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구려연구에 대한 우려) (오재성)
(1) 독립해도 동이일뿐 한나라이전 한족은 없다, 순의 조상 헌원은 동이이다
하은주를 계승한 나라도 동이국이다
한나라가 건국하고 역사를 정립한 것이 “사기” 임은 다알고 있다 그리고 국가의 시조를 황제 헌원이라고 했음도 알고 있다.
그런데 황제는 소전이라는 제후의 아들이다 이때 천자에 치우가 있고 나라이름은 구리였다
그런데 하 은 주의 역사를 알면 순임금도 알것이다 순은 동이인이다. 그렇다면 동이로서 임금이다.
또한 순의 조상이 황제헌원이다 순이 동이이면 조상 헌원도 당연히 동이이다
그들이 한족이라 하고 한나라의 후예라 하여도 한나라 이전은 “동이”임을 숨겨버릴수는 없다
나는 김해김씨 종친회를 찾은일이 있다 김유신의 선조는 누구인가 라고 물어 보았다.
김수로왕이라고 말했다. 김수로왕 이전은 모르는가 물었다. 모른다고 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은 소호금천씨의 후예로 기록되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삼국사기를 어떻게 믿느냐고 했다.
그러면 김유신 관계도 믿지 말아야 하는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런데 김유신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은 믿는다고 했다.
이것이 역사를 잘안다는 분들의 의식이다
소호금천씨가 살던 지역에는 기자가 살던지역도 묻힌지역도 김유신의 전쟁지명도 김유신때 신라에서 생산한 특산물생산지도 있다.
우리는 진실을 밝히기 보다 어슬픈 의식으로 공격하기를 잘한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던지 밝혀지게 되어 있다.
하은주를 계승한다는 한족도 그들이 “동이”로 돌아오던지
아니면 최초국호 구리족으로 하면 당연히 그 역사가 정리될수 있으나
그들이 한족으로 하는 한 고구리 역사를 그들이 가져간다해도 그들이 역사왜곡만 하나 더 할뿐이니
너무 상심할것은 없다
한반도만을 우리역사무대로 하고 고조선부터 근세조선까지 한반도에서 역사가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자기 비하를 했다고 말할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곳에 수록된 새로운 연구는 우리조상들은 아시아를 주름잡고 있던 조상들 그리고 그들의 후예는 하나의 민족 즉 구리족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 비하가 아니다
구리의 후예는 다 하나의 민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연구이다
나무에서 동쪽가지 따지고 서쪽가지 따지고 북쪽가지 따지고 남쪽가지따지는 것이 아니라
땅을 박차고 나온 믿그루 하나의 나무는 하나라는 의식으로 역사를 정립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를 기점으로 하는 신교 그러나 그 뿌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데 이의가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조상을 버릴수가 없다
그래서 찾아서 최초의 국가 구리를 민족의 기점으로 연구하는 것이지 반도사관에 묻혀 역사를 왜곡하는데 동참할 의사는 없다
지나족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계승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매우 바보스런 말이다
당나라까지 독립하여 한족으로 불리던 그들은 송나라이후에 새로운 사상을 만들었다
바로중화사상이다
중화사상은 한족사상이 아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당나라의 후예들이 동이로서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화의 중은 장안-낙양중심이라는 뜻도 있을 것이고 섞어서 중간으로 만든다는 뜻도 있을 것이다
또 화는 지즉화(동틀려,곧즉,화할화,)에 의하여 최초의 국호 구리의 “리”를 의미하므로 당, 고구리 백제 신라 패망이후에 이미 동이로써 복귀하였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이 무엇인지 헌원도 “동이”이니 동이의 후예라고 하면 큰일나는 것으로 생각했던지 역사기록을 무시하고 한족이라고 하는데 지금 중국은 한족도 아니고 화하도 아니고 중국민족을 만들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역사를 버리고 독립했다고 할수 없을 것이니 두려워 할것도 없다
자 우리는 중국25사, 삼국사기를 동하여 아시아를 역사민족으로 묶을수 있도록 연구를 해야 할것이다
고리 국가사관인 김부식의 삼국사기, 조선국가사관인 고리사 그리고 많이 출판된 반도사관(대한사관)에서 벋어나서 조상에게 부끄럼이 없는 역사를 복원해야 할것이다
김부식의 기록을 신채호는 반도사관으로 비판했다. 나는 신채호를 반도사관에 젖은 의식의 역사연구로 비판하고 있다.
최초로 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될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정리를 잘 할뿐이지 선택할 권리는 없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김해김씨의 시조는 수로왕이라고 한다. 물론 족보에도 시조가 수로왕이라고 했다. 족보제작은 4백년을 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서에서 인용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서를 정화하고 바르게 파악하여야 한다 살아보지 않았던 우리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것인가
먼훗날 후예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조상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나의 바른양심으로 연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가 아니고 나자신에게 부끄럽지 말아야 진실이라 할수 있는 것이다
(2) 삼국사기 김유신전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김유신도 논하지 말아야 한다
삼국사기를 부정하려면 삼국시대를 논하지 말아야 한다
三國史記卷第四十一.
○ <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峯>, 望<駕洛>九村, 遂至其地開國, 號曰<加耶>, 後改爲<金官國>. 其子孫相承, 至九世孫<仇亥{仇充}> , 或云<仇次休>, 於<庾信>爲曾祖.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與<新羅>, 同姓也.
김 유신은 경주 사람이다.
12대조 수로는 어느 곳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후한 건무 18년 임인에 귀봉에 올라가 가락의 구촌을 바라보고 마침내 그곳으로 가서 국가를 건설하고, 국호를 가야라 하였다가 후에 금관국으로 고쳤다.
그 자손이 대대로 이어져 9대 자손인 구해에 이르렀다. 구차휴라고도 하는 구해는 유신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신라인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예라고 생각하여 성을 김이라 한다고 하였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의 후예이며, 소호의 종손"이라 하였으니, 남가야 시조 수로도 신라와 동성이다.
三國史記卷第二十八
新羅古事云:
"天降金 , 故姓金氏." 其言可怪而不可信, 臣修史, 以其傳之舊, 不得刪落其辭. 然而又聞: "新羅人, 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見新羅國子博士薛因宣撰金庾信碑, 及朴居勿撰姚克一書三郞寺碑文.], 高句麗亦以高辛氏之後, 姓高氏."[見『晋書』載記.] 古史曰: "百濟與高句麗, 同出扶餘." 又云: "秦·漢亂離之時, 中國人多竄海東." 則三國祖先, 豈其古聖人之苗裔耶
신라 고사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성을 김씨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이 말이 전해 내려온지 오래되니, 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듣건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고, [이는 신라 국자박사 설 인선이 지은 김 유신의 비문과 박 거물이 지었고 요 극일이 쓴 삼랑사 비문에 보인다.]
고구리(高句麗)는 또한 고신씨의 후손이라 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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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를 읽어보고 김유신이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는 것에 반박을 해야지
삼국사기를 부정하는 반도사관 학자들의 글이나 읽고 그들이 쓴것이 옳다고 여기면 그런분에게 무엇을 더 말할수 있겠는가
콩을 팥이라 우기는 사람에게 할말이 없으니 삼국사기나 25사동이전을 믿지 않으려는 그 분들께 드릴말씀이 없습니다
나는 중국인의 후예가 아니다 그러나 동이의 후예이며 구리의 후예다 또한 한국인이다
삼국사기를 한번 더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천년후에라도 부끄럽지 않다면 실명으로 올리시길 영원히 남겨도 부끄럽지 않을것이라 자신있게 말이요
그리고 그 내용을 책으로 남기세요
대한민국이 독립했다고 말하지 않고 광복했다고 말하는것과 같이 역사광복으로 민족사를 정립하면된다
아무리 버리고 싶어도 버릴수가 없다
첫째 우리가 할일은 반도사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자도 한글도 모두 우리 조상이 만든 글임을 역사를 통하여 가르쳐야 한다 구리와 조선의 후예는 어디에 살던 어떤말을 하던 어떤 습관을 가지던 우리민족으로 정립해야 한다
조상을 버리고 사서를 취사선택하던
둘째 중국25사와 삼국사기 호태왕비와 진흥왕비를 통해서 아시아인은 구리의 후예임을 밝히고 정립해야 한다
셋째 현재에 연연하기 보다 과거 역사를 정립하여 미래에도 하나되는 역사를 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용어에 대하여 분명하게 역사기록에서 찾아서 정립해야 한다 다음 사서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정리하여야 한다 다음 종합적으로 정리된 것을 고지도와 현지도에 대입해보고 역사를 정립하고
다음 조상도 버리지 않고 현재도 부정하지 않게 전체를 하나로 보는 시각으로 정리 그러기 위해서 최초의 기준을 바르게 찾아 정리한다
정리된 역사를 홍보하고 가르친다 이것이 할수 있는 방법이다
중국인들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할수는 있어도 그들이 한족으로 있는한 왜곡된 역사임을 알려야 한다
한나라 이전에 한나라는 없고 한나라가 국조로 모시는 황제헌원은 동이임을 알려야 한다 헌원의 후예 순임금이 동이이므로 동이에서 벗어날수는 없다
동이가 동이역사를 한다면 같은 동이임으로 아무도 말릴수는 없다
6.25이후 우리는 휴전선 북쪽에는 소위 빨간 도께비만 있는줄 알았다 지금은 북한인들을 동포라고 말하지만 싸웠다고 동포가 아니라고 말할수는 없다.
민족은 씨족이 아니다. 어떻게 기준을 만들고 민족이라 말하는가에 달렸다
(3) 고구려의 역사를 흡수하려면 한족을 버리고 동이나 구리족이 되어야 한다
중국은 고구리를 중국역사에 편입하려고 한다는데
중국은 한족이 최대민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한족은 한나라가 건국하고 역사를 정립하여 사기를 편찬하므로서 그 이후 한족이라고 불렀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나라 이전에 한나라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한나라에서 국조를 한나라 건국자가 아니고 황제헌원이라고 하였고 헌원이 한족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황제헌원은 소전이라는 제후의 아들이다. 그 당시 나라는 구리가 있었고 천자는 치우였다. 구리의 역사를 계승하는 동쪽 사람들을 동이라 하면서 한나라는 한족을 형성하였다 한족이 먼저가 아니고 동이의 구리가 먼저였다
그런데 구리족이 아니고 한족이라고 했다면 그들은 한나라때부터 독립한 민족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고구리는 동이의 국가이다
그런데 한족이 흡수를 하겠다. 흡수한들 동이는 동이일뿐이다. 한족이 한족이라고 우겨도 그들은 동이의 후예이며 구리의 후예들일뿐이다
그들이 동이로 가던지 구리족으로 가지 않으려해도 그들은 구리국의 후예이고 구리백성 묘의 후예일뿐이다
그래도 중국에서는 동북3성의 역사를 밝혀서 자기들의 역사일부라고 하려고 한다
결국 또하나의 역사왜곡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고구리가 한나라와 전쟁을 한 지명도 만리장성의 남쪽이며 북평과 태원이었다. 고구리가 당나라와 전쟁을 한 지명도 만리장성의 남쪽이며 은산 신성 용도 등이다
그리고 북평 태원 신성 은산 용도의 남쪽에 백제패망때 지명인 평원 황산 동명 백마하 제성 항성 덕안 동성 잠산 독산 주류성 등이 있다.
중국인들은 고구리 수도를 만주에 두는 지금의 역사인식으로 역사를 왜곡할 것이다 그들은 만주에 있는 고구리 유적 근거로 고구리는 중국역사로 만들려고 할것이다
진실된 고구리사를 연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25사 동이전에서 동이배열도를 만들고 그 지명을 삽입하고 고지도와 현지도에 대입하여 고구리의 진실된 강역을 밝혀야 한다
고구리는 한국과 만주와 낙양동쪽 유연제노오월의 땅까지 통치한 고구리연방을 중국은 결코 밝히려 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결코 동이나 구리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한족을 버리고 동이라하던지 구리족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그 왜곡된 연구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동이의 후예이고, 구리의 후예들이며, 구리 백성 묘의 후예들이여
진실된 고구리사를 연구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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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자료)
< 동이에 대한 소고 >
① 중국정사를 보면 BC2700년대부터 우리민족을 "동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국호는 "구리(九黎)", - 리(九黎)는 동이국명이다 "黎東夷國名也"
사기본기에 따르면 (아래 원문 "붉은 빗금" 참조)
< 중국 25사 원문 >
- 치우고천자(蚩尤古天子) : 치우는 옛 천자이다 - 구리군호치우시야(九黎君號蚩尤是也) : 구리의 통치자는 치우다 - 리동이국명야(黎東夷國名也) : 리(九黎)는 동이국명이다
이분이 중국의 시조인 훤원과 탁록에서 전쟁을 하는데 중국역사상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가 BC 2700년대입니다 이미 중국정사에서 구리가 "동이"국명이라 기록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동이의 출발점입니다
동이민족에는 "구리"라는 국호가 있었으나 (黎東夷國名也) 이시기에 중국민족의 "국호"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중국민족의 최초국가는 "하"나라(BC 2205년 건국)로 구리국을 계승한 단군조선보다 130년 늦게 건국되었습니다
지금은 자기들 스스로 제후국의 아들로 기록한 "헌원"을 시조로 삼아 단군조선보다 400여년 정도 앞선 나라로 역사를 기술하고 있지요
치우천자 관련은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본란에서는 생략합니다
< 참고연표 >
< "동이"에서 독립한 중화국(지나족)시조 "훤원"에 대하여 ! >
기원전 2700년대 구리국 14대 천자인 "치우천자"와 탁록에서 전쟁을 한 중국의 시조인 제후의 아들 "헌원"이 동이에서 분리(독립 : 분가 ?)되어 지나족의 시조가 된 사연을 소개합니다
『사기』에 의하면
- 황제는 소전의 아들 (黃帝者少典之子) - 황제의 성은 공손이요 이름은 軒轅(헌원)이라고 하였다 (姓公孫名曰軒轅) - 유웅국의 군이 소전의 아들 (周曰有熊國君少典之子也) - 또한 소전은 제후국호이고 인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皇甫謐曰少典者諸侯國號非人名也)
"중국의 시조 헌원은 제후국 소전의 아들이다"라는 의미이다
헌원은 중국의 시조입니다 시조의 기록을 남기면서 동이의 기록을 남긴 이유는 헌원의 실존을 증빙하기 위한 한 방편(동시대 유명인 이었던 치우천자를 인용하여 비교기술 ?)이 아니었을 까요 ?
주무왕이 사마천에게 지나족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동이에서의 분리작업"을 본격적으로 기술합니다
지나는 정사가 남아있으나 동이의 정사는 남아있질 못하고, 모두가 불신하는 "야사"만이 전수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역사를 바로세우지 못하고 있으나 지나인이 기록한 정사의 기록중에 다행히 많은 "동이"의 기록이 남아 있음으로 추적이 가능하고, 그토록 불신하는 우리의 "야사"를 증빙해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나인들은 자기들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동이에서 분리되어 나갔음을 부인하지 못하는 기록들을 너무나 많이 남겨 놓았습니다 때로는 두려움의 기록으로, 때로는 경외의 대상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 치우고천자(蚩尤古天子) : 치우는 옛 천자이다 - 구리군호치우시야(九黎君號蚩尤是也) : 구리의 통치자는 치우다 - 리동이국명야(黎東夷國名也) : 리(九黎)는 동이국명이다
하여간 이 헌원이 태어난곳은 "수구(壽丘 : 산동성)"이고 죽어서 묻힌 곳은 장안 북쪽 "황릉"입니다
동평을 중심으로 한 산동성을 비롯한 요를 중심으로 한 태행산맥 동쪽은 BC2700부터 AD6세기까지 동이의 강역으로서 한번도 상실해본적이 없는 동이의 강역이자 "옥토"입니다
한단고기의 기록(본문 참조)은 생략합니다
제후의 아들 헌원이 구리국 치우천자에 반기를 들어 독립하려고 하니 치우천자가 이를 징벌 헌원은 저먼 척박한 땅 태행산맥 서쪽 장안북쪽 "황릉"에 쫒겨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 묻혀 지나족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기록이 아닌 자기들 스스로 그렇게 기록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후대 "동이"의 유명인들도 모두 이 산동성을 중심으로 역사의 주무대가 펼쳐집니다
헌원의 자손인 동이인 "순"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 순(舜)은 동이인(東夷人)이다 - 순은 "도군(都郡)"이다(舜者都郡也) - 창의(昌意)로부터 7세가 순(舜)이고 - 창의(昌意)는 헌원(軒轅)의 아들이다
"동이"의 "구리국" "치우천자"의 제후국 소전의 아들이 "헌원"이고 헌원의 8세손이 "순"이다
당연히 "헌원"도 "동이"이고 "순"도 "동이"다 - 순동이생요구(舜東夷生姚丘) - 순은 동이땅 "요구"에서 태어났습니다
누가 "주" 가 되어야 하는 역사인지 분명히 재정립하여야 합니다
< "구리(九黎)"국의 백성 "묘민(苗民)"에 대하여 ! >
중국사서에서는 동이 최초의 나라 "구리"의 백성을 "묘민"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사서에서는 삼국 및 변한이 "묘"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묘족(苗族)에 대한 사서(史書)의 기록
{삼국사기} - 당서를 인용하여 "변한(弁韓)은 묘(苗)의 후예(後裔)다." {신, 구당서} - 신라 및 변한은 묘족(苗族)의 후예(後裔)다. {삼국사기} - 삼국(三國)은 묘족(苗族)의 후예(後裔)이다.
< 원문소개 >
1. 사기
- 리동이국명야(黎東夷國名也) - 구리군호치우시야(九黎君號蚩尤是也) - 치우고천자(蚩尤古天子) - 삼묘재강회형주(三苗在江淮荊州)
삼묘가 강회형주에 살았다는 말입니다
< 강회형주는 어디인가 ? >
강회(江淮)지역이란 양자강과 회수(淮水)가 있는 두 강 사이의 지역을 말하는데
- 이 지역에는 기자가 살던 서화(하남성)와 묘가 있는 몽성(안휘성)이 있고, - 김유신의 조상 소호금천(少昊金天)씨가 거(居)하던 청양(靑陽)(안휘성)이 있습니다
형주(荊州)는 중국 고지도에 의하면 "형(荊 : 또는 형문(荊門))"으로 표시 되는 곳이 아닌가 합니다(아래 고지도 참조)
< 강회형주 지도 >
- 통상 중국고지도에는 외자 즉 "형"만 표시하고 "형주"로 인식 - 바로 옆에 "형문"이 있다
- 원본이 잘안보여 "형(형문)"이 잘안보임 - 이전 지도는 "형"으로 표시
2. 예기
- 묘구리지후(苗九黎之後) - 구리위묘민선조(九黎爲苗民先祖)
구리의 후예가 "묘"이고 구리는 "묘민"의 선조라 하였습니다
동이의 구리국의 백성이 "묘민"입니다
3. 구당서동이전
- 신라변한지묘예야(新羅弁韓之苗裔也)
신라변한이 묘의 후예라는 뜻입니다
* 해석에 다툼이 있는 부분인데 받아들이는 네티즌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다(2004. 10. 2) (강단의 해석) 신라는 변한의 후예다
-> 삼묘재 강회형주 땅인데 여기서 신라가 일어났다 (?) -> 구리국 백성 묘민 - 한웅땅 - 고조선(단군) 땅 - 삼국땅으로 이어짐
4. 당서동이전
- 신라변한묘예야(新羅弁韓苗裔也) 신라변한은 묘의 후예
5. 삼국사기
- 삼국조선개고성인지묘예야(三國祖先豈古聖人之苗裔耶)
삼국은 묘의 후예라는 의미
(주) 강단의 해석 : "곧 삼국의 선조가 어찌 옛 성인의 후예가 아니리오" -> 성인 = 삼묘(?)
6. 삼국유사
- 변한묘예(弁韓苗裔)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구리의 백성인 "묘민"에 대하여는 우리의 정사에서도 언급이 남아 있다는 것이며
동이의 역사는 동이의 최초 국호인 "구리"의 후예 "묘민" → 후예 삼국, 변한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묘족이 살던 곳은 "강회형주"영역입니다
우리가 "3도"라고 표시하듯 지역을 대표하는 표시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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