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곳 여행은 혼자보다 둘이가 좋아요
여행은 혼자서 하는 것이 가장 좋다지만
이렇게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에서는
둘이가 제격입니다.
1. 팔당댐
계속 내린 비로 물이 불어 팔당댐이 수문개방을 했습니다.
운좋게 가까이에서 이런 장관을 보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장관입니다.
한참을 내려다보니 와락 무서운 느낌이 납니다.
한강은 서울시민의 젖줄이지만 화가 날 때는 이렇게 표효를 합니다.
2 양수리
경안역을 지나 철길 밑에서 우회전하면 '다산 유적지'
길표지가 나옵니다.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 아담한 길을 구불구불 돌아
. 입구에서 1.5키로 정도 들어가면 호수가 바다처럼 펼쳐
져서 탁 트인 게 가슴이 다 후련합니다.
아마도 다산의 넓고 깊은 마음은 이 호수를 바라보며
자란 어린시절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어쩌면 이 호수는 서학과 실학의 통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호수 건너 천진암에는 대학자 권철신이 머물렀고, 호수
주변엔 실학자들이 포진해 있었다니까요.
학자들은 나룻배를 얻어 타고 이곳저곳 다니며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겠지요.
다산도 이 호수를 잊지 못했나봅니다.
다산초당 옆에 천일각에서 본 그 구강포 바다가 바로
이 곳과 비슷하거든요.
3 목책과 장승
목책을 세워 출입금지랍니다.
상수원인데 물속에 첨벙 들어가 놀고 쓰레기 버리고..
우리나라 사람들 언제까지 이럴런지 참 답답합니다.
4 공원같아요
너무 규격화 된듯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나마 얼마나 좋습니까.
마치 공원처럼 꾸며놓고 주차장도 시원스레 넓고...
천일각도 재현해 놓고, 거중기도 야외에 만들어 놓아
아이들 데리고 와도 참 좋아 하겠습니다.
5 목민심서 길
이건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돌에는 다산의 저서와 생애를 새겨 놓고
기둥마다엔 그의 금쪽같은 저서 목민심서를
한귀절 한귀절 새겨 놓아, 선생의 애국애민정신과
다감한 체취를 더듬어 보게 합니다.
6 정약용 생가 (與 猶 堂)
'여유당'
내가 갖고 싶었던 호이기도 합니다.
원래 생가는 아쉽게도 어느 해 홍수로 떠내려가고
지금 건물을 1975년에 원래대로 복원했다고 합니다.
이곳도 예전에는 개방을 했는데 훼손이 심해 굵은
자물통으로 잠가 놓았습니다.
담넘어로 껑충 들여다보니 'ㄱ'자 형의 몸채와 'ㅡ'자
형의 사랑채가 있는 전통 한옥이 아담하게 들어앉아
우리같은 나이의 사람들에게 정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의 천재성과 학문의 실용성을
정조대왕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황금기를 맞았었는데
망국병인 파당정쟁에 휘말려 유배생활을 시작합니다.
40세에 유배를 떠나 57세가 되서야 고향집에 돌아오니
고왔던 아내의 얼굴엔 고생의 흔적이 열력하고 검은 머
리엔 이미 하얀 꽃이 피어 있었겠지요. 죄인의 집이란
손가락질 속에 아비 없는 자식들 키우느라 마음 고생인
들 오죽했겠습니까.
그는 57세부터 75세까지 이곳 마현에서 여생을 보넵니다.
아마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일 겁니다.
호수를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리고 집필을 하다가 머리가
무거워지면 길 건너 운길산 수종사에 올라 저물어가는 세월
을 웃음으로 맞았겠지요.
사실 다산의 집안처럼 불행이 겹친 집안도 없습니다.
형 약전은 흑산도로 귀양 가서 죽고,
또 다른 형 약종은 천주교에 목숨을 바치고...
당시에는 몰락한 집안으로 손가락질도 무던히 받았을 겁니다.
그러나 후대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그들 형제는 언제까지나 이 나라의 후학들에게 잊혀지지 않을
이름으로 남아 있잖습니까.
정약전은 최고의 어류학자로 칭송받았고,
정약종은 천진암 순교지에 묻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7 생가 옆의 쉼터
생가 옆엔 침엽수와 활엽수들이 어우러진 그늘 속에
쉼터가 있습니다. 한 여름엔 매미소리까지 밀려들어
어린시절 말 달리고 꿈을 키웠을 선생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보도록 유도합니다.
8 다산 유택
천재 정약용
그는 약관의 나이에 임금의 총애를 받을 정도로 학문이 깊었고,
특히 실사구시적 그의 학문은 유명무실하여 책방에서만 유용한
구학문에서 탈피하여 실학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의 실학은 거중기를 발명해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명실공히
실학으로서의 자리를 굳힙니다.
수원 화성은 국고를 절약하고 공정을 대폭 단축하였다고 하는데
너무나 견고하면서도 아름다워 그의 심마안을 절절히 느끼게 합니
다.
형 약종과 함께 다산은 이벽을 통해 서학을 접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노론의 눈에는 정조의 총애를 받는 그가 눈에 가시였겠지요.
한 때 천주교 신자였다는 이유로 대학자는 18년동안이나 긴
유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긴 유배기간을 절망하지도 않았고, 유유자적 시간만
때우지도 않았습니다.
500여 권이 넘는 그의 주옥같은 저서들이 거의 유배기간 동안에
씌어졌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사회의 현실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여러 사상과 학문을 검토
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것입니다.
지역차별철폐, 세제개혁, 신기술도입, 중농중상정책등
오늘날에도 눈 여겨봐야할 혁신정책들이 가득합니다.
아마 선생자신도 뼈저린 아픔을 겪었기에 민초들의 입장에서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베트남의 호치민은 정약용의 책들을 평생 가까이 두고 읽었
다고 합니다.
9 다산 문화관
선생의 저서 복사본이 있고
마현마을과 강진유배지를 입체지도로 볼 수 있습니다.
수원성을 올릴 때 썼던 거중기도 복원되어 있답니다.
30분 간격으로 문화유산해설사가 다산선생님에 관해
설명해주십니다. 한 번쯤 가보세요.
다산선생님과 더욱 친해질 수 있답니다. (10시 -17시까지)
10 두물머리
여행메모
1) 버스
청량리역 앞에서 일반버스 8번이나 좌석버스 166번을 타고 능내역 앞에서 내려 15분정도 걸어가면 된다. 기차를 이용할 경우 청량리역에서 중앙선을 타고 능내역에서 내리면 되는데 40분 정도
걸리며 1일 3회 통일호가 다닌다. (능내역 전화 : 031-576-7788)
2) 승용차
청량리역 쪽에서 갈 경우는 망우리고개를 넘어 쭉 직진하다가 도농삼거리에서 덕소방면으로 계속 직진하여 팔당대교, 팔당댐을 지나면 오른쯕으로 다산유적지 입구가 나온다. 올림픽대로를 이용할 경우는 미사리 조정경기장을 지나 팔당대교를 건너 팔당댐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다산유적지 입구가 나온다.
3): 여행안내
연중무휴 개방하고 있으며 입장료, 주차비는 받지 않는다. 관람시간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며 겨울철은 오후4시까지 개방한다. 다산유적지 부근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므로
강물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도록 한다.
다산유적지 안내전화 : 031-576-9300 |
1) 기 차 : 중앙선 3회 운행(06:30/16:00/19:00)
2) 일반버스 : 8, 8-1, 166번(청량리 출발)
3) 직행버스 : 상봉 터미널에서 수시 운행
4) 자가운전 : 올림픽대로-팔당대교-팔당댐-양수대교-양수리 (잠실에서 30분)
※ 양수리 시외버스 터미널 건너편 골목으로 따라 걸어 들어가면 두물머리에 이른다. (터미널에서 도보로 15분) |
|
첫댓글 다시한번 둘러보고 갑니다. 좋은 유적지 사진에 감사...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