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간 아내에 바치는 눈물의 묘지명
조반 부인 이 씨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후기 이모본이지만 고려말 상류층 여성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남편 조반은 고려말, 조선초 대중국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내의 이름은 '경애'였다. 정숙하고 현명한 여자였다. 그녀는 항상 말하기를 "내가 먼저 천한 목숨을 거둔 후에 당신의 모든 일이 잘 되어 많은 녹을 받는 관직에 있게 되더라도 살림 재주가 없었다 원망 말고 가난을 함께 이겨내던 일만 기억하여 주기 바래요"라고 했다.
남편 최루백은 과거에 합격했지만 벼슬이 낮아 가난했다. 뒤늦게 간관(諫官)의 자리인 종6품 우정언(右正言) 지제고(知制誥)로 승진한다. 아내는 행여 고지식한 남편이 딴 마음을 먹을까 "가시나무 비녀에 무명치마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지라도 달게 여길 거예요"라고 안심시켰다.
고생만 하던 그녀는 남편의 승진 이듬해 병이 들어 47세의 나이로 그만 세상을 등지고 만다. 최루백은 2년 뒤인 1148년(고려 의종 2) 묘지명을 직접 지어 조강지처에게 바쳤다. 최루백은 "함께 묻히지 못함이 애통하오. 믿음으로 맹세컨데 당신을 잊지 않으리···"라고 절절한 심정을 담았다.
염경애 묘지명(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남편 최루백이 썼다. 최루백과 염경애의 부부·가족 관계가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고려묘지명을 통해 결혼과 사랑 등 당대 사람들의 삶을 보다 면밀하게 엿볼 수 있다. ▶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고려여인 염경애(廉瓊愛, 1100~1146) 묘지명(銘)에 실린 내용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염경애 묘지명은 부부·가족 관계를 진솔하게 묘사하고 있다. 묘지명은 무덤의 주인공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무덤 안에 넣는 기록물이다.
아내의 묘지명을 쓴 최루백(?~1205)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삼강행실도>에 등장하는 효자이다. 그는 15세때 아버지가 호랑이에 물려죽자 원수를 갚기 위해 산으로 가 잠이 든 호랑이를 도끼로 쳐서 죽였다. 그리고 배를 갈라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 지내고 무덤 곁에 초막을 지어 3년 동안 살았다. 최루백은 아내가 죽고서도 무려 59년을 더 생존했다. 염 씨와 함께 묻히고 싶다던 최루백은 재혼했고 세명의 아들딸을 더 뒀다. 이런 사실을 밝힌 최루백 묘지명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다수의 고려 묘지명을 보관하고 있다. 이를 포함해 현재 전해지는 것은 300개에 달한다. 우리나라에서 정형화된 형태의 묘지명은 고려시대 주로 발견된다. 죽은 사람의 생몰 일시, 출신지, 집안 내력, 가족 관계, 관직과 행적, 인품 등 생애와 함께 죽음을 애도하는 운문이 적힌 형식이다. 주로 점판암을 두껍지 않으면서 네모 반듯하게 다듬은 판석에 글씨를 새겼지만 다양한 모양도 존재한다. 사신, 쌍룡, 서수상과 연꽃, 당초, 구름 등의 무늬를 넣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문헌이 전하지만 바로 직전의 왕조인 고려는 아쉽게도 남은 기록물이 고려사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따라서 고려 묘지명은 당시의 풍속과 제도 등 실상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결혼과 사랑 등 고려시대 사람들의 삶을 보다 면밀하게 엿볼 수 있다. 서예사, 미술사 등 학술적 가치도 조명 받는다. 여성의 묘지석도 50여점이나 존재해 고려 여성사 연구에 기초가 되며 운문의 세련된 문장은 고려문학사를 풍성하게 한다.
'장가(丈家)간다'고 했듯 고려 남자들은 혼인 후 처가에서 살았다. 자녀들도 외가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혼인한 여성이 친정 부모를 모시고 살거나, 아버지가 사망한 후 계모의 집에서 생활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최윤의 처 김 씨 묘지명(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최윤의는 <상정고금예문>을 저술한 대학자였지만 죽은 아내에게 눈물의 묘지명을 바쳤다. 묘지명의 테두리를 당초문으로 정성스럽게 꾸몄다. ▶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고려 중기 문신 이문탁(1109~1187) 묘지명에는 충남 청양군 향리집안 출신의 가계와 수학과정, 관직생활 등이 세세히 서술돼 있다. 이문탁의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는 재혼했다. 아버지도 곧 사망하는데 이문탁은 뜻밖에도 개경의 계모 집으로 올라와 성장하면서 학문을 시작한다. 이문탁은 함께 자란 계모의 아들 허정선사 담요와도 우애가 깊었다고 묘지명을 기술한다.
고려중기 문신 김유신의 부인 이씨(?~1192)는 딸의 집에서 살았다. 이 씨 묘지명에 의하면, 이 씨는 일찍 남편과 사별해 홀로 살았다. 그러다가 딸이 개경의 관리 최돈의의 계실로 들어가자 딸을 따라 이사해 살았다고 이 씨의 묘지명은 설명한다. 딸과 사위가 친정어머니를 모셨던 것이다.
여성의 재혼은 자연스러웠고 심지어 재혼한 여성들은 새남편에게 당당했다. 고려 중기 문신 이승장(1137~1191) 묘지명은 자식을 위해 재혼한 이승장의 어머니를 언급한다. 새 남편은 가난을 핑계로 전 남편의 아들을 공부시키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전남편과의 의리까지 들먹이며 새남편을 질책한다. 그녀는 "저는 먹고 살려고 부끄럽게도 전 남편과의 의리를 저버렸지요. 아들의 친아버지가 다니던 사립학교에 입학시켜 그 뒤를 잇게 하지 않는다면 죽은 뒤에 무슨 낯으로 전 남편을 볼까요"라고 따졌다. 재혼에 대한 관념과 재혼 가정의 일면, 재혼여성의 발언권 등이 가늠된다.
사회상과 세태도 읽힌다. 고려는 불교 국가였지만 산신이나 성황신 등 민간신앙도 숭배됐다. 귀신을 업신 여겼다고 관직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고려 중기 문신 함유일(1106~1185)은 개경에서 귀신 모시는 곳을 모두 불태우고 무당을 성밖으로 내쫓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함유일 묘지명은 "함경도 안변의 무속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절하지도 않고 술잔을 올리지도 않으니 담당 관리가 귀신을 업신여겼다 보고하여 파면 되었다"고 했다.
정치 현황도 드러난다. 고려는 천자(天子)의 나라, 황제의 나라를 자처했다. 후삼국을 통일한 데 대해 자부심이 컸고 고려 역시 하나의 천하라는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복녕궁주 묘지명은 그녀에 대해 '천자의 따님'으로 지칭하고 있다. 복녕궁주(福寧宮主, 1095~1132)는 고려 제15대 숙종(재위 1095~1105)의 넷째 딸이자 제16대 예종(재위 1105∼1122)의 친동생이다. 다른 묘지명들도 고려왕을 칭하면서 '천자'라는 표현을 쓴다.
경주 향리 딸 김 씨 묘지명(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꽃잎 모양의 묘지명. 묘지명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기도 했다.+ ▶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고려는 대륙에 진출해 금나라, 청나라를 세웠던 여진족을 우리 민족의 일원으로 여겼다. 여진 정벌의 명장 윤관의 아들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윤언이(?~1149) 묘지명에 그런 인식이 잘 명시돼 있다. 당시 전성기를 맞은 금나라가 고려에 신하의 예를 요구했다. 권신 이자겸을 중심으로 조정의 여론이 칭신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 때 윤언이가 홀로 반대의 상소를 임금에게 올린다. 묘지명에 의하면, 그는 상소에서 "여진은 본래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손으로서 신하가 되어 차례로 우리 임금께 조공을 바쳐왔습니다. 국경 근처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호적에 올라 있습니다"며 "이런 우리가 어찌 거꾸로 그들의 신하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중국 후주 출신의 쌍기는 고려 조정에서 과거제 도입을 주관했다. 묘지명 중에는 귀화 중국인의 것도 일부 있다. 당시 고려에 중국 귀화자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채인범은 중국 남당 출신으로 970년(광종 21) 사신을 따라 고려에 왔다가 우리나라 사람이 됐고 오랜기간 관리로 근무했다. 그의 묘지명은 "경전과 역사에 널리 통달하고 문장을 잘 짓는 큰 학자였으며 욕심이 없고 신중하여 여러 임금을 섬겼다"고 서술한다. 채인범 묘지명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 묘지명이기도 하다.
묘지명은 인간사의 희노애락이 가감없이 표현한다. 최윤의(1102~1162)는 해동공자 최충의 현손으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을 편찬한 최고의 학자였다. 그는 먼저 떠나보낸 아내에 대해 눈물의 묘지명을 썼다. 최윤의 처 김 씨 묘지명은 "아들은 겨우 일고여덟이고 딸들도 아직 시집을 가지 못했소. 어떻게 하루 아침에 날 두고 갈 수 있다는 말이오. 당신의 일평생을 적으려고 붓을 잡았지만 흐르는 눈물을 어쩌지 못해 더 이상 써내려 갈 수가 없구려···"라고 적고있다. 고려의 대학자도 한낱 지아비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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