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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
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의 사도권을 의심할 근거가
적당치 않았다.
'인'(印)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프라기스'(*
)는 어떤
일정한 모양을 새기는 도구를 가리키거나 그 도구를 사용하여 진흙이나 밀납 등에 새
긴 소유권과 증명의
표시를 말한다. 바울로 인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
하게 되었고, 그들이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바울이
사도라는 사실을 입증하
는 분명한 증거였다. 엄격히 말해 사람들의 회개는 성령의 역사이다. 하지만
바울의
복음 전파로 말미암아 교회가 생긴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사도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Hodge).
=====9:3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發明)할 것이 이것이니 -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앞 구절을 지시할 수도 있고 뒷 구절을 지시할 수도 있다. 혹자는 이를 뒷절에 연결시
켜 바울이 자신의
언행을 본으로 보이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언급하는 가운데 자기
사도권을 변호하는 것이라 한다(Grosheide). 그러나 뒷절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입증하
는 것이 아니라 사도권이 입증된 후에 말할 수 있는 사실들을 열거한 것이므로 앞 구
절에 연결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Morris). '힐문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
나크리누신'(*
)은 '엄밀히 조사하다', 혹은 '심문하다'의
뜻이며 '발명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로기아'(*
)는 '답변하
다'의 뜻으로서 둘 다 법률 용어이다. 즉 바울은 그의 반대자들이 심문하듯이 자신의
사도권을
따진다면 앞에서 말한 내용들, 곧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목격하였으며,
이방인인 고린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회심시킨 뚜렷한
사도됨의 증거들을 법정에
서 증인이 되어 증명하듯이 단호하게 답변하겠다는 것이다.
=====9:4
우리가 - 본절에서 복수 1인칭 동사
'에코멘'(*
, '우리는 가지고 있
다')을 사용한 것은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 바나바를 의식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울
은 바나바와 함께 자비량
선교를 하였다(6절). 혹은 '우리' 속에 실라와 디모데를 포
함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바울과
협력하였으며 바울의 삶의
방식을 따랐었다(Godet).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
'권'(權)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수시안'(* )
은
'권리'(right, NIV)를 뜻한다. 이는 바울이 고리도 교인들로부터 생계에 필요한 물
질적 원조를 받을 권리가 있었음을 뜻한다(고전
9:9-11).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권리
를 주장하지 않았다.
=====9:5
다른 사도들 - 사도행전에서는 사도가 예수의 열 두
제자와 바울과 한 두 사람이
더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행 14:4,14). 본절에서도 사도의 범위가
사도행전
의 언급보다 그리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주의 형제들 -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
다. (1)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 전에 전처(前妻)에게서부터 태어난 예수의
형들도
포함한다는 것이다(Lightfoot). (2) 예수님의 사촌 형제 즉 마리아의 동생과 남편 알
패오의 소생일
가능성도 있다(마 10:3). (3) 가장 분명한 것은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들들로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이 네 사람들이다(마 12:46;13:55;행
1:14;갈 1:19).
게바 -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구분하여 '게바' 곧 '베드로'를 따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가 탁월한 사도이므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두드러진 본보기가 되기 때문
이다. 그가 탁월한 사도였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 내에 '게바파'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1:12). 또한 본절은 베드로가 아내가 있는 자임을 추
측케 한다(막
1:30).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 - '자매된 아내'라는 말은 헬라어의 관용구로서 '자
매'와
'아내' 이 두 단어가 서로 동격(同格)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자매'라는 말 속
에는 '믿는 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Lenski). '데리고 다닐'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아게인'(*
, '사방으로 데리고 다니다')은 '관례적인 선교 여
행'에만 적용시킬 수 있는 용어로 당시의 사도들이 아내를 대동시키면서
도움을 받았
음을 시사한다. 2세기 말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나 4세기 로마
교회의
부제(副祭)였던 암브로시에스터(Ambrosiaster)에 의하면 요한과 바울을 제외하고 모든
사도들에게 아내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결혼한 사도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딸린 식
솔까지 교회로부터 공궤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도 역시 다른
사
도들과 마찬가지로 결혼할 권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9:6
일하지 아니할 권 - 본절은 사도들이 교회로부터 그들의
생계비를 받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것을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딤전
5 : 18). 그러나 바울과 그의 제1차 전도 여행시 동역자였던 바나바는 이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생계를 위한 기술을 한가지씩 익히는 관습이
있었다. 더욱이 철저한 유대인이었던 바리새인들은 모두 스스로 생계비를
벌었는데 바
울 역시 그리하였다. 그러나 헬라인들은 육체적인 노동을 천하게 생각하였으므로, 혹
자는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을 매우 특이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라고
한다(Grosheide).
=====9:7
누가 자비량하고...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 바울은
본절에서 두 가지 예를 들
고 있는데 그것은 군인들이 자신의 비용으로 봉사 하지 않는다는 것과 일꾼들이 포도
원이나
목장에서 일을 할 때에 보수를 기대하고 일을 한다는 것이다(신 20:6). 바울은
이 같은 실생활의 예를 들어 그들이 보수를 받는 것이
당연한 순리임을 가르치고 있
다. 그러므로 바울 자신도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보조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다. 복음의 역군들(딤후 2 : 3, 4)과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3:6) 그리고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요 21:15)들이 보수를 받고 신령한 일에 참여하는 것은
결코 세속적이
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자비량(自備糧) 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옵소니오이스'(* )는
'옵손'(* , '양식')과
'오네오마이'(* ,
'구입하다')의 합성어로 문자적인 뜻은
'스스로 구입한 양식'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후에 '군인들의 봉급'을 뜻하는 말로 굳어졌다. 바울은 이러한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자신의 수고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피력한다.
=====9:8
사람의 예대로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안드로폰'(*
)
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습(人習)이나 생각에 따라'의 의미이다. 이 말이 때로는 육
체의 그릇된 이해를 따른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지만(롬 3 : 5), 본절에서는 사람
들에게 익숙한 임금 지불의 도리가 당연하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6절에서 예를
든 것처럼 사람의 피습을 따른다 할지라도 일한 대가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다.
그러나 바울은 보다 더 결정적인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제시하였다.
율법도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모스'(* )는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인
모세 오경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바울은 인간적인 생각과 하나님의 계시인 율법이 서
로 일치함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혹자는 인간을 만드신 분과 인간에게 계시를 주시는
분이 같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Grosheide).
=====9:9
곡식을 밟아 떠는 소 - 본절에서 인용된 구절은 신명기
25:4이다. '떠는'에 해당
하는 헬라어는
'알로온타'(*
)로서 '할론'(* , '둥근 모습')에서
파생된
말이다.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소를 이용하여 곡식을 터는 방아를 돌리거나,
혹은 일정한 반경(半徑) 안에 있는 곡식을 소로 하여금 발로
밟아 떨게 하였다. 혹자
는 이 때 이집트나 다른 이방 지역에서는 소가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그 입에 망을 씌
웠다고
한다(Lenski).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것을 금(禁)하였다. 소가 일을 할
동안에는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뿐만 아니라 짐
승들과 자연에게까지 관심과 사랑을 베푸시는 모습을 가르쳐 준다(욥 38:41;시
147:9;
마 6:26;눅 12:24).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소들을 염려하시지
않는다는 말
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마리 새에게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신다(마 6:26). 바울
의 의도는 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에 대하여는 가축도 율법에 의해 보장을 받는데
하물며 인간들이 일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바
울은 구약에서 달리 인용할 말씀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신 24:15), 굳이 본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처럼 일꾼의 품삯을 예로 들지 않고 가축을 예로 든 것은 짐승
들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은 더욱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사람들 사이에 서로를
귀중하게 대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Calvin).
=====9:10
전혀 - 이 단어를 '전혀'(altogether,
KJV), 혹은 '전적으로'(entirely,RSV)로 번
역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9절에서 바울이
인용한 구약의 계명은
인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혀'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토스'
(* )는 '확실히'(assuredly, certainly)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Hodge, Goert).
소망을 가지고 -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이 인용한 구약의 계명이 문자적인 뜻으로는
일하는 소에게 먹을 양식을 주라는 것이지만 내면적인 뜻은 인간을 위한
것으로서 밭
갈고 씨뿌리는 자들이 결실을 거두어 들이는 소망을 갖고 일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9:11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 10절에서는
모든 노동자들이 일한 대가로 그에 상당한 임금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으로
결
론을 맺었다. 이제 본절에서는 앞 구절의 비유들에 빗대어 바울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
여 말하고 있다. 그는 '신령한
것'(*
, 타 프뉴마티카), 곧 한
없이 고귀한 영적인 씨앗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뿌렸으므로 그들에게
'육신의 것'(*
, 타 사르키카) 즉 세상에 속한 것으로 영적인 것과 비교할 때 지극
히 미미한
것을 요구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9:12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 베드로와 아볼로 등 다른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생
계비를 보장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혹자는 이
러한 이유로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낮은 등급의 사도이기
때문이라는 오해를 하게 했을 것이라고
한다(Morris).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처음 세운 자로서 자신이 그 어떠한 사람들보다 더욱 물질적인 권리를
요구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다.
범사에 참는 것은 - '참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고멘'(* )은
'스테
게'(* , '지붕')에서 유래된 말로서 '덮다', '감추다',
'참다'의 뜻을 갖는다.
신약 성경에서 바울만이 이 말을 사용한다.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모든 것을 참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 바울은 온갖 종류의 곤궁함을 인내로써 참았다.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
바울은 복음이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권한을 행사
하려는 자들과 복음 전파를 통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에 의해 잘못
전달될 소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어떤이게는, 신령한 일을 담당한 자가 물질에 얽매
여 산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실족함 없이 신앙 생활을 하도
록 하기 위하여 바울 스스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4:2에서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 라고 하는 가르침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였다(Grosheide).
=====9: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
본절에서 바울은 구약에서 언
급된 제사 의식과 이방 제사의 실례를 들어, 신약의 교회가 복음 사역자들에게 물질을
공급할
의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제단 위에 드려지고 남은 고
기 중 일부를 그들의 몫으로 할당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율범이 규정
하는 바였다(레 7:6, 8-10, 14, 18-36).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의 권한을 주장할 수
있
는 것은 객관적으로도 합법적임을 보여주며 이에 바울이 자신의 권한을 자제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제단'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보모스'(* )가
있음에도
'뒤시아스테리오'(*
)을 사용하는 것은 '보모스'라는 용어에 너무 이
방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W.H. Mare).
=====9:14
이와같이 주께서도 -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에
관하여 규정하신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의 보수에 대해 똑같은 규정을 허락하셨다.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이것은 마 10:10이나 눅 10:7에서
주어진 예수님의 명령을 바울이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것은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
전에서 나는 것으로 생활을 영위 하였던 것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그 복음을
믿
는 자들의 현금으로 생계를 꾸려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이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의 직
접적인 명령인 만큼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권위를 가진 증거였다. 이처럼 바울은 자
신의 권리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이 없었으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려
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9:15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 바울은 복음 전파자로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보
조를 요구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리를 결코 사용하지
않
았다.
죽을지언정... - 바울은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짐
을 주지 않겠다고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에 있었을 때 겪은 여러가지 생생한
경험들의 기억으로 격한
감정이 되어 정상적인 방법으로 글을 잇지 못하고 파격 구문
(破格構文)을 사용했다.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 바울은 아무런 보상없이 복음
을 전파함으로써 자신을 의심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었고 또한
혹자의 말대로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축적했다(Hodge). 따
라서 물질적인 공급
없이 교회를 위하여 봉사한다는 것은 그가 전한 복음의 순수성을
입증하는 것이었으며 바울의 자랑이요 영광이었다.
=====9:16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일임이라 -
'자랑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
케마'(* )는 '자신이
취한 행동에 대하여 도덕적인 가치를 느끼고, 그로 인
해 갖게 되는 즐거운 감정'을 의미한다(Heinrici). 사도 바울이
선교 사역을 감당한
것은 그 일을 통해서 갖게 되는 즐거움과 보람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사명이 그리스도
로부터 주어진 일이었고(행 26:16-18;갈 1 : 1 ; 빌 1:16) 그가
부득불(不得不)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열정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던 것
은 단지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행 9:1-9)와 성령(행 13:2)에
사로잡혀 있었고 날마다 주의 계시에 민감하였다(행
22:21). 즉 그가 복음 전파 사역
을 감당할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내게 화(禍)가 있을 것임이로라 - 바울은 소명(召命)에 있어서 다른 사도들과
큰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12사도들은 자발적인 믿음으로 그들의 소명을 받아들였다.그
러나 바울은 오히려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완악한 불신앙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의 소명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강압적인 역사였다(행 9:
5,
Godet).
=====9:17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 바울이
자발적인 선택으로 복음을 전
파한다면, 그것은 자랑할 만한 것이요 그에 대한 상이 있을 것이다. '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도스'(* )는
'보상'(reward, KJV, NIV)을 뜻한다. 그러나 바
울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로부터 강압적으로 복음 전도의
소명을 부여받
았으므로 거기에 대해 어떠한 자랑거리나 보상이 있을 수 없다. 그는 단순히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행 26:16).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미안
페피스튜마이'(*
)의 문자적인 뜻은
'나는 청지기직을 부여받았다'이
다. 여기의 '청지기'(steward)는 '자유인'('freeman)과 상반되는
말로서, 청지기들은
노예 계급에 속했었다(눅 12:42, 43). 노예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고
하여 어떠한
보상도 기대할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때 엄한
처벌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본절은 바울이 그의
사도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나는 노예로서 일을 수행할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입장을
견지(堅持)하
였음을 보여준다(Godet). 바울이 자신의 사명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취한 것은 그리스
도의 가르침에 근거하는 것임이
분명하다(눅 17 : 10).
=====9:18
값 없이 전하고 - '값없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다파논'(* )은 바울 자
신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대가로 아무런 물질적인 부담을 지우지 아
니한 것을 뜻한다.
다쓰지
아니하는 것이로라 - '다 쓰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카타크레사스다
이'(*
)는 '남용하다'나 '오용하다'의 뜻이 아니라 '남김없이
소모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부정은 부분
부정이 아니라 전체 부정으로
'일체 사용하지 않다'의 뜻이 된다(Lenski). 바울은 청지기, 즉 아무런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노예로서 복음 전하는 사명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노예도 주인으로부터 먹을
것과 입을 것은 공급받을 권리가 있었던 것 같이 바울도
그러한 권리를 고린도 교인들
에게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바울은 보상을 바라지 않고 봉사하는 것과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것 자체를 자랑이며 보상으로 여겼다.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혀(빌 3:12) 그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롬 1:1)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사람에게도 예속되지 않았다.
따
라서 그는 민족이나 종교, 국가, 사상, 인습, 유대교의 율법주의 등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었다.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 이것은 곧 완전한 자기 포기를 의미한다. 즉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이 없어져도 좋다는 뜨거운 사랑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11:24,
25;롬 9:3). 이것은 바울이 자신을 부정하는 원리이며
그의 모든 행위는 이러한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Godet).그가 스스로 종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함이다(고후
4:5).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 바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포기한 이유
는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9:20
내가 유대민과 같이 된 것은 - 바울은 먼저 유대인을
언급했다. 그는 베냐민 출신
으로 육체적으로는 완벽한 유대인이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관습과 명예를 포
기하였으며
진정한 유대인, 곧 영적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자들이라는
확신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유대인처럼 행동하여 자
기의 동역자이며 제자였던 디모데에게 유대인의 상징인 할례를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행 16:3) 예루살렘에서는 결례(缺禮)를 행하였다(행 21 : 17-29).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율법 아래있는 자 같이 -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누
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유대인'을 뜻하는 다른 표현 이다
(Thomas). (2)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로서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인 자들이다
(Hodge, Godet).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율법
에 매여 있는 자'에 초점이 있으므로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냐 하는 것은 그리 중
요한 문제가
아니다. 바울이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것처럼 처신했
지만 사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더 이상 그에게는 율법
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유대인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
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과 같이 한 것은 그가 유대인 사이에서 소외(疏外)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나 혹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함이었다
(롬 9 :3;갈 2:7). 이로 보건대 바울은 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 자신을
구속할수 있는
자유를 소유한 진정한 자유자였다.
=====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 '율법 없는 자'란 유대인과 같이
하나님의 계시(啓示)가 성
문화(成文化)된 모세의 율법을 갖지 않았던 이방인들을 말한다. 그러나 이방인들도 자
기들
나름대로의 법, 곧 양심의 법은 가지고 있었다(롬 2:14, 15).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 바울은 어떤 상황
에서는 이방인들처럼, 즉 율법 밖에 있는 것처럼 행동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었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
이다(갈 6 : 12).
그렇다고해서 바울이 결코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의
율법'아래 있는 자였다. 그
런 바울이었으나 율법없는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율법을
무시하고 그들의 문화적인 상황에 자신을 순응시켰다.
=====9:22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 여기서 '약한
자'(* ,
아스데네이스)란
복음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약한 양심의 소유자들로서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상태에 처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전 8: 9; 살전 5 : 14). 바울은 복음을 바로 이해하
고 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로서 믿음이 강한 상태에
있었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
들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였으며, 그들의 믿음에 상처를 주
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제한했다(19절).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 '여러 사람'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10:32) 유대인, 헬라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
가운데 약한
자들을 가리킨다 할 수 있다(Edwards). 바울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전도
하면서 그들의 다양한 모양대로 '여러
모양'이 된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 '모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타'(*
)가 어떤
사본(* , TR)에서는 '투토'(* , '이것')라고 되어
있다. 즉
앞 구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여러 사람들과 여러 상황에 자신
을
순응시켜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장애가 없게 했다.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
'참예'에 해당하는 헬라어 '슁코이노노스'(*
)는 원문에
'참예자'라는 명사로 되어 있다. 이 단어는 '쉰'(* ,
'...와 함께')과
'코이노노스'(* , '공유자')의
합성어로서 '...와 함께 공
유(共有)한 자' 라는 뜻이다. 이 명사가
'기노마이'(* ,
'되다')의 부정과
거 '게노마이'(* ,
'되었다')와 함께 사용되어 본 구절의 문자적인 뜻은 '다
른 사람들과 함께 복음을 공유하는 자가 되고자'이다. 결국 바울은 자신이
소유한 복
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어 같이 공유하고 싶다는 말로써 전도에 대한 의지
를 표명한
것이다.
=====9:24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절제와 노력이 필
요함을 권면하기 위하여 운동 경기를 비유로 들었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 매 2년마
다 열렸던
'이스미안 경기'(Isthmian games)가 올림피안 경기(Olympian games), 피티
안 경기(Pythian
games), 네미안 경기(Nemean games)와 함께 그리스 사대 경기 중 하
나이다. 이스미안 경기에는 주로 격투기,
경마 등이 진행되었다.
운동장에서 - '운동장'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타디오'(* )는
606.75피트
(feet)로 약 200m 길이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이 경기장, 곧
'스타디움'
(Stadium)으로 뜻이 굳어졌다. 그 이유는 당시 그리이스 도시들에 있는 경기장들이 한
스타디오(약 200m)로
규격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
이 말은
문자대로 육상 경기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상을 얻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오직 한
사람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에는 운동 경기에서 승리하면 상금을
주지 않고 명예를 상징하는 월계관을 수여했는데, 모든 경주자는 이러한
명예를 획득
하기 위해 경기에 참가했다. 따라서 바울이 의미한 것은 경기에서 우승자가 질주하는
것같이 고린도
교인들도 상을 얻겠다는 목적 이외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 목표만
을 향해 노력하라는 것이다(Godet).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 '이기기를 다투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아고니조
메노스'(*
)는 동사 '아고니조마이'(*
, '경쟁하
다', '격렬히 몸부림치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본절에서는 경주에 참가하는 모든 자
를
가리킨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 '절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크라튜에타이'(*
)는 고대 그리스의 운동 경기자들이 사용했던 전문 용어였다.
그
들은 통상 10개월 가량의 고된 훈련을 받았으며 음식이나, 오락, 수면 시간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을
절제하여야 했다.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 고린도 지역에서 개최되었던 '이스미안
경기'에서는
승자에게 월계수나 솔잎, 또는 어린 파슬리(parsley) 잎을 엮어 만든 화환(wreath)을
머리에 씌워
주었으며 올림피안 경기에서는 우승자에게 야생 감나무 잎으로 엮은 화환
을 씌워 주었다. 이처럼 나뭇잎을 엮어 만든 그런 면류관은
경기자들에게 최고의 영예
(榮譽)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면류관은 금방 시드는 것이었고 그것을 쓴 우승
자의 영예
역시 덧없는 것이다.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 운동 경기자가 목표하는 면류관은 일시적인
것
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면류관은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이다. 따라서 그리스
도인들은 운동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
못지 않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 목표를 향
해 나아갈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9:26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 '향방 없는'의 헬라어
'아델로스'(* )는 '목
표 없는', '불분명한'의
뜻을 갖는다. 달리기 선수들이 목표와 방향을 분명히 정하고
경기에 임하는 것을 비유로 삼으면서 바울 자신도 목표와
방향을 확고하고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싸우기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퓌크튜오'(* )는
'퓌그메'(* ,
'주먹')와
'퓌크테스'(* , '권투 선수')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것은 '권투
시합'을 가리킨다. 바울은 여기에서 달리기 경주에서 권투 시합으로 비유를 바꾸어 표
현의 폭을 넓히고
있다.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 이것은 권투 선수들이 시합을 하기 전에 상대방 없
이 혼자서 연습하는
것을 표현한 말로 전문 용어로 '스키
아마키아'(*
,
'싸움')라고 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싸움이 상대방이 없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대적(對敵)이 있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 같다.
=====9:27
내가 내 몸을 쳐 - '쳐'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피아죠'(*
)는 '휘
포'(* , '...아래')와
'옵스'(* , '눈')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눈 아
래 부위를 친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매우 사실적인 표현으로서 당시 권투 선수들이
상대방의 얼굴 부위를 공격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권투
시합을 연
상하면서 자신의 싸울 대상이 자기 몸이 라는 것을 보여준다. '몸'에 해당하는
'소
마'(* )는 고린도전, 후서에서 '영'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본
절에서는 세속적이고도 육체적인 욕구를 제어하여 그리스도를 섬기기 원하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복종하게 함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라고고'(*
)는 '둘로스'(*
, '종', '노예')와 '아고'(* ,
'데려오다', '끌고 오다')의 합성어로서
전쟁에서 승자가 패자를 종으로 끌고 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서 패배시킨 후 이제는 온전히 복종시켜 종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바울은
그의 육체적인 본성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죄의 성향과 욕망까지 복종시키려고 하였다
(Hodge).
남에게 전파한 후에 - '전파한'의 헬라어
'케뤽사스'(* )는 헬라어
'케뤽
스'(* ,
'전달자')에서 유래하였다. 운동 경기에서 '케뤽스'의 임무는 경기
규칙을 설명하고 선수들을 소집시키며 나팔을 불어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일 등을 하
였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달자인 '케뤽스'에 비유하였다.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 '버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도키모스'(* )
는
'도키마조'(* , '조사하다',
'시험하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불합격
자'의 뜻을 갖는다. 또한 이 단어는 옛날 화폐로 사용된 주화의
무게를 달아서 제 무
게를 지닌 주파와 그렇지 못한 불량 주화를 가려내는 것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었다.
바울이
버림받는다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 두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다. (1) '구원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는다'는 의미이다(Lenski, Godet). (2)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Morris).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바울은 자신이 구원 얻은 자로서 주님을 마땅
히 섬기지 못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제 10장
=====10:1
헬라어 본문에는 접속사
'가르'(* , 왜냐하면)가 있어서 앞 문단의 내용과 본
장의 내용이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형제들아 - 바울은 이방인인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형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써 교회 전체를 하나의 몸(body)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이스라
엘의 출애굽 사건과
연결시킴으로써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에 기독교 교회의 근원이 있
음을 시사하였다. 롬 4장과 11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이라는 원 줄기에서
교회가 접목
되었음을 말하였다. 그러한 영적 관계의 맥락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 교회
구성원들의 조상이 될 수
있다.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출애굽 사
건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울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출애굽 사건이
지닌 참된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할까하는 염려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이 다 - 여기에서
'다'(* , 판테스)라는 말이 강조되어 2, 3, 4
절에서
5번에 걸쳐 반복된다. 이처럼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멸망
하였다(5절)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기
위함이다.
구름 아래 있고 - '아래'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
)는 공간적으로 구름 아
래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 출애굽하여 구원받았다는 사실
을 말한다. 여기서 구름은
하나님의 인도를 의미한다(출 13:21, 22;14:19, 24등).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확실히 체험하였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받았다.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도
끊임없
는 경건과 영적인 각성(覺醒) 없이는 멸망받은 이스라엘 조상들과 같은 전철(前轍)을
밟게 될 것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통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하고 있다.
=====10:2
모세에게 속하여 - 홍해를 건너는 위기의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롤
굳게
믿음으로써 모세와 하나로 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체를 이루는 것이다(롬 6
:3-5).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 혹자는 구름과 바다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인들
과 공간적으로 차단해 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해주는 역할이었고 동시에 모세의 권위를 높여주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제자
가
되게 하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구름과 바다가 그리스도인
들의 세례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한다(Lenski). 그러나 이에 대한 보다 심층적
인 의미를 분석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 기둥을
통해 인도
함을 받고 홍해 바다를 건너는 체험을 함으로써 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초자연적
능력을 극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은 하나님께
서 택하신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갖게 해주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구름 기둥과 홍해 바다'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 곧
'구원 받은
백성'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구름과 바다'는 구원
의 도구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인의 '물세례'를 상징한다(롬
6:3).
=====10:3
신령한 식물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콘
브로마'(*
)
에서 '식물'을 뜻하는 '브로마'(* )는 단순히
'고기'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
고 전반적인 음식물을 나타낸다. 본문은 '만나'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출
16:
4, 14-18). 그런데 이 '만나'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이 다양하다. (1) 유형론적(類型論
的, typical) 해석을
하는 자들의 견해로, 이에 따르면 '신령한 식물'은 보다 고상하
고 미래적인 것의 모형으로서 물질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
나 이것은 성경에서 쓰여진 '신령한'이라는 단어의 사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2) 혹자
는 이를 '영혼을 위한
식물'이었다고 해석한다. 즉 만나는 신 뿐만 아니라 영혼을 위
해서도 주어진 음식이라는 견해이다(Calvin). 이 견해에
따르면 '만나'는 곧 성만찬
때 예수님께서 나누어 주신 떡과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소
무리한 해석이다. 왜냐하면 만나는 평상적인 주식물(主食物)로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
이다(느 9 :
15). 또한 예수님께서는 만나가 영혼을 구원하는 영적인 효력이 없음을
말씀하시고 예수 자신만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참 떡이심을 가르쳤다(요 6:49-58).
(3) 혹자는 만나를 '성령으로부터 유래된'(procceding from the
Divine Spirit) 것으
로 보는데 이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창 1:2; 시 33:6).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
물 가운데에서 성령으로 역사하신다. 만나는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음식이 아니라 성령
의 역사로 공급된 초자연적인
양식이었다.
=====10:4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 - '따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두세스'(*
)는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으로 뒤따랐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
로 몇몇
주석가들은 바울이 랍비들 사이에서 전해져오는 우화를 인용하였다고 주장한
다(Ruckert, Baur, de Wette,
Meyer). 그 우화에 의하면 14피트 높이의 바위 덩어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다니며 물을 뿜어냈다고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러한 전
설을 근거로 해서 교회를 가르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반석'에 해당하는 헬라
어
'페트라스'(* )는 움직일 수 있는
바윗 덩어리를 가리키는 '페트로스'(*
)와는 달리 움직일 수 없는 고정된 암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절에서 바
울은 물질적인 바위 배후에 그 물의 참된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
지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마셨으매 - 앞 문장에서의 '마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온'(* )은 부
정 과거로 마신 것이 과거 사실이라는 점에 역점을
두는 반면, 본 구절에서의
'마셨으
매'(* , 에피논)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마셨
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적인 방법을 통하여 메마른
광야에서
계속 물을 공급받았으며 그 공급의 근원은 바로 그리스도였다. 바울은 구약 시대에나
신약 시대에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의 떡이며 물이심을 강조하
고 있다(요 6 : 31, 32). 주께서는 배고픔과 갈증으로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시급했던 음식과 물을 제공 하셨다(요 7 : 37-39). 마찬가지로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신령한 음료'와 '신령한 식물'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바울은 주지시킨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 바울이 그리스도를 반석에 비유한 것과 같이 신 32 :
4, 15, 18등에서는 하나님을 반석에 비유하고 있다.
이사야는 여호와를 '능력의 반
석', '영원한 반석' 등으로 표현하는데(사 17 : 10 ; 26:4)
이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
임이 분명하고(요 12:41) 본 구절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미
선재(先在)
하셨음을 뒷받침하는 구절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신령한 반석이셨던
여호와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과
동행하셨으며 그들의 구원자였다.
=====10:5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령한
음식인
만나보다는 애굽의 고기를 더 좋아하는 등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고 원망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
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멸망당하는 운명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민
26:65).
멸망을 받았느니라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스트로데산'(*
)
은
'카타스트론뉘미'(*
)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씨앗 등이 흩뿌려져
'표면을 뒤덮다' 또는 폭풍으로 말미암아 '쓰러지다'의 뜻이 있다. 본절은 민 14 :
16
을 인용한 것으로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비참하게 멸망받은 모습을
생생히 표현해 주고 있다. 바울이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예로 든 이유는 비록 그들이
성찬에 유추(類推, analogy)될 수 있는 '신령한 식물과 음료'를 먹고
마셨을지라도 하
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할 때에는 멸망받았던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성찬'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할 때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10:6
거울이 되어 - '거울'에 해당하는 헬라어
'튀포이'(* )는
'튀프토'(*
,'치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타격을 가한 흔적'이라는 뜻이었다가 후에는
'표상',
'윤곽' 등의 뉘앙스를 가진 '형식'을 의미하였다. 또한 신약에서 이 단어는
'표상'(롬 5:14), '식양'(행
7:44), 본받아야 할 '모범'(살전 1:7;살후 3:9;딤전
4:12;벧전
5:3) 등의 의미를 가졌다. 본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하나의
흔적으로 새겨놓으라는 강한 의미
를 담고 있다.
악을 즐겨하는 자 - '즐겨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뒤메산'(*
)
은 '뒤모스'(* , '영혼')와 전치사
'에피'(* , '...쪽으로')의 합성어로
사람의 마음이 뭔가를 하고자 하여
한쪽으로 쏠려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민 11:4, 5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을 갈망했었다. 그들이 애굽에서 먹던 고기와
야채를 간
절히 사모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시기는 하셨으나 그들의 탐욕에 대
해서는 진노로 큰
재앙을 내리셨다(민 11:33, 34).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에 대한 갈
망은 곧 그들의 불신앙의 증거였다. 바울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전제로 고린도 교
인들이 이교도들의 희생 제물 축제에 참여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10:7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데 에이돌롤라
트라이
기네스데'(*
)의 문자적인 의미는 '우상 숭배
자가 되기를 멈추라'는 뜻으로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가
이미
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스라엘 백성 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것(출 32
:4ff.)같이 이교도들의 관습, 즉 우상의 신전에서 열리는 연
회에 참가함으로써 우상 숭배의 행동을 범하였다. 바울은 8장에서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를 이미 다루었고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와 고린도 교인의 우상
숭
배를 비교하고 있다.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경배한 후
불경
스러운 향연을 벌인 모습을 묘사한다(출 32:6).
뛰논다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제인'(*
, '어린아이 같이 놀
다')은 특별히 춤추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가운데
놓고 놀며 춤추던 것을 묘사할 때로 사용되었다(출 32:6).
=====10: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또하나의 범죄는 '간
음'이었다.
'간음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르뉴오멘'(*
)은 일반적으
로 성적인 부정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된 용어로서 5장에서 사용된 용어들과 어원이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을 지날 때 그곳에 있는 모압 여인들에게 이스라엘 젊은
청년들이 유혹을 받아 바알브올 우상을 경배하였다. 바알브올을
섬기는 제사 행위는
처녀들과의 음행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민 25 : 1-9). 따라서 우상 숭배와 간음은
불가
분의 관계가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 당시의 고린도 지역도 종교적인 매춘 행위
가 성행하던 도시로 이름이 높았다. 고린도
교인들은 여신 '비너스'를 섬겼으며 비너
스 신전에서 열리는 우상의 축제에는 바알브올을 섬길 때 행해지던 음행이
그대로 재
현(再現)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절의 내용을 통하여 우상 숭배와 간음죄는 하나님
께 큰 죄악이므로 그러한
유혹에 빠지지 말 것을 간곡하게 권면하고 있다.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브올 우상을
섬기며 그곳 여인
들과 음란한 교제를 나눌 때 하나님께서는 징벌로 전염병이 돌게 하셨으며 그 일로 이
만 삼천 명이나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민 25 : 1-9). 한편 그 당시 죽은 사람의 숫자
가 민 25 : 9 (70인역),
필로(Philo), 요세푸스이(Josephus) 등에 의해 2만4천 명으로
제시되어 천명의 차이가 생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민
25:9의 내용이 환난의 전 기
간(이틀) 동안의 희생자를 언급한 데 반하여 본절에서는 당일 하루만 계산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10:9
시험하다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페이라조멘'(*
)은
하나님의 선하심, 능력, 지혜 등을 그릇된 동기에서 알아보려는 인간의 생각을 가리키
는 동사이다(마 4:7;행 5:9;히
3:9).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관용을 시험하고 구원의 능력을 시험하였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이다.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였던 것처
럼 고린도 교인들도 주를 시험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그리
스도인의 자유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 한계(限界)를 벗어났다. 즉 이교도들의 우상 축
제에 참여함으로
주를 시험하였던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구원하실 수 있는지를 시험하였으며 설사 그러한
죄를 범
했다고 할지라도 용서하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관용이 있는지를 시험하였다. 바울
은 고린도 교인들의 이런 상태를
경고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의미로 2인칭 복수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로써 주를 시험할 가능성이 바울을 포함한 모두에게 있음을
시사한
다.
=====10:10
원망하다가 - 본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네번째 잘못을 언급하고
있
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이었다. 본절은 고라의 반역과
그를 따르는 일만 사천
칠백 명이 염병으로 멸망한 사건을 가리키는 듯하다(민 16:41,
49).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이 9장에도 나오는데 본절이 가나안 정탐군의
보고를 듣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발했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언급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이 없었으
므로 전자의 경우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Godet).
멸망시키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올로드류투'(*
)는 히브리
어
'함마쉬히트'(*
)의 인용으로(출 12:23)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기
위해 온 멸망 시키는 하나님의 '천사'를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치명적인 염병(plague)으로 멸망을 받았다(민 16:48). 바울은 이 '염병'을
출 12
:23 의 내용에 근거하여 '멸망시키는 자'로 해석했을 것이다(Godet). 고린도 교
인들 중에 바울을 반대하여 우상 축제에 참여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
울의 가르침에 따라 우상 축세 참여에 반대하는 그들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원망과 불
평을
하였다. 바울은 그러한 불평자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예를 들어 경고를 하고 있
다.
=====10:11
말세를 만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텔레 톤
아이오논'(*
)
은 문자적으로 '세대들의 끝'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유대인 시대의 끝을 뜻하기도
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기도
한다(Hendriksen, 마 13:39;히 1:2). 또한 '메시
야 시대'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Godet).
그러나 바울이 긴 세월의 '완성'을
뜻하는 단어
'운텔레이아'(*
)를 사용하지 않고, 한 세월의 '끝'을 뜻
하는 '타
텔레'(* )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창조
이래 지나간 모든 시대의
'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Lenski). 즉 그리스도가 이땅에 옴으로써
유대 민족이
율법을 통한 제한적인 구원의 길로 인도되었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
는 구원의 시대가 열렸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히 9:26).
우리의 경계로 - '경계'에 해당하는 헬라어
'누데시안'(*
)은 '권고하
다' 혹은 '교정하다'는 뜻을 갖는 단어로(살전 5:12, 14)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당
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10:12
그런즉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테'(*
)는 '그러므로'라는 뜻으로, 바울
이 앞에서 열거한 예증을 근거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충고하려는 의도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선 줄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스타나이'(* )는 현재 서있는
모습을
표현하는 말로, 신앙이 아무런 흠없이 온전하다는 뜻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의 복
음에 대한 지식과 생활이 흠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넘어질까 조심하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민족이며 '만군의 주
여
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결코 이방의 침략을 받지 않을 것이
라고 장담하였었다(겔
12:22). 이와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인들 중에도 자신들이 이미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입었기 때문에 우상의 제사에 참석하고 그
제물을 먹어도 아무
런 해가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수많
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형벌로 죽은 사실을 지적하면서(5, 8절) 믿음 가운데
있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10:13
시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스'(*
)는 종교적인 의미
로 주로 사용되었고 의학적으로는 실험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는
주로
'유혹'(temptation)이나 '시련'(trial)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유혹'이라는 것은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고(마 6:13;눅 11:4;계 2:10) '시
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연단하기 위하여 허락하시는 것을
의미한다(마 5:4, 10;약 1:12;벧전 4:12).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 '미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
)는
'신실(信實)하다'는 말로서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있
었던 복음에 대한 지식이나
그들이 자처하는 경건의 생활로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써만 그들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었다
(Hendriksen).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
본절에서 나오는 '시험 당
함'의 의미를 '유혹'(temptation)과 '시련'(trial)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 양
자 택일의 개념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의미가 복합된 일원론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Grosheide). 약 1 : 14의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됨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고 시련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러한 시련을 통하여
그들을 연단하시고 훈계하신다.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 이 말씀을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시험이 임할 때 우리에게 회할 길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다는 의미로 하나님은 시
험과는 무관한 분이심을 전제한다. (2)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실 때 피할 길도
함
께 예비하신다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주관자이심을 전제한다
(Hendriksen). 그런데 본절에서는 '즈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 ,'...와
함께')이 사용되어 후자의 해석이 더욱 타당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허락지 않으시며 또한 직면한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공
급해 주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10:14
그런즉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페르'(* )는 앞구절과 매우
밀접하
게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서술임을 나타낸다. 바울은 지금까지 말한 사실들로부터 결론
을 도출해내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보기로 고린도 교회의 상황, 즉 우상
숭배 축제의 참여에 적용 시킨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
바울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뜨거운 애정을 표현하면서 바른
태도를 취할 것을 급박하게 권면하고 있다(Lenski,
Morris).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 '피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퓨게테'(* )
는 KJV에는
'달아나라'(flee)로 번역되어 있다. 죄를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도
망하여 멀리 있는 것이다. 희생 제사의 축연이 곧
우상 숭배는 아니었으나 그것은 우
상 승배의 경계선까지 가는 행위였으며 또한 충분히 우상 숭배에 빠지도록 할
가능성
이 있었다(Godet). 그러기에 바울은 여기서 단순히 우상 숭배만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일조차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10:15
지혜 있는 자들에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니모이스'(*
)
는 1:19에서 언급된 '지혜있는'(*
, 소포스)과는 달리 '지각있는', '총명한'
등을 의미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지각있고 총명한 자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권
면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양심을 속여가며 제물의 고기를 먹고 동시에 그리
스도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분별(分別)하라고 촉구한다.
스스로 판단하라 - 고린도 교인들이 실제로 지혜가 있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
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가정하였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에는 고린도 교인들이
자
신의 말을 이해하고 수용하기를 바라는 심정이 포함된다.
=====10:16
본절부터는 '성만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신약 시대의 성만찬은 구약 시대의 화
목제사 뒤에
있었던 '축제'와 상응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린 후 그의 가
족들과 함께 성전 뜰에서 신성한 축제를 가졌다. 거기에는 제사장도
같이 참여하였다.
제단에 드려지지 않고 남은 재물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었는데 재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시는 은총과 화해의 보증이 되는 행위였다(Godet). 마찬
가지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다는 화해의 표
식이 된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때에 시행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
한 것으로
성찬이 시행되었으며, 이러한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임을 확인
한다. 즉 주님의 살과 피로 상징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
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하며 주님과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를 갖는다. 뿐
만 아니라
다른 신자들과 서로 하나 된 지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축복의 잔은 -
'축복'(* ,
율로기아스) 이라는 말은 '찬사'나 '복을
비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 술잔을 들 때 복을 기원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
월절에 마셔야 하는 네 잔 가운데 세 번째 잔이 '축복의 잔'(*
, 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이었다.
참예함이 - '참예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
)는 '교제'
(communion)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떼는 떡은 - 여기에서 바울은
성만찬의 원래 순서와는 달리 '떡'보다 '잔'
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것 같
다. 잔과 떡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것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
스도와 살과 피를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0:17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그들이 떼어 먹는 떡이 한 덩어리인 것처럼 비록 많은
사
람들이 모여있다고 할지라도 실상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한몸이니 - 이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혹자는 '한
몸'(* , 헨
소마)이란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의 유기적인
단일체'(the
organic unity of the congregation)를 뜻한다고 한다(Grosheide). 그러나
본절에서는
성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뜻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Meyer, Godet, Osiander).
왜냐하면 16, 17절에서 한 떡을
떼므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
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한 덩어리의 떡을 떼는
의
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모든 교인들이 하나의 신비한 영체(靈體)를 이루게 된
다고 말한 것이다(엡 5:23;골
1:18).
=====10: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 - 이것은 혈통(血統)에 의한 민족적인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된 '영적인
이스라엘'(*
, 이스라엘 카타 프뉴마)과
상반된다. 이로써 앞구절에서 언
급한 성찬의식을 유대인의 의식과 대조하려 하고 있다.
제물을 먹는
자들이...아니냐 -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제단 위에 태워서 드리고 남은 고기를 제사장과 제물을
드리는 자들이 성전 뜰에서 나
누어 먹었다(레 7 : 15). 바울은 여기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주의를 다시 구약으로
돌
려서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물을 먹은 것과 고린도 교인들이 우
상 축제에 참여하여 제물을 먹는
것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 - 제물은 제단 위에 드려지는 것이므로 제물을 먹는 것은
제
단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또한 제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그러므로 결
국 이스라엘 백성이 제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의 행위가 되었다
(Hendriksen).
바울은 이에 비추어 이방 신전에서 열리는 우상의 축제에 고린도 교인
들이 참여하여 같이 제물을 먹는 것은 곧 이방의 신(神)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0:19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 어떤 사본에는 '우상의 제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돌로뒤톤'(*
)과 '우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돌론'(* )의 위치를 바꾸어 그
강조점에 차이를 두었다. 바울은 이러한
질문을 통해 '우상'이든 '우상의 제물'이든 모두가 거짓임을 강조한다.
우상은 실재
(實在)하지 않는 것이며(고전 8 : 4) 우상의 제물 역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이방인들의 제사는 여전히 우상 숭배였으며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10:20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 앞구절에서 우상의 허구성을 지적
하고 본절에서는
그 우상 배후에 영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귀신임을 시사한다. 당
시 헬라인들이 섬기던 신들은
쥬피터(Jupiter), 아폴로(Apollo), 비너스(Venus) 등
신화에 근거해 의인화된 신들로 실재(實在)하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신화적 존재들의 배후에는 사악한 힘, 곧 사단의 세력이 역사하고 있음을 바울은
지적
한다(Godet). 우상 자체는 결코 신(神)적인 존재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배후에는 살아서
활동하는 영적인 존재들이 있다(엡 2 : 3 ;6 : 12). '귀신'에 해당하
는 헬라어
'다이모니오이스'(*
)는 '하급의 신', '잡신' 등을
의미하는
'다이몬'(* )에서
나온 파생어로서 바울서신에서는 본절과 딤전 4 : 1에서
만 나온다. 본절은 신 32:17을 그대로 바울이 인용한 것이다(시
96:5;106:37).
귀신과 교제하는 자 - '교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누스'('
)는
'친교'(communion), 혹은 '협동'(fellowship)의 뜻으로 16절의 그리스도와 교제한다는
문맥에서도
'참예함'이라 번역되어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본절에서는 우상 그 자체와
친교를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둠의 세력과 결탁된
악한 영들과 짝이 된다는 뜻
이다(Grosheide).
=====10:21
주의 잔과 귀신의 잔 - 바울이 17절에서는 '떡'을 앞에 두어 강조하고 있는
반면
본절에서는 '잔'에 강조를 두어 '잔'을 앞에 두었다. 이렇게 하여 '잔'과 '떡'이 모두
중요함을 균형있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주의 잔'을 '귀신의 잔'과 대비시킴으로
명백하게 구분짓고 있다. 당시에 헬라인들은 자기들의 신전에서 향연을
베풀 때 첫번
째 술잔은 '쥬피터'(Jupiter)에게 두번째는 쥬피터와 '님프'(Nymphs)에게,
세번째는
'쥬피터 소터'(Jupiter Soter)에게 바쳤다(Godet). 또한 술과 고기 등 모든 음식은 우
상의 이름으로
축복되고 봉헌되었다(삼상 9:12, 13). 이러한 술잔을 드는 것은 곧 악
령의 세력에 굴복하는 것이고 복의 근원이 우상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성찬에서 주의 잔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주의 상과 귀신의 상 - '주의 상'에서는 주님께서 주인이시고 그에 참예한 자들은
그의
손님이 된다. '귀신의 상'에서는 귀신이 주인이 되고 참석자들은 귀신의 객(客)
이 된다(Hendriksen). '주의 상'과
'귀신의 상'은 '잔'과 마찬가지로 서로 배타적이
다. 그러므로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듯이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동시에 참여할
수 없다(고후 6:14-18).
=====10:22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 '노여워하시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젤루멘'
(* )은 '질투하게 하다'(to provoke to jealousy)는
뜻으로 '질투하
다'에 해당하는 '젤로오'(* )와
'곁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파라'(* )의
합성어이다. '젤로오'는 좋은
의미로는 '부러워하다'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어서
(TDNT) 하나님의
열심에 대해 묘사하기도 한다(겔 39 : 25). 이 '질투'는 사랑과 신
뢰에 대한 배신을 당하여 유발되는 감정으로 인간이 갖는 분노
중에 가장 강렬한 것이
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분노를 표현하
는데 있어서 가장
적절하다(Hendriksen). 구약 시편에서도 '질투 하다'에
해당하는
'카나'(* )가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으며(시
78:58), 신 32:16, 21에서는 다른 신으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게
하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 본절은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수사적 의문문을 사용하
여 반어적 표현으로 당연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절대적이므로
그
어떠한 것보다도 강하시고 그 무엇도 그분을 굴복시킬 수 없다. 본절의 질문은 둘 중
에 하나를 택하여야 한다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인정하고 있음을 단정하고 질문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이미 정한 마음을 거슬려서 어떤 것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
이다(Grosheide). 바울의 이러한
질문을 통해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결정한 것을 확고
히 하고 그들이 지은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10:23
모든 것이 가하나 - 본절의 논의는 바울이 이미 6 : 12에서 언급한
내용의 반복
이다. 본절에서는 개인적인 차원의 자유보다는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자유의 개
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바울은 이미 8장에서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러한 개인적인 자유가 교회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
게 될 때 그것은 제약(制約)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절에
서
두 가지를 제시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분명한 원칙 가운데 시행되는 것임을 보
여준다.
유익한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페레이'(* )는 개인의
영적인 유익
을 말하는 것으로(Godet) '이익이 되는'(beneficial)이라 번역할 수
있다(NIV).이에
대한 자세한 주석은 6 : 12을 참조하라.
덕을 세우는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도메이'(*
)는 특별
히 이웃들의 유익을 위한다는 의미의 '건설적인'(constructive)으로 번역할 수
있다
(NIV). 바울은 본절을 통하여 기독교인은 우상의 제물을 능히 먹올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는 자신의 영적인 유익과 이웃들의 신앙적 유익을 위하여 제한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10:24
남의 유익을 구하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참된
자유와 사랑의 실천 원리를 제시한다.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
앙 안에서 가능하며 모든 이기적인 욕심을
배척하여 구원을 완성하는 삶이다. 타인을
위하여 자유를 사용하는 것(롬 14: 7; 15: 2; 고전 13 : 5 ;갈
6:2)은 공동체를 위해
지켜야 할 원리이자 그리스도인이 덕을 세우는 방법이다. 인간에게 귀중한 자유가 타
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며 그러한 유익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 사회는 참
으로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요일 1 :
7).
=====10:25
시장에서 파는 것 - 당시 로마와 소(小) 아시아 지방에서는 '황제 숭배'와
'우상
숭배'가 성행하였기 때문에 상점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음식들은 일단 제물로 바쳐졌
던 것이었다. 즉 제사에 사용되었던 제물은
신전(神殿)에 바쳐졌으며 나머지는 제사장
이나 예배자들에게 제공되었는데 제사장들은 보통 많은 양의 고기를
할당받았으므로
쓰고 남은 대부분의 음식은 일반인들에게 판매되었다. 따라서 시장에 나와 있는 음식
들이 제물로 쓰여졌는지
아닌지를 가리기란 어려웠다.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여기에서의 '양심'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와 같이 믿음이 약한자의
양심을
말한다는 견해이다. 강한 자는 고기를 먹더라도 자유함으로 인하여 양심의 거리낌을
받지 아니한다. 따라서
이것은 약한 자의 양심을 가리킨 것이다(Holsten, Godet). (2)
이 말은 특별히 믿음이 약한 자들을 의식하여 한 말이 아니고
전반적인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한 말로서, 일단 시장에 나온 고기는 양심의 거리낌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으
므로 그 고기가
제물인지 아닌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견해이다(Hendriksen).
(3) 나중에 제물인 것을 알게 되더라도
양심의 부담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이다(Chrysostom, Erasmus).
이와같은 세 가지 견해 중에서 (1)의 견
해가 가장 자연스럽게 문맥과 연결된다. 이는 29절의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라는 언급과 잘 연결된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가 우상의 제물임
을 알게 되었을 때
믿음이 강한 자들은 개의치 않고 사먹을 수 있겠으나 믿음이 약한
자들은 우상 제물이 신비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여겨서 사먹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하였다.
=====10:26
본절은 시 24:1의 인용으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식사 전에 드리는 감사
기도의
형식이다. 이것은 만물의 창조주가 하나님이며 그분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분임을 인
정하는
고백이었다.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 '충만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로마'(*
)는 땅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고기도 우상의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 제물 자체는 더러운
것이 아니다.
또한 우상 제물로 쓰여진 고기를 먹는다 해도 그 음식이 본래 의도된 목
적대로 사용된 것이므로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다.
=====10:27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먹으라 - 본절에서는 식사에 초청받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시장에서 팔리게 되는 우상의 제물들은 이미 그 종교적인 의미를 상실한
것이므로 단순한 음식으로서의 의미 밖에는
없다. 따라서 음식을 먹을 때 양심의 가책
을 받을 필요 없이 자유롭게 먹을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나
이교도들에게
초청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교도의 형제나 친척들이 있을 수 있
으며 바울은 그런 자들과의 교제를
금하지 않았다(5: 9, 10).
=====10:28
알게 한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 그들은 상 위에 놓여진 음식은 어떤 것
이든지 양심의
가책없이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약한 그리스도인
이 특정한 음식이 제물이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면 성도는 그것을
알게 한 자와 자
신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 말을 듣고도 그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
이 제물임을 가르쳐준 사람은
그 약한 믿음이 그 일로 인해 성처받아 실족할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은 제물을 먹는 자에게 있다. 믿음이 약한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보고
우상과 교류해도 괜찮은 것이 아닌가 또는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이 우상 숭배자가 아닌
가
하는 등의 오해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10: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것은 믿음이
약한
자의 양심을 위한 것이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제물을 양심의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
었으므로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약한 자들이었다.
어찌하여 내 자유가...판단을 받으리요 - 이에 대해 혹자는
본절을 '다른 사람들의
판단으로 인해 너희 자유가 제약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므로 너희가 옳다고 생
각되는 한 너희의
자유함을 온전히 유지하라'는 의미로 이해한다(Meyer, de Wette).
그러나 28절의 문맥과 연결시켜 볼 때
보다 적합한 해석은 '너희의 자유함이 다른 사
람들의 비방을 듣는다면 유익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것이다. 즉 나의 자유가
남을 죄
짓게 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Godet, Hendriksen).
=====10: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비방을 받으리요 - '감사함'에 해당하
는
헬라어 '카리티'(* )는 본래
'은혜'(grace)라는 의미인데 '감사함'의 뜻
으로도 쓰인다(딤전 1:12). 본절에서는 음식에 대한 축사로
사용된 용어로 보인다
(TDNT). 바울은 기독교인이 이교도의 집에 초청받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될
때 그것
을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며 먹는다면 윈리적(原理的)으로는 합당
한 것으로 비방받을 일이
못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상처를 받는다면 음식을 먹음에 있어서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유익을 위해 나의 권리와 자유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자유와 권리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최대한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롬 14:21).
=====10:31
먹든지 마시든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이제 바울은 '우상의
제물'
이라는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결론적인 권면을 하고 있다. 본절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인의 전반적인 삶을 지배하는 기본 원리이다(골 3 : 17).
즉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행동은 그것이 먹는 것이든
마시는 것이든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벧전 4 : 11).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
여 행하라는 말 속에는 바울이 이제까지 말하였던 '타인의 유익'에 대한 언급이 포함
되어 있다(시
133:1-3).
=====10:32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프로스코포이...기네스데'(*
... )는 '거침돌이 되어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
는'의 뜻을 갖는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행동 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요 두번째 원리는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일을 피하는 것이다.
=====10:33
나와 같이...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 바울은 자신의 행동을 본보기로 고린도 교
인들에게
권면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
의 환경에 적응시켰다(9 : 18-22). 특히 그는
9:22에 기록된 대로 약한 자들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 약한 자가 되었다. 바울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 아니었다(갈 1:10). 즉 바울은 복음이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
함으로 전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Grosheide) 스스로를 순응시키는 겸손함을
통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본절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을 본받아 살면
결코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
이기도 하다. 바울은 자신의 중심에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살아가고 있
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갈 2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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