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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펀이 주목한 시집|임재정
시집 리뷰
요람을 꿈꾸며, 저 너머로
-임재정 시집 <아돌프, 내가 해롭습니까>
이송희(시인, 문학평론가)
1.
“믿어,/ 비 올 때의 물속이 가장 고요하다는 거// 불빛을 떠받치는 것은/ 어둠이라는 거”(시인의 말). 5년 만에 만난 임재정 시인의 말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물속 세계와 어둠의 세계에 대한 믿음이 농후하다. 시인에게 밤은 눈을 감으면 환해지는 저 너머의 시간이기에 “눈을 가리면다른 곳이 환해”(「너머」)진다고 믿는 것이리라. 이 판타지를 통해 자신을 위로해 보고자 하는 것인데, 현실은 구르는 수레바퀴처럼 고단한 ‘노동과 일상’이 반복이 될 따름이다. 전기공電氣工인 시인에게 평면의 벽이야말로 치열한 삶의 현장이며, 무념무상의 수행장소다. 그의 시 곳곳에 등장하는 노동의 시간은 “심약한 밤”, “나를 해하려 골몰하며 손가락 깎는 기분”(「밤의 아돌프」)을 경험해야만 하는 고단한 순간을 데려온다. “얼굴 반을 떼어 저마다 퇴근을 날인하고”(「진자들」) 돌아가는 인부들의 지친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임금을 대가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현장에서 그들은 저 ‘너머’를 꿈꿀 수 있는가. 노동자들은 살아남고자 자신의 의식을 일깨워 서로를 다독일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 레드썬!
여기에는 없어 눈을 감는다
눈을 가리면 다른 곳이 환해지는 인간을
풍선은 이미 아는지, 누르면 어디로든 부푼다
엄마가 폐부에서 부풀린 아이처럼
세상이 누르면 핑계처럼 집으로 불거진다
함께하는 이웃이면서 모르는 사람들, 마주칠까 봐 자주 눈을 감는다
이이가 품고 있는 시간이 풍선 속으로 건너가 쌓인다
조금씩 무거워지던 풍선이 덜컥, 무서워질 때까지 어른이란다
눈을 마주쳐야 하는데, 풍선은 불다 보면 눈을 감고 마는
이것은 엄마가 잃어버린 샛길
환영 허수아비 영혼 도깨비 귀신보다 더 무서워 눈을 감는다 내겐 풍선이 들려 있다
두려움도 없이 좀비처럼 풍선 안을 날뛰는, 터질 준비를 끝마친 미래
얼룩진 낮은 쉽게 세탁할 수 없는 밤이 될 것이다
비눗방울이 떠다니는 꿈에
눈꺼풀 속 한 곳만 환해질까 봐 다시 눈을 뜬다
감지도 뜨지도 않은 중간이란 없어서
오늘을 끝내려고 시계를 만든 사람을 떠올렸다
- 「너머」 전문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켜켜이 쌓인다. ‘너머’는 지금 여기를 벗어나는 곳이다. 저 너머에 있는 풍선은 아이가 품고 있는 것, 여기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 사이에 경계가 있다. 이제 더 이상 풍선을 부풀릴 자신이 없다. 그러나 시간은 자꾸 풍선을 부풀리게 한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집착으로 풍선은 자꾸 커지는데 마주하기는 두렵고 무섭다. 터져버리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너머’로 넘어가고자 하지만 넘어가는 것은 두렵다. 나의 야망과 꿈과 동심이 모두 다 사라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꿈과 희망이 있는 곳은 그 너머인데,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 내 꿈과 희망은 사라져 버린다. 아이러니다.
자크 라캉은 어차피 인간의 욕망은 상상계와 상징계, 실재계를 맴돌면서 결국 충족될 수 없는 환상 속에 머문다고 했다. 주체는 대상에게 욕망을 느낀다. 그 대상이 자신의 결핍을 완전히 채워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만 얻으면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그 대상을 얻게 되어도 욕망은 여전히 남는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렇다면 대상은 실재처럼 보였지만 허구일 수밖에 없다. 대상을 실재라고 믿고 다가서는 과정이 상상계이며, 그 대상을 얻는 순간이 상징계다. 그리고 여전히 욕망이 남아, 그 다음 대상을 찾아 나서는 것이 실제계다. 그리고 이때 실재라고 믿었던 대상이 대타자Autre이고 허구화된 대상이 소타자autre이다. 예컨대,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인도하며 조정하는 ‘신’, ‘자유’,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족’, ‘조국’ 등이 모두 대타자에 속한다. 그리고 이 개인(소타자)들의 의사소통에는 항상 대타자가 관여한다.
주체는 눈을 감으면서 저 너머로 넘어간다. 라캉에 의하면 확실한 대상을 목표로 욕구를 품을 때 삶은 지속되지만,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가령 ‘목이 마르다’고 떼를 쓰는 아이에게 물을 주어도 여전히 짜증을 부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아이는 물을 넘어서서 엄마의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다. 표면적 요구는 충족된 듯하지만, 요구의 진정한 목적은 보호자의 무조건적 사랑이다. 왜 욕구에 대한 불만이 남아 있을까? 모든 욕망은 근본적으로 무조건적 사랑이 주는 ‘온전한 만족’의 결여에서 기인하므로, 결코 완전히 채워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욕망이 항상 완벽하게 충족되지 않은 이유는 인간 내면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온전히 채울 수 없는 한계 때문이다. 풍선 안을 뛰노는 일은 불가능하다. 오늘을 끝내려고 시계를 만든 사람을 떠올렸다는 것도 같은 의미다. 시간의 탄생은 분리하고 경계 짓는 것을 통해서 오늘의 순간이 지나갔음을 각인시킨다. 오늘은 더 이상 내게 없다는 식으로 분리를 하는 것인데 이 또한 환상이다. 시간이 흘렀다고 과거가 사라지지 않는데, 이 판타지를 통해 자신을 위로해 보는 것이다.
2.
종일
덤덤한 벽에 얼굴을 달아줍니다
조금씩 일그러진 표정, 떠나간 얼굴들 모두
세 가닥의 전선 두 개의 나사에 묶이죠
면벽은 구도적이에요 무표정하려는 경향입니다
평면의 사원에 플롯을 재구성합니다 단다와 달다
그리고 달 것이다, 는 시점의 문제
콘센트마다 한 사람이 자기를 꽂고 충전되기를 바라는 것이 종교가 될 수 있을까요
밤새 시효 지난 꿈을 고정하는
두 개 무표정한 나사를 알고 있어요
낯익은 설비공이 변기를 놓고 물소리를 흘려봅니다
버릴 것들이 많은 수도승처럼
모두를 대표해 울어주는 수도꼭지처럼
나는 멀었습니다 면벽 뒤에 신발을 고쳐 신고
플러그에 딸린 티브이처럼 채널이 많습니다
전체이자 부분
면벽은 끄고 켤 수 없어야 하며
누구에게서나 벽이어야 합니까
- 「콘센트」 전문
콘센트concentric plug는 전원電源을 전달해 주는 매개체다. 콘센트가 있어서 여러 가지 가전제품들이 움직이고 기능을 수행한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콘센트와 접속해서 무한한 힘을 받아 낸다. 면벽面壁은 구도적인 행위로 진리나 종교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구하는 행위다. 이것은 시점(관점)의 문제이지 시제時制의 문제가 아니다. 평면의 사원은 벽인데, 주체는 이 사원의 플롯을 재구성한다. 콘센트가 삶의 활력을 주고 가능성을 열어 주고 움직이게 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생존의 업業으로 삼은 주체에겐 종교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밤새 시효가 다 되어 그 기능과 역할을 다 하였으나, 주체는 “밤새 시효 지난 꿈을 고정하는” “두 개 무표정한 나사를 알고 있”다. 전기공으로서 주체는 불이 나간 원인을 안다. 주체에게는 벽을 보며 작업하는 것 자체가 무념무상의 수행일 수밖에 없다. 주체는 이것을 면벽이라 한다. 달마대사는 면벽 수련 끝에 깨달음을 얻었으나 주체는 아직 멀었다고 하는 것 같다.
시효가 지났다는 것은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꿈, 이룰 수 없는 이상의 세계, 더 이상 현실이 될 수 없는 꿈이다. 하지만 그것을 버릴 수는 없다. 실현가능하지는 않더라도 항상 그 이상을 품고 살아간다. 콘센트를 통해서 전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데, 전력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다. 하지만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를 통해 힘을 얻을 수 있는 그 장치를 설치함으로써 아직 멀었지만 늘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벽은 내가 극복하고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기도 하지만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기도 하다. 그런 벽을 통해 보이지 않는 삶의 에너지를 얻는 것이야말로 평생의 과업이고 숙제다. 전기공 입장에서는 벽에 전기 시설을 설치해야 하는 작업이기에 그것이 자신을 먹여 살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집이 좁은들 천장에 놓을까
식탁을 장만했어 2인용이야
여분의 의자가 주는 기대감 따위는 배격하며
우린 우리 것이 아닌 기분으로부터 방어적이지
딩크족? 희망봉과 Cape of Good Hope는 다르다고 답할게
집과 자동차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축하합니다! 일단 부둥켜안고 울기로 할까 생각이 몸으로 바뀔 때까지만이라도 세속적일까
여섯 개의 공이 꺼내 오는 숫자로 조합해 보는 쇼핑과 여행
그러나 우린 캡슐을 견디지
몸만 겨우 구겨 넣는 최소 단위의 n이 되어
오후 3시 30분에서 4시 00분 사이 당신이 들어오면
칼날에 튕긴 무 조각처럼 나는 당신을 스쳐 도마 위에서 계단으로 쏟아져 출근을 하지
시클라멘이 목 뽑아 햇살을 좇던 창문이
우주의 별들이 그토록 기웃대던 곳이라니
맙소사, 당신을 위한 케이크에 가부좌를 튼 파리
누가 꺼내 놓았는지 누가 잊었는지
반나절 좋이 조리대에 놓여 두부를 빠져나가는 두부
얼마나 으르렁대야 서로의 울타리가 이해될까
머잖아 우리는 오아이스와 사막으로 대치하겠지만
Happy Birthday To You!
서로의 허리를 잘라 삽목을 한다면 우습지만, 먼저 뿌리내리는 쪽이 당신이기를
냉장고에 휘갈겨진 메모
-끊어진 전구를 갈고 활주로를 닦을 것-
그래, 우린 서로의 내일이니까
종이비행기라도 접어야 할까
몸무게가 사라지는 휴일이니까
아직 우린 서로의 쓸모를 인정하는 편이다
- 「회전주택」 전문
회전주택이라니! 내 집이 없어서 월세나 전세로 집을 전전하는 것이거나 한 공간에 살면서도 출퇴근이 엇갈려 서로 공유할 수 없는 공간을 말하는 듯하다. “냉장고에 휘갈겨진 메모”로만 소통하는 그들의 방을 상상해 본다. 2인용 식탁을 장만했지만, 그들은 그 공간마저 마주할 겨를이 없다. 애초에 “여분의 의자가 주는 기대감 따위는 배격하며” “우린 우리 것이 아닌 기분으로부터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여기서 영원히 살 것도 아니기에 필요한 것을 최소로 하여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실천하는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쓸모가 있으니 곁에 둔다.
오후 3시 30분에서 4시 사이 당신이 퇴근하면 나는 당신을 스쳐 출근한다. 일상을 함께 공유하지 못한다. 시간을 나눠서 당신이 이 공간을 쓰고 있을 때 나는 그 공간에 없다. “우린 서로의 내일”인 까닭으로 그래도 서로에게서 희망이 있다. 좁은 공간을 사용하면서 일정한 시차를 두면서 나눠 쓰는 상황은 무언가 비참하고 삭막하고 격리된 느낌이 든다. 전세 월세집을 전전하는 것도 회전이겠지만 사람들과 공간을 나눠 쓰고 있으니 이 또한 회전이다. 내가 퇴근하면 네가 출근하는, 비좁은 공간이지만 우린 서로에게 쓸모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지킨다. 물론 오아시스와 사막처럼 대치하겠지만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 ‘전구를 갈고 활주로를 닦을 것’이라는 냉장고에 붙여진 메모처럼 우리는 서로의 길을 비춰주고, 또 하늘을 날 수 있도록 길을 닦아줘야 한다. 그래서 서로 내치지 말고 버리지 말고 함께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미래이니까. 먹고살기 힘드니 복권에 희망이라도 걸어 보는 부질없는 꿈도 꾸면서.
3.
거실, 늘어진 티셔츠 속에서 나는
창밖 칭얼대는 가랑비에 젖은 몸을 맡긴다
바깥이 안을 적신다는 것을 아는 일
넘어갈 수 없을 때 건너편은 손짓들로 가득 찬다는 것을
세상에, 마스크 속 내가 삼킨 세계를 냄새 맡는 일은 역겹구나
웅덩이는 빗방울이 그린 각각의 밑그림을 모아
얼비친 건물들이 된다
짐승을 외면하느라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게 속한 너의 덩굴장미를 지우고
회화나무 아래 엉킨 두 그림자를 변기에 토해 놓는다
앓는 동안 나만 바라본 눈이 퀭하다
저 안쪽으로 누군가 절룩이며 걸어 들어가고 있다
내일은 담벼락만 살아남을 거라더군
그건 크레파스 상자를 걷어찬 노인들이 무지개를 검게 칠하며 하는 말이지
귀와 입을 묶어 놓으니 나 이외의 타인이 모두 의심스럽구나
어항의 구피가 유리벽 너머 구피에게 하는 짓
크레파스는 단 한 가지 색만 남아도 크레파스라 불릴 것이다
- 「팬데믹」 전문
화려하고 멋진 열대어 구피guppy는 어항 속에서 보호받고 있는 존재로, 집 안에 격리 중인 주체의 상황과 닮았다. 어항 밖은 알 수 없는 바이러스와 세균으로 많은 생명체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어항 속의 구피는 “유리 밖 구피를 좇”으며 “몸을 채운 물감이 빠져나올까봐 끊임없이 물을 삼”키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어항의 투명한 유리는 바깥세상을 내다볼 수 있지만, 바깥세상으로 넘어갈 수 없는 경계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지 않으면 생명의 위협이 올 수 있으니 끊임없이 물을 채우는 행위를 반복해야 한다. “바깥이 안을 적신다는 것을 아는 일”은 중요하다. 저쪽 세계의 존재들은 손짓을 하며 이쪽 세계로 오라고 한다. 주체는 이미 아프다.
“짐승을 외면하느라 사람들은” 힘들었을 것이다. 인류를 덮친 대부분의 전염병은 가축을 키우면서 시작되었다. 돼지로부터 백일해, 닭으로부터 장티푸스, 물소로부터 한센병, 말로부터 감기 등이 가축으로부터 인간에게 전염된 것들이다. “앓는 동안 나만 바라본 눈이 퀭”한데, 이제 내일은 담벼락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한다. 누가 바이러스를 옮길지 의심하는 건인가? “어항의 구피가 유리벽 너머 구피에게 하는 짓”은 그런 것이디. “귀와 입을 묶어 놓”는다는 것은 마스크로 표정을 가려 놓은 것을 말한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마스크 속 표정으로 인해 “타인이 모두 의심스”러울 수밖에. 주체는 “크레파스는 단 한 가지 색만 남아도 크레파스라 불릴 것이”라 한다. 멸종의 위기 속에 한 가지 색만 남아도 우리는 존재한다. 다른 모든 구피가 죽어도 한 가지 색을 끝까지 지키면 살아남는다는 구피의 이미지를 은유하며 시인은 팬데믹 시대의 자가격리와 거리두기를 그린다. 서로를 경계하며 자신을 지켜야 하는 우리의 삶을 투명하게 가른다.
임재정 시인은 「빗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시를 통해 “우리는 후드득이는 빗소리를 탐험”하는 중이라 말한다. 그것은 “앳된, 오늘보다 따스한, 어쨌거나 나일 수밖에 없는 내게로 걷는 동안” 가능하다. 주체는 “유리창에 손톱을 박고 미끄러지는 빗방울과 마주해 보”기를 권하며, “우리들의 까탈과 빗소리의 소란을 다독여 요람으로 바꾸는 마술에 초대”한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거기가 되고 거기를 살다 지느러미 달린 생으로 환생하는 꿈”을 꾸다 보면, “나를 부분으로 하는 빗소리 전체”세계의 황홀함을 느끼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당신과 함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송희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열린시학》 등에 글을 쓰며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외, 평론집 유목의 서사 외, 연구서 현대시와 인지시학 외. 기타 저서로 눈물로 읽는 사서함 등이 있다. 고산문학대상을 수상했으며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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