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과잉 사회에 대한 반성과 대책
1) 보수 언론들의 교육위기 상업주의 경계
최근 한국 사회는 학력의 인플레이션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대졸자가 예전의 고졸자들의 직장에도 가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가령 서울시의 환경미화원 뽑는데에도 대학졸업자가 줄을 썼다는 기사 등이 그러하다. 그 외에도 예전의 실업계 고교 졸업자들이 차지해야 할 직장들, 가령 은행의 창구직이나 동사무소의 9급 공무원 직까지 모두 대졸자들이 점령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졸자가 고졸자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얻기 위해 직업훈련학교에 대거 입학해 추가 교육을 받는 웃지 못할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경향의 반영으로 석사나 박사 학위 소지자들은 더욱 직장 구하기가 힘들어진다. 이른바 한국은 학력의 인플레이션과 그에 따른 학력의 가치 절하가 일어나고 있다.
"한국 사회의 ‘학력 과잉(overeducation)’이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지난해 말 현재 석사학위를 가진 취업자 10명 중 9명은 하향 취업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4년제 대졸 취업자 가운데 절반(49.5%)은 고졸 학력만으로도 충분한 업무를 맡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박사 출신 역시 절반에 가까운 44.8%가 하향 취업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
프랑스 파리 1대학에서 8년 만에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박모(37) 씨는 한국 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 지방 수능학원 강사를 지내다 현재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 학사주점의 경리 겸 웨이터로 일하고 있다. (...)
학력 과잉은 당연히 국력의 낭비와 사회 전반의 비효율을 초래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추산한 2년제 및 4년제 대학 졸업 비용은 6700만∼1억2000만 원. 이에 따라 대졸 출신 미취업자를 기준으로 산출한 사회적 비용만도 20조 원이 넘는다는 설명이다. 중앙고용정보원 박천수(朴天洙) 동향분석팀장은 “막무가내식 대학 진학으로 중소기업은 인력난, 대졸자들은 취업난을 겪고 있다”면서 “한국의 인적자원관리 시스템은 ‘학력 과잉의 덫’에 걸려 있다”고 진단했다". (동아일보 2005 9.10 일자 기사)
그런데 신문 매스컴에서는 이런 학력 과잉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 미흡하다. 즉 무엇이 이렇게 한국인들로 하여금 불필요한 많은 공부를 하게 만들었느냐는 질문와 그에 데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조선, 동아를 비롯한 보수적인 신문들이 이런 이야기를 재탕 삼탕하여 독자들의 흥미를 붙잡으려고 하는 데에는 그들의 보수적인 교육철학이 뿌리박고 있다. 그들의 기본적인 전제는 평준화및 교육에 대한 국가적-획일적 통제가 그런 요인을 낳고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처방은 각 교육기관들의 자율화 및 통폐합 그리고 명문 엘리트 교육의 도입 등을 노리고 있다. 위의 동아일보 연재물 역시 점점 가면 갈수록 결론은 그런 교육의 시장주의 내지 엘리트주의를 요구할 것이 뻔하다. 이런바 교육 위기 상업주의이다. 예전에는 안보위기 상업주의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면 이제는 학력 저하 내지 고학력 인플레에션 등의 애드벌룬과 국가 경쟁력, 기업경쟁력의 약화로 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대학의 수준 향상을 위한 각종 대학의 자유-자율화 지지와 해외 명문대의 국내 도입 그리고 조기 교육, 교육시장 개방 등의 이슈가 나올 것이 예견되고 있다. 또 나온다, 즉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 일인당 지도 학생수가 8명이니 국립서울대의 경쟁력이 세계 100권이니 등 그들의 레파토리는 상당히 진부한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런 이야기를 듣고 또 듣고 해야 그 스토리의 상투적 결말에 대해 지칠 것인가? 이는 마치 텔레비 드라마의 스토리가 끝업이 반복되어도 보고 또 보고 하는 독자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유사하다.
2) 학력 인플레이션의 원인
위의 신문 기사의 보고처럼 대학졸업자가 9급 공무원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고 박사학위 소지자가 학원 강사 그리고 웨이터 하는 현상은 반드시 나쁘게 볼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학업의 전공과 전문 분야에 관계없이 모두가 공무원 시험 준비에 매달리는 것은 개인적, 사회적으로 분명 손실이며 낭비이다. 즉 일인당 1억 이상의 교육비를 지불하고 그런 공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환경 미화직이나 경리직에 매달린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특히나 박사 학위를 소지한 고급 인력들의 불안정한 직업 현실은 이 나라의 장래와 인재 양성에 큰 손실이 되고 있다. 필자 역시 유학 출신의 시간강사의 한 사람으로서 그 고달픈 현실을 남들과 공유해 왔다. 그러나 개인적인 아픔을 떠나 공적인 차원에서 문제의 현실을 바라보고 그 해결책을 보려해 보아야 한다.
일언지폐지하고 말해서 현재 우리나라의 학력, 전공과 관련없이 무조건 아무데나 취업하려는 현상은 학벌주의때문이다. 즉 공부하면 출세한다, 좋은 대학가면 그만큼 더 출세한다. 라는 맹복적인 학벌주의가 이런 대규모의 "학업-직업의 무관련성"을 초래한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학력과잉이라기 보다는 "학업-직업의 무관련성"이라고 개념을 분명히 잡아야 한다.
학벌주의, 그것은 "공부하면 출세한다"라는 유교적 문치주의 전통과 학력의 서열화, 시장화라는 미국식 교육자본주의가 결합한 한국적, 일본적 사회병리이다.
위의 신문 기사에서 말하는 “막무가내식 대학 진학"을 야기한 원인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대학 못가면 인간취급 못받는다는 학벌주의이다. 왜 우리는 "좋은 대학 = 좋은 인간 = 좋은 사회적 대우" 라는 맹목적 공식을 맹목적으로 신봉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한국인들의 절대적 신화이며 신앙이다. 그들의 유일한 종교가 바로 학벌주의이다. 기독교든, 불교든, 유교든 혹은 무속신앙이든 모두가 공통되는 것은 바로 그 믿음, 그 공식이다. 북한에 "유일사상"이란 것이 있다면 남한에는 "유일 교육"이란 것이 있다. 북한 사람들 역시 대놓고 말을 안해서 그렇지 학벌주의에는 남한사람들과 막상막하일 것이다. 학벌주의 그것은 이미 한국인의 유전자의 한 염기서열을 구성하고 있다.
이런 절대 종교적 학벌 앞에는 인간성이니, 개성이니 주체성 혹은 인격과 양심, 도덕성 등은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인간이 죽고 학벌만이 전면에서 인간을 지배할 때, 그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하나 분명한 것은 학벌주의의 유전인자는 환경에 부적합하여 그만큼 생존에 불리한 치명적인 결함을 자체에 품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은 크게 봐서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으로 나눌 수 있다. 사회교육은 문자 그대로 회사나 직장 등에서 현장과 실무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교육을 말한다. 한국은 전자보다 후자가 낫다. 그래서 이만큼 경제적 부흥을 이룩한 것이다. 그래서 대학이 그렇게 무능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해도 삼성이니 하는 대기업들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얻은 것이다.
3) 대책
이는 우선 미국식의 단선적 학교제도를 지양하고 독일식의 복선적 학교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선적 학제는 6-3-3-4 식의 상급학교가 하급학교를 통제하는 지배적인 교육시스템이다. 이런 제도 하에서는 무조건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인식이 그렇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급학교졸업 = 높은 보수" 라는 등식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제도는 가진자들이나 유한 계급에게 극히 유리한 제도이다. 다시말해서 시장의 강자가 교육의 강자를 산출하는 시스템이다. 미국 교육이 앞세우는 무한 경쟁의 논리의 비극적인 결론을 우리는 최근 미국 남부의 대홍수의 참사에서 잘 목도한 바 있다. 거기서 교육받지 못한 흑인들은 이등 국민 아니 삼등 국민들이었다. 그런데 조지 부시 대통령의 어머니는 - 아버지 부시의 부인- 홍수로 집을 잃고 대피수용소에 피난 온 사람들을 보고 " 그들은 자기가 살던 곳보다 더 좋은 곳에 머무른다"라고 칭찬 혹은 비아냥거림을 했다고 한다. 물론 그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는 것은 미국 상류층의 하류층에 대한 인식의 구조이다.
경쟁의 논리를 절대화하면 사회는 결국 중세적 계급사회, 노예사회로 타락한다. 그런데 이를 모르고 교육의 무한 경쟁 운운 하는 한국의 일부 몰지각한 친미 절대적 인사들은 자신의 성장과 교육의 기반을 잃어 버린 것이다. 부자들이나 기득권층이 그런 말을 한다면 이해를 하지만 자신도 서민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이런 무한 경쟁과 시장지상주의 교육관에 물든 것을 보면 결국 언론과 신문들의 경향이 얼마나 인민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지를 알 수 있다.
미국이 그런 고급학력-고등교육 지향적인 체제를 가지고도 그럭저럭 잘해나가는 이유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자유주의적인 사회풍조와 다민족적 문화구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 여기는 단일민족이고 역사가 유구하며 인구는 많고 좁은 국토에서 바둥거리며 살고 있다. 한국에는 미국의 흑인들이 없다. 그런데 미국식의 - 그들은 이를 가장 민주주의적 교육방식이라고 자랑한다- 단선제 학교제도, 즉 고등교육이 하급교육을 지배하는 구조에서는 흑인이 탄생하게 마련이다, 단 피부의 흑인이 아니라 학벌의 흑인, 학벌 나쁘고 가난한 사람이 바로 흑인이다.
상급학교의 하급학교 지배란 다시 말해서 입시위주의 교육을 말한다. 초,중,고 등의 모든 교육과 학습은 오직 하나 , 즉 명문대 입학을 목표로 한다. 이는 강남지역에서 초등학생부터 서울대 준비 통합형 논술 학원에 다니는 것을 보면 된다.
한국의 교육은 이처럼 미국식의 단선적 학교제도인데 이는 교육기관들 간의 수직적 통합과 수평적 서열화를 그 중요한 특징으로 한다.
이에 비해서 복선적, 다원적 학제는 교육의 단계들의 상대적 자율성과 독자성을 그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초등교육은 초등교육대로 그 고유한 목적과 기능이 있고 중등교육은 그 또래의 아이들의 성장 단계에 따른 고유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가 중등학교에 잘 들어가지 위한 수단이 되면 안되고 또 고등학교가 대학에 가기 위한 수단이 되면 안 된다. 인생의 각 단계는 모두 각각 중요하며 그 시절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지금 대학생들이나 어른 들에게 자신의 성장과정을 기억해보라고 하면 거의 대동소이하다. 학교, 학원, 그리고 시험 등이 거의 전부이다. 특이한 추억이나 인상적인 일들은 거의 없다. 이는 필자가 직접 많은 대학생들에게 그들의 성장과정과 교육과정을 기억해서 써 보라고 하였더니 그러했다.
이런 단순한 성장의 과정은 보수신문들과 이에 부응하는 교육시장주의자들이 말하는 국가 경쟁을 위해서도 대단히 해롭다. 왜냐하면 이는 다양성과 창의성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