門이 갖는 傳統文化
立春大吉 建陽多慶 봄이 열린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해 첫 계절이 시작되는 문이 활짝 열렸으니 만물이 소생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대문밖에 써 붙이는 우리의 미풍양속이다.
문을 여는 것은 하루의 시작을, 문을 닫는 것은 하루 일과가 끝이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의 마지막 고비는 ‘관문“이고 ”등용문“이다.
닫힌 문은 추방이고 불운이고 단절을 나타낸다.
문은 어느 곳의 출입구이기에 마을 어귀도 문으로 여겨 장승을 세우고
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인 남사당놀이가 시작하기 전에 그들은 안전을 위하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서 ”문굿’을 친다.
오구굿에서도 문을 열어 신을 맞이하는 문굿을 펼친다.
집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것은 대문이다.
대문을 거쳐 들어가면 또 다른 중문이 버티고 다시 열고 들어가면
방의 안과 밖을 나누는 방문이 있다.
큰방과 아랫방 사이에도 장지문을 붙이고, 아랫간에서는 주인이,
윗간에서는 ‘아래 것’이 머문다.
지체가 낮은 손님은 윗간에 서서 주인과 말을 나누어야 한다.
신분사회에서 이러한 풍속은 과거 우리의 건축양식에서 드러나 있다.
옛 우리의 신분사회에서 “솟을대문“은 양반댁이나, 서원, 향교에서나 볼 수 있는 대문이다.
솟을 대문은 말 그대로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이 대문은 초헌·사인교·가마 따위가 드나들게 하려고 높이 세웠지만,
점차 권문세가나 부유한 가문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일반 서민들의 대문은 평대문이다. 옆에는 흔히 헛간이나 뒷간이 이어 달렸다.
솟을대문이 상류사회라면 평대문은 중류가옥의 전형인 셈이다.
또한 내외 관습에 따라 상류가옥에서도 사랑채로 향하는 문은 솟을 대문으로 세우고,
부녀자들이 드나드는 문은 평대문으로 꾸몄다.
퇴와 퇴 사이에 있어, 흔히 사랑채에서 안채로 드나들 때 이용하는 문이 편문이다.
이 문은 충남 서해도서 지방에 시부모가 거처하는 안방과 부엌 사이 또는
안방과 며느리 방 사이에 이 문을 달아 내 외벽으로 삼고 있다.
우리의 민간 신앙에서 문은 신성한 성역의 공간으로 존재해 욌다.
오월 단오날이면 양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날로 정오에 절정에 이르므로
이 때 쑥 다발을 만들어 문 위에 걸어두어 잡귀인 음기를 쫒는다는 풍습이 있는가 하면,
제주도지방에서는 가축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정살문‘을 만들어 집 입구에 ”정주먹”이라는
돌기둥 2개를 세우고, 여기에 통나무 서너개를 가로질러 놓는다.
이 정살문을 주목신과 정살신을 문 지킴이로 여기고 정주목을 주신목으로,
나무를 정살신으로 받들고 있다.
우리는 혼령도 문으로 드나든다고 해서 제삿날이면 반드시 문을 열어두고 불을 밝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석탑을 보면 몸돌에 문비가 새겨져 있고, 열지 못하도록 한 자물통의 문양을 볼 수 있다.
사후의 세계는 문이 닫힘으로서 현세와 단절을 뜻한다.
우리 속담에 “문지방 넘어서자 홍두께 찜질 당한다.”,
“문턱 밑이 저승이라”, 애써 일을 하였음에도 마지막 끝맺음을 잘못하여 수고한 보람이
없을 때 “다 가서 문턱을 못 넘는다.”고 하였다.
농가에서는 문지방에 걸터앉으면 논둑이 무너진다고 하여 절대로 앉지 못하게 한다.
문에도 얼굴이 있다고 하여 문짝을 달거나 끼우는 테를 문얼굴이라 불렀고,
밤나무로 문얼굴을 삼으면 도둑이 들지 않는다고 믿어 왔다.
우리의 문은 사람의 얼굴과 같아서 주인의 품격이 드러나 보이는가 하면,
농가에서는 울타리나 문조차 달지 않는 집이 많았지만,
누구든지 문으로 들어설 때나 나갈 때 그 자리에 문이 있거니 여기며 드나들었고,
이 마음의 문은 눈에 보이는 문 못지않은 구실을 하였다.
우리네 선조들은 자연에서 가장 큰 문은 마음의 문이며,
그 문을 열어 놓으면 온 우주를 모두 들여 놓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시인, 수필가, (재)ACEF한국전통문화연구원 원장 정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