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누가복음 17장 7-10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지난주 출애굽기 3장에 있는 말씀을 설교하면서 상급에 대한 내용을 언급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부분을 좀 더 정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자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가지의 가르침을 가르치고 난 뒤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먼저 누가복음 17장 1절 이하 6절을 정리해 보면 예수님께서 세 가지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첫 번째는 실족하게 하는 것에 관한 가르침이고, 두 번째는 용서에 대한 가르침이고, 세 번째는 믿음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각각의 가르침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과 연계해서 생각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먼저 주님은 1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모든 사람이 실족하게 하는 것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하는 자는 화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2절에서는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연자맷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빠지는 게 남을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는 만일 네 손이나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버리라, 네 눈이 범죄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마18:6-10, 막9:42-48). 왜냐하면 손이나 발, 눈이 없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그것을 가지고 지옥 가는 것보다 훨씬 더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는 실족의 문제를 무엇과 연결시키느냐 하면 영생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실족하게 하는 자는 단순히 세상 삶을 살면서 사람들이 길을 가는 데 그 길 가에 돌을 놓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그런 정도의 걸림돌이 아니는 걸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진리의 문제와 관련된 그런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족하는 것, 거저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도 열매로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영생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문제와 관련된 그런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는 좀 더 살펴야 할 것들이 있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바로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1장으로 가시면 진리의 문제와 관련해 진리라고 말하면서도 진리가 아닌, 오히려 진리를 말한다고 하면서 남을 실족하게 하는 한 부류에 대해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52절에 보시면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 마태복음에 있는데, 거기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없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3-15)
결국 주님이 제자들에게 교훈하시는 것은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를 계속해서 하고 계시는 겁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바리새인들, 율법교사들을 향한 내용이고, 그것을 지금 제자들에게 교훈하고 계시는 겁니다. 누가복음 12장 1절에서 바리새인들과 관련해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말씀하셨고, 또한 16장 14절과 15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요, 스스로 옳다 하여 사람들 앞에서는 높임을 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미움을 받는 자들이라 경계하셨던 바로 그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 17장 1절과 2절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을, 혹은 그들과 같은 부류들을 염두해 두시고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너희는 바리새인처럼 진리에 있어 실족하게 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두 번째 가르침이 제자들에게 있기를 바라십니다. 3절에 보시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그런데 그 용서의 성격에 있어 얼마나 해야 하느냐 하면 4절에서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용서의 근거는 하나님의 용서에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한 우리를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해 주신 것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매일 매일의 삶을 살아갈 때에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넘어집니다. 그런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용서하시는 분이 누구시냐?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고,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받고 있는 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당연히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게 용서에 관한 내용입니다. “무한한 인내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형제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바로 이것입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18장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언급을 하고 있는데(마18:15-35), 거기 보면 이런 비유를 듭니다. 만 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으로부터 탕감을 받았는데, 탕감을 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 돈을 갚아 달라고 죽일 듯 살릴 듯 한다는 비유입니다. 대략 1 달란트가 6천 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탕감 받은 것의 60만분의 1 빚진 자를 만난 겁니다. 그것도 자신이 탕감을 받고 나가다가 그 사람을 만난 겁니다. 이 소식이 주인에게 들리자 주인이 도로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마18:32-33) 그리고는 주인이 노하여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넘깁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교훈하시길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이 내용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일단 그 부분은 접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용서로 말미암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를 이끌어 내는 원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 이렇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과연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라고 할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왜냐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하나님처럼 온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용서하는 데 있어서도 온전함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떤 때는 마음으로 용서한다고 말할 수 있을 때가 있겠지만, 사람의 마음이 항상 같은가? 한결같은가? 한 번 용서했다면 전혀 그 마음에 있어 변호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기 스스로도 그 마음을 조절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바뀌면 용서조차 뒤집힐 수 있는 게 바로 사람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게 뭐냐? 이런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 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5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언뜻 보면 제자들의 이런 요청은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며, 죄인을 섬기는 것이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 요청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쉽게 이해하자면 제자들이 말하는 믿음과 예수님께서 말하는 믿음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경우는 믿음이 부족한 것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더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반면 주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청한 믿음이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나 그 외형, 믿음이라는 말 자체는 같아보여도 의미상에 있어 뭔가 다르다는 것을 저들의 요청에 대한 답변으로 주고 계신 겁니다. 다시 말해 “너희가 참된 믿음을 소유하기만 하였다면 그것이 겨자씨만큼의 믿음일지라도 뽕나무가 바다 가운데 심기어라 명할 때 순종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겨자씨 한 알만큼의 참된 믿음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바로 이 지적이 예수님의 답변 가운데 들어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지금 누가복음 17장 6절 말씀과 동일한 답변(마17:20)을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으로 올라가셨을 때 간질병을 고치기 위해 한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오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이 왔을 때 예수님은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간 세 제자 외 나머지 제자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없으니까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라도 고침을 받을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쳐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고칠 수 없었습니다(눅9:40). 그리고 그렇게 고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그것을 지켜보던 서기관들과 변론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눅9:14).
사실 제자들의 경우 이 사건 이전에 주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아 복음을 전하러 다닐 때 능히 귀신도 쫓아내고, 병든 자도 고쳤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7장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것이 의아했던지 모든 사건이 끝나고 난 뒤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게 됩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마17:19)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우리가 본 누가복음 17장 6절의 말씀을 여기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셨던 겁니다.
결국 이 마태복음 17장에서의 핵심은 뭐냐? 너희가 요청하는 믿음은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믿음’(박윤선)이고, 그 믿음은 비록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지만, 받은 그것이 너희 것인 줄 착각하는 그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믿음이란 너희 쪽에 원인으로 있지 않고,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원인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인간이 보이기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신다는 것은, 내 쪽에서의 믿음이 얼마나 크냐, 작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참된 믿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로서의 믿음, 그리고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하시는 주체라는 믿음이 조금만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하였을 것이란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너희가 생각하는 믿음은 믿음으로 너희 스스로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 편에서 볼 때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거짓된 믿음이 아닌 참된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었더라면, 외형으로 볼 때는 내가 하나 실제로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하신다는 그 믿음이 조금만이라도 있었더라면, 너희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주님을 의지하였더라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누가복음에서는 무엇과 연결이 되고 있느냐 하면 용서와 연결이 되고 있는 겁니다. 즉, 용서를 너희가 하는 것 같아 보여도, 앞서 말한 대로 하자면 아무도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만 있으면, 달리 말해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조차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없으면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용서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지만 참된 용서도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바로 이런 맥락 가운데 들어 있는 비유입니다. 너희는 저 바리새인들과 같이 실족하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오히려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너희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참된 믿음으로만 가능하며,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것도 ‘나’요, 용서할 수 있는 것도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바래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의 조목조목을 정하고, 그것을 통해 나는 한다, 그런데 너희는 안 한다는 것으로 남을 정죄하면서 자신을 높이는 자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 대하여 외식하는 자라 말씀하셨던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그런 자들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자들을 경계하실 목적으로 다시금 하나의 간단한 예를 들어 말씀하시는 게 오늘 본문입니다. 물론 예화 자체만 봐도 그 내용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있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인간의 공로를 내세울만한 어떤 것이라도 있는가? 바로 이 질문 앞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란 존재는 맨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존재 할 수 없었던 그런 자였습니다. 물론 자유의지를 받았습니다만, 그 자유의지라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만 제 기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자유의지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내 마음대로 순종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그런 개념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처음 아담에게는 자유의지를 통해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결국 순종보다는 불순종을 선택하게 되었던 게 바로 우리 조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모든 인류는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로마서에는 어떻게 표현하는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10-18)
이런 점에서 인간을 이해할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되는 것은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는 어떤 선도 나타낼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이것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향하여 참된 사랑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기 부모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복종하는 자녀들이 하나도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불쌍한 사람을 볼 때에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며, 고난당하는 사람을 볼 때 동정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양심적으로 일꾼을 부리는 사람들도 있고, 정직하게 남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가지는 대표적인 특징은 하나님에 대하여는 어떤 사랑도 가지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일반은총 면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이상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도, 자식이 부모에 대한 존경도 가질 수 없습니다. 혹 사랑과 존경을 가졌다고 한 들 그것이 하나님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의 선인가 했을 때는 그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이며, 죄인이기 때문에 죽어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 가운데 특별히 택자들을 불쌍히 여겨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해 주시고, 그의 자녀로 삼으시는 은혜를 받은 자가 누구냐?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이 은혜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죄인이었을 때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수도 없을뿐더러,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식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로서 당연히 받아 순종해야 할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온전한 순종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회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분의 긍휼로 우리를 대하시는 것에 대한 감사만 있을 따름입니다. 이것 외에는 혹 그분의 것을 마치 우리 것인 양 자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해 가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 이것이 신앙의 큰 원리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먼저 7절과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사실 본문을 오해하면 왜 우리가 종인가 이렇게 물을 수 있지만, 단적인 예라는 사실과 실제로 우리는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변화된 신분을 가졌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비유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있지 못하는 이상 죄의 종이며,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영원한 지옥 형벌에 놓여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종이 된 걸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 성경은 우리를 종으로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자녀라는 말과 종이라는 말에서 어감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해야 하는 일과 종으로서 해야 하는 일은 사실 하등 차이가 없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자녀라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아무 거나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의 불순종해도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때나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할 때는 똑같은 목적과 목표를 향해 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여기서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존재를 더욱 실제적으로 드러내는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종이기에 주의 명령의 순종해야 마땅한 자들이며, 마땅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요, 했다고 해서 자랑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비유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의 요점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권한으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종으로 소유하고 계실 때 우리가 우리의 모든 의무를 이행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셔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우리가 그의 소유인 이상 하나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갚아야 할 어떤 빚도 지고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가치 있는 일, 예를 들어 나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용서를 하되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했다면, 그것을 했다고 용서에 대해 보상을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칼빈의 말에 의하면 ‘사악한 교만의 죄’를 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서는 이러한 것을 저주를 받아 마땅한 우상숭배(스코틀랜드 신앙고백 제15장)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공로를 우리의 것으로 가지고 오는 것을 심각한 죄로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이와 같은 교만보다 더욱 일반화된 악도 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가장 일반화 된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다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심각하게 말할 정도입니다. 내가 뭔가를 했다고 했을 때 그 한 것에 대한 보상을 마치 바랄 수 있는 것처럼 목회자도 설교하고, 성도 역시 그런 사고방식에 젖어 있스니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하여 이 세상이 가지는 보편적인 죄의 방식 가운데 한 가지가 우리가 한 일에 대해 보상을 받고 싶어 하는 일이란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서 한 일에 대하여 보상을 받으며, 그 보상이 정당하길 바랍니다. 그러나 믿는 자가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할 자세는 이런 보상 논리는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임을 반드시 성경을 따라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에 우리는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만를 섬기며 그의 명령만을 따라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칼빈).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요, 성경의 큰 틀인 겁니다.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이 이 보상 논리에 젖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서 상급을 운운하곤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전도입니다. 전도가 천국에서 받을 가장 큰 상급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 있지만 어떤 이들은 “베드로와 바울이 가장 큰 상급을 받은 자로 있다. 그들의 집은 마치 궁궐과 같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거짓된 가르침에 우리의 귀를 기울이지 마셔야 합니다. 물론 성경에도 보면 상급을 이야기하고, 면류관을 받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 상급이 우리가 한만큼의 상급이냐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얼마나 완벽하게 지키겠습니까?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과연 얼마나 용서하며, 언제까지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순종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역으로 우리가 완벽하게 순종할 수 있다고 말할 만큼 하나님의 명령의 질이 그렇게 낮은 겁니까? 아니면 우리의 부분적인 순종이라도 받으시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기실만큼 하나님이 불완전한 분이십니까? 여러분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부분적이요, 완전히 지킨다는 것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한 일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는 결코 완전성화의 모습을 가질 수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겸비토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불완전함이 있고, 그 불완전함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이 땅에서는 완전성화를 이루시는 않는 겁니다. 그렇게 정하신 겁니다. 때문에 이 땅에서 뭔가를 했다면 항상 하나님 앞에 부족한 것이요, 부족한 것 자체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수준이 되지 못 한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이유가 무엇가도 알고 계셔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입니다(고전1:30). 나의 부족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것은 뭔가?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런 우리에게 보상하신다, 상급을 주신다고 말하는 것은 그 보상, 그 상급의 성격이 은혜의 성격을 배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야 합니다. 동일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육신의 자랑은 보잘 것 없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육신의 자랑으로 보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성경도 하나님도 모르는 처사요, 우리 자신은 더더욱 모르는 자와 방불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절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전 성경인 개역한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여러분,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아니 다 기억해야 할 말씀이지만 혹 놓쳤더라도 이 한 말씀만은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졌다는 사실, 즉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더불어 기억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무를 다했다 하더라도 보상을 하셔야 할 의무를 갖고 있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빚도 지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은혜를 베푸실 뿐입니다. 율법의 언약에는 행위에 대한 보상이 정해져 있지만, 우리가 그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과, 그런 의미에서 그 행위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진하여 보상해 주시기 때문에 받는 것뿐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반드시 기억을 해야 합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주님은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자세여야 하는 것입니다.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뭐라고 말해야 하느냐? “하나님! 명령 받은 것을 다 했기 때문에 이것을 주십시오!” 이것이 아니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사실 헌신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린다, 몸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한다는 의미입니다. 거기에는 분명 우리의 노력이 들어갈 것이고, 우리의 정성, 그리고 우리의 물질과 시간도 들어갈 것입니다. 어느 직분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직분을 맡으면 맡은 직분에 대한 고민이 들어갈 것이고, 그러나 그런 고민과 수고로움이 드러나지 않을 때는 사람인지라 마음이 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 마음이 상하거나 아니면 내 노력, 내 수고에 대한 어떤 대가가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하며, 그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헌신, 그런 수고와 노력은 하나님 앞에서 외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개혁자나 개혁주의 신앙고백서가 말하는 것처럼 사악한 교만의 죄요, 저주 받아 마땅한 우상숭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모르는 것이요,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자신을 섬기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주의하셔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너무나도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령 앞에 우리의 마땅한 바는 순종 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이런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순종이 내 자랑이 되고, 순종이 내 공로가 되고, 순종이 내 의가 되는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마땅한 바, 당연히 지켜야 되는 의무요, 감사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종 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그러나 온전히 지킬 수 없기에 항상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을 위해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날마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날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이 있는 것입니다.
불링거라는 개혁자가 있는데, 그가 쓴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에 보면 동일한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제 2 스위스 신앙고백 제16장).
성도의 행위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하나님의 위엄을 헤치는 요소들과 불완전한 요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것을 행한 자들에게 호의를 베푸시고 품어주신다. 이 때문에 그들에게는 약속된 상급이 주어진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워 주시지만 그것은 우리의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은사에 대한 상급이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급을 받든 지간에 이것은 은혜, 즉 상급이 아닌 은혜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한 선은 우리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린도전서 4장 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오늘 말씀과 정확하게 같은 의미입니다.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랑은 더더욱 안 될 말이란 것입니다. 오히려 받은 것이 있다면 그 받은 것으로 충성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알기 위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한 번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그분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인생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명령이 있는 것이고, 그 명령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어떠한 우리 자신이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로마서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신다면’(롬1:28)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죄밖에 지을 수 없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순종하고 있다면 얼마나 큰 은혜겠습니까? 마치 창조 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처럼 아무 것도 없는 우리 안에 명령을 통하여 그분의 뜻을 알리시고, 또한 그 뜻을 친히 이루시어 열매를 맺게 하시는 그 역사가 우리 가운데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공로를 말하고, 상급을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마땅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여러분, 이런 자세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세 가운데 더더욱 주의 은혜를 바라고, 그분만이 선한 모든 것을 이루는 주체인 줄 알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 이러한 삶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