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정리하느라 며칠 걸렸습니다. 요즘 회사에 우환이 있어 짬을 내기 어려운 데다가 정리를 위한 논거를 찾기도 어렵더군요. 대부분 직관에 의한 것이라서 엉터리가 좀 있으리가 봅니다.)
인터넷에서 ‘대과거’를 검색하니까. 누군가 대과거란,
‘겁나 먼 옛날’
이라고 답했더군요.^^
‘았었/었었’(‘았었’으로 통칭)으로 실현되는 대과거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용어 규정부터 살펴볼까요. 학계에서는 ‘았었’의 시제에 대해 여러 용어로 정의하더군요. 잘 알려진 용어로는 대과거, 과거완료가 있습니다. 대과거는 ‘과거 이전의 과거’를 뜻하고, 과거완료는 ‘과거에 완료된 상태’를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밖에 의미상으로 따져서 ‘경험’을 나타낸다는 견해(성기철)도 있고, 상태가 지속되지 않고 ‘단속’되는 것을 뜻한다는 견해(남기심)도 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견해가 있는데, 서정수 교수가 이들 견해를 두루 수용해서 ‘과거 상태, 과거 사건, 과거 지속, 불확정 과거’ 등을 나타낸다고 했답니다.
학교문법에서는 ‘았었’을 단순히 ‘과거’로 본답니다. 그래도 설명에서는 ‘과거 이전, 즉 대과거나 현재와 강하게 단절된 상황에 쓰이는 것’이라고 했으니 용어는 ‘과거’, 의미는 ‘대과거’의 입장을 취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서정수 교수가 말한 ‘과거 상태, 과거 사건, 과거 지속’ 등을 보아도 ‘과거’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또 ‘경험’ ‘단속’ 등의 의미로 쓰인다는 견해를 따라도 단순히 ‘과거’로 보아서 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시각을 바꿔서, 문제가 되는 ‘았었’의 사용 여부와 남용에 대해 살펴보죠. 대과거나 과거완료는 영어에서 온 것이고, 우리말에는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았었’을 사용하지 말자는 극단적인 의견도 있습니다만, 이건 지나친 해석이라고 봅니다. ‘갔다’와 ‘갔었다’의 의미가 엄연히 다른데 ‘갔었다’를 사용하지 말자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다만 우리말에서는 과거형 ‘었’만 써도 그게 ‘았었’의 뜻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유연하게 바라볼 필요는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음 두 표현은 어느 것을 쓰는 게 좋을지 애매합니다.
ⓐ평소 잠은 잘 잤습니까? 물론이지요/ 아주 잘 잤지요.
ⓑ평소 잠은 잘 잤었습니까? 물론이지요/ 아주 잘 잤었지요.
의사와 환자가 문답하는 내용입니다. 둘 다 맞는 표현이라고 하겠지요. 뉘앙스는 조금 다릅니다. ⓐ는 ‘평소 잠을 잘 자느냐’ ‘아주 잘 잤다’는 과거 습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고, ⓑ는 현재 상황을 암시합니다. 즉 ‘당신이 지금은 잠을 못 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평소엔 잘 잤느냐’ ‘그렇다. 평소에는 잘 잤는데, 요즘은 아니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대개 ⓐ처럼 표현해도 정황상 ⓑ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둘 다 맞는데 굳이 간결함을 외면하고 복잡한 ⓑ의 형태를 사용할 필요가 있냐는 논의가 나오는 거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를 쓰지 말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의미상으로 더 정확한 표현이니까요.
‘았었’이 남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중에는 이걸 사용하면 의미 조합이 안 될 때도 있지요. 예를 들면 ‘죽었었다’ 같은 표현입니다. 사실 ‘았었’이 모든 용언에 붙지는 않지요. 사용할 수 없는 용언이 있다고 봅니다. ‘았었’이 경험, 단속 등을 나타내므로 이런 뜻을 나타낼 수 없는 말에는 사용할 수 없지요. ‘죽다’는 경험을 나타낼 수 없으므로(한 번 죽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죽었었다’가 어렵습니다. 잠시 죽었다 살아났다는 의미로 쓰일 때는 사용할 수 있겠네요.
경험, 단속을 뜻하는 표현이 문장 내에 있어도 ‘았었’을 쓸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다음 예를 볼까요.
ⓐ나도 한때는 잘 나갔다.
ⓑ나도 한때는 잘 나갔었다.
여기서 ‘한때’는 과거 어느 시점을 뜻합니다. 현재와는 단절돼 있지요. 이럴 경우 ‘나갔었다’를 쓰면 의미 중복(겹말)이 될 듯합니다. 물론 이 중복은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짝을 이루는 호응 관계를 이룬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에도’와 ‘불구하고’가 짝을 이루는 것처럼요. 하지만 이 호응 관계는 ‘한때’라는 과거 시점과 ‘나갔다’라는 과거 시점이 짝을 이루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봅니다.
ⓒ나도 한때는 잘 나간 적이 있다.
이 표현 역시 ‘~잘 나갔다’ 정도면 간결미가 있어 보입니다.
ⓓ나도 잘 나간 적이 있었다.
이 표현은 어떨까요. ‘~한 적이 있다’가 경험을 뜻합니다. 여기에 또 경험을 뜻하는 ‘았었’이 붙었네요. ⓒ와 ⓓ 표현은 남영신 선생의 ‘국어 한무릎 공부’를 보니까 바람직하지 않은 표현으로 규정돼 있더군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 그는 줄곧 미음만 먹었었다.
㉯한때는 나도 프랑스에 유학을 하였었다.
㉰그건 어릴 때에 보았었다.
대과거 앞에 과거의 시점을 나타내는 부사어(‘그때, 한때, 어릴 때’ 등)를 앞세우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대과거와 과거 시제가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표현은 과거 시제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제 정작 다루고 싶었던 예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문장은 초등 교과서에서 발췌한 것들인데, ‘았었’과는 다른 형태지만 같은 범주에 넣어도 될 것 같습니다. ‘았었’이 대과거, 과거완료라면 다음 문장은 이중과거로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자신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문에서 ‘있었기~때문이었습니다’가 문제가 됩니다. 우선 ‘때문이다’의 과거형으로 ‘때문이었다’를 쓰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너 때문이었어’가 가능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는 앞말 ‘너’가 명사여서 문제가 없는데, 앞말이 용언일 때는 다소 어색해 보이기도 합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는 자연스러운데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는 부자연스러워 보이거든요. 다만 여러 예들을 찾아보지 않아 후자의 표현에 대해 옳다, 그르다를 속단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어쨌든 예문은 ‘있었기’와 ‘때문이었다’가 둘 다 과거 표현인 이중과거 형태입니다. ‘과거+과거’니까 대과거 아닌가 싶기는 한데, 이는 ‘았었’의 대과거와는 쓰임이 다릅니다. ‘았었’은 경험을 나타내지만 이 경우는 그렇지 않거든요. 특히 이 이중과거가 단순과거형과 어떤 의미 차이도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전형적인 겹말 같습니다. 교과서에 이런 표현이 더러 있었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글을 배우는 것을 싫어하였다. 우리 글에는 우리 민족의 얼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이다 *5읽,171
◇전통 신앙을 믿으며 권력을 누리던 귀족들이 불교에 반발하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이다. *5사,32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탈모증과 비슷한 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6생길,177
◇수도 요금이 많이 나왔던 것이었습니다.→것입니다. *6생길,185
◇그런데 그 기대는 학교에 가자마자 무너졌다. 왜냐하면 …달걀을 깜빡하고 안 가져왔기 때문이었다.→때문이다. *6도,155
◇호랑이가 나타나서 많은 어린이들을 물어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호랑이가 나타난 것을 다른 사람에게 경고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입니다. *5도,170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전 대과거가 군더더기라고 보지만 일단 두 가지 경우에는 쓰는 쪽이 나을 것도 같습니다
1. 서술의 기본 시제가 과거라면 더 옛날을 나타낼 때 반드시는 아니더라도 쓰면 낫기도 합니다
문맥을 보면 서술 상태에서 과거인지 더 과거인지 대개는 드러나지만 안 그럴 때도 있거든요
1년 전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걔는 교사로 일했다(그때 교사)/일했었다(당시 딴 일을 함)
2. 세련됐다, 잘생겼다 같이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는 동사에서 파생되어 현재형이라도 과거처럼 보입니다
이런 말도 과거를 나타낼 때는 이른바 대과거를 쓰면 나을 때도 있습니다
근데 이것도 문맥상 드러나기도 하니 반드시 써야 하는 건 아니겠죠
...기왕 사과를 하려면 친인척과 측근 비리를 단호히 척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함께 진정성을 보여줬어야 한다.
에서 '보여줬어야 한다'는 '보여줘야 했다' 혹은 '보여줬어야 했다'가 자연스러운 표현인 것 같은데 이유가 뭔지는 분명하게 설명하기 어렵네요. 사설 마지막 문장임.
저도 바다님과 같은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한다'는 '했다'보다 어색해 보이더군요. '줬어야 했다'와 같은 이중 과거도 이때는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네요. 바다님이 새로운 숙제를 내 주셨군요. 고민좀 해 보아야겠습니다
'보여줬어야 했다'가 제일 무난할 듯하네요. '너도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와 '너도 오면 얼마나 좋을까'는 의미 차이가 있네요. 같은 이유에서 '주어야'보다 '줬어야'가 적절할 듯. 과거완료 같네요. 또 과거 회상이라면 '너도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보다 '너도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가 나을 듯하네요. 따라서 이때의 이중 과거는 가능하리라 봅니다. 이런 형태가 위에 늘어놓은 제 견해를 완전 뭉개는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형태는 이중 과거가 가능해 보입니다. '했다'는 회상을 뜻하는 말 아닐까 싶네요. '그때 너도 갔어야 됐어'는 회상, '그때 너도 갔어야 돼'는 현재 판단. 똑부러지는 결론은 아니지만 대충 이런 거 아닐
이중과거는 일반적으로 겹말 형태로 보는데 '보여줘야 했다'라고 쓰면, 의미로는 '보여줬어야 했다'의 의미가 아닐지요. 같은 경우인지 자신은 없지만 '그가 달리는 모습을 중계했다'라고 하면 '그가 달렸던 모습을 중계했다'라는 의미가 되잖아요. 그렇게 쓰지는 않지만. 달린 사실도 과거, 중계한 사실도 과거이므로...
말그리 님이 새해 벽두부터 대단히 난삽한 문제를 제기하셨네요^^. 언어를 바라보는 님의 관찰력과 문제 의식이 새삼 감탄스럽습니다.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한두 마디 거들어 볼까 합니다.
'-었-/-었었-' 은 단순히 시제(과거/현재/미래) 문제로만 접근하면 풀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완료상, 진행상, 단속상 같은 상(相)의 문제로 동시에 접근해야 실마리가 풀리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아까 집에 갔다."에서 '갔다'는 과거지만, "그는 붉은색 옷을 입었다."에서 '입었다'는 현재완료입니다. 이것은 결합하는 동사가 무엇이냐에 따라 시제의 문제이기도 하고 상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문제로 삼는 동사가 무엇이냐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었었-'은 기본적으로 단속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부산에 갔었다."는 현재 부산에 없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는 부산에 갔다."가 현재 부산에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것과 대비가 되지요. 그런데 이 문장에 시점을 나타내는 어떤 말을 넣으면 위의 두 문장은 변별성을 잃어버립니다. 즉, "그는 어렸을 때 부산에 갔다."와 "그는 어렸을 때 부산에 갔었다."는 의미 중화가 일어납니다. (물론 앞의 문장이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의미를 띨 수도 있습니다만 일단 같은 의미로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 후자를 굳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가치 판단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좀 더 분명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중복이 항상 낭비인 것만은 아니니까요. '-했기 때문이었다'에 대해서는 시간 관계상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했기 때문이다'에 대한 명쾌한 설명 기대하겠습니다.^^
아담님 말씀 중, '어렸을 때 부산에 갔었다' 문제입니다. 남영신님이 이걸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셨고, 저도 그러려니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이더군요. '그때 담배를 끊었지'와 '그때 담배를 끊었었지'는 의미가 달라 보였습니다. 단속 여부에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보조사 '는'이 들어가면 '았었'을 생략해도 돼 보였습니다. '그때는 담배를 끊었지'의 경우 지금은 피운다는 의미가 들어 있더군요. 즉 한정 보조사 '는'이 단속의 의미를 더해주니까 '았었'이 생략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과거형+았었'이 부자연스럽다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거나 할 건 아닌 듯싶네요.
바다 님의 질문에 간단히 답변드려 봅니다. 가정법 조건절과의 호응 문제로 보입니다. "사과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아직 사과가 이뤄지지 않았을 경우), "기왕 사과를 하려면(했으려면) 제대로 했어야 했다."(사과가 이미 이뤄졌을 경우) 정도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했기 때문이다'는 조금 길어져 별도로 올리겠습니다.
시제 문제가 아니라 '가정법 조건절과의 호응 문제'로 보니까 문장이 제대로 풀어지는군요. 역시 공부를 해야 해요. 시제 문제로만 접근하려고 하니까 원인이 잡히지 않더라구요. 아담님, 감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