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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 프랑크와 넬슨 만델라
숨겨진 두 페이지
독일에서 살던 유대인 소녀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의 은신처에 숨어 지내며 쓴 <안네의 일기>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동아시아의 청소년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홀로코스트 수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원본 가운데 갈색 종이를 붙여서 가려놓았던 두 페이지의 내용이 최근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안네 프랑크 박물관 소속 연구원들이 최근 이미지 처리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갈색 종이에 가려진 글자들을 판독해냈다고 한다. 가려진 종이 뒤쪽에 역광을 비춰 사진을 찍은 뒤 최신의 이미지-글자 전환 소프트웨어를 통해 판독한 것이다. 그 내용도 흥미롭다. 즐울 그어 지운 다섯 구절 외에 네 가지 야한 농담, 성교육과 매춘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니 말이다. 예컨대, "정상적인 남자라면 누구나 거리의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다"든가, "파리에는 이를 위한 집들이 마련돼 있고, 아빠도 거기에 간 적이 있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고 한다. 은신처에서 숨어 지낼 때 주변 어른들이 흘린 이야기를 주워듣고 쓴 것으로 보인다. 기사에서는 어린 소녀에게는 금기시되는 내용들이라 직접 종이를 붙여 가린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그렇다면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볼까 싶어 안네 스스로 검열을 한 셈이다. 물론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딸의 일기를 출판하기에 앞서 매춘과 관련되어 자신이 언급된 부분을 가리고 싶어 한 일일 수도 있다. 오토 프랑크는 이미 초판 서문에서 가족의 내밀한 사생활이나 사춘기 소녀의 성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내용 등은 뺐다고 밝히기도 했다.
<안네의 일기>는 사실 1947년 첫 출간 때부터 이런저런 논란에 시달렸다. 정통파 유대교도들은 안네 프랑크의 생활이나 생각이 너무 세속적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실제로 일기 어디에도 가족이 유대교의 계율을 지키려한 흔적을 찾기 어렵다. 독일에 동화된 유대인으로 살다가 나치 집권 이후 네덜란드로 피신한 집안이니 세속적이라고 해서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시온주의자들도 불만이 많았다.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죽어간 유대인이라는 수동적 이미지를 벗기 위해 바르샤바 게토 봉기와 같은 영웅적 투쟁을 강조하려는 그들에게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소심하고 수동적인 유대인이라는 기존의 통념을 강화하는 것으로 비쳤다. 그런 이유에선지 처음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되었을 때는 독서 시장의 반응도 미지근 했다. 1952년에는 일본어 번역판이 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가 되어 400만 부 이상 판매되고 청소년용 만화 등으로 출간되기도 했지만 일본의 열기는 오히려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서구에서 안네 프랑크가 크게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55년 브로드웨이에서 연극 <안네프랑크의 일기>가 상연되면서부터 였다. 이 연극은 토니상 연극 부문 최우수상과 희곡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정통파 유대교도들은 연극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안네 프랑크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지워졌다고 분노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연극 속의 안네는 옆집의 비유대인 소녀와 다를 바 없었다. 시오니스트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안네의 일기>를 불태우고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목소리까지 나왔다. 그런데 사실 <안네의 일기>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의 특수한 정서를 넘어선 보편성 때문이다. 사춘기 소녀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내밀한 고민과 미세한 감정의 떨림이 국경과 인종, 종교를 넘어 큰 호소력을 지녔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안네의 일기는 유대인들의 지탄을 받은 그 보편성 때문에 홀로코스트라는 유대인의 비극을 전 세계의 청소년에게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하게 된 셈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간 <안네의 일기>
<안네의 일기>의 호소력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까지 가닿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당 정부의 인종 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1948-1994)에 대항해 온몸을 던진 투사이자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권운동가이며 정치가였던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고 민주화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1994년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우리(반 아파르트헤이트 정치범)의 정신을 고양시켰으며, 자유와 정의의 대의는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가 인종주의의 한 극단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만델라가 안네 프랑크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충분히 이해된다. 그럼에도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아프리카국민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의 반아파르트헤이트 정치범들에게 인기가 높았다는 사실은 흥미롭기 짝이 없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정치범들의 감옥으로 악명 높았던 로벤 아일랜드(Robben Island)의 자료실에는 수감자들이 남긴 노트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아메드 카트라다(Ahmed Kathrada)의 노트가 가장 유명한데, 18년간 복역하면서 밀반입된 책이나 신문 등에서 따온 인용문들이 주된 내용이다. 안네 프랑크는 카트라다가 엄중한 처벌을 각오하고 만든 이 노트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4인방 가운데 한 명이다. 프랑크가 소포클레스, 공자 그리고 잔 다르크와 같은 반열에 올라 있는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시대착오적 인종차별주의와 싸우고 있던 이들에게 나치의 극단적 인종주의 정책, 즉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였던 안네 프랑크의 기억은 소중한 정치적, 문화적 자산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1940년대 초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자국의 인종차별주의와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연결 지어 운동의 동력과 국제적 지지를 얻으려 했다. 민주화 이후인 1990년대에도 정의와 화해, 아파르트헤이트와 그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들의 복권 등을 둘러싸고 토론을 벌일 때면 나치즘과 홀로코스트를 비교 대상으로 자주 언급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다. 1957년 브로드웨이의 연극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무대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유대인이자 저명한 연극 연출가인 레너드 샤흐(Leonard Schach)가 케이프타운의 극장에 올린 이 연극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무려 8개월 동안 공연을 이어갔다. 그런데 백인 관객들에게 이 연극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신력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한 한 소녀의 인생극장으로 보였을 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적 정치 현실을 떠올릴 만한 구석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나치즘의 기억이 지워져버린 탓이다. 대신, 안네 가족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되살아났다. 브로드웨이에서는 영어로 바꾸어 불렀던 하누카(Hanukkah)의 송가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히브리어 노래로 되살아나는 식이었다. 정통파 유대교도였던 연출가 샤흐의 입김이 작용한 탓인데, 심지어 안네 프랑크 가족이 겪은 고통은 독일인으로 동화되기를 바라던 유대인에게 닥친 인과응보성 시련이라는 시각이 엿보이기도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버전의 연극에서 되살아난 안네 가족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이데올로기에 맞게 기묘하게 배치되었다. 인종주의적 권력 집단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민당은 '평등한 분리'라는 슬로건 아래 흑백의 인종적 정체성을 뚜렷이 구분함으로써 아파르트헤이트의 문화 담론을 구축했다. 그러니 나치의 인종주의적 학살의 희생자라는 역사적 맥락만 제거되면, 안네 가족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아파르트헤이트와 배치될 것은 없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기승을 부리던 1977년에도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다시 샤흐의 연출 아래 아프리칸스어 연극으로 만들어져 공연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에서 공연된 이 연극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와 연결시켜 보는 백인 관객은 아무도 없었다.
나치즘과 아파르트헤이트
프리토리아의 백인 관객들이 역사성이 삭제된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즐기는 동안,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들은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이야말로 '나치의 패망 이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도덕적 전투'라고 규정하고, <안네의 일기> 속에서 나치즘이란 역사적 맥락을 되살렸다. 1970년대 초반 3년 연속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박물관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나치즘(Nazime in Zuid-Afrika)'란 주제로 열린 기획 전시는 바로 이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네덜란드의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 단체가 주관한 이 전시들은 나치즘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끼친 영향을 강조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71년 여름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네덜란드 학생들로 구성된 단체가 조직한 첫 번째 전시는 나치의 뉘른베르크 법령들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에 기초한 사법 조치들, 유대인 거주구역인 게토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구역인 반투스탄(Bantustan)간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들을 보여주고자 했다. 전시 기획자의 말에 따르면, 굳이 나치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전시를 한번 둘러본 사람들은 나치즘과 아파르트헤이트를 연결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박물관이 본래 안네 가족이 숨어 살던 집이라는 장소의 특별함 덕분인지 이 전시는 많은 관람객을 끌어모았다. 전시는 안네 프랑크 가족이 숨어 지내던 2층에서 출발해 1층으로 내려와 전시실 입구에서 관람을 끝내는 동선으로 짜였는데, 전시실을 나서는 관람객은 모두 '나치즘=아파르트헤이트'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 밑을 지나야만 했다.
1972년 여름의 두 번째 전시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유지를 뒷받침한 외국 자본이 주제였다. 전시장 안에는 나치의 휘장인 헤켄크로이츠를 들고 있는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상 발타자르 포스터(Balthazar J. Vorster)의 실물 크기 종이 인형이 세워져 있었다. 또 이런저런 아파르트헤이트 정치가들의 인종주의적 발언들을 인용한 포스터들이 걸려 있었다. 이 전시 역시 관람객을 끄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3년의 세 번째 전시는 관람객들의 방명록이 남아 있어 흥미롭다. 유럽, 미국, 중남미,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지에서 온 수천 명이 방명록에 남긴 반응은 제각각이다. 많은 사람이 나치즘과 아파르트헤이트를 연결 짓는 전시 내용이 설득력이 있으며 인종주의에 맞서 싸울 필요가 있다고 썼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온 방문객들은 대부분 심드렁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관람객들은 격렬히 항의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언론들도 전시를 주목하고 본국에서 토론을 이끌었다. 편견과 광기에 사로잡힌 남아프리카공화국 때리기라는 비난이 주를 이루었지만, 아파르트헤이트가 지속되는 한 전시가 보여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이미지는 바뀔 수 없다는 용기 있는 주장도 나왔다. 전시를 주도한 집단 내에도 이견이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나치즘 이전부터 존재한 식민주의의 유산이기도 한데 '나치즘=아파르트헤이트'라는 등식은 식민주의의 책임을 지워버린다는 비판이 대표적이었다. 안네 프랑크의 유산을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에 이용하는 데 찬성하고 투쟁을 지지해 온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도 '나치즘=아파르트헤이트' 등식에는 반대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결국 1973년 전시를 마지막으로 안네 프랑크 박물관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네덜란드 학생 단체는 결별하고 말았다.
변명과 비판 사이에서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본국의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들은 여전히 아파르트헤이트를 나치즘에 비유했다. 만델라도 마찬가지였다. 만델라는 "히틀러 같은" 국민당 정부, "미래의 게슈타포" 같은 표현을 즐겨 썼고, 아파르트헤이트를 나치의 '헤렌폴크(Herrenvolk, 나치가 아리아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 낸 개념이다. '지배자 민족'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정책'에 비유하기도 했다. "벨젠과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의 유령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회하고 있다"는 경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만델라를 비롯한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들은 아파르트헤이트를 나치즘에 비유함으로써 인종 차별 정책의 부당함을 비판하는 데 몰두할 뿐, 나치의 희생자들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실제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범죄를 폭로하고 그에 반대하는 운동의 동력을 재생산하는 데에는 '아파르트헤이트=나치즘'이라는 구도가 유효했을 것이다. 그런 구도는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에 매우 분명한 도덕적 정당성과 지적인 확신을 가져다줄 수 있었을 것이다. 총과 지식을 독접한 거대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과 싸우는 이들에게 가장 유효한 기억의 프레임이엇을 것이다. 홀로코스트라는 나치의 사악한 범죄행위는 너무도 자명해서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희귀한 역사적 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생자 개개인이 겪은 고통과 아픔은 물론 심지어 죽음마저도 도구화되어 정치투쟁의 장에 동원된다는 느낌은 감추기 어렵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타도'는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정언명령과도 같지만, 그 도덕률이 정치의 영역에서 작동할 때 희생자들을 도구화하는 경향 역시 부정하기 힘든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끝나고 민주주의로의 전진이 절실했던 시기에 안네 프랑크에 대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기억이 바뀌는 것도 흥미롭다.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안네 프랑크는 나치가 저지른 끔찍한 범죄의 희생자에서 화해와 관용의 상징, 민주화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지구적 인권체제를 연결하는 보편적 희생자-인간의 이미지로 재정립되었다. 1994년 케이프타운에서 시작해서 14개월 동안 남아프리카공화국 전역을 순회한 전시 '세계 속의 안네 프랑크(Anne Frank in the World)'가 대표적인 예이다. 요하네스버그의 전시 개막식에는 신임 대통령 만델라가 직접 참석해서 앞서 인용한 연설을 했다. 안네 프랑크가 살아서 그 연설을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다.
희생자에 대한 기억은 도덕의 영역에 머물러야지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주장은 너무 순진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기억의 정치에서 희생자를 도구화하는 경향을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정치의 영역에서 희생자의 도구화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불가피한 것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래도 '불가피하니까 어쩔 수 없지 않냐'는 태도와 '불가피 하지만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회의하는 태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이 차이가 한 사회의 기억 문화가 자기변명 중심으로 구성되는가 아니면 자기비판 중심으로 구성되는가 하는 큰 차이를 낳는다. 한국 사회의 기억 문화는 어느 편에 가까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