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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추모시론
황홀한 놀이와 우주적 상상력
고 명 수
1. 언어의 꽃밭을 경영한 문학의 CEO
호모루덴스의 저자 하위징하는 먹고 사는 데 쓰고 남는 에너지를 가지고 인간은 놀이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고 하였다. 언어를 가지고 한 바탕 거하게 이 놀이를 즐기고 간 시인이 방산 박제천 시인이 아닐까 한다.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나 1966년 『현대문학』에서 신석초의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장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의 불꽃을 피워보자”는 포부를 품었고, 그 꿈은 17권의 시집으로 장대하게 펼쳐진다. 첫 시집 『장자시(莊子詩)』(1975)로부터 『심법(心法)』(1979), 『율(律)』(1981), 『달은 즈믄 가람에』(1984), 『어둠보다 멀리』(1987), 『노자 시편(老子詩篇)』(1988), 『너의 이름 나의 시(詩)』(1989), 『푸른 별의 열두 가지 지옥에서』(1992), 『나무 사리(舍利)』(1995), 『SF-교감(交感)』(2001) 까지 열권의 시집은 2005년 박제천 시전집 전 5권 속에 수록된다. 그 이후에도 아,(2007), 달마나무(2010), 호랑이 장가 가는 날(2013), 마틸다(2015), 천기누설(2016), 풍진 세상 풍류인생(2020), 노자의 블랙홀(2021)에 이어 미처 발간되지 못한 제18시집 장자시집 심경(우화시)과 기타 신작시들로 지치지 않고 창작의 불꽃은 꺼지지 않고 이어졌다.
또한 그는 재야의 고수이자 은둔의 시인으로 300명에 가까운 많은 제자를 길러낸 국내 최초의 문학사숙 문학아카데미의 대표이자, 종합문예 계간지 문학과 창작을 178호까지 펴낸 잡지의 편집인인 동시에 방산시회의 수장이었다. 근작시 「소창다명(小窓多明)」(문학과 창작 2022년 봄호)에서 표방한 것처럼 “이 한생 맑게 빚어 삶의 꽃 한 송이”피우고자 했던 방산 박제천은 확고한 예술의 비전을 가지고 말의 씨앗을 뿌리고 묵묵히 그 꽃밭을 경영한 언어의 CEO였다.
「환상과 정신」이라는 시론에서 방산은 사람의 상상력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보는 것이 서구의 예술에서 배운 것이라면, 사람의 세계와 사람이 없는 세계를 이어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정신이라는 것을 동양에서 배웠다고 진술한 바가 있다(영혼의 날개, 1983). 장자시와 같은 초기의 시에서 상상력의 극한을 탐구하던 그는 이후의 시에서는 동양의 정신세계를 탐색하는 기나긴 여정을 꾸준히 이어갔다. 서양인들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아 과학문명을 발전시켜 온 데 비해, 인간조차 자연의 일부로 여겨 자연과의 조화를 지향했던 동양인들의 태도와 정신세계가 시인 박제천의 생리에 더욱 잘 맞았을 것이다. 시론 「꿈의 하늘」에서 표명하듯 그는 “무작정 하늘로 올라가려고 떼를 지어 바벨탑을 쌓았다가 하늘의 노여움을 받았다는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에 비추어볼 때 용이며 봉황이며 붕새를 하늘에 노닐게 한 동양인의 의식구조”가 동양인인 그에게는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유크리드 기하학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과학정신은 자연을 정복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현대의 시간과 공간을 단축시켰으며, 회색빛 시공에 갇힌 현대인들은 ‘꿈의 하늘’을 잃어버린 채, 삭막한 삶을 살고 있다. 시인의 역할은 바로 분주한 일상 속에서 현대인이 잃어버린 ‘꿈의 하늘’을 되찾아주는 일이 아닐까? 시업 60년 동안 박제천 시인이 추구해 온 ‘꿈의 하늘’로의 여행은 고대와 현대를, 문명과 자연을, 동과 서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양쪽을 신비적으로 융합하는 새로운 경지를 열어 보였다.
2. 황홀한 놀이로서의 시와 우주적 상상력
1960년대의 한국 사회는 분단 상황 속에서 6. 25 전란을 마무리하면서 민주화를 실천하고 근대화를 추진해야 하는 막중한 과제를 안고 있던 시대였다. 4.19혁명이 민주화 실천의 불꽃을 피워 올렸지만, 곧 이어진 5.16군사쿠데타는 민주화의 이념적 목표보다는 근대화라는 현실적 목표를 우선시하며 양자 간의 충돌을 야기하여 첨예한 대립과 갈등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60년대의 시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몇 가지 흐름의 시적 응전 방식을 보여주었다. 김수영, 신동엽, 김지하, 신동엽, 신경림 등의 현실참여시의 흐름과 정진규, 박이도, 김종해, 오탁번, 이탄, 이가림 등의 순수한 서정과 낭만적 서정시의 흐름, 그리고 이승훈, 오세영, 박의상, 이수익 등의 이른바 현대시 동인을 중심으로 한 주지적 서정과 언어의 탐구 흐름이 있었다. 이러한 60년대 시의 흐름 속에서도 전통적이고 독자적인 상상의 세계를 펼친 점에 시인 박제천의 자리가 놓인다. 그의 시는 동양인과 한국인의 정신세계와 정서를 탐구하고 천착하였다. “삶의 근원을 탐구하여 초시대적 상상의 자유를 개진하려는 박제천의 시적 의지는 전통사상의 현대화라는 점에서 분명 남다른 시적 성취를 획득하고 있음은 사실”이라는 최동호의 평가(「동양정신의 현대적 탐구」)도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60년대에 치열하게 정신의 고투를 통해 탐구했던 박제천의 시적 작업은 1970년 10월호 『현대문학』에 33편의 「장자시」를 발표함으로써 당대 시단에 충격을 주게 된다. 띄어쓰기를 무시한 채 현란하게 전개되는 이미지의 파노라마는 기존의 가치와 규범을 파괴하는 전위적인 양상을 보인다.
漢籍갈피에서날리는智慧의숨소리
깨어있는나의안에서해를길어올리는두레박소리
출렁이는물속의아픔이손가락끝에서얼굴을드러내네
거슬러오를수없는時代
내여윈肋骨의틈에서해를밀어올리는莊子
그의바람이山갈치를떨어뜨리네山갈치가퍼덕이고햇빛은
槍처럼그것의등을꿰어바다로도로던질것이네.
―「莊子詩 그 열 하나」
「장자시」는 연작시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연작시는 “한 인간이나 사물의 전체상을 구성하거나 적어도 가능한 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의 산물”(김준오, 「비전과 시의 존재양식」)이라는 점에서 시인 박제천의 치밀한 전략과 계산이 숨어있는 것이었다. 연작시에는 개별 작품에 제목을 부여하지 않고 “그 하나”, “그 둘”과 같이 숫자로 명명되어 있어 익명성을 부여하는데, 이것의 효과는 이러한 “익명의 비결정성” 이 오히려 시를 “다성적 구조로 존재”(이지선, 「한국현대시의 해체적 상상력: 박제천의 장자시를 중심으로」)하게 하는 효과를 준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방산은 왜 생사 초탈의 이분법적 사유를 해체하는 장자의 세계를 탐사해 들어갔는가? 그의 의도는 바로 위의 시 “장자시 열 하나”에서 잘 나타나 있다. “한적의 갈피에서 발견한 지혜의 숨소리가 깨어있는 나의 안에서 해를 길어 올리는 두레박 소리”처럼 구원의 소리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혼란스런 시대의 한 가운데서 고통스럽게 방황하던 20대 청년이었던 시인은 “내 여윈 늑골의 틈에서 해를 밀어 올리는” 장자(莊子)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시단의 권위였던 정한모 시인은 박제천의 장자시를 이렇게 평했다.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는 감각들이 신선하고, 쌓아 올리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봐리에떼도 다양하다. 상상의 세계로 터무니없이 비약하지 않고, 필연적인 확대와 비약을 하고 있다. 감각과 상상과 언어구사, 이 세 가지가 모두 든든한 바탕 위에 자리하고 서로 유기적인 연관성을 잃지 않고 하나의 표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박제천의 시는 구문이 정확하고 메타포에 의한 이미지들이 각명(刻明)하여 그 전달성이 강하다. 불투명한 이미지, 그것을 은폐하려는 구문의 불구성(不具性), 이런 것으로 현대시의 난해성에 편승하려는 사이비 시와 대조해보면 박제천의 시가 지니고 있는 안정성과 견고성이 이해될 것이다.
위의 평에서 보듯이 방산의 시가 지닌 “안정성과 견고성”을 높이 평가하며 그러한 안정성과 견고성은 “감각과 상상과 언어구사가 든든한 바탕 위에 자리하고 서로 유기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한 “구문이 정확하고 메타포에 의한 이미지들이 각명(刻明)하여 그 전달성”이 강한 박제천 시의 장점이 당시의 난해시들, 즉 “불투명한 이미지, 그것을 은폐하려는 구문의 불구성(不具性), 이런 것으로 현대시의 난해성에 편승하려는 사이비 시”들과 구분된다고 명확하게 평가하고 있다. 김용범의 지적처럼, 방산의 첫 시집 『장자시』의 뛰어난 점은 “장자의 원전을 인용하거나 그 비유를 전제하거나 해석하지 않았으며 장자 철학이론을 시에 드러내지도 않았”으며, “다만 장자를 빛나는 감성과 상상력으로 수용함으로써 시라는 창조적 산물을 빚어냈다”(「노장철학의 문학적 수용과 형상화」)는 새로움에 기인한다. 이러한 장자시의 성공은 이후 그의 시를 평가하는 하나의 준거틀로 작용한다. 작고하기 전에 방산은 우화시로 풀어쓴 112편의 장자시집, 심경을 집필하고 그 일부는 발표했으나 출간되지는 못하였다.
“서양정신과 동양정신의 대결을 통하여 깊고 넓은 동양적 상상의 세계를 독자적인 자신의 세계로 구축”(「최동호, 앞의 글)해가던 방산은 『장자시』 이후 시집 『심법』과 『율』을 발간한다. 그는 시집 『율』의 서문에서, “『심법』에서 마음의 궁리에 힘썼으며 『율』에서는 자연의 습합을 노래했다”고 스스로 작의를 밝힌 바 있다. 네 번째 시집 『달은 즈믄가람에』에서는 한국의 정신사에 대한 탐사를, 『어둠보다 멀리』에서는 “지상적인 것들의 속박에서 벗어나 우주적 상상으로 펼쳐져 나가는” 시적 탐구를 보여주었다.
이제 내가 날리는 새들은 自然의 새들이 아니어라
하늘 높이, 거기 떠 있는 별들을 지나 또 다른
하늘로 날아가는
저 새를 무어라 이름지어야 할지 몰라라
죽지며 부리며 머리에 여벌의 날개며 혀며 뇌를 단 채
빛보다 빨리 어둠보다 멀리
이 마음의 구석구석을 떠돌아다녀라
새여,
뜻이 있을 수 없는 이 손길 가리키는 대로
이 눈길 주어지는 대로
날아간 새여
오늘 내가 문득 새가 되어 전속력을 다해 날아가 보아라
하늘 높이 거기 떠 있는 별들을 지나 또 다른 하늘에
별로 떠 있어라
전신 全身으로 우는 네 소리가
혹은 높아지고 낮아지고
그 때마다 혹은 밝아지고 희미해지는 별빛이어라.
―「새」 전문
이 시에서 화자가 말하고 있는 새는 “자연의 새들”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 높이, 거기 떠 있는 별들을 지나 또 다른 하늘로 날아가는” 새, 즉 우주적 상상의 새이다. 는 “마음의 구석구석을 떠돌아다니는” 그 새는 “빛보다 빨리 어둠보다 멀리” 확산되는 시적 주체의 상상력을 가리킨다. 이러한 박제천의 상상력을 필자는 ‘신사(神思)의 상상력’으로 논평한 적이 있다(「신사의 세계」) 그것은 ‘천지를 형상 속에 담아내고 만물을 붓끝에 싣는’ 것으로 시인의 마음은 작게는 그 안에 더 이상 무엇이 담길 수 없을 정도로 작으며(其小無內) 크게는 경계가 없을 정도로 큰 것(其大無限)이라야 한다. 고전시학이론에서 흔히 쓰이는 신사(神思)란 용어는 시공을 초월하는 예술적 사유능력을 의미한다. 즉 ‘서두르지 않아도 빨리 갈 수 있으며, 직접 가지 않아도 이를 수 있는’ 무궁무진한 형상적 예술 사유를 말한다. 위의 시에서 보여주듯이 이러한 신사의 구사에 있어 박제천은 그야말로 우주적 상상의 바다를 노니는 자유 자재함을 보인다.
『너의 이름 나의 시』에서 자연의 사물들, 특히 꽃이나 풀들이 가지고 있는 존재와 언어를 천착한 그는 여섯 번째의 시집 『노자 시편』에 도달한다.
『노자 시편』은 역시 각각 10편씩 모두 4부로 이루어진 40편의 연작시이다. 이 연작시의 기본 틀은 너와 나라는 이원적 대립구조에 의해 세계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의 기본 틀은 노자의 깨달음을 언급한 도(道)나 무(無)를 ‘너’라고 명명하고 잡다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나’로 설정하여 시를 전개해 나간다.
비로 바뀌어 내리는 말씀들
눈이 되어 내리는 소리들
내 생각의 자리에 언제나 너 서 있음이나
네 생각의 자리에 언제나 내 머물음이나
이 모든 어리석음이
오늘은 눈으로 혹은 비로 혹은
진눈깨비로 나타나는구나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오, 네가 바로
새로구나
너에게 달겨드는 한 마리 수리
나에게 나래치는 한 마리 해동청
오, 하늘 가득 떠 있는
새들의 날개
이 모든 부질없음이
오늘은 점으로 혹은 선으로
희미한 그림인 양 겉만 내보이는구나
―「아름다운 말은 거짓말」 전문
「노자 시편」 직전에 방산은 파랑새문고(샘터, 1986)에 채근담을 펴낸 바 있는데, 이 책의 해제에서 그는 “『채근담』은 한마디로 말해 삶의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어떻게 살아야 사람의 삶을 올바로 사는 것일까. 무리와 어울려 살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길은 없을까, 이러한 옛사람들의 꿈을 구체화할 수 있는 갖가지 아름다운 삶의 방향과 실천의 덕목을 유·불·도를 중심으로 모아놓은 명상록”이라고 진술한다. 방자하다는 비난을 들을 정도로 패기만만했던 그는 이제 불혹(不惑)의 40대에 접어들어 ‘도가적 은일의 청담(淸談) 교량’(김용범, 앞의 글)을 건너온 다음에 노자의 세계로 진입한 것이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눈으로 혹은 비로 혹은 진눈깨비”로 다가오는 “이 모든 어리석음”을 직시하며 “이 모든 부질없음”을 깨우친다. 그리고 “한 마리 수리”와 “한 마리 해동청”으로 “하늘에 가득 떠 있는 새들의 날개”를 발견한다. 모든 어리석음과 부질없음을 떨쳐버리고 대자연의 도를 깨닫기 위해 치열하게 다가가는 도전의 기록이 『노자 시편』을 통해 전개된다. 그것은 시집의 서두에서 ‘너의 이름은 어둠이다’라는 시적 명제로부터 출발한 화자가 “아름다운 말은 거짓말”’이라는 시적 명제로 회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최동호의 지적처럼, 『노자 시편』은 “박제천의 삶 전체를 용해시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한 시적 도전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마치 현대 철학의 선구자인 프리드리히 니체가 삶의 다양한 변화에 직면하여 인간의 정신이 겪는 변화상을 낙타, 사자, 어린이의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하고, 낙타의 단계를 거쳐 사자의 단계에 이르고 다시 어린 아이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과 견주어 볼 수 있다. 낙타의 삶이란 무거운 짐에 대한 공경과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기에 짐이 아무리 무거워도 그것을 견딘다. 강인한 정신을 지닌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고 그 자신의 사막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주관이나 신념이 없이 수동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인간, 익숙한 것들을 등에 짊어지고 말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삶이다. 주어진 고행만으로도 벅찬 삶인데, 그것을 참고 견디는 일은 어쩌면 일종의 자기학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낙타는 사자로의 변신을 꿈꾼다. 사자가 된 정신은 더 이상 짐을 지고 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의 자유이다. 그는 자유를 통하여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고자 한다. ‘나는 누구인가?’하고 자신의 존재와 운명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반복적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해서 도전해본 적이 있는가? 하고 묻는다. 자신의 부조리한 운명에 대해 성찰해본 적이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니체가 ‘거대한 용’으로 비유했던 윤리적 당위성의 명령들을 의미한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근원적인 의문을 표하는 것이다. 기존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의 힘은 마치 용의 위용과도 같이 우리의 의식을 짓누르고 있다. 그것은 기존의 가치들을 묵묵히 따르는 낙타가 되기를 종용한다. 그러나 참된 자신이 되고자 한다면 그러한 용에 대하여 저항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낙타로서의 삶으로부터 정신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자유의 쟁취가 필요하다. 나의 존재와 운명에 대하여 가열찬 저항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는 사자의 단계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불과하다. 이 준비작업 다음에는 ‘어린아이’로의 변화가 필요하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 아이는 천진난만, 망각,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라고.
시인 박제천에게 시 쓰기는 창조적 놀이이자, 황홀한 놀이이다. 그것은 삶의 고통을 승화시키는 자기 치유(healing)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세계와 자연의 이법을 직관으로 깨달아 그것을 독자들에게 나누어주는 회향의 과정이기도 하다.
하느님처럼 부처님처럼
스스로
내 안의 더럽고, 고름 끼고, 상처 난 별들을
하나하나 씻어주고 풀어주는
황홀한 놀이
민들레도 쑥부쟁이도 제 얼룩 햇살에 씻어내고
강아지도 고양이도 제 상처
혓바닥으로 핥아내듯
내 안에 비틀러지고 엉겨 붙고 축 늘어진 별들을
하나하나 바로잡고 동여매고 일으켜 세우는
황홀한 놀이
어둠조차 눈부시게 눈부시게
혓바닥으로 닦아내고 햇살로 씻어내는
자연법을 가르쳐 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아직, 혼자서, 캄캄한,
누구에게라도 전해드리겠습니다.
― 「황홀한 놀이」 전문
사람들이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온갖 어둠들을 하나하나 씻어주고 풀어내어 눈부시게 회복시켜주는 치유의 예술, 그것은 마치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뭇 생령들의 고통과 어두움을 사랑과 광명의 빛으로 밝혀주는 것과 같은 구원의 과정과 연관되어 있고, 방산은 마치 수행자처럼 내적 수련과 고뇌를 극복한 고행의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누군가 “아직, 혼자서, 캄캄한” 영혼들에게 희망의 새싹을 나누어 주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시인 박제천에게는 ‘거룩한 긍정’에 기반한 ‘창조의 놀이’인 동시에 그만의 독특한 상상놀이 혹은 가면놀이이기도 하다(「무지개도둑」).
3. 통합과 생성으로서의 우주적인 몸
사람의 몸이란 외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닮지 않은 신비한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공간으로 아직 탐험할 곳이 많은 거대한 대륙(칼 짐머,기생충제국)이다. ‘생태학적 상상’은 어떤 상황이나 사물을 상상하는 데 있어서, 생태계의 특징에 따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상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생태학적 상상은 인간의 ‘신체’와 관계 지을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인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체적 ‘체험’을 통해서 생태학적 합일을 몸소 실천하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임현정, 「상상의 공간으로서의 몸」).
청나라 때 내경도(內徑圖)를 보면
내 안에
산과 강, 들과 숲, 바위가 있단다
생각해보니 산에는 산짐승, 강에는 물고기,
들과 숲에는 사슴도 있고, 늑대도 있을 것이다
내 안에 아침이며 밤도 있고
꽃 피고 지고 봄 가을이 찾아오는 계절도 있어
내 안의 산천경계를 유람하려면 꽤나 바쁠 것 같다
그래도 좋겠지, 그렇게 바쁜 날에도 한순간
회오리바람을 타고 내 안의 하늘로 올라가
구름 위에 벌러덩 누워 남명이나 다녀오면 더욱 좋겠다
어이, 친구들, 휴가는 없나
내 안에 사는 내게 카톡을 해보았더니
죽어서 영생 휴가를 받을 텐데
뭐 그리 급하시나, 실실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준다
저쪽 나라에서는 쉬고싶으면 로봇처럼
잠시 전지를 빼놓던데, 내 안의 붕새가 중얼거린다
회남자 가로대 새옹지마라 한다
이쪽 나라에서 바쁘게 사는 것도 복받은 인생일지니.
-「유람 천하」전문
제9시집 나무사리에 실린 위의 시에서 화자는 도교의 신체관을 그대로 계승하여 이미지화한 그림으로, 중국의 청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내경도’를 상상의 매개로 삼아 시상을 전개한다. 인간 신체의 내부를 묘사한 이 그림은 마치 지도를 보는 것처럼, 신체를 이미지화 한 것이지만, 산, 들, 바위, 강 등 자연적 요소와 시인의 상상은 유비적 감응 관계에 있다. 화자는 산과 강, 들과 숲, 바위 등으로 이루어진 ‘내 안에 있는 산천경계’를 유람하려면 꽤나 바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내 안의 하늘’로 올라가 ‘남명’을 다녀오고 싶다고 말한다. ‘남명’이란 익히 알고 있듯이 장자의 「소유유」편에 나오는 남쪽바다이다. 이 남쪽 바다에는 분명 붕새를 타고 갔을 터이다. 이러한 도가적 상상과 사유는 이윽고 현대문명의 이기를 상징하는 ‘카톡’이나 이모티콘 등의 수단을 통해 현실의 세계에 사는 내가 상상의 세계에 사는 나와 교신을 한다. 자유분방한 상상을 통해 화자는 ‘휴가’조차 없는 현실적 삶의 분주함의 노고조차도 뛰어넘어 “죽어서 영생 휴가를 받을 텐데 뭐 그리 급하시나”라는 위안에 가볍게 도달한다. 융 심리학의 용어로 말한다면 심층의 ‘자기self’가 현실의 ‘자아ego’에게 하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말미에는 한漢대의 도가사상가인 회남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인생만사가 변화무쌍함을 ‘새옹지마’의 고사를 통해 설파한다. 화자는 그러한 고전적 사유를 통해 이승의 분주함조차도 ‘복받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의 동양학적 사유는 이제 자유자재의 경지로 육화되어 스스로 시상을 전개해나감을 볼 수 있다. 삶과 세계의 근원적 진실을 찾기 위한 그의 시적 탐구는 마침내 아래와 같은 화해로운 의경(意境)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한 마음의 열두 가지 지옥을 다 비우는,
오늘은 내가 당신이 되는 날
한 물줄기의 수만 물방울이 하나같이 반짝이는,
오늘은 당신이 분수가 되는 날
푸르름의 목어, 눈부심의 풍경 다 내어건
향기로운 절 한 채 지어서
마음이 추운 이들을 모두 불러들이는,
오늘은 당신이 집이 되는 날
하찮은 돌멩이나 풀줄기, 꾸겨진 종이장 하나에까지
햇빛의 광명을 가득 채워
숨쉬게 하는,
오늘은 당신이 내가 되는 날
한 마음의 열두 가지 생각을
한 생각으로 바꾸어
오늘은 내 안을 텅 비우는 날.
―「오늘은 내가 당신이 되는 날」 전문
시인의 이전 시집 제목이 푸른 별의 열두 가지 지옥이었음을 상기할 때, 오랜 시적 탐구가 이제 한 고비를 넘어가고 있음을 알게 하는 시가 아닐까 한다. 마음의 열두 가지 지옥을 다 비우고 너와 내가 따로 없는 따뜻한 화해의 세계에 이르렀을 때의 공간적 경계가 ‘한 물줄기의 수만 물방울이 하나같이 반짝이는’ 모습으로, ‘푸르름의 목어, 눈부심의 풍경 다 내어건’ 향기로운 절 한 채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면, 이러한 세계에서의 시간적 경계는 청각과 후각이 어우러지는 봄밤의 상황으로 나타난다. 도취의 황홀경이라 할 만하다.
봄밤이다, 복사나무 마디를 뚝뚝 꺾는 소리, 인동덩굴 서로 껴안는 소리, 뿌리 아래 작은 벌레들이 더듬이를 세우는 소리, 날개를 손질하는 소리, 굳은 어깨 관절이 풀리는 소리, 얼음이 종이짝처럼 바스라지는 소리, 남천나무 열매가 얼음물에 녹아나가는 소리,
화엄세계다, 쌓인 눈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쑥내음, 눈매가 푸른 냉이내음, 지난 가을 떨어진 비자열매 매자열매 들뜨는 내음, 웅크린 바위마저 코를 벌룸이며 들여마시는 자연의 술내음, 산도 나도 천지도 취해 기지개를 켜다가 팔자걸음을 걷다가
―「봄의 신에게」 부분
이제 시인은 허무와 분노의 대장간을 나와 암수나무가 아름다이 어울려 한데 사는 불이(不二)의 ‘오수유 숲’에 이른 것이다.(「오수유 옆에서」) 그곳은 삼라만상이 서로에게 말을 걸어오는, 약동하는 생명의 물활론적 세계이다.(「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의 시집 『나무 사리』는 살아 있는 도깨비들을 창조해냄으로써 황홀한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도깨비란 곧 예술가의 도이고, 그 도의 환에 다름 아닐진저’ 라고 한 시집 말미에 붙은 그의 에세이에서의 언급처럼, 그의 시 속에 전개되는 상상의 세계, 예술의 세계에는 수많은 도깨비들이 출몰한다. 도깨비가 되어 도깨비들과 어울리며 그리운 이들의 이름을 불러보는 호모 루덴스의 시인!
4. 자기실현인의 표본
니체는 인간을 ‘짐승과 위버멘슈(Übermensch)를 잇는 밧줄’ 비유한 바 있다. 위버멘슈는 ‘극복인’, 즉 인간의 가장 현실적인 이상형을 말한다. 그는 심연 위에 드리운 밧줄일 뿐만 아니라 그 밧줄 위를 걸어가는 자이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인간이 이미 위대하기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위대함으로 가는 밧줄 그 자체이자 그 밧줄 위를 걷는 자이기 때문이다. 극복인으로서의 인간은 자신과 세계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변화의 계기들을 발견한다. 그는 부단히 이행하는 열린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익숙해진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기에 고통스러운 과정이다(김선희,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시인으로서의 박제천의 생애는 기나긴 자기실현의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노장과 달마를 통해서, 때로는 국학과 민속을 통해서 다양한 시의 존재가능성을 실험해보면서 오묘한 상상력과 직관을 통해 구현하려고 한 것은 바로 이 신비한 우주와 마음의 이법이 아니었을까? 박제천의 시선집인 『밀짚모자 영화관』(시월, 2011)에는 그의 반백 년 시가 오롯이 모여서 있는데, 물처럼 흐르는 시들은 “그 예리한 것을 꺾고(挫其銳, 『도덕경』 제4장)”, “빛을 고르게 하고 티끌과 함께 하는(和光同塵, 『도덕경』 제56장) 유려한 시들로 가득하다.
노장의 도(道)라든가, 융이 말하는 자기(自己, self)는 갓 태어난 아기 또는 어린이와 같이 불변의 순환성과 유연함으로 가득하다. 모든 것을 포괄하며 분열되지 않는 전체성, 상처받기 이전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아이를 융은 ‘놀라운 아이’, 또는 ‘경이로운 아이(wonderful child)’라 칭했다. 경이로운 아이의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상상력의 세계가 펼쳐진 만화경 세상이 박제천의 시 세계라 할 수 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시인의 길, 혹은 도의 길은 외로운 것이거나 바보 같아 배척받는 것 같고, 또한 자기에 입각한 삶이기에 외로운 길이지만, 고독한 자의 감상적 우수와는 전혀 다른 “확고하게 대지에 발을 딛고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가는”(이부영, 『자기와 자기실현』) 삶이었다. 두루 알다시피 박제천 시인은 여러 군데 출판사를 전전하다가, 문예진흥원에 오래 근무하면서 우리 문화의 선양에 힘써 왔다. 그러다가 뜻한 바 있어 국내 최초의 문학사숙인 문학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수많은 시인들을 양성하는 일에 주력하며 양질의 시집과 문학지를 출판해 왔을 뿐만 아니라, ‘숲속의 시인학교’와 시낭송회와 같은 ‘시의 축제’를 열어 시의 대중화에도 기여해온 바 있다. 무엇보다 시단의 권력에 편승하거나 연연하지 않는 초연함을 지키며 오로지 시인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시인이다. 박제천 시인은 시를 통해 자기실현을 이룬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원만한 인간관계와 사람들에 대한 신중함과 사려 깊음을 포함하여 매슬로우가 말하는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들의 특성, 이를테면 자연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수용, 초연함과 개인적 자유의 추구, 인식의 신선함과 절정경험, 자발성과 솔직함, 창의성, 민주적인 성격구조, 적개심 없는 유머감각, 고정된 문화와 인습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등에 대부분 해당하는 자질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것은 오로지 시를 향한 깊은 애정과 사명감에 기인된 것으로 시인(詩人)이 시와 사람을 포함하는 개념이라면 양자를 두루 갖춘 인품으로 한국시단에서 보기 드문 아웃사이더시인이라 할 수 있다.
(시인, 전 동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