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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소년 실종사건 관련-50사단의 해명을 보고
출처: http://blog.daum.net/jamgok/10855922
2002년 10월 작성
예비역 중위로서 실무부대에서 소대병력을 통솔해서 자주 사격장을 이용해보았던 사람으로서
10월1일 와룡산 인근사격장의 관리부대인 육군50사단측 발표내용에 다소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또 제보 및 언론보도등에서 제기되는 사격장 관련 사항에 대해 본인의 경험을 피력하고자 함.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개구리 소년 사망사고와 관련해서 군부대사격장 주변인점,
유골주변에서 다량의 실탄이 발견된점.
사망자의 일부 두개골에서 실탄 관통흔적이 있는점.
(10. 1)대구지방경찰청에서 그간 언론과 경찰측이 제기한 사격장 관련 문제에 대해 50사단측에서 해명한 발표내용을 보면,
수년전 소대장으로서 병사들을 통솔하여 사격장을 이용해본 본인이 보기에는 헛점 내지는 확인해야할 사항이 많다.
50사단측은 오늘 발표내용중에서
1)사건당일(1991. 3.26)은 지방선거로 인한 임시 공휴일이어서
당시 사격장 관리를 맡았던 주임 원사가 당일은 사격이 없었다고 진술했다는 내용
- 본인이 전방(21사단)에서 소대원을 통솔하여 사격해본 경험과 관행적으로 사격장을 이용하는 행태를 보아도,
통상 부대에서 상급부대의 전투력측정(검열) 혹은 상급부대에서 예하부대들간에 사격측정(경쟁)을 위해 측정 일정이 잡히면
수검을 받는 예하부대들은 측정에서 좋은 성적(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특히 측정 항목중 사격에 대한 비중이 가장 크므로 다른부대 보다 더 많은 사격 연습 기회를 갖기위해 사격을 시행한다.
이 과정에서 사격장 이용은 평일은 물론 공휴일에도 이용하는 경우가 있고.
2) 50사단발표중 91년 당시 비공식적,개별적 사격은 없었던 걸로 파악 됐다는 내용
- 부대 규정이나 기타 공식적으로는 사격장 이용시에는 사단 교육과(작전처)나 연대
혹은 기타 상급부대 및 사격장 관리부대에 사격장 출입 및 이용시에는 통보하고 또 기록에 남겨야 하나,
-실제 일선 부대중 일부에서는 상급관련부대(부서)로의 통보나 해당 관리부대의 기록이 부실하게 정리 혹은 누락 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들어 사단예하 여러 단위부대가 상급부대 사격측정등을 받게되면,
수검 부대에서는 한정된 사격장 이용 공간과 횟수가 부족하다며,
사격장 관리부대측에 구두로 사정하거나 부탁해오면
(사격장)관리 부대측은 이에 응해서 비공식적,개별적 사격이 이루어 지기도 한다.
=> 특히 이런 경우 비공식적,개별적 사격이 이루어 지며,
공휴일등에도 이루어 지므로 사격장 관리부대 담당자(주로 영외 거주 부사관,하사관)등이 출근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대 일직간부 혹은 선임병등에 의해서 사격장이 통제된다.
3) 사격장 관리는 당시 사격장 출입을 통제할 수 있는 직접수단인 철책선은 설치가 안되고
표식주와 경고 안내판이 있었고 군데 군데 경계병을 두었다는 50사단측 발표내용
- 외부인들의 사격장 주변 출입을 직접적,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철책건조물등이 없으므로
비록 경고표지등이 있다해도 장난기 많은 어린이들에겐 계고(戒告) 및 통제 수단이 되기 어렵다.
- 와룡산 주변이 민간인 주거,도로시설등이 있는데
사격장주변에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는 철책선이 설치 안됐다는 것은 사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4) 공식 관리,통제하는 사격장 이외에도 비공식적,변칙적인 사격장 존재유무
- 1)번 사항에서도 언급했듯이 통상 상급부대에 의한 예하부대들에 대한 사격측정은 나누어 실시하는 것이 아니고
측정의 공정성,편의성 등을 이유로 동일한 일시에 동시에 실시한다.
그러면 측정받는(수검대상)예하 부대들은 다른 부대와의 측정에서 상급부대로부터 좋은 평가(결과)를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사격장을 이용해서 측정에 대비한 사격연습을 하게되는데,
여러 많은 부대가 한 개의 사격장을 동시에 이용하다 보면 공간부족,
이용횟수 등이 부족하므로 공휴일은 물론 공식 사격장이 아닌 비공식,
변칙적 사격장을 개설(開設)하여 이용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또, 사격측정 인원중 사격실력이 떨어져 부대측정에 누가 될 것을 염려하여
사격이 부족한 병사들만 따로 모아 놓고 소규모로 정규사격장이 아닌 소규모,비공식적인 공간에서 영점사격훈련,
사격자세(PRI)등을 실시하므로
실탄을 주으러 갔던 소년들이 현재의 공식사격장이 아닌 유골등이 발견된 가까운곳에서 피격(被擊)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구두미화원인 어느 분이 제보한 지난 7월경 어는30대 남자가 와서 자신이 군복무중 사격을 하는데
소년들이 갑자기 나타나 사격한 실탄이 2명에게 맞고 이를 은페하기 위해
다른소년들도 타살했다는 내용은
위의 내용처럼 본인의 실무부대에서 사격장 이용 경험이나 관행에 비추어 보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오늘 50사단측에서 경찰측이 요청한 자료에 대한 답변과 제보,
언론등에서 제기하는 문제점을 반박하는 내용발표는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많다고 본다.
5) 앞서 언급한 바 처럼 실종 당시인 91년 3월26일 전후로 와룡산 군부대 사격장을 이용했다면
시기적으로 봄철 과 가을철에 보통 부대 단위 사격이나 전투력측정이 있으므로
평소 와룡산 사격장을 이용하는 50사단 예하 직할부대 및 인근 보병부대의 당시(91년전후) 근무했던
병사,하사관,장교들을 상대로 각종 사격 및 전투력 측정이 있었을 때 현 와룡산 군부대 사격장만을 이용했는지,
6) 아니면 경우에 따라서 당해 사격장이 사용부대 과다로 혹은
기타사유(시설물 교체, 시설물 고장 등)로 이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대체 사격장으로
인근 다른 사격장(군부대 발표로는 용산동 일대에 40여년간 군부대가 주둔해 있었으므로
91년 당시 주사격장 이외에도 당시 주로 사용하는 주사격장 이외의
훨씬 오래전에 조성(造成)되어 당시에는 거의 사용은 않는 비공식(廢) 사격장이지만,
정규사격장의 수용인원 초과 기타사유로 사용 못하게 되는 경우,
간헐적으로 혹은 임시로 사용되는 예전 사격장)을 이용했었는가 하는점.
또 정규사격장 이외에 별도로 조성된 비공식 사격 연습장등이 있었지도 확인 해보아야 할것임.
이런 사항은 50사단측의 공식답변에 전적으로 의존하다 보면
50사단측의 고의 혹은 보유정보,기록등의 미비로 제대로 밝힐 수 없을 수 도 있으므로,
당시(91년 전후) 와룡산 사격장을 이용했던 50사단 예하 단위부대와 그 부대들에서 근무했던 인원들에 대해
탐문(探問)을 통해 이번에 50사단측에서 공식적으로 넘겨준 자료와 비교하고 또 자체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으로 판단됨.
그리고 만약 91년 당시 주사격장이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 이용했던 임시(廢)사격장의 위치가
현재 소년들의 유골(遺骨)들이 발견된 지역과 인접하지는 않았 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확인되어야 한다.
10월 1일 대구지방 경찰청에서 있었던
문제의 와룡산 소재 사격장 관리부대인 육군 50사단측의 작전참모가 기자회견시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 "만약 당시 소년들이 총기로 총살돼 타살됐다면 어떻게 10여 년이 지난 지금 까지 밝혀지지 않았겠는가?"
□ 또, 경찰측 이나 다수 언론은 최근 주목되고 의혹이 큰 사격장관련 유탄(流彈)에 의한 사망 가능성에 대해 의심은 들지만,
5명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우발적으로 총기오발이나 유탄을 맞고 쓰러진 아이들을
현장에서 추가 타살하고 암매장(暗埋葬)까지 했다면
사격장 이라는 장소의 특성상 주변에 많은 인원들이 함께 있었을텐데,소년들을 타살하고 사체를 유기,매장 까지 할 수 있었 겠느냐?
라고 생각하면 군병력이나 사격장에서의 유탄에 의한 사망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사격장을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위와 같은 생각이 지극히 단순한 판단임을 알 수 있다.
즉, 통상 사격장에서 군부대가 사격할 때 가장 경계하는 것이 두 가지인데 첫째는 사격간 총기오발등에 의한 안전사고 이고,
두 번째는 사격후 발생하는 탄피(彈皮)수거 문제이다.
사격훈련이나 사격측정이 끝나고 단위부대는 탄피 갯수를 확인한다.
교육훈련용탄(교탄)을 쓰고 당초 부대에서 수령해서 가져온 탄알 갯수와 탄피숫자가 정확히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탄피가 부족하면, 부대는 사격장을 떠나지 못하고 함께 찿는다.
그러다가 탄피 부족한 수량이 그렇게 많지 않으면,
부대인원 다수는 사격장에서 철수해 부대로 복귀하고, 일부 적은 수의 간부나 병사들만 남아 추가로 탄피를 찿거나,
또는 탄피가 부족하지 않아도 부대에서 가져온 교탄이 남는 경우에는 그걸 현장에서 소모하고 가려고 대부분의 병력은 철수하고,
극히 적은 간부등이 남아, 정식 사격 과녘이 아닌 그 사격장 이나 그주변 등에 단발(單發) 혹은 점사,자동사 형식으로 사격을 한다.
자, 사격장엔 탄피수거를 위해 남았던 몇 명 혹은 잉여(남는) 교탄을 다 소비하고 가려고 남은
역시 극소수의 몇 명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가정하자.
그 넓은 사격장엔 이들 몇 명밖엔 없다.
사격장 관리 부대측 통제요원들도 철수한 상태이다.
이들이 사격장 목표 과녘이 아닌 주변일대 특정 목표물을 정하고,
부주의하게 혹은 장난 삼아 부담 없이 쏘았는데,
마침 부대 사격이 끝나면 사격장으로 들어가 탄피와 탄알을 수집하려고
사격장 가까이에 근접해 있던 소년들중 일부가 피격(被擊)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사격간 지켜야할 기본적인 안전수칙 및 규범을 무시하고 사격하던 인원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 즉 무심코 사격한 것이 갑자기 나타난 민간 소년들이 맞았다면,
현장에 있던 극히 적은 사격자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 같은가?
주변엔 이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자기들 밖에 없다.
사격간 기본안전수칙을 지키지 않고 총기오남용(銃器-誤濫用)을 한 이 사격자들의 선택은?
1) 신속히 부대나 인근 병원으로 부상자 등을 후송할 것 같다.
2) 이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자신들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은페 하려는 내면의 유혹을 받는다.
만약 사격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은 당연히 1)번의 행동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다수의 목격자들이 있기 때문에 당시는 모면해도 언젠가는 탄로 날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위의 상황처럼 자신들 사격자 소수인원 몇 명 밖에 없다면 사정은 달라질 개연성이 크다.
더구나 이들은 사격장 안전수칙 및 규범을 지키지 않은 상태로 사격하다 사고가 난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그들은 형법상 정범(正犯)과 방조범의 관계가 된 이들은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길 극히 꺼릴 것이고 그렇다면 이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 위에서 가정한 상황은 물론 최악의 보통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생각할 수 도 생각하기도 싫은 최악의 선택이요, 행동일 것이다.
도덕적으로나 당위적으로는 도저히 있어서는 안될 일인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발적(偶發的)인 상황하에서 발생한 사고에 평상시의 이성과 양심으로 행동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본인이 이런 극히 비극적인 상황을 가정한 것은 ,
군측이나 일반인들,수사하는 경찰측도 사망한 소년들이 타살인 것으로 보고
유골주변이나 유골에서 탄환(彈丸)등이 발견 된 점을 미루어 보아
인근 사격장이나 군 병력에 의한 사고일 수도 있다고 강한 추정이나 의심을 하면서도,
사격장이라는 장소적 특성을 떠올리며,
다수의 많은 인원들이 함께 있었을 것인데 만일 우발적으로 유탄 등에 의해 피격(被擊)됐더라도
사체유기 및 매장등의 증거인멸,은폐시도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껏 본인이 가정한 군관련, 사격장 관련 가정(假定)이 아니고
이번 사망사건이 민간인에 의해 와룡산 일대 혹은 제3의 장소에서 타살되고 유기(遺棄),매장(埋葬)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다만, 현재까지 언론 등을 통해 당시의 정황(情況)등을 보았을 때,
그것이 군사격장과 깊은 연관성(聯關性)이 있다고 본다면,
위에서 본인이 기술(記述)한 상황설정이 결코 허황되거나 실현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님을 밝혀두고 싶다.
즉, 단순한 사격장에 대한 고정관념(다수인원이 항상 함께 한다는것)으로
사건발생과 연관성이 큰 수사대상을 간과(看過)하여 91년 사건당시의 초동수사에서의 실패
(모든 발생 가능한 상황을 배제한 채 단순한 아동 가출,실종으로 보고 수사력을 집중한 점)를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유골과 발견된 옷가지에서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 없다고 하나,
유가족들의 증언도 그러하지만 소년들 상의와 일부 옷가지가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점을 보아
경찰이 추정하는 옷가지에 탄환(彈丸)관통 흔적은 없다는 말은 부적절하다.
10월1일 50사단측의 해명가운데 사건당일인 1991년 3월26일은 지방자치 의원 선거일 이어서 사격은 일체 없었다고 확언하면서,
평소 대구등지에 주둔하는 미군부대의 사격이 당일에는 없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아니, 당일 사격장 이용은 일체 없었다고 확언하면서
평소 이용했던 미군사격이 당일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인을 못한다는게 말이 되는가?
■지금까지 읽은 시나리오 중에서는 가징 개연성이 있어 보입니다.
사격 총성이 멎고 꽤 긴 시간 조용하자 사격이 끝난 줄 알았던 소년들은 총탄을 줍기 시작했고
총탄 정리 문제로 2명 정도가 남아서 추가 총격을 하던 중 아이 2명이 총상을 입게 됩니다.
한명은 사망 한명은 중상. 아이들도 놀라고 남은 군인도 놀람.
이일을 어쩌나. 군에서 이것은 엄청난 일.
패닉상태에 빠진 군인들은 피탄 된 두 아이의 옷을 벗겨 묶고 난 후,
일단 사격장에서 멀리 떨어진 유골 발견 지점까지 나머지 3명을 반 협박 반 회유하며,
같이 이동시킴. 사태가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군인들은 세 명의 아이와 중상 입은 아이를 살해 후 매장함.
이군인들(두명 또는 세명정도)은 절대로 발설하지 말자고 맹서함.
■친구한테 탄피를 주으러 간다고 했고,
구두닦이 아저씨가 들어서 신고 한것도, 실제 사건당사자가 죽였다고 했는데도 언론까지 통제되었던건...참 무서운 군대다...!
총상관련의문/개구리소년사건
구지방경찰청에 올려져있던 글로 군에서 병기담당경험자의 글입니다. 2002.10.04. 10:27
출처: http://blog.daum.net/jamgok/11557701
채종민 교수는 개구리소년의 유골 귀윗부분의 관통형 구멍(지름3센치)을
구멍의 입구와 출구 크기 차이가 나지않아 총상이 아니라고 했다.
과연 이 말이 옳을까?
군에서 병기담당을 한 나로서는 수긍하기 힘들다.
나는 칼빈, 엠16, 엠원소총에 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유효사거리나 제원은 지금도 거의 외우고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먼저 총알이 신체나 두개골을 관통하면 입구보다 출구가 크다는 것은 그 총이 정상적인 상황이었을 때는 그렇다는 것이다,
총의 상태, 총의종류, 비탄거리, 피탄 등등의
변수로 얼마든지 크기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채교수는 이런변수 상황을 무시했다.
채교수도 나름대로의 경험과 이론적인 학식이 있겠지만 총기를 직접 다뤄본 사람인지 의심이 간다.
나는 여기서 총기의 상태에 대해서 주로 말하겠다.
나는 군입대 초기엔 총기를 딱으면서 총알의 회전력에 대해서 몹시 궁금했다.
총알이 날아가면서 회전을 한다는 것을 들었지만 왜 회전하는지는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알 수 있었다. 바로 총열 내구의 조우선 때문이란것을.
그런데, 엠16소총은 조우선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칼빈과 엠원 소총은 조우선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무리 햇살 비추는 곳에 가서 총열 안쪽을 봐도 조우선이 없었다.
이것은 무었을 말하는가. 칼빈과 엠원 소총이 노후와 되었다는 뜻이다.
총열 안쪽이 마모가 심해 조우선이 사라진 것이다. 6.25전쟁부터 사용된 총이라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총들은 영점도 잘 잡히지도 않았고 탄착점이 아무리 정조준 하여 쏘아도 흩어지기만 하였다.
탄착점이 대체로 하향이었다.
총의 조우선이 없다면 총알의 회전력은 상실한다고 봐야 한다. 당연히 위력이 떨어지고 비탄거리도 줄어든다.
총알의 회전력 상실은 곧 총알이 물체 관통시 총알의 입구와 출구의 차이가 나지 않거나,
출구가 입구보다 오히려 작아질수도 있다는 것이다.
직접 실험을 해보면 알 수가 있다.
지금 군에서 사용하는 총들 중에 오래된 총들은 거의다 조우선이 망가졌다고 보면 맞다.
이런 총으로 사격했을시 총알의 물체 관통력은 현저히 저하되고, 총알이 관통한 입구와 출구의 차이가 조우선이 완전한 총과 같을까?
채교수는 여러가지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실수를 한것이다.
이번 유골에 난 구멍은 조우선이 없는 낡은 총의 관통상일 가능성이 아주 높고,
아니면 총알의 회전력이 상실한 상태에서의 관통상일 가능성이 높다.
경찰은 최교수의 말에 의심을 품고 정밀한 검사를 하시는게
현명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