 절강(浙江) 지방에서는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저들이 옛날에 거란을 섬겼으니, 지금은 반드시 금나라를 섬길 것으로, 우리의 허실(虛實)을 엿보아서 금나라에 보고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들을 오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고려의 사신을 명주(明州)에 머물게 하고는 폐백만 바치게 하였더니, 이듬해에 비로소 본국으로 돌아갔다. 왕휘(王徽) 이래로 비록 사신이 끊이지 않고 왔으나, 거란의 봉책(封册)을 받고 그 정삭(正朔)을 받들어서, 중국 조정에 올리는 문서와 다른 중요한 문서에 갑자라는 것을 사용하였다. 고려에서 거란에게 한 해에 조공을 6회나 하였는데도 거란에서는 끊임없이 요구하면서 말하기를,
“고려는 우리의 종인데 남조(南朝)에서는 무엇 때문에 후하게 대접하는가?”
하였다. 금나라 사신이 고려에 가서는 더욱 거만하고 사나워서, 관반(館伴)이나 공경(公卿)이 조금만 뜻을 거스르면 문득 머리채를 휘어잡고 매질을 하였으며, 우리 사신이 고려에 왔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고 와서 엿보고는 하사한 물품을 나누어 가졌다. 거란에서 항상 고려가 서쪽으로 송나라에 조공(朝貢)하는 일에 대해 힐문하자, 고려에서 표문을 올려 사과하였는데, 그 대략에,
“중국에는 삼갑자(三甲子) 즉 6개월 만에 한 번 조회(朝會)하고, 대방(大邦)에는 1주년(周年) 만에 6회나 조공(朝貢)한다.”
하니, 거란에서 그제야 깨달아서 책망을 면하였다. 《송사》 ○ 《손공담포(孫公談圃)》에는, “거란에 불사(佛寺) 하나가 있는데,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며, 사신이 거란에 가면 반드시 그곳에 가서 분향하였다. 풍직(豐稷)이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그곳에서 사용하는 기물들을 보니, 모두가 신종황제가 고려에 하사한 것이었다. 대개 고려는 거란에 제압당하여 매번 거란의 사신이 올 적마다 고려의 전각(殿閣)의 지붕을 덮은 치미(鴟尾) 기와를 모두 잠시 철거하였다.” 하였다.
○ 금 천회(天會) 4년 인종 4년 6월 초하루 병신에 고려국왕 왕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서 번국(藩國)으로 자칭하니, 너그러운 뜻의 조서를 내려 답하였다. 7월 병인에 고백숙(高伯淑), 오지충(烏至忠)을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사신이 왕래함에 있어서는 모두 요나라와의 구례(舊例)를 따르도록 하였으며, 이어 보주로(保州路)와 변방 지역의 사람으로서 고려의 경내에 있는 자들을 모두 쇄환하게 하였다. 고백숙 등이 출발하기 전에 조칙을 내리기를,
“만약 고려에서 우리 측의 요구를 모두 따라 주면 즉시 보주의 땅을 그들에게 주라.”
하였다. 고백숙 등이 고려에 도착하자, 고려 왕 왕해가 표문을 올려 사례하고, 모든 일을 예전에 요나라를 섬기던 규례대로 하였다. 《금사》 ○ 《문헌통고》에는, “마단림(馬端臨)이 말하기를, ‘여진은 혼동강(混同江)의 북쪽에 있는데, 고려와는 압록강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다. 여진은 본디 거란을 신하로서 섬겼으며, 고려에 대해서는 노예로서 섬겼다. 그런데 강성해짐에 미쳐서는 고려에서 도리어 신하로서 여진을 섬겼다.’ 하였다.” 하였다.
○ 송 고종(宋高宗) 건염(建炎) 원년 인종 5년 5월에 고종황제가 즉위하고는, 즉시 호려(胡蠡) 《송사》에, “적공랑(迪功郞) 호려(胡蠡)를 파견하였다.” 하였다. 등을 보내어 고려에 국신사(國信使)로 가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조정에서 고려가 금나라 사람들과 통할까 우려한 때문이다. 금나라에서도 이때에 왕추(王樞)에게 책명(册命)을 가지고 고려에 사신을 가게 하였는데, 이 또한 고려가 우리 송나라와 통할까 우려한 때문이다. 호려가 귀국한 것에 대해서는 사관(史官)이 기록에 빠뜨렸다. 《문헌통고》
○ 2년에 인종 6년 황제가 조서를 내려 멀리 떨어져 있는 외국에 사신으로 갈 사람을 모집하니, 절동로 부총관(浙東路副摠管) 양응침(楊應忱)이 살펴보건대, 《송사》에는 양응성(楊應誠)으로 되어 있다. 조서에 응하여 가기를 청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아버지가 변방의 관리에 임명될 때 그곳에 따라갔었기 때문에 오랑캐의 실정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고려와 여진과는 길이 매우 가깝습니다. 신이 삼한(三韓)에 사신으로 가서 계림(鷄林 고려를 가리킴)과 결탁한 다음 연운(燕雲) 지방으로 가겠습니다.”
하였다. 《송사》에, “이로써 이성(二聖)을 맞이해 오기를 도모한 것이다.” 하였다.
3월에 양응침이 가 형부 상서(假刑部尙書)가 되어 고려에 사신으로 가게 되자, 절동(浙東)의 수신(帥臣) 책여문(翟汝文)이 상주하여 아뢰기를,
“양응침은 황제를 속이고서 스스로 자신을 위한 계책만 세웠을 뿐입니다. 만약 고려에서 ‘대국에서 길을 빌어 연운 지방에 이르게 됨에, 금나라 사람들이 혹 길을 물어 오월(吳越 송나라를 가리킴) 지방을 엿보려 할 경우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하겠는가.’라고 하면서 거절하게 되면 반드시 황제의 명을 욕되게 하고 먼 오랑캐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니, 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송사》에, “양응성이 그 말을 듣고서도 드디어 부사 한연(韓衍), 서장관 맹건(孟健)과 함께 항주(杭州)에서 바다를 건너 고려로 갔다.” 하였다. 6월에 양응침이 고려에 이르러 국왕 왕해에게 조서를 선유(宣諭)하니, 왕해가 조서를 받고 나서 양응침과 더불어 서로 맞대고 의논하였다. 왕해가 말하기를,
“대국에서 여진으로 가는 길로는 산동로(山東路)가 있는데, 어찌해서 등주(登州)를 경유해서 가지 않았습니까?”
하니, 양응침이 말하기를,
“귀국을 통해서 가는 빠른 길만 못해서입니다. 국왕께서는 번거롭겠지만 금나라에 전달하는 수고만 해 주십시오. 우리 사행(使行)은 사절 3인과 28명의 기병(騎兵)뿐으로, 모두가 각자의 양식을 싸 가지고 왔습니다.”
하니, 왕해가 난처해 하는 기색이 있었다. 조금 뒤에 왕해의 명으로 태부(太傅) 김부일(金富佾)이 관사(館舍)에 와서 말하기를,
“금나라 사람들이 현재 배를 만들면서 절동(浙東)과 절서(浙西) 지방으로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사신을 인도하여 금나라로 갔다가는 뒷날에 금나라에서 우리 고려에 길을 빌어 절강(浙江)으로 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무슨 말로 대답하겠습니까?”
하였는바, 고려 사람의 말이 과연 책여문이 앞서 헤아린 바와 같았다. 그러자 양응침이 말하기를,
“여진 사람들은 수전(水戰)에 익숙지 못합니다.”
하니, 김부일이 말하기를,
“저들은 일찍부터 바닷길을 통해 우리와 왕래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여진은 예전에는 본국의 신하 노릇을 하였으나, 근래에는 본국으로 하여금 신하로서 저들을 섬기게 하려고 하고 있으니, 저들과 우리의 강약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동》
○ 양응침이 고려에 있은 지 수십 일이 되었다. 왕해가 다시 중서 시랑(中書侍郞) 최홍재(崔弘宰),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김부식(金富軾) 등을 시켜 관사(館舍)에 가서 의논하게 하였는데, 전날에 한 말을 고집하면서 변경하지 않았다. 관반사(館伴使) 문공인(文公仁)이 또한 말하기를,
“지난날 제가 상국(上國)에 들어가서 조공할 적에, 일찍이 상황(上皇)께 ‘금나라 사람들은 얼굴은 사람같아도 마음은 짐승과 다름이 없으니 서로 친하게 지내서는 안 됩니다.’고 아뢰었는데, 이제 12년이나 되었습니다.”
하고, 최홍재는 말하기를,
“이성(二聖)이 현재 연운(燕雲) 지방에 있으니, 중국 조정에서 모든 땅을 다 바쳐도 이성을 모셔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군사를 훈련시켜서 그들과 더불어 싸우지 않습니까?”
하면서 끝내 조서에서 말한 대로 하지 않았다. 이에 양응침은 고려에 64일이나 머물러 있다가 부득이 수창문(壽昌門)에서 왕해를 만나 보고는 배표(拜表)만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상동 및 송사》
○ 10월에 양응침이 대궐에 들어와 입대(入對)하여 그동안의 상황을 자세히 말하니, 황제는 왕해가 중국의 은혜를 저버린 것에 대해 몹시 노했다. 상서(尙書) 주승비(朱勝非)가 아뢰기를,
“고려는 금나라와는 이웃하여 있고 중국과는 바다를 격해 있으니, 멀고 가까움에 따른 이해(利害)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고려에 대해서 지난날 후하게 대우하기는 하였지만, 지금 어떻게 그에 대한 보답을 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우복야(右僕射) 황잠선(黃潛善)은 아뢰기를,
“만약 큰 배에다 날랜 갑병(甲兵) 수만 명을 싣고서 바로 고려로 진격해 간다면 저들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주승비가 아뢰기를,
“바다를 건너가서 정벌하는 것은 연산(燕山)의 일을 거울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하니, 황제의 노여움이 그제서야 풀어졌다. 이때 개봉윤(開封尹) 종택(宗澤) 또한 사신을 고려로 보내어 군사를 출동시켜 금나라를 치게 하기를 청하였다. 《문헌통고》
○ 11월에 왕해가 그의 신하 윤언이(尹彦頤)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서 사죄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성(二聖)이 아직 귀국하지 못하였으므로 잔치를 할 적에 음악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고는 이어 전문(殿門) 밖에다가 막차(幕次)를 설치한 다음, 객성관(客省官) 오득흥(吳得興)에게 명하여 사신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게 하고, 중서 사인(中書舍人) 장징(張澂)에게 명하여 예식대로 접대한 다음 귀국시키게 하였다. 《송사》
○ 3년 인종 7년 8월 임신에 황제가, 보좌하는 신하에게 이르기를,
“상황(上皇)께서 내신(內臣)과 궁녀(宮女) 각 2명씩을 보냈는데, 그들이 고려의 공사(貢使)를 따라서 들어온다고 한다. 짐이 이 소식을 들으니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슬프다.”
하니, 여이호(呂頤浩)가 아뢰기를,
“이것은 반드시 금나라 사람들의 뜻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고려에서는 반드시 감히 그들을 데려오지 못할 것입니다. 고려의 사신이 우리 측의 허실을 정탐하여 금나라에 보고하려는 것이 아닌 줄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서 고려의 사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상동》 ○ 조서는 예문지에 나온다.
○ 금 천회 9년 인종 9년 2월 기해에 고려 왕 왕해가 표문을 올려 보주(保州)로 도망하여 들어간 변방의 호구(戶口)를 색출하는 것을 면하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얼마 뒤에 욱(勗)이 표문을 올려 보주로 도망쳐 들어간 호구를 색출하지 말기를 청하니, 태종이 따라 주었다. 이로부터 보주의 경계가 비로소 정하여졌다.
○ 태조가 고려와 화친한 때부터 여진 사람으로서 고려로 도망쳐 들어간 자들을 모두 색출하였는데, 10년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이에 종실(宗室)인 욱이 글을 올려서 간하기를,
“신이 듣건대 덕은 천명(天命)을 즐기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인(仁)은 아랫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 색출하고 있는 호구(戶口)는 모두가 전대에 간사한 짓을 저지르고 도망친 오준(烏蠢), 와모한(訛謨罕), 아해(阿海), 아합속(阿合束)의 후예들로서, 선세(先世)에 사방을 위무할 적에도 오히려 와서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선군(先君)께서 고려와 더불어 통호하면서부터 우리 금나라가 장차 커질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본디 한 조상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차츰차츰 우리나라로 귀부하였습니다. 고려에서 우리의 말을 듣지 않아 드디어 변경에 소요가 일어나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오랜 시일이 지나서 화친을 맺게 되었는바, 대개 30년이란 시일이 걸렸습니다. 그 당시에 장성하였던 자들은 지금은 모두 죽었고, 그 자손들은 그곳의 토속(土俗)을 편안하게 여겨, 서로 혼인을 맺으면서 그곳에서 살아왔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그들을 색출해 송환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면 고려 측에서는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골육 간에 서로 헤어지게 하는 것은 참으로 백성들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원망하는 것은 아주 민망한 일인데도 반드시 자기의 소유로 만들려고 한다면, 이는 특별히 피아(彼我)의 구별에 가리어진 것으로, 천하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보아 사랑하는 천자의 덕이 아닙니다. 국가와 백성 및 물산이 풍성하여 강역(疆域)이 만리나 되도록 넓은데, 이들을 쇄환해 오는 것이 과연 무슨 보탬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그들을 쇄환하려다가 고려에서 송환시키지 않을 경우, 우리의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가서 취해 오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무기는 흉기(凶器)이며, 전쟁은 위험한 일인바,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하여야 하는 법입니다. 고려에서 번국(藩國)을 칭하면서 조공을 빠뜨리지 않고 바치고 있으니, 그 나라 전체가 우리의 신하로 되었고 그 백성들 역시 우리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성인(聖人)이 의를 행함에 있어서는 작은 허물은 책망하지 않는 법이며, 이치가 있는 바에는 즉시 결정짓는 법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아랫사람에게 은혜를 내리는 어짊을 베풀고 천명을 즐기는 덕을 넓혀서, 고려에서 쇄환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들어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럴 경우 고려에서는 자신들의 소유라고 하지 않으면서 우리들에게서 얻은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따랐다.
○ 한방(韓昉)은 천회(天會) 연간에 건문각 대제(乾文閣待制)로 승진하였다. 위위 경(衛尉卿)과 지제고(知制誥)의 벼슬이 더해지고 고려국신사(高麗國信使)에 충임되었다. 이때 고려와 비록 예전에 통호하여, 천회 4년에 고려에서 표문을 올려 번국(藩國)을 칭하기는 하였으나, 서표(誓表)를 바치려고 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금나라에서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서표를 바치라고 하였으나, 모두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였다. 한방이 다시 고려로 가서 두세 번 독촉하였다. 고려에서는 글을 읽어 고금의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자를 온 나라 안에서 찾아, 말할 내용을 미리 상의하여 확정 지은 다음, 그들로 하여금 사신을 접대하면서 수답하게 하였다. 열흘이 지나서 비로소 마주 대했는데, 고려에서 한방에게 말하기를,
“소국이 요나라와 송나라를 2백여 년 동안 서표가 없이 섬기면서도 일찍이 번국으로서의 예의를 잃은 적이 없었다. 지금 상국을 섬기면서도 요나라와 송나라를 섬기던 예와 똑같이 할 따름이다. 그리고 여러 차례 맹세하여 난리를 조장하는 것은 성인이 반드시 허여하지 않을 것인바, 감히 서표를 바치지 못하겠다.”
하니, 한방이 말하기를,
“귀국에서 반드시 고례(古禮)를 쓰고자 하는데, 순 임금은 5년마다 한 차례 순수(巡狩)하였고, 여러 제후들은 4년마다 한 번씩 조회하였다. 그리고 주나라에서는 6년마다 오복(五服)이 한 번 조회하였고, 또 6년마다 왕이 순시하였으며, 제후들이 각각 방악(方岳)에게 조회하였다. 지금 천자께서 바야흐로 서쪽 지방을 순수하고 계시니, 귀국에서는 마땅히 그곳에 가서 조회하여야 할 것이다.”
하자, 고려 측에서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고는 서서히 의논해 보겠다고만 말하자, 한방이 말하기를,
“서표를 올릴 것이냐, 아니면 조회를 할 것이냐에 대해서 한마디로 결판을 내라.”
하였다. 고려 측에서 약속한 것과 같이 서표를 올리니, 한방이 이에 돌아왔다. 《이상 모두 금사》
○ 송 소흥(昭興 고종의 연호임) 원년 인종 9년 10월에 고려에서 장차 조공하는 사신을 보내려고 하자, 예부 시랑 유약(柳約)이 말하기를,
“사명(四明)이 격파당한 나머지 나라가 황폐하고 미약해졌으므로 군사를 일으킬 마음을 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니 많은 군사를 주둔시켜 그들이 오는 것에 대비하여야만 합니다.”
하였다. 11월에 유약에게 조서를 내려 고려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으나, 끝내 가지 못하였다. 《송사》
○ 2년 인종 10년 윤4월에 왕해가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 최유청(崔惟淸), 합문 지후(閤門祗候) 심기(沈起)를 파견하여 금 1백 냥, 은 1천 냥, 능라(綾羅) 1백 필, 인삼 5백 근을 조공으로 바쳤으며, 최유청이 바친 것도 그것의 3분의 1은 되었다. 황제가 후전(後殿)에 나아가 인견하고는 최유청, 심기에게 금대(金帶) 2개를 하사하였으며, 따뜻한 조서를 내려서 돌려보냈다. 이달에 정해현(定海縣)에서 말하기를,
“백성들 가운데 도망쳐서 고려로 들어간 자들이 약 80명 가량 되는데, 고려에서 표문을 올려 그들을 송환시키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이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고려의 강수(綱首) 탁영(卓榮) 등에게 적당히 헤아려 은혜를 베풀어 주게 하였다. 12월에 고려에서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홍이서(洪彜敍) 등 65명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친다는 소식을 듣고 임안부(臨安府)의 부학(府學)에다가 그들의 관소(館所)를 정하기로 의논하였다. 그러자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비록 전쟁 중이기는 하지만 학교가 없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정탐당할까 염려된다.”
하였다.
○ 3년 인종 11년 5월에 조서를 내려서 홍혜사(洪惠寺)를 동문관(同文館)으로 만들어 고려의 사신들이 오면 접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고려에서 사신이 오지 않으면서, 바닷바람에 배가 뒤집혀서 오지 못한다고 핑계 대었는데, 의논하는 자들이 고려에서 거짓말을 하여 우리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문헌통고》
○ 6년 인종 14년 고려의 지첩관(持牒官) 김치규(金稚圭)가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는데, 조정에서 그가 금나라의 간첩일까 두려워하여, 조서를 내려서 은과 비단을 하사한 다음 되돌려 보냈다. 이로부터 사신이 20여 년간 오지 않았다. 《상동》
○ 금 희종(金煕宗) 황통(皇統) 원년 인종 19년 정월 임인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였다. 11월 기유에 존호를 받은 것을 하례하였다. 《금사》
○ 2년 인종 20년 정월 을사에 고려를 정벌하라고 명하였다. ○ 조서를 내려서 왕해(王楷)에게 개부의동삼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上柱國)을 더해 주었다. 《이상 모두 상동》
○ 6년 인종 24년 5월 임신에 고려 왕 왕해가 훙하였다. 그의 아들 왕현(王晛)이 왕위를 이어받고는 사신을 파견하여 국상(國喪)을 고하였다. 《상동》
○ 해릉(海陵) 천덕(天德) 원년 의종(毅宗) 3년 12월에 고려의 하정조사(賀正朝使)가 광녕(廣寧)에 도착하였는데, 사람을 파견하여 폐립(廢立)한 일에 대해 말해 주고 중로에서 돌려보냈다. 《상동》
○ 2년 의종 4년 정월 신사에 사신을 고려로 보내어 새로 즉위한 황제의 명휘(名諱)를 고유(告諭)하고,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폐립한 일에 대해 유시하였다. 3월 병술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에 즉위한 것을 축하하였다. 《상동》
○ 송 소흥(紹興) 32년 의종 16년 3월에 고려의 강수(綱首) 서덕영(徐德榮)이 명주(明州)에 와서 말하기를,
“본국에서 축하하는 사신을 파견하기를 원한다.”
하였는데, 명주의 수신(守臣) 한중통(韓仲通)이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러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오불(吳芾)이 아뢰기를,
“고려는 금나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전에 고려에서 김치규(金稚圭)가 왔을 적에도 조정에서는 그가 금나라의 간첩 노릇을 할까 두려워서 곧바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지금 우리 송나라와 금나라가 전쟁을 벌이고 있는 판이니, 사신을 파견하겠다고 하는 서덕영의 청을 어찌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과연 사신을 파견한다면 예측치 못한 변이 생길까 염려스럽고, 만에 하나라도 오지 않을 경우에는 먼 외방 나라의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중지시켰다. 《송사》
○ 효종(孝宗) 융흥(隆興) 2년 의종 18년 4월에 명주(明州)에서 고려가 입공(入貢)했다고 말하였는데, 역사서에는 이들을 인견(引見)한 날짜를 기록하지 않았다. 효종ㆍ광종(光宗)ㆍ영종(寧宗) 3조(朝)를 거치면서 사신의 왕래가 마침내 끊겼다. 경원(慶元 송 영종의 연호임) 연간에 조칙을 내려 상인들이 동전(銅錢)을 바꿔 가지고 고려에 들어가는 것을 금하였고 조정에서도 사신을 끊었다. 고려인이 사신으로 들어올 때마다 명주(明州)ㆍ월주(越州) 두 군(郡)에서는 그들을 지공하는 데 곤욕을 치르는 탓에 시끄러워 편안치가 못하였다. 궁궐에 도착하고 나서는 관소에서의 접대와 향연의 비용 및 하사해 주는 물품의 비용이 수만금을 헤아렸는데, 고려의 임금에게 주는 것은 제외하고도 그만큼이나 들었다. 우리 사신이 가는 데는 두 척 신주(神舟)의 길이와 크기가 전함의 몇 배는 되어 그 경비가 막대하게 들었으며, 삼절(三節) 관리의 신분에 따른 급여는 모두 현관(縣官)에게 의지하는데, 이 비용 역시 많이 들었다. 앞서 소식(蘇軾)이 ‘고려가 조공을 바치는 데에는 다섯 가지의 폐해가 있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문헌통고》
살펴보건대, 고려가 중국을 신하로서 섬기는 것은, 대개 중화(中華)의 풍속을 사모하여 해마다 내리는 물품을 이익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 고려를 초래(招來)하는 것은, 먼 지방 사람을 회유(懷柔)하여 태평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그러니 나라의 운수가 중도에 막혀서 강한 오랑캐가 와서 침범할 경우에는 빙문(聘問)하는 일은 중지시켜도 될 것이다. 조그만 섬 오랑캐는 옛날에는 요나라에 신하 노릇을 하여 스스로 보존해 왔다. 강포한 금나라가 이미 요나라를 멸망시켜 이를 차지한 데다 중화를 거듭 잠식하여 신경(神京 중경(中京)을 가리킴)을 뒤엎고 있는데도 고려가 이를 방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양응침(楊應沈)이 고려에 간 것은 또한 형편없는 짓을 한 것이다. 고려를 의지하여 화친을 구하려고 하였다면, 저들이 어찌 송나라 사람의 싸움을 중지시키는 맹약(盟約)을 주장하여 하겠으며, 고려를 의지하여 국난(國難)을 구원하려고 하였다면, 저들이 어찌 진백(秦伯)의 무의(無衣)의 시(詩)를 본받겠는가. 또 당시에 공손한 말로 구청(求請)하는 사신으로 보낸 부우(傅雩)ㆍ왕륜(王倫)과 같은 무리들도 일찍이 금나라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송나라 사신이 가는 것은 돌이 바다에 가라앉는 것과 같고, 금나라의 군사가 쳐들어오는 것은 불길이 들판을 태우는 것과 같으므로, 마침내 그 요령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 어찌 사나운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로 들어가 삼한(三韓)에 길을 빌어 금나라에 도달하기를 구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부우ㆍ왕륜의 무리들이 금나라로 사신갔으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채 비굴한 말만 하는 데 불과하였으며, 중원을 침략하고자 하는 금나라의 계책을 중지시키지 못하였다. 연운(燕雲) 지방은 강회(江淮)에서 수천 리나 떨어져 있는데, 그 중간의 토지와 인민(人民), 성곽은 진실로 모두 우리 송나라의 봉강(封疆)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로써 싸워 협격(挾擊)하여 견제할 경우, 금나라 사람들이 거침없이 몰고 내려와 반드시 이기리라고 보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고려에서 중국 조정의 명을 받들어 양응침에게 길을 인도하여 금나라로 가게 해, 금나라 사람들이 고려에 길을 빌어서 송나라를 치려는 계책을 세우게 하였다면, 배의 돛을 날리면서 오회(吳會)로 곧장 쳐들어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책여문(翟汝文)이 헤아린 바와 왕해(王楷)가 사신에게 대답한 말이 모두 성실한 말과 지극한 계획이니, 헐뜯을 수가 없는 것이다. 승상(丞相) 주승비(朱勝非)가, “고려는 금나라와는 이웃하여 있고, 중국과는 바다를 격해 있는바, 멀고 가까움에 따른 이해가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러니 지난날에 고려를 후하게 대해 주기는 하였으나, 지금 어떻게 그에 대한 보답을 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말이 진실로 적당함을 얻었다. 고려에서는 정화(政和 송나라 휘종의 연호임) 무렵에 의관(醫官)을 파견해 주기를 요구하여 충성스러운 계책을 바치고 건염(建炎 송나라 고종의 연호임) 무렵에 금나라 사신을 공경히 대하면서도 조서를 받들지 않았으니, 고려 사람들은 진실로 은혜에 보답한 것이고 일찍이 은혜를 저버린 적은 없는 것인바, 이보다 더한 것은 책망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황잠선(黃潛善)의 망발된 말과 그릇된 계책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웃을 만한 일이다. 이른바 날랜 갑병(甲兵) 수만 명이 이미 바다 바깥에서 고려를 습격할 수 있었다면, 어째서 다른 때에 이 군사로 금나라 사람들을 유주(維州), 양주(揚州)에서 대항하지 못했는가. 한(漢)나라 계포(季布)가, “번쾌(樊噲)가 면전에서 아첨하니, 목을 베어야 합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바로 황잠선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상동》
○ 금 세종(金世宗) 대정(大定) 4년에 의종 18년 압록강의 보수(堡戍)가 고려의 침입을 받아 약간 부서지고 무너졌다. 《금사》
○ 5년 의종 19년 정월에 세종이 고려에서 온 정조사(正朝使)가 하직 인사를 하는 것을 인하여 유시하기를,
“변경에서 뜻밖에 일어난 소소한 변고는 너의 왕이 시켜서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변경을 지키는 관리가 저지른 것인가? 만약 변경을 지키는 관리가 그랬다면 너의 왕이 또한 그를 징계하여야 한다.”
하였다. 처음에는 고려의 사신이 별도로 사사로이 예물(禮物)을 바치는 것이 상례가 되었는데, 이해 만춘절(萬春節)에 황제가 고려 사신이 사사로이 예물을 바치는 것은 전례(典禮)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조서를 내려 혁파시켰다. 《상동》
○ 9년 의종 23년 12월 무술에 고려의 변보(邊報)에서, 왕현(王晛)이 손자를 얻었으므로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고하려고 한다고 하였다. 《상동》
○ 10년 의종 24년 11월 기묘에 왕현의 동생인 익양공(翼陽公) 왕호(王晧)가 왕현을 폐위(廢位)시키고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다. 고려에 생일사(生日使)를 보냈는데, 대종정승(大宗正丞) 규(糾)가 국경에 도착하자 고려의 변리(邊吏)가 전왕이 이미 양위(讓位)하였다고 하면서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무신(武臣) 정중부(鄭仲夫)ㆍ이의방(李義方) 등이 난을 일으켜 문관들을 많이 죽이고, 왕을 거제도(巨濟島)로 추방하고, 태자를 진도(珍島)로 추방하고, 태손(太孫)을 죽인 다음, 왕의 동모제인 익양군 왕호를 왕으로 삼았다.
○ 11년 명종(明宗) 원년 정월 임진에 왕호가 나라를 양위받은 사실을 고하자, 파속로(婆速路)에 조서를 내려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한편, 유사(有司)에게 공문을 보내서 상세히 물어보게 하였다. 그러자 고려에서 통보하기를,
“전왕이 오래도록 병을 앓아 정신이 혼모해서 국사를 다스리지 못하므로 동모제인 왕호에게 임시로 국사를 처리하게 하였다.”
하였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왕위를 양위하는 일은 중대한 일인데 어찌하여 먼저 사실을 아뢰어 요청하지 않았는가.”
하면서 조서를 내려서 유사로 하여금 다시 상세하게 물어보게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 왕현이 나라를 양위한다는 내용의 표문을 올렸는데, 살펴보건대, 《금사》 본기에는 4월 정묘에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선신(先臣) 왕해(王楷)가 동생에게 왕위를 전하라고 유언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그의 아들은 죄가 많아서 왕으로 세울 수가 없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황제가 이를 믿지 않고 여러 재상들에게 물어보자, 승상(丞相) 양필(良弼)이 아뢰기를,
“이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왕현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지난해에 손자를 얻자 일찍이 표문을 올려서 스스로 손자를 얻은 기쁨을 말하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왕호는 일찍이 난을 일으켰다가 왕현에게 감금되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지금 왕현은 사신을 보내지 않고 왕호가 사신을 보내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조정에서 왕현의 생일에 생일사를 파견하였는데 왕호가 생일사를 왕현에게 보내지 않고는 이에 감히 받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네 번째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이는 왕호가 형의 왕위를 찬탈하고서 천자에게 거짓으로 아뢰는 것이니, 어찌 차마 그를 책봉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우승(右丞) 맹호(孟浩)는 아뢰기를,
“마땅히 고려의 사민(士民)들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민들이 모두 왕호를 추대하여 복종하면 즉시 사신을 파견해 왕호를 책봉해 주어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이르기를,
“한 나라의 왕을 책봉하면서 그 나라의 사민들에게 물어본다면, 이는 맹안(猛安)이나 모극(謀克)을 제수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 고려의 사신을 물리치고는 왕현에게 직접 상세히 물어보는 조서를 내린 다음, 이부 시랑(吏部侍郞) 정(靖)을 왕현에게 직접 물어보는 사신으로 삼았다. 살펴보건대, 《금사》 본기에는 5월 신묘의 일로 되어 있다. 이때 왕호가 사실은 나라를 찬탈하고서 해도(海島)에다 왕현을 가두어 두고 있었다. 정이 고려에 도착하자, 왕호가 말하기를,
“왕현은 이미 왕위를 양보하고서 다른 곳으로 나가 있는데, 병이 차도가 없어서 자리에 나와 명을 받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곳은 길이 험하고 멀어서 사신이 갈 만한 곳이 못 된다.”
하였다. 이에 정은 끝내 왕현을 직접 만나 보지 못한 채 조서를 왕호에게 준 다음, 왕현이 올리는 표문을 왕호에게 전달받아 가지고 돌아와 황제에게 아뢰었는데, 그 내용은 전의 표문과 대략 비슷하였다. 정이 돌아온 뒤 세종이 대신들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왕현의 표문이 이러하니, 이제 책봉해 주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는데, 승상 양필과 평장사(平章事) 수도(守道)는 아뢰기를,
“왕호가 간절하게 책봉해 주기를 요청해 온 다음에 책봉해 주어도 늦지 않습니다.”
하였다. 12월에 왕호가 예부 시랑(禮部侍郞) 장익명(張翼明) 등을 파견하여 책봉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상동》
○ 12년 명종 2년 3월 정축에 숙직장군(宿直將軍) 오고논사열(烏古論思列), 상서 우사원외랑(尙書右司員外郞) 장향(張享)을 왕호의 책봉사(册封使)로 삼았다. ○ 왕호의 생일이 정월 19일이었는데, 이해 12월이 다 가도록 미처 사신을 파견하지 못하였다. 이에 유사가 내년에 거행하자고 주청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15년 명종 5년 7월 병신에 갈라로(曷懶路)에서 아뢰기를,
“고려의 변보(邊報)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켰기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하고자 하는데, 의주로(義州路)가 막혀 통할 수가 없기에 정주(定州)를 경유해서 갈라로로 들어가 아뢰고자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서 허락하였다.
○ 조위총이 서경(西京)을 근거지로 하여 왕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다음 서언평(徐彦平) 등 96명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아뢰기를,
“전왕이 사실은 왕위를 피하여 양위한 것이 아니라, 대장군 정충부(鄭沖夫), 살펴보건대, 《고려사》에는 정중부(鄭仲夫)로 되어 있다. 낭장 이의방(李義方)에게 시해당하였습니다. 신 조위총은 자비령(慈悲嶺) 서쪽에서 압록강 동쪽까지의 사이에 있는 40여 성을 바치고 내속(內屬)하겠으니, 군사를 보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왕호에게 이미 책봉을 더하였는데, 조위총이 감히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고 또 땅을 바치려고 하고 있다. 짐은 만방을 회유하여 위무하고 있으니, 어찌 반신(叛臣)을 도와 포악한 짓을 하도록 하겠는가.”
하고는, 조서를 내려서 서언평 등을 잡아 고려로 송환하게 하였다. 얼마 뒤 고려에서 조위총의 반란을 평정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사례하였다.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킨 뒤로는 왕호가 파견한 생일회사(生日回謝), 횡사회사(橫賜回謝), 하정조사(賀正朝使), 진봉사(進奉使), 만춘절사(萬春節使) 등의 사신이 모두 길이 막혀서 오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호가 이 사실을 모두 아뢰니, 조서를 내려 그 뜻에 답하면서 사신을 파견하되 절차에 따라서 들어와 조회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금사》
○ 16년 명종 6년 12월에 고려에서 호부 상서 오광척(吳光陟)을 파견하여 조위총이 내부(內附)하는 것을 허락지 않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상동》
○ 17년 명종 7년 정조(正朝)를 축하하는 예물 가운데 옥대(玉帶)가 옥과 비슷한 돌로 만든 것이었다. 이에 유사가 공문을 보내어 물어보기를 청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저 소국에서 옥을 제대로 알아보는 자가 없어서 잘못 옥으로 안 것이니, 공문을 보내어 물어볼 필요가 없다.”
하여, 중지하였다. 12월에 유사가, 고려의 하절(下節)인 압마관(押馬官) 순성(順成)이 규례를 어기고 갑사(甲士) 3명을 거느리고 국경을 통과하였다고 아뢰니, 세종이 사신이 범법한 것은 중한 죄에 해당되나,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만 하라고 하였다. 《상동》
○ 23년 명종 13년 12월에 왕호의 어머니 임씨(任氏)가 훙하였다. 왕호가 생일사 및 하례사(賀禮使), 회사사(回謝使) 등의 파견을 중지시켜 달라고 청하니, 조서를 내려서 따라 주었다. 《상동》
○ 29년 명종 19년 장종(章宗)이 즉위하였다. 조사(詔使)가 고려의 국경에 이르러서 입국이 자못 지체되었다. 조서를 내려서 그 까닭을 물으니, 고려에서 공손하게 사과하였다. 《상동》
○ 장종 명창(明昌) 3년에 명종 22년 고려의 하절(下節)인 김정(金挺)이 고려로 돌아가다가 평주(平州) 무령현(撫寧縣)에 이르러서 무령현 역(驛)의 사람 하첨아(何添兒)에게 맞아 죽었다. 유사가 사신이 오갈 적에는 적당히 군사를 배정해 호위하기를 청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장만공(張萬公)이 아뢰기를,
“사신들이 유숙하는 곳에서만 호위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그가 아뢴 것을 옳게 여겨, 지금부터 접반(接伴)하고 접송(接送)하는 정사와 부사가 사신을 제대로 호위하지 못하였을 경우 죄주겠다는 내용의 조서를 내렸다. 예전에는 하정조사(賀正朝使)가 12월 29일에 들어와 알현하였는데, 명창 6년 12월 29일인 기묘일은 입춘(立春)이었으므로 조서를 내려 2일 전에 들어와 알현하라고 하였다. 《상동》
○ 승안(承安) 2년 명종 27년 10월 경진에 상서성(尙書省)에서 아뢰기를,
“고려국의 첩보(牒報)에, ‘국왕이 늙고 병든 탓에 동모제(同母弟) 왕탁(王晫)에게 국사를 임시로 맡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최충헌(崔忠獻)이 명종을 폐위시키고 태자를 추방한 다음 왕의 동모제인 평량공(平凉公) 왕민(王旼)을 왕으로 세웠는데, 왕의 이름을 왕탁(王晫)으로 고쳤다.
○ 3년 신종(神宗) 원년 3월 병인에 왕호가 표문을 올려서, 자신은 늙고 병들어서 나라를 동생인 왕탁에게 양위하였다고 진달하였다. 이에 왕탁이 국사를 임시로 맡았는데, 이해에 왕호가 훙하고 왕탁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명종이 신종 5년 임술에 훙하였으니, 바로 금나라 태화(泰和) 2년(1202)이다. 이곳에서 이해에 훙하였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 4년 신종 2년 3월에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왕탁을 책봉해 고려국왕으로 삼았다. 《상동》
○ 태화 3년에 신종 6년 왕탁이 훙하였다. 아들 왕영(王韺)이 왕위를 이었다. 《상동》 ○ 살펴보건대, 《금사》에서 태화 4년에 왕탁이 훙하였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기에, 동사(東史)에 따라서 바로잡는다.
○ 4년 신종 7년 정월 초하루 을축에 고려의 겸인(傔人)이 조그만 패도(佩刀)로 이무(梨廡) 아래의 순랑(巡廊)을 깎고 있는 것을 직무를 보고 있던 관원이 발견하고서 규찰하였다. 관반관(館伴官)에게 조칙을 내려, 이후로는 기일에 앞서 공문을 보내 그런 짓을 못하도록 금지시키게 하였다. 《상동》
○ 지령(至寧 금나라 위소왕(衛紹王) 영제(永濟)의 연호) 원년 강종(康宗) 2년 8월에 고려 왕 왕영(王韺)이 훙하였다. 사자(嗣子)가 기복(起復)을 행하지 않았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희종 7년 신미, 즉 금 대안(大安) 3년(1211)에 최충헌(崔忠獻)이 희종을 폐위시키고 명종(明宗)의 태자인 한남공(漢南公) 왕정(王貞)을 왕으로 세웠으며, 이름을 왕오(王祦)로 고쳤는데, 이가 바로 강종(康宗)이다. 왕위에 있은 지 2년 만인 이해에 훙하고 다시 세자인 왕철(王㬚)이 즉위하였는데, 이가 바로 고종(高宗)이다. 희종은 뒤에 고종 24년인 송 가희(嘉煕) 원년(1237) 정유에 훙하였다. 《금사》에서 희종이 이해 8월에 훙하였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9월에 선종(宣宗)이 즉위하였다. 변방의 관리가 아뢰기를,
“고려의 첩보에 ‘사자가 기복을 하지 않은 탓에 흉복(凶服)을 입고 길한 조서(詔書)를 맞이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상중에 있는 몸으로 직함을 사용하여 표문에 서명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예관(禮官)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임시로 길복(吉服)을 입고서 조서를 맞이하게 하여야 하며, 권국사(權國事)의 직함을 사용해서 표문에 서명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고려에서 보낸 고애사(告哀使)가 대궐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사신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고 위문(慰問)하며, 책봉하는 의식을 거행하여야 합니다.”
하니, 황제가 재가하였다. 다음 해에 선종이 변경(汴京)으로 천도하여 요동의 도로가 불통되었다. 《상동》
○ 원(元) 태조(太祖) 철목진(鐵木眞 징기스칸의 이름) 11년 고종 3년 병자에 거란[契丹] 사람인 금산(金山)과 원의 원수(元帥)인 야율육가(耶律六哥) 등이 군사 9만여 명을 거느리고 고려로 도망쳐 들어갔다. 《원사》
○ 12년 고종 4년 9월에 야율육가가 고려의 강동성(江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그곳에 웅거하였다. 《상동》
○ 금 선종(金宣宗) 흥정(興定) 원년 고종 4년 완안아리불손(完顔阿里不孫)에게 명하여 파속로(婆速路)에다가 원수부(元帥府)를 열게 하였다. 이때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요동에 웅거해 있으면서 파속(婆速)의 경계 지역을 침략하였으므로 고려가 그가 강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양곡 8만 석을 보내 도왔다. 《금사》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고종 3년 윤7월에 금나라의 동경 총관부(東京摠管府)에서 북계 병마사(北界兵馬使)에 첩문(牒文)을 보내어 포선만노를 협공하자고 하였다. 이때 포선만노가 요동에 웅거해 있으면서 천왕(天王)을 참칭하고 국호를 대진(大眞)이라 하였다. 고종 4년 4월에 포선만노의 군사가 와서 대부영(大夫營)을 공격해 격파하였다. 《원사》 지리지에는, 원나라 초기 계사년에 군사를 출동시켜 정벌해 포선만노를 포로로 잡았으며, 군사가 개원(開元), 휼품(恤品)에 도달하여서 동쪽 지역이 비로소 평정되었다고 하였다.
○ 2년 고종 5년 4월 초하루 임인에 포찰오근(蒲察五斤)이 표문을 올리기를,
“요동(遼東)에서 편의종사(便宜從事)하고 있는 완안아리불손이 고려에 군량을 꾸려고 하였는데, 고려에서 꾸어 주지 않자 군사를 출동시켜 고려의 경내를 약탈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황제가 포찰오근에게 명하여 사람을 파견해서 조서를 가지고 고려로 들어가 유시해, 군사를 출동시킨 것이 금나라의 뜻이 아님을 고려로 하여금 알게 하도록 하였다.
○ 계축에 포선만노가 반란을 일으키자, 완안소란(完顔素蘭)을 파견하여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완안소란이 출발하기에 앞서 상언하기를,
“신이 근래 고려에 다시 호시(互市)를 여는 일에 대해 유시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조서를 행성(行省)의 필란(必蘭)에게 주어 나가게 하였다고 합니다. 만약 행성으로 하여금 고려로 가서 유시하게 한다면, 가까이 있는 경내에서만 그 유시를 받는 데 불과하여, 아마도 중간에서 불통되어 성상의 은혜가 고려에 전달되지 않을 염려가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고려에서도 조정의 본 뜻을 알지 못할 염려가 있습니다. 더구나 저 고려는 대대로 번국(藩國)으로 있으면서 일찍이 신하로서의 예의를 다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 신사(信使)를 파견하여 은혜로운 조서를 가지고 가서 유시하도록 한다면, 식량을 꾸는 것과 호시를 여는 두 가지 일이 모두 한꺼번에 반드시 성사될 것입니다. 고려에서 이 두 가지 일을 다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잘못이 고려 측에 있는 것이니, 그런 이후에 별도로 고려를 정벌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에 전객서 서표(典客署書表) 유병(劉丙)을 파견하여 완안소란을 따라가게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원 태조 13년에 고종 5년 합지길(哈只吉)ㆍ차라(箚刺) 살펴보건대, 《원사》 본기에는 합진(哈眞)ㆍ예라(禮刺)로 되어 있다.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러자 고려 사람 홍대선(洪大宣)이 군중(軍中)에 나와 항복하고는 합지길 등과 함께 공격하여 포위하였다. 이에 고려 왕이 소를 잡고 술을 가지고 나와 원나라 군사들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추밀원사 이부상서 상장군 한림학사 승지(樞密院使吏部尙書上將軍翰林學士承旨) 조충(趙沖)을 파견하여 함께 야율육가(耶律六哥)를 공격하여 토멸시켰다. 차라가 조충과 더불어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는데, 조충이 해마다 공부(貢賦)를 바치겠다고 청하자, 차라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길이 멀어서 왕래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매년 사신 10명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을 바치면 된다.”
하였다. 12월에 차라가 공문을 보내어 군량을 요구하자, 쌀 1천 곡(斛)을 보내 주었다. 《원사》
○ 금 흥정(興定) 3년에 고종 6년 요동행성(遼東行省)이 아뢰기를,
“고려가 다시 표문을 올리고 조공을 바칠 뜻이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해 재신(宰臣)들이 아뢰기를,
“요동행성으로 하여금 그 표문을 받게 하고, 조공을 바치는 예는 뒷날 서서히 의논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선종이 그렇게 여겼다. 이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를 위무하였는데, 고려에서는 끝내 도로가 막혀 사신을 맞이하지 못하였다. 요동행성에 조서를 내려, 고려를 계속해서 견제하여 우호 관계를 단절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다시는 사신이 왕래하지 못하였다. 《금사》
사신(史臣)이 찬하기를,
“금나라 사람들은 본디 고구려에 부속된 말갈(靺鞨)의 족속들이다. 처음에는 고려와 우호를 통하여 인국(隣國)이 되었다가 얼마 뒤에는 군신(君臣) 관계로 되었다. 그러다가 정우(貞祐 금나라 선종의 연호임) 이후로는 도로가 막혀 겨우 한두 번 왕래하였을 뿐이다. 고려는 성조(聖朝 원나라를 가리킴)에 들어와서도 오히려 자손들이 서로 왕위를 전하면서 스스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므로 다시 자세하게 논하지 않고 금나라와 서로 관계된 것만 논하였다.”
하였다. 《상동》
살펴보건대, 《금사》 애종본기(哀宗本紀)에, “정대(正大) 3년 6월 임자에 고려 및 요동행성의 갈불애(葛不靄)에게 조서를 내려 반란을 일으킨 역적 포선만노(蒲鮮萬奴)를 토벌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 당시에는 고려와의 길이 막혀서 통하지 못하여 빙문(聘問)조차도 이미 막혔는데, 조서를 내려 유시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아마도 요동행성에만 조서를 반포하고, 고려에는 미처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정대 3년은 바로 고종 13년 병술년이다.
[주D-001]목종(穆宗) : 동여진의 추장 영가(盈哥)에게 추존(追尊)한 묘호(廟號)이다. 영가는 완안부(完顔部)의 기초를 확립하기 시작한 오고내(烏古迺)의 뒤를 이어 계승한 추장으로서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오늘날의 간도(間島) 지방을 복속하였으며, 다시 남하하여 광의(廣義)의 함흥평야(咸興平野)를 지칭하는 갈라전(曷懶甸)에까지 그 세력을 미치게 하여 금나라의 기초를 닦았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61, 376쪽》
[주D-002]동여진(東女眞) : 갈라전(曷懶甸) 지방에 있는 여진을 말한다. 고려와는 이미 정종 3년(948)부터 교섭이 있었지만 현종 이후 왕래가 잦았다. 그들이 고려에 오는 목적은 진공(進貢), 내조(來朝) 등이었으며, 그들의 생활 필수품이 부족할 때에는 해적이 되어 고려의 동해안과 일본의 서남해안을 노략질하였다.
[주D-003]백산(白山) : 백두산을 말한다. 백두산은 금나라 때 백산, 또는 장백산(長白山)으로 불렸다.
[주D-004]금나라의 …… 하였다 : 금나라의 선조를 고려인 또는 신라인으로 보고 있는 것은 《금사》의 세기(世紀)나 《송막기문(松漠紀聞)》을 비롯하여 중국 사서(史書)의 기록이 모두 같다. 일본의 지내굉(池內宏)은 “금나라의 6대 오고내(烏古迺) 이전의 기사는 모두 세계(世系)를 연장한 가상의 인물이고 그 유래도 고려인 혹은 신라인으로 볼 수 없다.”고 추단하였다. 이에 대해 삼상차남(三上次男)은 ‘그것이 설화에 불과하나, 그 설화는 금나라 때 여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구려 후예 사상(高句麗後裔思想)을 경(經)으로 하고 금나라 황실의 정치적 필요를 위(緯)로 하여 성립한 것인 듯하므로, 시조가 고려인이라는 설은 실로 고구려인임을 말한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상기(金庠基)는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인임에 대하여는 그리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금나라의 선조가 고려 사람이라는 설에 대해서는 후고(後考)가 필요하나, 이 당시에 여진 사회에서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인이라 하여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였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375~376쪽》
[주D-005]아지고촌(阿之古村) : 아지고는 아륵초객(阿勒楚喀), 즉 안출호(按出虎)의 이역(異譯)인 듯하다.《韓國史, 진단학회, 375쪽》
[주D-006]완안부(完顔部) : 12~13세기에 지금의 만주 아성현(阿城縣) 일대를 근거지로 살다가 금나라를 세운 여진의 부족 이름이다. 오고내(烏古迺) 추장 때 세력을 확장하였고, 그의 손자인 오아속(烏雅束) 때 급속히 팽창하였으며, 아골타(阿骨打) 때에 이르러 금나라를 세웠다.
[주D-007]을리골령(乙離骨嶺) : 여진의 남쪽 지방에 있던 산이다. 지금의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이나 함경북도 경성(鏡城) 부근에 있었다고 하나, 정설(定說)이 없다.
[주D-008]발근(勃菫) : 여진족 추장의 칭호이다.
[주D-009]갈라전(曷懶甸) : 고려 시대 때 흑수여진(黑水女眞)이 살던 지역의 명칭이다. 갈라전의 범위에 대해서는 고려의 기미주(羈縻州) 설치 지역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이설(異說)이 있다. 종래에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 윤관의 9성 개척 지역이 함흥평야(咸興平野)에 한정된다는 설이 제기됨으로 해서 갈라전의 지역 범위도 정평(定平) 이북으로부터 함관령(咸關嶺)을 잇는 함흥평야 일대에 비정되기도 했다. 정약용(丁若鏞)은 길주(吉州) 이남 함흥 부근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애당초 갈라전의 범위는 고려의 기미주의 계한(界限)인 길주 이북으로부터 두만강 유역 일대를 포괄하였으며, 그 치소(治所)는 오늘날의 경성(鏡城)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갈라전 지역은 당시 두만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 남하해 오고 있는 완안부 여진과 고려 왕의 사이에 완충 역할을 하기도 하였는데, 고려의 기미주를 여진에게 돌려준 뒤에 이르러서는 갈라전의 범위가 정주 이북 두만강 유역까지를 포괄하는 명칭으로 변하였다.
[주D-010]소해리(蕭海里) : 거란국구장인(契丹國舅帳人)으로 무리를 모아 도적질을 하다가 여진 지역으로 도망쳤다. 거란의 군사들이 직접 소해리를 토벌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완안부(完顔部)에 부탁하자 아골타(阿骨打)가 소해리를 죽였다.
[주D-011]성현(星顯) : 지금의 포이합도하(布爾哈圖河)를 가리킨다.
[주D-012]통문(統門) : 지금의 두만강을 가리킨다.
[주D-013]오수(五水) : 함흥평야를 흐르는 성천강(城川江) 등 다섯 하천을 말하는 듯하다.《김상기, 高麗時代史, 208쪽》
[주D-014]고려가 …… 축하하였다 : 김상기(金庠基)는 “여기에는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오아속이 사위(嗣位)한 것을 축하하였다고 하였으나, 당시 국제적 지위로 보나 또 오아속이 즉위한 지 3년이 지난 시기임을 감안할 때 그의 사위를 하례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우며, 도리어 고려 예종의 사위를 알린 것이 이와 같이 바뀌어 적힌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때 완안부에서 고려로 보내온 사신의 이름은 《고려사》에 공아(公牙)라고 하였다.” 하였다.《김상기, 高麗時代史, 215쪽 주》
[주D-015]9성(城) : 윤관이 갈라전 지역에 있던 여진족을 정벌하고 쌓은 함주(咸州)ㆍ복주(福州)ㆍ영주(英州)ㆍ길주(吉州)ㆍ웅주(雄州)ㆍ통태진(通泰鎭)ㆍ진양진(眞陽鎭)ㆍ숭녕진(崇寧鎭)ㆍ공험진(公嶮鎭) 등인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분분하여 정설이 없다.
[주D-016]태조(太祖) : 아골타(阿骨打)를 말한다. 이름은 완안민(完顔旻)이고, 아골타는 여진명(女眞名)이다. 오아속(烏雅束)의 뒤를 이어 완안부의 추장으로 추대되어, 조부인 오고내 때부터 길러온 세력을 토대로 요나라의 지배에 반발, 독립 전쟁을 일으켜 금나라를 건국하였다.
[주D-017]도문수(徒門水) : 지금의 두만강을 가리킨다.
[주D-018]갈라수(曷懶水) : 갈라(曷懶)는 금나라 시대에 함경도 지방에 대한 호칭으로, 갈라수는 함흥 지방의 성천강(城川江)이다.
[주D-019]9개의 성 : 김상기는 “고려의 9성에 대해 여진 측에서도 각각 9개의 성을 쌓아 대치한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여진에서 장기전을 각오하고 임시로 작은 성과 책(柵)을 쌓아 그곳을 공격의 근거지로 한 데 불과한 것이다.” 하였다.《김상기, 高麗時代史, 221쪽 주》
[주D-020]황룡부(黃龍府) : 농안(農安)으로, 만주 길림성(吉林省) 북부에 있는 현이다. 요나라 시대에는 황룡부(黃龍府)였다가 금나라가 지배하고부터는 제주(濟州)ㆍ융주(隆州) 등으로 바뀌었다.
[주D-021]합주(合主) : 요나라 때 설치한 만주 지방의 행정 구역 이름이다.
[주D-022]순화(順化) : 요나라 때의 현으로, 만주 요령성(遼寧省) 일대에 있었다.
[주D-023]석현(石顯) : 《요사》 태조본기에는 습현(習顯)으로 되어 있다.
[주D-024]발근(孛菫) : 여진족 추장(酋長)의 칭호이다.
[주D-025]갈라전(曷懶甸)의 장성(長城) : 고려의 천리장성(千里長城)을 말한다.
[주D-026]고려에서 …… 있었겠는가 : ‘사신이 논하기를’에서부터 ‘있었겠는가’까지의 기사는 《요사》 이국외기(二國外紀)에 들어 있는 고려와 서하(西夏)의 기사에 대한 사론(史論)으로, 고려와 서하에 대한 내용이 혼재(混載)되어 있다. 본문 가운데 ‘틈만 있으면’부터 ‘경우도 있었다’까지는 서하에 관한 사론이다. ‘고려에서’에서 ‘하였지만’까지의 이 부분은 《요사》 고려열전(高麗列傳)에, “태종 통화(統和) 14년(996, 성종15)에 고려 성종이 표문을 올려 서로 혼인하자고 청하자, 부마(駙馬)인 동경 유수(東京留守) 소항덕(蕭恒德)의 딸을 시집보냈다.”고 하였다. 이 기사가 《고려사》와 《동사강목》에는 통화 13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주D-027]왕씨가 …… 17명이며 : 이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주D-028]괴자마(拐子馬) : 진법의 일종으로 3기(騎)를 가죽 끈으로 연결시켜 함께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송사》 악비열전(岳飛列傳)에, “금나라 태조의 넷째 아들인 올출(兀朮)에게 경군(勁軍)이 있어 이들에게 두꺼운 갑옷을 입힌 다음 3기(騎)를 가죽 끈으로 연결하여 함께 행동하게 하고는 이를 괴자마(拐子馬)라 불렀는데, 관군(官軍)이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하였다.
[주D-029]처형한 …… 명이었다 : 인종 즉위년(1122) 12월에 이자겸(李資謙), 이자량(李資諒) 등과 알력을 빚고 있던 한안인(韓安仁), 문공미(文公美) 등의 일파가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와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를 받아, 대방공 왕보는 경산부(京山府)로 내쫓기고, 한안인은 감물도(甘勿島)로 유배당하였다가 살해되었으며, 문공미 등은 유배당하였다.
[주D-030]연운(燕雲) : 황하(黃河) 북쪽에 있는 연주(燕州)와 운주(雲州)를 가리킨다. 이때 송나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이곳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이를 모셔 오기 위해서 송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주D-031]연산(燕山)의 일 : 연산은 지금의 북평(北平) 지방으로, 송나라 휘종이 거란으로부터 빼앗아 연산부(燕山府)를 설치하였다. 그 뒤 정강(靖康) 2년(1127)에 금나라와 이 지역을 다투다가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는 변이 일어났다. 정강(靖康)의 화(禍)라고도 한다.《宋史 卷23》 《讀史方輿紀要 卷11 順天府》
[주D-032]욱(勗) : 금나라의 종실(宗室)로, 목종(穆宗)의 다섯째 아들이며, 본명은 오야(烏野)이고, 자(字)는 면도(勉道)이다.《金史 卷66 列傳 第4 始祖以下諸子》
[주D-033]오복(五服) : 고대 중국의 행정 구역을 말한다.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5백 리마다 차례로 나눈 다섯 구역으로, 상고(上古) 시대에는 전복(甸服)ㆍ후복(侯服)ㆍ수복(綏服)ㆍ요복(要服)ㆍ황복(荒服)이라 하였고, 주나라 시대에는 후복ㆍ전복ㆍ남복(男服)ㆍ채복(采服)ㆍ위복(衛服)이라 하였다.
[주D-034]사명(四明) : 산의 이름으로 영파부(寧波府)와 소흥부(紹興府) 사이에 있다.
[주D-035]강수(綱首) : 상인단(商人團)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강(綱)은 화물(貨物)을 총괄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수(首)는 우두머리이다.
[주D-036]부학(府學) : 부(府)의 치소(治所)에다가 설립하였던 관학(官學)을 말한다.
[주D-037]홍혜사(洪惠寺) : 《송사》 고려열전에는 법혜사(法惠寺)로 되어 있다.
[주D-038]해릉(海陵) : 금나라의 폐제(廢帝)인 해릉서인(海陵庶人) 완안량(完顔亮)을 가리킨다. 본래의 이름은 적고내(迪古乃)이며, 요왕(遼王) 종간(宗幹)의 둘째 아들이다. 평장사(平章事)로 있다가 희종(煕宗) 단(亶)을 시해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가 뒤에 폐위되었다.《金史 卷5 本紀 第5 海陵》
[주D-039]신주(神舟) : 송나라에서 고려로 가는 사행(使行)을 태우고 가는 선단(船團)의 중심이 되는 관선(官船)을 가리킨다. 원풍(元豐) 원년에 명주(明州)에서 신주 2척을 건조하였는데, 이름이 ‘허치원안제(虛致遠安濟)’와 ‘영비순제(靈飛順濟)’이다.《宋史 卷487 高麗列傳》
[주D-040]삼절(三節) : 사행(使行) 가운데 정사(正使)ㆍ부사(副使)ㆍ서장관(書狀官)을 가리킨다.
[주D-041]진백(秦伯)의 …… 본받겠는가 : 무의(無衣)는 《시경(詩經)》 진풍(秦風)의 편명으로, 진(秦)의 강공(康公)이 싸움을 좋아하여 백성들의 뜻과 달리 전쟁을 자주 일으키는 것을 풍자한 시이다. 여기서는 고려 사람들이 송나라를 위하여 금나라와 싸우지는 않을 것이란 뜻으로 쓰였다.
[주D-042]부우(傅雩)ㆍ왕륜(王倫) : 두 사람 모두 송나라 때 사람으로,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억류되어 있다가 죽었다.
[주D-043]만춘절(萬春節) : 음력 3월 3일을 말한다.
[주D-044]생일사(生日使) : 금나라에서 주위에 있는 나라의 왕에게 보내는 사신이다. 이때 금나라에서는 서하(西夏)ㆍ송(宋)ㆍ고려(高麗)에 생일사를 파견하였다.
[주D-045]파속로(婆速路) : 《일통지(一統志)》에, “요양성(遼陽城) 동쪽 4백 7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고,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금나라 천덕(天德) 2년에 파속로 총관(婆速路摠管)을 두었는데, 원나라 초기에 파속로를 파사로(婆娑路)로 고친 다음 부(府)를 설치하였다. 지금의 봉황성(鳳凰城) 관할에 속한다.” 하였다. 지금의 봉천(奉天) 봉황성(鳳凰城)의 동쪽 변경에 있다고도 한다.
[주D-046]맹안(猛安)이나 모극(謀克) : 모두 금나라의 관직이다. 《금사》 국어해(國語解)에 “맹안은 1천 부(夫)의 장(長)이고, 모극은 1백 부의 장이다.” 하였다.
[주D-047]서경 유수(西京留守) …… 일으켰기에 : 명종 4년 9월에 병부 상서(兵部尙書)로서 서경 유수로 나가 있던 조위총이, 정중부 등이 의종을 죽이고서 장사 지내지 않고 있자 동북(東北) 양계(兩界)의 군사들을 불러 모아 정중부와 이의방을 쳤다. 그 뒤 명종 6년 6월에 윤인첨(尹鱗瞻)에게 패하여 효수당하였다.
[주D-048]서언평(徐彦平) : 《금사》 고려열전에는 서언녕(徐彦寧)으로 되어 있고, 《금사》 교빙표(交聘表), 《고려사》 명종세가(明宗世家), 조위총열전(趙位寵列傳), 《동사강목》 제9에는 모두 서언(徐彦)으로 되어 있다.
[주D-049]살펴보건대 …… 바로잡는다 : 이 부분은 편찬자가 어느 사서(史書)를 근거로 하여 이렇게 고친 것인지 모르겠는바, 아마도 착오를 일으킨 듯하다. 신종은 태화 4년 1월에 병으로 인해 왕위를 태자인 왕덕(王悳)에게 전하였으며, 8일 만에 덕양후(德陽侯)의 집에서 훙하였는데, 왕덕은 희종(煕宗)의 구휘(舊諱)로 바로 왕영을 말한다. 《금사》에서 태화 4년에 왕탁이 훙하였다고 한 기사가 맞다.《東史綱目 第10上》 《高麗史節要 卷14 神宗靖孝大王》
[주D-050]신종 7년 : 이해가 원문에는 희종 원년으로 되어 있는데, 희종 원년은 태화 5년이기에 신종 7년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1]선종이 …… 불통되었다 : 이해에 금나라가 몽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중경(中京)을 버리고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개봉현(開封縣)인 변경으로 천도하였으며, 이로 인해 요동을 경유하여 금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막혔다.
[주D-052]금산(金山) : 거란 유민(遺民)의 추장으로,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운 야사포(耶斯布) 즉, 야시불(耶厮不)의 아들로 추측된다. 고종 3년(1216)에 걸노(乞奴) 등과 함께 야사포를 황제로 추대하여 대요수국을 세웠으며, 이해에 몽고군이 쳐들어오자 걸노ㆍ아아(鵝兒)ㆍ통고여(統古與) 등과 함께 거란의 유민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 서계(西界)의 여러 성을 약탈하고 개경 부근까지 위협하다가 김취려(金就礪)에게 패해 본거지로 퇴각하였다. 그 뒤 다시 침입하였으나 패하고 강동성(江東城)에 들어가 고려ㆍ몽고ㆍ동진(東眞)의 연합군에 대항하였다. 그 뒤 왕이라고 칭하다가 통고여에게 살해당하였으며, 그가 이끌던 거란의 유민은 김취려 등의 군사에 의하여 분쇄되었다.
[주D-053]야율육가(耶律六哥) : 금나라의 북변 천호(北邊千戶)로 있다가 몽고군이 침입하자 10여 만 명의 무리를 끌어 모아 몽고에 붙고는 자립하여 요왕(遼王)이 되었다. 연호를 원통(元統)으로 고치고 요동 지방을 차지한 다음 함평(咸平) 즉, 지금의 개원(開原)에 도읍하였다가 다시 몽고에 항복하여 원수(元帥)가 되었다. 야율유가(耶律留哥)로도 표기한다.
[주D-054]포선만노(蒲鮮萬奴) : 금나라의 무장(武將)이다. 함평로 선무사(咸平路宣撫使)로 있다가 정우(貞祐) 3년(1215)에 금나라를 배반하여 요동에 웅거하고는 국호를 대진(大眞)이라 하고 연호를 천태(天泰)라 하여 대요국(大僚國)과 대립하였다. 성길사한(成吉思汗)에게 쫓기어 두만강 유역으로 이주한 다음 국호를 동진국(東眞國)으로 고치고 두만강과 압록강 주위에 있는 여진족을 통합하였다. 1217년에 몽고와 화맹(和盟)하고는 고려를 구한다는 구실로 고려의 동북쪽을 쳐들어왔다. 1233년에 몽고의 공격으로 멸망당했다.
[주D-055]대부영(大夫營) : 의주(義州) 부근 압록강에 있는 섬 이름이다.
[주D-056]호시(互市) : 외국과의 교역(交易)을 행하는 무역장(貿易場)을 말한다. 무역장은 두 나라 간의 국경 지역에 설치하여 물품을 교역한다.
[주D-057]합지길(哈只吉)ㆍ차라(箚刺) : 합지길은 《원사》에는 합적길(合赤吉)ㆍ합제제(合齊齊)ㆍ합지길(哈只吉)로, 《신원사》에는 합진(哈眞)으로, 《고려사》에는 합진(哈眞)ㆍ하칭(何稱)으로, 《고려사절요》에는 합진(哈眞)으로, 《동사강목》에는 합진(哈眞)으로 각각 표기되어 있다. 차라는, 《고려사》에는 찰라(札刺)ㆍ찰라(扎刺)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찰랍(札臘) 등으로 각각 표기되어 있다. 합진은 1219년에 동진(東眞)의 군사와 함께 거란의 유종(遺種)을 토벌한 몽고의 장수이다.
[주D-058]홍대선(洪大宣) : 홍대순(洪大純)을 말한다. 홍복원(洪福源)의 아비로, 이 당시에 인주 도령(麟州都領)으로 있다가 합진(哈眞) 등이 강동성(江東城)을 칠 때 그를 맞이하여 항복하였다.
.고려(高麗) 3
○ 원(元) 태조(太祖) 14년 고종(高宗) 6년 정월에 고려에서 권지 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 윤공취(尹公就), 중서주서(中書注書) 최일(崔逸)을 보내와 화호(和好)를 맺고, 첩문(牒文)을 차라(箚刺)의 행영(行營)으로 보내어 오자, 차라가 사신을 보내어 이에 회답하였다. 고려 왕은 시어사(侍御史) 박시윤(朴時允)을 접반사(接伴使)로 삼아 차라의 사신을 맞이하였다. 황제가 또 포리대야(蒲里帒也)를 파견하여 조서를 가지고 가서 유시하게 하니, 고려 왕이 조서를 맞이하여 절하고 잔치를 베풀었다. 9월에 황태제국왕(皇太弟國王), 원수(元帥) 합신(合臣), 부원수 차라(箚刺) 등이 각각 글을 선차대사(宣差大使) 경도홀사(慶都忽思) 등 10명에게 주어 보내면서 들어와 조공을 바칠 것을 재촉하니, 얼마 뒤에 방물(方物)을 올렸다. 《원사》
○ 15년 고종 7년 9월에 대두령관(大頭領官) 감고고(堪古苦)ㆍ착고여(着古歟) 등이 다시 황태제국왕의 글을 가지고 독촉하자, 이에 방물을 올렸다. 《상동》
○ 16년 고종 8년 7월에 고려에 칙지(勅旨)를 내려 여진(女眞)을 정벌한 일에 대해 유시하니, 비로소 표문을 받들고 진하(陳賀)하였다. 《상동》
○ 17년 고종 9년 10월에 조서를 내려 착고여(着古歟) 등 12명을 파견하여 고려에 가서 성심으로 귀부하는지의 실상을 살피게 하였다. 《상동》
○ 18년 고종 10년 8월에 선차(宣差) 산출대(山朮䚟) 등 12인이 다시 황태제국왕의 글을 가지고 공물을 바칠 것을 재촉하였다. 《상동》
○ 19년 고종 11년 12월에 착고여 등이 또 고려에 사신으로 갔는데, 중간에서 암살당하였다. 이로부터 7년 동안 사신의 왕래가 끊어졌다. 《상동》
○ 태종(太宗) 와활태(窩闊台) 원년 기축에 고종 16년 왕영조(王榮祖)에게 북경등로정행만호(北京等路征行萬戶)를 제수하고, 금호부(金虎符)를 주어 고려를 정벌하게 했다. 《상동》
○ 2년 경술에 고종 17년 정행만호(征行萬戶) 매노(買奴)가 고려를 정벌하기 위해 화량성(花凉城)을 공격하였는데, 감군(監軍) 장익(張翼)ㆍ유패(劉覇)가 모두 고려 군사에게 죽었다. 이에 매노가 노하여 말하기를,
“두 장수가 적에게 죽었으니, 의리상 혼자서만 살아 돌아갈 수가 없다.”
하면서 곧바로 나가 싸워 적을 격파하여 우두머리 장수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진군하여 개주(開州)를 공격해 개주의 장수 김사밀(金沙密)을 포로로 잡았다.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동남동녀 및 금옥으로 만든 기물을 바쳤는데, 모두 받지 못하도록 명을 내렸다. 드디어 용주(龍州)ㆍ선주(宣州)ㆍ운주(雲州)ㆍ태주(泰州) 등 14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상동》
○ 3년 신묘 고종 18년 8월에 고려에서 사신 착고여를 살해했다는 이유로 살례탑(撒禮搭)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고려를 토벌하게 하여 40여 성을 빼앗았다. ○ 고려 사람 홍복원(洪福源)이란 자가 군사들을 맞이하면서 항복하여 왔다. 이에 홍복원이 거느리고 있던 편민(編民) 1천 5백 호를 얻으니, 부근에 있던 주군(州郡)에서도 항복하여 오는 자가 있었다. 살례탑이 즉시 홍복원과 함께 귀부하지 않은 주군을 공격하고, 또 아아독(阿兒禿)으로 하여금 홍복원과 함께 왕경(王京)으로 가서 왕 왕철(王㬚)을 불렀다. 그러자 왕철이 그의 동생인 회안공(懷安公) 왕정(王侹)을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니, 허락하였다. 살례탑이 제서(制書)를 받들어서 관직을 설치하고, 경(京), 부(府), 현(縣)에 72명의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두어 감독하게 하고는 드디어 회군하였다. 11월에 원수 포도(蒲桃)ㆍ적거(迪巨)ㆍ당고(唐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의 왕성에 이르렀다. 왕철이 사신을 보내어 소와 술을 가지고 맞이하였다. 12월 1일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행영(行營)에서 원수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다음날에 고려의 사신들이 원수가 보낸 사람 40여 명과 함께 왕성으로 들어가서 문첩(文牒)을 왕에게 주었다. 또 다음날에 왕철이 왕정 등을 보내어 살례탑이 주둔한 곳에 나아가 군사들에게 호궤(犒饋)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4년 고종 19년 정월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왕철에게 새서(璽書)를 내려 유시하였다. 3월에 왕철이 중랑장(中郞將) 지의원(池義源), 녹사(錄事) 홍거원(洪巨源)ㆍ김겸(金謙) 등을 보내어 선물과 첩문(牒文)을 가지고 살례탑이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 가게 하였다. 5월에 다시 조서를 내려 유시하였다. 6월에 왕철이 원나라 조정에서 설치한 다루가치 72명을 모두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드디어 왕경과 여러 주현의 백성들을 모두 거느리고 해도(海島)로 들어갔다. 홍복원이 남은 백성들을 수습하여 원나라 군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상동》
○ 처음에 고려에서 원나라와 강화하고서는 원나라에서 보낸 사신에게 황금 7천 근, 백금 1천 3백 근, 유의(襦衣) 1천 벌, 말 1백 70필을 보내고, 살례탑에게 금은 및 금은으로 만든 주기(酒器), 비단, 수달피, 안장, 말 등의 물품을 보내고, 그의 처자와 휘하들에게도 적지 않은 물품을 싸 보내었다. 살례탑의 군사가 회군하자, 왕철이 원나라 사람들이 설치한 다루가치를 모두 죽이었는데, 이로부터 고려가 원나라 사람들에게 시달려 편안한 해가 없었다. 고려 왕의 상(相) 최우(崔瑀)가 왕에게 강화도(江華島)로 천도(遷都)하여 원나라의 화를 피하기를 청하였는데, 강화도는 고려의 바다에 있는 섬이다. 그러자 유승조(兪升朝)가 말하기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예입니다. 바다 섬으로 도망쳐서 성곽을 버리고 종묘사직을 버리는 것은 옳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고, 야별초(夜別抄)를 지휘하고 있던 김세충(金世沖)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서 최우를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송경(松京)은 조종들께서 도읍하신 곳인데,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하니, 최우가 김세충을 끌어다가 참수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고려 왕에게 강화도로 가기를 청하였다. 왕이 결정을 못 내리고 주저하고 있는데, 최우가 세력을 믿고는 백성들의 뜻을 거스른 채 날짜를 정해 놓고 백성들을 내보내었다. 이때 마침 가을비가 열흘이 넘도록 내려 진흙탕이 정강이까지 빠져 사람과 말이 길에 넘어져 울부짖는 소리가 곳곳에서 났다. 송도는 백성들의 호구 수가 10만이 넘고 기와집이 줄지어 늘어섰는데, 이를 모두 버리고 간 것이다. 《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
○ 8월에 다시 살례탑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토벌하게 하였다. 살례탑이 왕경의 남쪽에 이르러 처인성(處仁城)을 공격하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에, “살례탑이 처인성을 공격할 때 어떤 중이 성 아래로 난리를 피해 와 있다가 살례탑을 쏘아 죽였다. 고려 왕이 그중에게 상장군(上將軍)을 제수하자 중이 사양하였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처인성은 지금의 용인현(龍仁縣)이며, 중은 바로 김윤후(金允侯)인데, 김윤후는 그 뒤에 관직이 우복야(右僕射)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고려사》에 그의 전(傳)이 있다. 이에 별장(別將) 철가(鐵哥)가 군사를 지휘하여 철수하였으며, 그들 가운데 이미 항복한 사람들은 홍복원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였다. 10월에 왕철이 장군 김보정(金寶鼎), 낭중 조서장(趙瑞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면서 사정을 진달하였다. 《원사》
○ 5년 고종 20년 4월에 왕철에게 조서를 내려, 허물을 뉘우치고 와서 조회하라고 유시하였다. 또한 왕철의 다섯 가지 죄목을 나열하기를,
“거란을 평정하고 차라(箚刺)를 살해한 뒤로는 일찍이 한 번도 사신을 대궐로 보내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죄이고, 사신에게 명해 훈계하는 글을 가지고 효유하게 할 적마다 활을 쏘면서 되돌아가게 한 것이 두 번째 죄이고, 착고여(着古歟)를 모해하고서도 포선만노(蒲鮮萬奴)의 백성들이 그를 죽였다고 한 것이 세 번째 죄이고, 너희들로 하여금 진군(進軍)하라고 명하고 이어 여필(汝弼)에게 들어와 조회할 것을 명하였는데도 너희들이 감히 이에 항거하고 바다 섬으로 도망한 것이 네 번째 죄이고, 너희 나라의 호구 수를 현재의 숫자대로 다 보고하지 않고 감히 속여서 아뢴 것이 다섯 번째 죄이다.”
하였다. 10월에 왕철이 다시 군사를 파견해서 이미 원나라에 귀부한 서경(西京) 등처의 항복한 백성들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홍복원의 집을 빼앗았다. 《상동》
○ 6년에 고종 21년 홍복원(洪福源)이 항복한 백성들을 이끌고 동경(東京)으로 옮겨 가서 살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이를 허락하고, 금부(金符)를 하사해 차도록 하였다. 《상동》
○ 7년 고종 22년 당고(唐古)와 홍복원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서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상동》
○ 9년 고종 24년 고려의 용강(龍岡)ㆍ함종(咸從) 등 10여 성을 함락하였다. 《상동》 ○ 《원사》 야율유가열전(耶律留哥列傳)에는, “야율유가는 설도유가(薛闍留哥)의 아들이다. 태종 경인년에 광녕로도원수(廣寧路都元帥)가 되어 경인년부터 정유년까지 잇달아서 고려 및 동하(東夏)를 정벌하여 6천여 호(戶)를 회복하였다.” 하였다.
○ 10년 고종 25년 5월에 고려 사람 조현습(趙玄習)ㆍ이원우(李元祐) 등이 2천 명을 거느리고 항복하면서 군사들을 맞이하였다. 이에 동경(東京)에 살게 하고, 홍복원의 절제를 받게 하였다. 또 어전(御前) 은부(銀符)를 하사하여 조현습 등으로 하여금 이를 차고서 항복하지 않은 민호를 불러 모으게 하였다. 또 이군식(李君式) 등 12명이 항복하여 오자 대우하기를 조현습과 같게 하였다. 《상동》
○ 11년 고종 26년 5월에 조서를 내려서 왕철로 하여금 들어와서 조회하게 하니, 왕철이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6월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 조회하였다. 10월에 칙지를 내려 왕철에게 유시하여 내년 12월에 직접 들어와서 조회하라고 하였다. 이에 왕철이 신안공(新安公) 왕전(王佺)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상동》
○ 12년 고종 27년 5월에 다시 조서를 내려 유시하였다. 12월에 왕철이 예빈 소경(禮賓少卿) 송언기(宋彦琦)를 행리사(行李使)로 차임하여 들어와 조공을 바쳤다. 이해에 창주(昌州), 삭주(朔州) 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상동》
○ 13년에 고종 28년 고려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그런데도 몽고(蒙古)의 군사가 나와 끊임없이 공격하면서 창주, 삭주 등의 고을을 빼앗아 고려의 형세가 날로 기울었다. 몽고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이 직접 들어와 조회하면 군사를 철수할 것이라고 효유하니, 왕철이 부득이하여 가을에 족자(族子) 왕준(王綧)을 자기 아들이라고 하면서 들여보내 볼모로 있게 하였다. 《홍간속록(弘簡續錄)》 ○ 《원사》 오야이열전(吾也而列傳)에는, “태종 3년(1231)에 오야이(吾也而)가 살리탑(撒里搭)과 함께 고려를 정벌하여 수주(受州)ㆍ개주(開州)ㆍ용주(龍州)ㆍ선주(宣州)ㆍ태주(泰州)ㆍ가주(葭州) 등 10여 성을 함락하니, 고려에서 두려워하면서 강화를 요청하였다. 이에 오야이가 효유하기를, ‘만약 왕의 아들을 들여보내 볼모로 있게 하면 공격을 중지하겠다.’ 하였다. 고려 왕이 13년(1241)에 그의 아들 왕준(王綧)을 파견하여 오야이를 따라 들어가 조회하게 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면서 상을 후하게 내렸다. 그러고는 오야이를 칠로정행병마도원수(七路征行兵馬都元帥)로 삼고 호부(虎符)를 하사하여 차게 하였다. 헌종 원년(1251)에 오야이를 불러 동이(東夷)의 일에 대해 물으니, 오야이가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비록 늙었으나 황상의 위엄을 빌어 삼군(三軍)을 지휘하면 맞상대가 될 만한 나라도 이길 수 있는데, 더구나 동이의 작은 오랑캐쯤이겠습니까.’ 하니, 황제가 그 말을 장하게 여겼다.” 하였다.
○ 정종(定宗) 귀유(貴由) 2년 정미에 고종 34년 고려에서 해마다 바치는 조공을 바치지 않자 아모간(阿母侃)에게 명하여 고려에 가서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였다. 《상동》
○ 아모간이 고려의 염주(鹽州)에 주둔하고는 산골짜기로 피난한 고려의 백성들을 모두 몰아내었다. 염주의 바다 가운데 위도(葦島)란 섬이 있는데, 10여 리쯤 되는 평탄한 개펄에 해조(海潮)가 넘나들었다. 예전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방경(金方慶)이 백성들을 시켜 이곳에 제방을 쌓아 큰 못을 만들고는 개간을 하여 벼를 심었는데, 그 당시에는 백성들이 몹시 원망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산골짜기에서 몰려난 백성들이 이 위도에 의지하여 살아났다. 고려 왕이 강화도에 있자, 원나라 사람들이 와서는 왕으로 하여금 육지로 나와서 조서를 맞이하라고 독촉하였는데, 왕은 나오지 않았다. 《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
○ 헌종(憲宗) 몽가(蒙哥) 2년 임자 고종 39년 10월에 제왕(諸王) 야고(也古)에게 명하여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원사》
○ 3년 고종 40년 정월에 제왕 야고가 고려를 정벌하는 것을 중지하였다. 12월에 종왕(宗王) 야호(耶虎)에게 명하여 홍복원(洪福源)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화산(禾山)ㆍ동주(東州)ㆍ춘주(春州)ㆍ삼각산(三角山)ㆍ양근(楊根)ㆍ천룡(天龍) 등의 성을 함락하였다. 《상동》 ○ 《원사》 왕순열전(王珣列傳)에는, “왕영조(王榮祖)가 제왕(諸王) 야홀(也忽)을 따라 삼한(三韓) 지역을 정벌하여 천룡(天龍) 등 여러 진보(鎭堡)를 함락하였는데, 군사들에게 난폭하게 약탈하는 것을 금지시키니 백성들이 모두들 기뻐하여 복종하였다. 이에 황제가 그 공을 가상하게 여기어 금폐(金幣)를 하사하였다. 진을 고려의 평양(平壤)으로 옮기자, 왕영조가 백성들을 모집하여 주둔해 지키면서 땅을 1천여 리나 개척하였다.” 하였다.
○ 당초에 헌종(憲宗)이 즉위하여 고려 왕에게 조서를 내려 도로 송경(松京)으로 나와서 있게 하였다. 최우(崔翏)의 아들 최항(崔沆)이 고려의 상(相)이 되었는데, 역시 세력을 믿고는 최우와 마찬가지로 왕이 강화도를 나가는 것을 막았다. 원나라의 사신이 도착하자, 왕이 그의 아들 왕전(王佺)으로 하여금 나아가서 사신을 맞이하게 하고, 사신이 관소(館所)로 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만나니, 사신이 화를 내었다. 이때에 이르러서 아모간(阿母侃)과 홍복원이 헌종에게 고려가 육지로 나올 뜻이 없다고 아뢰자, 헌종이 그의 동생인 야굴왕(也窟王)으로 하여금 살펴보건대, 야굴은 바로 《원사》의 야호(耶虎)이다.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동쪽 국경으로 들어가게 하고, 아모간과 홍복원으로 하여금 북쪽 국경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몽고의 군사가 대이주(大伊州)에 주둔하고서 고화주(古和州)로 향해 나아가자 고려 사람들이 산성(山城)과 해도(海島)로 들어가서 버티었다. 이에 앞서 고려 왕이 왕의 족자 왕준(王綧)을 자기 아들로 삼아 원나라에 볼모로 보내었는데, 야굴이 그로 하여금 몽고 군사를 따라 고려로 가게 하였다. 이에 왕준이 최항(崔沆)에게 글을 보내어 왕에게 육지로 나와서 몽고 군사를 맞이하기를 청하게 하였는데, 최항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야굴이 서해도(西海道)를 함락하고 산성을 약탈하면서 10세 이상된 남자를 모두 죽이고, 부녀자와 어린아이는 사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왕이 이에 사신을 보내어 글을 올려 애원하면서 야굴에게 항복할 기일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약속한 지 6일이 지나서 왕이 다시 고려의 장수를 보내어 금은으로 만든 주기(酒器)와 비단, 모시 등의 물품을 선물로 보내면서 내년으로 약속을 미루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야굴이 고구려의 성을 공격하여 8개의 주현을 함락하였으며, 얼마 뒤 병이 나 북쪽으로 돌아가면서 아모간과 홍복원을 남겨 두어 지키게 하였다. 고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송경에서 야굴을 전송하게 하면서 군사를 물릴 것을 청하게 하였다. 그러자 야굴이 꾸짖으면서, 고려 왕이 반드시 강화도에서 육지로 나와 사신을 맞이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고는 몽고대(蒙古大) 등 10인을 파견하여 고려의 사신과 함께 가서 고려 왕을 만나 보게 하니, 고려 왕이 강을 건너와서 맞이하였다. 몽고대가 고려 왕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일찌감치 이와 같이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는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신 다음 헤어졌다. 야굴이 다시 고려 왕이 있는 성을 허물려고 하자, 왕이 다시 아들 왕창(王淐)을 원나라로 보내어 애원하였는데, 진봉(進奉)한 물품과 원나라의 궁인(宮人)과 여러 공비(公妃) 및 왕비(王妃)에게 보낸 선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명산장왕향기》
○ 4년 고종 41년 여름에 찰라태(札刺台)에게 명하여 고려를 정벌하게 하고, 섭길홀라(葉吉忽刺)에게 명하여 제왕(諸王)을 내어 모두 그의 절제를 받게 하였다. 《원사》
○ 원나라에서 차라대(車羅大)로 하여금 살펴보건대, 차라대는 바로 찰라태(札刺台)이다. 동방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차라대가 왕에게 묻기를,
“왕은 비록 육지로 나왔지만, 시중(侍中)과 상서(尙書) 등의 관원은 아직 진짜로 항복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였다. 이에 고려 왕이 고려의 장수 장(長)을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장(長)은 바로 대장군 이장(李長)이다. 시켜 차라대에게 금은으로 만든 주기(酒器)와 가죽, 비단 등을 선물로 보내었다. 차라대가 말하기를,
“군왕과 백성들이 육지로 나온 다음에는 모두 삭발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왕을 데리고 원나라로 돌아가겠다.”
하였다. 이에 왕이 두려워하여 다시 신하 최린(崔璘)을 보내어 가서 군사를 파하기를 청하게 하였다. 그러자 차라대가 말하기를,
“상(相) 최항이 왕을 받들고서 육지로 나오면 군사를 파하겠다.”
하였다. 이해에 원나라에서 잡아간 고려 사람이 무려 20만 명이나 되고 죽인 자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으며, 몽고 군사가 지나간 곳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는바, 고려가 원나라에게 시달린 것은 이루 형용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명산장왕향기》
○ 5년에 고종 42년 다시 차라대(箚刺䚟)에게 명하여 살펴보건대, 차라대는 바로 찰라태(札刺台)이다. 본기(本紀)에도 차라대(箚刺䚟)로 되어 있는데, 《명산장왕향기》와 《고려사》에는 차라대(車羅大)로 되어 있다. 이는 모두 한사람이다. 홍복원(洪福源)과 함께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 또 3년에 걸쳐 잇달아 고려를 정벌해 광주(光州)ㆍ안성(安城)ㆍ충주(忠州)ㆍ현봉(玄鳳)ㆍ진원(珍原)ㆍ갑향(甲向)ㆍ옥과(玉果) 등의 성을 함락하였다. 《이상 모두 원사》
○ 차라대가 회군하자 산성과 해도로 들어가 버티었던 고려의 백성들이 모두 도로 육지로 나왔다. 차라대가 다시 나가자 고려 왕이 신하인 신집평(愼執平)을 사신으로 보내어 차라대를 만나 보게 하였다. 차라대가 말하기를,
“고려 왕이 나와서 군사를 맞이하고, 세자가 직접 몽고에 조회하면 군사를 파하겠다.”
하였다. 이에 고려 왕의 사신이 다시 말하기를,
“대병(大兵)이 돌아간 뒤로 우리나라에서는 오로지 명령하는 대로 따랐다.”
하니, 차라대가 말하기를,
“만약 명령대로 따랐다면 어찌하여 우리 군사를 많이 죽였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충주(忠州)를 도륙하고, 충주산성(忠州山城)을 공격하니, 산성에 있던 사람들이 월악신사(月岳神祠)로 올라가서 피란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리자 원나라 군사들이 신령스럽게 여겨서 물러갔다. 고려 왕이 다시 신하 김수강(金守剛)을 몽고에 사신으로 보내었는데, 김수강이 헌종을 따라서 화림성(和林城)으로 들어가 군사를 파하기를 애원하니, 헌종이 고려 왕이 육지로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김수강이 아뢰기를,
“짐승을 쫓을 때 활을 가지고 굴 앞을 막고 서 있을 경우에 그 짐승이 감히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헌종이 이에 차라대에게 회군하라고 명하였다. 《명산장왕향기》
○ 7년에 고종 44년 원나라에서 다시 차라대를 파견하여 고려로 가게 하였다. 차라대가 말하기를,
“왕이 직접 오라. 그러면 내가 군사를 돌리겠다. 그리고 왕자가 몽고로 들어가서 조회하면 영원히 후환이 없을 것이다.”
하니, 고려 왕이 말하기를,
“대군이 돌아가면 세자가 즉시 조회할 것이다.”
하자, 차라대가 이에 허락하였다. 《상동》
○ 8년 고종 45년 3월에 홍다구(洪茶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차라대를 따라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원사》
○ 원나라에서 차라대를 파견하여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내용으로 다시 고려 왕을 책하였다. 그러자 고려 왕이 이미 늙고 병들어서 자기 대신에 세손(世孫)인 왕희(王僖)와 신하 김보정(金寶鼎)으로 하여금 차라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 가게 하였다. 원나라 장수 여달수(余達愁)가 김보정에게 말하기를, “반드시 세자가 와야만 한다.” 하였는데, 세자가 끝내 가지 않았다. 그러자 여달수가 군사를 풀어 침략하였으며, 차라대가 여사(廬舍)를 불지르고 백성들을 마구 죽이면서 약탈하기를 더욱 심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 사람 조휘(趙暉) 등이 드디어 화주(和州) 이북의 땅을 들어 원나라에 항복하였다. 《명산장왕향기》
○ 9년에 고종 46년 고려 왕이 고려의 상(相) 선()을 살펴보건대, 선()은 바로 의(竩)를 잘못 쓴 것으로, 최의(崔竩)이다. 죽이고, 세자 왕전(王倎)으로 하여금 표문을 받들고 원나라로 가게 하였는데, 차라대가 갑자기 죽었다. 선이란 자는 최항(崔沆)의 아들이다. 고려에서는 상의 직위를 대대로 세습한다. 그러므로 최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대를 이어 고려의 상으로 있었는데, 모두 고려에 불충(不忠)하였다. 차라대의 뒤를 이어 군사를 거느린 자는 송길대왕(松吉大王)이라 하는데, 고려 강화도의 내성과 외성을 모두 헐면서 공사를 매우 촉박하게 독촉하여 성곽이 무너지는 소리가 마치 벼락이 치는 것과 같았다. 이에 고려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였다. 이해에 헌종이 붕어하고 원 세조(世祖)가 즉위하여 한창 남쪽으로 송(宋)나라를 공격하고 있었다. 고려의 세자 왕전이 중국 남쪽으로 가서 세조를 만나자, 세조가 놀라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고려는 만리 밖에 있는 나라로 당나라 태종이 친히 정벌하였는데도 복속시키지 못한 나라다. 그런데 지금 스스로 귀순해 왔으니, 함께 개평(開平)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동》
○ 원 세조(世祖) 중통(中統) 원년 경신이다. 원종(元宗) 원년 이보다 앞서 고려 왕 왕철이 세자 왕전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게 하였는데, 당시에 헌종이 한창 송나라를 공격하다가 합주(合州)에서 붕어하였다. 이에 원나라에서는 왕전을 머물러 있게 하고 고려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세조가 즉위하자, 염희헌(廉希憲)과 조양필(趙良弼)이 나아가 아뢰기를,
“고려가 비록 작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산을 의지하고 바다로 가로막혀 있어서 국가에서 용병한 지가 20년이 되었어도 아직도 신하로 복속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해 고려의 세자 왕전이 와서 조회하였는데, 마침 황제의 수레가 서쪽으로 가서 정벌하는 중이었기에 이곳 객관에 머물러 있은 지가 이미 3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궤하는 것이 아주 소략하고 박하여 그의 환심을 사지 못하였는바, 만약 하루아침에 그가 돌아가게 된다면 앞으로 다시는 원나라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숙소와 음식을 후하게 지급해 주고, 번왕(藩王)의 예로 대우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듣건대 그의 부왕이 이미 죽었다고 하니, 그를 세워 왕으로 삼아 돌려보내야만 합니다. 그럴 경우 그는 반드시 은덕에 감사해 하면서 신하로서의 직공(職貢)을 닦기를 원할 것인바, 이는 한 명의 군졸도 수고롭히지 않고 나라 하나를 얻는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옳게 여기고는 그 즉시 관소를 바꾸게 하였다. 그리고 3월에 세자를 책봉해서 고려국왕으로 삼은 다음 군사로 호위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서 고려에 나가 있는 군사를 회군하게 하고, 이어 고려 경내에 사면령(赦免令)을 내렸다. 《홍간속록(弘簡續錄)》
○ 4월에 다시 고려국 왕전에게 칙지를 내려서 유시하기를,
“짐은 천명을 공손히 받아 조종조들께서 이룩하신 아름다운 공렬을 이어받아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는바, 온 천하를 다 같이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음의 차이가 없다. 네가 정성을 보여옴으로써 이미 너를 고려국왕으로 책봉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지금 너와 변경의 장수가 보내온 글을 받아 보고 인하여 상하 사람들의 심정을 모두 알았는바, 짐의 마음이 몹시 민망스럽다.”
하였다. 왕전이 강화도에서 육지로 나갈 것이니 군마의 침입을 면하기를 요청하고, 또 포로로 잡혀간 고려 사람과 도망한 백성들을 모두 되돌려 보내 주기를 요청하니, 황제가 모두 따라 주었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군사를 철수시키고 이어 고려 경내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6월에 왕전이 그의 아들 영안공(永安公) 왕희(王僖)와 판사재사(判司宰事) 한즉(韓卽)을 파견하여 들어가서 황제가 즉위한 것을 축하하게 하였다. 그러자 국왕으로 책봉한 옥인(玉印)과 호부(虎符)를 내려 주었다. 이달에 또 고려에 조서를 내려 위무하였다. 《원사》
○ 2년 원종 2년 4월에 왕전이 들어가서 조회하였다. 6월에 왕전이 이름을 왕식(王禃)으로 바꾸고는 세자 왕심(王愖)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어서 아뢰게 하였다. ○ 7월에 만가노(萬家奴)를 안무고려군민 다루가치[安撫高麗軍民達魯花赤]로 삼은 다음 호부(虎符)를 하사하였다. ○ 8월에 고려 왕 왕식에게 옥대(玉帶) 하나를 하사하고, 시위장군(侍衞將軍) 패리찰(孛里察)과 예부 낭중(禮部郞中) 고일민(高逸民)을 파견하여 세자 왕심을 호위하고 고려로 가게 하였다. 10월에 황제가 아적미실(阿的迷失)과 초천익(焦天翼)을 파견하여 조서를 가지고 가서 전매 시장을 여는 일에 대해 유시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3년 원종 3년 정월에 제왕(諸王) 탑찰아(搭察兒)가 고려에다가 철야(鐵冶)를 세우기를 청하니, 황제가 따랐다. 고려 왕 왕식에게 역(曆)을 하사하였는데, 이 뒤에는 규례화하였다. 이에 왕식이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니, 너그러운 조서를 내려 답하였다. ○ 2월 갑신에 고려에서 술을 만들어 바치는 것을 면제해 주었다. 6월 을미에 여진(女眞)이 고려국 백성을 침범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고려의 사신이 오갈 적에는 관(官)에서 호송하게 하였으며, 파사부(婆娑府)의 둔전군(屯田軍)으로 하여금 압록강(鴨淥江)의 서쪽으로 옮겨 주둔하게 하여 바닷길을 막았다. ○ 8월에 고려의 사신 박륜(朴倫) 등이 돌아갔다. 황제가 고려 왕에게 서금(西錦) 3단, 간금숙릉(間金熟綾) 6단을 하사하였다. 10월에 왕식에게 조서를 내려 유시하기를, “백성들의 호적을 작성하여 군사를 내고, 양곡을 실어 보내 군수(軍需)를 도우라.” 하였다. 이달에 왕식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 병인에 조서를 내려서 고려가 기만한 죄를 꾸짖었다. 《이상 모두 상동》
○ 4년 원종 4년 2월에 왕식이 조서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사신을 꾸짖으니, 왕식이 표문을 올려서 백성들이 조금 안정되기를 기다려서 명을 따르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표문의 내용이 아주 간절하고 진실된 것을 보고는 그대로 허락하고, 조공하는 물품의 숫자 역시 그 힘에 맞게 하라고 명하였다. 3월부터 6월까지 왕식이 세 번 사신을 보내어 들어와 조공을 바쳤다. 황제가 왕식에게 양 5백 마리를 하사하였다. ○ 9월 경인에 고려와 상경(上京) 등처에 유시하여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과중하게 걷지 못하게 하였다. 11월 병술에 왕식이 역(驛)을 설치하고 호적을 작성하는 등의 일을 면제시켜 준 데 대해 신하 한취(韓就)를 보내어 표문을 올리면서 사례하였다. 이에 중통(中統) 5년의 역(曆)과 촉금(蜀錦) 1단을 하사하고, 이어 왕식에게 들어와서 조회하라고 명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지원(至元) 원년 원종 5년 정월 초하루 정축에 왕식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면서 진하하였다. 황제가 돌아가는 사신 편에 유시하여 왕식으로 하여금 경사(京師)에 와서 친히 조회하도록 명하였다. 4월에 서북의 제왕들이 백성을 이끌고 와서 귀부하자, 왕공(王公)과 군목(群牧)들로 하여금 해마다 상도(上都)에 모여 조회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또 필도치(必闍赤) 고을독(古乙獨)을 파견하여 왕식에게 들어와 조회하여 대대로 알현하는 예를 닦게 하였다. 5월에 왕식이 차국자좨주(借國子祭酒) 장일(張鎰)을 보내 고을독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서 황제를 알현하게 하였다. 6월에 왕식이 직접 조회하였다. 9월에 황제가 연호를 고쳐 중통 5년을 지원 원년으로 고치고는 낭중(郞中) 노득성(路得成)을 파견하여 사면령(赦免令)을 가지고 가서 왕식의 낭장(郞將) 강윤소(康允玿)에게 주어 고려에 반포하게 하였다. 10월에 왕식이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 11월에 등주(登州)와 화주(和州) 등지와 여진 사람들에게 고려의 경계에 들어가서 노략질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 12월에 왕식을 고려로 돌아가게 하였다. 《일하구문(日下舊聞)》에, “《고려사》에, ‘원종 5년 9월에 왕이 연경(燕京)에 이르러서 황제를 알현하자, 황제가 직접 잔치를 두 번 베풀었다. 10월에 왕이 만수전(萬壽殿)에서 하직 인사를 하자 황제가 낙타(駱駝) 10마리를 하사하였다.’고 하였다.” 하였다. 이해 봄에 왕식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로부터 세조 31년까지 고려에서 들어와 조공한 것이 모두 36번이었다. 《이상 모두 상동》
○ 3년 원종 7년 2월 계유에 심주(瀋州)를 만들어서 고려에서 항복해 온 백성들을 살게 하였다.
○ 당초 지원 1년에 고려 사람 조이(趙彜) 등이 말하기를,
“일본국(日本國)과 통호(通好)할 수 있으니, 명을 수행할 만한 사신을 뽑으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8월 정묘에 병부 시랑(兵部侍郞) 흑적(黑的)에게 호부(虎符)를 주어 국신사(國信使)에 충임하고, 예부 시랑(禮部侍郞) 은홍(殷弘)에게 금부(金符)를 주어 국신부사(國信副使)에 충임하고, 사의관(司議官) 백덕효선(伯德孝先) 등에게 국서(國書)를 주어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었는데, 국서에 대략 말하기를,
“짐이 즉위한 처음에 무고한 고려의 백성들이 오랫동안 변란에 시달렸기에 즉시 전쟁을 중지하도록 하고는 그 나라를 되돌려 주었으며,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에 고려의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감격해 하면서 와서 조회하였는데, 의리상으로는 비록 임금과 신하 사이지만 정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 같다. 이에 대해서는 아마도 왕의 임금과 신하들도 이미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는 짐의 동쪽 번국(藩國)이다. 일본국은 고려와는 아주 가깝게 있으며, 개국한 이래로 역시 가끔씩 중국과 통호하였다. 그런데 짐의 몸에 이르러서는 단 한 명의 사신이라도 보내어 통호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왕의 나라에서 잘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이에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여 국서를 가지고 가서 짐의 뜻을 고하게 하는 바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통호하면서 결연을 맺어 서로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용병(用兵) 하는 것을 어느 누구인들 좋아하겠는가. 왕은 이를 잘 생각하라.”
하였다. 그리고 또 고려에 조서를 내려서 원나라 사신을 일본까지 잘 인도해 가라고 하였다.
○ 12월에 왕식이 고려의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송군비(宋君斐)를 파견하여 예부 시랑(禮部侍郞) 김찬(金贊) 등과 함께 가서 조사(詔使) 흑적과 은홍 등을 인도하여 일본에 가게 하였는데, 일본까지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이상 모두 상동》
○ 4년 원종 8년 정월에 왕식이 송군비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흑적 등을 따라 들어와서 조회하게 하였다. 6월에 황제가, 왕식이 거짓말을 꾸며 대어 사신으로 하여금 일을 성사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되돌아오게 했다고 하면서, 다시 흑적과 송군비 등을 파견하여 조서를 내려 일본의 일을 왕식에게 맡기면서 기어이 일을 성사시키라고 효유하였다. 9월에 왕식이 기거사인(起居舍人) 반부(潘阜)와 서장관(書狀官) 이정(李挺)을 파견하여 국신사로 충임해서 고려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가게 하였다. ○ 이들이 일본에 6개월 동안을 머물러 있었으나 역시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이상 모두 상동》
○ 5년 원종 9년 정월에 왕식이 그의 동생 왕창(王淐)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게 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식이 거짓말로 속이고 있다고 하면서 면전에서 그 사실을 하나하나 들어 왕창을 심하게 꾸짖었다. 그러고는 다시 북경로총관(北京路摠管) 우야손탈(于也孫脫), 예부 낭중(禮部郞中) 맹갑(孟甲)을 파견해 조서를 가지고 가서 왕식에게 유시하게 하였다. 조서는 예문지에 상세하게 나온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태조(太祖)의 법제에 내속(內屬)한 국가는 모두 볼모를 보내고, 군사를 돕고, 군량을 수송하고, 역참을 설치하고, 호적을 작성하고, 장관(長官)을 두게 되어 있다. 태조 때에는 왕준(王綧)이 이미 들어와서 시위하였고 역참을 대충 설치하였으나, 나머지는 대부분 봉행하지 않았다. 이제 장차 송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보내줄 사졸과 전함(戰艦)의 숫자는 얼마나 되고, 수송할 군량은 제대로 비축하였는가? 그리고 관장을 두고 호적을 작성하는 등의 일에 대해 왕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에 묻는 바이다.”
하였다. 3월에 우야손탈 등이 고려에 도착하였다. 4월에 왕식이 고려의 문하시랑(門下侍郞) 이장용(李藏用)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서 우야손탈 등과 함께 원나라로 들어와서 조회하게 하였다. 5월에 황제가 이장용에게 칙서를 내려 이르기를,
“가서 너희 임금에게 속히 군사의 숫자를 사실대로 아뢰라고 유시하라. 장차 사람을 파견해서 감독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출동하는 군사들이 어느 지역으로 출동할 것인지에 대해 반드시 너희 나라에서 의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남송을 정벌하거나 혹 일본을 정벌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 임금은 마땅히 배 1천 척을 만들되, 4천 석 정도를 싣고 큰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를 만들어야 한다.”
하였다. 그러자 이장용이 아뢰기를,
“배를 만드는 일에 대해서는 마땅히 명대로 따르겠습니다만, 백성들이 얼마 없어서 아마도 기한 내에 만들 수 없을 듯합니다. 지난번에 신의 나라에는 4만 명의 군사가 있었으나, 30여 년에 걸친 전란에 죽어 지금은 단지 패자두(牌子頭), 오십호(五十戶), 백호(百戶), 천호(千戶)니 하는 유(類)는 명목만 있고 실제 군사는 없는 상태입니다.”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죽은 자가 있으면 태어나는 자가 있는 법이다.”
하자, 이장용이 아뢰기를,
“황제의 거룩하신 덕에 힘입어 군사가 원나라로 철수한 뒤에 태어나 자란 자는 지금 겨우 열 살밖에 안 되었습니다.”
하니, 황제가 또 이르기를,
“너희 나라에서 온 사람이 바다의 일에 대해서 말하기를, 송나라는 순풍이 불 경우 3일 만에 도달할 수가 있고 일본에는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배에다 쌀을 싣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먹으면서 가면 어찌 가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하고, 또 이장용에게 칙명을 내리기를,
“돌아가서 너희 임금에게 이 말대로 유시하라.”
하였다.
○ 7월에 고려가 신하 최동수(崔東秀)를 파견하여 와서 군사 1만 명과 배 1천 척을 만들었다고 말하였다.
○ 조서를 내려 도통령(都統領) 탈타아(脫朶兒), 무덕장군(武德將軍) 통령(統領) 왕국창(王國昌), 무략장군(武畧將軍) 부통령(副統領) 유걸(劉傑) 등을 고려에 사신으로 가게 하면서 고려에서 사신으로 온 최동수와 함께 가게 하였다. 8월에 원나라의 사신이 고려에 도착하자, 왕식이 승천부(昇天府)까지 나와 영접하였다. 대개 군사를 사열하고 배 만드는 일에 대해 효유하기 위해 사신으로 나간 것이다.
○ 탈타아(脫朶兒)를 파견하여 가서 흑산도(黑山島)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살펴보게 하였다. 이어 탐라(耽羅)에 명하여 별도로 배 1백 척을 만들어 가져다 쓸 수 있게 대기시키라고 하였다.
○ 9월에 왕식이 표문을 올려 반부(潘阜) 등이 일본에서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황제가 다시 흑적(黑的) 등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왕식에게 조서를 내려 중신(重臣)을 파견하여 사신들을 인도하여 호송하게 하였다. 12월에 왕식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신사전(申思全), 예부 시랑(禮部侍郞) 진정(陳井), 기거사인(起居舍人) 반부 등을 파견하여 국신사(國信使) 흑적 등을 따라서 일본에 가게 하였으며, 차예부 시랑(借禮部侍郞) 장일(張鎰)에게 표문을 받들고서 탈타아를 따라 들어와 조회하게 하였다.
○ 흑적 등이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자, 일본 사람들이 몰아내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대마도 사람 탑이즉(塔二卽)과 미이즉(彌二卽) 두 사람을 잡아서 돌아왔다. 《이상 모두 상동》
○ 6년 원종 10년 정월에 왕식이 대장군 강윤소(康允玿)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어 권신(權臣) 김준(金俊) 등을 주살하였음을 아뢰게 하였다.
○ 고려에 서금(西錦)을 하사하였다.
○ 3월에 왕식이 다시 신사전(申思全)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서 흑적 등을 따라 들어와 조회하게 하였다.
○ 6월에 고려의 김유성(金有成) 등에게 명하여 대마도에서 잡아 온 자를 일본으로 돌려보내게 하고, 중서성(中書省)으로 하여금 일본에 첩문(牒文)을 보내게 하였는데, 일본에서 회답하지 않았다. 김유성 등이 일본의 태재부(太宰府) 수호소(守護所)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 병신에 고려에서 세자 왕심(王愖)을 파견하여 들어와 조회하게 하였다. 이에 황제가 왕식에게 옥대(玉帶) 하나를 하사하고, 왕심에게는 금 50냥을 하사하였으며, 따라온 관원들에게는 은폐(銀幣)를 차등이 있게 하사하였다.
○ 7월에 황제가 명위장군(明威將軍) 도통령(都統領) 탈타아(脫朶兒), 무덕장군(武德將軍) 통령(統領) 왕국창(王國昌), 무략장군(武畧將軍) 부통령 유걸(劉傑)을 파견하여 탐라(耽羅) 등처의 도로를 살펴보게 하였다. 그리고 왕식에게 조서를 내려 관원을 보내어 이들을 인도하여 탐라로 가게 하였는데, 누군가가 탐라에서 바닷길로 가면 송나라와 일본을 쉽게 갈 수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살펴보게 한 것이다. 8월에 세자 왕심이 와서 조회하면서, 고려의 신하가 제 마음대로 왕식을 폐위시키고 왕식의 동생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임금으로 세운 일에 대해 아뢰었다. 이에 조서를 내려 사신 알타사불화(斡朶思不花)ㆍ이악(李諤) 등을 파견하여 고려에 가서 그 연유를 상세히 묻게 하였다. 9월에 추밀원(樞密院)ㆍ어사대(御史臺)에서 아뢰기를,
“세자 왕심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군사를 출동시키면 제가 군사 3천 명을 준비할 수 있고, 5개월 치의 군량을 준비할 수 있으며, 중국 군사가 국경을 넘어 들어갈 때 제가 함께 가면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황제가 그렇게 여겼다.
○ 기미에, 세자 왕심에게 특진 상주국 동안공(特進上柱國東安公)을 제수하였다. 무진에 왕심에게 칙서를 내려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그 국난(國難)에 나아가도록 하였다. 왕심이 동안공(東安公)에 제수한 것을 사양하니, 특진 상주국만 제수하였다.
○ 초불화(抄不花)에게 명하여 고려로 가서 정벌하라고 명하였는데, 병이 나서 가지 못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몽가도(蒙哥都)를 파견하여 초불화를 대신하게 하였다.
○ 신미에 칙서를 내려 관군만호(管軍萬戶) 송중의(宋仲義)에게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 알타사불화와 이악이, 고려의 형부 상서 김방경(金方慶)이 와서 권국사(權國事) 왕창의 표문을 올리면서 전 국왕 왕식이 병에 걸렸다고 한 것을 가지고 아뢰자, 동생 왕창으로 하여금 국사를 임시로 맡아보게 하였다.
○ 10월에 황제가 왕식을 폐위하고 왕창을 임금으로 세운 것이 임연(林衍)이 한 짓이라고 여겼다. 이에 중헌대부 병부시랑(中憲大夫兵部侍郞) 흑적(黑的), 치래로총관부 판관(淄萊路摠管府判官) 서세웅(徐世雄)을 파견하여, 왕식ㆍ왕창ㆍ임연에게 조서를 내려서 12월에 함께 대궐로 나와 직접 실정을 진달하여 시비를 가리게 하였다. 또 국왕(國王) 두련가(頭輦哥)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으로 가서 고려를 압박하고 기일 안으로 오지 않을 경우에는 즉시 주모자를 끝까지 치죄하고 군사를 진격시켜 섬멸하게 하였으며, 조벽(趙璧)을 동경(東京)의 행중서성(行中書省)으로 명하고, 이어 조서를 내려 고려국 군민들에게 유시하였다. 11월에 고려의 도통령 최탄(崔坦) 등이 임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서경(西京)의 50여 성을 이끌고 들어와 귀부하였다. 이에 단사관(斷事官) 별동와(別同瓦)를 파견하여 역말을 타고 달려가 왕준(王綧)과 홍다구(洪茶邱)가 관할하고 있는 백성 가운데 군사로 편성되어 있는 자들을 동경으로 오게 하여 추밀원(樞密院)에 소속시키게 하였는데, 모두 3천 3백 명이 왔다. 고려의 서경 도통(西京都統) 이연령(李延齡)이 군사를 더 보내 주기를 요청하니, 망가도(忙哥都)를 파견하여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달려가게 하였다. 추밀원의 신하들이 고려를 정벌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였다. 처음에 마형(馬亨)이 말하기를,
“고려는 본디 기자(箕子)가 봉해졌던 지역으로, 한(漢)나라나 진(晉)나라에서 모두 군현으로 삼았었다. 지금 비록 와서 조회하고는 있으나, 그 속마음은 헤아리기가 어렵다. 그러니 군사를 정제하고서 길을 빌리되, 일본에 쳐들어간다는 것으로 명분을 세우고는 형세를 틈타 고려를 습격해 우리의 군현으로 정하여야 한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지금 이미 전란의 단서가 생겨났으니, 군사를 파견해 정벌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만에 하나라도 이기지 못할 경우에는, 위로는 국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아래로는 사졸들의 목숨을 잃을 것이다. 고려에서 혹 표문을 올려 사실대로 말하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고, 공물 숫자를 줄여 주어, 그 백성들을 위무해서 우리의 덕화를 흠모하게 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 남송을 다 평정하고 나서 고려에서 다른 마음을 품으면, 군사를 고려로 돌려 주벌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전 추밀원 경력(樞密院經歷) 마희기(馬希驥) 역시 말하기를,
“지금의 고려는 옛날의 신라ㆍ백제ㆍ고구려 세 나라를 통합한 나라입니다. 대체로 번진(藩鎭)은 권한이 분산되면 제어하기가 쉽고, 제후가 강성하면 신하로 삼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니 저들 주(州)와 성(城)의 군사의 많고 적음을 조사한 다음 이들을 분리시켜 둘이 되게 하여 나라를 나누어서 다스리게 하되, 두 나라의 권력과 세력이 서로 엇비슷하게 하여 서로 견제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런 뒤에 서서히 고려를 도모할 계책을 의논한다면, 쉽사리 조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흑적 등이 고려에 도착하자, 왕식이 조서를 받고 다시 즉위한 다음, 예부 시랑 박걸(朴杰)을 파견하여 흑적 등을 따라 들어가서 표문을 받들고 조회하게 하였다. 12월에 왕식이 직접 경사(京師)에 와서 조회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7년 원종 11년 정월 갑인에 고려 왕 왕식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지난번에 조서를 받들고서 신이 이미 다시 즉위하였습니다. 이제 종자(從者) 7백 명을 데리고 경사로 들어가서 알현하겠습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서 종자 4백 명만 거느리고 들어오고, 나머지 종자는 서경(西京)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 조서를 내려서 내속(內屬)한 고려의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고치고, 자비령(慈悲嶺)으로 경계를 삼게 하였다. 정사에 망가도(忙哥都)를 살펴보건대, 《원사》 본기(本紀)에는 망가도가 몽가(蒙哥)로 되어 있다. 안무고려사(按撫高麗使)로 삼은 다음 호부(虎符)를 차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고는 조서를 내려 고려의 요속(僚屬)과 군민들에게 유시하기를, 조서는 예문지에 상세하게 나온다.
“임연(林衍)이 제멋대로 국왕을 바꾸었으니, 어떻게 주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경공 왕창은 본래 마지못해 그렇게 한 것이었기에 너그럽게 용서하여 준다. 그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체 죄를 묻지 않겠다.”
하였다.
○ 2월에 왕식이 와서 조회하였다. 왕식이 황자(皇子)인 연왕(燕王)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구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이르기를,
“그대는 한나라의 군주이니, 짐만 만나 보면 된다.”
하였다. 왕식이 세자 왕심(王愖)을 만나게 해 주기를 청하자, 황제가 따랐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왕식에게 유시하기를,
“그대는 뒤늦게 내부(內附)하였으므로 반열이 제왕(諸王)의 아래이다. 우리 태조 때 도호(都護)가 먼저 내부하자 즉시 그의 반열을 제왕의 위에 있게 하였으며, 아사란(阿思蘭)이 뒤에 내부하자 반열을 아래에 있게 하였다. 그러니 경은 이를 잘 알라.”
하였다.
○ 군사를 파견하여 왕식이 귀국하는 데 호위하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고려의 관리와 군민 등에게 유시하였다. 조서는 예문지에 상세하게 나온다. 당초에 칙지를 내려 두련가(頭輦哥)의 행성(行省)을 서경에 주둔하게 하고, 망가도(忙哥都)와 조양필(趙良弼)을 안무사(安撫使)에 충임하여 왕식과 함께 개경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다시 행성을 개경으로 들어가게 하고, 탈타아(脫朶兒)를 고려의 다루가치로 충임하고 안무사(安撫司)를 혁파하였다.
○ 세자 왕심(王愖)이 수조(隨朝) 및 공주(公主)에게 장가들기를 청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고, 아버지를 따라서 귀국하라고 명하였다.
○ 4월에 동경의 행상서성(行尙書省) 군대를 서경에 가까이 가서 주둔하게 하고, 철철도(徹徹都) 등을 파견하여 왕식의 신하 정자여(鄭子璵) 등과 함께 행서성의 차자(箚子)를 가지고 고려국의 영공(令公) 임연(林衍)을 소환하게 하였는데, 사신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임연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제멋대로 영공(令公)의 자리를 이어 받자, 고려의 시랑(侍郞) 홍문손(洪文孫), 상서 송종례(宋宗禮)가 임유무와 임연의 사위 최종소(崔宗玿)를 살해하였고, 임유무의 동생 임유인(林惟䄄)은 자살하였습니다. 그런데 임연의 도당인 배중손(裵仲孫) 등이 다시 남은 무리를 끌어 모은 다음 왕식의 서족(庶族) 승화후(承化侯)를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승화후의 이름이 온(溫)이다. 왕으로 삼고는 진도(珍島)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군을 왕경의 서쪽 성문에 주둔시키고, 사람을 파견해 임연의 처자식을 체포하였다. 행성(行省)이 왕식과 함께 강화도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개경으로 옮기고 이어 조서를 내려서 위무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왕식이 그 의논에 따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8월에 개경에 들어가 거처하게 되자, 비로소 행성의 의논에 따랐다. ○ 《원사》 1백 59권 조벽열전(趙檗列傳)에는, “조벽을 중서좌승(中書左丞)으로 옮겨 제수하고 국왕 두련가(頭輦哥)와 함께 동경등로중서성(東京等路中書省)의 일을 보게 하니, 조벽이 군사를 평양으로 모았는데, 이때 임연이 이미 죽었다. 이에 조벽이 두련가와 더불어 의논하기를, ‘고려가 강화도로 옮겨 있은 지 이미 몇 해가 되었습니다. 고려가 겉으로는 비록 공손하게 말하면서 신하가 되어 조공을 바치고 있으나, 속으로는 험고함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권신(權臣)으로 하여금 꺼리는 바가 없이 제멋대로 임금을 몰아내게 한 것입니다. 지금 비록 임연이 죽기는 하였지만 고려 왕은 실로 죄가 없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고려 왕을 호위해 돌아가, 고려 왕으로 하여금 다시 개경에서 나라를 회복하게 한다면, 군사를 쉬게 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상책입니다.’ 하고, 인하여 사신을 보내어 아뢰자, 황제가 그 말대로 하였다. 이때 함께 고려로 간 자들이 고려의 미인을 얻어 나누어 차지하였는데, 조벽이 세 사람을 차지하게 되었으나, 모두 되돌려 보냈다. 군사가 돌아오자, 조벽을 중서 우승(中書右丞)으로 올렸다.” 하였다. ○ 《원사》 1백 78권 송도열전(宋衜列傳)에는, “황제가 조서를 내려 국왕 두련가와 조벽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서 고려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송도를 행성 원외랑(行省員外郞)으로 삼아 조서를 가지고 가서 강화도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평양으로 옮기게 하였다. 송도가 복명하자, 아주 도타이 위로하고, 이어 옷감을 하사하였다.” 하였다. 6월에 왕식이 사람을 보내어 조정에서 도망친 군사가 승화후(承化侯)와 함께 삼별초(三別抄)의 군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고하였다. 세자 왕심이 다시 말하기를,
“반란을 일으킨 군사들이 강화도를 차지하고 있으니, 군대를 이끌고 수로와 육로로 나아가 공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왕식이 다시 반란군이 모두 숨어 버렸다고 보고하니, 세자 왕심이 다시 말하기를,
“반란군이 창고를 노략질하고 호적을 불사른 다음 바다로 도망쳐 들어간 것입니다.”
하였다. 행성에서 강화도로 사람을 보내 염탐해 보니, 백성들이 모두 도망쳐 섬 안이 텅텅 비었고, 섬에서 동남쪽으로 약 40리 정도 되는 지점에서 반란군들이 배를 탄 채 바람이 불기를 기다려 도망치려고 하고 있었다. 이에 즉시 내안(乃顔)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서 추격하게 하였다. 7월에 승상(丞相) 안동(安童) 등이 말하기를,
“두련가 등이 대탁(大托)과 망고대(忙古䚟)를 파견하여, 아해(阿海)로 하여금 군사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왕경에 주둔하면서 고려의 동태를 살펴보게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니, 드디어 아해를 안무사(安撫使)로 삼았다. 11월에 중서성의 신하가 고려에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를 설치하자고 말하였다. 이에 흔도(忻都)ㆍ사추(史樞)를 봉주등처경략사(鳳州等處經略使)로 삼은 다음 호부(虎符)를 차게 하고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서 금주(金州)에서 둔전하게 하였다. 또 홍다구(洪茶邱)에게 명하여 옛날에 거느리던 백성 2천 명을 거느리고서 둔전하게 하고, 아랄첩목아(阿剌帖木兒)를 부경략사로 삼아 총괄하게 하였으며, 아해(阿海)의 군사는 파하였다. ○ 《원사》 1백 47권 사추열전(史樞列傳)에는, “사추는 연(燕)의 영청(永淸) 사람이다. 지원(至元) 6년(1269)에 고려 사람 김통정(金通精)이 진도(珍島)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였는데, 한 해가 넘도록 함락하지 못하였다. 7년에 사추를 소용대장군 봉주경략사(昭勇大將軍鳳州經略使)로 올렸다. 사추가 이르러서 장수들과 보좌관들에게 말하기를, ‘적의 형세가 한창 치성하니, 힘으로 이기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찌는 듯한 무더위에 바다 기운이 올라와 활이 느슨해지고 칼날이 무디어져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기치를 많이 펼쳐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한 다음, 내가 제군들과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몰래 들어가서 적의 소굴을 뒤흔들 경우, 반드시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적과 싸워서 크게 격파하고, 그 지역을 모두 평정하였다.” 하였다. 윤11월에 세자 왕심이 고려로 돌아갔다. 조서를 내려 왕식에게 유시하였는데, 배신(陪臣) 원부(元傅) 등이 망녕되이 국왕 두련가(頭輦哥)가 맡고 있는 행성 관원들의 잘못에 대해 주달한 것과, 고려가 사사로이 남송 및 일본과 교통한 것에 대해 유시하였다. 그리고 또 지난해에 말한 군사를 모으고 배를 만드는 일이 지금까지 이룩해 놓은 실적이 없음에 대해 유시하고, 또 이 뒤로 혹 남송을 먼저 정벌하거나 일본을 먼저 정벌할 경우, 어느 쪽이든 간에 병마와 전함, 군량을 일찌감치 조처하여야 한다고 유시하였다. 이달에 또 왕식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지난번에 신사(信使)를 파견하여 일본과 통문(通問)하였는데, 뜻밖에도 일본에서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참으로 그들을 좋은 말로 개유하기가 어려운바, 이에 대해서는 경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에 장차 일본을 경략(經略)하고자 해서 유사에게 신칙해 군사를 뽑아 둔전(屯田)을 하게 하면서 진격할 계획을 하였으니, 뒷날 그대 나라에서 군량을 수송하느라 고생하는 것을 거의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 사신을 파견해 조서를 가지고 가서 일본을 부르는 뜻을 미리 알리게 하였다. 그러니 경은 온 정성과 생각을 다 쏟아 방략을 강구해 기어이 일을 성사시켜서 짐의 뜻에 부응하기 바란다.”
하였다. 지난날 임연(林衍)이 변란을 일으켰을 적에 백성들이 동요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조서를 내려 쓰다듬고 어루만져 주었다.
○ 12월에 또 비서감(祕書監) 조양필(趙良弼)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 《원사》 2백 8권 일본열전(日本列傳)에는, “일본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이르기를, ‘대개 듣건대 왕자(王者)는 온 천하가 그의 나라라고 한다. 고려는 짐과 더불어서 이미 한집안이 되었는데, 왕의 나라는 실로 고려와 이웃한 나라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신사(信使)를 보내어 수호(修好)하였는데, 변경인 대마도를 맡고 있는 관리가 억류하고서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 뒤 대마도에서 잡아 온 일본 사람 두 명은 유사에게 신칙해서 잘 위무하게 한 다음 서신을 주어 귀국으로 돌려보냈으나, 적막하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계속해서 통문하려고 하였으나, 곧바로 고려의 권신(權臣) 임연(林衍)이 변란을 일으킨 탓에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왕 또한 어찌 이 일을 인연해서 사신을 보내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면 혹 이미 사신을 보내었는데도 중도에서 길이 막힌 것인가?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일본은 본디 예를 아는 나라라고 칭하는데, 왕의 신하들이 어찌 함부로 그렇게 하였을 리가 있겠는가. 근래에 이미 임연을 주멸하고 왕위를 다시 회복하였으며, 백성들을 안집시켰다. 이에 특별히 소중대부(少中大夫) 비서감(祕書監) 조양필(趙良弼)을 국신사로 삼아 국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가게 하였다. 그러니 일본에서도 즉시 사신을 파견해서 그와 함께 내보내라. 어진 나라를 가까이하고 주변 나라와 잘 지내는 것은 나라의 정책에 있어서 아름다운 일이다. 혹시라도 주저하여서 무력을 쓰는 일이 생기게 될 경우, 누구인들 좋아서 그렇게 하겠는가? 왕은 잘 헤아려서 조처하라.’ 하였다.” 하였다.
○ 왕식에게 조서를 내려 일본에 사신을 보내 통호하도록 하면서 유시하기를,
“짐이 생각건대, 일본은 옛날부터 중국과 통호하면서 실로 아주 가깝게 지내었다. 그러므로 일찍이 경에게 조서를 내려 일본으로 가는 사신을 잘 인도하여 데려가서 신의와 화목을 닦게 하였는데, 일본의 변경을 맡고 있는 관리가 가로막아 마침내 짐의 마음을 일본왕에게 분명하게 효유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에 임연의 변고로 인하여 다시 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 이미 그대 나라가 안정되었기에 소중대부 비서감 조양필을 국신사로 충임하여 보내어 기어이 일본에 도착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이어 홀림적(忽林赤)ㆍ왕국창(王國昌)ㆍ홍다구(洪茶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서 조양필을 바닷가까지 호송하여 가게 하고, 국신사가 귀국할 때까지 우선은 금주(金州) 등처에 주둔해 있게 하였다. 그러니 그들이 필요로 하는 군량은, 경이 전임관을 금주로 파견하여 공급하게 하고, 아울러 금주 근방에 있는 선척을 모두 한곳으로 모아 금주에서 쓸 수 있도록 대비하게 하되, 시일을 지체하여 모자라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8년 원종 12년 정월에 왕식이 고려의 추밀사(樞密使) 김련(金練)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서 알현하게 하면서 결혼(結婚)을 요청하였다.
○ 병술에 고려안무사(高麗安撫使) 아해(阿海)가 진도(珍島)에 쳐들어갔다가 역당(逆黨)을 만나 많은 군사를 잃었다. 중서성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첩자들의 탐지에 의하면 진도의 양식이 얼마 안 있으면 다 떨어질 것이라 하니, 약세를 틈타 공격하여야 합니다.”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허락하지 않고, 험고한 요해처를 순시하면서 항상 대비하게 하였다.
○ 2월 갑진에 홀도답아(忽都答兒)에게 명하여 조서를 가지고 가서 고려의 임연의 여당인 배중손(裵仲孫)에게 유시하게 하였다.
○ 3월 기묘에 중서성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배중손이 여러 군사들이 모두 물러나서 주둔한 뒤에 내부(內附)하겠다고 청하였는데, 흔도(忻都)가 그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지금은 전라도를 얻어 살면서 조정에 직속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거짓으로 꾸며 대면서 시일을 끄는 것이라고 하면서 윤허하지 않았다. 4월 임진에 고려봉주경략사(高麗鳳州經略司) 흔도가 말하기를,
“반역한 신하 배중손이 사신을 오랫동안 머물게 하면서 험고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고 있으니, 홀림적(忽林赤)ㆍ왕국창(王國昌)과 함께 길을 나누어 진격해서 토벌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황제가 따랐다. 그러고는 고려에 명하여 군사를 뽑아서 진도(珍島)를 정벌하게 하였다.
○ 5월에 흔도가 사추ㆍ홍다구와 함께 진도의 역적들을 크게 무찌르고, 승화후(承化侯)를 참수하였다. 그의 여당인 김통정이 탐라(耽羅)로 도망쳤다.
○ 6월에 일본통사(日本通事) 조개승(曹介升) 등이 상언하기를,
“고려에서 빙 돌아가는 길로 신사(信使)를 인도하여 데려 가는데, 그 이외에 다른 지름길이 있어서 순풍을 만날 경우에는 반나절이면 일본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사신이 나갈 경우에는 감히 함께 가지 못하겠으나, 대군이 나아가 정벌할 경우에는 향도(嚮導)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니, 황제가, 그와 같다면 생각해 보겠다고 일렀다.
○ 7월에 위협에 못 이겨 반란군을 따른 진도(珍島)의 백성들이 와서 항복하였다.
○ 왕식이 상장군 정자여(鄭子璵)를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진도를 평정한 것을 사례하였다. 세자 왕심이 상서 우승(尙書右丞) 송분(宋玢), 군기감(軍器監) 설공검(薛公儉) 등 관원들의 맏아들 28명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시위하였다. 8월에 홀림적이 진변(鎭邊)의 합포현(合浦縣)에 있는 둔소(屯所)로 나아갔다. 9월에 왕식이 통사(通事) 별장(別將) 서칭(徐稱)을 파견하여 선무사(宣撫使) 조양필(趙良弼)을 호송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 조서를 내려 왕국창(王國昌)에게 고려의 의안군(義安郡)에 주둔하여 후원군이 되게 하였다.
○ 계해에 세자 왕심이 하직하고서 귀국하였는데, 국왕인 왕식에게 서금(西錦)을 하사하고, 너그러운 조서를 내려 유시하였다.
○ 11월에 왕식이 추밀원사(樞密院使) 이창경(李昌慶)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서 혼인을 허락해 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9년 원종 13년 정월에 왕식이 별장 백거(白琚)를 파견하여 장탁(張鐸) 등 12명과 함께 표문을 받들고 들어가서 알현하게 하였다. 세자 왕심이 고려의 상서 우승 송분(宋玢)과 그의 아버지인 상장군 송완례(宋完禮)가 임유무(林惟茂)를 토벌한 실상을 들어 중서성에 그들의 공을 말하였다. 낭중(郞中) 불화(不花)와 마린(馬璘)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전선(戰船)의 공급과 군량을 수송하는 일에 대해 유시하였다.
○ 신사에 봉주(鳳州)의 둔전(屯田)을 염주(鹽州)와 백주(白州) 두 주로 옮겼다.
○ 2월 초하루 경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간 조양필이 서장관(書狀官) 장탁(張鐸)을 일본 사람 26명과 함께 경사(京師)로 보내었는데, 이들이 경사에 이르러서 알현하기를 청하였다.
○ 왕식이 일본에 서신을 보내어 일본으로 하여금 원나라와 통호하게 하였다.
○ 3월 을축에 중서성에 칙지를 내려 일본 사신을 속히 되돌려 보내는 일을 의논하라고 하였다. 이에 안동(安童)이 말하기를,
“조양필이 금주(金州)에 있는 군사를 다른 곳으로 옮겨서 일본으로 하여금 망녕되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의 생각에는 금주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것은 저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로, 다시 이들을 옮겨 주둔하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니 다만 일본에서 온 사신에게 ‘금주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탐라(耽羅) 때문에 잠시 동안 설치한 것이니 일본에서는 의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개유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황제가 좋다고 하였다.
○ 5월에 고려 왕 왕식이 또 서신을 일본에 보내어 일본으로 하여금 원나라와 통호하게 하였는데, 모두 회보하지 않았다.
○ 조서를 내려서 탐라(耽羅)와 제주(濟州)를 빼앗는 일을 의논하라고 하였다.
○ 6월에 서경(西京)에 속한 성의 여러 다루가치와 볼모로 와 있던 김일(金鎰) 등을 귀국시켰다.
○ 갑오에 고려에서 기근이 들었다고 알려 오자, 동경에 있는 쌀 2만 석을 보내어 진휼하였다. 신해에 고려 왕 왕식이 탐라에 있는 나머지 역적들을 토벌하기를 청하였다. 11월 기사에 둔전군 2천 명, 중국 군사 2천 명, 고려 군사 6천 명을 동원하고, 이어 무위군(武衛軍) 2천 명을 보태어 탐라를 정벌하였다.
○ 중서성의 신하와 추밀원의 신하가 의논 올리기를,
“만약 일본을 먼저 정벌할 경우에는 일본이 어떻게 나올지를 알 수 없는바, 아마도 뒷말이 있을 듯합니다. 그러니 먼저 탐라를 평정한 뒤에 일본이 따르는가 안 따르는가를 보고서 정벌하는 일을 서서히 의논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탐라 국왕이 일찍이 와서 조근(朝覲)하였는데, 지금 고려의 역적들이 탐라의 임금을 축출하고 성을 차지하고는 반란하고 있으니, 의리상 먼저 군사를 들어 이들을 쳐야 합니다.”
하였다.
○ 12월 신축에 제왕(諸王) 홀라출(忽刺出)이 고려의 국경으로 가서 도망친 백성들을 잡아들였는데, 고려의 다루가치가 그 사실을 아뢰자, 조서를 내려서 고려의 백성들이 아직 안집되지 않았으니 그 일을 파하도록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10년 원종 14년 정월에 경략사 흔도(忻都)ㆍ사추(史樞) 및 홍다구(洪茶邱) 등에게 명하여 크고 작은 병선 1백 8척을 거느리고 가서 탐라의 적도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 《원사》 1백 54권 정온열전(鄭溫列傳)에는, “지원 9년(1272)에 정온을 회원대장군 우위부도지휘사(懷遠大將軍右衛副都指揮使)로 삼은 다음 조서를 내려서 몽고, 한인, 여진, 고려의 여러 절부군(節部軍) 1만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 탐라를 정벌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하였다.
○ 2월에 고려 왕이, 원나라 군사들이 탐라를 정벌할 적에 명령을 내려서 백성들을 노략하고 포로로 잡아가는 것을 금지시키고, 무기를 스스로 만들게 해 주기를 청하니, 황제가 따랐다.
○ 4월에 경략사 흔도가 홍다구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갔다. 탐라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김통정(金通精)을 사로잡은 다음, 조서를 받들어서 처형하였다.
○ 6월 무신에 경략사 흔도 등의 군사가 탐라에 이르러서 그곳의 백성들을 위무하여 안정시켰다. 조서를 내려서 질리백(迭里伯)을 탐라국 초토사(耽羅國招討使)로 삼고, 윤방보(尹邦寶)를 부초토사로 삼았다.
○ 탐라를 토평한 다음, 그 지역에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를 세우고, 진변군(鎭邊軍) 1천 7백 명을 주둔시켰으며, 공부(貢賦)로 해마다 모시포(毛施布) 1백 필을 바치게 하였다. 초토사(招討司)는 뒤에 군민도다루가치총관부[軍民都達魯花赤摠管府]로 바꾸고, 다시 또 군민안무사(軍民安撫使)로 바꾸었다.
왕식이 고려의 대장군 김흔(金忻)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면서 제주를 공격하여 격파하였음을 아뢰었다.
○ 9월 임진에 중서성의 신하가 아뢰기를,
“고려 왕이 여러 차례 ‘소국은 지역이 협소한데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흉년이 들었으니, 생권군(生券軍)을 동경에 주둔시켜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서 북경(北京) 지방의 경계 지점에 군영을 두게 하고, 이어 칙령을 내려서 동경로(東京路)에 있는 군량미 2만 석을 운반하여 고려를 진휼하게 하였다.
○ 고려의 다루가치 초천익(焦天翼)이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상 모두 상동》
○ 11년 원종 15년 3월 기묘에, 조서를 내려서 농상(農桑)을 권장하라는 내용으로 고려 왕에게 유시하고, 이어 안무고려군민 총관(安撫高麗軍民摠管) 홍다구에게 명하여 농사짓는 상황을 점검하게 하였다.
○ 천호(千戶) 기공직(綦公直)에게 금부(金符)를 내려 고려로 가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전선(戰船)을 만드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 경인에 봉주 경략사(鳳州經略使) 흔도, 고려군민 총관 홍다구에게 칙령을 내려 둔전군(屯田軍)과 여진군(女眞軍) 및 수군(水軍) 도합 1만 5천 명과 크고 작은 전선 도합 9백 척을 거느리고 가서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다.
○ 출속탑팔(朮速搭八)과 살출합(撒朮合)을 파견하여 조서를 가지고 고려로 가서 유시해 군사 5천 6백 명을 뽑아 일본을 정벌하는 데 돕게 하였다.
○ 금주초토사(金州招討司)를 만호부(萬戶府)로 고쳤다.
○ 5월 병신에 황녀(皇女)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을 고려의 세자 왕심에게 시집보냈다.
○ 7월에 고려의 추밀원 부사 기온(奇蘊)이 표문을 올리어 국왕인 왕식이 훙하였음을 고하였다.
○ 고려에서 표문을 올리면서 또 세자 왕심이 효성스럽고 근실해서 뒷일을 맡을 만하다고 말하였다. 이에 동지상도유수사사(同知上都留守司事) 장환(張煥)에게 칙령을 내려 왕심을 책봉해서 고려국왕으로 삼게 하였다.
○ 조서를 내려서 고려국왕의 종족 및 대소 관원과 백성들에게 효유하였는데, 그 대략에,
“국왕 왕식이 살았을 적에 세자인 왕심이 후사를 이을 만하다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이에 지금 왕심으로 하여금 작위를 승습하여 고려국왕이 되게 하였다. 그러니 그에 소속되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절제(節制)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8월에 세자 왕심이 고려로 돌아가서 왕위를 승습하였다. 9월에 고려에서 제안후(齊安侯) 왕숙(王淑)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서 사은하였다. 11월에 황녀(皇女)가 고려의 도성에 입경하였다. 왕심이 다시 판합문사(判閤門事) 이신손(李信孫)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들어와서 사은하였다. 12월에 흑적(黑的)을 고려의 다루가치로 삼고, 이익(李益)은 교체시켜 돌아오게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살펴보건대, 《원사》 열전을 보면, 이익은 지원 8년(1271)에 행성(行省)의 다루가치가 되었다.
[주D-001]포리대야(蒲里帒也) : 포리대완(蒲里帒完)ㆍ포리대(蒲里帶)ㆍ포도(蒲桃) 등으로도 표기된다.
[주D-002]합신(合臣) : 합거(合車)ㆍ합지길(哈只吉)ㆍ합적길(合赤吉)ㆍ합제제(合齊齊)ㆍ합진(合嗔)ㆍ합진(哈眞) 등으로도 표기된다.
[주D-003]착고여(着古歟) : 《원고려기사》에는 저고여(著古歟), 《고려사》ㆍ《고려사절요》ㆍ《동사강목》에는 저고여(著古歟)로 표기되어 있다.
[주D-004]12월에 …… 암살당하였다 : 저고여 피살 사건(著古歟被殺事件)을 말한다. 고려에 공물을 징수하러 왔던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몽고로 돌아가다가 고종 12년 정월에 함신진(咸新鎭) 즉, 지금의 의주(義州)에서 누군가에게 암살당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는 고려에서 암살한 것이 아니라 여진(女眞)의 별장(別將)인 우가하(亏哥下)가 고려와 몽고가 가까이 지내는 것을 싫어하여 암살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에서는 후일 이것을 고려를 침입하는 구실로 삼았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550쪽》
[주D-005]금호부(金虎符) : 주군(州郡)의 군사를 동원할 때 차는 부(符)이다.
[주D-006]개주(開州) : 지금의 봉황성(鳳凰城)이다.
[주D-007]살례탑(撒禮搭) : 《원사》에는 철아태(撤兒台)ㆍ철리태(撤里台)ㆍ융리태(隆里台)ㆍ찰라태(札刺台)로, 《원고려기사》에는 철리답(撤里答)ㆍ철리탑화리(撤里塔火里)로, 《동국이상국집》에는 철리타(撤里打)ㆍ사타(沙打)ㆍ사타리(沙打里)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살례탑은 몽고의 장군으로 고종 18년(1231)에 고려를 칠 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략하고 남하하여 개경(開京)을 포위하였다. 그 뒤 고종 19년에 고려에서 강화 천도를 단행하고 항쟁할 태세를 보이자 스스로 원수(元帥)가 되어 재차 침입하였다가 처인성(處仁城)에서 김윤후(金允侯)에 의해 사살되었다.
[주D-008]홍복원(洪福源) : 홍대순(洪大純)의 아들로 몽고에 붙어 고려를 괴롭혔다.
[주D-009]동생인 회안공(懷安公) 왕정(王侹) : 《고려사》에는 종실(宗室) 회안공(淮安公) 왕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그 당시에 일부러 왕의 동생으로 가칭(假稱)하여 보낸 것인 듯하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555쪽 주》
[주D-010]다루가치[達魯花赤] : 점령 지역 내의 민정(民政)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몽고의 관직으로, 진수자(鎭守者), 단사관(斷事官), 지방 장관 등을 뜻한다. 다루가치에는 점령한 지역의 백성들을 직접 맡아 다스리던 다루가치, 국사(國事) 전반에 걸쳐 간섭하던 다루가치 두 종류가 있는데, 전자는 고종 18년(1231)에 살례탑이 고려를 정벌하였을 적에 설치하였으며, 후자는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한 뒤인 원종 11년(1270)에 설치하였다가 충렬왕 4년(1278)에 폐지하였다. 몽고에서 이들을 설치한 것은 고려에 대한 철저한 내정 간섭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다루가치는 임금의 잘못을 충고도 하고, 고려에 나와 있는 원나라 관원과 고려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을 해결하기도 하였으며, 원나라에 죄를 지은 고려 사람들을 처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나라 조정의 명령을 받아서 행한 것으로, 현대의 총독(摠督)처럼 독자적으로 직권을 행사하지는 못하였다.
[주D-011]해도(海島) : 강화도(江華島)를 말한다. 몽고와 강화한 뒤 고려는 몽고의 계속되는 요구 조건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에 당시의 권신(權臣)이었던 최이(崔怡)의 주장으로 수전(水戰)에 약한 몽고 군사와 항전(抗戰)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 6월 16일에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강화도는 이때부터 강도(江都)라고 일컫게 되었다.
[주D-012]야별초(夜別抄) : 별초(別抄)는 용사(勇士)들로 이루어진 선발군(選拔軍)이란 뜻으로, 그 시초는 최우(崔瑀)가 도둑을 막기 위해 설치한 데서 나왔다. 그 뒤 숫자가 점차 불어나자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나뉘어졌으며, 몽고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군사들로 이루어진 신의군(神義軍)과 합해 삼별초(三別抄)라 불렀다.
[주D-013]동경(東京) : 지금의 요양(遼陽)이다.
[주D-014]동하(東夏) : 금나라 말기에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세운 동진국(東眞國)을 말한다.
[주D-015]은부(銀符) : 은부(銀符)는 백호(百戶)가 차는 부이다.
[주D-016]어머니 상 : 이 당시에 왕태후(王太后) 유씨(柳氏)가 훙하였다.《東史綱目 第10下》
[주D-017]아들 왕준(王綧) : 왕준은 고종의 아들이 아니라 신안공(新安公) 왕전(王佺)의 종형(從兄)으로, 왕의 아들이라고 가칭(假稱)한 것이다. 왕준은 몽고의 장수 오야이를 따라 몽고의 수도인 화림(和林)에 가서 태종을 본 뒤 요동으로 돌아와 홍복원(洪福源)의 집에 우거하였다. 그러다가 홍복원이 죽은 뒤에는 안무고려군민 총관(安撫高麗軍民摠管)이 되어 요동 지방에 가 있던 고려 사람들을 지배하면서 심주(瀋州) 즉 지금의 봉천(奉天)에 있으면서 종신토록 귀국하지 못하였다.
[주D-018]염주(鹽州) : 지금의 황해도 연안(延安)이다.
[주D-019]야고(也古) : 야호(也虎)ㆍ야굴(也窟)ㆍ야홀(也忽) 등으로도 표기된다.
[주D-020]동주(東州) : 지금의 강원도 철원(鐵原)이다.
[주D-021]춘주(春州) : 지금의 강원도 춘천(春川)이다.
[주D-022]천룡(天龍) : 지금의 여주(驪州) 지방을 말하는 듯하다.
[주D-023]대이주(大伊州) : 대이천(大伊川)의 잘못이다. 대이천의 위치는 미상이다.
[주D-024]고화주(古和州) : 지금의 영흥(永興)이다.
[주D-025]화림성(和林城) : 몽고의 고비 사막 서남쪽에 있다. 돌궐(突厥) 이래로 추장(酋長)들이 있었던 곳이며, 원나라 태조 역시 이곳에 도읍하였다. 화령(和寧)이라고도 한다.
[주D-026]홍다구(洪茶邱) : 홍복원(洪福源)의 둘째 아들로 본명은 홍준기(洪俊奇)이고 다구(茶邱)는 그의 자(字)이다. 원나라 세조가 일찍이 자(字)로 홍준기를 불렀으므로 보통 홍다구로 칭해진다. 그의 아비인 홍복원의 뒤를 이어 몽고의 세력에 빌붙어서 오랫동안 조국인 고려를 괴롭혔다.
[주D-027]화주(和州) 이북의 땅 : 화주는 지금의 영흥(永興)으로,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말한다. 이를 계기로 몽고에서 이곳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두고 조휘(趙暉)를 총관으로, 탁청(卓靑)을 천호(千戶)로 삼았다.
[주D-028]합주(合州) :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합천현(合川縣)이다.
[주D-029]상도(上都) : 여기서는 화림성(和林城)을 말한다.
[주D-030]필도치(必闍赤) : 몽고의 직명으로 문사(文史)를 주관하는 자, 문서를 맡은 자, 또는 문서를 베끼는 자를 뜻한다. 고려에서는 고려 고종 때 최이(崔怡)가 정권을 잡고 정방(政房)을 두었을 적에 그의 심복으로서 붓을 들고 인사 행정에 종사하던 문사(文士)를 말한다.
[주D-031]6월 : 《고려사》ㆍ《고려사절요》ㆍ《원고려기사(元高麗紀事)》에는 8월로 되어 있다.
[주D-032]강윤소(康允玿) : 《고려사》 권26 원종세가(元宗世家)와 권123 강윤소전(康允紹傳)에는 강윤소(康允紹)로 되어 있다.
[주D-033]심주(瀋州)를 …… 하였다 : 심주는 지금의 봉천(奉天)이다. 이 당시에 봉천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는 몽고에 포로로 잡혀갔거나 항복한 백성, 유민(流民) 등의 고려 백성들이 많이 살아서 마치 고려의 영지(領地)와 같았다. 이에 몽고에서는 고종 28년에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을 안무고려군민총관(安撫高麗軍民摠管)으로 삼아 이들을 관할하였으며, 그 뒤에는 또 충선왕(忠宣王)을 봉하여 심양왕(瀋陽王)으로 삼아 이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569쪽》
[주D-034]문하시랑(門下侍郞) : 《고려사》와 《동사강목》에 의하면, 원종 9년 정월에 이장용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문하시중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주D-035]승천부(昇天府) : 강화의 대안(對岸)인 해창포(海倉浦) 부근이다.
[주D-036]흑산도(黑山島) : 대흑산도를 말한다. 대흑산도는 당시 고려와 송나라와의 해상 교통에 있어서 중심지로, 몽고에서 이곳으로 가는 길을 살펴보게 한 것은 송나라의 경략이 그 목적이었다.
[주D-037]진정(陳井) : 《고려사》ㆍ《고려사절요》에는 진자후(陳子厚)로 되어 있다.
[주D-038]강윤소(康允玿) …… 하였다 : 김준(金俊)이 최이(崔怡)의 후계자인 최의(崔竩)를 죽이고 권력을 잡아 세도를 부리다가 임연(林衍)과 알력을 빚어 원종 9년에 피살되었다.
[주D-039]태재부(太宰府) : 일본 구주(九州)의 북안(北岸)에 있다. 《동사강목》에, “일본 서해도(西海道) 축전주(筑前州)에 태재부를 두었는데, 대도독부(大都督府)라고도 한다. 서북쪽으로 박라(博羅)까지 3리 떨어져 있으며, 소이전(小二殿)이라고도 부른다.” 하였다.《東史綱目 第11下》
[주D-040]왕식을 …… 일 : 김준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임연(林衍)이 원종(元宗) 10년에 원종을 폐위(廢位)시켜 태상왕(太上王)이라 하고,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왕으로 삼았다. 그 뒤 몇 달 만에 몽고의 간섭으로 안경공을 다시 폐위시켰으며, 임연은 몽고의 입조(入朝) 요구에 울화병이 나서 죽었다.
[주D-041]알타사불화(斡朶思不花) : 《고려사》ㆍ《고려사절요》ㆍ《동사강목》에는 알탈아불화(斡脫兒不花)로 표기되어 있다.
[주D-042]몽가도(蒙哥都) : 《고려사》ㆍ《고려사절요》ㆍ《동사강목》에는 몽가독(蒙哥篤)으로 표기되어 있다. 망가도(忙哥都)ㆍ몽가(蒙哥) 등으로도 표기한다.
[주D-043]동녕부(東寧府) : 원나라에서 서경(西京)에 두었던 관청이다. 원종 10년(1269)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의 기관(記官)으로 있던 최탄(崔坦) 등이 난을 일으켜 북계(北界)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 서해도(西海道) 6성을 들어 원나라에 귀부하자, 원 세조가 이곳에 동녕부를 설치한 다음 최탄을 동녕부 총관으로 삼아 자비령 이북을 원나라 영토로 편입했다. 그 뒤 동녕로총관부(東寧路摠管府)로 개칭되었다가 이를 돌려달라는 고려의 끊임없는 요청에 따라 충렬왕 16년(1290)에 폐지하고 그 지역을 고려에 되돌려 주었다.
[주D-044]철철도(徹徹都) : 《동사강목》에는 저지두(諸之豆)로 표기되어 있다.
[주D-045]배중손(裵仲孫) …… 들어갔습니다 : 원종 11년에 원종이 강화도에서 나와 개성으로 환도할 때 삼별초(三別抄)의 영수로 있던 배중손이 이에 따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강화에서 반란을 일으켜 승화후 왕온(王溫)을 왕으로 추대하고는 개경에 대해 적의를 표하는 한편 몽고에 항전했다. 그 뒤 이탈자가 생겨 방어가 어려워지자 군사를 진도(珍島)로 옮겨 항전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김방경(金方慶)을 파견하여 토벌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음 해에 몽고 군사의 협력을 얻어 겨우 평정하였다. 그 뒤 김통정(金通精)이 남아 있던 삼별초의 여당들을 거느리고 제주도로 들어가서 항거하였으나, 얼마 뒤에는 모두 평정되었다.
[주D-046]아랄첩목아(阿剌帖木兒) : 영녕공(永寧公) 왕전(王倎)의 아들로서 홍다구와 같이 요양 지방의 고려인들을 다스렸다.《김상기, 高麗時代史, 493쪽 주》
[주D-047]금주(金州) : 지금의 경상도 김해(金海)이다.
[주D-048]합포현(合浦縣) : 지금의 경상도 마산포(馬山浦)이다. 환주(還珠)라고도 한다.
[주D-049]생권군(生券軍) : 남송(南宋) 때에 시작된 제도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특별한 급료를 지급받는 군대를 가리킨다.
[주D-050]천호(千戶) : 원나라 때 위소(衛所)에 두었던 관직명으로, 군사 1천 명을 관할한다. 천호에는 행군천호(行軍千戶), 둔전천호(屯田千戶) 등이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정신문화연구원, 1991, 738쪽 주》
[주D-051]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 원 세조의 딸로 고려 제25대 왕인 충렬왕(忠烈王)의 비(妃)가 된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이다.
.고려(高麗) 4
○ 지원(至元) 12년 충렬왕(忠烈王) 원년 5월 계사에 고려 왕 왕심에게 조서를 내려서 탐라(耽羅)에 가 있는 진도(珍島)의 나머지 무리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 7월에 흑적(黑的)이 원나라 조정으로 돌아왔다. 11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왕심에게 유시해 관직의 이름을 바꾸게 하였다. 왕심이 대방후(帶方侯) 왕징(王澂)을 파견해 관원의 자제(子弟) 20명을 거느리고 들어와 시위(侍衛)하게 하였다. 석말천구(石抹天衢)를 부다루가치[副達魯花赤]로 삼았다. 《이상 모두 원사》
○ 13년 충렬왕 2년 정월 기축에 고려국에 칙서를 내려 관직이 있는 자의 자제들을 볼모로 보내게 하였다. ○ 7월에 왕심이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어서 송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 9월 을사에 고려 왕이 첨의중찬 김방경의 공을 상달하자, 호부(虎符)를 주었다. ○ 11월에 왕심이 판비서시사(判祕書寺事) 주열(朱悅)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게 해 이름을 왕춘(王賰)으로 바꾸었다고 아뢰었다. 《이상 모두 상동》
○ 14년 충렬왕 3년 정월 무술에 고려의 김방경 등이 난을 일으켰다. 고려 왕에게 명하여 그의 죄를 다스리게 하고, 이어 흔도ㆍ홍다구에게 명하여 군사를 정돈해 방어하게 하였다. 《상동》
○ 15년 충렬왕 4년 정월에 왕춘이, 다루가치 석말천구(石抹天衢)의 임기가 찼으나 아직 교체되지는 않았으니 다시 3년을 더 유임시켜 달라고 청하자, 황제가 따랐다. 동정원수부(東征元帥府)가 상언하기를,
“고려 시중(侍中) 김방경이 그의 아들 김수(金㥅)ㆍ김훤(金愃)ㆍ김순(金恂), 사위 조변(趙卞) 등과 몰래 결사대 4백 명을 양성하고, 갑옷과 무기 등을 숨겨두고, 전선을 만들고 군량미를 쌓아 두어 난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습니다. 이에 김방경 등을 체포해서 증거를 조사해 사실임을 밝혀낸 다음, 이미 여러 해도(海島)로 유배 보내었습니다. 고려가 우리에게 귀부한 지 얼마 안 되어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일본(日本)을 정벌하러 갔다가 돌아온 군사 2천 7백 명을 징발하고, 장리(長吏)를 두어 충청ㆍ전라 등 여러 곳에 주둔하게 해서 외방 오랑캐를 진무하여, 이로써 백성들을 안정시켜야만 합니다. 그리고 다시 병사들에게 명하여 소와 농기구를 마련하게 해서 내년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계획을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상동》
○ 16년 충렬왕 5년 정월 계축에 고려국에 칙령을 내려 대회애주(大灰艾州)ㆍ동경(東京)ㆍ유석(柳石)ㆍ패락(孛落) 4역(驛)을 설치하게 하였다.
○ 6월 갑신에 칙령을 내려 전선(戰船)을 만들어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고려에서 배를 만드는 재목이 산출되니 고려에 가서 만들게 하였으며, 고려 왕에게 그에 대한 편부(便否)를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 8월 기해에 해적(海賊) 김통정(金通精)이 죽었다. 그의 조카인 김온(金溫)을 잡았는데, 유사(有司)가 법대로 논해 처형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이르기를,
“김통정이 이미 죽었는데, 김온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특별히 그 죄를 용서해 주라.”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17년 충렬왕 6년 5월에 고려 왕 왕춘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하면서 양식 1만 석을 꾸어 주기를 요청하니, 황제가 따랐다. 전선(戰船) 3천 척을 만들게 하고, 탐라에 칙령을 내려 재목을 마련해 보내 주게 하였다. 7월에 고려에 처음으로 역참(驛站)을 두었는데, 백성들에게 식량이 부족하자 한 해 치의 식량을 주도록 명하였으며, 이어 사신들이 왕래할 때 음식물을 지공하도록 요구하지 못하게 하였다. ○ 8월 무진에 왕춘이 와서 조회하였으며, 또 군사 3만 명을 더 보태어 일본을 정벌하라고 말하였다. ○ 10월 계유에 왕춘에게 개부의동삼사 중서좌승상 행중서성사(開府儀同三司中書左丞相行中書省事)를 더해 주었다. 12월 신미에 고려 왕 왕춘이 군사 1만 명, 수수(水手) 1만 5천 명, 전선 9백 척, 양곡 10만 석을 거느리고 일본을 정벌하러 나갔다. 홍다구 등에게 전쟁 도구를 주고, 고려국에 갑옷과 전투복을 주었다. 그리고 일본을 정벌하러 가는 여러 도의 군사들에게, 고려의 길을 취해서 나아가되 백성들을 동요시키지 말라고 유시하였다.
고려의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을 정일본도원수(征日本都元帥)로 삼고, 밀직사 부사(密直司副使) 박구(朴球)ㆍ김주정(金周鼎)을 관고려국정일본군만호(管高麗國征日本軍萬戶)로 삼았으며, 이들 모두에게 호부(虎符)를 하사하였다. 계유에 고려 왕 왕춘을 중서 우승상(中書右丞相)으로 삼았다. 《이상 모두 상동》
○ 18년 충렬왕 7년 정월 임자에 고려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이 변경을 침입해 왔다고 말하면서 군사를 보내어 추격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금주(金州)의 포구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 5백 명을 보내 주었다.
○ 3월에 왕춘이, 본국의 필도치(必闍赤)가 공문서에 쓰는 글자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낭중(郞中)과 원외랑(員外郞)을 각 1명씩 제수해 그를 보좌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 무진에, 일본을 정벌하러 가는 선사군(善射軍)과 고려의 화장 수군(火長水軍)에게 초(鈔) 4천 정(錠)을 내려 주었다. 신미에, 고려 왕 왕춘이 공주에게 장가들었다는 이유로 조칙(詔勅)을 내릴 때 ‘부마(駙馬)’ 두 자를 더 써 주기를 요청하니, 그러라고 하였다. 병술에 일본국을 정벌하러 가는 군사들이 길을 떠났다. 을해에 칙령을 내려 탐라에서 만든 전선을 홍다구에게 주어 일본을 정벌하러 나가게 하였다. 5월 임자에 탐라국에서 올해에 조공으로 바칠 백저(白紵)를 면제하게 하였다. 탐라국다루가치[耽羅國達魯花赤] 탑아적(塔兒赤)에게 칙령을 내려 고려의 전라도 등에서 사냥을 하여 백성들을 소요시키는 일을 금지하게 하였다. 6월 임오에 탐라를 지키는 군사들에게 힘써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라고 명하였다. 일본행성(日本行省)의 신하가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대군(大軍)은 현재 거제도(巨濟島)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해서 섬 사람을 잡았는데, 그자가 말하기를, ‘태재부(太宰府)에서 서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예전에 수군(戍軍)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징발되어 싸우러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비어 있는 틈을 타 들어가 유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군사에 대한 일은 경들이 스스로 잘 헤아려서 조처하라.”
하였다. 임진에 고려 왕이 본국에 역(驛) 40개를 둔 뒤로 백성들이 잔폐해 졌다고 말하자, 칙령을 내려 20개의 참(站)으로 줄이게 하고, 이어 말 값으로 8백 정(錠)을 주게 하였다. 8월 임진에 흔도ㆍ홍다구ㆍ범문호(范文虎)ㆍ이정(李庭)ㆍ김방경(金方慶) 등 제군(諸軍)의 전선(戰船)이 파도를 만나 난파되어 상황이 아주 불리하게 되었다. 이에 나머지 군사들이 고려의 경내로 되돌아왔는데, 살아난 자가 열에 두세 명이었다. ○ 《원사》 2백 8권 일본열전(日本列傳)에는, “패졸(敗卒) 우창(于閶)이 일본에서 도망쳐 돌아와 말하기를, ‘관군(官軍)이 6월에 바다로 들어가 7월에 평호도(平壺島)에 도착하여 오룡산(五龍山)으로 옮겨 있었다. 8월 1일에 바람이 세게 불어 배가 난파되었고, 5일에 범문호(范文虎) 등 여러 장수들이 각자 튼튼하고 좋은 배를 잡아 타고 사졸 10여 만 명을 산 아래에다 버려둔 채 돌아갔다. 남아 있던 군사들이 장 백호(張百戶)란 자를 추대하여 주수(主帥)로 삼았는데, 그를 장 총관(張摠管)이라고 불렀다. 한창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서 돌아가려고 하고 있던 차에 7일날 일본 군사들이 와서 그들과 싸웠는데, 모두 죽었으며, 살아남은 자 2, 3만 명은 모두 포로로 잡혔다. 9일에 팔각도(八角島)에 도착하였는데, 일본 사람들이 몽고와 고려, 한인들을 모두 죽였다. 그러고는 새로 군대에 편입된 자 가운데 중국 사람들만 죽이지 않고 살려서 노예로 삼았는데, 바로 나와 같은 사람들이다.’ 하였다. 대개 행성(行省)의 관원들이 일을 의논하면서 서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모두 군사들을 버리고서 되돌아온 것이다. 오래 뒤에 막청(莫靑)과 오만오(吳萬五)란 자가 역시 일본에서 도망쳐 돌아왔다. 군사 10만 명 가운데 돌아온 자는 이들 3명뿐이다.” 하였다. 9월에 탐라를 지키는 군사를 더 보태었다. 이어 고려에 명해서 전투 도구를 지급해 주게 하였다.
○ 11월 갑자에 고려국의 금주(金州) 등지에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두어 일본을 제어하게 하였다.
○ 을사에 군기감(軍器監)에 칙령을 내려 무기를 고려에 보내어 바닷가의 군현에 나누어 주게 하였다. 고려 왕이 바닷가에 있는 성(城)을 완전하게 하여 일본을 방비하게 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상 모두 상동》
○ 19년 충렬왕 8년 정월에 왕춘이 일본에서 바닷가의 군현들을 노략질하면서 집을 불태우고 백성들을 잡아갔다고 하면서, 도리첩목아(闍里帖木兒) 휘하의 몽고 군사 5백 명을 파견하여 금주(金州)에 주둔하게 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또 따라 주었다. ○ 7월에 고려 왕이 스스로 전선 1백 50척을 만들어 일본을 정벌하는 데 돕겠다고 청하였다. 9월 임신에 고려ㆍ탐라ㆍ평란(平灤) 및 양주(楊州)ㆍ융흥(隆興)ㆍ천주(泉州)에 칙령을 내려 크고 작은 배 3천 척을 만들게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20년 충렬왕 9년 정월 을축에 일본을 정벌하는 데 필요한 군량을 미리 준비하게 하였는데, 고려로 하여금 20만 석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아탑해(阿塔海)를 전과 같이 정동행중서성승상(征東行中書省丞相)으로 삼았다. 4월에 고려 왕에게 명하여 행성(行省)에 나아가서 일본을 정벌하는 일을 조처하게 하였다. 갑오에 고려 왕 왕춘이 몽고 사람에게 행성의 일을 함께 조처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계묘에 왕춘을 정동행중서성좌승상에 제수하고, 이어 부마 고려국왕(駙馬高麗國王)으로 삼았다. 5월에 정동행중서성을 세우고 고려국왕이 아탑해와 함께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일본을 정벌하러 가는 고려국의 군사들에게 옷과 갑옷을 내려 주었다. 《원사》 91권 백관지(百官志)에, “정동등처행중서성(征東等處行中書省)이다. 지원(至元) 20년에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다. 고려국왕에게 명하여 성(省)을 설치하고 군사를 일으키는 데 필요한 제반 사항을 맡아보게 하였다. 군사가 돌아오자 성을 혁파하였다.” 하였다. 갑술에 고려국권농관(高麗國勸農官) 4명을 설치하였다. 《상동》
○ 21년 충렬왕 10년 정월에 탐라국안무사(耽羅國安撫使)를 두었다.
○ 2월 신사에, 고려에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배를 만드는 것을 혁파하였다. 4월 무신에 고려 왕 및 공주가 세자 왕원(王謜)과 함께 와서 조회하였다. 7월에 탑라적(塔刺赤)이 말하기를,
“두련가(頭輦哥) 국왕(國王)이 고려에 나아가 주둔하면서 왕속(旺速) 등 부(部)의 사람 4백 명을 징발하여 갔었는데, 두련가가 어제 되돌아왔습니다. 그러니 탐라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는 의당 다른 군사를 파견하여 교대시켜 주둔하게 해야 합니다.”
하자, 백안(伯顔) 등이 의논올리기를,
“고려의 군사 1천 명을 탐라에 주둔시키고 남아서 지키고 있던 군사 4백 명은 놓아 보내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황제가 따랐다. 《이상 모두 상동》
○ 22년 충렬왕 11년 4월 신유에, 탐라에서 만든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배 1백 척을 고려에 내려 주었다. 10월 정묘에 추밀원에 칙령을 내려 교주(膠州)ㆍ내주(萊州) 등 여러 곳의 조선(漕船)과 고려(高麗)ㆍ강남(江南) 등 여러 곳의 해선(海船)을 헤아려 보고 강회(江淮) 지방의 민선(民船)을 임대하여 일본을 정벌하는 데 대비하게 하였다. 11월 무인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에 가서 군사 1만 명, 배 6백 50척을 징발하여 일본을 정벌하는 것을 도우라고 고하게 하였다. 이어 부근 지역에다 명령을 내려 배를 많이 만들게 하였다. 계사에 칙령을 내려 강회(江淮) 지방에 있는 쌀 1백 만 섬을 조운하되, 바다를 건너 싣고 가서 고려의 합포(合浦)에다가 쌓아 두게 하였다. 이어 동경(東京)과 고려로 하여금 각각 10만 석씩의 곡식을 저축해서 일본을 정벌하는 데 대비하게 하였다. 여러 군사들은 내년 3월에 차례대로 출발해서 8월에 합포(合浦)에 모두 모이게 하였다. 《상동》
○ 23년 충렬왕 12년 5월에 칙령을 내려 탐라에서 수자리 살고 있던 사람 4백 명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9월 임진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의 포로를 바쳤다. 10월 임술에 고려에서 또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의 포로 16명을 바쳤다. 《상동》
○ 24년 충렬왕 13년 5월에 고려 왕 왕춘에게 행상서성평장사(行尙書省平章事)를 제수하였다. 임자에 고려 왕이 군사를 더 파견해서 내안(乃顔)을 정벌하기를 청하니, 5백 명을 보내었다. 《상동》
○ 25년 충렬왕 14년 2월 기묘에 고려 왕 왕춘을 다시 정동행상서성좌승상으로 삼았다. 《상동》
○ 26년 충렬왕 15년 정월 무신에 참지정사(參知政事) 장수지(張守智),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이천영(李天英)을 파견하여 고려로 가서 일본을 정벌하는 데 필요한 군량을 마련하기를 독촉하게 하였다. 4월 기유에 요양성(遼陽省) 관내에 기근이 들자, 고려에서 쌀 6만 석을 꾸어 진휼하게 하였다. 계유에 고려에서 은(銀)이 많이 산출되므로 공인(工人)을 고려로 내보내어 인근 백성들을 징발해서 제련한 다음 관가로 실어들이게 하였다. 9월 기묘에 고려국유학제거사(高麗國儒學提擧司)를 두었는데, 종5품 벼슬로 하였다. 《상동》
○ 27년 충렬왕 16년 정월 병인에 합단(合丹)의 잔당들이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고려에 명하여 탐라(耽羅)에 수자리 살고 있는 군사 1천 명을 징발해서 토평하게 하였다. 정묘에 고려 왕이 말하기를,
“신이 예전에 경사(京師)에서 숙위하고 있을 적에 임연(林衍)이 반란을 일으켜 국내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대동강(大同江) 이북에 살고 있는 고려의 백성들을 모두 원나라의 백성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신은 이들을 다시 고려로 돌려주어 고려의 백성을 삼게 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황제가 따랐다. 《원사》 1백 31권 백첩목아열전(伯帖木兒列傳)에, “합단(哈丹)이 다시 고려의 경내로 들어가자 백첩목아가 회원대장군 상만호(懷遠大將軍上萬戶)로서 명을 받들고 철리첩목아(徹里帖木兒)와 함께 나아가 토벌하였다.” 하였다. 2월 초하루 을해에 고려전라주도만호부(高麗全羅州道萬戶府)를 설치하였다. 4월 계사에 태부(太傅) 여옥로(呂玉魯)가 말하기를,
“알자(斡者)에 소속된 역걸열(亦乞烈)을 불러 모아 이제 6백 21명을 모았는데 이들로 하여금 고려의 백성들과 함께 둔전(屯田)하게 하였으니, 그들의 식량을 지급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요양(遼陽)의 행성(行省)에 칙령을 내려 사실을 조사해 본 다음 지급해 주게 하였다. 5월 기사에 철리철목아(徹里鐵木兒)에게 소속된 여진(女眞)ㆍ고려(高麗)ㆍ거란(契丹)ㆍ한(漢)의 군사들에게는 지세(地稅)를 수송하는 이외의 부역을 모두 면제시키도록 명하였다. 《상동》
○ 28년 충렬왕 17년 5월 계축에 상서성(尙書省)의 일을 혁파하고 모두 중서성(中書省)으로 귀속시켰다. 정동행상서성좌승상 부마 고려국왕(征東行尙書省左丞相駙馬高麗國王) 왕춘을 정동행중서성 좌승상(征東行中書省左丞相)으로 고쳐 제수하였다. 기미에 고려국왕 왕춘이 그의 아들 왕원(王謜)을 세자로 삼기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서 왕원을 고려 왕세자로 삼고 특진 상주국(特進上柱國)에 제수한 다음 은인(銀印)을 하사하였다. 10월 신사에 조서를 내려 고려국왕 왕춘과 공주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에게 예궐하게 하였다. 계미에 고려국에 기근이 들자, 쌀 20만 곡(斛)을 주었다. 12월 을축에 요양(遼陽)ㆍ홍관(洪寬)ㆍ여진부(女眞部)에 기근이 들자 고려의 곡식을 빌려서 진휼하였다. 정묘에 고려국 압록강 서쪽에 있는 19개의 역(驛)이 내안(乃顔)의 반란을 겪는 동안에 마축(馬畜)을 모두 약탈당하였으므로, 소 각 40마리씩을 지급해 주었다. 《상동》
○ 29년 충렬왕 18년 2월 을해에 총관고려여진한군만호부(摠管高麗女眞漢軍萬戶府)를 설치하고 은인(銀印)을 나누어 주었다. ○ 합단(哈丹)이 바다 남쪽을 건너서 고려를 습격하였다. 제왕(諸王) 탑출(塔出)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토벌하였다. ○ 무인에 조서를 내려 고려 왕 왕춘에게 태보(太保)의 직책을 더해 주었다. 윤6월 신해에 고려에 기근이 들자 고려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곡식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쌀 10만 석을 하사하였다. 8월 무오에 고려ㆍ여진의 계수관(界首官)인 쌍성(雙城)에서 기근이 들었다고 고해 오자, 고려 왕에게 칙령을 내려 해운(海運)한 곡식 가운데서 덜어 내어 진휼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고려사》 세가(世家)에,
“충렬왕 18년 8월에 낭장(郞將) 진양필(秦良弼)을 파견하여 주인(呪人)과 무녀(巫女)를 데리고 원나라로 가게 하였는데, 황제가 이들을 불러서 간 것이다. 9월에 황제가 자단전(紫檀殿)에 나와 세자를 인견하면서 주인과 무녀 등으로 하여금 전 안으로 들어오게 하니, 주인과 무녀가 황제의 팔다리를 잡고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황제가 웃었다.”
하였다. 《일하구문(日下舊聞)》 ○ 《일하구문》에는 또, “곤전(昆田)이 살펴보건대, 고려의 세자는 바로 충선왕(忠宣王) 왕장(王璋)으로, 일찍이 경사(京師)에다가 만권당(萬卷堂)을 지은 자이다.” 하였다.
○ 30년 충렬왕 19년 2월에 왕춘이 사신을 파견하여 이름을 다시 왕거(王昛)로 고쳤다고 아뢰면서 공신의 호를 내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제서(制書)를 내려 추충선력정원공신(推忠宣力定遠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다. ○ 살펴보건대, 《원사》 본기를 보면 29년 2월에 공신의 호를 내려 준 것으로 되어 있는바, 고려전(高麗傳)과는 서로 다르다. ○ 또 고려의 첨의부(僉議府)를 첨의사(僉議司)로 올리고 2품의 도장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니, 황제가 따라 주었다. 신해에, 고려에 조서를 내려 연해(沿海)에다가 수역(水驛)을 설치하게 하였는데, 탐라에서 압록강의 입구까지 모두 11개소를 두고, 홍군상(洪君祥)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다. ○ 11월에 고려 왕 왕거가 들어와 조회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31년 충렬왕 20년 4월 갑오에 성종(成宗)이 즉위하였다. 을사에 고려 왕 왕거에게 은 3만 냥을 하사하였다.
○ 5월 무인에 황고(皇姑) 고려 왕 왕거의 비(妃)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을 책봉해서 안평공주(安平公主)로 삼았다.
○ 고려 왕이 상언하기를,
“탐라는 조종조 때부터 본국에 신하로 복속하였는데, 역당(逆黨) 임연(林衍)이 토평된 뒤에는 조정(朝廷)에 직속되었으니, 예전대로 다시 고려에 복속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이것은 작은 일이다. 그러니 탐라를 도로 고려에 복속시키라.”
하였다. 이로부터 드디어 다시 고려에 복속되었다. 《이상 모두 상동》
○ 성종(成宗) 원정(元貞) 원년 충렬왕 21년 4월 을사에 고려 왕 왕거에게 은 3만 냥을 하사하였다. ○ 윤4월 무진에 애아적(愛牙赤)을 파견하여 고려에 저축되어 있는 양곡을 파악하게 하였다. 6월 임자에 고려 왕 왕거가 태사 중서령(太師中書令)으로 삼아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상 모두 상동》
○ 2년 충렬왕 22년 7월에 고려의 첨의사(僉議司)를 올려 2품 아문(衙門)으로 삼았다. ○ 임오에 특진 상주국 고려 왕세자 왕원(王謜)에게 의동삼사 영도첨의사사(儀同三司領都僉議司事)를 제수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대덕(大德) 원년 충렬왕 23년 정월에 왕이 공주, 세자와 함께 만세산(萬歲山) 광한전(廣寒殿)에서 황제를 모시고 잔치하였다. 《일하구문(日下舊聞)》
○ 2월 계묘에 도리태(闍里台)에게 예속된, 새로 부속시킨 고려ㆍ여진ㆍ한(漢)의 군사를 심주(瀋州)에 살게 하였다. 11월 계해에 고려 왕 왕거가 늙었음을 고하면서 작위를 아들 왕원에게 물려주게 하기를 요청하였다. 정축에 조서를 내려 고려 왕세자 왕원을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좌승상 부마 상주국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駙馬上柱國高麗國王)으로 삼고, 이어 왕거에게 관작을 더 제수해 추충선력정원보절공신 개부의동삼사 태위 부마 상주국 일수왕(推忠宣力定遠保節功臣開府儀同三司太尉駙馬上柱國逸壽王)을 삼았다. 《원사》
○ 2년 충렬왕 24년 정월에 화림(和林)에 수자리 살고 있는 고려ㆍ여진ㆍ한의 군사에게 초(鈔) 3만 정(錠)을 하사하였다. 7월에 고려 왕 왕원이 명령을 제멋대로 내려 함부로 죽이자 조서를 내려 중서 우승(中書右丞) 양염룡(楊炎龍), 첨추밀원사(僉樞密院事) 홍군상(洪君祥)을 파견해 왕원을 불러들여 입시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그의 아버지인 왕거에게 국정을 통괄하게 하였다. 《상동》
○ 3년 충렬왕 25년 정월에 왕거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을 바쳤다. 승상 완택(完澤) 등이 말하기를,
“세조 때 어떤 사람이 혹 고려에서 참람되게 성(省)ㆍ원(院)ㆍ대(臺)를 설치하였다고 말하므로 조서를 내려서 폐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고려에서 마침내 첨의부(僉議府)ㆍ밀직사(密直司)ㆍ감찰사(監察司)로 이름을 고쳐 설치하였습니다. 지금 왕원은 그의 신하인 조인규(趙仁規)에게 사도(司徒)ㆍ사공(司空)ㆍ시중(侍中)의 직책을 더하여 주었고, 왕거는 조인규에게 죽을죄를 아홉 번이나 용서해 주겠다는 장려하는 문서를 작성해 주었으며, 또 황조(皇朝) 제왕(帝王)의 세계(世系)를 함부로 베끼고 역서(曆書)를 스스로 만들었고, 조인규의 딸을 높여서 영비(令妃)로 삼았고, 자정원(資政院)을 설치하여 최충소(崔沖紹)를 흥록대부(興祿大夫)로 삼았습니다. 또 일찍이 태후(太后)의 전지를 받들어서 공주와 왕원에게 내린 겁설대(怯薛䚟)를 하나로 합병하게 하였는데, 왕원은 전지대로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왕원은 또 제멋대로 천호(千戶) 김려(金呂)를 죽이고는 그에게 내려 준 금부(金符)를 환관인 출합아(朮合兒)에게 주었습니다. 또 조인규는 자신의 딸을 왕원에게 바치어 모시게 하고는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를 저주하는 짓을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조인규와 최충소를 경조(京兆)와 공창(鞏昌) 두 로(路)에 보내어 안치(安置)시킨 뒤 마음대로 나다니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왕거는 불법적인 짓을 저질렀고, 왕원은 어린 나이로 망녕되게 무고한 자를 살해하였으니, 조서를 내려서 신칙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 임진에 고려의 배신(陪臣) 조인규(趙仁規)를 안서(安西)에다가 안치하고, 최충소(崔沖紹)를 공창(鞏昌)에다가 안치하였는데, 모두 태형(笞刑)을 가한 뒤 유배 보낸 것이다. 이로써 왕원에게 빌붙어서 마음대로 인명을 살해한 죄를 바로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왕거를 고려 왕으로 삼은 다음 공부 상서(工部尙書) 야선철목이(也先鐵木而), 한림대제(翰林待制) 가여주(賈汝舟)를 파견하여 조서를 가지고 가서 유시하게 하였다.
○ 2월에 왕거와 온 경내의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려 유시하기를,
“지금부터는 나라의 법규를 준수하도록 힘쓰고, 하늘을 두려워하라는 경계를 더욱 부지런히 지키라. 모든 관원들은 각자가 자신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서로 협력하면서 바르게 도와, 지난날의 잘못을 다시 답습하여 스스로 형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다른 일반 백성들은 각자 자신들의 생업에 안정하라.”
하였다. 5월에 합산(哈散)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왕거가 백성들을 복종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조정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함께 다스리게 해야만 합니다.”
하였다. 경자에 드디어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다시 설치한 다음, 활리길사(闊里吉思)에게 명하여 고려행성평장정사(高麗行省平章政事)가 되게 하였다. 9월에 왕거가 사신을 보내어 들어와서 조공을 바치면서 조정에서 행성(行省)을 설치한 것에 대해 표문을 올려 진정하였는데, 그 대략에,
“여러 해 동안 근왕(勤王)한 공이 있어서 모두 80여 년 동안 해마다 직공(職貢)을 닦았습니다. 일찍이 세자가 조정에 입시(入侍)하여 잇달아 황실과 혼사를 맺어 드디어 장인과 사위 관계가 되었는바, 실로 지극한 그 은혜에 감격하였습니다. 그러니 소국으로 하여금 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풍습을 바꾸지 말고 길이 제후 나라로서의 직공을 닦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4년 충렬왕 26년 2월에 정동행성평장사(征東行省平章事) 활리길사(闊里吉思)가 말하기를,
“고려국왕이 스스로 설치한 관서가 3백 58개이고, 관원이 4천 55명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옷과 음식을 모두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충당하느라 다시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큰 모임을 열 때 왕은 곡개(曲蓋)와 용을 그린 병풍을 사용하고, 거둥을 할 때에는 사람들이 다니는 것을 금지시키며, 여러 신하들이 춤을 추면서 만세(萬歲)를 불러, 한결같이 조정에서 하는 의식과 똑같이 하여 참람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산동 선위사(山東宣慰使) 탑찰아(塔察兒), 형부 상서(刑部尙書) 왕태형(王泰亨)을 파견하여 조서를 가지고 가서 유시하여 참람된 의식을 바로잡은 다음 보고하게 하였다. 3월에 활리길사가 다시 글을 올리기를,
“첨의사(僉議司) 관원들이 민호(民戶)의 호적과 주현(州縣)의 경계에 대해 제대로 보고하려 들지 않으며, 고려에서 함부로 세금을 부과하여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관원들은 많고 백성들은 적으며, 형벌이 일정한 법도가 없으니, 만약 고려의 풍속대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둘 것 같으면 실로 무마해서 다스리기가 곤란합니다.”
하였다. 《상동》
○ 5년 충렬왕 27년 2월에 고려 왕 왕거를 위하여 행성(行省)의 관원을 혁파하고는 조서를 내려서 왕거에게 유시하였다. 7월에 왕거가 표문을 올려서 말하기를,
“옛날 강화도에 있었을 때 일찍이 만세를 불렀으나 뒤에는 천세(千歲)로 고쳤으며, 지금은 조서를 받들고서 일체 혁파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관부(官府) 90여 개소를 혁파하고 관리 2백 70여 명을 줄였으며, 기타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잡다한 부역과 역전(驛傳)을 소요케 하는 역참들도 모두 줄였습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경은 짐의 뜻을 잘 이해하였으니, 말한 바를 마땅히 종시토록 시행하여야 할 것이다. 혹 그렇지 않을 경우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 12월 신묘에 정동행성평장사 활리길사가 고려를 제대로 안집시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상 모두 상동》
○ 7년 충렬왕 29년 9월에 형부 상서 탑찰이(塔察而)와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왕약(王約)을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전횡을 한 고려의 국상(國相) 오기(吳祈)를 징소(徵召)하여 대궐에 나오게 해 죄를 문책하였다.
○ 고려 왕 왕거가 연로하여서 아들인 왕원에게 나라를 전하자, 왕원의 정사에 대해 불안하게 여겨 원나라에 참소하여 이간질하는 자가 있었다. 왕원이 경사에 조회하러 오자, 이들이 몰래 사람을 시켜서 원나라의 권력자에게 뇌물을 보내어 왕원을 원나라에 머물려 두고 돌려보내지 못하게 하였다. 왕거가 다시 왕위에 올라서 소인배를 등용하여 세금을 많이 거두고 형벌을 함부로 쓰자, 고려 사람들이 떼를 지어 조정에 나와 하소연하였다. 이에 중서령이 그 주모자를 잡아 형부(刑部)에 구금하였다. 그런데도 그의 당여들이 죄를 뉘우치지 않자, 왕약(王約)에게 맡겨서 사실을 조사하게 하라고 상주하였다. 왕약이 고려에 이르러서 조서를 반포하고는 유시하여 말하기를,
“천지간에 지극히 친한 것은 부자 사이이고 지극히 중한 것은 군신 사이이다. 저 소인배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알 뿐이니, 어찌 너희 나라를 위해 일하겠는가.”
하니, 왕거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하기를,
“신이 늙고 혼모하여 간사한 자의 말만 들은 탓에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제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표문을 올려서 죄를 씻고, 또 아들인 왕원을 귀국시켰으면 합니다. 소인배들에 대해서는 모두 사신께서 죄를 다스리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왕약이 다음날 그들을 체포하여 죄를 심리한 다음 32명을 유배 보내고 3명을 곤장쳤으며, 2명을 파직하였다. 그런 다음 옛 신하 홍자번(洪子藩)을 국상(國相)으로 삼아 잘못된 정사를 바로잡게 하고, 불법적으로 설치한 수참(水站) 13곳을 혁파하고, 탐라에서 바치는 조공 가운데 토산물이 아닌 것은 모두 면제시켜 주었다. 그러자 고려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 10월 무술에 성(省)ㆍ대(臺)ㆍ원(院)의 관원들에게 명하여 고려의 국상 오기(吳祈)와 천호(千戶) 석천보(石天輔) 등을 국문하게 하였는데, 오기는 왕의 부자 사이를 이간질하고, 석천보는 일본으로 귀화하려고 도모하였기 때문이다. 모두 태형(笞刑)에 처한 다음 안서(安西)로 유배하였다. 11월 임자에 고려에 조서를 내려서 세 번이 넘게 도적질을 한 자는 경형(黥刑)을 면제하고 호광(湖廣)으로 유배 보내어 수자리 살게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8년 충렬왕 30년 곽관(郭貫)을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로 승진시킨 다음 조서를 받들고서 요양행성평장정사(遼陽行省平章政事) 별속합철리첩목아(別速合徹里帖木兒)와 함께 고려로 가서 진압하게 하였다. 《상동》
○ 10년 충렬왕 32년 5월 을유에 고려국왕 왕거를 고려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어 행성의 일을 맡아서 진무하게 하였다. 고려의 첨의사와 밀직사 등의 관원에게 모두 칙서를 선포하였다. 《상동》
○ 《동국사략(東國史略)》에,
“충렬왕 32년에 왕이 원나라로 가서 전왕(前王)과 살펴보건대, 전왕은 바로 충선왕(忠宣王)이다. 함께 고려로 돌아오고자 하였다. 그러자 왕유소(王維紹) 등이 충렬왕과 충선왕 사이를 이간질하여 적자(嫡子)인 충선왕을 폐하고,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을 전왕의 비(妃)인 보탑공주(寶塔公主)에게 장가들여서 충렬왕의 후사로 삼고자 모의하였다.”
하였다. 《일하구문》
○ 11년 충렬왕 33년 5월에 무종(武宗)이 즉위하였다. 6월 무오에 고려 왕 왕거를 올려 책봉해서 심양왕(瀋陽王)으로 삼았으며, 태자태부 부마도위(太子太傅駙馬都尉)를 더해 주었다. 《원사》
○ 《동국사략》에,
“충렬왕 33년에 원나라 성종(成宗)이 붕어하였다. 충선왕이 황제의 조카인 애육려발력팔달(愛育黎拔力八達) 태자(太子) 및 우승상 답라한(答刺罕) 등과 함께 계책을 정하여 회령왕(懷寧王) 해산(海山)을 맞이해 와서 황제로 옹립하였다. 그런 다음 태자의 전지를 받들어서 왕유소 등을 체포하여 가두고, 충렬왕을 경수사(慶壽寺)로 옮겨 있게 하였다.”
하였다. 《일하구문》
○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 충렬왕 34년 4월 병진에 고려 왕 왕장(王璋)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신으로 하여금 고려로 돌아가게 하면서 다시 행정동행성사(行征東行省事)의 관직을 설치하였습니다. 고려는 몇 년 동안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식량이 떨어졌으며, 또 수백 명이 그 토지에서 농사지어 먹고 있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곤궁함을 이기지 못하고 있으니, 또한 이는 세조께서 남기신 옛 제도가 아닙니다.”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먼저 정동행성을 세우기를 청한 것도 경의 말 때문이고, 지금 혁파하기를 청하는 것도 역시 경의 말 때문이다. 세조의 옛 제도를 준행해서 속히 사신을 파견하여 가서 혁파하게 하라.”
하였다. 9월 병진에 고려국왕 왕거가 졸하였다. 경진에 고려국왕 왕장이 고려의 왕위를 이었다. 살펴보건대, 《홍간속록(弘簡續錄)》에는 원 성종 11년 5월에 충렬왕이 훙한 것으로 되어 있고, 《원사》 본기에는 무종 지대(至大) 원년 9월에 훙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고려사》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원사》에는 지대 원년 4월에 고려 왕 왕장이 행성을 혁파하기를 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의거하여 보면 행성을 설치한 것은 마땅히 충렬왕이 훙하기 전에 있어야 하니, 《고려사》 및 《홍간속록》과는 서로 어긋난다.
○ 이해에 영원왕(寧遠王) 활활출(闊闊出)이 역모를 꾀하자, 조서를 내려서 고려로 옮겨 있게 하였다. 《이상 모두 원사》
○ 2년 충선왕 원년 2월 계해에 태후가 오대산(五臺山)의 불사(佛寺)에 행행하였다. 3월 기축에 요양행성우승(遼陽行省右丞) 홍중희(洪重喜)가 고려국왕 왕장이 국법을 준행하지 않고 포악한 짓을 한다는 등의 일에 대해 하소연하였다. 중서성의 신하가 홍중희와 고려 왕을 대질시키기를 청하니, 중서성에 칙령을 내려 대질시키지 말게 하였으며, 고려 왕으로 하여금 태후를 따라서 오대산(五臺山)으로 가게 하였다. 《상동》
○ 3년 충선왕 2년 4월 기유에 고려국왕 왕장에게 공신의 호를 하사하고, 심왕(瀋王)으로 고쳐 봉하였다. 《상동》
○ 4년 충선왕 3년 3월에 인종이 즉위하였다. 4월 임인에 조서를 내려서 불법적으로 들어온 한인ㆍ고려인ㆍ남인(南人)의 숙위(宿衛)하는 군사들을 태거(汰去)시켜 원적(原籍)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상동》
○ 인종(仁宗) 황경(皇慶) 2년 충선왕 5년 4월 병자에 고려 왕이 왕위를 사양하였다. 그의 세자인 왕도(王燾)를 정동행중서성좌승상 상주국(征東行中書省左丞相上柱國)으로 삼고 고려국왕에 봉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에는, “원나라에서 충선왕을 귀국시키려고 하였는데, 충선왕이 핑계 댈 말이 없었다. 이에 드디어 강릉대군(江陵大君) 왕도(王燾)에게 왕위를 전하고, 스스로는 심양왕(瀋陽王)이라고 칭하였다.” 하였다.
○ 《고려사》 세가에,
“황제가 상도(上都)에 행차하였다. 충선왕이 따라가서 용호대(龍虎臺)에 이르러서 배사(拜辭)하니, 황제가 옷을 하사하고 위로하였다.”
하였고, 또,
“충선왕 5년 9월에 왕이 대도(大都)에 도착하였다. 10월에 황제가 왕을 형부(刑部)에 내렸다. 얼마 뒤에 머리를 깎고 석불사(石佛寺)에 안치하였다.”
하였다. 《일하구문》
○ 10월 임인에 칙령을 내려 한인ㆍ남인ㆍ고려인으로서 들어와서 숙위하고 있는 자들을 상도(上都)에다가 사(司)를 나누어 있게 하고, 활과 화살을 주지 못하게 하였다. 《원사》
○ 연우(延祐) 원년 충숙왕 원년 12월에 복색(服色) 등에 관한 제도를 정하였으며, 지금 이후로는 고려 사람으로서 겁설(怯薛)에 투속된 자들은 모두 금한(禁限)에 들어 있게 하였다. 《상동》
○ 3년 충숙왕 3년 3월 신해에 고려의 세자 왕고(王暠)에게 개부의동삼사 심왕(開府儀同三司瀋王)을 특별히 제수하였다. ○ 《홍간속록》에는, “고려 왕 왕도(王燾)가 처음에는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에게 장가들었다가 이어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얼마 뒤에 왕도의 동생인 왕고(王暠)를 왕세자로 삼아 양왕(梁王) 송산(松山)의 딸에게 장가들였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고려사》에, 충선왕이 이미 심양왕(瀋陽王)이라 칭하고는 형의 아들인 왕고를 세자로 삼았으며 얼마 뒤에 심왕의 자리를 왕고에게 전하였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 7월 경오에 고려ㆍ여진ㆍ한의 군사 1천 5백 명을 동원해 빈주(濱州)ㆍ요하(遼河)ㆍ경운(慶雲)ㆍ조주(趙州)에서 둔전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5년 충숙왕 5년 4월 기해에 탐라(耽羅)의 포렵호(捕獵戶) 성금(成金) 등이 노략질을 하자, 정동행성에 칙령을 내려 군사를 독려해 체포하게 하였다.
○ 6월에 위왕(衛王) 아출가(阿朮哥)가 죄를 지어 고려로 쫓겨났는데, 술자(術者)인 조자옥(趙子玉)이 몰래 배를 타고 고려로 가서 아출가를 데려오려고 모의하다가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주살당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7년 충숙왕 7년 3월에 영종(英宗)이 즉위하였다. 4월 무진에 왕후(王煦)를 봉하여 계림군공(鷄林郡公)으로 삼았다. 《상동》
○ 영종(英宗) 지치(至治) 원년 충숙왕 8년 정월 갑신에 고려 왕 왕장(王璋)에게 조서를 내려서 상도(上都)로 오게 하였다. 《상동》
○ 2년 충숙왕 9년 5월 계미에 휘정원사(徽政院事) 신원(新源)을 탐라에 유배 보냈다. 《상동》
○ 3년이다. 충숙왕 10년 조정에서 정동성(征東省)을 혁파하고 삼한성(三韓省)을 설치한 다음 법제와 규식을 다른 성(省)의 예와 똑같이 하는 것을 의논하였다. 조서를 중서성에 내려서 그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는데, 집현태학사(集賢太學士) 왕약(王約)이 대답하기를,
“고려는 경사에서의 거리가 4천 리나 되고 토질이 척박하고 백성들은 가난하며, 오랑캐의 풍속이라 숭상하는 것이 잡다하여 중원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만일 억지로 교화하여 힘을 다해 다스려고 한다면 이는 다행스런 일이 아닙니다. 조종조의 옛 제도를 준수하게 하느니만 못합니다.”
하니, 승상이 좋은 의견이라고 칭찬하면서 이를 아뢰었다. 이에 그 논의가 중지되어 시행되지 않았다. 고려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왕약의 화상(畫像)을 그려 사당에 걸고 섬기면서 말하기를,
“국가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된 것은 왕공(王公) 덕분이다.”
하였다. 《상동》
○ 태정제(泰定帝) 원년 충숙왕 11년 정월 갑인에 고려 왕에게 칙령을 내려 환국하게 하였다. 살펴보건대, 왕은 충선왕이다. 이어 그의 인(印)을 되돌려 주었다. 《상동》
○ 4년 충숙왕 14년 마찰대(馬札台)를 패호부 영고려여진한군만호부다루가치[佩虎符領高麗女眞漢軍萬戶府達魯花赤]로 삼았다. 《상동》
○ 치화(致和) 원년 충숙왕 15년 6월에 고려의 왕세자 완자독(完者禿)이 그의 인(印)을 충숙왕이 빼앗았다고 하소연하자, 평장정사(平章政事) 매려(買閭)를 파견하여 고려 왕에게 유시해 인을 돌려주게 하였다. 《상동》
○ 문종(文宗) 천력(天曆) 원년 살펴보건대, 치화 원년 9월에 문종이 즉위하여 천력(天曆)으로 연호를 고쳤다. 11월 기미에 고려의 환관(宦官) 미설미(米薛迷)ㆍ강답리(剛答里)를 석방하여 고려로 돌아가게 하였다. 《상동》
○ 2년 충숙왕 16년 정월 계유에 요양성(遼陽省)에 있는 몽고ㆍ고려ㆍ조주(肇州)의 군사 3만 명을 거느리는 장교가 역적을 따라서 경기(京畿)를 침범하자, 인부(印符)와 제칙(制勅)을 압수하였다. 11월 기묘에 고려 왕 왕도(王燾)가 병으로 인해 오랫동안 조회하지 못하자, 그의 아들 왕정(王禎)에게 왕위를 전하도록 명하기를 청하였다. 《상동》
○ 지순(至順) 원년 충숙왕 17년 4월 신축에 명종(明宗)의 후(后) 팔불사(八不沙)가 참소를 입어 해를 당하였다. 이에 드디어 명종의 아들 타환첩목이(妥懽帖睦爾)를 고려의 대청도(大靑島)로 옮기고 사람들과 접하지 못하게 하였다. 1년이 지나서 다시 조서를 내려 광서(廣西)의 정강(靜江)으로 옮겼다. 《상동》
○ 2년 충혜왕(忠惠王) 원년 4월 무신에 궁중에 있는 고려의 여자 불안첩니(不顔帖你)를 연철목아(燕鐵木兒)에게 하사하였다. 고려국왕이 고려에 있는 전지(田地)를 떼어 보내 주기를 청하자, 사신을 파견하여 가서 받게 하였다. 《상동》
○ 3년 충숙왕 후 원년 정월 계유에 고려 왕 왕도에게 그대로 고려 왕이 되라고 명하고는 금인(金印)을 하사하였다. 당초에 왕도가 병이 나자 그의 아들인 왕정에게 왕위를 전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왕도의 병이 다 나았으므로 복위하게 한 것이다. 《상동》
○ 순제(順帝) 원통(元統) 원년 충숙왕 후 2년 고려국의 사신이 경사에 조회하러 가면서 요양(遼陽)을 지나게 되었다. 요양성의 관원을 알현하면서 포목 4필과 서신 1통을 올렸는데, 거기에 정동성(征東省)의 도장을 찍어 봉하였다. 그러자 행성의 참지정사 답리마(答里麻)가 사신을 꾸짖기를,
“국가의 제도에 도장을 둔 것은 공적인 문서에 도장을 찍어서 간사한 짓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사사로운 서신에 찍는단 말인가. 그리고 더구나 네가 출국할 때에는 나는 경사에 있어서 요양성의 관원으로 임명받지도 않았었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서신을 보내었단 말인가? 너희 나라 임금과 신하들은 어찌하여 이와 같이 속이는가.”
하니, 사신이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 서신과 포목은 되돌려 주었다.
○ 12월 임신에 노열니타(奴列你他)에게 그의 아버지인 탑라적(塔刺赤)을 대신해서 탐라군민안무사사다루가치[耽羅軍民安撫使司達魯花赤]가 되게 하고, 삼주호부(三珠虎符)를 하사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2년 충숙왕 후 3년 4월 임신에 당기세(唐其勢)에게 명하여 총관고려여진한군만호부다루가치[摠管高麗女眞漢軍萬戶府達魯花赤]가 되게 하였다. 《상동》
○ 후지원(後至元) 원년 충숙왕 후 4년 3월 경자에 어사대(御史臺)의 신하가 말하기를,
“고려국은 가장 먼저 신하의 절개를 바쳤는데, 근년에 들어와서는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잉첩(媵妾)을 뽑아왔습니다. 이에 심지어는 딸을 낳으면 내다버리고 장성해서도 시집가지 못하고 있으니, 뽑아오는 것을 금지시키소서.”
하니, 황제가 따랐다. 11월 갑오에 연철목아(燕鐵木兒)ㆍ당기세(唐其勢)ㆍ답리(答里)가 빼앗은 고려의 전택(田宅)을 고려 왕 아라특눌실리(阿刺忒訥失里)에게 돌려주었다. 《상동》 ○ 살펴보건대, 아라특눌실리는 충숙왕의 몽고식 이름이다.
○ 3년 충숙왕 후 6년 4월 임오에 고려 왕 아라특눌실리가 조하(朝賀)하고 환국하였는데, 금 1정(錠)과 초(鈔) 2천 정을 하사하였으며, 종관(從官)들에게도 차등이 있게 하사하였다. 《상동》
○ 6년 충혜왕 후 원년 6월 병신에 조서를 내려서 문종(文宗)의 태자 연첩고사(燕帖古思)를 고려에서 석방하였다. 《상동》
○ 지정(至正) 2년 충혜왕 후 3년 가을에 감찰어사가 아뢰기를,
“환관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으니, 인원수를 줄여야 합니다.”
하였다. 대개 당시에 환관들은 대부분 고려 사람들이 하였다. 《경신외사(庚申外史)》
○ 12월에 일본의 장사꾼 1백여 명이 폭풍을 만나서 고려로 표류해 왔다. 고려에서 그들의 재물을 빼앗고는 표문을 올려서 그 사람들을 몰입(沒入)하여 노예로 삼기를 청하자, 철목아탑지(鐵木兒塔識)가 안 된다고 고집하였다. 이에 필요한 물자를 지급해 주어 돌려보냈다. 《원사》
○ 4년 충혜왕 후 5년 3월 임인에 팔독마타아지(八禿麻朶兒只)에게 정동행성 좌승상을 특별히 제수하여 고려국왕의 자리를 이어받게 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에는, “원나라에서 충혜왕이 탐학스럽고 음란하며 부도하다는 이유로 내주(乃住)ㆍ타적(朶赤) 등을 파견하여 충혜왕을 원나라로 잡아가 게양현(揭陽縣)에 유배하였는데, 중도에 악양(岳陽)에 이르러서 훙하였다. 왕이 원나라로 잡혀갔을 때 재상(宰相)과 국로(國老)들이 민천사(旻天寺)에 모여 글을 올려서 충혜왕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청하기로 의논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그 글을 초하여 서명을 받은 다음 정동성(征東省)에 바치고자 하였는데, 일이 마침내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고려국의 기로와 뭇 관원들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정동성의 여러 상공(相公)들의 집사(執事)께 글을 올립니다. 원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사신 타적(朶赤) 등이 하늘에 제사 지내고 대사(大赦)하라는 덕음을 공손히 받들고 앞서 왕경(王京)에 왔습니다. 이에 우리 보탑실련왕(寶塔實憐王)이 관원들을 거느리고 의장(儀仗)을 갖춘 다음 성 밖으로 나아가 맞이하고, 다시 본성(本省)으로 들어가 조서를 반포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마치자마자 사신 등이 왕을 잡아 말에 태워서 돌아갔습니다. 일이 창졸간에 발생하였으므로 배신(陪臣)들은 모두 몸 둘 바를 모르겠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생각해 보건대, 왕은 나이가 어려 많은 일을 경험해 보지 못한 탓에 감정에 따라 곧바로 일을 행하여서 이 지경에 이른 것으로, 왕의 본심을 따져 보면 대개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하늘의 해가 내려 비추고 있는데 어찌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또 생각해 보건대, 소방은 시조(始祖) 왕씨가 바다 귀퉁이에서 개국한 지 이미 4백 26년이 되었고, 자손들이 서로 계승한 것이 이미 28대나 되었습니다. 그동안에 송(宋)ㆍ요(遼)ㆍ금(金)나라를 두루 섬기면서 사신을 통하여 내왕하기는 하였으나, 그들에게 얽매여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우리 태조 성무황제(太祖聖武皇帝)께서 나라를 일으키실 즈음에 미쳐서 금산왕자(金山王子)란 자가 중원의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망한 요나라의 왕업을 다시 일으키기를 도모하다가 형세가 궁해져 동쪽으로 달아나 섬에서 숨어 지내며 날뛰었습니다. 태조께서 합진(哈眞)ㆍ찰라(札刺) 두 장수에게 명하여 그의 죄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날씨는 차고 눈은 높이 쌓여 군량미를 이어 대지 못하였으므로, 우리 충헌왕(忠憲王)이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 등을 파견해 군사와 식량을 도와 일거에 적들을 격파하였습니다. 이에 두 나라가 서로 동맹을 맺어 자손만대토록 그 당시의 일을 잊지 말자고 하였으며, 인하여 포로로 잡은 자들을 서로 나누어서 징표로 삼았습니다. 지금 소방에 거란장(契丹場)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조 문무황제(世祖文武皇帝)께서 양양(襄陽)에서 군사를 사열하실 때 아리패가(阿里孛哥)가 막북(漠北)에서 변란을 선동하자 제후들이 모두 의심하여 각자 자신들의 거취를 결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우리 충경왕(忠敬王)이 세자로 있으면서 험난함을 무릅쓰고 곧바로 변량(汴梁)에 가서 길에서 황제를 맞이하자, 세조께서 바라보시고는 놀라고 기뻐하면서 말씀하시기를, 「고려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이다. 지금 내가 북쪽으로 돌아가서 장차 대통(大統)을 이으려 하는데, 고려의 세자가 스스로 와서 나에게 귀순하니, 이는 하늘이 나를 돕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 뒤 충경왕이 이미 즉위하였는데도 배신(陪臣) 임유무(林惟茂) 부자가 내속(內屬)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제 마음대로 충경왕을 폐하고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서 저항하자, 세자로 있던 충렬왕이 원나라 조정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세조께서 불끈 화를 내시어 조서를 내려서 왕을 복위시키고 역말을 타고 달려와 조근(朝覲)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왕과 세자가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가서 역당들을 모두 잡아 죽이고 강화도에서 육지로 나와 온 마음을 다해 직공(職貢)을 닦았습니다. 충렬왕 대에는 세조께서 두 차례 일본을 정벌하시었는데, 왕이 김방경(金方慶) 등을 파견하여 전선(戰船)을 수리하였으며, 매번 선봉이 되었습니다. 또 내안(乃顔)의 당(黨)인 합단(哈丹)이 수달달(水達達)과 여진(女眞) 지역을 함락시키고는 우리나라의 국경까지 침범하여 황제의 위엄을 거역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왕이 군사를 출동해 맞받아쳐서 수레 한 대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대덕(大德) 말년에 익지례불화왕(益知禮不花王)이 인종황제(仁宗皇帝)를 도와 난을 평정하여 궁궐을 맑게 했으며, 무종황제(武宗皇帝)를 맞이해 와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이상의 사실로 볼 때 왕씨가 원나라에 충성한 것은 오래된 것입니다. 또 생각해 보건대, 세조황제께서 홀독겁미사공주(忽篤怯迷思公主)를 고려로 시집보내셨는데, 이 공주가 익지례불화왕을 낳고, 익지례불화가 아납특실리왕(阿納忒室利王)을 낳고, 아납특실리가 보탑실리왕(寶塔實里王)을 낳았습니다. 그러니 보탑실리왕은 비록 소원하기는 하지만 세조에게 있어서는 실로 피를 나눈 후손인 것입니다. 또 생각해 보건대, 황후(皇后) 기씨(奇氏)는 소방에서 태어나 위로 지존(至尊)의 배필이 되어 태자를 낳아 천하 사람들이 경하하면서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원나라 조정에서 소방을 다른 번국(藩國)들과 똑같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또 생각건대, 소방은 일본과 더불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원나라로부터 복을 받는다면 저들은 원나라에 늦게 귀화한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우리가 화를 당한다면 저들은 원나라에 귀화하지 않은 것을 잘한 짓으로 여길 것으로, 이는 형세에 있어서 반드시 그러한 것입니다. 옛날에 주(周)나라에서는 우후(虞侯) 간(衎)을 잡아갔다가 마침내는 그로 하여금 왕위를 회복하게 하였고, 한(漢)나라에서는 양왕(梁王) 무(武)를 징소하였다가 역시 양(梁)으로 되돌아가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왕자(王者)의 큰 도량을 엿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원나라 조정은 열성조(列聖祖) 이래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저 주나라나 한나라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지금 남쪽 교외에서 친히 제사 지내어 조(祖)를 높여 하늘에 짝하게 하고, 대례(大禮)가 이미 이루어져 덕음(德音)이 널리 펴졌습니다. 이에 밖으로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춤을 추면서 환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한 사람이라도 그 은택을 입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마땅히 마음 아프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천자(聖天子)께서는 허물을 용서하는 더할 수 없이 크신 어지심으로 한 마음을 돌림으로써, 우리 보탑실리왕으로 하여금 죄망에서 벗어나 은파(恩波)에서 놀게 하고, 또 왕씨의 군신(君臣)과 사직(社稷)으로 하여금 그 이름을 바꾸지 않고 의관과 풍속을 모두 옛 제도대로 하게 해서, 산골짜기와 바닷가에 사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구업(舊業)에 편안하게 하신다면, 태조와 세조께서 소방을 돌보아 주신 뜻이 어찌 더욱더 밝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세조께서 공주를 시집보내시어 자손을 낳게 해 먼 나라의 마음을 붙잡아 두신 그 규모가 어찌 더욱 원대해지지 않겠으며, 기씨 황후가 태자를 낳아 천하 사람들이 경하하며 의지하는 것이 어찌 더욱 거룩해지지 않겠으며, 소방에서 근왕(勤王)하며 적개(敵愾)하는 마음이 어찌 더욱 굳어지지 않겠으며, 복종하지 않는 일본 사람들이 그 어리석음을 고쳐서 기꺼이 원나라로 귀화하려는 뜻이 어찌 더욱더 독실해지지 않겠으며, 4백 26년간 28대에 걸친 역대의 선왕들이 어찌 더욱더 감격해 하지 않겠으며, 허물을 용서해 주는 더할 수 없이 큰 원나라 조정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어찌 더욱더 천하 후세에 퍼져나가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보잘 것 없는 저의 말을 굽어 살펴서 황제께 진달해 주소서.’ 하였다.” 하였다. ○ 또 살펴보건대, 팔사마타아지(八沙麻朶阿只)는 충목왕(忠穆王)의 몽고식 이름이다.
○ 8년 충목왕 4년 12월에 감찰어사 이필(李泌)이 아뢰기를,
“세조께서 맹세하시면서 고려와는 일을 함께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세조께서 계셨던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어찌하여 차마 세조의 말씀을 잊으시고 고려의 기씨(奇氏)를 황후(皇后)의 자리에 앉힌단 말입니까. 지금 재변이 여러 차례 일어나고, 강물이 터지고 지진이 일어나며, 도적들이 점점 불어나고 있는데, 이는 모두가 음기가 성하고 양기가 미약한 탓입니다. 바라건대 황후 기씨를 강등시켜 비(妃)로 삼으소서. 그러면 삼신(三辰)이 제 자리를 찾고 재변이 그칠 것입니다.”
하였으나, 황제가 따르지 않았다. 《상동》 ○ 기씨(奇氏)에 대한 일은 인물고(人物考)에 상세히 나온다.
○ 10년 충정왕(忠定王) 2년 11월 병진에 고려 심왕(瀋王)의 손자 탈탈불화(脫脫不花) 등을 동궁(東宮)의 겁설관(怯薛官)으로 삼았다. 《상동》
○ 11년 충정왕 3년 9월 임술에 조서를 내려 고려국왕 부답실리(不答失里)의 동생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에게 왕위를 이어받게 하고, 부답실리의 아들은 폐위시켰다.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충혜왕의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寶塔實里)이고, 공민왕(恭愍王)의 몽고식 이름은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이다.
○ 12년 공민왕 원년 8월 정미에 일본에서 고려에 알려오기를, “도적들이 바다를 건너가서 노략질할 것이다.” 하였는데, 알려온 자는 자칭 도거주(島居主)라고 하였다. 고려국왕 백안첩목아가 군사를 징발해 왜구들을 물리치자, 금계요(金繫腰) 하나와 초(鈔) 1천 정을 하사하였다. 《상동》
○ 14년 공민왕 3년 9월 갑자에 고려국왕 탈탈불화(脫脫不花)를 봉하여 심왕(瀋王)으로 삼았다. 《상동》
○ 15년 공민왕 4년 11월 신해에 고려국왕 백안첩목아에게 친인보의선충봉국창혜정원공신(親仁輔義宣忠奉國彰惠靖遠功臣)의 호를 하사하였다. 《상동》
○ 16년 공민왕 5년 2월 병인에 한림국사원(翰林國史院)ㆍ태상예의원(太常禮儀院)에 명하여 황후 기씨(奇氏) 3대의 공신 시호(功臣諡號)와 왕작(王爵)을 의논해 정하게 하였다. 《상동》
○ 18년 공민왕 7년 12월 계유에 관선생(關先生)ㆍ파두반(破頭潘) 등이 상도(上都)를 함락하고 궁궐을 불태웠으며, 7일간 머무르다가 다시 요양(遼陽)으로 가서 공략한 다음 드디어 고려에까지 이르렀다. 《상동》
○ 19년 공민왕 8년 파두반ㆍ관선생ㆍ사유(沙劉) 및 이군(二軍)이 고려의 왕경(王京)으로 들어가자 고려 왕이 탐라(耽羅)로 도망쳤다. 그의 신하들이 여자들을 바치면서 항복을 청하자, 장교들이 여자들을 군사에게 나누어 주어 드디어 고려와 인척 관계를 맺고는 마음대로 왕래하였다. 고려 사람들이 이를 인하여 말을 몰래 수풀 속에 감추고는 어느 날 저녁에 왕의 명령을 전하면서 고려말을 하는 자는 죽이지 않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였다. 이에 사유 및 이군과 관선생이 모두 죽고, 오로지 파두반과 비장 좌이(左李)만이 날랜 기병들을 거느리고 샛길을 따라서 서경(西京)으로 도망쳤다. 《경신외사(庚申外史)》
○ 22년 공민왕 11년 12월에 황제가 참소하는 말에 속아 고려 왕 백안첩목아를 폐위시키고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를 왕으로 삼았다. 그러자 고려 사람들이 상서하여 옛 왕을 폐해서는 안 되고 새 왕을 즉위시켜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하였다.
○ 황후 기씨의 종족들이 고려에 있으면서 황제의 총애를 믿고는 교만방자하게 굴었다. 《경신외사》에, “기후(祈后)의 종족들로서 고려에 남아 있는 자들이 대부분 관작과 봉호를 받고는 나가서는 세력을 믿고 교만방자하게 굴면서 다른 사람들의 전택과 자녀들을 강탈하였다.” 하였다. 백안첩목아가 여러 차례 경계시켰으나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 이에 고려 왕이 드디어 기씨의 일족을 모두 죽이니, 황후가 태자에게 말하기를,
“네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어찌하여 나를 위해 원수를 갚아 주지 않는가.”
하였다. 이때 고려 왕의 형제로서 경사에 머물러 있는 자가 있었는데, 의논을 하여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를 왕으로 삼았다. 《홍간속록》에, “황후가 고려 왕이 기씨들을 모두 죽였다는 이유로 날마다 황제에게 참소하여 마음대로 왕위를 폐하였다.” 하였다. 그러고는 기씨의 족자(族子)인 삼보노(三寶奴)를 원자(元子)로 삼고 장작동지(將作同知) 최첩목아(崔帖木兒)를 승상으로 삼아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려로 가게 하였다. 이들이 압록강에 이르러서 고려의 군사들에게 패하여 겨우 17기(騎)만 경사로 되돌아왔다. 《이상 모두 원사》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탑사첩목아는 바로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德興君) 왕혜(王譓)이다. 일찍이 중이 되어 원나라로 들어갔는데, 원나라에서 탑사첩목아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임인년에 반신(叛臣)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유세하여 왕으로 세우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로 들어와서 약탈하려고 하였는데, 갑진에 최영(崔瑩) 등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원나라에서는 명을 내려 다시 공민왕을 복위시키고, 최유를 잡아보내니, 복주하였다. 최유는 바로 최첩목아이다.
○ 23년 공민왕 12년 봄에 관선생(關先生)의 잔당들이 다시 고려로부터 돌아와서 상도(上都)를 노략질하였는데, 패라첩목아(孛羅帖木兒)가 격파하여 항복시켰다. 《상동》
○ 25년 공민왕 14년 12월 을묘에 조서를 내려 차황후(次皇后) 고려 기씨를 세워 황후로 삼았다. 그러고는 기씨를 숙량합씨(肅良合氏)로 고친 다음 천하에 조서를 내리고, 이어 기씨의 아버지 이상 삼대를 봉하여 모두 왕작(王爵)을 주었다. 《상동》
○ 명(明) 태조(太祖) 홍무(洪武) 원년 공민왕 17년 고려에 사신을 보내 고려왕 왕전(王顓)에게 새서(璽書)를 하사하고, 천하를 평정하였음을 유시하였다. 《명사(明史)》
○ 2년에 공민왕 18년 왕전이 표문을 올려 하례하면서 방물을 바쳤으며, 아울러 고려 왕으로 책봉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부새랑(符璽郞) 설사(偰斯)를 파견하여 살펴보건대, 《본기》에는 8월 병자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서와 금인(金印), 고문(誥文)을 싸 보내어 왕전을 고려국왕으로 봉하였다. 가을에 왕전이 총부 상서(摠部尙書) 성유득(成惟得)과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 김갑량(金甲兩)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사례하고 아울러 천수절(天壽節)을 축하하였으며, 인하여 제복(祭服)에 관한 제도를 청하였다. 성유득 등이 하직하고 돌아갈 때 황제가 조용히 묻기를,
“왕은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는가? 성곽은 잘 정비되어 있는가? 무기는 날카로우며 궁실은 크고 볼만한가?”
하니, 머리를 조아리면서 아뢰기를,
“동해 바닷가에 살고 있는 신들은 오로지 부처만을 숭상하며, 다른 것은 할 겨를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드디어 새서를 내려서 유시하였다. 새서는 예문지에 상세하게 나온다. ○ 《무비지(武備志)》에는, “새서를 내려서 왕에게 유시하기를, ‘불법(佛法)은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가 아니니,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일이 후세의 귀감인 것이다. 왕은 불법에 미혹되지 말라. 한나라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정령(政令)을 펴지 않고서야 어떻게 위엄을 보일 수 있겠는가. 왕의 나라는 북쪽으로는 오랑캐들과 접하여 있고, 남쪽으로는 왜놈들과 인접해 있다. 오랑캐들이 지금 이쪽에서 상처를 입었으니 아마도 그쪽으로 도망칠 것 같으며, 왜놈들은 또 교활하고 탐욕스러워 바닷가에 출몰하면서 왕의 빈틈을 노릴 것이니, 짐은 걱정이 된다. 성을 쌓고 군사를 모아 방비를 굳게 하는 것을 왕은 잘 생각해서 하라. 이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여러 책을 왕에게 하사하니, 짐의 뜻을 잘 알라.’ 하였다.” 하였다. 이로부터 공물을 자주 바쳤고, 원단(元旦)과 성절(聖節)에는 사신을 보내 축하하는 것이 해마다의 규례로 되었다. 《상동》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는 진후(晉侯)가 나라를 세운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8백여 년이 되었는데, 비로소 삼성(三姓)을 바꾸었다. 당나라 이전에는 소위 고려(高麗 고구려를 가리킴)라고 하는 나라는 삼국 가운데 한나라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대(五代) 이후에는 삼한과 백제를 병합하여 하나로 통일하였으나, 승국(勝國 원나라를 가리킴) 때에는 오히려 탐라(耽羅)가 독립된 나라로 있었다. 지금은 탐라 역시 차지하여서 국토의 넓이가 수나라나 당나라가 정벌하러 갔을 때 비해 이미 몇 배는 된다. 그러나 그 나라는 자못 예의를 숭상하고 분수를 잘 지킨다. 이에 명나라에 들어와서부터는 중국 조정을 공손하게 섬겨, 철마다 조공을 바치면서 신하로서의 예절을 폐하지 않고 있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 3년 공민왕 19년 정월 계사에 황제가 7일 동안 재계(齋戒)하고 직접 축문(祝文)을 지어 서명하였다. 그러고는 향(香)을 사신에게 주어 고려국으로 보내 산천(山川)의 신에게 제사 지냈다. ○ 이해에 과거령(科擧令)을 반포하면서 고려에 조서를 보내 알렸다. 다음 해에 고려에서 들어와 과거에 응시한 3인 가운데 1명이 급제하였는데, 중국말을 모른다는 이유로 후하게 대접한 다음 되돌려 보냈다. 《이상 모두 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
○ 5년 공민왕 21년 왕전이 예부 상서 오계남(吳季南), 민부상서 장자온(張子溫)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치고 표문을 올려서 말하기를,
“탐라국이 험하고 거리가 먼 것을 믿고는 조공을 바치지 않고 있으니, 탐라에 남아 살고 있는 몽고 사람들을 모두 옮겨야만 합니다. 그리고 난수산(蘭秀山)에는 도망친 자들이 모두 모여 있는데, 이들이 노략질할까 걱정되니, 군사를 동원해 토벌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새서를 내려 이르기를,
“탐라는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며, 몽고 사람들도 역시 사람의 무리다. 난수산에 모여 있는 도적들은 짐의 조서를 내보이기만 하면 곧바로 나오게 할 수 있으니, 군사를 쓰지 않는 것이 편하다.”
하였다. 《오학편(吾學編)》
○ 공사(貢使) 홍사범(洪師範)ㆍ정몽주(鄭夢周) 등 1백 50여 명이 경사로 오다가 풍랑을 만나 39명이 죽었는데, 홍사범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황제가 불쌍하게 여겨 원나라의 추밀사(樞密使)로 있었던 연안답리(延安答里)를 파견하여 고려에 가서 조공을 자주 바치지 말라고 유시하였다. 그런데 왕전이 다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강인유(姜仁裕)를 보내어 말을 바쳤으며, 하정조사(賀正朝使) 김서(金湑)가 그에 앞서 와 있었다. 황제가 이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명사》
○ 상이 고려의 사신들을 돌려보냄을 인해서 중서성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막 고려에게 자주 사신을 보내지 말라고 유시하였다. 지금 한 해 사이에 다시 여러 차례 사신이 와서 고려의 백성들이 그에 시달리고 있다. 또 사신들이 바다를 건너기가 어려운바, 정몽주(鄭夢周)와 같은 자들은 다행히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면하고 능히 돌아가서 그동안의 사연을 말하였으나, 그렇지 않고 빠져 죽을 경우 고려에서 우리를 의심하지 않겠는가. 무릇 옛날에 제후들은 천자에게 한 해에 한 차례 소빙(小聘)하고, 3년마다 대빙(大聘)하였으며, 9주(州) 이외의 나라에서는 한 대(代)마다 와서 알현할 뿐이었다. 지금 고려는 중국에서의 거리가 조금 가까우며, 사람들이 경사(經史)와 문물(文物)을 알고 있다. 그러니 3년마다 한 차례씩 조빙(朝聘)하는 예를 행하게 하거나 혹 1년마다 공물을 바치게 하되, 단지 그 나라에서 산출되는 포(布)로 바치며, 포의 숫자는 10필을 바치게 하라. 이러한 짐의 뜻을 그들에게 고해 주라.”
하였다. 《명산장왕향기》
○ 6년에 공민왕 22년 고려 왕이 다시 사신 김갑량(金甲兩) 등을 보내어 말 50필을 바쳤다. 김갑량이 경사에 와서 도중에 말 2마리가 없어졌다고 말하였는데, 말을 올릴 때에는 50마리를 바쳤다. 이에 그 까닭을 묻자, 사마(私馬)로 채워 넣었다고 하였다. 다시 어떻게 사마를 구하였는가를 묻자, 동궁(東宮)에 바치려고 하던 말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황제가 그가 성실치 못한 것을 미워하여 말을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그러고는 이르기를,
“신하가 사사로이 통교하는 것은 《춘추》의 의리가 아니다.”
하면서, 왕전에게 새서를 내려, 이 뒤로는 성실치 못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자를 사신으로 보내지 말라고 하였다. 《상동》
○ 7년에 공민왕 23년 왕전이 감문위 상호군(監門衛上護軍) 주의(周誼)ㆍ정비(鄭庇) 등을 보내어 와서 공물을 바치고, 표문 5통을 올렸다. 2통은 전후로 내려 준 2통의 새서에 대해 사은하는 것이었고, 1통은 해마다 한 차례씩 조공을 바치겠다는 것이었고, 1통은 조공하는 길을 정료위(定遼衛)를 거치는 육로로 가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일이 없게 해 달라는 것이었고, 1통은 풍랑에 휩쓸린 사람들을 구휼해 준 데 대해 사은하는 것이었다. 황제가 그 공물을 되돌려 주면서 새서를 내려 이르기를,
“사신이 와서 공물을 바치면서 왕의 마음을 모두 진달하였는데, 사신의 말을 들어 보고 표문을 읽어 보니, 왕이 사대(事大)하는 마음이 참으로 깊음을 알겠다. 짐이 보건대, 상고 시대의 임금은 전후(甸侯)나 수복(綏服) 이외의 지역은 다스리지 않으면서, 하늘을 본받고 어짊을 넓혀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먼 외방의 진귀한 물품을 보배롭게 여기지 않고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으니, 성인의 마음이 크지 아니한가. 짐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어찌 감히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려는 왕의 마음을 보배로 삼지 않겠으며, 정성으로 바쳐온 공물을 물리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짐은 왕이 지금 이후로는 공물은 적게 바치면서도 정은 도탑게 하였으면 한다. 왕은 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하였다. 이해에 왕전이 졸하였다. 왕전이 졸한 것은 대개 고려의 권신인 이인인(李仁人)이 시해한 것이다. 왕전에게 아들이 없어서 총애하는 신하인 신돈(辛旽)의 아들 신우(辛禑)를 아들로 삼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이인인이 살펴보건대, 이인인은 이인임(李仁任)으로 써야 한다. 신우를 왕으로 세웠다. 《상동》
○ 8년에 신우(辛禑) 원년 신우가 판종부사(判宗簿事) 최원(崔原)을 파견하여 부고를 전하였다. 그러고는 또 말하기를,
“앞서 공사(貢使) 김의(金義)가 조사(朝使) 채빈(蔡斌)을 살해하였기에 사왕(嗣王)이 이미 김의를 잡아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하였다. 황제가 속이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최원을 구류시키고 사신을 파견하여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명사》
○ 10년에 신우 3년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죽은 왕의 시호(諡號)를 내려 주기를 청하였다. 이때는 왕전이 시해당한 지 이미 3년이 지난 뒤였다. 황제가 중서성의 신하에게 칙령하기를,
“고려국왕이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이제서야 비로소 와서 시호를 내려 주기를 청하니, 짐은 몹시 의심스럽다. 무릇 사사로이 임금을 시해하고 조정의 사신을 속임수를 써서 죽였으니, 그들이 어찌 길이 변경을 지키면서 헌장(憲章)을 준수하겠는가. 오는 자를 잘 대우해 주기만 하고 저들의 일에는 간여하지 말라.”
하고, 인하여 최원을 풀어 주어 돌아가게 하였다. 《명산장왕향기》
○ 여름에 고려에서 다시 주의(周誼)를 파견하여 말과 방물을 조공하였으나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명사》
○ 겨울에 고려의 사신이 다시 왔다. 중서성에 칙령하기를,
“고려 왕이 간신에게 시해당하였는데도 사신으로 온 자들이 모두 사왕(嗣王)이라고 하고 있기에, 그들을 억류하고서 캐물어 보았으나, 단서를 찾지 못하였다. 짐은 차마 사신들의 부모와 처자들이 사신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겠기에 특별히 신칙한 다음 돌려보내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는 다시 사신이 나오고, 이를 물리치면 다시 또 나오는데, 이와 같이 한 것이 다섯 차례나 된다. 짐이 보건대, 고려는 중국에 대해서, 한나라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고려의 군신들이 대부분 은혜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속임수를 쓰면서 화만 일으켜 왔다. 그러니 중서성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고려로 가서 사왕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물어보고, 정령(政令)이 어떠한가를 알아보라. 그런 다음 정령이 예전과 같을 경우에는 해마다 바치는 조공으로 말 1천 필을 바치게 하고, 정사를 담당하는 배신(陪臣) 절반을 와서 조회하게 하라. 그리고 내년에는 금 1백 근, 은 1만 냥, 좋은 말 1백 필, 세포(細布) 1만 필을 조공으로 바치되, 이것을 매년 상례로 하게 하고, 억류하고 있는 우리 요동 백성을 모두 국경으로 호송하게 하라. 그렇게 하여야만 왕이 사위(嗣位)한 것이 사실이고 정령이 행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왕을 시해한 역적은 반드시 화를 당할 것이라고 일러 주라.”
하였다. 《명산장왕향기》
○ 11년에 신우 4년 고려가 정사를 담당하고 있는 대신을 파견하여 약속한 조공을 바쳤는데, 감히 ‘사왕(嗣王)’이라고 칭하지 못하고 ‘고려국 왕세자 우(禑)’라고 칭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폐신(嬖臣) 홍륜(洪倫)이 전왕 왕전을 시해하자, 이인인(李仁人)이 홍륜을 죽이고 우(禑)를 세운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황제가 정사를 담당하고 있는 고려의 신하를 돌려보내면서 칙서를 내려 유시하기를,
“네가 간신에게 속임을 당해 중국으로 와서 나를 속이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기에, 내가 이제 너를 돌려보낸다. 그러니 돌아가서 화를 일으킨 주모자에게 짐의 뜻을 말해 주되, ‘죄 없는 중국 사신을 죽였으니 그 죄가 크다. 만약 약속대로 조공을 바치지 않을 경우에는 장차 죄를 추궁하는 군사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라.”
하였다. 《상동》
○ 12년 신우 5년 겨울에 신우가 이무방(李茂芳) 등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는데, 약속과 맞지 않으므로 퇴각시켰다.
○ 섭왕(葉旺)이 요동을 진수하고 있었는데, 마침 고려에서 사신을 요동으로 파견하여 서신과 예물을 올렸다. 섭왕이 이를 조정에 보고하자, 황제가 이르기를,
“신하는 사사로이 교제할 수 없는 법이다. 이는 간첩을 파견한 것이니, 그들을 가볍게 믿지 말라. 저들은 특별히 우리 측에게 약한 면을 보여 변방의 틈을 노리는 것이니, 그것을 되돌려 주어 저들로 하여금 핑계댈 말이 없게 하라.”
하였다.
○ 명나라에서 요왕(遼王) 식(植)을 위하여 성곽을 쌓고 궁실을 지었다. 그때 마침 고려에서 국중(國中)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모두 양곡을 저장하니, 황제가 고려에서 음모를 꾸밀까 염려하여 공사를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이상 모두 명사》
○ 경신에 원나라의 임금이 사막(沙漠)으로 달아난 뒤의 그 임금과 신하들의 사적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 수가 없다. 고려에서 가끔 사신을 보내 통교하면서 북원(北元)이라고 칭하였다. 북원의 임금이 응창(應昌)으로 달아났다가 홍무 3년 경술년 4월에 죽었다. 국인(國人)들이 뒤에 혜종(惠宗)이라고 시호를 올렸는데, 이가 바로 순제(順帝)이다. 그의 아들이 임금의 자리를 이어 나머지 군사들을 이끌고 화림(和林)으로 달아났다. 홍무 10년 정사에 북원에서 고려로 사신이 왔는데, 선광(宣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국인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살펴보건대, 바로 홍무 12년이다. 또다시 첨원(僉院) 보비(甫非)를 파견하여 천원(天元)이라는 연호를 알려왔다. 이에 신우가 영녕군(永寧君) 왕빈(王彬)을 파견하여 가서 축하하도록 하였다. 임금으로 된 지 11년 만에 죽었고 북원에서 시호를 소종(昭宗)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13년에 신우 6년 고려에서 명나라 변경의 신하들에게 자주 금과 비단을 예물로 바쳤는데, 다시 주의(周誼)를 파견하여 요동으로 들어가 일을 꾸미게 하였다. 이에 황제가 변경을 지키는 장수인 도지휘사(都指揮使) 번경(藩敬)과 섭왕(葉旺)에게 칙령을 내리기를,
“내가 일부러 고려로 하여금 조회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고려에서 굳이 조회하게 해 주기를 청하므로 고려와 더불어 약속하였다. 그런데 또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는 지금 또다시 주의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우리 변경으로 들여 보내었으니, 이는 무언가 깊은 속셈이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고려 사람들로 하여금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들어오는 자는 저지시키라. 그리고 수장(首將)이 나오지 않으면서 공물만 바치는 것은 바치지 못하게 하며, 주의는 경사로 보내라. 그러면 내가 조처하겠다.”
하였다. 주의가 경사에 도착하자, 경사에 머물게 하고는 이르기를,
“고려로 하여금 우리 궁인(宮人)의 일에 대해 사신을 파견하여 나에게 와서 변명을 늘어놓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 17년 신우 10년 6월에 신우가 사복 정(司僕正) 최연(崔涓), 예의 판서(禮儀判書) 김진의(金進宜)를 파견하여 말 3천 필을 바쳤다. 또 말하기를,
“금은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니, 말로 대신 바쳤으면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약속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요동의 수장(守將) 당승종(唐勝宗)이 이를 청하자, 황제가 허락하였다. 가을에 또 사신을 파견해 표문을 올려 죽은 왕의 시호 및 사왕(嗣王)의 책봉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명사》
○ 18년 신우 11년 정월에 고려에서 공사(貢使)가 나와 말 5천 필, 금 5백 근, 은 5만 냥, 포 5만 필을 바쳤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하기를,
“짐이 즉위한 이래로 고려국왕 왕전이 먼저 신하로 귀부하였기에 짐이 성의를 다해 그를 대우하였다. 이는 대개 삼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 시해를 당하여 운명할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그 신하가 스스로 그 죄를 덮고자 하여 번번이 와서 청명(請命)하였으나, 짐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는 그로 하여금 스스로 성교(聲敎)를 펴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더욱더 부지런히 와서 청하였다. 저들에게 세공(歲貢)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찌 그것으로 천하를 부유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겠는가. 그들의 성의를 시험해 보고자 해서 그러는 것이다. 이제 그들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고 있으니, 약속한 대로 조공의 숫자를 줄여 주어, 그들로 하여금 3년에 한 번씩 조공을 바치게 하되, 말 50필을 바치게 하라. 그리하여 21년 정조(正朝)에 조공하게 하라.”
하고, 이어 왕전에게 공민왕(恭愍王)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명산장왕향기》
○ 7월에 왕우를 봉하여 고려국왕으로 삼았다. 《명사》
○ 19년에 신우 12년 지휘첨사(指揮詹事) 고가노(高家奴) 등을 보내어 기단(綺段)과 포필(布疋)을 가지고 고려로 가서 말을 사게 하였는데, 말 1필당 문기(文綺) 2필, 포 8필을 주게 하였다. 《속문헌통고》
○ 전에 원나라에서 고려의 포마(鋪馬 역마(驛馬)를 말함)에게 준 몽고 문자(蒙古文字)를 받아들이고, 쌍마(雙馬)에게는 4통의 현자호(玄字號)를, 단마(單馬)에게는 2통의 홍자호(洪字號)를, 기선(起船)에게는 2통의 안자호(安字號)를 내려 주었다. 《대명회전(大明會典)》
○ 20년에 신우 13년 고가노(高家奴) 등이 고려에서 말을 사고는 돌아와서 고려 왕이 말값을 받지 않겠다고 표문을 올려 청하였다고 아뢰었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고, 예부에 유시하기를,
“짐이 여러 번국(藩國)들을 대우함에 있어서 성실과 믿음으로 하기에 힘써 왔다. 고려에서 전에 약속한 것을 지키고는 값을 주고 말을 사는 것을 허락하였기에 사람을 파견해서 말을 사들였다. 그런데 지금 저들이 말 값을 감히 받지 못하겠다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그들의 본심이겠는가. 대개 위세를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다. 위세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짐이 할 바가 아니다. 너는 짐의 이 뜻을 자문에 써 보내어 고려의 국왕에게 알리라.”
하고, 이어 연안후(延安侯) 당승종(唐勝宗)에게 유시해서 고려의 말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쓸만한 말을 가려 값을 갚아 주고 노둔하고 허약한 말은 값을 적당하게 감한 다음 이어 고려의 국왕에게 보고하여 알리게 하였다. 이 칙서가 요동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고려에서 보낸 말 3천 40필이 요동에 도착하였다. 당승종이 칙서의 내용대로 값을 쳐주었다.
○ 이에 앞서 기해년(1359, 공민왕8)에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지방에서 군사들이 일어났을 적에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고려로 흘러 들어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고가노(高家奴)ㆍ서질(徐質) 등이 고려로 말을 사러 갈 때에 미쳐서 예전에 원나라에서 항복해 온 장수 교주(咬住) 등이 이 사실을 말하자, 황제가 고가노 등에게 명하여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려가 판 말을 보내는 편에 이들을 보내어 드디어 요양과 심양에서 옮겨간 유민 나타리(奈朶里)ㆍ불반(不反) 등 45호(戶) 3백 58명이 돌아왔다. 《이상 모두 엄주별집(弇州別集)》
○ 7월에 고려에서 주달하기를,
“요동의 문주(文州 지금의 문천(文川)임)ㆍ고주(高州 지금의 고원(高原)임)ㆍ화주(和州 지금의 영흥(永興)임)ㆍ정주(定州 지금의 정평(定平)임) 등은 모두 우리나라의 옛 영토이니 철령(鐵嶺)에 나아가 둔수(屯守)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예부 상서 이원명(李原名)이 아뢰기를,
“이 몇 주는 모두 원나라의 판도(版圖) 안으로 들어와서 요동에 속하였으며,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습니다. 지금 철령에다가 이미 위(衛)를 설치하였으니, 다시 진정(陳情)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12월에 황제가 호부에 명하여 고려 왕에게 자문(咨文)을 보내게 하였는데, 그 자문에,
“철령의 북쪽ㆍ동쪽ㆍ서쪽의 지역으로 예전에 개원로(開元路)에 소속되었던 곳은 요동에서 관할하고, 철령 남쪽의 예전에 고려에 소속되었던 곳은 고려에서 관할하라. 그리하여 각자 경계를 확실히 정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명사》
○ 21년 신우 14년 4월에 신우가 표문을 올려서 아뢰기를,
“철령의 땅은 실제로는 대대로 고려에서 지켜왔으니, 예전대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고려는 예전에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았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철령이 경계였었다고 꾸며 대니, 이는 속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짐이 말한 대로 효유하여 고려로 하여금 흔단을 일으키지 않게 하라.”
하였다. 8월에 고려의 천호(千戶) 진경(陳景)이 와서 항복하였다. 10월에 신우가 그의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를 청하였다. 《상동》 ○ 《오학편(吾學編)》에는, “이인인(李仁人)이 우(禑)를 위협하여 수금하고는 그의 아들 창(昌)을 세웠다. 그런 다음 강백회(姜伯淮)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와서 조공을 바쳤다.” 하였다.
○ 22년 공양왕(恭讓王) 원년 창이 들어와 조회하기를 청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 《무비지(武備志)》에는, “국상(國相) 이인인이 우를 폐위시키고 창을 세우고는 그해에 두 번이나 입조할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하였다. ○ 이성계가 창을 폐위시키고 정창국원군(定昌國院君) 요(瑤)를 세우고는 사신을 파견하여 이 사실을 고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살펴보건대, 공양왕은 신종(神宗)의 7세손이다.
고려 왕 왕전(王顓)이 홍무 16년에 국상(國相) 이인인(李仁人)에게 피살되었다. 왕의 동생인 왕옹(王顒)이 임금이 되어 국사를 임시로 맡아 다스렸는데, 이인인이 세운 것이다. 홍무 18년에 이르러 말 5천 필, 금 5백 근, 은 5만 냥, 포 5만 필을 바치니, 21년부터 정조(正朝)에 하례하고 공물을 바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명년에 다시 흑백포(黑白布) 1만 필, 말 1천 필을 공물로 바쳤다. 홍무 22년에 권서국사(權署國事) 왕창(王昌)이 들어와 조회하기를 청하였는데, 왕창은 왕옹의 아들이다. 이때 아버지인 왕옹이 갇혀 있었으므로 조서를 내려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얼마 뒤에 다시 왕창을 폐위시키고 정국군왕(定國君王) 왕요(王瑤)를 세웠다. 24년에 말 1만 필을 사들이고 내시 2백 명을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사승고오(史乘攷誤)》 ○ 살펴보건대, 고려 공민왕 원년인 임진년(1352)은 원나라 순제 지정(至正) 12년이다. 공민왕 17년 무신(1368)에 이르러서 황명의 태조황제가 즉위하였다. 그 뒤에 또 6년이 지난 갑인년(1374)에 공민왕이 환관(宦官) 최만생(崔萬生)과 행신(幸臣) 홍륜(洪倫) 등에게 시해당하였는데, 바로 홍무 7년이었다. 그러니 엄주산인(弇州山人 명나라 왕세정(王世貞)의 호임)이 홍무 16년이라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그리고 공민왕이 시해당한 뒤 이인임(李仁任)이 신우(辛禑)를 세웠는데, 잘못 신옹(辛顒)을 세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우는 본디 신돈(辛旽)의 첩 반야(般若)의 소생인데 공민왕이 자기의 자식이라고 칭한 자이다. 그러므로 왕세정이 왕의 동생 왕옹이라고 한 것은 더욱 잘못된 것이다.
○ 24년에 공양왕 3년 고려에 조서를 내려서 말 1만 필을 샀다. 8월에 권국사(權國事) 왕요(王瑤)가 판선공시(判繕工寺) 양천식(楊天植) 등을 파견하여 고려에서 판 말 1천 5백 필을 올렸다. 요동에 와서 아뢰기를,
“이제 황제의 조서를 받들었으니 어찌 감히 온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근년에 들어 생산된 말이 체구가 작아 명령에 부응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왜적을 막느라 멀리 달리고 무거운 짐을 지고 추위를 견뎌 내는 데 있어 소방에서 이 말들에게 의지하고 있으므로 감히 이만큼만 먼저 올립니다. 나머지 말들은 차례대로 봉진하겠습니다.”
하였다. 11월에 고려의 신하 김지탁(金之鐸) 등이 고려에서 판 말 2천 5백 필을 올리기 위해 요동에 이르니, 황제가 정료위 지휘첨사(定遼衛指揮僉事) 장충(張忠)에게 명하여 광녕위(廣寧衛)ㆍ중호위(中護衛) 등에 보내어 기르게 하였다. 《엄주별집》
○ 12월에 왕요가 그의 아들 왕석(王奭)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을 바쳤다. 《명사》
○ 25년에 공양왕 4년 고려국의 지밀직사(知密直事) 조반(趙胖) 등이 고려의 도평의사(都評議司)에서 올리는 주문(奏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공민왕이 훙한 뒤부터 사자(嗣子)가 없었습니다. 이에 권신(權臣)인 이인인(李仁人)이 신돈의 아들 신우를 세워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으나, 신우는 어리석고 포악하며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여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침범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장 이성계(李成桂)가 안 된다고 하면서 군사를 되돌리니, 왕우가 두려워서 아들인 신창(辛昌)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공민왕의 비 안씨(安氏)에게 계품한 다음 왕요(王瑤)에게 국사를 맡겼는데, 왕요 역시 혼미하여 참언만을 들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왕석(王奭) 역시 어리석고 우매하며 주색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자, 신우의 일당인 현우보(玄禹寶) 등과 몰래 모의하여 다시 신우를 복위시키려고 꾀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문하시랑(守門下侍郞) 정몽주(鄭夢周)는 요동을 공격하려던 음모가 이성계(李成桂)에게 저지당하자, 몰래 왕요에게 참소하여 해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사직과 생령들을 염려하여 왕요가 백성들을 다스리기에는 부족하다고 하면서 공민왕비 안씨의 명령으로 왕요를 사저(私邸)로 물러나 있게 한 뒤, 나라 사람들과 기로(耆老)들이 함께 문하시랑(門下侍郞) 이성계를 추대하여 국사를 주관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아룁니다.”
하였다. 이어 이름을 이단(李旦)으로 바꾸고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고쳤는데, 황제가 모두 따라 주었다. 《사승고오》
[주D-001]탐라(耽羅)에 …… 무리들 : 김통정(金通精)이 거느리고 들어간 삼별초(三別抄)의 군대를 말한다.
[주D-002]관직의 …… 하였다 : 이때 원나라에서 원나라의 관명(官名)과 일치하는 것은 참람하다는 이유로, 고려의 관직 가운데 최고 행정 기구인 중서성(中書省)ㆍ문하성(門下省)ㆍ상서성(尙書省)을 통합하여 첨의부(僉議府)란 단일 기구로 개편하는 동시에 그 장관을 첨의중찬(僉議中贊)이라 하고, 상서육부(尙書六部)는 이부(吏部)와 예부(禮部)를 합하여 전리사(典理司)로, 병부(兵部)를 군부사(軍簿司)로, 호부(戶部)를 판도사(版圖司)로, 형부(刑部)를 전법사(典法司)로 고쳤으며, 사(司)의 장관을 상서(尙書)에서 판서(判書)로, 차관을 시랑(侍郞)에서 총랑(摠郞)으로 고쳤다. 또 추밀원(樞密院)은 밀직사(密直司)라고 개칭하여 첨의부와 함께 양부(兩府)라 하고, 양부 요관(要官)의 합의 기관인 도병마사(都兵馬使)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개칭하였으며, 왕과 왕족에 관련되는 칭호 및 용어도 모두 고쳤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613쪽》
[주D-003]김방경 …… 일으켰다 : 이때 김방경은 난을 일으키지 않고 무고(誣告)를 당하였다. 당시에 김방경이 권력을 잡고 일본을 정벌한 데 대한 논공행상을 주관하면서 공평하게 하지 않자, 대장군 위득유(韋得儒), 중랑(中郞) 노진의(盧進義)가 개인감정으로 흔도(忻都)에게 ‘김방경이 그의 아들과 사위 및 공유(孔愉)ㆍ나유(羅裕)ㆍ안사정(安社貞)ㆍ김천록(金天祿) 등 4백 명과 모의하여 왕과 공주 및 다루가치를 제거하고 강화도로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무고하였는데, 홍다구(洪茶邱)에 의해 대청도(大靑島)로 유배 갔다가 얼마 뒤 무고임이 밝혀져 석방되었다.《東史綱目 第12上》
[주D-004]김수(金㥅) : 《고려사》와 《동사강목》에는 김흔(金忻)으로 되어 있다.
[주D-005]해도(海島) : 이때 김방경은 홍다구(洪茶邱)의 모함으로 대청도(大靑島)로, 김흔은 백령도(白翎島)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무고임이 밝혀져 풀려났다.《東史綱目 第12上》
[주D-006]화장 수군(火長水軍) : 전선(戰船)을 지휘하여 항해하는 수군을 말한다.
[주D-007]초(鈔) : 지폐(紙幣)를 말한다. 회자(會子)ㆍ보초(寶鈔)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저화(楮貨)는 이를 모방한 것이다.
[주D-008]일본행성(日本行省) :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설치하였던 관청이다. 제1차 일본 정벌에 실패한 원 세조가 충렬왕 6년(1280)에 일본행성을 설치하고 제2차 일본 정벌을 준비, 실행에 옮겼다가 실패하자 충렬왕 8년에 폐지하였다. 그 후 제3차 일본 정벌이 계획됨에 따라 충렬왕 9년에 다시 설치하였으나, 중국 강남에서 소요가 일어남에 따라 정벌 계획을 중지하는 동시에 일본행성도 폐지하였다. 그 후 다시 충렬왕 11년에 3차로 설치하고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다음 해 1월에 계획의 중지로 폐지하였다. 정동행성은 본디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설치했으나, 원나라에서 일본 정벌을 포기한 뒤로는 고려에 대한 간섭 기관으로 변모되어 공민왕 5년(1356)까지 존속하였다.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ㆍ정동행성(征東行省)ㆍ정동성(征東省) 등으로도 칭하였다.
[주D-009]평호도(平壺島) : 일본 서해도(西海道) 비전주(肥前州)에 속하며, 대마도와 구주(九州) 사이에 있는 일기도(壹岐島)의 동쪽에 있다. 평호도(平戶島)라고도 한다.
[주D-010]내안(乃顔) : 원나라 태조의 동생인 첨목가알적근(帖木哥斡赤斤)의 5대손으로 흥안령(興安嶺) 동쪽 요동 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이해에 동쪽 지방에 있는 여러 왕들을 충동해 4만 명의 군사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가 원 세조 홀필렬(忽必烈)에게 패하여 사로잡혀서 처형되었다. 그의 나머지 잔당들이 충렬왕 16년(1290)에 합단(哈丹)과 합류하여 고려의 북변을 침입, 철령(鐵嶺)을 넘어 양근(楊根)을 함락하였는데, 고려와 원나라 군사가 힘을 합해 연기(燕岐)에서 대파하여 물리쳤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624쪽》
[주D-011]합단(合丹) : 원나라 태조의 동생인 합적온(合赤溫)의 손자이다. 내안(乃顔)의 여당(餘黨)으로, 내안이 토벌된 뒤 다시 반기를 들어 일어났다가 원나라 관군에게 패하였다. 그러자 방비가 약한 동쪽으로 진출해 충렬왕 16년에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고려로 침입해 와 양근(楊根)을 함락하였으나, 연기(燕岐)에서 패하여 북쪽으로 달아났다.
[주D-012]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이름이다.
[주D-013]계수관(界首官) : 주위에 있는 주부(州府)와 군현(郡縣)을 관할하는 중심이 되는 고을을 말한다.
[주D-014]만권당(萬卷堂) : 충선왕이 재위 5년 만에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원나라 서울인 연경(燕京)에다 지은 독서당(讀書堂)으로, 충숙왕 1년(1314)에 건립하였다. 고금의 많은 진서(珍書)를 수집하여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본국으로부터 이제현(李齊賢)을 불러 그 당시 중국의 유명한 학자인 조맹부(趙孟頫)ㆍ염복(閻復)ㆍ우집(虞集) 등과 함께 경사(經史)를 연구, 토론케 하여 두 나라 간의 문예(文藝)가 많이 교류되었다.
[주D-015]탐라에서 …… 두고 : 이 부분의 원문은 ‘自耽羅 至鴨綠江 幷楊村海口 凡十一所’이다.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를 보면 “지원 30년에 해안선을 따라 수역(水驛)을 설치하였는데, 탐라에서 압록강까지와 양주(楊州)의 바다 입구까지 합하여 30개소였다.”고 하였고, 《원사》 권17 본기 제17 세조 14에는 ‘自耽羅至鴨綠江口 凡十一所’라고 되어 있다. 이에 ‘幷楊村海’를 빼고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6]고려 왕 …… 요청하였다 : 이해에 충렬왕의 비(妃)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죽자, 원나라에 있던 그의 아들 충선왕(忠宣王) 왕원(王謜)이 귀국하여 제국대장공주가 죽은 원인이 내총(內寵)을 투기하는 자들의 저주 때문이라고 하면서 충렬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무비(無比) 등 여러 사람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이에 충렬왕은 아들의 지나친 처사와 왕비의 죽음 및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에 충격을 받아 충선왕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태상왕(太上王)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7개월 만에 다시 원나라의 명에 의해 복위(復位)하였다.
[주D-017]겁설대(怯薛䚟) : 시위하는 군사를 말한다. 겁설(怯薛)은 몽고어로 시위(侍衛)를 뜻하며, 겁설알(怯薛歹)이라고도 한다.
[주D-018]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를 …… 짓 : 충선왕의 정비(正妃)는 원나라 진왕(晉王)의 딸 계국대장공주인데, 계국대장공주와 원나라에서 혼사를 맺기 전에 고려에 있으면서 조인규(趙仁規)의 딸을 맞아들여 비(妃)로 삼았었다. 충렬왕 24년에 충선왕이 계국대장공주와 함께 원나라로부터 고려로 돌아와 즉위한 뒤 조비(趙妃)만을 총애하자, 계국대장공주는 조비의 어머니가 왕으로 하여금 조비만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도록 저주를 행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원나라 조정에 보냈다. 이에 원나라에서는 충선왕을 원나라로 들어오게 하고, 다시 충렬왕이 복위하게 하였다.
[주D-019]고려 왕 …… 하였다 : 충선왕이 원나라의 명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 원나라로 들어간 뒤에도 충선왕에 대해 원한을 품은 오기(吳祈)ㆍ송린(宋璘)ㆍ송방영(宋邦英) 등이 계속해서 충선왕을 모함하여 충렬왕과 충선왕 사이를 이간시켜 귀국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계국대장공주를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에게 개가(改嫁)시켜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성사되기 직전에 원나라 내부에 모반 사건이 일어나 충렬왕 34년(1308)에 원나라 인종(仁宗)이 즉위함에 따라 충렬왕과 충선왕의 불화가 풀려 좌절되어 송인ㆍ송방영 등의 일파와 서흥후 왕전은 피살되었다.
[주D-020]10월 …… 하였다 : 이 기사가 《원사》 권21에는 성종 대덕(大德) 8년의 기사로 되어 있는바, 편찬자가 잘못 기록한 듯하다.
[주D-021]보탑공주(寶塔公主) : 계국대장공주를 말한다.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이다.
[주D-022]심양왕(瀋陽王) : 고려 때 원나라로부터 받은 봉작(封爵)의 하나이다.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武宗)을 추대한 공으로 처음으로 심양왕의 봉작을 받았다. 이는 그 당시에 심양 즉 지금의 봉천(奉天) 등지가 고려인의 전쟁 포로나 유민(流民)들이 많이 살면서 특수한 지역을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상 경제상으로도 아주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이 지방을 맡아 다스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D-023]충선왕이 …… 옹립하였다 : 원나라의 성종이 붕어하자 승상인 아홀대(阿忽臺) 등이 반란을 꾀하였는데, 원나라에 가 있던 충선왕이 뒤에 인종(仁宗)이 된 애육려발력팔달(愛育黎拔力八達)과 함께 아홀대를 잡아 죽이고 회령왕 해산을 맞이하여 와 황제로 옹립하였는데, 이가 바로 무종이다. 애육려발력팔달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충선왕과 함께 생활하여 아주 친하였었다.
[주D-024]왕장(王璋) : 충선왕의 고친 이름이다. 충선왕의 원 이름은 왕원(王謜)이다. 《원사》에는 왕장(王章)으로 되어 있으나 왕장(王璋)이 맞으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5]상도(上都) : 원나라는 이때 연경(燕京)을 대도(大都)라 하고 개평(開平)을 상도(上都)라 하여 여름에는 황제가 대도에 있고 겨울에는 상도에 있었다.
[주D-026]충선왕 5년 …… 안치하였다 : 《신원사》 권249 외국열전(外國列傳)에는, “연우(延祐) 6년(1319, 충숙왕6)에 왕원(王謜)이 강남(江南)에 강향(降香)하러 가는데, 강소성(江蘇省) 단사현(丹徙縣) 서북쪽에 있는 금산사(金山寺)에 이르렀을 적에 영종(英宗)이 갑자기 불러들였다. 왕원이 복명(復命)하자, 갑사(甲士)들이 갑자기 그를 에워싸 데려가자 시종하던 신하들이 모두 달아났다. 왕원이 대도(大都)에 이르렀을 때 중서성에 명하여 왕원을 고려로 호송하게 하였는데, 왕원이 머뭇거리며 곧바로 떠나지 않았다. 이에 10월에 왕원을 형부의 옥에 수금하였다가 얼마 뒤 그의 머리를 깎고 석불사(石佛寺)에 안치시켰다.” 하였으며,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3하 충숙왕 6년 조에는, “3월에 상왕(上王) 즉, 충선왕이 강절(江浙)에서 강향(降香)하였다.” 하였다. 이상에 근거하여 보면 이 기사가 충선왕 5년 조에 들어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인 듯하다.
[주D-027]태정제(泰定帝) : 태정(泰定)은 원나라 진종(晉宗)의 연호이다.
[주D-028]고려의 …… 완자독(完者禿) : 완택독(完澤禿). 완자독은 심양왕 왕고(王暠)의 몽고식 이름이다. 왕고는 심양왕으로 있으면서 원나라 양왕(梁王)의 사위가 되어 충선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고려의 왕위를 노려 여러 차례 충숙왕을 모함하였다.
[주D-029]팔독마타아지(八禿麻朶兒只) : 충목왕의 몽고식 이름으로, 《고려사》와 《동사강목》에는 팔사마타아지(八沙麻朶阿只)로 표기되어 있다.
[주D-030]게양현(揭陽縣) :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주(潮州)이다.
[주D-031]악양(岳陽)에 …… 훙하였다 : 이때 충혜왕은 단신으로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유배지로 가다가 악양현에서 죽었는데, 짐독(鴆毒)을 먹고 죽었다고도 하고 귤(橘)을 먹고 죽었다고도 하여 사인(死因)이 분명치 않다.《東史綱目 第14上》
[주D-032]보탑실련왕(寶塔實憐王) : 충혜왕을 가리킨다. 보탑실련은 충혜왕의 몽고식 이름이다. 부답실리(不答失里)로 표기하기도 한다.
[주D-033]충헌왕(忠憲王) : 고종(高宗)을 가리킨다.
[주D-034]거란장(契丹場) : 고려에 귀속(歸屬)한 거란인들의 집단 거주지를 말한다. 고종 6년(1219)에 강동성(江東城)의 거란인들을 토벌할 때 잡은 포로들을 각도(各道)에 나누어 보내 인구가 적은 곳에 집단으로 거주하게 하고 땅을 주어 농사짓게 하였다.
[주D-035]충경왕(忠敬王) : 원종(元宗)을 가리킨다.
[주D-036]수달달(水達達) : 흑룡강(黑龍江)ㆍ송화강(松花江) 유역에서 수초(水草)를 따라 다니며 사는 달단(達靼)을 가리킨다.《新元史 地理志 2》
[주D-037]익지례불화왕(益知禮不花王) : 익지례불화는 충선왕의 몽고식 이름이다. 익지례보화(益知禮普花)로 표기하기도 한다.
[주D-038]홀독겁미사공주(忽篤怯迷思公主) :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가리킨다.
[주D-039]부답실리의 …… 폐위시켰다 : 부답실리의 아들은 충정왕(忠定王)이다. 충정왕이 충목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정세가 좋지 못하였다. 이때 충혜왕의 동생으로 충정왕의 숙부인 강릉대군(江陵大君) 왕기(王祺)가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공주(魯國公主)와 결혼하여 원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었다. 그러자 원나라에서는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대군 왕기를 왕으로 삼았는데, 이가 바로 공민왕이다. 충정왕은 폐위된 뒤 강화도로 물러나 있다가 짐독(鴆毒)을 먹고 죽었다.
[주D-040]관선생(關先生) …… 이르렀다 :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말한다. 홍건적은 한림아(韓林兒)를 황제로 삼고 국호를 송(宋)이라고 한 다음 중국 각지를 노략질하다가 만주로 침입하여 요양(遼陽)을 함락시켰으나, 원나라 군사들에게 쫓겨 고려의 영토로 들어오게 되었다. 공민왕 8년(1359)에 1차로 침입하였다가 이방실(李芳實)이 거느린 고려 군사에 의해 격파되었다. 그 뒤 공민왕 10년(1361)에 반성(潘城)ㆍ사유(沙劉)ㆍ관선생(關先生)ㆍ주원수(朱元帥)ㆍ파두반(破頭潘) 등이 10여 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침입, 자비령(慈悲嶺)을 넘어 개경(開京)을 함락하였다. 공민왕은 안동(安東)으로 피란하여 있으면서 정세운(鄭世雲) 등으로 하여금 홍건적을 토벌하게 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주D-041]탐라(耽羅)로 도망쳤다 : 이 기사는 잘못되었다. 이때 공민왕은 복주(福州) 즉, 지금의 안동(安東)으로 피란하였다.
[주D-042]왕전(王顓) : 공민왕의 고친 이름이다. 공민왕의 원 이름은 왕기(王祺)이다.
[주D-043]성유득(成惟得) : 《고려사》와 《동사강목》에는 성준득(成准得)으로 되어 있다.
[주D-044]김갑량(金甲兩) : 《고려사》와 《동사강목》에는 김갑우(金甲雨)로 되어 있다.
[주D-045]다음 해에 …… 되돌려 보냈다 : 명나라 황제가 고려의 향시에 합격한 자를 경사(京師)의 회시에 응시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 박실(朴實)ㆍ김도(金濤)ㆍ유백유(柳伯濡) 세 사람이 응시하여 그 가운데 김도가 급제하였다. 명나라에서 동창부(東昌府) 구현(丘縣)의 승(丞)을 제수하였으나, 중국말을 모른다는 이유로 사직하고서 되돌아왔다.《東史綱目 第15下》
[주D-046]난수산(蘭秀山) : 절강성(浙江省) 정해현(定海縣) 바다에 있는 산의 이름으로, 수산도(壽山島)라고도 한다.
[주D-047]정료위(定遼衛) : 명나라에서 요동 지방에 둔 관부(官府)이다. 명나라에서 중ㆍ좌ㆍ우ㆍ전ㆍ후 오위(五衛)를 설치하였는데, 지금의 봉천(奉天) 요양현(遼陽縣)이다.
[주D-048]전후(甸侯)나 수복(綏服) : 전후는 전복(甸服)을 맡아 다스리는 제후를 말하는데, 전복은 주(周)나라 시대의 제도인 오복(五服)의 하나로, 왕기(王畿)로부터 5백 리 이내의 지역을 말한다. 수복은 왕기에서 1천 리에서 1천 5백 리 떨어진 지역을 가리킨다.
[주D-049]신우(辛禑) : 우왕(禑王)의 성씨(姓氏)에 대해서는 신돈(辛旽)의 아들이라는 설과 공민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정인지(鄭麟趾) 등이 편찬한 《고려사》에는 “공민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신돈의 첩의 아들 모니노(牟尼奴)를 자기의 자식이라 사칭하여 궁중에 들인 것이다.”고 하여 이를 왕씨세가편(王氏世家編)에 넣지 않고 열전반역편(列傳反逆編)에 넣었다. 그러나 선유(先儒)들 가운데는 왕왕 신씨가 아니라 공민왕의 실제 아들이라 하였으며, 근래 학자 대부분은 이 설을 따라 “우(禑)를 신돈의 자식이라 하는 것은 이씨조선을 두호(斗護)하고 고려 왕실을 필연적 쇠락에 붙이기 위한 곡필(曲筆)에서 나온 것이다.”고 한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670~671쪽》
[주D-050]공사(貢使) …… 몰수하였다 : 우왕이 즉위하고 몇 달 뒤에 명나라 사신 임밀(林密)과 채빈(蔡斌)이 고려로 왔다가 돌아가는 도중에 개주참(開州站)에서 호송관(護送官) 김의에게 살해당하고, 김의는 임밀을 잡아 가지고 북원(北元)으로 달아났다. 《고려사》에는 이 사건이 이인임(李仁任)이 전왕을 살해한 사건에 대해 명나라로부터 추궁당할 것이 두려워 김의를 시켜서 살해한 것이라고 하였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676쪽》
[주D-051]요왕(遼王) 식(植) : 명나라 태조의 열다섯째 아들로 요왕에 봉해졌다.
[주D-052]응창(應昌) : 열하성(熱河省) 경붕현(經棚縣)의 서쪽, 찰합이(察哈爾) 북부에 있는 지명으로, 원나라 순제(順帝)가 이곳에서 죽었다.
[주D-053]궁인(宮人)의 일 : 궁인은 고려 사람으로서 원나라에 벼슬하여 환관으로 있다가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간 뒤에 그대로 남아 명나라의 환관으로 있던 손 내시(孫內侍)를 말한다. 손 내시가 공민왕 21년 5월에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들고 고려로 와서 채단(綵緞)과 사라(紗羅)를 바친 뒤 아무런 이유 없이 불은사(佛恩寺) 뒤편의 소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살해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高麗史 世家43》
[주D-054]철령(鐵嶺) :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에 있는 관문(關門)이다. 고려 말기에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 철령위(鐵嶺衛)의 귀속 문제가 있었다. 1387년 1월에 명나라에 다녀온 설장수(偰長壽)가 철령 이북은 본래 원나라에 속했던 땅이라는 이유로 명나라에서 이 지역을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려 한다고 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 문제로 5도(道)에 명을 내려 성을 수축하게 하고 여러 장수들을 북방에 보내어 대비케 한 다음 박선중(朴宣中)을 명나라에 보내어 철령 이북의 문천(文川)ㆍ고원(高原)ㆍ영흥(永興)ㆍ정평(定平)ㆍ함흥(咸興) 등과 공험진(公險鎭)까지 고려의 영토임을 밝히면서 철령위의 설치를 중지해 달라고 교섭하는 한편, 최영(崔瑩)은 중신 회의를 열고 정료위(定遼衛) 정벌을 논의한 결과 모두 화의(和議)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자 최영은 왕과 비밀회의를 열어 요동을 정벌하기로 하고 최영이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출군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786쪽 주》
[주D-055]개원로(開元路) : 요양성(遼陽城)에 소속된 지명으로, 원나라에서 처음 설치하였다. 《원사》 권59 지리지(地理志)에, “을미년(몽고 태종7)에 개원만호부(開元萬戶府)와 남경만호부(南京萬戶府)를 설치하고 치소(治所)를 황룡부(黃龍府) 즉,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농안(農安)에 두었다. 지원(至元) 4년에 다시 요동로총관부(遼東路摠管府)로 바꾸었다가 23년에 개원로(開元路)로 바꾼 다음 함평부(咸平府) 즉 지금의 봉천(奉天) 개원현(開原縣)으로 치소를 옮겼다.” 하였다.
[주D-056]8월에 …… 항복하였다 : 명나라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는 것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명나라에서 거절하자, 최영(崔瑩)ㆍ조민수(曺敏修)ㆍ이성계(李成桂) 등게 명하여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그때 진경이 예주(乂州)에 주둔해 있다가 군량이 떨어지자 군사를 후퇴시켰다. 그 뒤 이성계가 회군(回軍)하여 우왕과 최영을 가두자, 진경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중국으로 도망쳤다.《明史 卷320 朝鮮列傳》
0.번역출처 :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