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시인을 만나다|신작시 – 박노식
능주 장날 외 1편
어떤 소원은 얼굴에 수심을 남긴다
팔리지 않아서 한 움큼의 생이 길 위의 고해 같다
말린 고구마 줄기, 말린 토란대, 말린 대추, 그리고 고지말랭이
말에도 그늘이 있듯 그런 사람은
햇빛을 등지고 오래 행상을 한 나머지 작은 몸이 공벌레처럼 굳어서 눈에 밟힌다
능주 장날,
장터 밖에서 냉이를 다듬는 할머니의 손마디가 돌 같다
그 거친 손등에 봄이 묻어서 꽃이 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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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바랜 잎들
이미 바랜 잎들은 고요한 표정을 짓는다
시간이 끌어올린 멍한 눈빛,
잎들의 우물 같은 동공 안에는 천사의 언어가 숨어 있을 것이다
나의 눈은 강물로부터 왔으므로 쉬이 잠들지 못하고 찬 별빛처럼 서걱거린다
밤, 바래진 모든 것들의 은신처
어둠 속에서 아주 멀리 사라진 잎들이 바스락거릴 때,
문득 죽은 오감이 깨어나 나의 볼기짝을 후려친다
숨이 차고 침이 마르고 입술이 튼 바랜 잎들도 한때는 축축한 혀를 가지고 있었다
이미 오래 고요해진 잎들은 길 위의 그리움을 그의 몸속에 조각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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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식
1962년 광주에서 출생해 광주공고와 조선대 국어국문학과, 전남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수료했으며 2015년 《유심》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고개 숙인 모든 것』, 『시인은 외톨이처럼』, 『마음 밖의 풍경』, 『길에서 만난 눈송이처럼』, 『가슴이 먼저 울어버릴 때』가 있다. 현재 ‘시인 문병란의 집’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화순에서 시창작에만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