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편찬된 문헌비고(文獻備考)는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1770)≫, ≪증정문헌비고(增訂文獻備考, 1809)≫,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의 3종이 있다.
각 성씨와 관련한 내용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1770)≫ 에는 없고, ≪증정문헌비고(增訂文獻備考, 1809)≫의 씨족고(氏族考)에 처음 실리나 이 책은 간행되지 못하여 필사본으로 전하며 그 내용이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증정문헌비고(增訂文獻備考, 1809)≫를 증보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에는 성씨에 관한 내용이 거의 그대로 제계고(帝系考) [附] 氏族 편에 나온다.
≪증정문헌비고(增訂文獻備考, 1809)≫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의 안씨(安氏) 기록에 순흥 안원숭(安元崇)이 문과에 급제했다고 나온다.
순흥안씨 :
...牧子 元崇 - 文 政堂文學 文惠公. [문과급제. 정당문학 역임. 시호 문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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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년경 각 지방 지리지를 수집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 에도 안원숭을 문과 급제자로 기록하고 있다.
輿地圖書 解說
輿地圖書 下 > 慶尙道 > 順興 > 人物
安元崇 牧之子 登第 官至政堂文學 : 안원숭은 안목의 아들로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輿地圖書 下 > 慶尙道 > 豐基 > 人物
安元崇 牧之子 登第 官至政堂文學 : 移屬順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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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의 동국여지승람이나 중기의 여지도서, 조선말의 증보문헌비고 등 관찬 도서에 안원숭(安元崇)은 일관되게 문과급제자로 기록되어 있다.
안원숭이 문과에 급제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안원숭의 외조모인 김태현처 왕씨 묘지명에 대해서는 "이 묘지명으로는 안원숭의 급제여부를 알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안원숭이 급제했다면 여기에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급제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황당한 논리적 비약이다. 이 묘지명에 나오는 사람들 중 급제했다는 말은 없지만 실제로는 급제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특정 인물이 급제했다는 언급이 없는 문헌으로는 급제여부를 알 수 없을 뿐이지 그것이 급제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신죽산, 탐진 안씨들이 주장해온 안원숭, 원형, 원린의 3형제가 문과에 급제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고 안원숭의 문과급제 사실까지 부인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현재 밝혀진 바로는 안목의 외아들 안원숭은 문과에 급제한 것이 맞으나 급제연도는 미상이다. 안목의 아들이 아닌 신죽산 시조 안원형의 문과급제 여부는 알 수 없고, 1341년 문과 장원인 안원룡과는 동일인이 아니다. 안원린은 실존 인물로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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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증정문헌비고(增訂文獻備考, 1809)≫ 씨족고(氏族考) 안씨(安氏) 편의 순흥안씨 인물 기록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에도 똑같이 나온다.
...牧子 元崇 - 文 政堂文學 文惠公...
증정문헌비고(增訂文獻備考, 1809) 의 안씨 기록 이미지
https://cafe.daum.net/ahnwha/GYhI/24
https://cafe.daum.net/ahnwha/GYhI/4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의 안씨 기록 이미지
https://cafe.daum.net/ahnwha/GYhI/19
첫댓글 1358년 김태현의 처 묘지명:
외손자는 6명이다. 안원숭(安元崇)은 군부판서진현관(軍簿判書進賢舘)이다. 박밀양(朴密陽)은 급제하여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이다. 박태양(朴太陽)은 급제하여 고공낭중(考功郎中)이다. 박소양(朴紹陽)은 성균시에 합격하고 원(元)에 들어가 형호지▨원수부주차(荊湖池▨元帥府奏差)가 되었다. 박삼양(朴三陽)은 급제하여 충주판관(忠州判官)이다. 박계양(朴季陽)은 좌우위정용(左右衛精勇)의 산직(散職)이다. 외손녀는 1명인데, 봉익대부 우상시(奉翊大夫 右常侍) 민유(閔愉)와 혼인하였다.
- 위 문맥을 보면 급제자는 누구이고 비급제자는 누구인지 느낌이 오지만 언급할 필요가 없다. . 앞으로도 이에 대해서는 언급않겠다.
- 중요한 것 안목의 아들 세 명이 급제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안목의 아들은 원숭 한 명이다. .
안목의 아들이 안원숭 뿐이라는 것은 이미 여러 자료와 글에서 검증된 것이니 새삼스러울 건 없습니다.
신죽산과 탐진 안씨 측에서 그동안 안원숭의 있지도 않는 동생 두명을 더하여 3형제가 급제했다고 주장해왔는데 이제는 또 안원숭이 급제한 사실조차 없다고 하시니 이건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안원숭이 급제했다는 조선초의 기록들까지 깡그리 다 무시하고, 목은의 묘지명에 급제했다는 말이 없는 것만 확대해석해서 급제하지 못했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하시는데, 그의 급제를 뒷받침하는 고려시대 문헌도 없지 않습니다.
1378년 안보의 명:
-문성의 증손인 정당문학 원숭은 아들 셋(원, 조동, 수)을 낳았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성의 족자(族子)로서 급제한 석(碩)은 은거하였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근재선생(안축)의 아버지이다. (안석의) 아들 셋(축, 보, 집)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근재의 아들인 현 밀직공 안종원의 아들 셋(경온, 경량, 경공)도 모두 또 과거에 급제하였다.
- 안향의 증손인 안원숭의 세 아들이 급제했다는 기록은 나오는데, 안향의 증손으로서 원숭·원형·원린 삼형제가 급제했다는 기록은 없다는게 포인트이다.
- 정당문학 안원숭과 밀직공 안종원은 직급을 적고 급제 여부는 미기재하였다. 안종원은 1341년 급제하였는데 미기재한 것으로 봐서는 여기서는 안원숭도 언제인가 급제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안병태13:34 새글
1390년 박소양의 묘지명:
- 쾌헌 김태현의 사위로는 안씨(안목 安牧)와 박씨(박윤문 朴允文)가 있는데, 안목은 정당문학이요 박윤문은 밀직대언으로서 모두 문과를 통해 현달하였다. 안목의 손자 셋과 박윤문의 아들 셋이 또 모두 등과하여 현재 사(士)의 관직에 몸담고 있다
- 여기서도 안목의 아들 셋이 급제했다는 기록은 없다. 반면에 손자 셋이 급제했다는 기록만 나온다.
- 제발 탐진안씨 오성군파 집행부에서는 원숭.원형,원린 삼형제는 없고 1341년 동방급제했다느 사실도 없다는 것을 인지해 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